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34 (34/41)

 

주자영이 [발견]된 것은 경도의 북문 인근에서였다. 그녀의 신분을 몰라본 경비들이 한밤중에 성문을 두드린 그녀를 거의 죽일 뻔 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수문장이 그녀가 가진 공무패를 알아보았던 덕에 그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력으로 심강(번서)의 감금에서 탈출했다고 했다. 고달픈 도주 행각으로 인해 상당히 초췌해지기는 했지만, 그녀가 무사히 돌아온 덕분에 태후의 분노도 잦아들었다. 그녀의 순결까지 확인한 태후는 심강(번서)에 대한 공식적인 수색령을 철회했고, 궁내부에도 평화가 돌아온 듯이 보였다. 궁에 돌아와서 사흘을 먹고 씻으며 쉰 다음, 주자영은 궁내부 감찰 장의 직책에 복귀했다.

사경을 헤메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금추춘은 살아 있었다. 황국에서 가장 저명한 의원에 속하는 어의가 쓴 약은 번서가 쓴 독을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의 목숨을 붙여 두고 있었던 것이다. 궁에 돌아온지 나흘 때되던 날의 묘시 무렵, 아침 문안과 식사를 마친 주자영은 금추춘을 병문안 했다. 평소에 교분은 없었지만, 어쨌든 태후와 가까운 사이고 높은 지위에 있는 중시였으므로 그녀가 병문안을 할 명분은 충분했다.

금추춘의 병상을 지키던 다른 내관들을 물리친 후, 주자영은 품 속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냈다. 그것은 번서가 금추춘을 중독시켰을 때 썼던 고였지만, 그때보다 약간 개량되어 있었다. 옥병을 막고 있던 밀랍을 제거하고 그 입구를 피부가 드러난 손등에 가져간 것 만으로, 옥병에서 나온 고는 금추춘의 피부 안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그것까지 확인한 후 옥병을 갈무리한 주자영은 하나의 서찰을 그의 베개 아래에 두고 나서 자리를 떠났다.

금추춘이 서서히 회복증세를 보이는 동안 주자영은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번서의 서찰로 인해 그 소인배는 번서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재확인 당했다. 그리고 이제 번서의 요구도 한층 발전(?)해, 이제 금추춘은 자신이 목록화 해서 번서에게 건네 준 대왕실 보고(寶庫)에 있는 보물들을 하나씩 빼돌려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는 태후에게 헌상된 갖가지 귀한 포목이나 보석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들키면 즉시 목이 달아날 상황이었지만, 이미 번서에게 반항할 경우 야기되는 결과를 뼈저리게 체험한 후다. 금추춘에게 있어 태후는 번서의 필요보다 후순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번서는 빼돌린 보물들을 쌓아 두지 않았다. 번서의 노예 중 서봉은 거래에도 상당한 재주가 있어, 이렇게 빼돌린 물건 중 금은 장식품이나 보석류, 포목 등을 곧잘 돈으로 바꾸어 왔다(장물을 처리하는 느낌이지만, 액수가 큰 만큼 상당한 재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돈으로 그는 자신과 노예들을 위한 소모품들을 사고, 경운경의 광산에도 추가의 투자를 하는 한편, 유준에게도 꾸준히 자금지원을 해 나갔다. 그리고 그의 자금지원을 받은 유준이 상주와 중주의 접경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의적]으로 이름을 높여 가는 동안, 번서는 자산성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아무 목적이 없는 방문은 아니고, 여러가지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번서가 자산성을 다시 찾은 것은 거의 일년만이었다. 마영달이 죽은 후 잠시 혼란에 빠지기도 했던 자산성이었지만, 새로운 마왕으로 부임한 후족방(後足房)은 윤숭의 측근이라는 점은 똑같았지만 전임자이던 마영달과 달리 쓸데없는 낭비를 벌이거나 여염의 여자를 마구 농락하거나 하는 병신짓을 노골적으로 벌이지는 않고 있어서, 분위기는 대체로 평몬했다.

번서의 노예들 대부분(국무령 자매, 예하랑, 서봉, 당여월)이 이 자산성 출신이거나 인근의 대사막 등에 연고지를 가지고 있는지라, 이 오랜만의 복귀는 노예들에게도 감회가 새로운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예하랑은 오색림에 있는 자신의 은둔지에 가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번서는 잠시 자신의 볼일을 미루고 서봉과 예하랑을 동반한 채 오색림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색림은 자산성의 산쪽과 서쪽에 걸쳐 있는 거대한 혼성림(침엽수와 활엽수가 비슷한 비율로 섞인 숲)이다. 서로 다른 계절에 꽃을 피우는 다양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어서 계절마다 그 색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그 안에 다시 이름난 절경만 해도 세군데가 있었다. 호사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승지이지만 또한 인간의 발길이 닿기 힘든 곳도 많아서, 은퇴 후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기에도 적당한 곳이었다. 당장 예하랑이 그랬으니까.

" 아, 모든것이 그대로군요. 먼지가 좀 쌓이긴 했지만... "

예하랑의 은둔지는 낮은 절벽 위에 위치한 평지였는데, 절벽 아래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집 옆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경치도 좋고, 인간 세상과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적당한 은둔지라 볼 수 있었다. 집을 비운지 일년이 넘은 지금이야 먼지와 거미줄과 잡초 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워낙에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해 두었던지라 집안의 기물들은 그런 방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무사했다.

" 아, 여기 있네요. "

예하랑이 꺼낸 것은 하나의 고풍스러운 부조 장식이 달린 목갑이었다. 그것의 안에는 두 자(60cm) 가량의 길이를 가진 권장이 들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원통형에, 양쪽 끝이 은색의 금속으로 마감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윤기가 도는 새카만 색이었다. 그냥 보기에도 비범해 보이는 물건이었는데, 예하랑은 두 손으로 그것을 들어 번서에게 공손히 바쳤다.

" 용인(龍刃)이라고 불리우는 보물입니다. 십대보물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병기로써의 가치는 그에 못지 않은 것이지요. 제가 돌아오고자 했던 것은 이것을 위함이었습니다. "

권장의 몸통에 숨겨져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단추를 누르자 권장의 양쪽으로부터 파란 예기를 발하는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다시 다른 단추를 누르자 권장 부분이 둘로 분리되어, 두자루의 칼이 되었다. 튀어나온 칼날은 검(劍)이 아니라 도(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얇고 완만하게 휘어진 검신의 모양이 번서의 마음에 들었다. 칼날을 다시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손잡이 둘을 맞대어 붙인 다음 비틀어 고정시키면 칼날을 지탱하고 있던 힘이 빠져 칼집 역할을 하는 권장 안으로 숨겨지는 구조였다.

" 오호... 훌륭하군. "

번서는 이미 노예들 중 국무령이나 당여월로부터 검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물론 소위 상승무공의 절기급인 그녀들의 경지에 비한다면 사소한 호신술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2류는 되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이제 그 검법을 써먹을 무기가 생긴 것이다. 칼날의 예기도 국무령이 가지고 있는 보검에 못지 않은 훌륭한 것이었고 그것을 숨겨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기발함이 실로 마음에 흡족했던지라, 번서는 예하랑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의 칭찬에 노예로써의 기쁨을 누린 후, 예하랑은 집안의 기물을 정리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활활 타오르는 예하랑의 집을 뒤로하고 배로 돌아온 번서가 점심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가까운 객잔에 들렀을 때, 상당히 낮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어머 심공자님, 이런데서 다시 뵙게 되니 반갑네요! "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는 금여화의 것이었다.

" 일전에는 그렇게 말없이 훌쩍 떠나셔서 제가 좀 서운했어요. "

"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궁내부 감찰들에게 쫒기고 있었으니까. "

" 궁내부 감찰이라면...그 대왕궁 직속의 여살수들 말인가요? "

금여화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궁내부 감찰에게 찍힌다는 것은 저승사자의 호송 대기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과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궁녀를 지망하는 소녀들 중에서도 무예에 적합한 근골을 가진 아이를 가려내서 어릴적부터 단련시킨다. 10년 이상이 걸리는 그 과정 동안 그 중에서 다시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거쳐 뽑는 것이 궁내부 감찰이었다. 개인으로써도 상당한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언제나 언제나 백수십명 내외의 인원을 유지하는 그 조직의 일사불란한 전술이다.

실제로 번서와 맞닥뜨렸을때도 그가 다른 곳에서 노예들을 불러모아 뒤에서 덮치지 않았다면, 예하랑 혼자서는 결코 수월하게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조직에 속한 감찰들의 일은 궁녀들의 그것에 더해서 대왕실 가족의 신변 경호, 지방관의 비리 수사, 심지어는 왕실이 공개적으로 처단하기 힘든 껄끄러운 자들에 대한 암살까지 다양했다. 황국의 일반인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지만, 대왕실과 여러가지로 금전적인 계약관계에 있는 금탑삼상의 후계자쯤 되면 들어오는 정보도 많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아는만큼 그 무서움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이다.

"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제가 더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이제는 괜찮으신 건가요? "

" 아직은 살아 있잖소. "

번서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금여화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일행과 합석하게 된 금여화는 이런저런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여화가 이번에 맏은 일거리는 다름아닌 소금이었다.

염전을 일굴 수 있는 해안지방이 아니라면 소금이 가치 있는 자원이 되는 것은 시대나 장소를 초월한 만국 공통의 이치다. 황국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 다만 전매품이라고 해도 생산에서 유통까지 모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아니고, 염전의 경영이나 유통을 담당하는 것은 소정의 권리금을 내고 염전의 경영권이나 소금의 유통권을 얻은 개개의 상인들이다. 황국에서 유통되는 소금의 원천은 크게 나누면 두곳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해안선이 복잡하고 백사장이 많은 양주의 염전이 그 첫째고, 그 다음이 상주와 대사막의 경계에 있는 거대한 소금산의 노천 광산으로부터 채굴되는 암염이었다. 양주의 염전에서 나는 소금은 금탑삼상에서 거의 전매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소금산에서 나오는 암염은 자산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금상들이 유통하고 있었다.

이중 암염은 산출량은 염전의 그것에 비해서 적고 양주의 소금에 비해 비쌌다. 보통이라면 보다 싼 양주의 소금이 시장을 독점할수도 있겠지만, 대량운송과 유통을 통해 가격을 낮게 누를 수 있는 금탑삼상이라 해도 한계는 있어서, 해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운송비 때문에 소금 가격이 비싸지는 것은 피할수가 없었다. 반면에 자산성으로부터 채굴되는 소금은 주로 수로를 이용해 유통하고 유통지 자체가 금탑삼상의 그것에 비해서 작기 때문에, 운송비가 적게 드는 장점이 있어 충분히 시장의 일부를 나누고 있었다.

규모가 커지면 필연적으로 독점을 지향하는 상업의 성격상, 이 양주의 소금상인들이 금탑삼상의 공략 목표가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금 소저. 이미 금탑삼상은 중주와 해주, 양주 등지의 상권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시피 하며 거대한 이윤을 내고 있지 않소, 왜 이런 변방의 소금상인들의 영역에까지 손을 대려는 것이오? "

금여화도 번서의 지적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버님 께서는 만족을 모르시는 분이니까요. 그리고 좀 더 변명을 하자면, 금탑삼상은 [품질은 높게, 가격은 낮게]라는 신조 하에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의 세력 확대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이에요. "

확실히 금여화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월영포에 상설시장을 세운 것도 가격을 낮추기 위한 활동의 일환일 것이다. 그녀와 몆마디 더 나눈 번서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헤어졌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다시 올 것이라 기대하기는 힘들고, 번서는 점찍어 두었던 진소아를 망가뜨려진 경험 때문에 이번에는 계획을 미루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금여화가 머무르는 화려한 장선으로 숨어든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배의 구조는 예전에 태워먹었던 그것과 거의 똑같은지라, 번서는 어렵지 않게 금여화의 침실을 찾을 수 있었다. 술법으로 불러들인 짙은 안개를 깔고 배 위로 오른 후, 침실의 창문을 살짝 열고 준비해 온 분말형 마비약을 흘려넣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동안 기다린 다음, 선실 안으로 숨어들었을 때 금여화는 화려한 비단 잠옷 차림인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변고를 알아채고 방을 벗어나려다 실패한 모양새였다.

번서는 금여화를 침대 위로 끌어올린 다음 잠옷을 벗겨서 알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예의 마비침을 머리에 박아 완전히 의식을 제압한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손에 떨어진 그녀의 나체를 찬찬히 살폈다.

이미 일전에도 감상한 적이 있지만, 금여화는 윤기가 도는 건강한 다갈색의 피부를 가진 미인이다. 색국인인 부친의 피를 많이 이어받은 것인지 머리카락도 금속성 광택을 띄는 금발에, 황국인들 사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은회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영양상태는 지극히 양호했고, 몸매도 맵시가 있었다. 그동안 그가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논하자면, 번서의 노예들의 기준으로 치면 작지만 제법 괜찮은 유방을 가지고 있었고, 연보라색을 띄는 유두는 다갈색의 피부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보지의 색은 그보다는 진해 붉은 색에 가까웠고 모양새도 약간 농염한 편이었는데, 이미 남자를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그것이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납치할 생각은 없었다. 금여화의 부친은 불과 14살의 그녀가 납치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인질범들과의 협상을 거부했다. 번서가 생각한 것도 인질이 아니라 대리인이었다. 그녀는 만상대인 금탑의 외동딸이다. 물론 전임자도 금탑의 부친이 아니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금탑삼상의 후계자 지명 제도 자체가 세습제는 아니었지만, 만상대인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부가가치는 대단히 특별하고 유리할 것이다.

번서는 금여화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후 그녀의 유방과 보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흠칫거리는 반응과 함께 반쯤 열려 있던 눈 사이로 드러난 회색의 눈동자가 촉촉히 젖어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해 두었던 암시를 그녀의 귀 속으로 불어넣기 시작했다.

소곤소곤...

번서의 귓속말이 이어지는 동안, 금여화는 몆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

이튿날, 번서는 소금 상인들의 대표격인 강자전(姜自全)의 점포 앞에서 금여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여화가 그와 협상을 벌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미리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야 나타난 금여화는 지난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새로, 번서를 보자 마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번서는 그녀의 일행 자격으로 협상에 참석할 수 있었다.

사실 금탑삼상이 마음먹고 자본을 풀기 시작하면, 위세가 드높다고는 하나 규모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영세한 자산성의 소금상인들은 잠시도 그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쌍방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쓸데없는 낭비를 피하고 합의점을 찾아보고자 모인 것이다.

" 그것은 무리한 요구요! "

"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금탑삼상의 우산 아래 들어오는 것으로 그동안 쓸데없이 중복 지출하고 있던 봉납(세금을 현물로 내는 것)이나 관세의 문제가 일괄적으로 처리되니 오히려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어요. "

이번에도 금여화의 어조는 논리정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이성 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그녀는 합리적인 정신은 충분했지만, 말을 너무 직선적으로 하는 단점은 번서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똑 같이 고쳐지지 않았다. 합의가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하던 상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협상 결렬이었다.

" 이대로는 이야기가 안되겠으니, 후일 다시 내왕해 주시길 바라겠소. "

정중한 축객령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금여화는 한마디 더 해서 만인의 공분을 살 뻔 했으나, 다행히 같은 자리에 번서가 있었다. 그는 금여화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압박감]을 발휘해 그녀의 말실수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게끔 했다. 어제의 암시 덕분이긴 하지만, 번서로서도 금여화의 사정을 돌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협상이 완전히 깨진다면 번서가 그녀를 소유할 가치가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대체 그 사람들은 왜 그리 똥막힌건지... "

" 금 소저, 직언을 하나 해도 되겠소이까? 듣기 싫은 말이 될 수도 있소. "

무슨 말인지 예상한 금여화는 화를 내려다가 번서와 시선을 맞춘 후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다음 협상때는 좀 더 [부드럽게]말하는 방법을 연구해 볼께요. "

" 그 뿐만이 아니오. 금 소저에게는 숨기기 힘든 결점이 하나 더 있소. "

" 뭐죠 그게? "

" 금 소저가 말할 때 취하는 태도요. 단지 단어의 선택 뿐 아니라 소저의 어조, 몸짓, 그리고 시선까지, 모든것이 말을 듣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소. 어렷을 때 부터 다른 사람들을 부리는 데 익숙한 자들이 흔히 가지기 쉬운 본능적인 우월감이 배어 나오는 거지. 그것이 소저가 상대하는 이들로 하여금 반감을 느끼게 만드는 거요. "

" ... "

" 그 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소저는 지금과 같이 계속해서 협상에 실패할 가능성을 늘 떠안고 있게 되는 셈이오. "

반박할 수 없는 번서의 지적에, 금여화는 시시각각 안색을 바꾸면서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지난번의 담판이 잘 되었던 것도 번서가 물밑작업을 해 두었기 때문이고, 그러지 않았을 경우 협상에서 번번히 일이 꼬이곤 했다.

번서로써도 금여화의 태도는 고칠 필요가 있는 요소였다. 번서의 노예들은 지금까지는 한결같이 다 고귀한 태생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인간 사회의 막장에서 구르다 온]당여월 같은 존재도 있었다. 때문에 지금 그의 눈앞에서 투덜거리고 있는 금여화와 같이, 저절로 몸에서 배어나오는 우월감 같은 것은 약에 쓸래도 찾기 힘들었다. 최근에 조교한 주자영도 왕족이니 그런 위압감을 가지고 있지 않냐고 강변할 수 있지만, 일단 그녀는 대왕실에 속한 왕족이긴 해도 엄연히 어릴적부터 집안의 어른(특히나 태후 윤씨)을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 대하고 살았기 때문에, 금여화만큼 제멋대로이지는 않았다. 기품을 가지되 정도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모친과는 태어난 직후에 사별하고, 황국에서 가장 거부의 외동딸로 성장해 오면서 주변에 무서운 것이 없이 살아온 금여화는 소위 그 [콧대]에 제동을 걸어줄 만한 이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보통 부친은 딸에게 무르다). 심한 일도 당하고 몆번이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겨왔어도 자존심만은 꺾이지 않았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복수까지 깔끔하게 해치워 버렸다. 그러니 자신만만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실력에 바탕이 되는 자신감은 추하지 않지만, 너무 지나치면 주변으로부터 반감을 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럼? "

" 이것 역시 기분이 상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자존심을 꺾여 보시겠소? "

번서를 바라보는 금여화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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