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4. 추방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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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아침 마을광장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주가 다스리지 않는 이 마을의 판결은 촌장이 내리는 것이었는데. 촌장이 마을에 범죄자가 생겼고 이놈들을 아침 일찍 마을 광장에서 판결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어제 마을 주민인 애니를 강간하려다가 붙잡힌 모험가 3명이 있다고, 빗속을 뚫고 애니의 동생 마크가 한밤중에 촌장 집의 문을 두드렸을 때, 촌장은 잠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크의 소리를 듣자마자, 촌장은 애용하는 무기인 곤봉을 손에 쥐고, 자신의 두 아들을 끌고 여관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고 여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무차별적인 구타가 범죄자 셋에게 쏟아졌다. 변명은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자신을 대신해 애니의 가족들을 거둬줬던 러셀의 분노에 찬 눈빛만으로도 이놈들은 유죄였다.
이 마을은 촌장의 친구였던, 애니 아버지와 촌장이 같이 세운 마을이었다. 자신의 친구의 딸이기에 애니는 자신의 조카 같은 존재였다.
낼 수 없는 세금을 요구했던 악랄한 영주를 피해 둘이 같이 가족을 데리고, 공백지(?白?) 까지 목숨을 걸고 도주했다. 친구와 긴 여행 끝에 도착하여 세운 마을이 이곳이었다. 몬스터의 침입에 친구는 먼저 떠나 버렸지만 자신과 친구의 추억과, 그의 가족들이 남겨져 있는 마을인 것이다.
친구의 부인이 돈을 못 구해. 여관을 팔고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때도, 도움을 주지 못해 먼저 떠난 친구에게 너무도 미안했는데. 이런 일까지 터지니, 이에 격노한 촌장이 휘두르는 곤봉은 범죄자 셋을 다진 고기를 만들기 충분했고, 러셀의 여관 바닥을 검붉은 색으로 리모델링 해버리셨다.
촌장님은 한참의 구타 후 정신을 차리고는,
“애, 애니는 괜찮은가?”
‘이분 참 빨리도 물어보시네.’
“조, 조금 놀랜 것 뿐입니다. 촌장님.”
촌장님은 여관 바닥을 망연자실하게 보며 멍하니 대답하는 나를 보고, 엄청나게 미안해하시며, 어젯밤 셋을 끌고 가 광장 한가운데 묶어두셨다.
그리고 아침이 밝자마자 살아 있는 게 용한 햄벅 스테이크 수준인 놈들에게 촌장의 판결이 떨어졌다. ‘추방형’ 말이 추방형이지. 움직이지도 못하는 놈들을 꽁꽁 묶어서, 대 늪지 입구에 던져두고 오는 거다.
몬스터에게 밥 주는 거라고 보면 된다.
더군다나 저렇게 피 냄새를 풍겨댄다면, 늪지 거머리나, 흡혈박쥐, 늪 진드기 같은 아주 피를 좋아하는 악랄한 녀석들이, 개 때처럼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일.
차라리 밤에 다크엘프들에게 목숨을 내놓았다면, 더 편한 죽음을 맞이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놈들을 뒤로하고 여관에 도착하자, 한나 부인과 마크가 어제 소동으로 인한 정리를 한참하고 있었다.
도울 게 없나 기웃거리자, 리젤다 파티의 창잡이 마틴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어제 셋에게 압수한 동패를 흔들며 나에게 마을 가는 인편에 길드에 신고하라고 전해주었다.
이건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어제 놀랐을 애니에게 가보려고 집을 나섰다.
옆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자 애니의 막냇동생인 앤이 문을 열었다. 내가 애니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앤이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러셀 형부! 언니가 좋아하겠어요!”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자 애니가 가르쳐 줬단다.
앞으로 형부라고 부르라고 했다나?
관자놀이를 누르고 애니의 방 앞으로 안내되었는데. 이 녀석은 문을 살짝 열어주고는 부리나케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둘이 사용하는 방인지 침대가 두 개 있었는데, 한 침대에 애니가 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어제 충격이 컷던지 헛소리까지 해대기에, 옆에 있던 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닦아주었다.
내 손길에 애니가 깜작 놀라 일어나서는 창밖을 보고, 아침이 완연해 보이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나를 확인하자 더 크게 놀랐는데. 나는 애니를 진정시키고는, 어제 크게 놀랐을 테니 오늘은 푹 쉬라고 이야기해주고 침대에 다시 애니를 눕혔다.
애니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서 놀라서 큰 병이 난건 아닌지, 열을 한번 확인하고 일어나 가려는데 애니가 내 옷깃을 꾹 잡더니 말했다.
“그... 러셀...”
“응?”
“고... 고마워...”
“아니, 난 뭐한 게 없는데, 손님들이 나서주셔서...”
“그... 그래도 아무튼 고마워...”
“그래, 그럼 푹 쉬고 내일 보자고?”
도발적인 평소와는 다르게 왠지 오늘은 소녀같이 귀여운 애니가 거기 있었다. 다시 열이 오르는지. 얼굴이 다시 빨개진 애니를 푹 쉬라고 해두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 카운터에 앉아서 어제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병신도 아니고. 모험가가 여럿 묵고 있는 여관에서 여급을 강간하려 한다? 자기보다 등급 높은 놈이 있을 수도 있는데? 더군다나 안에 모험가가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약을 했거나 미친놈이거나 둘 중 하가 아니라면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
내 15년 용병 경험이 이상한 점을 계속 경고한다. 더군다나 그놈들은 동 등급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곱씹으며 혼잣말을 하는데. 내 어깨에 사람의 머리가 턱 얹어지더니. 그 머리의 주인이 말을 한다.
“아, 뭐가요?”
나는 손가락으로 에브리나의 이마를 밀어내면서 말한다.
“아니, 동 등급이면. 어느 정도, 사냥터 정보나 자기랑 겹치게 활동하는 파티 정보 정도는 알고 활동하지 않나?
철 등급이야 나무 등급에서 올라와서 철없이 행동하는 애들 많지만, 동 등급 정도 되면 위로 은 등급 무서움을 느껴봤을 텐데 말이야?
나무 등급이나 철 등급은 보통 자기들끼리 파티를 하지만. 동 등급부터는 가끔 은 등급과 파티를 할 수 있는 규모가 큰 임무를 하게 된다. 거기서 은 등급의 실력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겸손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철 등급처럼 나대다가 나보다 약해 보이고 어수룩해 보이는 은 등급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것이란 걸. 은 등급의 무력을 보는 순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여관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벨릭도, 마음만 먹으면 동 등급 열 명 정도는 순식간에 도륙 낼 수 있다. 동 등급이 노련하고 구를 만큼 구를 용병이라면, 은 등급은 탈 인간의 시작이니까 말이다.
힘이면 힘 민첩이면 민첩. 뭔가 한 가지씩 인간에서 벗어난 존재, 신의 힘이든 마력이든 정령력이든, 뭔가 한 가지를 받아들여 그들의 힘을 빌리거나 이용해. 육체를 강화할 수 있는 선택된 소수만이 은 등급이 될 수 있거든.
“아, 어제 그놈들 말이구나! 그러면 한번 알아볼까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에브리나는 나를 자신의 방까지 끌고 갔다.
계단을 내려오며 나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리젤다와 엠마도, 손을 잡혀 끌려가는 나를 보고, 에브리나 방까지 따라 들어왔는데.
에브리나가 왜 따라왔느냐고 하자, 리젤다는 말음 더듬고 엠마는 “러셀님이 걱정돼서요!” 라고 말했다.
“아, 아니, 나랑 같이 있는데. 왜 걱정 돼? 리젤다 너도?”
“아, 아니... 그... 그냥 무, 무슨 일인지 궁금했을 뿐인데...”
귀까지 빨개져서 대답하는 리젤다를 보고 에브리나가 웃으면서, 자신의 짐을 뒤져서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수정구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양손으로 수정구를 잡고는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수정구가 몇 번 점멸하더니. 말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필드 모험가 길드 수정통신 대기마법사 헨슨입니다.”
“은 등급 에브리나님 맞으십니까?”
“뭐야! 에브리나! 길드직통 수정이 있었어?”
수정구 통신에 사용하는 수정은 애초에 둘이 같이 한 쌍으로 만들어서, 나누어 가진 후 사용하는 것이다. 에브리나가 길드에 직접 수정 통신을 한다는 건. 길드에서 에브리나에게 수정을 주었다는 말이 된다.
“아, 응? 은 등급 마법사들은, 다 하나씩 받는 거 아닌가?”
은 등급에 올라온 마법사들은, 길드 입장에서는 아주 귀중한 전력이다. 그런데 이 마법사들이 연구 때문에, 자기 공방이나 집에 처박히면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길드에서는 은 등급부터. 그러니까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마법사들에게, 길드 직통 수정구를 강제로 지급하는 것이다.
“아참! 대답해야지 아~ 응, 나야! 궁금한 게 있어서!”
“무슨 일이시죠?”
“아~ 그, 동 등급 이름이 뭐였지?”
“조, 카빈, 릭터 였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동패를 꺼내서, 어제 세 멍청이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동 등급 조, 카빈, 릭터 셋이 한 파티 같은데, 뭐하는 애들인지 조사 좀 해줄 수 있을까?”
“왜 그러시죠?”
“아니 여기 웜포트인데. 세 놈이 어제 여관에서 여급을 강간하려다가, 오늘 추방되었거든?”
“옛? 잠시 만요! 제가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 한 잔정도 마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수정구가 점멸했다.
에브리나가 수정구를 다시 양손으로 잡고, 마력을 집어넣자. 수정구에서는 노년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브리나야, 할애비다.”
“아, 헤럴드 할아범! 무슨 일이야?”
“부. 부 마스터?”
옆에 있던 엠마가 화들짝 놀라서, 에브리나를 쳐다본다.
리젤다도 이마를 잡는다.
대충 짐작을 해보니 길드 부 마스터인데 에브리나는 할아범이라고 부르나 보다. 아마 길드 내에서 부 마스터를 할아범이라고 부르는 건. 에브리나 정도이리라 짐작했다.
“아. 옆에는 누군가?”
“은 등급 리젤다와 엠마입니다.”
“응? 걱정했는데 일단은 안심이네, 은 등급이 셋이나 있다고?”
“아니, 할아범 여기 벨릭네 파티원 넷이랑, 브릴다네 파티 세 명이랑 나까지 8명인데?”
“아니, 길드 은 등급 두 파티나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아니지 우리 입장에서 좋은 건가? 내 이야기 일단 잘 들어라”
“그놈들 몇 달 전에, 붉은 초승달 도적단 소탕에 참여했던 놈들이다.”
붉은 초승달은 나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비교적 안전한 남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적단으로, 붉은 초등 달은 원래 용병 단이었는데 의뢰 중 의뢰 상단을 몰살시키고, 호송 품을 훔쳐 도망가 도적단이 된 아주 극악한 놈들이다.
두목은 은 등급 상위에 수뇌부 8명이 전원 은 등급 용병으로 이루어진. 남부의 악몽이라고 불리우 던 놈들이다.
그런데 몇 달 전 길드에서 대대적으로 소탕했다고 들었는데?
“아~ 붉은 초승달? 아니, 저번에 다 잡아 죽인 거 아니었어?”
에브리나가 부 길드 장에게 되물었다.
“아니다. 두목이랑 수뇌부가 도주한 것 같다. 그놈들 원래 80명 정도라고 했는데, 토벌에 잡아 죽인 놈만 80이 넘었어! 얼마나 살아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네가 물어봤던 그놈들. 소탕 때 다 사망한 우리 녀석들이다. 용병패가 없어져서 회수를 못 했는데, 그놈들이 가져간 것 같군. 세 놈이 발견되었다면 다음 목표는 공백지 마을 이라는 건데, 우리 쪽에서도 지금 토벌병력을 편성할 테니까. 이틀만 버텨봐라!”
‘아니 근데 도적단 새끼들이면, 쳐 맞을 때 협박이라도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왜 악당들의 전형적인 대사 있잖아? “곧 우리 붉은 초승달 도적단이 도착한다. 니들 큰 실수 하는 거야?” 이러면서? 근데 이 새끼들 왜 다들 입 다물고 있었지?
어제 분명히 한 놈은 엠마에게 턱이 사라질 때까지...
또 한 놈은 브릴다에게 성대가 찢어지고...
또 한 놈은 아우로라에게 생명력 좀 빨려서 실신을... 그
다음에는 촌장님한테 한 놈씩 곤봉으로 머리통을...
아... 이 새끼들 말을 안 한 게 아니고 못하게 쳐 맞은 거구나...
그때 갑자기 쾅하고 문이 열리더니. 벨릭이 에브리나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혀, 형님! 이... 이게...”
벨릭이 손에든 건 어제 놈들에게 압수 한 무기 중 칼집에 든 단검이었는데. 벨릭이 칼집에서 단검을 뽑아들자 단검에는 초승달이 음각되어, 붉은빛을 내는 문양이 나타났다.
“알고 있어 벨릭 손님들 전부 무장시켜. 리젤다 촌장댁 까지 다녀와 주겠어? 목책 확인하고 경계병력 증원 시키라고 해,
추방하러 나간 사람들 아직 출발 안 했으면 못하게 하고 출발했으면, 누구든 말 타고 나가서 다시 복귀시키라고 해줘!”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전부 무장부터 해야겠는 걸?”
내 소리에 다들 각자 방으로 뛰어갔다.
나도 내방에서 용병시절 입던 갑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모두들 장비를 챙겨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형님 무기는?”
벨릭이 무기가 없는 날 보고 말했다.
“지하에서 꺼내 와야 한다. 먼저 출발해”
벨릭을 선두로 여덟 명의 은 등급 용병이 마을 광장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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