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24화 (24/352)

〈 24화 〉 23. 이실리엘 롱윈드 2

* * *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조용히 말해주셨다.

우리 높은 엘프는 천년 이상을 살아가는데 인간은 백년도 살지 못한다고, 그런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백년의 짧은 행복 뒤에는 긴 시간의 고통스러운 삶뿐이라고 말이다.

엘프의 사랑은 다른 종족과는 많이 다르다. 남자 엘프는 다른 종족들처럼 여러 여자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다. 그래서 엘프 사회에서도 일부다처제가 가능하지만, 여자 엘프는 일생에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 내가 그 인간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나는 결국 그 남자가 죽은 후 남겨진 삶을 혼자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 남자와 낳은 아이들과 그 후손들이 먼저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그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가는 그 남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테지?”

나는 울음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엘프의 사랑은 강렬한 영혼의 속박이다. 청혼한 뒤 남자가 거절하면 그 충격에 목숨을 끊기도 한다. 할머니 말대로라면 나는 이미 사랑에 빠졌고 죽음 이외에는 나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고위 엘프의 핏줄이면서, 세계수의 수호 궁수인 나는 자신에게 맹세했다. 그 남자를 엘프 평생 한 천년쯤 사랑하리라...

나는 할머니와 그 남자를 다시 찾았다.

할머니가 정령의 축복과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남자를 치료해 주었다. 처음에는 손녀가 인간 남자를 사랑한다니 어쩔 수 없이 따라오긴 하셨는데, 그래도 인간 남자라 좀 꺼리는 게 없지 않아 있으셨는지 남자를 보고 탐탁지 않아 하셨다.

하지만 누워있는 남자를 치료하려고 손을 대시더니 깜짝 놀라면서 남자가 고결한 영혼이라고 하셨다.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반려로 부족함이 없다나?

기분이 좋았다. 남자가 할머니께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오른쪽 다리가 무릎 아래부터 거의 다 녹아 내려가던 남자는, 오른쪽 발목의 힘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회복했다.

치료 후 할머니가 떠나시고 남자가 깨어날 때까지 간호했다. 그리고 결국 며칠 만에 남자가 깨어났다. 남자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남자는 내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나중에 자신의 다리를 보고는 시무룩해 졌다.

남자를 위해서 목발을 만들어주었다. 인간들에게는 귀하다는 백단목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남자도 무척 고마워했다.

같이 마을을 구경 가기도 하고 같이 싸워준 엘프들에게 초대받아 함께 식사를 가기도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행복했다. 통역에게 꼭 시간을 들여 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남자와 보내야 하는 시간도 너무 짧아서 다른 것 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운데 말을 배우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한껏 부푼 내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남자에게 청혼했다.

내가 성인이 되고 고위 궁수가 되어서 만든 첫 활. 세계수의 새싹이 맺힌 가지와 성인이 된 내 첫 머리카락으로 만든 그 활을 남자에게 건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자가 내 청혼을 거절하려 했다. 절망감에 눈물이 났다.

내가 이렇게나 당신을 사랑하는데 내 첫 활을 그대에게 바치며 청혼을 하는데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다니. 세계수에게 버림받은 다크엘프가 이런 느낌일까? 절망에 늪으로 빠지는 나를 보고 남자가 깜짝 놀라더니 무척 미안해하며 내 활을 받아주었다.

뭘까? 인간세계에는 한번 거절하는 문화가 있는 건가? 아니 말이 통하지 않으니 오해를 했었던 건가? 아무튼, 내 활을 받아주었으니 내 청혼을 받아준다는 것!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남자에게 말했다.

할머니에게 당신이 내 청혼을 받아주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오겠다고, 삼일만 기다려 달라고 말이다.

그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말이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다시 할머니와 남자가 묵는 집에 도착했는데. 남자가 없었다. 그의 짐도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내 활도 없었다.

할머니는 불같이 분노하시면서 나를 농락하고 세계수의 활을 가지고 도망간 그 남자를, 엘프 레인저들을 풀어서라도 잡아야겠다면서 길길이 분노하며 날뛰셨다. 할머니의 분노에 정신이 든 나는 일단 사정을 알아보자고 할머니를 달래며, 그 남자와 친했던 통역하던 엘프를 찾았다.

다행히 남자는 그 엘프에게 자신이, 왜 어디로 가는지 말을 해 두었다.

“그, 이제 용병 생활은 못하게 되었으니. 자기 꿈이었던 여관 주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쌀을 먹고 싶다고?”

“제게 청혼을 받았다는 말은 않던가요?”

“아, 그 높은 분께 선물을 받았는데, 인사도 하고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꼭 좀 전해달라고? 예, 예? 처, 청혼이요? 아니, 그, 그 선물이 그럼 높은 분의 활입니까?”

“그... 말을... 아니지. 아니, 그럼 그분은 청혼을 받은 게 아니라, 선물을 받은 거로 생각하고 떠나셨단 말입니까? 맙소사...”

“역시, 그런 건가요...”

“청혼하실 때 저라도 부르셨으면, 제가 통역이라도... 하... 이게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높은 분의 반려께서...”

통역 엘프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날 엘프의 의회로 달려가 남쪽으로의 여행의 허락을 구했다. 나 같은 세계수의 수호 궁수는 세계수의 곁을 쉽게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의회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말이다.

“목적은?”

의회 의장이신 높은 엘프 에스미가께서 물으셨다.

“반려를 찾으러 가기 위함입니다.”

“넷? 그게 무슨?”

내 설명을 들은 의장은 화들짝 놀랐다. 아마 높은 엘프의 우두머리인 그녀가 그렇게 놀라는 걸 본 건 내가 처음이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첫째로 내가 인간 남자에게 청혼을 했다는데 놀랬고, 내가 그에게 청혼하며 건넨 세계수의 활을 그가 가지고 청혼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 체 떠났다는데 더 놀랬다. 의장은 놀란 와중에도 나를 위로하고 인간세계는 위험하다며,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없겠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다고, 고위 엘프 수호자 10명을 나에게 붙여주었다.

그렇게 내 남편 찾기. 그, 반려 찾기 여행이 시작되었다.

내가 고위 엘프 수호자 10명과 가장 가까운 북부 인간의 왕국을 찾았을 때. 그곳은 왠지 모르게 난리가 나 있었다. 성벽 위에 수많은 병사들이 우리를 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날이 좀 추운데 영주가 지급한 병사들의 방한복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처음 도착한 곳의 영주는 최근에 인간들이 뱀의 왕의 알을 훔친 것 때문에, 우리가 피의 대가를 요구하러 왔는지 알았던지, 성 앞에 나와 자신이 그들의 잔당을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일망타진해 오겠다며 한 달을 요구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삼주, 이주 아니, 일주일만 달라며 애걸복걸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놈들 따위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

“그런 놈들이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나의 말에 영주는 갑자기 “부디 노여움을 가라앉히시고” 라며 눈물로 사정을 해댔다.

그 일 때문이 아니라는 내 설명에, 영주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반색했는데. 잠시 후 반려를 찾으러 왔다는 내 말에, 영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친것처럼 벌떡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다.

“어, 어떤 새끼들이 감히! 세계수의 수호 궁수 반려를 납치를! 제가 국왕께 아뢰어 군대를 동원해. 이 미친놈들을 아니, 그놈들이 속한 국가를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라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부끄럽지만 반려와의 일을 설명하고,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 차이 때문에 반려가 청혼 받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떠나, 그를 다시 찾으려 한다고 하자 그는 멍해진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그렇게 나는 반려를 찾기 위해 엘프들과 교류하는 북부 왕국의 왕과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반려를 수소문했다.

모험가 길드라는 곳을 통해서 반려의 이름과 특징을 현상금과 함께 뿌렸다.

반려의 몸을 상하게 하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자는, 북부왕국과 엘프들의 이름으로 심판될 것이며 위치를 아는 자에게는 금화 100개에 해당하는 백단목으로 사례한다는 공고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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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금 공고

이름 : 러셀

특징 : 오른쪽 다리 힘줄이 없어서 절름발이임

나이 : 20대 후반에서 30대

기타 : 남부에서 여관 주인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음.

현상금 : 금화 100개 가치의 백단목

특이사항 : 결코 신체에 상해를 입히거나 목숨을 거두거나 협박 등 위해를 가하지 말 것.

만약 현상금을 위해서 당사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할 경우.

또는 당사자가 죽은 채로 발견 될 경우.

범인을 끝까지 찾아내어 높은 엘프와 북부 5왕국 (엘튼, 한겔, 에삭스, 하툰, 크람)의 이름으로 심판 할 것이다.

그리고 아래 5왕국 각각의 인장과, 높은 엘프의 상징이 찍혀있었다.

북부부터 시작된 특이한 현상금 공고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금을 가지고도 구할 수 없다는 백단목이 걸린 현상금 공고로, 특이하게 있는 위치만 알려줘도 확인이 되면 현상금을 준다는 공고였다.

하지만 그 어느 사기꾼도 감히 사기를 칠 수 없었다.

그 용맹하고 호전적이라는 북부 5왕국의 왕가의 인장과 높은 엘프의 인장 아래 걸린 현상금이라니. 사기 치다 걸리면 목숨 한두 개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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