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녀 헬레나 2부 : 오스.. 2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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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미리 준비가 잘 되어 있고, 하녀들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 이런 광경이 과거에도 여러 번 펼쳐진 듯 했다.
헬레나는 결박당한 걸로 끝나지 않았다. 하녀들은 달려들어서 헬레나의 옷을 찢어발겼다. 헬레나가 입은 최고급 옷가지가 거친 손길에 의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평소 속옷을 입지 않는 헬레나이기에 순식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됐다. 이제 그녀의 몸에 남은 신외지물이라고는 바닥을 뚫어버릴 것처럼 높고 날카로운 하이힐과 악세사리들뿐이었다.
“어머나, 속옷도 입지 않고 다니다니 고귀한 여성으로서 몸가짐 실격이네요. 펜트 제국의 황녀들은 다 그러고 다니나 보죠.”
아까 헬레나에게 충고했던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의 미녀가 예쁜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살포시 웃었다. 예의를 잔뜩 차리는 듯 했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제저벨. 이렇게 몸가짐이 형편없는 년이니 오늘은 제대로 교육 좀 시켜줘야겠구나.”
나디야가 차갑게 대꾸했다. 여전히 등받이 없이 길쭉한 의자에 옆으로 누운 자세인 그녀는 여황제처럼 오만한 포스가 철철 넘쳐흘렀다.
하지만 헬레나에게 더 불쾌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납고 오만한 나디야가 아니라 우아한 척하면서 그녀에게 비웃음과 조롱을 쏟아내고 있는, 제저벨이라고 불린 금발머리 미녀였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제저벨이 딱 그짝이었다. 아까 충고할 때부터 진심이라기보다 그녀의 고충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확실히 제저벨은 재수 없는 여자였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류의, 타인의 고통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착한 아이' 이미지는 지키고 싶어 하는 ‘비열한 여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태후 마마, 전..........”
헬레나는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뒤에 선 하녀가 가죽 채찍을 높이 치켜들더니 가녀린 등을 향해 내리쳤다.
“아악!"
헬레나는 너무나 아파서 비명을 질러댔다. 여기사로 활동한 전적이 있는 헬레나지만, 그것은 오직 아이리스의 목걸이의 마력에 기댄 것이었다.
실제 그녀의 육체는 다른 신분 높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가해지는 가죽 채찍의 타격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대 치기도 전에 헬레나의 눈이 까뒤집혔다. 너무 비명을 질러대서 목소리가 갈라져 나올 정도였으며, 그녀의 팔다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저벨은 흡족한 얼굴로 또 다시 비웃음을 날렸다.
“어머, 비명소리 한 번 크네요. 그러게 아까 내가 충고해줄 때 바로 들을 것이지, 어리석게 굴다가 호된 꼴을 보네요.”
나디야는 누운 자세 그대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제저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제저벨. 하긴 너처럼 눈치가 빠른 아이는 좀 드물긴 하지.”
“어머, 과찬이세요. 태후 마마.”
그녀들은 정말로 죽이 잘 맞았다. 아마 제저벨은 나디야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면서 아첨을 매우 잘 하는 듯 했다.
다행히 채찍질은 딱 5대로 끝났다. 헬레나도 명색이 황후인데다가 너무 두들겨 패다가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건장한 사내가 아닌, 연약하고 가냘픈 여성인 헬레나에게는 채찍 5대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형벌이었다.
헬레나의 등허리, 그 새하얀 피부에는 새빨간 줄이 죽죽 그어져서 무척이나 흉측해 보였다. 온몸이 땀으로 번들거렸으며, 마라톤이라도 뛴 마냥 숨결이 가빴다.
하녀들이 그녀의 팔목과 발목을 결박한 가죽끈을 풀어주자 헬레나는 그대로 바닥에 힘없이 늘어졌다. 눈동자에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으며, 알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녀의 육체는 지금 열 명의 사내와 섹스했을 때보다도 더 심하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게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나디야가
"이제 정신을 좀 차렸느냐?"
라고 차갑게 일갈하자 번개처럼 반응했다. 헬레나는 다급하게 바닥에 두 팔과 두 다리로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 벌레같은 모습을 나디야와 제저벨은 함께 비웃었다.
나디야와의 만남이 끝나자마자 헬레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임에도 하녀들에 의해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이제 술탄 폐하를 만나러 가셔야 돼요."
헬레나의 궁전에 배속된 하녀 중 제일 나이 많고, 노련한 하녀장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황실의 최고 어른인 태후에게 우선 인사했으니 이제는 그녀의 남편이자 이 제국의 지배자인 술탄에게 인사드려야 할 차례란 것이었다.
채찍 5대에 심신이 피폐해진 헬레나는 현재 뇌세포 자체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하녀들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갔다. 아까의 노련하고 나이 많은 하녀장이 재빨리 또 속삭였다.
"술탄 앞에 가시면, 무조건 아까처럼 바짝 엎드리세요.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시면 안 돼요!"
말투가 세긴 했지만, 거기에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우아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헬레나를 깔보고 조롱하기 바빴던 제저벨과 정반대였다.
안 그래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헬레나는 충성스러워 보이는 하녀장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술탄의 궁전은 엄청나게 크고 웅장하면서 위압적이었다. 군사대국 오스만 제국의 절대 지배자인 술탄의 거처임을 느끼게 했다. 천장도 매우 높았고, 복도도 너무 넓었다. 보통 사람보다 키가 10배쯤 되는 거인이 사는 곳인 듯 했다.
술탄의 궁전도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물건이 잔뜩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여성인 나디야의 궁전에 비해 아름답기보다는 위압적인 느낌이 더 강했다. 양쪽 벽에 번쩍거리는 무기와 창칼이 잔뜩 걸려 있는 부분도 그런 점을 더 부각시켰다.
술탄이 처첩들을 만나는 곳은 그 궁전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의 내실이었다. 다만 내실이라는 표현이 웃길 만큼 컸다. 사람 수백 명이 들어갈 만 해서 거의 펜트 제국 황궁의 홀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내실의 주변을 침실, 욕실 등이 감싸고 있었는데, 모두 어마어마하게 컸다. 술탄의 궁전은 어딜 가든 그 규모가 질릴 정도였다.
내실 안쪽 깊숙한 곳의 황금과 보석으로 번쩍거리는 태사의가 놓여 있었으며, 그곳에 한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그가 술탄이란 것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금남의 구역인 하렘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사내란 점에서,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이 모두 바닥에 노예처럼 바짝 엎드린 상태인 데 반해 혼자 의자에 앉아 있다는 점에서 그가 술탄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일단 헬레나는 하녀장이 시킨 대로 그 자리에 노예처럼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건 하나도 신기하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여성들이 똑같이 하고 있었으니까.
내실에 있는 수십 명의 여성들은 모두 암캐처럼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상태였다. 개중에는 보석 장신구를 듬뿍 달고, 차림새가 화려한 것이 단순한 하녀가 아니라 최소한 시녀거나 첩으로 보이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도 허름한 차림새의 하녀와 마찬가지로 술탄 앞에서는 그저 노예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아까 나디야 옆에는 제저벨처럼 서 있는 여성들도 여럿 있었는데, 술탄 옆에는 한 명도, 정말로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술탄이 뭐라고 명령하면, 번개처럼 움직이곤 했다. 그것도 술탄 앞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엎드려서 고개를 깊이 숙인 그대로 뒷걸음질쳐서 물러난다. 내실 밖으로 나가서, 술탄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들은 허리를 들었다. 실로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헬레나는 그녀들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면서 그대로 따라 했다. 지금 힘을 쓸 때가 아니란 점과 함께 더 이상 채찍질을 당하기도 싫었다. 지금은 일단 스스로를 최대한 낮추며 제국의 지배자의 비위를 맞출 때였다.
술탄이
“또 새로운 황후인가? 가까이 오너라.”
라고 명령하자 ‘새로운 황후’란 단어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헬레나는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똑같이 암캐처럼 바닥을 박박 기어서 술탄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