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28 (28/41)

진소아의 모든것이 예전 그대로였다면 이후로 번서와의 접점은 한도 없이 얇아질 것이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는 않았다.

번사가 상주와 중주의 경계를 오가며 자신의 기반을 확립하는 동안, 진소아는 복수를 끝낸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계획해 온 복수를 끝냈으니 더이상 현상금 벌이의 삶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황국을 뜨고자 했던 것이다.

현상금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위험한 자들을 상대하는 일상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현상금이 걸린 자들을 추적해 잡아 넣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다. 현상금이 붙은 자들에게도 가족과 동지와 친구들은 있기 마련이니까. 때문에 진소아는 곳곳에 적이 많았다.

보통이라면 이 원한을 가진 자들의 존재는 희미하다.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직업의 이점 중 하나는 관인들과 친분이 생긴다는 것이고, 관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지면서까지 복수를 관철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자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관인과 관련이 끊어지면, 그때는 그동안 감히 복수할 마음을 품지 못했던 잔챙이까지도 덤벼들 뿐더러, 어제까지의 친구도 적이 된다.

전마방(戰馬房)이라는 방파는 상주의 관군에 군마를 납품하는 것이 주업인 무리로, 일단은 백무련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정도를 추구한다기 보다는 돈에 움직이는 용병들에 가까웠다. 이 전마방의 현 방주인 [말 파괴자]색두(色頭)는 진소아를 원수로 삼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 방주이자 그의 아버지인 [말 분쇄자] 색동(色銅)이 그녀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색동이 현상범은 아니었다. 그의 죽마고우인 금추춘(金醜椿)이라는 2류 사기꾼이 현상범이었을 뿐. 진소아에게 쫒기던 금추춘이 색동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실을 밝혀낸 진소아를 막으려다가 그녀의 총에 맞았던 것이다. 색동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좋지 않은 곳에 총탄을 맞은 금추춘은 관아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금추춘이 궁내부의 내관이 되면서부터였다. 본래라면 유배행일 것이지만, 어쩌다 보니 거세를 당한 셈인 금추춘은 유배지에서의 노역 보다는 평생 내관으로 일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타고난 입담과 간사함에 힘입어, 그는 3년도 되지 않아 궁외부 말단직에서 궁내부의 중시(궁녀 중의 상궁과 비슷한 직위)에 올랐다. 그리고 태후 윤씨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부와 권세를 손에 쥔 금추춘이 자신을 거세시킨 진소아를 향한 복수를 시작할 마음을 품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 금추춘은 자신을 도와주려다 죽은 친구의 아들인 [말 파괴자] 색두와 손을 잡았다. 색두가 전마방의 졸개들을 풀어서 진소아를 쫒는 동안, 금추춘이 고용한 청부업자가 진소아를 [처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 청부업자의 이름은 이름은 패산(覇山)이라고 했는데, 황국인이 아니라 그 이름을 표기할 때 음차를 한 것에 불과했고, 실제 이름은 좀 더 길었다. 그는 딸인 악산라(珞珊羅)를 데리고 전마방 무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진소아가 자신이 쫒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시점은 그동안 모아 둔 자금을 정리하려고 경도에 있는 금탑삼상의 환전장에 들렸을 때 였다. 금자루를 들고 여행을 하는건 힘들 뿐더러, 쓸데없는 이목을 끌 수가 있다. 하여 숨기기 쉽고 운반하기 편한 전표와 보석류로 바꿀 생각이었던 것이다.

진소아도 10여년간을 현상금 벌이로 무림의 바닥에서 구르면서 살아남은 노련한 고수다. 그 경험 덕분에 그녀는 전장에서 보석을 챙겨사 나온 직후에 거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전마방의 무리를 알아볼 수 있았다.

싸움은 짧았다. 확실한 뒷배가 있는 전마방 무리들은 거리 하나를 온통 비운 채로 진소아를 기다렸고, 그녀는 숫적인 열세에 압도당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고 봐도 좋았다. 부상을 당한 채로 경도의 북문을 돌파한 진소아는 보름 동안이나 전마방의 추적을 피해 달아났다.

진소아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언 모든 연줄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고, 심지어 친구로 알고 있었던 자들까지 그녀를 함정에 빠트리려 했다. 그 와중에도 보름이나 도망친 것은 경이로운 재주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있는 한계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고, 그녀는 경도에서 북쪽으로 사십 리 가량 떨어진 한 야트막한 산기슭에서 전마방의 무리들에게 따라잡혀 포위당했다.

번서가 진소아의 소식을 들었을 무렵, 그녀는 전국적으로 지명수배 되어 있었다. 관인을 살해한 범인으로 현상금이 걸린 것이다. 번서가 아는 한 그녀가 멀쩡한 관인을 살해했을 리는 없기에, 번서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를 시도했고, 곧 그녀가 [살해 했다]고 알려진 관인은 청렴한 것으로 평판이 높은 인물임을 알 수 잇었다. 그것은 문제의 해답을 주기는 커녕 의문만 증폭시켰기에, 번서는 가외의 돈과 시간을 더 들여서 수소문을 했다. 그리고 그 수소문의 끝에서 진소아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금추춘은 진소아에게 복수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생각한 복수는 조금 복잡한 것이었다. 그는 진소아의 명예를 빼앗고,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선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복수의 일차로, 그는 진소아를 조종할 수 있는 실력자를 찾아냈던 것이다.

[고(蠱)]라는 것은  원래는 대산맥에 거주하는 군소 부족의 주술사들로부터 온것이다. 그것은 원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의술의 일종으로, 대산맥의 저지대에 걸쳐 존재하는 거대한 밀림에서 채집한 독을 품은 기생충을 인체에 감염시키는 것이다. 감염시킨 [고]는 그 종류에 따라 즉시 발동하거나, 혹은 특정한 조건(특정한 소리, 진동, 혹은 시간의 흐름 등등)에 따라 발동하거나 한다. 그리고 독술도 원래는 의술로부터 왔듯이, [고]역시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된지 오래다.

전마방의 무리와 함게 한 청부업자, 패산은 바로 이 고독술사였다. 전마방의 포로가 된 진소아가 윤간당하고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은 후, 그 무리로부터 그녀를 넘겨 받은 패산은 진소아에게 고독을 사용했다. 처음 며칠간은 그녀도 의연하게 버텼지만, 그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신경을 좀먹어 들어가는 고독이 그녀를 굴복시키는데는 며칠로 충분했다.

이후 진소아는 금추춘의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도구로써의 첫 임무가 태후 윤씨의 신경을 거스른 관인을 암살하는 임무였다. 그 일로 인해 황국 전역에서 수배령이 내린 것이다. 번서가 그녀에 대해 본격적인 탐문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이무렵이었다.

번서는 돈을 쓸 줄 안다. 게다가 금탑삼상의 정보망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는 처지다. 상황의 부자연스러운 점을 깨닫고 그녀의 소재를 파악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패산도 진소아를 탐문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번서가 진소아의 숨겨진 지인이라 짐작하고, 그녀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그를 향해 함정을 팠다. 일부러 흔적을 남기며, 월영포구의 건너편에 있는 나루터의 객잔 하나를 통채로 함정으로 꾸민 것이다 전마방의 무리들과 함께 기다린지 사흘도 되지 않아서 번서가 나타났다. 막 해가 넘어가고 달이 환한 보름의 밤이었다.

패산의 오산이라면, 번서를 너무 쉽게 봤다는 것이다. 임독이맥이 뚫린데다 채화술로 인해 나이에 걸맞지 않는 고강한 공력을 갖게 된 번서는 전투가 예상될 경우에는 항시 호체기공이 발동된 상태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객잔 주변에 풀어 놓은 고독은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때문에 번서는 상대가 고독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노예들에게 전음으로 대비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은 드러내놓고 나타났지만, 그의 노예들은 숨겨진 채로였다. 패산은 일부러 진소아의 흔적을 흘려 그를 함정으로 유인했다고 생각했지만, 함정에 빠진 것은 그쪽이 된 셈이었다.

[주인님, 지붕에 넷, 마루에 둘, 주방이 요리사와 점소이도 모두 무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뒤편의 대나무 숲에도 매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녀석이 눈치 못 채게 처리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여 당여월과 예하랑에게 신호를 준 다음, 번서는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1층은 깨끗하게 비워진 채,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통해 일남일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진소아였다.

" 아...시...심...공자... "

마치 실로 조종되는 인형처럼, 진소아의 움직임은 어색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은 참혹할 정도로 변해 있어서 보는 번서가 다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전마방의 무리들에게 붙잡혔을 때 부터 입고 있던 진소아의 때묻고 찢어진 옷은 그녀의 몸을 거의 드러내놓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가해진 폭행과 강간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고 있었다. 얼굴을 비롯한 전신은 쫒길 당시부터 전혀 씻지를 못해 더러웠고, 보기 좋은 금발이던 머리카락은 썩은 해초같은 빚깔을 띈 채 땟국물이 말라붙어 있는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흐릿한 푸른색의 시선, 번서를 알아보는 진소아의 눈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미안... 죽... 여... 주... 아으으으... "

진소아의 손에 들려 있던 단총이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보며, 번서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이국적인 군청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중년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고독술사 패산이었다.

" 그래, 진짜는 그쪽이었군. "

" 흐흐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네가 어떻게 고독에 걸리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이걸로 끝이다. "

" ...죽이지는 마라. "

번서의 명령이 떨어진 직후, 객잔의 벽과 천정의 어둠 속에서 하얀색과 보라색 섬광이 번쩍이며 그들을 덮쳤다. 패산을 덮친 보라색의 섬광은 서봉이었고, 진소아를 덮친 하얀색의 섬광은 국무령이엇다. 그녀들은 이미 호체기공을 끌어올려 고독에 대비하고 있었다.

퍼버벅!...

섬광과 함게 마루에는 네자루의 단검이 박혔다. 그것만은 번서의 솜씨였다. 모두가 정확하게 매복해 있던 전마방의 무리의 얼굴을 꿰뚫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퍼억!...

" 끄아아악!... 우아아아악!... "

칼등으로 혈도를 얻어맞은 진소아가 흙바닥 위에 쓰러지는 동안, 서봉의 쇠채찍에 얻어맞은 패산은 늑골과 사지의 뼈가 유리조각처럼 부서진 채 마룻바닥에 처박혔다.

" 아으으으으!... 아으악!... 컥!... "

번서가 쓰러진 진소아의 몸에 붙어 있던 고독을 내공으로 몰아내는 동안, 비명을 지르다가 서봉의 손에 턱 관절이 뽑힌 패산은 쇠사슬에 묶였다. 그리고 객잔의 입구로 붉은 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는 당여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 바깥의 정리가 끝났습니다. "

밤에다, 기습의 이점도 있고, 게다가 당여월의 실력이다. 방주인 색두를 포함한 전마방의 무리 서른 두명은 그녀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피를 흘리며 기절한 채 그녀의 손에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오고 있는 색두를 제외한 전원은 일검에 목숨을 잃었다. 진소아의 응급처치를 끝낸 번서가 패산 앞으로 다가갔을 때, 그는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번서가 턱짓으로 서봉을 부려 다시 턱 관절을 끼워맞춰 주자 그의 웃음은 더욱 커졌다.

" 뭐가 그리 즐겁지? "

" 호체기공을 풀었어... 흐흐흐흐... 고독을 쓸 수 있는 자가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나보군? "

번서는 마주 웃어 보여 주었다.

" 사실 나도 일에는 만전을 기하는 편이라서 말이지... 숨어있는 놈부터 먼저 찾게 되더라구. "

하늘색 옷을 입은 예하랑이 마침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의 옆구리에는 기절한 악산라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패산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 저걸 기다리고 있었나보지?... "

번서는 붙임성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예하랑이 내공을 써서 진소아의 혈도에 침투한 고독들을 태워버리는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번서는 그자리에서 패산을 심문했다. 먼저 그의 척추에 있는 신경에 침을 꽂아 고통을 멎게 해준 후, 다시 철침 하나를 들고 빙긋이 웃었다.

" 의술을 알고 있으니 복잡한 설명은 할 필요가 없겠지? "

직후에, 번서의 철침이 패산의 머리에 꽂혔다.

" 무...무슨 짓을 하려고... "

" 아, 별거 아니랴 네 통각을 한 이만배쯤... 올렸을 뿐. 이제 이 침을 빼면... "

" 아... 그, 그만, 안돼!... "

" 왜 안돼지? 네가 진소아에게 베푼 고독도 비슷한 종류로 보이는데 말이야. 그리고 그거 아나? 고문을 하려면, 일단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이건 네게 좋은 공부가 될거야. "

미리 번서가 전음으로 귀뜸을 했기에, 노예들 전원은 내공을 끌어올려 귀를 보호하고 있었다. 객잔의 건물 안에서 지른 패산의 비명소리가 강을 넘어 거의 5리 밖에 있는 월영포의 부두까지 들렸던 상황은 필설로 표현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번서의 침술은 농담이 아니었고,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단 한번 목에 찔려 있던 침을 뽑았을 뿐인데, 다시 침을 원위치 시켰을 때 패산은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패산이 진소아에게 베푼 독술과 해독 방법이 없다는 사실, 악산라와의 관계, 그를 고용한 금추춘의 신분과 그와의 접선 방법까지 술술 부는 동안, 비명소리에 깨어난 악산라와 색두는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이 진소아에게 저지른 일이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되돌아 오게 될지도.

고통에는 면역성이 있다. 때문에 자백을 받는 방법으로써 고통에 호소하는 고문은, 의외로 설득보다 덜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고통에서 면역성을 제거한다면, 고문은 더없이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뇌에 직접 작용하는 번서의 침술은 고통에서 면역성을 제거했고, 면역성이 사라진 고통은 진소아에게 저지른 짓거리에 대한 [처벌]을 하는데도 탁월했다. 다시 고통에 노출 시킨지 반각(5분 쯤)도 지나지 않아서, 패산은 고통으로 미쳐 버렸다.

쓸모 없어진 그를 내버려 둔 채 객잔에 불을 지르고 나온 번서는 일단 포로들과 진소아를 데리고 자신의 거처인 배로 돌아갔다. 악산라를 감금하고 진소아를 선실에 재운 후, 그는 색두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상갑판으로 되돌아 갔다.

" 이놈 보게, 오줌을 쌌군. "

아직도 당여월의 손에 붙들려 제압당해 있는 색두는 이미 번서가 자신의 수하들을 모두 도륙하고 패산을 고문으로 미쳐버리게 만들고는 그를 산채로 불태우는 과정을 보고 있었다. 공포에 질리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는 색두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번서는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 안심해, 난 널 죽이지 않을거야. "

" 살...살려 주시는 겁니까?... "

" 네가 필요하거든. "

번서는 두자루의 침을 꺼내서 색두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것이 패산에게 어떤 효과를 발휘했는지를 직접 목도한 색두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 제발, 제발 무엇이든 할테니 그것만은... "

" 알아, 알아... 나도 패산과 너를 똑같이 다룰 생각이 없어. 네가 이런 곳에서 비명을 지르면 몹시 시끄럽게 될테니까 말이지... 게다가 여긴 내 집이라고. 소란은 곤란하지. 단지... 이건 일종의 보험이라고 해 두지. "

번서는 색두의 목과 머리에 차례로 침을 꽂았다.

" 이 침을 제거하면, 보아서 알다시피 너는 비명을 지르게 될거야. 하지만 이 침이 여기 이 자리에 꽂혀 있는 한은 괜찮지. "

번서는 침의 끝을 밀어서 완전히 피부 안으로 밀어넣었다.

" 목에 꽂힌 침은 재질이 특별한 것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녹기 시작할 거야. 대략 사흘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녹게 되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숨을 쉬는 것도 몹시, 아주 좁시 고통스러워 지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해. "

" 그러면...침을 제거해 주시는 겁니까?... "

" 당분간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해 줄 지도 모르지. "

번서의 [부탁]이란, 금추춘을 꾀어 내라는 것이었다. 번서가 원하는 일시에. 기한은 사흘이다. 월영포에서 경도까지는 전마방의 준마를 타고 최단 거리를 선택한다 해도 사흘 밤낮을 전속력으로 내달려야 한다. 전서구를 보내면 좀 더 빠를 것이다. 딴 꿍꿍이를 품을 수 없게끔 시간을 촉박하게 만든 연후에, 번서는 예하랑은 비밀리에, 당여월은 공개적으로 색두와 동행시켰다.

" 왜 저런 자를 살려 두시는 것인지요? "

불알에서 요령소리가 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색두의 뒷모습을 보던 서봉의 질문에, 번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보다 더 큰 고기를 잡기 위한 미끼로 쓸 수 있다면, 작은 고기를 풀어줘야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저런 놈의 목숨이란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지. 하지만 금추춘은 궁내부의 내시인 만큼, 꾀어낼 기회가 많치 않아. 그나저나 서봉... 너는 참으로 궁금한게 많구나. "

" 여자의... 천성이라고 할까요. 아응... "

" 뭐 그것도 좋겠지. 이렇게 가르쳐 줬는데도 나중에 멍청하게 군다면, 용서치 않겠다. "

" 네, 네에... 주인님. "

옷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 그 풍만한 유방을 주물러 준 다음, 번서는 부럽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국무령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넣고는 그녀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대고 거기서 풍겨나오는 체향을 즐겼다.

" 아으응... "

" 아직은 즐길 때가 아니야. 이제 우리의 포로를 보러 가 볼까? "

" 네 주인님. "

불침번을 서도록 국무령을 남긴 후, 서봉을 동행한 번서는 감금실이 있는 배의 하갑판으로 내려갔다.

번서가 말한 그 [포로]인 악산라는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녀의 사연은 조금 기구했다. 완전한 색국인인 그녀는 패산과는 친부녀지간이 아니었다. 고독을 연구하던 도중에 생긴 사고로 인해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던(아이를 만들 수 없는) 패산이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였던 그녀를 제자 겸 딸 삼아 기르기 위해 납치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기술이 끊어지지 않게끔 하려는 목적에서였지만, 아이란 기르다 보면 정이 드는 법이다. 16년이나 키운 악산라는 패산에게는 친딸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는 재능도 있어서, 그의 기술을 거의 모두 이어받고 있었다.

하지만 생애 처음의 패배를 당한 직후, 진짜 부친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언 패산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납치된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악산라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번서가 패산를 비명 끝에 미치게 만들고, 산채로 불에 태워저리는 것을 본 후다. 그 압도적이면서 일말의 용서도 없는 잔혹함은 생전의 패산의 손속 정도는 어린애 장난이라 여겨지게 만들기에 족했고, 그 패산에게 배운 악산라 역시 냉혹한 암살자로 자랐지만, 번서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잔인한 자들일수록 자신보다 더 잔인한 자를 만나면 쫄게 마련이고, 그점은 악산라도 마찬가지라 번서가 하갑판 문을 열고 내려오는 모습을 본 직후에 창살 감옥의 구석으로 도망쳤다. 부질없는 시도였지만,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번서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했다.

" 귀엽군. "

번서는 코웃음을 치면서 감옥 안으로 들어가 악산라를 상대했다. 이미 감금할 때 부터 알몸으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고독 같은 것을 숨겨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다), 사지를 펼친 자세로 창살에 매달아 놓고 나니 색국인 여자 특유의 압도적인 나체가 속속들이 드러났다.

" 이 악마!, 악당!, 귀신!... "

" 난 아직까지 살아 있는 자라고, 귀신이라니 참으로 적절치 못한 비유로군. "

악산라가 뱉은 침을 피한 다음, 번서는 그녀의 버릇없음을 벌해 주기 위해 무릎에 침을 찔러 넣었다. 뼈를 뚫고 신경이 모인 장소를 직접적으로 찌른 것이다.

" 끄아아악!... "

악산라는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번서의 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무릎으로 옮겨 가 있었다. 긴 비명을 한번 더 지른 후, 부들거리며 떨고 있는 악산라의 하얀 나체 위로는 송글거리는 땀이 맺혀 있었다. 고통을 견뎌내느라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 뭐 이대로 감각을 좀 더 올려 줄까 싶기도 하고... "

" 하지마!... 하지마!...  "

비명을 지르는 것과 비슷한 고음의 서툰 황국어가 튀어나왔다. 이미 패산의 지리멸렬한 꼴을 본 후다. 번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예고는 실행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공포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 네 사정은 딱하다만, 너도 진소아를 저꼴로 만든 녀석들과 한패니까 말이야... 나는 알고 그랬던 모르고 그랬던 간에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의거든. 내 말 이해하겠나? "

" 으... 응. "

" 그래서, 너도 그녀를 저 꼴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지. "

" 하지만 아빠는 내 아빠가 아니었어. "

" 그래, 그것 떄문에 네 처지가 딱하다는 거지. "

번서는 정말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겁에 질려 있는 악산라의 머리에 침을 꽂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촛점이 사라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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