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32 (32/41)

한편, 금추춘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었다.

번서가 금추춘을 고에 중독시키고 나서 해약이라고 준 것은 물론 고의 발작을 막는 효과도 있었지만, 또한 독약이기도 했다. 어떤 관계인가 하면, 독약으로 고를 억누르는 동시에 고도 독약의 독성을 누르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금추춘은 대산맥에서 유능한 고독술사 하나를 다시 초빙해 와서 자신의 고를 해독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그동안 복용해 왔던 [해약]의 독성이 드러났다.

처음 이틀은 가벼운 오한과 어지럼증 정도였지만, 사흘째가 되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발열이 심해졌다. 이질이 걸린 것 처럼 피똥을 싸기 시작하면서 어의를 불러 왓을 때 중독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의도 무능한 자는 아닌지라 중독이라는 사실까지는 밝혀 내었지만, 독은 번서 특제의 것이다. 결코 해독할 수 없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금추춘이 태후 윤씨에게 빌어서 보낸 궁내부 감찰들의 소식이 전해졌다. 번서를 죽이기는 커녕 절반 이상이 그자리에서 맞아 죽었고, 생존자 중 절반도 엄중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장의 행방도 묘연했다.

이것은 태후 윤씨에게 이제 금추춘보다 더한 문제가 생겼음을 말하고 있었다.

무림에도 잘 알려져 있는 영웅인 선대왕의 정비는 현재의 태후 윤씨로, 정략결혼이었지만 나름 금슬은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선대왕도 영웅 축에 끼이는 인물이니만큼 여색에 영 소질이 없는건 아니어서 정비 윤씨 말고도 세명의 여인이 더 알려져 있었는데, 첫번째인 하씨는 무림을 주유하던 시절에 만나 혼약한 사이였지만 대왕이 되기 전에 죽었고 두번째 심씨와 세번째 송씨는 모두 후궁이 되었다. 윤씨보다 먼저 선대왕을 알았지만 그녀가 가진 정비로써의 권위를 인정한 이들은 선대왕이 승하한 후 궁을 나와 낙향했다.

윤씨 소생의 적자인 주탱자 외에 심씨와 송씨도 각각 딸 하나씩을 두었는데, 송씨의 딸은 어려서 죽었고 심씨의 소생은 딸이 없는 태후 윤씨가 원했기 떄문에 궁에 남아 지금은 영양군주(英楊君主)로 알려져 있었다. 이름은 주자영(主紫英). 방년 19세였다. 부친을 닮아 무예에 소질이 있는 그녀는 백무련의 여러 인사들과 깊은 교분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고, 윤씨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는 궁내부 감찰의 수장으로 활약 중이었다.

바로 그 주자영이 번서에게 포로로 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윤씨예게 귀여움 받고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궁내부 감찰장으로 윤씨가 요 3년 동안 저지른 모든 더러운 일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금추춘의 중독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윤씨는 급히 심강(번서)를 다시 찾으라는 명을 내렸지만, 그는 금여화에게 개인사정으로 퇴직해야겠다는 서찰을 남기고 월영포를 떠난 상태였다. 소백강은 황국의 주요 수로 중 하나라 오르내리는 배도 적지 않고, 많은 후미진 부분을 포함하고 유유히 흐르는 대하라 배를 띄워버리면 찾기가 지극히 곤란해진다. 윤씨는 역정을 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아무리 황국의 태후라도 불가능한 일을 즉시 가능하게 만들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동안 번서는 포로인 주자영을 조교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번서는 먼저 사흘동안 주자영을 고통 속에 방치했다. 내공을 봉쇄당한데다 뼈가 부러진 고통을 수백배로 증폭당한 그녀는 고통 때문에 사흘동안 단 한잠도 자지 못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종종 환각에까지 시달릴 정도였다. 

또한 식사와 화장실은 악산라가 처리해 주었는데, 원래 귀한 집안의 영애들은 자신의 신변 관리를 하녀들에게 맏기므로 그것 자체가 그녀에게 큰 수치를 주지는 않았다. 다만 정말로 자영이 수치스러움을 느꼈던 것은, 이틀째 되는 날 부터 그녀의 식사와 배변 시간 마다 나타나서 감상(?)을 하는 남자, 즉 번서의 존재였다. 더더군다나 주자영을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태도였다. 포로를 잡았으면 정보를 캐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인데도, 그는 이틀동안 그저 관찰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성적인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주자영은 자신의 용모에 자신이 있던 여자이니만큼 이것은 상당한 굴욕이기도 했다.

재갈이 물려져 있었으므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점점 강해지는 육체적인 고통과 수치, 그리고 심적인 압박감에 짓눌린 주자영은 점점 뭐가 뭔지 제대로 판단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 갔다.

물론 번서가 그동안 주자영의 여자답지 못한 수치만 감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래의 일을 모색하기 위한 궁리를 하느라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금탑삼상에서 한자리 하는 일은 궁내부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금추춘을 매개로 한 대왕실 내부로의 연줄 확보도 당분간은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심강이라는 위장신분도 그다지 쓸모가 없어졌다. 일이 돌아가는 모양새로 보면 어떻게든 대왕실 내부로 침입해 복수를 꾀한다는 작전은 원점으로 되돌아 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왕실 외부의 누군가와 손잡고 바끝에서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떤가. 탐관오리가 날뛰고 몆년간 흉작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윤씨의 천하는 아직 굳건하기 그지없었다. 내부의 반란도 외적의 침입도 없었다. 누군가 윤씨에 대항한 의병이라도 일으킨다면 좋겠지만, 윤숭의 솜씨(상소 한장 만으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로 볼때 그런 경지까지 가려면 아직도 수년은 더 기다려야 할것이다.

결국 번서가 선택할 길은 많지 않았다. 그는 일단 상주의 합포로 돌아가서 상황을 관조하면서 앞으로 어찌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 어서 오세요 상공! "

자신을 환영해 마지않는 경운경과 손을 맞잡고 그동안의 회포를 풀면서 당분간 머무를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자, 그녀의 안색은 더없이 밝아졌다. 물론 일행이 머무르는 것은 포구에 정박한 배에서였지만, 읍내의 저택에서 포구까지는 기껏해야 반시진도 걸리지 않는다. 번서를 존경해 마지않는 경운경이 반색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번서는 광산을 돌아보았다. 그가 경운경에게 광산을 맡기고 떠났을 때 보다 훨씬 사정이 나아져 있었다. 경운경이 고용한 전문 광부들만 열두명이었고, 약수골의 장정들까지 합치면 스물 두명을 부리고 있었다. 혈석 산출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경운경의 깔끔한 일처리 덕에 평판이 올라서 매입자도 많아졌다.

이런 보고서를 훝어보며 번서는 경운경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겨우 3개월 정도였지만, 그녀는 관록이 붙은 경영자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가 신경쓸 것도 없을 정도로 혈석 광산의 경영은 순조로웠다. 원래부터 이런 방면에 재능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광산 경영으로 얻은 소득은 약수골에 나눠주기로 한 돈과 광부들의 임금을 제하고도 금편 한 상자 30개에 달하고 있었다. 단기간에 이만큼이나 고수익을 올린 것은 물론 죽인 밀채꾼들이 남긴 것들을 처분한 탓도 있었지만, 판로를 다각화한 경운경의 공로라고 봐야 할것이다.

" 이것은 경 소저의 몫이오. "

번서는 금편 15개를 경운경 앞으로 내밀었다.

" 이런 엄청난 금액은 받을 수 없어요! "

" 아니 실질적으로 광산을 발전시킨건 경 소저의 재주니만큼, 자격은 충분하오. 또한 앞으로도 쭉 잘 해 달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

경운경은 마침내 수긍했다. 아직은 소녀라고 불러도 좋을 나이다. 하고싶은 일도 사고싶은 것도 많을 것이다. 같은 원한을 공유한 사이였던 다른 여인이던 진소아가 그지경으로 망가졌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번서는 그녀가 부자유스럽지 않게, 그리고 위험에서 멀리 떨어진 생을 살도록 해 주고 싶었다.

광산을 돌아보고 수익을 나눈 후 번서는 배로 돌아왔다. 저녁식사에는 경운경도 참석했기 때문에, 국무령과 진소아는 잠재워서 배 바닥에 숨겨두었다. 식사 도중에 인근에서 돌아 다니는 소문들로 화제가 옮겨졌을 때, 번서는 솔깃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유준(柳俊)이라는 자가 이끄는 몽룡당(夢龍黨)이 최근 이 근처에서 출몰하고 있어요. 일종의 비적 겸 수적인데, 부자들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어서 인기가 높아요. "

실제로 최근 몆년 동안 하층민들은 높은 세금과 흉작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기에, 땅을 버린 유랑민들이 비적이나 수적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무기라고 해 봐야 조잡한 농기구가 보통인데다 대부분 조직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관부의 조직적인 토벌이 시작되면 여지없이 격파되어 붙잡히던가 뿔뿔이 흩어지던가 하는 것이 보통이다. 헌데 경운경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 유준이라는 자가 이끄는 집단은 제법 어엿한 조직을 갖추고 있고, 대의를 표방하는데다, 관부의 추격을 떨굴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꾸미던 일이 백지화되어 몆걸음이나 뒷걸음질 친 셈이 되는 번서에게는 나쁘지 않은 조력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유준의 무리와 접촉해 보기로 했다.

수적을 불러내는 일이야 어렵지 않다. 털기 좋은 먹잇감으로 가장하기만 하면 되니까. 번서는 부유한 상인으로 가장해 일부러 기루에서 돈을 좀 뿌린 후, 자신의 배를 타고 항구에서 나와 하류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일행이라고는 평범해 보이는(?) 여자들 몆명 뿐. 도적질도 정보가 있어야 해 먹을 수 있는 만큼, 기루나 시진에 유준의 눈이 있다면 반드시 번서를 노릴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하안의 으슥한 갈대숲으로부터 거룻배 몆척이 접근해 왔다. 자기들 딴에는 신경써서 위장한다고 배에 검은 칠까지 하고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지만,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도 대낮같이 보는 번서의 노예들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 올라오도록 둔 다음 한번에 잡거라. "

" 네 주인님. "

솜씨 좋게 갑판을 타고 오른 야행복의 무리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하얗고 붉은 섬광들이 뱃전을 어지럽게 날았다. 하얀 섬광은 국무령이고, 붉은 섬광은 당여월이다. 참고로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서봉은 번서 옆에 있었고, 예하랑은 선실에서 꿀잠을 자는 중이었다.

" 어이쿠!... "

" 으억!... "

몆몆은 제법 무공이 강해 보였지만, 번서의 노예들 만큼은 아니었다. 기습의 이점도 있고 해서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 되었다. 저마다 급소를 걷어 채이거나 두들겨진 도적들은 짧은 비명과 함께 모조리 붙잡혔다. 그나마 번서가 [붙잡아라]고 명령을 내렸기 망정이지, 아니였다면 꼼짝없이 일격에 황천행 확정이었을 것이다.

혈도가 제압되고 오랏줄에 꽁꽁 묶인 열명의 도적들이 번서의 앞에 나란히 꿇어앉혀지고, 곧이어 복면이 벗겨졌다. 다들 본래 농부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볕에 그을려 구수한 인상이었지만, 단 한명, 깔끔한 인상에 메기수염을 기른 문사같아 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무공도 제일 나았기에, 번서는 그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자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나도 손님을 받는걸 기꺼워하지 않는 편은 아닌데, 해 떨어진 다음에 배 위로 살금살금 기어오르는 손님들은 어떻게 접대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 "

" ... "

" 그냥 관인들에게 넘겨 드릴까? "

그제사 메기수염의 서생이 입을 열었다.

" 마음대로 하시구려. "

" 도적으로 죽기엔 아까운 나이들이 아닌가? "

" 우리 실력이 모자라 함정을 몰라봤으니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다만 공의 처분에 맏길 뿐. "

" 내 처분에 맏긴다니 생각나는 일이지만, 그대들은 근자에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몽룡당의 인물들이 아니오? "

" 그러하오. "

" 듣자니 빈민을 구휼하는 일에도 힘쓰며 의적을 자칭한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자신의 대의를 포기하는 거요? "

번서의 도발에, 메기수염은 발끈해 소리쳤다.

" 우리는 그런적 없소! "

" 당신들의 의가 그렇게 절실하다면 어떻게든 살아서 그 의를 관철할 생각을 해야지, 어찌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목숨을 남의 처분에 맏기겠다고 말할 수 있소? "

번서의 말에는 반박하기 힘들었기에, 염소수염은 침묵했다. 하지만 번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 당신들의 두령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겨우 이정도라면 실망이구려. "

" 두령님을 욕하다니! "

이번에는 염소수염 뒤에 꿇어앉아 있던 자가 발끈해 일어나려다가 당여월에게 제압당했다. 번서는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화는 이만하면 된 것 같군. 이들은 도적들이니 사사로이 처분해도 누구도 뭐라지 않겠지. 모두 내일 관아에 넘길 것이다. 셋씩 묶어서 선창에 처박고, 저자는 본보기로 삼을 것이니 돚대에 묶어라. "

번서가 말한 선창이란 배의 상갑판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작은 창고로, 평소에는 닺과 돚줄 등 항해에 필요한 도구들을 보관해 두는 것이었다. 그것을 비우고 나서 아홉명을 셋씩 묶어서 선창에 처박고, 메기수염은 돚대에 매달았다. 하지만 그는 당여월에게 귀뜸하여, 메기수염은 일부러 매듭을 약간 허술하게 메어 두도록 했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메기수염은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배도 하안에 정박시켜 둔 상태기 때문에 탈출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놓고 번서는 기다렸던 것이다. 그가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메기수염이 풀려나자 마자 도망가지 않고 선창에 갇힌 다른 동지들을 구출하려 들었다는 점이다. 선창은 열쇠는 걸려 있지 않았지만 그 천정에 무거운 철창이 달려 있다. 시간의 낭비와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동지들까지 모두 구해낸 메기수염이 배를 탈출한 것은 한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 쫒아라, 아무도 상하게 하지는 말고. 들키면 돌아오거라. "

" 네 주인님. "

번서는 국무령에게 그렇게 명령을 주어 메기수염을 따라 보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국무령은 주어진 임무를 잘 해냈다. 다만 몽룡당의 두령인 유준이 거의 매일 근거지를 바꾸는 용의주도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연락을 받고 예하랑을 대동하고 찾아간 교외의 동굴에는 아무도 없었다. 번서가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의아해 하는 동안, 국무령이 흙과 가시덤불 투성이가 되어 나타났다.

" 그들은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영서가 하나 뿐이라 연락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 영서를 하나밖에 주지 않은 내 잘못이니 괜찮다. 그래서 근거지는 어디더냐? "

국무령이 안내한 곳은 합포의 남쪽에 있는 깊은 계곡이었다. 사냥꾼들은 [곰골]이라 불렀는데, 은처에 곰이 자주 출몰하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베어 내고 임시로 숙영지를 만든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 번서는 속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럼 이 유준이라는 자를 만나봐야 겠군. "

번서는 국무령을 돌려 보내고, 예하랑을 대동한 채 산채의 정면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 웬놈이냐? "

" 침입자다! "

경보가 울려퍼지고 도적들이 모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직 모여든 도적들의 무공 실력이 미숙하긴 했지만 훌륭한 조직이었다. 번서는 이런 조직을 만들어 내고 이끄는 자라면 손을 잠음직 하다고 평가했다.

" 내 이름은 번서라 하고, 소문이 자자한 몽룡당의 두령을 만나고자 찾아왔소. "

그때쯤 메기수염이 나타났다. 그는 번서의 얼굴을 알아보자 마자 새파랗게 질릴 수 밖에 없었는데, 그가 어떻데 자신들의 산채를 찾아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 두령님은 너같은 자가 함부로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

" 기껏해야 도적떼의 두령 정도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

" 이놈이! 얘들아, 본때를 보여줘라! "

빳빳한 수염이 텁수룩하니 난 거한이 대도를 들고 있었다. 그의 명령에 도적들이 모두 일사불란하게 번서를 둘러싸고 움직이며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번서는 곧 이것이 일종의 군사용 진형임을 금새 깨달았다. 각각의 도적들과 교환하는 공방은 한두 수에 불과했고, 위태롭다 싶으면 금새 팔팔한 다른 도적이 무기를 꼬나들고 덤볐기 떄문이다.

" 네가 솜씨를 좀 보여야 겠구나. "

그때까지 번서의 귀쯤도 있고 해서 방어만 하고 있던 예하랑의 눈에 광채가 돈다 싶더니,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하늘색의 섬광으로 변해 장내를 휩쓸었다.

" 으억!... "

" 컥!... "

" 허억!... "

예하랑의 손속은 자비롭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늘색의 그림자가 날아드는 곳 마다 도적들이 무슨 추풍낙엽마냥 날려갔다. 비명조차 짧았던 이유는 다들 급소를 얻어맞고 날아가는 동안 기절했기 때문이다. 

" 그만! "

정확히 스물 한명째가 막 땅바닥에 처박혔을 때, 진형의 뒤로부터 상당한 내공을 지닌 일갈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사자후의 일종으로 보였다. 그것으로 예하랑의 공격을 멈출 셈이었던 모양이지만, 슬프게도 예하랑에게는 눈꼽만치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번서에게도 단지 고함소리 정도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도 번서는 손을 들어 예하랑의 공세를 거두었다.

스무명이 넘는 장정을 허공에 띄워 날리며 한바탕 휩쓸었음에도, 번서의 옆에 돌아와 선 예하랑의 숨소리조차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고수인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도적의 무리가 갈라지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차림새는 다른 자들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일단 상당히 준수한 미남이었고 내외공을 고루 단련한 티가 완연했다. 그는 번서에게 포권을 해 보였다.

" 고인을 몰라보고 실례를 저지른 부하들을 용서해 주시기 바라오. "

" 느닷없이 찾아온 결례를 용서해 주신다면... "

마주 포권해 보인 후 번서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심성이 바르고 올곧은 자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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