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8. 리젤다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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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에서 목책 보수를 위해 도착한 목수들이 어제 목책 보수를 전부 끝냈다.
오늘부터 물레방아 공사를 한다는데, 물레방아공사가 막 첫 삽을 뜨느라 마을이 북적북적했다. 마을 아낙네 들은 참을 만들어 내가느라 바쁘고, 마을 주민은 삽질을 하며 터를 잡는데,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도적들의 습격으로 세 사람이 사망해. 마을이 좀 침울 한 분위기였는데, 여기저기 삽질하는 소리와, 일꾼들의 외치는 소리로, 마을이 간만에 활기를 찾았다.
마을에서 곡식을 추수해도 방앗간이 없는 작은 마을이었던 웜포트는, 절구를 이용해 곡식을 각자 개인이 빻았는데. 이제 방앗간이 생기면, 수력으로 편하게 곡식을 껍질을 벗기거나 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기대가 크다. 도시까지 가서 상태 별로인 곡식을 사오는 것보다. 마을에서 추수한 걸 사다가 직접 빻아서, 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소란스러운 마을 한편에 있는 한적한 목책 옆에, 나와 리젤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을을 빙 두른 목책 그늘에 큰 가죽을 깔고 앉아, 공부하려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Mimil 무슨 뜻이라고 했죠?”
“어머니입니다.”
“Medora 는요?”
“활입니다.”
“러셀은 무척 똑똑한 것 같아요.
제가 벨릭 같은 애들 이랑만 다녀서 그런지. 한두 번 가르쳐 줘도 다 기억하고 있으니. 뭘 가르치는 게 무척 편하네요.”
‘아 벨릭아 너란 놈의 평가는 언제나 한결 같구나, 하지만 너로 인해 이 형님이 리젤다에게 긍정 평가를 받았으니. 차후 훈련은 조금 느슨하게 해 주마...’
리젤다가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나를 막 칭찬해대기까지 했다.
‘여자의 마음은 알다가 모르겠다니 깐...’
어제까지만 하도 그렇게 찬바람이 휙휙 불더니...
어제 저녁을 먹고. 목욕 끝내고 나오는 리젤다를 조용히 불러서, 단둘이 조용한 데서 엘프어 공부 좀 가르쳐 주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목욕을 끝내고 나와서인지 발그레한 얼굴로 알았다고 했다.
‘거절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그 뭐 저 정도는 누구나 하지 않을까요?”
나는 겸손한 모습으로, 리젤다 선생님께 이 기회에 점수를 더 따리라 다짐하며, 정석적인 대답을 했다.
“아뇨... 그 누구한테 이런 말하긴 처음인데, 저도 북부 귀족 출신이거든요.
뭐, 하급귀족이긴 하지만... 그 큰오빠한테만 작위가 계승되는...”
“아... 그랬구나... 리젤다는 그래서 그런지 침착하고 또 배려심이 많은 것 같아요.
그 뭐 모험가들은 구를 대로 구른 평민 애들이 많이 하는 편이라서, 자기 먹고살기도 바쁜데 남 배려 같은 거 잘 안 하거든요?
처음엔 좀 힘들었겠다. 그죠?”
내 말에 리젤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볼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내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 말 처음 들어봐요. 그리고 처음엔 힘들었겠다 는 그 말 왠지 위로가 되네요.
근데, 그거 알아요?
러셀이랑, 이런 대화 처음 해 보는데, 왠지 예의 바른 귀족 청년이랑 대화하는 느낌 든다는 거?”
바닥만 보면서 리젤다가 칭찬을 해주기에, 쵸큼 부끄러워진 나는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 큼...”
“제가 뭐... 귀족씩이나 그냥 뭐 여관주인 나부랭이죠. 구를 만큼 구른 전 용병에...”
“아니, 아니에요! 그 뭐랄까 그냥 용병들이랑 다른 게 있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리젤다의 부정에 왠지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려고 했는지. 리젤다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뭐 하급 귀족인데... 아니 이었는데, 그 뭐 귀족들의 사정 있잖아요.
아버지는 날 다른 부유한 상인이나 하급귀족 가문에 시집이나 보내려고 하셨고, 가문을 위해서...
저는 그게 싫어서 도망을 나온 거죠. 그렇게 배려심 깊은 행동은 아니잖아요?”
리젤다는 씩 웃으면서 말을 끝마치는데 그 끝말이 좀 씁쓸했다.
마음 같아서는 붙잡고 인생 개척 론에 대한 나 강사 러셀님의 강의를, 한 열 번 정도 하고 싶지만 리젤다를 좀 위로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나도 내 이야기를 살짝 하기로 했다.
원래 남의 비밀은 들으면 나의 비밀도 이야기해주는 것 아니겠나? 그러다 보면 신뢰도 쌓이고, 비밀을 공유했다는 연대감도 들고...
다 이게 인생사는 법이다.
“그 저는 열여섯 살 성인이 되기 며칠 전. 살던 마을에 오크들이 쳐들어왔어요.”
“부모님은 두 분 다 사냥꾼이셨는데, 뭐 오크로부터 마을을 지키다가 돌아가셨죠. 시체도 못 찾았죠. 놈들이 끌고 갔으니까...”
“그리고는 집에 남은 거 다 팔고, 부모님이 혹시 몰라 숨겨둔 돈까지 꺼내서 용병이 되었죠. 나무등급 용병부터 시작해서 진짜 안 해 본 일이 없네요.”
내 말에 리젤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쳐다본다. 아마 내가 내 이야기해주리라 생각을 못 했나보다.
“그... 뭐 그래서 용병 생활만 한 15년을 했네요.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고 이젠 가정을 만들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아뇨! 늦지 않았어요!”
내 말을 리젤다가 소리치며 부정한다. 하지만 자기 외침에 놀랐는지. 입을 급하게 가리며 부끄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말한다.
“그... 러셀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서른 한두 살 정도면 그 아직 늦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도 뭐 여자로는 나이가 많죠... ”
‘이 아가씨야 16살에 결혼하는 이 동내가 좀 이른 거예요. 전생에는 30대도 별로 늦은 게 아니었어요.’
‘20대 초반 아가씨가 뭐 그렇게 나이가 많다고 그러는지...’
리젤다가 양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말을 더듬거리며 질문한다.
“그, 그... 저한테 엘프어 그, 다 배우시고 그분 오시면 러셀은 겨, 결혼하는 거죠?”
“뭐, 저도 모르고 이루어진 청혼이라...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말하면 또 나쁜 놈 되려나?
그, 그분이 아름답긴 하죠. 높은 엘프라니까요. 근데 제가 구해 준 부채감에 그러시는 건지? 뭐 그건 아니려나?
근데 엘프는 오래 사니까 결혼해도 문제예요. 결국, 저는 먼저 죽을 텐데, 그분은 그 후에 어떻게 되실지. 잘 모르겠네요. 정말로”
“어휴...”
나는 답답한 마음에 눈을 감고 가죽위에 누워 버렸다.
“하아... 모르겠다... 인생...”
드러누운 내 얼굴 위로 천천히 그늘이 졌다.
그리고는 가는 실들이 폭포수 같이 떨어져 내리며 내 얼굴을 간질인다.
입술에 뭔가 촉촉한 것이 닿아 살며 눈을 뜨니. 리젤다의 남색 머리카락이 온통 내 시야를 가린 상태로 내 입술이 리젤다의 입술과 맞닿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리젤다의 머리카락이 한껏 휘날리고, 그와 함께 들꽃 향기가 콧속까지 스며들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뇌가 정지했는데, 내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리젤다가 입술을 살며시 떼더니. 활화산같이 새빨간 얼굴로 말했다.
“그, 뭐 저... 저도 이... 이 정도 권리는 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여관으로 뛰어가 버린다.
‘아니, 아가씨 무슨 권리요? 예? 아니, 내 첫 키스를 이렇게 훔쳐 간다고? 이 아가씨야! 거기 좀 서봐!’
북부 5 왕국에는 각 왕국에 3개씩의 기사단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사단에 속한 자 중 가장 뛰어난 기사들만이, 북부 기사들의 열망인 눈꽃 휘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 휘장을 가진 기사들은 총 오십 명으로 알려졌는데, 지금 말을 타고 질주하는 이 10명의 기사도 눈꽃 휘장을 가진 기사들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말을 타고 질주하는 이유. 그것은 세계수의 수호궁수인 높은 엘프의 반려를 찾기 위함이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엘프의 남편 하나 찾기 위해서 북부 왕국의 드높은 기사 열 명이, 이렇게 북부에서 최남단까지 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대륙의 평화를 지켜내고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 임무를 받았을 때는, 솔직히 젊은 기사들은 조금 의심하기도 했다.
그들의 선배와 아버지 그리고 국왕들이,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엘프가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뭐? 엘프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그들의 의심은, 엘프들을 직접 만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늙은이들의 굼뜸 움직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들이 직접 움직이길 희망한 것이다.
대체 언제 수배지가 모험가 길드로 퍼지길 기다린단 말인가? 또 직접 첩보를 확인해야 할 것인데 북부에 앉아서 무슨 일이 된단 말인가?
“저 괴물들을 나라 한가운데 잡아 두고, 잠이 온단 말인가?”
걱정만 많고 굼뜬 늙은이들을 대신해. 젊은 기사들의 리더인 노스윙 가문의 브라한 노스윙이 나섰다. 브라한의 지휘로 삼십 명의 기사가 남부로 출발했다.
기사들은 남부 관문 도시까지는 같이 이동했다. 그러나 남부에 도착하자마자 각 다섯 명씩 여섯 개 조로 나눠, 남부에서 쌀 생산이 가능한 도시의 여관들을 싹싹 훑으며 내려오는 중이었다.
이들은 러셀이라는자가 남겼다는 마지막 말에 주목했다.
엘프를 통해 전해들은 ‘쌀이 먹고 싶다’ 쌀은 남부의 몇몇 지역에서만 재배되는 작물이다. 그렇기에 쌀 재배가 되는 남부 전역을 다 뒤지고 다녔는데, 얼마 전 모험가 길드를 통해서 의뢰대상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남단에 가장 가까이 있던, 두개 조가 중간에 만나 그란폴로 향하게 된 것이다.
“하루거리에 삼개 조가 도착 했다는군, 수정통신으로 확인했네.”
“드디어!!!”
“달려라! 북부의 용사들아! 인간을 수호하라!”
북부의 용맹한 기사들이 그란폴로 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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