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33화 (33/352)

〈 33화 〉 32. 절망 속의 고백

* * *

어제부터 시작된 게들의 습격으로 화살은 이미 떨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애초에 사냥용으로 가지고 있던 양은 화살 통 서너 개 정도였기에, 끝없이 밀려드는 게들을 막아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더군다나 이실리엘에게 선물 받은 이 활은 강력한 정령력으로 위력과 명중을 보정해주지만, 이렇게 많은 생명체들이 주변에 바글바글 몰려 있을 때는 그 한계가 있었다.

활을 선물만 받았을 뿐 어떤 능력이 있는지 배우거나 듣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에브리나를 통해서 길드에 연락도 해 보았지만 그쪽도 이미 난리라고 했다.

다행스럽게 마을의 목책이 겉에는 나무 기둥을 박고, 안에는 진흙과 자갈을 채워 만든 것이라 타고 오르는 게들의 무게로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목책을 타오르는 놈들을 모든 마을 사람이 달려들어 장대로 떨 구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방어에 도움이 되는 마법사가 둘인데, 하나는 에브리나로 마력이 될 때마다 화염 구로 게들을 박살내고 있고, 하나는 호크의 파티였던 베키라는 여자인데 독 마법 전문이라고 해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중이다.광역 마법이 없는 마법사라니...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놈들이 한낮에는 활동을 잠시 멈춘다는 것이다. 아마 갑각류이기 때문인지. 덥거나 몸이 마르면 다시 강으로 돌아가거나 그늘진 곳으로 몰려들었다.

세 개의 태양이 높게 떠오르자 강으로 숨어든 게들 덕분에 다들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하... 이젠 더 서 있을 힘도 없어...”

“죽... 죽을 것 같아요... 언니...”

엠마와 에브리나를 비롯한, 그제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게들을 막아낸 용병들은, 여관 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한나 아줌마와 애니, 애니의 여동생과 릴리아나 누님이 그런 용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일으켜 물을 먹이거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등 용병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었다. 내가 시킨 대로 고기와 햄을 잔뜩 넣은 콩 수프를, 애니가 솥 하나 가득 끓여두었기에 빵과 함께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지시했다.

아마 해가 지면 게들은 다시 기어 나올 테니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했다.

“이거 게 떨어뜨리는 걸로는 언제까지 막아야 할지 모르니까. 착실하게 숫자를 한두 마리씩이라도 줄여야 할 것 같은데?”

역시 현직 접수원답게 릴리아나누님이 필요한 의견을 내신다.

“그 한 마리 정도 해부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해부?”

“네 뜯어보면서 약점을 찾아보는 거죠.”

“헤에?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릴리아나 누님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씀하신다.

“그... 게는 요리에 많이 사용해봤으니까요.”

잠시 후 내 부탁으로 애니가 게를 한 마리 가져왔다.

어제 호튼씨가 준 게였는데 테이블에 올려두고 해부를 시작해보았다.

“관절이 약하긴 한데 살아있을 때는 아마 좀 더 연결이 단단할 것 같고. 등껍질은 칼로는 흠집밖에 안나는 정도고. 메이스나 철퇴 헤머로는 깨는 데 문제는 없지만, 한두 대로는 안 되고...”

“뭔가 진짜 본격적인데?”

해부하는 내가 신기한지. 릴리아나 누님이 옆에 와서 턱을 괴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보통 게들은 이 입으로 피를 빼니까 입을 찌르면...아? 잘 들어가네? 역시 일반 게랑 크게 다를 바는 없구나? 심장도 등껍질 중앙쯤에 있고...”

“그래 뭔가 알아냈어?”

“원래 게 요리할 때 입에 칼을 찔러 넣어서 심장을 찌르고 피를 빼거든요? 이 녀석도 크게 다르진 않네요. 아마 목책 기어오를 때 창이나 뾰족한 막대기로 입을 찌르면, 착실하게 한 마리씩 잡아 죽일 수 있을 듯 하네요.”

“오오 역시!”

“있다가 시작되기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해야겠어요. 우리 애들에게도 알리고요,”

“마을 촌장한테는 내가 가서 알릴께~”

릴리아나 누님이 촌장에게 지금 들은 사실을 알려준다며 여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음... 이게는 콩 스프 이거 다 먹으면 게살수프에 넣어야겠다... 나는 이 순간에도 요리와 여관 걱정을 하는 그냥 진짜 여관 주인이었다.

이게 직업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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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젤다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러셀이 게를 해부해서 게들의 약점을 찾아냈을 때만 해도 분명 그때에는 다들 희망을 품었었다. 게들은 한 두 마리씩이라도 착실하게 손해를 누적하게 되었고, 수는 조금씩 줄어들어 가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게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수가 무한하지 않은 이상 결국 이렇게 조금씩 줄여가다 보면 위기감을 느끼고 물러가던지, 또 대낮이 되면 그래도 몇 시간 쉴 수 있었기에, 이렇게 시간을 끌면 목수와 릴리아나씨를 구하려 부 길드장이라도 달려오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를 막아내던 삼 일째, 아침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리젤다와 마을 사람들을 절망에 빠져들게 하기 충분했다.

게들이 빗속에서 쉬지 않고 목책으로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정확히 게의 입을 찔러내던 마을 사람과 리젤다의 손도 천천히 천천히 무뎌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냥 밤을 새우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목책에 오르는 게를 죽이거나 저지하기 위해서 긴 창이나 봉을 계속 휘두르거나 찔러야 했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며칠째 누적되다 보니. 다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늪지대에서 여기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이동해서 쉬지 않고 전투에 참가했던, 자기를 비롯한 다섯의 상태가 심각했다.

리젤다는 이제 눈꺼풀이 무거워져, 반은 감긴 눈과 반복된 움직임, 뇌리에 박힌 손동작으로 게를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게를 밀어내면 다른 게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또 밀어내면 다른 놈이 그 자리를...

그렇게 지옥 같은 하루가 다시 지나갔다. 물론 밤에도 쉴 수는 없었지만 태양이 없기에 그래도 버티기는 한결 수월했다.

사일 째 아침이 되자 마을 사람들과 용병들은 파멸만 기다리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비가 그쳤기에 잠깐 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었는데. 그들의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는 그쳤지만, 어제 내린 비로 땅이 축축해서 그런지 게들이 쉬지 않고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여자와 아이들이 그리고 용병들에게는 여관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목책에 달라붙어 용병과 마을 사람들의 입에 먹을 것과 물을 넣어주었지만. 한낮을 의미하는 3개의 태양이 머리 위로 완전히 떠오르자 다들 탈진해버리기 직전에 몰리고 말았다.

리젤다의 머릿속에는 이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책을 기어오르는 게를 장대로 계속 밀어내길 얼마였던가?

결국 좀 전 물레방아 공사로 지반이 약했던 강 쪽의 목책이 무너지며 게들의 진입을 허락하고 말았다. 벨릭과 엠마, 에브리나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마틴까지 무너진 입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달려갔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지키는 목책에서, 여러 인원이 빠져버리자 방어해야 하는 면적이 증가해 게들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손은 이미 벗겨져 만신창이다. 러셀이 며칠 전 쉴 때 조용히 찾아와 감아준 붕대는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핏방울까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올린다.

목책을 기어오르는 게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떨리는 팔을 들어올려 손에 쥔 장대로 간신히 목책 위로 기어오른 한 놈을 떨어냈지만, 들어 올렸던 장대도 같이 목책 아래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부웅~~~”

이제는 너무 지쳐 눈까지 완전하게 감겨오던 리젤다의 귓가에, 저 멀리서 아련하게 고향에서나 듣던 북부 기사들의 돌격을 재촉하는 양각나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젤다는 피식 웃어버렸다.

북부가 싫었다.

북부에서의 귀족으로서 삶이 싫었다.

인형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던 북부의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그랬는데... 그래서 북부를 떠나왔는데 삶의 마지막에 자신에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것이 북부 기사들의 돌격나팔 소리라니...

애써 다른 걸 떠올려 보았다.

러셀과의 달콤한 키스 같은...

그의 따듯한 목소리 같은...

목책 발판에 서 있던 리젤다의 몸이 천천히 뒤로 꺼지기 시작했다.

남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리젤다가 목책 아래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다 핀 한 떨기 남색 꽃잎처럼.

“리... 리젤다!!!”

러셀의 목소리가 꺼져가는 의식 너머로 들려왔다.

그리고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자신의 머리를 다리에 누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러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고 멀리 목책에서는 게들이 붉은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리며 밀려오고 있었다.

밀려오는 붉은 죽음 앞에서이제 더는 기회가 없을 것 같기에,핏물이 뚝뚝 흐르는 손으로 러셀의 볼을 쓰다듬으며 힘겹게 입을 떼어 러셀에게 말했다.

“러... 러셀...좋아해...”

그리고 리젤다는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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