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40 (40/41)

 

진서연...

진서연이라는 이름은 낮설지 않았다. 번서는 자신의 배로 돌아가는 내내 그것이 어디서 보았던 이름인가를 기억해 내려 애썼고, 마침내 배에 도착해 진소아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이름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왕이자 무림 사대고수 중 일원인 권황 진천권의 행방불명되었다던 장녀였다.

다른 사대 고수인 검후 궁비월(역시나 행방이 묘연하다)의 제자로 들어갔다지만, 갈천휘와의 전투를 보건데 진서연은 사대 고수 모두에게 사사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환술은 갈천휘의 그것의 정 반대판이었으며, 간간히 검과 함께 강력한 내가 중수법이 포함된 권각술을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각술이라면 그녀의 부친의 특기고, 내가 중수법은 이미 작고한 고인인 역신 홍대곤의 특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그 모든것을 절정에 가까운 솜씨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완전체에 가까운 능력을 바로 눈 앞에서 보았다.

분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그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번서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환술이면 모를까, 무공 실력으로 그녀를 따라잡을 가능성은 몹시 희박할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메꾸어 줄 수 있는 전대의 절정고수인 예하랑을 포함한 노예 군단이 있으며, 당분간은 생각할 시간도 있다. 그리고 예하랑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열세가 곧 패배인 것은 아니다.

갈천휘가 벌어준 시간은 도망치는 시간이 아니라 반격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번서는 맨 먼저 갈천휘가 남긴 유산들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부터 시작했다. 쇠로 된 나막신 바닥에 새겨진 것은 신행법(神行法)이라는 이름의 경공이었다. 보통의 경공은 보다 더 적은 내공으로 보다 더 멀리, 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인 반면, 신행법은 짧은 순간에 최대의 속도와 최대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완전한 전투 경공이었다. 근접거리에서 적의 공세를 무력화시키는 목적으로 만들어 진 그 효과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내공의 소모가 격심해 번서나 예하랑 정도나 되어야 간신히 구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행법에 대한 파악을 마친 후 풀어본 비단 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낡은 책자였다. 번서는 그것이 오래된 악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음, 설마?... "

갈천휘가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남기고 간 것이 바로 옥적(玉笛)이었다. 그리고 황국에서 선비의 교양 중 하나는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다. 번서도 어릴적부터 음악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선실의 보물함에서 옥적을 꺼내온 번서는 악보를 펼치고 처음 나오는 곡을 연주해 보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옥적의 바람구멍 안을 들여다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나무 마개 비슷한 것으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마개 끝에는 실낱같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거기로 아주 미세하지만 바람이 통하고 있었다.

악기라면 오락당이었던 당여월도 일가견이 있다. 번서의 허락을 얻어 옥적을 살피던 그녀는 옥적을 내려놓고 다시 악보를 펼쳤다. 

" 주인님, 이것은 혹시? ... "

"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 "

" 아주 약간은 바람이 통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알맞은 곡을 연주한다면 이 피리의 신비가 풀리지 않을까요? "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기에, 번서는 시험삼아 모든 곡을 차례대로 연주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번서는 그 악보가 그대로 연주할 수도 없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모든 음악에는 격식이 있다. 이를테면 아악(雅樂)과 향악(鄕樂)의 음조의 차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문장도 그러하듯이, 음악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어떤 일관된 주제와 형식을 따르며 반복되는 구간이 반드시 존재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불문율과 같다. 그런데 번서 앞에 놓인 악보는 그것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 암호인 걸까요? "

서봉의 의견에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던 번서는 다시 한번 악보를 찬찬히 훝어 보았다. 그리고 곧 전혀 뜻밖의 부분에서 반복되는 일관성을 발견했다.

" 과연...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서봉. 필요한건 음조가 아니야. 비어 있는 부분이지. "

어떤 형식과 마찬가지로, 연주자를 죽일 의도로 작성된 것이 아닌 이상 악보에는 쉼표가 반드시 있다. 번서는 악보의 음표에서는 규칙성을 찾지 못했지만, 각 장의 쉼표의 배치에서 반복되는 부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책 한권을 통채로 써서 또 다른 하나의 악보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번서가 그 악보대로 연주하자,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음에도 옥적의 속을 채우고 있던 나무 마개가 소리도 없이 뽑혀 나왔다.

피이이~

마개가 빠지자 마자, 피리 특유의 구슬픈 음색이 흘러나왔다. 번서는 빠져나온 나무 마개를 살펴 보았다. 굵은 젓가락을 연상케 하는 그것의 끝은 비틀어 열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것을 열자, 그 안에는 둘둘 말린 동이 한장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기름을 먹인 청단지(淸檀紙)였는데, 금색 글씨가 써져 있었다. 번서는 그 글씨의 재료가 금을 갈아서 만든 가루라고 추측했다.

" 이것도 악보군... "

그것은 다 연주해도 일다경을 채우기도 전에 끝나는 짧은 곡이었다. 하지만 번서는 금으로 써진 곡의 제목을 보고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하황은(河滉恩)!... "

일찌기 황국이 들어서기 전에 풍국(風國)이 있었고, 풍국이 들어서기 전에 하국(河國)이 있었다. 이제와서는 거의 전설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국은 대왕(大王)이 아니라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하황은은 그 하국의 전설적인 궁중 음악이다. 그 연주 한번으로 천후(天候)를 바꾸고, 인간의 감정을 뜻대로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단순한 전설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것이 번서의 손 안에, 그것을 연주하기에 알맞을(지도 모르는) 악기와 함게 들어온 것이다.

무림의 세계에서 음공(音功)은 드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주류인 것도 아니다. 몆가지 강력한 장점과, 또 몆가지 강력한 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당한 전제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한 거의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장점에 대해 논하자면, 음공은 내공의 경지에 따라 다르지만, 한번에 다수를 제압하기에 최적화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소리가 들리는 범위 전체에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나 귀는 달려 있고, 음공은 바로 그 귀를 통해 대상의 정신에 거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주 정순한 내공과 철저한 정신적인 수련이 없이는 저항하기도 쉽지 않다. 광역기로 친다면 상당히 효과가 넘치는 광역기인 셈이다.

그러나 음공은 또한 단점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거의 대부분의 음공의 경우 악기가 필요하다는 점이 첫번째 제약이다. 또한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경우 두 손과(추가로 입도)을 쓸 수 없다. 또한 아주 특별하게 제작된 악기라면 모르지만, 보통의 악기는 무기로 적합한 종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손쉽게 파괴하거나 고장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고도의 집중을 요하기에 사소한 방해 만으로도 금방 효과가 무산된다. 게다가 음공의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효과를 발휘하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비슷한 종류인 사자후는 효과가 즉시적이고 악기가 필요없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본격적인 파괴력으로 따지자면 음공과는 비교가 불가능할정도로 효과가 약한데다 그마저도 시전하기 위해 대단히 고강한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력이 몹시 떨어지는 다수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극히 비효율적이다.

이런 단점이 있는 만큼, (본격적인)음공은 공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불가능에 가깝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 악기를 준비하는 손쉬운 적을 내버려 두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상대와 거리를 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의외로 무림인들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상황에서 자주 대적하는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대한 대비도 많다. 번서는 활과 화살을 쓰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암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유엽비도 같은 것들은 작고, 빠르며,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제작과 보관이 용이한 편이다. 그리고 유엽비도 몆개만 날려도, 음공의 준비는 순식간에 와해된다.

광역기에다 방어도 어렵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명한 단점들 때문에 음공은 주로 수세적인 상황, 그것도 주로 기습 효과를 볼 수 있는 상황에 쓰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함정이다. 전술적인 관점에서 따지자면 번서는 공세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방어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음공을 배워서 써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음공이 전설에나 등장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피~필릴리~피이이~

하황은의 전설은 진짜였다. 그의 손에 들린 옥적의 선율에 따라 구름과 안개가 모였다 흩어지고, 동물을 물론 초목조차 그 선율에 감정을 번농당했다. 번서의 무공 실력은 평범할지 모르나 그의 내공은 이미 당대 최고의 반열에 있었으므로, 영향이 미치는 범위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연습을 위해 틀어박힌 죽림에서 그가 슬픔의 선율을 연주할 때면, 강 건너에서 대기하고 있던 배 안의 노예들까지 지극한 슬픔에 젖곤 했다. 물론 그는 곡의 영향이 미치는 대상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끔 연습을 반복해서 금새 그런 일은 없어졌지만.

마침내 번서가 완전하게 한 곡을 끝마쳤을 때, 그의 곁에 서 있던 예하랑은 엎드려 이마를 땅바닥에 대었다.

" 대공의 완성을 경하드리옵니다. 이제 그 진가 계집아이를... "

번서는 예하랑이 고개를 드는 것을 기다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직은 부족하다.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아. 나는 완전히 준비되기 전까지 진서연과 맞서지 않을 것이다. "

그날 번서의 배는 합포 포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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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진서연이 갈천휘에게 입은 부상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족히 반년은 정양을 요하는 깊은 상처를 입은 채, 그녀는 중주의 모처에 있는 음산한 계곡으로 향했다.

" 돌아오셨습니까. "

문지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곡의 입구에 걸쳐진 현수교 위를 미끄러지듯이 건넌 진서연의 눈 앞에 안개에 싸여 있던 계곡의 본격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장엄한 고대 양식으로 지어진 전각이 즐비한 풍경은 보는이를 위압하는 바가 있었다. 진서연은 그 중간에 지어진 가장 크고 장엄한 전각을 찾아 들어갔다.

높이가 두 척에 이르는 문이 열린 후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 진서연은, 전각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계단을 몆개나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거대한 태사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태사의 앞에는 발이 드리워져서 거기 앉아 잇는 자의 모습은 알 수 없었다.

"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

" 돌아왔느냐. 갈천휘의 일은 처리했겠지? "

" 그렇습니다. "

" 그렇다면 됐다. 다음 임무가 있을 때 까지 편히 쉬거라. "

" 네 아버님. "

진서연이 다시 고개를 공손히 숙인 후 뒷걸음으로 물러서 나가자, 태사의에 앉아 있는 자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황금색의 용포를 걸친 중년의 남자였다. 그 인상은 평범한 편이었지만, 눈꼬리가 사납고 입술이 얇은 모양새가 전형적인 악역이었다. 물론 그는 진서연의 [아버님]인 권황 진천권이 아니었을 뿐더러, 심지어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의 옆에는 푸른 문사의를 걸친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하나 서 있었는데, 그의 눈에는 휜자위가 없었다.

" 크...보면 볼수록 천하절색이야... 하루바삐 저 계집의 도도한 얼굴이 쾌락으로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싶군... "

"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주군... 우리가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저 계집이 필요합니다. 천하를 얻으신 후에 취하셔도 늦지 않을 일입니다. "

" 그래... 그렇겠지. 조금만 더 인내해야겠지... "

" 대신 오늘은 좋은 진상품이 들어왔습니다. "

" 무엇이냐? "

곧이어 그늘 속에서 미끄러지듯이 등불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매끄러운 하얀 비단에 싸인채 반듯이 누워있는 한명의 여자였다. 피부가 건강하게 그슬려 가무잡잡했고, 군살이 거의 붙지 않은 늘씬한 체격을 가진, 전신으로부터 건강미를 풍겨 내는 미인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긴 검은 생머리와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빨은 하얗고 가지런했다. 곱게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는 촛점이 결여되어 있었고, 그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양유견(楊柔絹)이라고 합니다. 경도에서 제법 이름을 알린 여고수로 철엽비화(鐵葉飛花)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요. "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사실 양유견은 경도에 위치한 백무련 산하의 방파인 [청량문(淸良門)]의 소문주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는 비도로도 쓸 수 있는 단도의 이도류. 실력도 발군이라서 백무련의 장래를 떠받칠 후기지수로 여겨지고 있었고, 그 미모로도 당상히 유명했다. 그런 여고수가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의식을 잃은 채 실려온 것이다.

" 흐음...나쁘지 않군. 내 방에 가져다 두도록. 그럼 뒷일를 맏기겠네. "

금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은 천천히 태사의에서 일어났고, 청색 문사의를 입은 중년인 역시 깊숙히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그가 자신의 침실로 향하는 복도로 접어들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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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처인 전각으로 돌아온 진서연은 침실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주르륵...

욕실에 들어서기 위해 옷을 벗자 마자, 마른 피와 끈적해진 피가 엉켜 진득하고 끈적한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진서연은 비로소 발걸음을 휘청거렸다.

[아직... 아직은 안된다....]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은 진서연은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진 욕실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물로 피를 낚아낸 후,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갈천휘의 마지막 일격은 그녀의 왼쪽 늑골 끝에서 허리 어림에 걸쳐 길고 깊숙한 자상을 남기고 있었다. 위치가 조금 더 안좋았거나 그녀의 호체기공이 조금 더 약했다거나, 혹은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어도 내장을 건드리는 치명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명상이 아니다 뿐이지 상처 자체는 충분히 심각했다. 얼마나 심했는지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순수히 내공의 힘만으로 지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서연이 신경을 집중해 운공요상을 시작하자, 그때까지도 피를 흘리고 있던 상처가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서서히 봉합되어 갔다.

압도적인 내공을 집중해 상처를 지져서 맞붙인 것이다. 마침내 봉합이 끝난 상처에는 길고 가는 흔적만이 남았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치료법에, 살이 타는 고통까지도 견디는 실로 무시무시한 정신력이었다.

치료가 끝난 후, 진서연은 비로소 탕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씻기 시작했다. 그 차가운 미모는 김이 오르는 탕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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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포의 중년인이 침실을 나선 후, 침실을 치우러 들어론 시종들을 잠깐이지만 침실어귀에서 멈추어 섰다. 방 안에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고, 피골이 상접한 채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 여자의 시신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백무련의 후기지수 중 하나이던 철엽비화 양유견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매번 보는 광경이었지만, 시종들은 그 참혹한 모습에 결코 적응할 수 없었다. 양유견의 시신을 더러워진 침대보에 싸서 침대에서 끌어내린 다음, 그대로 밖으로 내 보내고 나서야 그들은 평상심을 되찾고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시 진서연 쪽으로 이야기를 돌려 보자면, 목욕에 앞서 겉의 상처를 치료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목욕을 끝내고 갈천휘가 남긴 내상을 치료하느라 운공요상을 하는 그녀의 감각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운공을 중단하고 일어나서 뒤를 보았을 때, 그녀의 방 앞에서 누군가 멈춰 서 있었다.

" 소인 이만승(李慢蠅) 삼가 공녀님을 뵙기를 청하옵니다. "

대답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드러난 것은 아까 금포 중년인 옆에 서 있던 특이한 눈을 가진 문사였다.

" 너무 자주 찾아오는것 아니오, 중수사(中數仕)? "

" 기밀엄수를 위해서는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

손을 흔들어 주변에 단음결계(斷音結界)를 펼친 후, 이만승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진서연이 내 준 자리에 앉았다.

" 천문을 보아 하니... 아직 갈천휘는 죽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

" 아마도... 놈의 제자로 보이는 놈이 방해를 했소. 하지만 마염(魔炎)에 당했으니 놈의 목숨은 시간 문제일 뿐이지. "

이만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 발본색원... 그자의 제자도 찾아서 정리해 주셔야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

" 아버님께서 실망하시겠지. 곧 그렇게 할것이오. "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만승은 품속에서 하나의 목갑을 꺼내었다. 그것을 본 진서연의 시선이 잠깐이지만 욕망으로 번득이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뛰어난 년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 ]

" 이번달 분의 공삼단(空蔘團)입니다. "

그것은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약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은 상당한 중독성을 지닌 미약이었다. 물론 그 미약효과는 특수한 향을 써야만 드러나고, 그런 조건이 성립하기 전에는 그저 (미약한)내공 증진 효과를 가지고 있는 약일 뿐이다. 진서연은 벌써 몆해동안 이 약을 복용해 오고 있었으니, 이제 완전히 중독되어 있을 것이다. 향을 피우기만 하면 제정신을 잃고 음탕한 색녀가 되어 뒹굴 그녀를 상상하며 이만승은 속으로 웃었다.

" 그럼 소인은 이제 가 보겠습니다. "

" 나가 보지는 않겠소. 살펴 가시오."

이만승이 누각에서 나가는 모습을 자신의 침실의 창문 너머로 확인한 후, 진서연은 품에 넣고 있던 공삼단이 든 목갑을 꺼냈다.

" 이따위 것으로 날 지배하려는것은... 한 일억년쯤 이르지. "

진서연의 손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 오르며 순식간에 목갑을 소멸시켜 버렸다. 수법 자체는 삼매진화였지만, 일반적인 삼매진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를 가진 그녀의 그것은 목함을 태우지 않고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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