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41(1부완) (41/41)

구문궁과 해운곡을 다녀온 후, 번서는 자산성과 합포와 월영포를 교대로 오르내리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구문궁과 진서연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 있던 탓도 있어서, 그는 자신의 실력을, 특히나 세력을 구축 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자산성에는 금여화의 금탑삼상 지부가 있었고, 합포에는 경운경이 광산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월영포에는 역시 금여화의 입김이 미치는 상설시장과 함께 포구와 머지않은 곳에서 유준이 이끄는 몽룡당이 새로운 산채를 세우고 있었다.

이무렵 대왕실의 토벌 순위에서 제 1순위를 차지하게 된 몽룡당의 세력은 상당한 것이어서, 산채의 숫자는 셋이 되었고 각각의 산채의 인원수도 늘었다. 중주와 상주 일대에 걸친 많은 반 윤숭파에 속하는 인물들도 뜻을 같이 해 은밀하게 협조하고 있는 덕분에 정보력과 기동성도 한층 나아져 있었다.

이제 유준은 번서 없이도 어느 정도는 해나갈 수 있을만큼 세력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사업을 번서와 상의해 결정했다. 번서가 그에게 제공하는 정보도 비할 데 없이 정확했을 뿐더러, 개인적으로도 그를 어느 정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서도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라서, 그의 몽룡당을 자기 세력처럼 생각해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해를 넘겨 생일을 맞아 18세가 된 경운경이 성년식을 치렀을 때, 유준은 축하 선물을 가지고 방문했다. 그리고 그때 유준과 경운경은 처음 만나게 되었다.

" 어머, 이 공자님은 누구신가요? "

" 이분이 유준 공자시오. 유공자, 이쪽이 오늘의 주인공이신 경운경 낭자요. "

두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유준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포권을 해 보였다.

" 처음 뵙겠소이다. 유준이라고 합니다. 번공과 함게 작은 사업을 하고 있지요. "

" 처음 뵙겠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

두명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해 하면서도 몆마디를 더 나누텄고 친근한 분위기 속에서 헤어졌다. 번서의 옆에 서 있던 서봉이 은근한 미소를 띄우며 한마디 했다.

" 좋을 때군요. "

" 아아... 그렇군. "

그제사 번서도 눈치를 채고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중키에 평균적인 체구라 신체적으로도 두드러지지 않는데다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번서와는 달리, 유준은 키도 크고 당당한 체격에, 호남형으로 생겼다. 게다가 영웅적인 기개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경운경이 그를 보고 반한 것은 어찌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준 역시도 경운경에게 한눈에 반해서 성년식을 치른 그 다음주의 첫날에 예물을 가지고 와서 번서에게 청탁을 넣었을 정도다. 일단은 번서가 경운경의 보호자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 진도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 그 마음은 잘 알겠소만,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

번서의 지적에 깨닫는 바가 있었던 유준은 예물과는 별도로 선물을 마련해 이번에는 경운경에게 직접 가지고 갔다. 석달을 넘게 공을 들인 끝에 결국 결혼 승락을 받아 낸 유준이 다시 예물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는, 그도 반대하지 않았다. 상당히 보기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한쌍이었다.

결혼 축하연 만큼은 국무향과 진소아를 제외한 노예들 전원도 코뚜레를 벗고 참석했다(심지어 주자영까지도). 번서나 경운경 쪽의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유준쪽의 손님은 그렇지 않았던 덕에 아무래도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의 접대를 도울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손님 접대를 도맏는 동안, 누구에게나 귀여움 받는 막내인 악산라는 계속 번서 옆에 붙어서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의 황국말이 점점 유창해져 가긴 했지만 어투와 어순은 아직 이상했고, 게다가 생긴것도 황국인과 완전히 달라서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 주인님, 아깝다? "

" 음? "

" 이쁘다, 운경낭자. 주인님 잘 따른다. 나는 동생이라 생각했다. "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악산라의 보석같은 푸른 눈을 보며, 번서는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 ...그녀는 내게 있어 여동생 같은 존재다. "

" 나쁜 남자들, 여동생 많이 좋아 한다. [오니짱, 야메떼]한다. 아청아청 한다. "

"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운거냐... 당여월이냐? "

물어보자 악산라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여월언니 재미있는거 많이 가르쳐 준다. 좋다. "

범인의 정체는 알아냈다. 아마 악산라는 자기가 말하는 단어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태연한 표정으로 인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번서는 당여월의 엉덩이를 때려 주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 당언니, 왜 그래요? "

" 아냐, 갑자기 오한이... "

국무령의 질문을 받은 당여월은 얼버무렸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에 잠깐 몸서리쳤다.

물론 결혼한 이후에도 경운경이 번서의 광산을 관리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고, 번서가 유준에게 조언자로써 정보와 금전을 제공하는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은 이제 경운경을 중간에 두고 한 식구가 되었다는 점 정도다. 유준은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번서를 [빙장어른]이라고 불렀고, 번서는 [사위]라고 대꾸해 주는 관계랄까.

술시가 되자, 왁자지껄하던 잔치 분위기도 슬슬 정리되었다. 신부를 공주안기로 안아 들고 신방으로 들어가는 신랑의 등 뒤를 휘파람 소리가 쫒았지만, 예하랑에 의해 신방을 엿보는 것은 엄금되었다. 신방의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자 아직 술잔을 더 기울일 여력이 남아있는 몆몆 손님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자 마련된 임시 숙소를 안내받았고, 바쁜 사람들은 덕담을 남기고 헤어지게 되었다.

" 좋은 날이군요. "

" 그래. 나도 모처럼 마셨더니 기분이 좋군 그래. "

그동안 옆을 지키고 있던 악산라는 이미 잠자러 가고 없었다. 은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의 시선에 취해, 예하랑은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진인 특유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유방이 스치는 감각에 번서의 마음도 동해서, 그는 예하랑의 허리를 끌어 안고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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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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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서의 노예들을 나이 순대로 줄을 세우자면, 당연히 이제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예하랑이 1등이다. 그 다음이 당여월(올해로 서른, 위기다!), 국무령&서봉(동갑이다), 금여화, 진소아(번서와 동갑), 국무향, 주자영&악산라 순이다. 다만 당여월 이하로는 나이차이가 고만고만해서 한두살씩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모두 번서의 의향도 있고 해서 나이 순대로 언니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번서는 원래는 동갑인 경우에도 생일이 앞선 쪽을 언니라고 부르게 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속세 시절의 경쟁자이던(그리고 지금도 경쟁자인) 서봉과 국무령이 동갑(서봉의 생일이 두달 앞선다)인 터라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언니동생 하긴 하지만 사실상 번서 아래서는 모두 입장이 동등하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예하랑인데, 그녀는 나이도 많고 배분도 높고(현존하는 모든 백무련과 일부 창천교 문파 장문인들의 사조뻘) 무공 실력도 넘사벽으로 높은 터라 번서가 다른 노예들을 통솔하도록 [권위]를 부여해 주고 있었다. 그 권위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물론 노예가 번서의 호위를 서는 순번을 결정하는 일이다.

물론 모든 노예들은 언제나 번서에게 범해지는 것을 갈망하지만, 하루종일 침대 위에만 머물 수 없는 그는 외유가 잦다. 그때 같이 외출하는 것이 바로 호위 노예들인 것이다(그동안 희롱을 당할수도 있고, 야외에서 할수도 있다). 그러니 한순간이라도 그와 함께하고 싶어하는 노예들에게 있어, 이 순번을 결정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된다. 무공 실력으로도 압도당하고 이런 권력도 있는 만큼, 당여월을 비롯한 다른 노예들은 두말없이 예하랑에게도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예하랑은 번서가 자신에게 부여한 권위의 중요성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칫하면 질투 등으로 얼룩질 수 있는 노예들 사이를 큰언니로써 원만하게 중재하며, 호위 순번 역시도 불평의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번서와 함께 무공 연구를 한다던가, 그의 의술 실험에 자원한다던가, 너무 돈을 쓰는데만 열중하고 있는 번서를 대신해서 구멍이 나기 직전인 살림을 챙긴다던가, 이래저래 사실상의 안주인으로써 바쁜 그녀였다.

또한 예하랑의 체액은 다른 노예들의 체액보다 훨씬 더 번서의 병증에 대한 진정 효과가 높았기 때문에, 이래저래 번서로써는 그녀를 노예중 필두로 삼을 이유가 충분했다. 번서는 처음에는 노예들의 피를 뽑아 마셨으나, 곧 음액이나 젖에도 같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이후로는 모은 노예들이 그 유방의 크기와 상관없이 젖을 분비할 수 있도록 처치가 베풀어져 있었다.

상주에서 소백강이 크게 휘며 유속이 느려지는 지점에 위치한 작은 어촌인 제물포(濟勿浦)는 다른 큰 포구들과 달리 번서의 배가 정박할 만한 선착장도 없어서, 보통은 지나치는 곳이다. 번서도 이미 몆번이나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전과 달랐다.

평상시는 어떤 마을이건 저녁무렵에는 밥을 짓는 연기가 오르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정상이고, 농사든 고기잡이든 간에 일을 정리하는 해질 무렵이 가장 번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 번서가 지나치는 제물포의 저녁은 너무 조용했다. 밥짓는 연기도,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개나 닭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기에 오히려 너무 눈에 뜨이는 터라, 번서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로 하고 제물포에 최대한 가깝게 배를 대고 경공을 써서 선착장까지 날아 갔다.

" 진짜 너무 조용하네요. "

" 인기척도 없어요. "

번서의 좌우를 담당한 당여월과 서봉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단련된 감각 만으로도 마을이 텅 비어 있음을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환술로 감각을 확장하고 있는 번서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노예들은 불안감 정도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지만, 번서에게는 분명하게도 사악한 힘의 악취가 느껴졌다.

이 작은 마을을, 무엇인가 몹시 사악한 것이 쓸고 지나간 것이다.

" 무언가 안좋은 것이 숨어있다. 조심하거라. "

" 네 주인님. "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사라진 마을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개와 닭과 소도. 그들은 모두 마을의 우물가에 모여 있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 그들의 시선은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번서는 곧 그들에게서 전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시체였던 것이다.

번서는 상대가 시술사(屍術使)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시를 다루는 것부터 시작하는 사술은 그리 큰 도력을 요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수하를 만들어 부릴 수 있기에, 비용대비 효율이라는 점에서는 몹시 괜찮은 술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은자의 안식을 방해하는 사악한 수법이라는 이유로 술자들 사이에서도 금기시 되어 왔고, 황국에서는 아예 그 강시술 자체가 불법이다. 그 강시의 종류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용자는 모두 사형에 처해지며, 알려진 시술사들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

악당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갈천휘의 제자인 만큼, 번서는 강시술에 호감을 가지지 않는 쪽이었다. 무고한 민간인을 죽여서 강시로 만들어 전력에 보태야 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 이런이런... 손님이 오셨군. "

소리가 들려온 것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정자 양식의 건물의 지붕 위였다. 번서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중년 초입의 색국인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번서가 생전 처음 보는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온통 빛을 반사하는 새카만 재질로 이뤄진 그것은 마치 해녀들이 입는 물옷 같아 보였다. 그가 시술사라는 사실은 불문가지였다.

" 약간 이른 감은 있지만... 뭐 어때. 그나저나 괜찮은 계집들이로군. 그리고 배까지... 이렇게 고마울데가. "

시술사가 번서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전신으로부터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겨나오고 있었다. 번서는 상대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막 뛰쳐 나가려던 당여월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난번 처럼, 격검부터다.]

" 네, 주인님! "

[서봉, 너는 방어 담당이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근처에 오는 놈부터 처리해라]

" 네, 주인님! "

시체들이 움직여서 번서 일행을 포위해 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시술사의 손으로부터 시커먼 요력의 덩어리가 날아왔으나, 그것은 당여월이 던진 단검과 허공에서 맞부닥쳐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산산조각 난 칼날의 파편이 마치 포탄의 파편이 흩뿌려진 것 처럼 마을사람들로 만든 강시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효과도 그와 비슷했다. 도력이 실린 칼날 조각을 얻어 맞은 시체들은 그대로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를 본 시술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가 완전히 열받기 전에 당여월이 던진 두번째 단검이 그의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 으헉?! "

간신히 고개를 틀어 피해냈지만, 이마에 길다란 칼자국이 생겨났다.

" 이 건방진 년이!... 껍데기를 벗겨내... "

" 훗, 격검도 모르는 무식한 놈 같으니... "

당여월은 코웃음을 치며 기를 날렸다. 시술사가 그녀가 한 말의 뜻을 깨닫기도 전에, 단검은 허공에서 크게 삼각형을 그리며 되돌아 와 그의 뒷목에 명중했다.

" 커컥!... "

대부분의 환술, 혹은 요술은 주문의 영창을 필요로 한다.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될 리가 없다. 당여월이 의기양양하게 다음 공세를 펼치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상대의 눈이 붉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 하앗?!... "

아마 무공 수련이 깊지 않았거나 번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도록 강제되는 주박이 걸린 노예가 아니었다면, 당여월의 의식은 순식간에 시술사의 그 붉은 눈동자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효과를 무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의식이 흐릿해졌고, 공세가 멈추었다. 번서가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그녀도 제정신을 차렸지만 그때 그는 그 시술사가 시선 만으로 상대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선을 마주치지 마라.]

" 네... 넷, 주인님! "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당여월이 다음 격검을 준비하는 사이, 그녀의 주변을 둘러쌌던 강시들을 날카로운 검기가 휩쓸었다. 배에서 변고를 알아 채고 날아온 국무령이 탄검술로 검기를 날렸던 것이다. 조각나 흩어지는 강시들 사이에 착지한 뒤 번서에게 약식의 예를 취해 보인 후, 전음으로 주의사항을 전달 받은 그녀는 곧바로 우물을 향해 뛰어 올랐다.

" 쳇!...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

그때즘 겨우 목에 박혔던 단검을 뽑아낸 시술사는 땅 속에서 시커먼 강시 몆구를 더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두개의 요력 덩어리를 발사해 당여월과 국무령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번서가 그것을 허공에서 무효화 시켰다. 상대도 사술사 중에서는 특출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미 갈천휘에 의해 한단계 성장한 번서의 환술은 계통이 다른 요력이라 하더라도 원거리에서 즉시로 무효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경지에 달해 있었다.

퍼버벅!... 

파박!...

하지만 상대인 사술사도 만만찮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여월이 격검으로 날려보낸 검이 사술사의 몸통을 꿰뚫고 국무령이 탄검으로 날려보낸 검기가 그 뒤를 이어 그를 휩쓸었지만, 걸치고 있던 옷이 누더기가 되어 찢겨 나가면서도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당여월이 날린 검을 뽑아내 땅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 크하하하하!...버러지 같은 것들, 이정도는 간지러울 뿐이야!... "

환술이 아니야. 칼을 맞은 상처조차 순식간에 아문다... 이건 인간이 아닌가보군.

번서는 전음으로 재공격을 명령하고, 자신의 도력을 당여월과 국무령의 칼날에 실었다. 

합격이라는 것은 단순히 1 + 1 = 2 의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마음이 맞는 두 고수의 합격은 적어도 4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번서의 노예가 된 이래 끊임없이 서로의 검술을 교환하고 그 장단점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당여월과 국무령의 합격은 4가 아니라 8 이나 12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당여월의 월홍(月紅)의 초식이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으며 다시 날아오는 요력 덩어리를 찢어발긴 다음, 국무령이 거합(巨合) 수법으로 날려보낸 탄검기가 시술사의 몸통을 훝어버리고 지나갔다.

" 크아악!... "

혼신의 내공과 번서의 도력이 담긴 만큼, 이번에는 시술사도 버텨내지 못했다. 허리를 중심으로 상하로 분리된후 그의 몸통은 두걸음 정도 뒤로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상태로도 시술사는 죽지 않았지만,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강시들이 주춤하는 동안 서봉이 달려들어 쇠채찍으로 욱편을 만들어 놓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확실하게 기울었다.

" 오늘의 빚은 잊지 않겠다... 크으으으... "

슈우웅!...

시술사의 상반신만 남은 몸이 굉장한 속도로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경공이라고 보기엔 비정상적일 정도의 속도와 고도였으니 분명히 요술이나 환술의 일종일 것이다. 그러나 번서가 [놓치는건가] 하고 잠깐 실망했을 때,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던 시술사의 몸이 치솟아 올랐을 때 보다 훨씬 더 굉장한 속도로 떨어져 땅바닥에 처박혔다.

콰앙!...

흙먼지가 가라앉은 후, 시술사의 몸은 바위 위에 던져진 개구리처럼 땅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웬 고혹적인 미인이 땅바닥을 향해 처박혀 있는 시술사의 뒤통수를 밟고 서 있었다.

" 어머머... 또 도망치려고? 나쁜 아이군... "

시술사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색국인으로 보였다. 남자들을 내려다 볼 정도로 큰 키, 검은 야행복의 풍성한 기장으로도 숨기기 힘든 늘씬한 체형, 그리고 은발로 착각할 정도로 옅은 금발과 주홍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는 번서의 노예들 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풍겨 오는 분위기가 지금 바닥에 패대기쳐진 시술사와 상당히 비슷했다. 번서는 내심 긴장했지만, 여자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 미안홥니다만... "

" 흠?... "

" 이 살아있기 어색한 멍청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보아하니 이녀석을 이꼴로 만드신 것은 공자님의 일행인것 같은데... "

" 이유에 따라서는... 생각해 보겠소이다. "

" 흐음... 제 일이라서요. 이놈을 잡아가는 것이. 허락하신다면 제 일의 대부분을 해 주신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약간의... 사례도 드릴 수 있어요. "

거기까지 말한 후, 번서를 보는 여자의 시선에 살짝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

" 이런 실례가. 그러고보니 아직 인사도 드리지 못했군요. 제 이름은 가리타(歌璃妥)라고 해요. "

" 소생은 번서라고 하오. 이쪽은 당여월, 국무령, 그리고 서봉이오. "

" 특이한 코 장식을 하셨지만, 아름다우신 분들이군요. 반가워요. "

번서는 약간 놀랐다. 이 여자는 어지간한 고수라도 꿰뚫어 보지 못할 두꺼운 면사 너머로 자신의 노예들이 코에 걸린 코뚜레를 알아 본 것이다.

" 그자를 살려줄 생각이시오? "

" 천만에요, 아니 사실은 이자는 이미 죽었지만, 데려가서 처벌을 받게 만들 거에요. 그다음엔 아마... "

어께를 으쓱해 보인 후, 가리타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보이며 웃었다. 낮설긴 했지만, 무슨 의미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동작이었다.

" 그렇다면 좋소. "

" 감사해요. 어머니께서 몹시 기뻐하실 거에요. 아 그리고 이것... "

가리타는 제멋대로 말라 비틀어진 것 같은 형상의 작은 골패(骨牌)를 번서에게 건네었다. 그것에는 목에 걸 수 있도록 가죽 끈이 꿰어져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 번서는 무언가 강렬한 요력 비슷한 것이 자신을 감싸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 태양으로부터 공자를 보호해 드리긴 어렵겠지만, 다른 재앙들로부터는 공자를 지켜 드릴 거에요. 그럼 이만!... "

슈우웅!...

" 잠깐... 빠르군. "

번서가 무슨 의미인지 되묻기도 전에, 가리타는 시술사의 뒷덜미를 붙잡고 하늘 높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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