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38 (38/41)

두시진 동안 간소하게 논 후, 번서는 노예들의 보고를 받았다. 다른 상인들의 이야기도 진효월이 해 준 이야기와 대충 비슷했다. 그들 역시 금여화의 실각을 바라고 있었다.

번서는 이미 만상대인 금탑을 보았다. 올해 예순. 이제 군역에서도 퇴역할 나이이고, 비록 머리를 살짝 염색하고 있기는 했지만 금탑은 강철같은 건강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체구와 기도로 보건데 무공의 경지도 낮지 않을 것이다. 번서는 그가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끄덕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전의 납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금탑은 자식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창조물이나 다름 없는 금탑삼상 보다는 아니었다. 겉으로는 사이좋은 부녀였지만,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마 금여화가 유래없이 열심히 금탑삼상에서 활동하는 이유도 부친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후계자로 인정받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상인회의에서 금여화가 나서게 된다면, 견제를 받을 것은 확실하다. 보통 번서는 자기 휘하에 들어온 노예들의 개인적인 요망을 되도록 들어주기는 하지만, 이번만은 금여화를 물려야 했다.

" 하...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

번서는 금여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독였다.

" 지금만 때가 아니야, 그리고 네 부친은 아직 건재하다. 지금 네가 너무 대놓고 나선다면 네 처지는 물론이고 부친의 입장까지 난처해질 것이야. 그러길 바라느냐? "

금여화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후, 번서를 살짝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러면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

" 당분간은 계속 이대로, 저 상인들이 너를 견제하게끔 두자꾸나. 네 부친의 의향이 어떤 쪽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기 전까지 쓸데없는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 만상대인이 아니더라도 너는 이미 이 금탑삼상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

" ...네 주인님. "

열굴을 쓰다듬어 주자, 금여화는 앓는 소리 비슷한 신음성을 내며 그 손에 얼굴을 부벼 왔다. 아무래도 주인의 의향인 것이다. 애완동물겸 노예일 뿐인 그녀가 그를 거스를수는 없었다. 간단한 번서의 명령 만으로, 그녀의 마음 속에서 평생을 키워 왔던 금탑삼상에 관련된 야망이 눈녹듯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항문을 희롱해 작은 절정을 준 후, 번서는 약간 아쉬워하는 금여화를 자기 방으로 보냈다. 보는 눈이 많은 관계로 이곳에서는 그녀를 마음껏 범해줄수가 없었다. 그는 예하랑은 돌려 보내 재우고, 대신 서봉을 불러와 침실 봉사를 시켰다. 이미 흡족하게 범해진 당여월은 불침번이다. 서봉의 만지는 재미가 있는 유방을 희롱하면서 조금 즐기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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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강탄에서는 닷새를 더 머물렀다. 삼상총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동안 번서는 금탑삼상의 총단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상인들에게는 부를 만들고 지키기 위한 자위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여행 상인이라면 더 그러하다. 금탑삼상은 그런 여행 상인들의 모임으로 출발했고 그렇기에 당연히 자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일전에 본 금여화의 장선의 무장도 비범한 것이었지만, 외강탄의 총단은 거의 작은 독립국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충실한 자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뭍을 가는 수레에도, 물을 가는 수송선에도 무장을 하고 훈련된 위사가 동행하는데, 그 위사들의 훈련과 무공 수위는 백무련 출신인 국무령이나 창천교 출신인 서봉이 봐도 여느 무림 방파와 견주어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외강탄의 방어시설도 황국 최전방 방어선인 자산성의 성벽이 떠오를 정도였다.

도둑에 대한 경계도 철저해서, 아무리 금여화의 손님이라지만 번서가 가볼 수 없는 곳도 많았다. 특히나 금고나 상품이 만재된 창고의 경비는 삼엄하기 그지없어서 국무령조차도 침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둑질의 난이도로 친다면 대왕실 보고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불리운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은 것이다. 그만큼 귀중한 물건도 많고 엄청난 재화가 쌓여 있기에 노리는 자도 많았다. 번서가 머문 닷새 동안에는 별일이 없었지만, 일년에 적어도 여섯 번은 자칭 [대도]들이 보물창고를 노린다고 했다.

마침내 삼상총회가 열렸을 때, 금여화는 번서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때까지의 자신 만만하던 태도를 버리고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이다. 진효월 등 다른 상인들은 놀란 눈치였지만, 그것이 번서의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그가 가진 금여화에 대한 [영향력]은 아직 미미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진 상태에서, 금여화는 새로 개설되게 된 자산성 지부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아 외강탄을 오랫동안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금탑의 배려일 것이다.

다시 화려한 장선으로 이뤄진 금여화 일행이 자산성을 향하는 동안, 번서는 그녀와 헤어져 육로를 통해 경도에 들렀다. 주자영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황국 최고의 도시에 대한 관광도 겸하고 있었다. 그는 예하랑과 진소아, 국무향을 제외한 노예 전원을 데려갔는데, 예하랑을 제외한 나머지 노예들은 한번도 경도를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온갖 진귀한 구경거리들이 가득한 경도의 시장인 중양시(中梁視)에서 장을 보는 동안, 그와 노예들 모두 흡족한 하루를 보내었다. 저녁이 되어 숙소로 잡은 객잔에 도착했을 때는 영서를 받은 주자영이 미리 와서 대기중이었다.

" 찾아계셨사옵니까. "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바닥에 이마를 가져다 대는 주자영의 모습은 번서의 다른 노예들과 별반 다를것이 없었지만, 그녀는 아직 코뚜레를 꿰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풋풋해 보였다.

" 궁에는 뭐라고 둘러 대고 나왔느냐? "

" 아무말도요, 저는 감찰부의 장이기 때문에 행선지를 밝힐 필요가 없사옵니다. "

다른 노예들이 욕실을 쓰는 동안 미리 씻고 기다린 덕분에, 주자영은 잠시 번서를 독점하게 되었다. 나긋나긋한 태도로 침대에 걸터 앉은 번서의 무릎께에 다가와 앉온 그녀는 공손한 태도로 다시 한번 그의 발 끝에 입을 맞추어 복종심을 표시했다. 그리고 미리 보아져 있던 저녁을 겸한 주안상을 가져와 번서의 앞에 차리고 식사 시중을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요리는 호화로웠던데다, 그 뿐 아니라 다른 노예들의 것 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 음... 괜찮군. 네가 준비한 것이냐? "

" 부끄럽게도 저는 요리 솜씨가 부족한지라... 경도 제일의 요릿집에서 시킨 것이옵니다. "

모기소리만한 대답을 하며 부꺼러워 고개를 돌리는 주자영의 허리를 끌어 안아 주면서 번서는 껄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노예였다면 부족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자영은 왕실 가족이니만큼 돈은 돈대로 넘칠만큼 많고, 권위도 있다. 게다가 궁내부 감찰들의 장이니만큼 권력도 남 못지 않다. 보통이라면 배달따위는 하지 않는 경도 제일의 요릿집에서 저녁때에 맞춰 요리를 배달시키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생전 먹어보지 못한 호화로운 요리를 맛보면서, 그는 새삼 그녀가 권력이라는 것을 아는 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자영의 [아첨]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노예들이 목욕을 마치고 줄줄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식사를 하는 동안, 먼저 식사를 마친 번서는 운동을 겸한 저녁 산책을 나가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동행하며 길안내를 하게 되었다. 주인인 그에게 아첨하고 싶은 일념으로 가득한 이 어린 노예는 시내의 명소마다 그를 안내함과 동시에, 그동안 궁 내에서 있었던 일들도 시시콜콜하게 고해 바쳤다.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그에 맞추어 적시에 제공하는 재주는 다른 노예들이 흉내낼 수 없는 영민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특별대우가 있어서는 안된다. 번서는 놀이패가 공연하고 있는 천막극장으로 가기에 앞서, 영서를 날려 객잔에 남아있는 다른 노예들도 불러 들였다. [독점]을 끝낸 것이다. 그녀는 약간 서운한 눈치였지만, 번서가 한번 시선을 맞추어 주자 순순히 시선을 내리 깔았다.

" 주인님, 여기, 굉장한 것이 있어요! "

" 저기 정말 멋져요! "

상설 천막 극장 주변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즐길 꺼리 투성이었는데, 노는 것이라면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던, 그래서 그런 [유치한] 놀이에 심드렁해 하는 당여월과는 달리 국무령과 서봉은 대흥분 상태가 되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다. 특히나 서봉은 단것에 사족을 못쓰는 대식가로써의 본색을 드러냈는데, 구경꺼리를 즐기라고 준 은각들을 모두 간식비로 소모하는 위엄을 과시했다. 그녀들이 함께 온갖 볼거리와 먹거리를 섭렵하고 다니는 동안 당여월은 주자영이 번서를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그녀와 신경전을 벌이며 번서의 한쪽팔을 끌어안아 차지하고 있었다.

" 너는 어울리지 않느냐? "

" 저는 저런 유치한 놀잇거리 따위는 애저녁에 졸업했습니다. 그보다 주인님께 좀 더 붙어있고 싶어요... "

" 저도용... "

이래저래 [흠집]이 있는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당여월은 노예의 처지라 해도 남자인 번서에게 귀여움 받는 것이 지금이 오히려 꿈같은 시간인지라 눈앞의 유치한 놀이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어린아이로 돌아가 열심히 노는 노예들의 모습도 보기 좋고, 그런것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주인인 그의 팔을 끌어안고 옆에 착 붙어있는데만 신경쓰는 노예들도 보기에 흡족하다. 번서는 길쭉한 통나무를 반쪽으로 잘라 쉬라고 만들어 둔 의자에 앉아서 쉬면서, 노예들의 재롱을 즐겼다. 한밤중 까지 신나게 놀던 노예들이 마침내 배를 채우고 흡족하게 즐기고 나서야, 일행은 객잔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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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구문궁(九門宮)이군... "

" 발걸음에 조심하십시오 주인님, 이쪽 통로는 함정이 많습니다. 제가 밟은 자리만 딛고 오시길. "

구문궁은 대왕실 가족들이 거주하는 궁전이며, 대왕이 신하들을 불러모아 조회를 여는 대전은 황국 정치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 이름대로, 내전에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홉 문을 통과해야 하는 거대한 궁전이었다. 대왕실의 가족인 주자영조차 일곱 문 까지밖에 들어가보지 못했을 정도로 엄격하고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곳이기도 해서, 번서는 당장은 들어가 본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권력이 일개인에게 집중된 체제는 필연적으로 부도 그 개인에게 집중되는 효과를 가져 온다. 구문궁의 호사스러움은 재력으로는 황국 제일이라 불리우는 금탑삼상의 본거지인 외강탄을 개집처럼 보이게 만들기에 족한 것이었다. 가장 바깥 문을 통과해 들어간 곳에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온갖 기화요초와 기암괴석이 미학적인 설계에 따라 배치된 그 정원은 단순히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흉내낼 수 있을 법 하지 않은 일종의 [기품]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주자영의 손님이라도 출입이 허용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번서가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문궁에 들어온 이유는, 한번 보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도모할 대왕실의 힘과 권력이 어떠한가를. 그리고 그것은 가장 바깥 구역인 [정원]을 돌아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고 남을 정도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절정고수가 아닌 그의 감각에 잡히는 경비 만으로도 군대 규모였다.

번서가 부리는 노예들을 모두 동원한다 해도, 정면에서 공격한다면 이 정원조차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와 손을 잡고 있는 유준의 무리도 마찬가지다. 비로소 그는 왜 유준이 자신의 무리를 [모기]에 비유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이 모든것을 통제하고 있는 태후 윤씨와 윤숭의 무리를 상대하려면, 그들에게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 죄송합니다. 아무리 제 손님이라고 해도 여기까지인지라... "

" 아니다. 충분하다. "

주자영은 이미 번서의 목적을 듣고 있었다. 태후 윤씨를 포함한 윤씨 일족의 [말살]이라는 그 목적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이긴 했지만, 다름아닌 주인이 하는 일이다. 그녀는 언제라도 그가 명령하면 태후 윤씨의 목을 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태우 휸씨의 목을 따는 것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번서는 그들의 권력을 빼앗고, 인간 세상의 지옥을 맛보게 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윤숭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탐관오리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외척은 발호하기 마련이다. 윤숭을 죽여 본들 다른 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얼굴만 바꾸는 셈이 된다. 그래서는 복수를 실행하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는 황국 자체가 지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정도가 되어야만, 그의 부모를 앗아간 황국에 대한 공평한 복수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니.

상념을 가득 싣고 정원을 한차례 돌아본 후, 그는 다시 주자영의 안내를 받아 구문궁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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