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 호출
여의사인 송유라는 호텔 스위트룸에 호출되었다.
벨을 누르자 곧이어 문이 열렸다.
- 오랜만입니다. 송선생.
송유라는 스위트룸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있었고, 흰색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남자가 친한척 반기는 그 목소리에 순간 저도 모르게 응대할 뻔 하였으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는 다른 남자가 한명 더 있었는데 창가쪽에 걸쳐서 송유라가 들어오는 모습을 곁눈으로 슬쩍 쳐다보았고, 그 순간 송유라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것이 민망하여 송유라는 그나마 알고있던 남자를 다시 쳐다보는 식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송유라는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스위트룸의 큰 창으로 밝은 조명이 들어오고 있었고, 밖의 하늘은 청명했다.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 듯 했고, 앞의 큰 건물의 하얀 벽돌이나 외장재들이 내리쬐는 햇빛에 비춰 반짝거리고 있었다.
송유라는 스위트룸 안의 거실 소파 뒷편에서 걷던 걸음을 멈췄다. 굳이 그 가운데에 소파로 들어가 앉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남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였으나, 이 남자들의 페이스에 말려들 틈을 주지 않을셈이였다.
송유라는 오전 진료를 막 마치고 온 길이였고, 이 날의 진료 중에 딱히 특별한 사건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는 그녀에게 고되게 느껴졌던 한 주였었다. 그리고 딱히 약속이 없는 주말에는 그녀는 피로를 풀고 밀려놨던 빨래나, 자동차 세차같은 일을 하면서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송유라는 금요일 오후 퇴근을 이 스위트룸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병원을 나서면서 맑은 하늘과 청명한 바람에 스치는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그 호텔에 대한 기억이 뇌리에서 살아나는 것을 애써 모른체 했다.
- 더 이상 호출할 일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 아니 오랜만에 보고싶기도 해서..
송유라를 호출한 남자가 소파에서 무릎을 짚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다른 낯선 남자는 어느새 창가쪽에서 이동해서 옆의 가구에 살짝 팔을 기대면서 송유라를 주의깊게 쳐다보았다. 송유라는 자신의 전신을 훑는 낯선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으나,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식으로 그 남자를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그래서 요구는 어떤 겁니까?
송유라는 이 흐름을 주도하고 싶었다.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더 이상 시간 낭비 없이 주말을 돌입하는 금요일을 즐길 셈이었다. 고된 업무의 후유증으로 다리의 근육통이나 어깨결림이 느껴졌으나, 집에서 따뜻한 물을 틀어놓은 욕조에 들어가, 입욕제를 풀어놓고 한시간 정도 푹 몸을 불릴 생각이었다. 피부과 전문의적 지식으로는 30분이상의 입욕은 오히려 몸에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피로회복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냉장고에 채워놓은 맥주를 하나 꺼내서 TV드라마를 보면서 이 주말을 제대로 즐길 생각에 살짝 들뜨기도 하였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 남자들을 제압하고, 이 일을 뒤탈없이 마무리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지만 자신이 책잡힐 만한 것은 없었으니, 굳이 버거운 싸움도 아니었다. 송유라는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진료를 볼 때처럼 공손하고 밝고 친절한 말투로 남자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일적인 거니까, 일 끝나고 바로 오신겁니까?
남자는 굳이 송유라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주의를 끄는 다른 질문을 덮음으로써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송유라는 자신의 질문이 완전히 씹혀버리고 오히려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송유라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잘근 씹으려다가, 아차 싶어 그저 입술을 살짝 모으는 것에 그쳤다.
- 외투 이쪽으로 주시죠?
벽에 기대어 있던 낯선 남자가 송유라에게 말을 걸었다. 흰색 셔츠를 입었고, 키는 딱히 커보이진 않았으나 체격이 다부져보였다. 그의 바지위로 울퉁불퉁한 근육의 짜임새들이 보였고, 팽팽한 바지의 탄력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 괜찮습니다.
송유라가 낯선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연이어 다른 남자가 송유라에게 재차 말을 걸었다.
- 어때요. 피곤할텐데 앉아서 얘기합시다.
- 아니에요. 금방갈꺼니까.
송유라는 남자의 페이스에 절대 말려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팔짱을 끼고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낯선 남자가 옆에서 갑자기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송유라는 전신에 소름이 돋고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애써 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었다. 여자아이처럼 이 불쾌한 장난에 반응했다가는 이 남자들에게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으나 힘으로 이 남자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 송유라의 눈빛이 약간 화가난 듯 하고 볼이 상기된 것처럼 탁하게 붉어졌다.
- 앉아서 얘기하시죠.
다른 남자가 이 광경을 보면서 다시한번 송유라에게 권했다.
낯선 남자는 송유라의 뒷편에서 거의 그녀와 접촉하듯이 서서 그녀의 반응을 주시하면서 입을 씰룩거렸다.
- 요구가 뭔데요. 진짜로.
송유라는 남자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또박또박 큰목소리로 말했다. 낯선 남자가 이와중에 송유라의 몸에 손을 갖다댔으므로 송유라는 그 손을 밀어쳐내면서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했다. 그러다가 송유라는 손에 들고있던 쇼핑백을 그에게 뺏겨버린 걸 깨달았다.
낯선 남자는 쇼핑백을 뒤집어 소파위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안에는 하얀색 의사 가운이 돌돌 말려 들어있었다. 송유라의 병원 네임택 목걸이와, 가운 주머니에 꽂혀 있던 볼펜 몇 자루가 소파 위에 널부러졌다.
- 뭐하시는겁니까.
송유라는 불쾌해하며 얼른 가운을 주워담고 네임택과 펜들을 품안에 주워담았다. 남자들은 이 광경을 보며 송유라를 비웃었다. 송유라는 이 유치한 장난에 기분이 나빴으나 딱히 대응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이 그녀가 해왔던 방법이었고, 더 이상의 방법이 필요하지도 않아 왔었다. 의사라는 엘리트의 장점이었다. 공부를 좀 잘했으나, 생명에 대한 대단한 책임감 같은건 없었음에도, 그녀는 이 진로를 쭉 타고가 피부과 전문의가 되었다. 남들보다 대단히 뛰어난 적도 혹은 남들보다 뒤쳐진 적도 없었고, 송유라는 그저 본인의 적성에 잘 맞는 일을 택한 것 같은 생각으로 큰 불만도 만족도 없이 피부과 전문의의 삶을 살고 있었다.
송유라는 전체적으로 화장이 짙은 편은 아니었으나, 눈의 마스카라는 환자들을 대면진료하는 서비스업 답게 짙게 자리잡고 있었다. 얼굴 전체적으로 빈티나 흠집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볼살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 피부과 의사 답게 피부관리가 열심히 인지 몰라도 눈에띄게 귀가 반짝거리는게 보였다. 귓바퀴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빛에 비춰 반짝거렸고, 마치 기름칠이라도 한 것마냥 눈에 띄었다. 목주름은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 송유라의 화가 난 듯한 얼굴이 점차 온화해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눈은 남자들이 아닌 땅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 송선생. 앉아서 얘기합시다. 얼른 얘기하고 가자고요. 저도 피곤합니다. 주말인데, 그래도 사람이 얘기하는데 눈은 좀 쳐다봅시다. 예? 사람이 얘기하는데 버릇없이.
- 그니까 말하시라고 하는데 말을 왜 안하십니까?
송유라는 버릇없다는 남자의 표현에 발끈하여 쏘듯이 말을 몰아 붙였다. 송유라는 순간 자신이 너무 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괜히 기죽은 듯이 있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치켜떠 남자를 노려봄으로써, 그 행동에 후회하는 본인의 속마음을 숨기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한번 쏘아 본 뒤 계속 그러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옆의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남자는 자신의 언행에 어떠한 위축이나 반응없이 그저 자신을 관조하고 있었다.
송유라는 본인의 대응이 어디가 잘못됐는지 순간적으로 복기해보았다.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송유라는 괜시리 입술만 꿈뻑거려보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의사 가운을 접어 쇼핑백에 집어 넣었다. 그때 낯선 남자가 뒤에와서 자신의 묶은 머리의 끝자락을 쓰다듬어 내리는 것을 느꼈다. 송유라는 재빨리 그 불쾌한 감각으로부터 머리를 빼내었다. 그러자 낯선 남자는 그녀의 어깨가까이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짓거리를 해댔다.
- 하지마세요.
- 앉아서 얘기합시다. 선생.
송유라는 도망칠 구멍 없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 방에 온지 벌써 십몇분이 흐른 것 같았으나, 이야기는 진척되지 않았고, 요구사항이 무엇인지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송유라는 이런식으로는 이 일을 재빨리 마무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마무리하고 해야할 주말의 계획또한 이 일에 따라 그 성패가 달려있었다. 남자들은 자꾸 소파에 앉을 것을 강요했고, 이제와서 이렇게 거세게 저항해왔는데 소파에 앉는 것도 자존심 상하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남자들의 호의에 따라 소파에 앉았으면 별 것도 아닌 걸로 자존심 세우거나 시간이 끌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실책에 대해 질책했다.
소파에 앉는게 그다지 별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소파에 앉는 다는 것이 송유라에게는 이 남자들에게 강요당하고 굴복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앉으시죠.
송유라는 한번 더 권하는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지금껏 해왔던 거절이나 완강한 거부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 말을 듣자마자 소파로 걸어가서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송유라의 옆으로 낯선남자가 바짝 앉았다. 다른 남자가 송유라쪽으로 걸어와 그녀의 쇼핑백을 받아들고 소파의 남은곳에 앉았다. 송유라를 가운데 끼고 소파가 꽉 찼다.
송유라의 분홍색 가디건과 짙은 초록색 소파의 색의 대비가 눈에 띄었다. 남자는 송유라의 옆에 앉자, 그녀의 검은스타킹으로 덮인 무릎 위에 손을 슥 올렸다.
- 하지마세요.
송유라는 남자의 손을 치워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송유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어깨동무를 했다. 이를 피하고자 했으나 반대쪽엔 낯선 남자가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그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애써 모르는 척 하면서 송유라는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 가방 이리주시죠.
- 됐습니다.
송유라가 가방을 꽉 끌어안자 남자는 더 쎄게 가방을 끌어당겼고, 힘으로 그녀의 가방을 손쉽게 뺏어서 건너편 테이블 앞으로 휙 던져버렸다. 송유라의 소지품이 모두 들어있는 가방에 땅으로 쿡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나마 몸을 숨기고 의지하던 가방마저 빼앗겨 버리자, 남자들 사이에 왜소하게 자리잡은 송유라의 전신이 헐벗은 겨울 나무처럼 앙상해보였다.
남자가 가방을 던지고나서 송유라의 가디언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윗단추를 풀으려 하자, 송유라는 재빨리 남자의 그 손을 쳐내면서 양손으로 가디건을 꾹 움켜쥐고 옷매무새를 여몄다.
오른쪽의 낯선 남자가 이를 보다가 팔꿈치로 그녀를 밀어 소파 뒤쪽으로 기대게 하자, 송유라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팔꿈치로 낯선 남자의 팔을 쳐냈다. 남자들은 송유라의 거친 반응을 보며 흡족해했다.
- 우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숙이고 있는 송유라의 이마를 손으로 들어올렸다. 송유라는 그러면서도 고개를 숙이며 남자의 시선을 애써 피했는데, 그 틈새에 옆의 낯선 남자가 송유라의 묶은 머리를 꼭잡고 뒤로 재껴 도망칠 수 없었다. 송유라는 손으로 애써 낯선 남자의 손을 풀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 송선생.
- 송선생.
- 송선생.
낯선 남자가 묶은머리를 잡고 송유라를 갖고노는 사이 다른 남자가 나즈막히 송유라를 계속 불러댔다. 송유라는 대답도 하지않고 자신의 묶은 머리를 잡은 손에서 벗어나려고 이리저리 애썼다. 결국 풀려나지 못했고, 다른 남자가 송유라의 손을 머리쪽에서 끌어내버렸다. 그리고 그때 송유라가 손을 아래쪽으로 내리자마자 송유라의 얼굴로 남자의 큰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 짝!
송유라는 예상치못한 일격에 화들짝 놀라서 빰맞은 쪽의 볼을 손바닥으로 뒤늦게 막았으나, 볼에 열기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오면서 남자에게 맞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남자에게 맞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여자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차오르자, 삭힐수 없는 분이 가슴한구석에서 불처럼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남자가 빰을 맞고 옆으로 돌아가 있는 송유라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면서 송유라의 손을 치워내리려고 시도하였다.
- 여기봐. 송선생. 여기.
송유라는 본인의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는 그 손을 잡아 냅다 잡아 던지듯이 치워버렸다. 송유라의 화난 불그스레한 표정이 남자들에게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자 남자는 한방 더 송유라의 볼을 후려갈겼다.
- 뭔짓거리야!
송유라는 화난 목소리로 남자에게 거칠게 일갈했다. 이에 그치지않고 남자의 팔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후려갈겨버렸다. 당한 만큼 돌려주는게 그녀의 신조였다. 그 남자만큼 쎄게 때릴수는 없었으나, 본인도 시원하게 후려갈기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남자는 순간 움칫거리는 듯 했으나, 다시 송유라의 붉게 물든 따귀를 한방 더 후려갈겼다. 그 때 송유라는 연이어 무슨 말을 하려는 참이었는데 세번째 따귀가 날아들어오자 순간 고개가 꺾이면서 벙쪄버렸다. 돌아간 고개를 바로 세울 생각도 없이 맞은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화난 눈은 그대로였고, 입술은 분노에 꽉 차 부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이에 그치지않고 돌아간 송유라의 볼에 연달아 네대 다섯대를 후려 갈겼다. 반응없던 송유라는 여섯번째 따귀를 맞자 손으로 맞던 빰을 감쌌다. 남자는 이에 그치지않고 볼을 감싼 송유라의 손등 위로 일곱대 여덟대를 후려갈겼다. 딱히 봐줄 생각이 없었다.
- 뭔 짓거리야 이게..
송유라의 또박또박한 음성에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조금전의 당차던 기세는 온데간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