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하랑의 주 무공은 암영각(巖影脚)이라는 발기술이 주가 된 권각술에 단검을 보조로 쓰는 투로법이었는데, 그녀는 살생을 피하고자 단검 대신 부채를 사용했다. 이 부채도 은으로 짠 살 위에 붉은색의 천잠사로 짠 비단을 이중으로 붙여 만든 것이라 대단히 귀중한 물품이라는 사실을 한번에 알 수 있었는데, 다름아닌 황국의 십대보물 중의 하나인 풍진(風鎭)이라 했다. 예하랑이 백무련을 만드는 등 무림을 주유하던 시절에 얻은 물건이었다.
이 풍진의 의 한쪽 면은 백년전 황국 제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던 이두(李杜)가 쓴 유오색가(留五色歌)라는 시가 금 글씨로 새겨져 있었고, 반대편에는 이두와 동시대 인물이자 그의 친우로 황국 제일의 화가라 일컬어지는 백보(白甫)의 몽오색도(夢五色圖)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재질도 재질이지만 이런 거장들의 작품까지 함께 붙어있는 탓에 그 가치로 따지자면 성 하나를 줘도 부족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번서는 전문적인 평론가는 아니었으나 문장과 그림이 모두 걸작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욕심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억지로라도 빼앗고자 할만한 보물이었지만(그리고 예하랑은 이제 번서의 노예가 되었으니 달라면 기꺼이 바쳤을 터이지만), 번서는 예하랑이 노예가 된 기념이라며 그 부채를 그녀가 그대로 지닐 수 있도록 돌려주었다. 이에 예하랑은 지극히 감격했는데, 다른 노예들의 물건도 그것이 금붙이라면 빼앗아서 돈과 장신구로 바꾸었지만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물건들에 대해서는 보유를 인정하고 있었으니 번서의 입장에서는 그저 하던대로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 그림으로만 봐도 절경이군. 언젠가 오색림의 경치를 즐기러 가고 싶구나. "
" 주인님께서 오색림으로 가신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품안에서 아양을 떠는 진인의 엉덩이와 가슴을 주무르며 조금 가볍게 즐긴 다음, 번서는 갑판으로 나갔다. 마침 바람의 방향이 바뀐 탓에 서봉과 당여월이 돚의 방향을 바꾸는 작업 중이었고, 국무령은 키를 잡고 있었다. 그녀 옆에서 의젓하게 개꼬리(항문 마개에 꼬리 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으로, 국무향 전용의 항문 마개다)를 달고 엎드려 있는 국무향은 번서를 보자마자 잽싸게 기어와서 그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 아앙... 응... "
" 그래그래, 착하구나. "
" 냥!... "
번서는 국무령과 예하랑을 교대시키고, 국무령 자매를 데리고 선실로 내려가서 그녀들을 재웠다. 이제 노예가 다섯, 그중에 넷을 교대로 돌릴 수 있게 되었기에, 노예의 교대 일정을 짜면서도 틈틈히 좀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깨어있는 노예가 둘, 준비하는 노예가 하나, 그리고 자는 노예가 하나. 이런 식으로 네시진(8시간)씩 돌아가며 번을 세웠던 것이다.
당초에는 뱃일이라고는 전혀 경험이 없던 예하랑도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이런 식으로 번을 서며 다른 노예들과 어울리면서 빠르게 키를 잡는 법이나 돚줄을 다루는 법을 익혔고, 금새 제대로 된 하나의 노예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강의 하류로 내려가는 길이다 보니 배의 속도를 어떻게 빠르게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배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느냐(안전 때문에)가 문제가 되어, 번서는 해가 지면 강변 근처에 닺을 내리고 항해를 쉬도록 했다. 그렇게 쉬엄쉬엄 간 탓도 있어서, 중주의 경계에 해당하는 월영(月影)포에 도달했을 때는 처음 예상을 잡았을 때보다 닷새가 더 지난 칠월 초하루가 되었다.
" ... "
월영포에 도착했을 무렵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배의 이물에 서서 항구를 보고 있자니 일꾼들이 등대 역할을 하기 위해 포구 어귀에 세운 높은 장루에 설치한 기름 등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강 위로 지면서도 아직은 새빨갛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석양을 등진 채, 번서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번서가 국무향을 통해 인간을 제압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어느 정도 마치고 처음 무림에 출도할 생각으로 자산성에 들어왔던 때부터 계산하면 벌써 반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동안 네명의 노예를 추가로 얻었고, 윤숭의 앞잡이라는 마영달과 마봉춘 부자를 죽였으며, 진소아라는 여협과 친분을 쌓고, 경운경이라는 재기 넘치는 협력자도 얻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윤숭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중주의 경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번서의 눈에 이물에 푸른색 비단을 씌운 초롱을 단 거룻배 하나가 이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푸른 초롱은 관원이 타고 있는 배라는 표식이었고, 이 경우 도강사(導江使; 포구 관리인격인 역주 휘하의 항구 길잡이)가 타고 있을 것이다. 작은 포구였던 합포와는 달리 월영포는 제법 큰 읍이고 중주의 경계이다 보니 많은 선박들이 드나드는지라, 드나드는 배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물 사다리를 내려 도강사가 배에 오르는 것을 도운후, 그의 지시에 따라 포구의 구석에 배를 정박시킨 번서는 인심 좋게 도강사의 허리춤에 은각 하나를 찔러넣어 주었다.
" 날도 저물었는데 따뜻하게 데운 술이라도 한잔 하시지요. "
" 인정이 넘치시는 공자시군 그래,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강나루에서 포삼(布三)을 찾으시오. "
"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심해 가시길. "
엄격히 절차를 집행하자면 도강사가 안내한 배가 포구에 닿으면 배의 도착 일시를 기록한 후에 승객과 적하를 검사하고 문서로 만들어 남겨야 한다. 하지만 황국 전체에 부정이 만연해 있다 보니 인정(人情; 뇌물)이 쉽게 먹혔다. 번서가 서류의 공란을 채우는 동안(물론 번서는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기다려 준 다음, 도강사는 배다리를 건너 자신의 사무처로 되돌아 갔다.
이미 해가 저물었기에 읍내에 나가는 것은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침실로 돌아간 번서는 그날의 불침번인 당여월을 갑판으로 올려보내고 예하랑과 서봉을 데리고 즐기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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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선실을 나와 갑판에 오른 번서를 기다리던 것은 자욱한 안개였다. 대사막에서는 자연적인 안개가 드물다. 자신이 펼치지 않은 자연적인 안개를 오랜만에 보는 번서는 마찬가지로 안개가 잦고 비가 많이 왔던 고향 해운곡의 날씨를 떠올리며 약간 감개에 젖었지만, 이내 그날의 호위역인 국무령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윤숭을 타도하기 위해서 번서가 앞으로의 일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윤숭과 그 주변인들의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중주의 곳곳에는 윤숭에게 돈을 주고 관직을 산 탐관오리들이 있을 것이고, 그의 더러운 일을 대행해주는 자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하나 찾아 내서 계획은 망치고, 인간은 죽이며, 재물은 빼앗아야 한다. 또한 윤숭에 반대하는 자들도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암약하고 있을 터이니 그들과 연계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번서는 필요하다면 적고적이나 창천교의 무리들과도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정보를 수집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자연스럽게 정보가 흘러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구암도의 유형지에서 배운 사실 중 하나는 돈이 모이는 곳에 정보도 모인다는 사실이다. 간수들을 매수해서 생필품 등을 들여오는 암상인은 유형지의 정보통이기도 했다. 따라서, 번서는 큰 장사를 하는 자들 무리에 들어가거나, 혹은 동업자가 되어 볼 마음을 품고 있었다.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시진에 내놓은 점포가 있는가 하는 여부였다.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장사를 하고자 한다면 보부상 수준이어서는 안된다. 자기가 직접 발품을 팔아 정보를 얻는 것은 무릇 확실하기는 하나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적기에 하수의 책략이다. 큰 일을 꾸미기 위해서는 정보력 자체가 커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되고, 정보를 제공하는 자들이 되도록 많이, 제발로 찾아와 주어야 한다. 이런 규모의 정보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도매급은 되어야 하고, 독점적인 도고(都賈)가 된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장사 능력에 따라서 자금도 얻을 수 있으니, 이만큼 좋은 책략은 없을 것이다.
마침 작은 창고와 2층 주택이 딸린 점포가 매물로 나온 것이 있어서, 번서는 계약을 맺기 위해 관아로 갔다. 관아의 서기를 통해 공증을 받아야 매매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가지고 다니던 금편 네개로 일시불로 대금을 치루고, 점포를 다시 열기 위해 목수와 미장이를 고용하기 위해 시진으로 돌아왔을 때, 매입한 점포 앞에서 기다리던 한 중년인이 다짜고짜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
" 이런 파렴치한 도적놈 같으니, 그 점포는 내가 먼저 사기로 언약이 되어 있었단 말이다! "
" 그런 이야기는 없었소만. "
아래위로 한번 훝어보니 꼴이 가관이었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비단 장포를 입은 모양새가 영 나지 않을 정도로 살이 뒤룩뒤룩 찐데다, 뭘 발랐는지는 모르나 살찐 얼굴에서 개기름이 흘러내릴듯 번들거렸다. 그 모습은 실로 불판 위에 올려둔 돼지고기에서 배어 나오는 기름을 연상케 하는 바가 있어서, 인간의 생김새 치고는 참으로 역겹다고 할 수 있었다.
" 아니 이놈이 내가 감히 누군줄 알고 말대답을 하는 거야! "
" 지금 당신이 보이는 언행으로 미루어 보건데, 내가 당신을 알아야 할 의무는 없는것 같소. "
난동을 부리는 중년인의 이름은 알 수 없었으나 그 목적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번서가 개업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원주인이 번서가 제시한 가격을 애누리도 않고 덥썩 받아들였던 것도 이자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뭔가 싼값에 점포를 넘겨받기 위한 수작을 부렸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대낮에 멀쩡한 남의 점포 앞에서 입에 거품을 물어 가면서 미친척을 하고 있는 꼴을 계속 보아줄 만한 인내심은 번서에게는 없는 관계로, 가장 먼저 지나가던 병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상대가 딱히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생각해보니 아직은 단지 시끄러울 뿐으로, 실력행사를 할 정도의 가치는 없었기 때문에 일단 참기로 하고 더들던 말던 데려온 목수와 미장이들을 투입해 점포와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수들이 작업을 완료하기도 전에 다시 방해가 있었다. 그때까지 미친 돼지(난동을 부리는 중년인을 잠정적으로 칭하는 말이다)가 떠드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주민들의 원이 마치 누군가가 바다를 가르는 것 마냥 갈라지더니, 어디선가 대여섯명의 장정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쇠몽둥이나 검 등으로 무장을 한 모양새가 한눈에 봐도 질이 좋지 않은 무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돼지가 고성을 멈추고 거한에게 뭐라고 귓말을 넣은 후 이쪽을 향해 씨익 웃었다. 같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 누구 맘대로 여기서 장사를 하려고 들어!... "
두목격으로 보이는 거한이 호통을 치니 성량이 다르다. 내공 공부를 수박 겉핥기나마 한 것 같았다. 그 호통에 목수들이 놀라서 작업을 멈추었을 때 번서는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 보았으나, 병사는 어느틈엔가 자리를 피하고 없었다. 물론 병사가 없는 쪽이 그에게도 더 편하다.
" 왜 남의 생업을 방해하려고 드는가? "
" 어디서 굴러먹던 말뼉다귀인지는 모르나,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이 조현오(鳥睍汚) 님의 허락부터 구해야지! 지금 그만 두고 집에 가는 놈은 두 다리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
" 그러지 않으면? "
"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군, 좋아, 오랜만에 내가 얼마나 성질이 더러운지 보여 주마. "
조현오라는 이름의 거한이 손에 들고 있던 쇠몽둥이를 들어 번서를 내리치려는 찰나, 하얀 섬광이 그의 몸을 훝고 지나갔다. 국무령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번서와 조현오의 사이로 뛰어 들어와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 죽이지는 마라. "
" 커억!?... "
가끔 기발한 착상이나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는 해도 번서의 명령이 있다면 기꺼이 자살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복종적인 국무령이니만큼, [죽이지는] 않았다. 특기인 탄검을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격차가 나는 하수라 그저 검집 째로 휘둘러 떨쳐냈을 뿐임에도 검의 끝은 조현오의 전신 요혈 곳곳으로 파고들었고, 더불어 그의 전신의 뼈도 산산조각으로 박살내 놓았다. 짧은 비명과 함게 피떡이 되어 두 간(2 間; 4m 정도)을 날아간 조현오는 끔찍한 고통 때문에 땅에 닿기도 전에 이미 기절하고 있었다.
쿠웅!...
당바닥을 뒹구는 조현오의 의식을 잃은 몸뚱이로부터 흙먼지와 함께 고약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똥오줌을 싼 것이다. 그제사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렸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번서는 그대로였고, 국무령도 조현오를 일검으로 날려보내고 나서 재빨리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었고, 심지어는 그녀가 손을 쓴 것인지조차 불분명할 정도였다.
" 사...사술이다!... "
방금전까지 기세등등하던 미친놈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침을 삼키며 한동안 침묵했다. 조현오가 데려왔던 네명의 거한도 가만히 뒷집을 지고 서 있던 번서에게 공포를 느꼈다.
" 그래, 여러분들도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시겠지? "
번서가 그렇게 한마디 묻자,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상황파악을 완료한 그들은 반쯤 죽어 있는 조현오를 내버려 둔 채 줄행량을 놓았다.
" 이제 일들 하시지요. "
그때까지 정신줄을 놓고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목수와 미장이들은 그제사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작업을 재개했다.
" 사... 살려줘... "
고통속에 깨어나서 구원을 울부짖으며 죽어가던 조현오의 목숨을 붙여서 관아에 있는 시약당에 데려다 준 것은 번서가 딱히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이제 영원히 제대로 된 인간 구실을 할 가능성이 없어진(국무령은 거세까지 끝마쳐 놓았다) 그녀석이 여생을 고통 속에서 보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살려준 것은 살려준 것이고,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이인규와 다른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에, 조현오는 번서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조현오를 앞세워 장사를 방해하려 했던 낮의 미친놈의 이름은 이인규(吏靭窺)이며, 월영포 관아의 서기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번서가 짐작했던 대로, 원래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던 가족을 핍박해 싼 값에 가게를 인수받으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번서가 사들인 점포 이외에도 이미 월영포 시진의 점포 중 여섯군데를 그런 식으로 싸게 인수해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번서가 몰랐던 사실은 관헌이라지만 말단에 불과한 이인규가 이런 사업을 벌일 자금이 어디에서 난 것인가 하는 점이엇는데, 조현오는 거기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공했다.
" 금탑삼상? "
" 금탑삼상을 모르다니... 당신 어디 달에서 살다가 오기라도 했소?... "
그러고보니 일전에 합포에서도 한번 들었던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황국 국내의 유통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일종의 독점적 상인조합인 금탑삼상은, 이윤과 세력의 확대를 위해 합법을 빙자한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벌이기로도 악명이 높았다(물론 뒷구멍으로는 비합법적인 일도 한다). 이인규는 관헌의 입장임을 이용해서 금탑삼상의 자금과 비호를 받아 이 일대에서 금탑삼상의 대리인 노릇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현오는 그런 이인규에게 고용된 [어깨]였다.
그럭저럭 시약당의 침대 옆에 앉아서 이인규에 대한 다른 잡다한 정보들을 더 입수하려던 참에, 관인이 네명의 병사를 대동하고 번서를 찾아 왔다.
" 무슨 일이신지요 나으리? "
" 그대가 심강인가? "
" 그렇습니다. "
" 그대를 체포해야만 하겠네. "
" 뭐라굽쇼?... "
이인규에 의해 몹시 신속하게도 고발을 당했던 것이다. 고발의 내용인 즉슨 사술을 써서 사람을 해쳤다는 것인데, 번서가 손을 쓴것도 아니고 피해자가 죽지도 않았으며 그를 직접 시약당에 데려 온지라 그 고발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정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당 관인은 사건을 재신에게 송치하고 번서를 구금했다.
" 어떡할까요, 주인님. "
" 일단은 관헌들이니 나서지 말거라. "
번서는 체포에 저항하지 않았는데, 공정한 재판을 기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장사를 하려면 자신의 이력에 흠이 나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대신 국무령을 서봉과 교대시키고, 그녀에게는 관인의 직인을 훔치고 나서 파발을 따라가 서신의 내용을 바꿔치는 임무를 맏겻다. 고발인과 피고인을 바꿔치는 것이다. 관인이 쓰는 도장만 있으면 새로 문서를 하나 작성하면 될일이니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예하랑은 번서의 대리인을 맏아 점포와 주택의 수리를 끝마치도록 했다.
번서로서는 오랫만에 구암도의 악몽같은 세월이 생각나게 만드는 맛이었지만, 감옥의 저녁식사는 그때에 비하면야 진수성찬이엇다.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의 계획을 곰곰히 궁리하는 번서의 앞으로 낮의 그 미친 돼지, 즉 이인규가 나타났다.
" 히히히...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사술이 있다고 해도 이젠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다. "
살진 돼지같은 이인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참 역겨웠다. 천성이 약자를 놀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 보였다. 문득 톱밥이 섞인 쥐고기 육포를 뜯던 하청의 얼굴이 그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살찐 얼굴에 겹쳤다. 이자도 그런 식으로 남을 해치고 줄을 대는 방식으로 어디에서나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든 번서는 씁쓸하게 웃었다.
한동안 이인규는 번서를 놀려대는데 열을 올렸으나, 그가 상대해 주지 않자 결국 제풀에 기운이 빠져 악담을 몆마디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번서가 한잠 자기 위헤 팔베게를 하고 감옥에 있는 간이침대 위에 누웠을 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났다. 일부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일어나 보니 국무령이었다.
"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
" 그러하더냐, 잘 했다. "
"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남아 있습니다. "
" 무엇이냐? "
" 조현오가 죽었습니다. "
누가 손을 쓴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었다. 이인규일 것이다. 쓸모없어진 패를 처리함과 동시에 혹시나 번서측에 유리한 증언을 할 수도 있는 증인을 없에는 일이 되니 일거양득이다. 하지만 번서는 그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미 국무령 편에 언질을 넣어 서봉으로 하여금 조현오와 한패거리였던 네명의 불량배를 찾아서 적당히 구금해 두라고 지시해 두었던 것이다. 그들의 증언이면 이인규의 부정을 밝혀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 주인님께서 앞을 내다보시는 안목에는 탄복할 따름입니다. "
" 얼굴에 금칠을 하려 들다니, 귀여운 노예로구나. 오늘 활약한 건도 있고 하니 나중에 듬뿍 귀여워 해 주마. "
" 아...앙...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저희들의 일과는 어찌 해야 할까요? "
노예들이 번서 앞에서 배설과 자위를 보이는 일은 중요한 일과였다. 번서는 그날만 특별히 자유롭게 그것을 허용한다는 명령을 내려 참고 있는 눈치가 역력한 국무령을 안심시켰다. 물론 그녀는 자유롭게 되자 마자 번서 앞에서 싸서 감옥 통로의 바닥을 더렵혔지만.
" 간수들이 내일아침에 뭐라고 할지 기대되는군. "
" 아...부끄럽습니다. "
잠시 국무령의 애교를 즐기던 번서는 그녀를 배로 보내어 예하랑과 임무교대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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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의 법은 엄혹하다. 특히나 공직자의 수뢰는 그 혐의가 확정될 경우 예외없이 사형이다. 국무령이 재치를 부려 바꿔친 공문서의 내용은 서기인 이인규가 금탑삼상에 속한 자에게 뇌물과 향응을 제공받으며 그들의 이득을 위해 죄없는 상인을 무단으로 구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발이 간지 이틀만에 확인을 위해 내려온 사자(使者)에 의해 그 고발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장사를 시작하려던 번서가 감옥에 있었고, 때맞춰 불러온 증인들의 증언으로 이인규가 금탑삼상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보통 이상으로 그 생활이 풍족한 정황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 휘하의 병졸들이 체포를 위해 이인규의 호화로운 집에 들이닥쳤을 때, 조현오를 처리하고 이제 번서만 처리하면 될것이라고 안심하고 있던 그로써는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 안돼!... 이럴수는 없어, 안돼에에에!... 꾸에액!... "
하루만에 신세가 바뀌어버린 번서와 이인규. 돼지 멱따는 소리같은 비명을 지르며 재판을 위해 압송되어 가는 그를 향해, 번서는 그저 조용히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물론 해 주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편이 훨씬 더 강렬한 의사 전달이 될것이다.
번서는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쪽 뺨을 내밀어 주는 성인군자가 아니고, 돼지를 관헌에게 넘기는 정도로 담백하게 복수를 마치는 선량한 일반인도 아니었다. 복수를 자신의 삶의 이상으로 삼은 그는 이런 사소한 원한이라도 철저하게 보복해야만 했다.
어떤 남자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복은, 그 자신을 재기불능으로 만든 다음 그 눈앞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차례대로 파괴하는 것이다. 남자로써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감을 곱씹으며 절망하게 만드는 것. 이야말로 번서가 가졌던 피맺힌 원한의 실체이며, 그가 윤숭을 향해 하고자 하는 복수의 완성형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인규는 그런 형태의 복수를 처음 [실습]하는 대상이 될것이었다.
아직 미혼인 조현오는 달리 가족이 없었지만, 엄연한 관헌의 신분을 가지고 있고 재산도 있는 이인규에게는 (그 돼지같은 생김새에도 불구하고)인정 많은 노모와 제법 미인인 부인, 그리고 영특해 보이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번서는 한밤중에 그 집에 독안개를 풀어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는데, 그 부인을 다른 여자들 처럼 범하거나 그 노모나 아들을 괴롭히지 않고 깨끗히 죽였던 이유는 이들이 직접적으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은 이들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그에게 죄를 지은 이인규에 대한 처벌이었다.
동행한 서봉이 번서를 향해 물었다.
" 하지만 그들은 돼지가 저지른 부정이나 주인님을 향한 무례와는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
번서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강한 상관이 있다. 돼지가 벌어온 돈으로 저 가족은 부유하게 살았다. 그 노모와 부인은 안락한 삶을 영위했고, 그 아들도 다른 학동들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성년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럴리 없지만 그들이 그 가장의 범죄 사실을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그가 모은 부정한 재산 덕분에 안락한 삶을 누렸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지는 것이 당연하다. 오래전부터의 법도에 따라 공범에게 죄를 묻는 것이 불의로운 일이 아니듯이, 죄인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이득을 입은 그 가족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전혀 무리한 처사가 아니다. 하물며, 그는 자신의 근무지에 거하는 백성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관헌이 아니었더냐. "
가족이 하룻밤만에 몰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이인규는 자신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렷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는 내내 넋이 나간 것 마냥 멍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집행이 멈출리는 없다. 마침내 형장에 나와 있는 구경꾼 중에 번서의 모습을 발견한 그가 원한에 가득찬 목소리로 뭔가 부르짖으려는 찰나, 발을 지탱해 주고 있던 판자가 빠져나가며 밧줄이 그의 목에 파고들었다.
이인규 같은 인간 돼지가 목매달려 죽어가는 광경은 역겹지만 통쾌한 것이다. 그간에 관헌이라는 입장을 악용해 얼마나 많은 패악질을 저질러 왔던지, 가족이 하룻밤에 모두 몰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음에도 아무도 그자를 동정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죽음을 확인한 사형 집행인이 목을 잘라 효수하자, 모여든 주민들은 그 목에 대고 한마디씩 하거나 침을 뱉으며 떠나갔다.
" 저런 더러운 자의 고기는 개도 먹지 않을 것이다. "
" 확실히 그렇습니다. "
번서는 기분 좋게 한마디 남긴 후에 자신의 거처인 배로 돌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