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7. 도망친(?) 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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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활을 달라기에 손에 쥐어줬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감히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던 리젤다는, 곧 정신을 차리고 눈빛을 광인처럼 빛내며 나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리젤다의 엄청난 기세에 나는 검사님 앞에 한명의 죄수가 된 것처럼 그녀가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거... 친구에게 받은 거긴 한데...”
“친구라고요? 여성분이었나요?!”
“어... 일단 그렇긴 한데?”
“아무 말도 없었나요 그분이?”
“아니, 그 뭐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그... 엘프어는 내가 모르니까?”
“혹시 이렇게 말하진 않았나요? (A Mani Ni Mir Medora Esol Am Mimil)”
“어? 어떻게 알았어? 완전 똑같은데? 활 선물할 때는 하는 말이 똑같나?”
‘리젤다 얘 무슨 독심술 같은 거 있나?’
진짜 판타지 세상은 다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내말에 리젤다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옆에 두 다크엘프도 똑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뭐? 뭔데? 뭐, 나쁜 말인가?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럼 활을 받았는데 주신 분은 어디 갔죠?”
“응? 그... 그 친구는 대 수림에 있겠지?”
“아니, 활 받은 전후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세요!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범죄자가 심문 당하듯 몰아 붙여졌다. 리젤다 검사님께서 나에게 어떤 용의 점을 포착 하셨는지, 테이블까지 주먹으로 쾅쾅 치며 화까지 내며 나를 닦달했다.
“아니 그게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한 건가?” 라며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친구를 구해주고 내가 다리를 다쳤는데, 예전에 에키젤한테 물린 건 알려줬지?”
리젤다와 엠마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 그 친구를 구해 주려다 다친 거거든. 상처는 나았는데 뭐 이제 용병 생활은 못하겠고, 예전부터 생각하던 여관 주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떠날 준비를 다 해놨는데, 그 친구가 찾아왔거든?”
“그리고 이 활을 주면서 그 아까 했던 말 그거 그, 그걸 하더라고? 나도 궁수니까 이 정도 활이 당연히 얼마나 좋은 활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
“당연합니다! 궁수라면 이활의 가치를 모를 수가 없죠!”
내말에 리젤다는 아주 격하게 호응했다.
“그래, 그런데 그... 아무래도 이게 아무리 목숨을 구해줬다고 해도, 받기에는 좀 부담스럽잖아? 한번 거절하려고 했는데, 내가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눈물까지 흘리기에...”
“아무리 활이 좋은 거라도, 아니 사람 나고 활 났지 활 나고 사람 났나? 활이 뭐 대수라고, 여자 눈물까지 흘리게 하나 싶어서 그... 일단 받았거든... 뭐, 선물 아무리 비싸도 목숨만큼 비싸겠어? 그치?”
나는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을 리젤다에게 지어주었는데, 리젤다는 정색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봐 날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혹시, 그럼 여관이름이랑 간판에 있는 게?”
내 이야기를 같이 듣던 에브리나가 끼어들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그, 그렇지? 아무래도, 아름다운 엘프가 그렇게 슬프게 눈물 흘리는 모습은 처음 봐서 기억에 남더라고?”
“꺄악! 너무 낭만적이야!”
“어머! 어머! 어째! 어째!”
“엘프의 선물. 그걸 거절하자 눈물을 흘리고 다시 받아주자 감격. 아니 누가 보면 청혼이라도 한 줄 알겠어요!”
에브리나와 엠마는 둘이 손을 잡고 꺅꺅거리면서 난리가 났는데, 엠마의 말에 리젤다가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근데 그 활을 받으니까 너무 좋아하면서 뭐라고 하더니 가더라고? 그리고 나는 뭐 짐도 다 싸놨겠다. 그 길로 마침 그날 마을에 떠나는 상행이 있기에, 같이 말 타고 대 수림 빠져나와서 여기 까서 와서 여관을...”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슬쩍 리젤다 눈치를 보자. 리젤다는 나를 인간쓰레기를 보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 왜? 그렇게...?”
“맙소사... 러셀님, 아니 러셀, 당신은...”
아우로라 에우로라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리젤다의 반응과는 정반대의, 희열이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인 에우로라가 무엇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우리 다크엘프의 예절에 밝더니. 러셀 그대는 허연 놈들보다 우리 다크엘프들에게 잘 어울리는 인간이야! 그 허연 놈들에게 그런 수모를 안겨주었다니!”
“혹시 다크엘프 도시에 갈 일이 있다면, 광장에서 큰 소리로 이 일을 외치게. 러셀! 아마 모든 다크엘프들이 러셀을 집으로 초대해 큰 연회를 베풀어 주려고 할 것이야.!”
옆에서 아우로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나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크엘프의 예의와 신앙에도 밝으시고, 고위 엘프 년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주었다는 러셀님의 영웅스러운 행동을 듣고 나니. 제 가슴이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혹시 언니나 제가 마음에 드시지는 않습니까? 고위 엘프 년이 침을 발라 두었었다니. 다크엘프로써 참을 수 없습니다! 감히 미천한 여신의 종이. 허락하신다면 모시고 싶습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라도 좋습니다. 러셀!“
“오, 죽음의 여신이시여 이렇게나마 저희에게 설욕의 기회를! 언니, 언니도 같은 생각이시죠?”
‘아니 무슨 모욕! 아니 저는 목욕밖에 몰라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아우로라의 말에 에우로라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 둘의 눈빛이 광기로 물들어 가는 게 보였다.
그때 쾅하고 테이블을 친 리젤다가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살짝 45도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한번 푹 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러셀님, 잘 들으세요. 러셀님은 그 엘프 분께 청혼을 받으신 겁니다! 그리고 청혼을 받고, 청혼 선물인 활만 받아서는, 도주하신 것이 되는 겁니다!”
“아마도 자존심이 드높은 높은 엘프! 그러니까 이 활에 걸린 활줄이 황금색인데, 엘프 중에 높은 엘프의 혈통만이 머리카락색이 황금색인건 아시겠죠? 설마 이것도 모르셨나요?!”
뭔가 리젤다가 엄청난 말을 쏟아내는데.
그 말이 귀를 거쳐 뇌로 향하자 갑자기 나의 뇌가 활동을 정지해버렸다.
‘네? 뭐라 굽쇼?’
“그러니까 고위 엘프! 보통 높은 엘프라고도 하죠! 그리고 이 활대는 분명 세계수입니다. 세계수 활을 들 수 있는 건 극소수입니다. 엘프 궁수 중에서도 최고위의, 세계수의 수호 궁수 108명!”
“그러니까 엘프가 12부족인 것도 모르시겠죠? 한 부족당 9명씩 총 108명! 그 108명은 엘프 12부족 연합의 무력의 정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엘프들 중의 한 명이!”
“누구에게?”
“러셀님. 아니 러셀 당신에게!”
“청혼해온 것입니다!”
“애초에 자존심 높은 종족인 엘프가 인간에게 청혼했는데, 청혼 선물만 받고 도주했다? 아마 그 엘프분은 수치심에 자살했거나 엘프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수백 년을 살아가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러셀, 당신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말을 끝낸 리젤다는 완전히 흥분한 표정이었고, 그 이야기를 같이 들은 브릴다나, 엠마, 에브리나 까지. 나를 어제 애니를 강간하려 했던 그놈들 보던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게...”
내가 정지한 뇌로 버벅거리고 있자, 리젤다가 이어서 강렬한 일격을 선사했다.
“활을 선물할 때, 그 엘프분이 하신 말씀을 알려 드리죠! 어머니 대신! 이제 제가 활시위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활시위를 여성 엘프의 머리카락으로 만드는 엘프들은, 결혼 전에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활시위를, 결혼 후에는 배우자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활시위를 씁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어머니 대신 본인이 활시위를 만들어 평생! 활에 걸어주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하신 말씀은. 아마도 가족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오겠다는 것이었겠죠. 보통 엘프들은 둘이 먼저 청혼을 하고 서로에게 허락을 받으면 가족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곤 한다죠!”
“그사이에 러셀! 당신이 도주한 것입니다!”
리젤다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지. 무슨 청혼을 그렇게 하냐고! 아니, 그래도 엄청 예쁘긴 했는데...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혹시 그분 이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리젤다의 눈빛에 나는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 이실리엘 롱윈드라고...”
리젤다가 더는 놀랄 게 없다는 듯. 기운 빠진 모습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우로라 에우로라는 갑자기 전생에서 열린 락 페스티발에 참여한 여자들이 보여주던, 광란에 찬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아우로라가 광기 빛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조용히 말했다.
“세계수의 열두 가지 엘프 열두 장로 중 하나의 후손이라니...”
그리고는 에우로나 아우로나가 나에게 미끄러지듯이 다가와 내 양팔에 한 명씩 매달리더니.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러셀, 밤까지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저희랑 같이 방으로 가실까요?”
‘아... 내 인생이야....’
광기에 찬 두 다크엘프를 피해 다니느라, 밤이 늦어서야 다락방인 3층 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계단 오를 때도 아주 조심조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귀 밝은 다크엘프들에게 걸리면, 또 한참 시달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욕도 다들 잠이 든 것으로 보이는 때에, 혼자서 조용히 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 이실리엘을 생각했다.
그게 청혼이었다니... 처음에 활 받는 걸 거절했을 때.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근데 이실리엘을 찾아가야 하나?’
이실리엘이 내게 준 활은, 원래 창고에 보관 중이었는데, 방으로 가져왔다. 그 활이 담겨있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활줄이 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활줄을 살짝 쓰다듬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빛을 받으면 아름답게 반짝이던 머리카락, 침대에 누워 그녀를 찾아가야 하나 어째야하나, 그런 고민을 하다가 활을 넣은 상자를 덮고, 침대에 누워 그렇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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