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21 (21/41)

마왕성 내부의 지하 뇌옥에서 일소일로(一小一老)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젊은 쪽은 진소아였고, 나이든 쪽은 예하랑이었다. 뇌옥에 갇힌 진소아를 예하랑이 직접 와서 살피는 중이었다.

" 역신 진씨 가문의 말예라니, 집안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번지수를 잘못 골랐구나 아이야. "

" 아니, 난 잘못 고르지 않았어, 간적 윤숭의 주구들... 너희들이 죄없는 신하를 모함해 죽이고 민초들을 사지로 몰아넣어 황국을 좀먹고 있다는 것은 세살먹은 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

" 네 말은 공허해. 누구도 지금 마왕의 지배에 대항하지 않고 있어. 국경도 평안하지... 오히려 너야말로 역신이야. 황국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마왕을 암살하려 했고, 금역인 마왕성에 몰래 숨어들어오려고 시도했으니 말이야. 이런 물건을 가지고... "

예하랑은 진소아의 단총을 손가락 끝으로 붙잡아 들어 보였다. 마영달의 명치에 납탄을 박아 넣은 바로 그 물건이었다.

" 네 죄상은 명백하고, 증거도 확실하지. 다시는 지난번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네 처형은 내일 아침 이 감옥에서 집행될거다. 이제 몆시간 남지 않은 삶을 즐기라고... "

비웃음을 흘리며, 예하랑은 진소아가 갇힌 뇌옥에서 멀어져 갔다.

.

.

.

잠입할 방법이 있을까.

마왕성의 성벽을 올려다보며, 번서는 고민했다.

성벽의 높이는 아홉간(間_약 17 미터) 한번의 도약으로 올라가기는 불가능한 높이고, 그 표면의 상태를 설명하자면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매끄러운 돌들이 완벽하게 맞물린 구조라 전문적인 도적들이 쓰는 벽호공 같은 기공을 사용한다 해도 난이도가 높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번서는 벽호공을 몰랐다.

벽을 넘을 수 없다고 정문으로 쳐들어가는건 자살행위다. 경보를 위한 종이 울리면, 적어도 이백명 정도의 훈련받은 병사가 완전 무장을 하고 튀어나올 것이다.

제아무리 무공이 강한 자라도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이라면 제대로 진형을 갖춘 창의 숲 속에 뛰어들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제아무리 강한 호체기공이라도 제대로 만든 화살이나, 혹은 총의 일제사격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방법이 없군.

하지만 방법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은 번서가 아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진소아라는 상품(?)까지 걸려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 게다가 붙잡은지 이미 하루가 지났다고 하니 무슨 사단이 나기 전에 빨리 그녀를 빼내야 했다.

한참을 병사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성 주변을 돌아보며 틈이 될 만한 약점이 없을까 살피던 번서는 더이상 완벽할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그 성의 구조를 절감했을 뿐이다.

" 흠... "

바로 그 때, 번서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성을 감싸는 해자(垓字)였다. 

해자라는 것은 성의 방어를 위한 시설로, 성벽 밖에 만든 인공적인 하천이나 호수다. 자산성의 경우, 시진 전체를 성을 감싸는 외성과 내성에 해당하는 마왕성을 감싸는 해자는 가까운 소백강의 물을 끌어온 것이다.

일부러 강물을 끌어들이는 수고를 할 필요 없이 그냥 땅을 파고 물을 채워넣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고 묻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물의 성질에 무지한 자다. 고인 물은 썩는다. 그리고 썩은 물은 위생상의 문제를 일으킨다. 구체적으로는 전염되는 열병이다. 게다가 이곳은 전형적으로 무더운 사막과 접경한 지역이다. 물이 썩는 속도도 빠르고, 무더운 날씨 속에 병은 더 빠르게, 널리 퍼진다.

때문에 오직 흐르는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성만이 제대로 된 해자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건축이나 공학에 대해 조금의 지식이라도 있다면 흐르는 물의 위험성을 안다. 아무리 작은 양의 물이 흐르는 실개천이라해도 막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때문에 치수라는 작업은 몹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다른 모든 것보다 물길이 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보통 이런 물길을 만들때는 절대 외길로 만들지 않는다. 외갈로 만들면 역류할 때 멈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의 힘은 무적에 가깝다. 홍수가 나면 인간이 만든 성벽이나 도시 따위는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쓸어 가버버린다. 흐름을 인공적으로 뒤집으려 해도 마찬가지로 재앙을 부른다. 제방도 무적이 아니다. 

이런 물의 힘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흐름은 작게, 여러 갈래로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때문에 자산성의 [내성]으로 끌어들인 해자의 경우, 외성의 성벽 내에도 물이 지나가도록 만든 촘촘한 물길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길은 아무나 이용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의 길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물고기가 아닌 이상 통과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만, 번서는 이 문제를 극복할 재주가 있었다. 그는 침 한방으로 인간을 살리고 다시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의원이다. 약으로 가사상태를 초래하는 일 정도는 우스울 정도다. 이 상황에서 그에게 필요한 유일한 정보는, 물길의 속도를 재어 보고 어느 시섬에서 [깨어나도록]만드느냐였다. 그리고 유속을 측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 정말 이걸 하실거에요? "

" 그래, 경소저도 진소저가 저 안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으리라 믿소만. "

" 하지만... 이건 위험하잖아요?... "

" 경소저, 내 재주가 몹시 보잘것없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지만, 적어도 보잘것 없는 범위 내에서는 쓸만하고, 이런 경우에는 더할나위 없는 셈이오. 걱정하는 바는 알겠지만 나는 별탈없을거니 진소저를 위해 기도나 해 주시구려. "

"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

" 이분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

경운경은 완전히 졌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 알았어요. 저도 돕죠. 뭐가 필요하시다고요? "

" 아 우선은... "

번서와 국무령이 해자를 통해 침투하는 동안, 경운경이 담당한 일은 밤귀의 일을 재개해서 성내의 병사들의 주의를 끄는 것이었다. 적어도 마왕성 내부의 병사들은 외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효과를 기대하고 부탁한 것이다. 운이 좋다면 성 내부의 경비들의 시선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운경의 경공은 몹시 뛰어난 바가 있어서 무공을 모르는 병사들을 따돌리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날은 그믐밤이었다.

경운경이 야단스럽게 성내를 교란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동안, 번서와 국무령은 준비를 끝마쳤다.

번서가 자랑하는 약 중 하나는 강력한 마비약이다. 본래는 종기 등의 치료를 위해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환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쓰는 물건으로, 가벼운 마비와 감각 상실을 동반한다. 하지만 번서의 것은 [보통]의 것이 아니라, 적당량 이상을 쓰면 신체를 마비시킬 뿐 아니라 신진대사율을 떨어뜨려 일종의 가사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

그것을 삼킨 다음 약효가 되는 동안 빠르게 물 속으로 잠수해서 수중의 배수구 근처까지 헤엄쳐 가서는, 물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맏기는 것이었다. 수압과 약효에 의해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면, 이미 마왕성의 한가운데일 것이었다.

빗물을 생활용수로 이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하의 양 까지다. 황국의 우기에 내리는 격렬한 비는 어떤 성이라도 호수로 만들 수 있을 만한 양이고, 그래서 빗물을 흘려내 버리기 위한 구조도 중요하다. 당연하지만 물을 흘려내 버리기 가장 좋은 곳은 언제나 물이 흐르고 있는 곳, 즉 하천이다. 마왕성의 지하 수로는 해자의 유지 뿐 아니라 과도한 빗물과 하수를 처리하는데도 몹시 편리했다. 번서가 종이접기로 만든 새로 살펴보았던 성의 대략적인 정보를 통해 어림짐작한 배수로의 위치는 그의 기대와 거의 일치했지만, 몹시 좁아서 날씬한 여자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정도였다.

번서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깨어난 데 이어 그 배수로를 통과하기 위해 어께 관절을 뽑는 고행을 감수해야 했다. 국무향의 도움을 받아 통로를 벗어난 그는 그녀가 어께 어께 관절을 맞춰 주는 동안 오만상을 찌푸렸다.

" 으윽!... 휴...부디 이 일에 이럴만한 가치가 있어야만 할텐데... "

"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진소아라면 [백보필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여자입니다. "

" 그녀에 대해서 잘 아나? "

" 몆번, 제 문제를 해결해 준 적도 있죠. 물론 비싸게 먹혔지만, 돈값을 하는 여자였습니다. "

문득 번서는 서봉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자산성에 있는 백무련의 본거지를 털거나 하는 이외에는 그 정보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소위 [무림]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여젼히 유용할 것이었다. 그는 그녀들의 지성을 빼앗지 않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께는 좀 아팠지만.

" 네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이런 일을 벌이기 전에 미리 물어볼걸 그랬군. "

" 조언은 드릴 수 있지만, 저는 주인님의 노예일 뿐입니다. 주인님께서 정하시면 따를 뿐입니다. "

그 참다운 충성에 대한 칭찬의 의미로 국무령의 목 아래를 한번 쓰다듬어 준 다음, 번서는 자신이 들어온 곳이 정확히 어딘지 파악하기 위해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습하고, 어둡고 사방이 온통 돌벽으로 이뤄진 좁은 공간의 양쪽 두껍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철제 문이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번서가 구암도에서 잠깐 머물러 본적이 있는 공간과 몹시 흡사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썩는듯한 악취에 국무령의 눈썹 사이로 세로로 주름이 잡혔다.

" 으... 우리는 감옥의 갱도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습니다. "

"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들어온 구멍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한 구멍이겠지. "

익숙한 죽음의 냄새가 코 끝으로 전해져 왔다. 번서는 구암도의 채석장을 떠올렸다. 인간 세상의 바닥의 풍경이란 어디나 다 비슷한 것이던가.

복도는 일직선이고, 간수는 없었다. 복도 끝에 있는 검은 철문이 뇌옥의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로 보였다. 번서는 창살 너머로 감금실들을 하나 하나 살폈지만 진소아는 없었다. 다만 뇌옥 중 하나의 문이 최근에 여닫아진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 안의 공기중에는 희미하지만 진소아의 체향이 감돌고 있었다. 국무령 덕분에 여자의 냄새에 민감해진 번서는 보통이라면 놓쳤을 그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 보아하니 우리의 친구 마봉춘은 죽은 지 애비랑 취미가 비슷한가 보군... "

간수도 없는 뇌옥의 출입구를 나오자 내성의 안뜰이었다. 번서는 종이접기로 부엉이를 여러 마리 만들어 하늘로 날려 보냈는데, 이는 두가지 목적에서였다. 첫째 부엉이는 극히 조용하게 나는데다 밤눈이 밝았기 때문에 이런 한밤중에는 다른 어떤 새보다 훨씬 더 유용한 [눈]이 될 수 있었다. 두번째 목적은 누군가 이 부엉이의 존재를 알아챌만한 자가 있다면, 보통이라면 이런 곳에 오지 않을 이 새의 존재에 반응할 것이다.

번서가 기억하는 진소아는 총 뿐 아니라 암기 던지는 솜씨도 훌륭했고, 맨손이라도 병사 몆명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보였다. 게다가 이곳은 그녀가 어린시절을 보낸 마왕성이다. 이런 곳에서 그녀를 생포하기 위해서는 몹시 함정이 철저했던가, 아니면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고수자가 나섰다는 말이 된다. 추가로 진씨 일족이 급하게 제거되고 나서 마왕성의 비밀통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극소수였을 것이고, 마영달의 일족은 당연히 그 목록에서 제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생포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추리해 본다면, 준비가 철저했다기 보다는 그녀를 제압할 만한 고수자가 있다는 쪽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번서는 진소아를 구출해 나가는 동안 그 누군가와 쓸데없이 충돌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환술로 만든 부엉이를 통해 그 고수자를 노출시키고, 되도록이면 선수를 취하거나 도망칠 가외의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내성의 안뜰을 가로지르는 동안, 번서는 여섯병의 경비병과 마주쳤지만 그믐밤이라는 조건과 부엉이를 사용한 정찰 덕에 그들에게 들키는 따위의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왕성의 주인의 거처인 중앙 전각의 지붕에 성공적으로 오를 수 있었다.

기와 몆장을 떼어내고 지붕 안으로 들어갔을 때, 번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십개의 색국산 고급 향촉이 켜진 하나의 커다란 침실이었다.

"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어차피 넌 내일 아침 동이 트자 마자 처형될거고, 그래서 죽기 전에 여자로써의 행복을 충분히 맛보게 해 주자... 뭐 내 아버지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 넣은 댓가 치고는 싼 편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죽으면 다 똑같아 지니까 말이야. 너의 그 쓸만해 보이는 얼굴과 몸뚱이도 죽고 나면 아무 쓸모가 없어지잖아. 죽기전에 좋은일 한번 하는거지. "

휘장이 쳐진 커다란 침대 옆에서 비단으로 만든 침의(寢衣)하나만 걸친 마봉춘이 무슨 축문을 외는 것 마냥 장황하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껄이고 있는 광경이 내려다 보였다. 침대 안에 보이는 희끄무레한 그림자는 진소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게 함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번서는 확실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퍼억!...

막 휘장을 걷고 침대 위로 오르려던 마봉춘의 살찐 목 한가운데를 촉과 화살대는 물론 깃까지 강철로 만들어진 특제 강전이 관통했다. 정확히는 위에서부터 비스듬히 내려꽂힌 그것이 그의 목의 측면을 뚫고 기도를 관통해 허파에 박혔던 것이다. 그대로 마룻바닥에 쓰러지는 마봉춘의 몸을 국무령이 받아서 소리가 안나도록 천천히 눕히고 휘장을 걷었다.

" 오랜만이군요, 진소저. "

거기에는 발가벗겨진 채 재갈이 물려지고, 사지는 활짝 펼쳐진 자세로 침대의 각 모퉁이에 서 있는 기둥에 구속되어 있는 진소아가 있었다.

"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된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심공자님? "

" 나도 마영달이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려 했다고 말하면 적당한 설명이 될 것 같군요 진소저. "

국무령이 진소아의 결박을 풀어주는 동안, 번서는 뒤돌아 서 있었다. 마룻바닥에서 자신의 피에 의해 질식하며 경련하고 있는 마봉춘의 반나체를 옆에 둔 채로 대화의 장을 연다는것은 얼핏 보면 몹시 불편한 광경일 수 있지만, 번서도 진소아도 그런 상황을 신경쓰지는 않았다. 번서가 여전히 돌아 서 있는 동안 그녀는 마봉춘의 옷장에서 적당한 옷을 꺼내어 입었고 국무령이 마봉춘의 시체를 침대 위로 옮기는 것을 돕기까지 했다.

번서가 돌아섰을 때는 하마터면 웃을뻔 했지만,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참을 수 있었다. 진소아가 걸치고 있는 것은 마봉춘의 초록색 비단 장포였는데, 마봉춘의 체구가 체구이다보니 맞는 옷이 하나도 없어서 입었다기 보다는 걸친다는게 더 올바른 표현이었지만, 어쨌건 그녀는 노력했기 때문이다.

" 어떻게 잡히게 된 것인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소이까? "

" 무서운 고수가 있어요. 자기 이름이 예하랑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녀의 반초지적도 되지 못했어요. "

" 예하랑?... "

번서가 국무령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는 무언가 몹시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마자, 그녀는 큰일났다는 듯한 기운이 충만한 목소리로 정보를 제공해 왔다.

" 제가 아는 예하랑이 맞다면, 그녀는 금선진인(錦扇眞人)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실력은... 무서운 고수 정도가 아닙니다. "

" 부채를 가지고 있더군요.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

" 그렇다면 확실합니다. "

"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기에 그렇게 겁에 질리는 것이냐? "

" 그ㅂ... 그녀는 백무련을 창설한 여덟 고수 중의 한명입니다. 당시부터 이미 백도계의 전설이었고, 지금의 실력은 어느정도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

" 잠깐, 백무련의 창시라면... 벌써 한갑자가 다 되어 가는군. 관에 들어가야 할 나이가 아닌가? "

" 그런것 치고는 몹시 젊어 보이던데요. "

" 그 때문에 [진인]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그녀는 다른 일곱명의 ㅅ...고수들과는 달리 나이를 먹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

" 진인이라? 그런건 전설의 존재인줄 알았는데. "

바로 그때, 번서는 자신의 부엉이들 대부분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 새를 만드는 것은 갈천휘가 본녀의 무릎위에서 놀던 꼬맹이 시절 만들어 낸 수법이었지... "

번서가 뭐라고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한차례 붉은 광풍이 침실을 휩쓸었다. 그리고 번서는 물론 국무령과 진소아까지 각각 방 구석으로 날려가서 쓰러져 있었다.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두번 손을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렬한 공세였다.

" 코뚜레라니... 요즘 젊은 아이들의 취향은 특이하기 그지없구나. "

국무령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은 어느틈엔가 사라져 있었다.

" 어린 놈, 네 취향이더냐? "

"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면서, 번서는 입 안으로 흐르는 피를 삼켰다.

" 여자에게 저런 수치스러운 장식을 채우다니, 너도 좋은 부류는 아닌가 보구나. "

고개를 끄덕이면서, 번서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마봉춘은... "

예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 죽었겠지. 하는 짓이 죽어도 싸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석은 내 당조카의 아들이었어. "

" 백무련을 창시했다는 분께서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불의를 저지르는 탐관오리에게 힘을 빌려주시다니, 몹시 실망이군요. "

" 아니, 아니야, 본녀가 사사로운 정 따위에 얽매였다면 너희들은 방금전 내 일격에 죽었겠지. 너희들은 황국의 공법을 어긴 죄인이고, 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

" 아, 법. 마영달과 그 아들이 그 법을 이용해서 죽인 무고한 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으시는 것이겟지요. 당장 진소저만 해도... "

" 거기까지. 본녀는 정의에 관해 너희와 토론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다. " 

" 하지만 그러려면 제 입을 막으셔야만 할겁니... "

다시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붉은 그림자가 번서의 얼굴에 명중했고, 그는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는 다은 모퉁이의 벽에 피를 바르며 일어섰고, 피와 이빨 조각을 뱉으며 웃었다.

" 음... 꽤 좋은 일격이었습니다만, 아직 저의 입을 닥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군요. "

[움직이지 마라. 내가 신호하면, 진소아를 데리고 침대 아래로 숨어라]

나서려던 국무령을 전음으로 제지하며, 번서는 다음 일격을 맞았다. 그리고 또 다시 일어나서 다음 벽에 피를 칠했다. 그거 무엇을 할 것인지 깨달은 국무령은 진소아 쪽으로 기어가 그녀를 감싸듯이 안았다.

" 그래서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진인께서 아껴 마지않는 당조카인 마영달은, 인간 세상의 쓰레기로... "

다시 일어나는 번서가 여전히 웃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예하랑도 평정심을 잃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비틀거리는 번서에게 다가와서 부채가 아니라 손을 펴서 뺨을 때렸다.

짜악!

쿠당탕!...

평범한 따귀였지만, 예하랑의 내공이 적지 않게 들어있는 따귀이기도 했다. 피를 뿌리며 방 구석까지 날아가서 처박히긴 했지만, 번서는 견뎌댔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났다. 예하랑도 독했지만, 그는 더 독종이었던 것이다.

" ...화제를 약간 돌리자면, 진인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갈씨 어르신의 진전을 약간 이어 받았습니다. "

" 그래, 갈천휘 그 아이가 제자를 몹시 잘못 택한 것이겟지. 나중에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

" 그분께 책임을 묻는다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사실 저는 그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분도 저를 제자로 생각지는 않으실 것이고요. 제가 그분의 진전을 이어받게 된 사연이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 "

" 갈천휘에게 물어보면 될일이겠지. "

" 하지만 진인께서는 결코 그분께 물어볼수 없을 겁니다. 그분은 백무련에 쫒겨서 몸을 숨기셨거든요. 그리고... "

" 그리고? "

" 제가 만나뵙지 못하게 할겁니다. "

예하랑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 네가, 어떻게 본녀를 막겠다는 것이냐? 종이 부엉이 수천마리를 접어서 날린다 한들 나를 막을수는 없어. "

" 제가 그분에게 이어받은 기술은 종이접기 뿐만이 아니니까요. "

쿵!...

다음 순간, 예하랑의 주변의 땅 속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올라와 그녀를 둘러 쌌다. 번서의 피로 그린 진법이 발동한 것이다.

" 본녀는 갈천휘가 내 무릎만할 때 부터 봐 왔다. 이따윈 것들은 조잡한 환상일 뿐이야. 이따위 사술이 나한테 통하리라고 생각하나, 정말로? "

" 진인께서는 갈천휘 어르신을 너무 평가 절하 하고 계시는군요. 물론 그분이 사용하는 술법 중 대부분은 무해한 겁니다. 기껏해야 눈속임 수준이라고 자신이 스스로 책에 써 두셨지요. 하지만 그중 몆몆은, 정말 위험한 것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시술자의 피를 대량으로 요구하긴 하지만, 실제로 명계(冥界)에 서식하는 식귀(蝕鬼)들을 불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저는 진인께서 도움을 주신 덕분에... 대량의 피를 바닥에 쏟았지요. "

캬아아아아아...

" 그리고 식귀들은 시술자를 포함해 보이는 것 전체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시술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갈천휘 어르신이 만들어 낸 술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전 이미 그 술식을 알고 있지요. "

" 차앗!... 이따위 잡귀들 따위로 본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겻다면 너의 오산이란다... "

실제로 예하랑의 일격에 식귀 하나가 흔적도 없이 분해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번서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그리고 제가 아직 설명드리지 않는 점이 있는데, 그 식귀들은 여기서 파괴당한다고 해도 진짜로 파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명계로 돌아갈 뿐이죠 그리고 식귀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명계로 돌아간 식귀를 대신해 다른 녀석이 그녀석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서의 핏자국으로부터 식귀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 그리고 그들은 먼동이 틀 때 까지 절대 멈추지 않지요. 지금이 축시니까... 족히 세 시진(6시간)은 남았군요. 진인의 공력이 높은지 식귀들의 인해전술이 강할지 두고 볼일입니다. "

" 이노옴!... "

예하랑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자들을 이끌고 그 장소를 벗어난 번서는 자신의 상처를 대충 응급처치 한 다음, 국무령과 진소아도 응급처리를 마쳤다.

" 내장이 뒤집어진 느낌이에요. "

" 그렇지만 살았으니 됀거 아니겠소이까. 혼자서 돌아가실 수 있겠소?  "

진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성에 대해서는 그녀가 누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공자님은 어쩌실 건가요? "

" 들어왔던 데로 나갈 생각이지만... "

" 어디로 들어오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제 총을 찾는걸 잠깐 도와 주시면 쉽고 빠른 탈출로를 알려 드리죠. "

어차피 당분간 예하랑은 식귀들이랑 싸워야 할 것이기 때문에, 번서도 그 계획에 이의가 없었다. 그리고 반시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성의 무기고에서 진소아의 무기를 되찾고 대량의 화약까지 탈취해 내고 있었다.

" 정말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소이까? "

번서의 질문에 진소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번서의 피투성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시선을 맞추었다.

" 이봐요, 심공자님. 이곳은 내 어린 시절의 모든것이 담긴 곳이에요. 좋았던 일보다 싫었던 일이 더 많았지만, [집]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죠. 그런데 그곳을 지금 내 가족을 죽인 자들이 차지하고 살고 있어요. 그리고 내 능력으로는 이곳을 되찾을 방법도 없고요.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차선책은, 이곳을 그런 자들이 더럽히게 두지 않는 거에요. "

[집]이라는 말을 듣자 해운곡에 남겨두고 온 아담한 집이 떠올랐다. 그래도 번서의 집은 되찾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진소아는 그렇지 않다. 그녀의 심정을 완전히는 아니지만 공감할 수 있었던 번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그렇다면 먼저 가시오, 뒷처리는 내가 하리다. "

" 빚을 너무 많이 지면 안좋다고 생각하지만... "

" 지금 우리는 친구요. 그리고 친구 사이에서는 그런걸 따지는 법이 아니지. 얼른 가시오 진소저. "

" 고마워요. 심공자님... "

외성에서 가장 높은 전각의 꼭대기에는 거의 국무령의 허리 만큼 굵어 보이는 굵은 쇠기둥이 있었다. 이 쇠기둥에는 철사를 꼬아 만든 쇠줄 3개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 철사의 다른 쪽 끝은 마왕성 외성의 출입구 지붕에 있는 같은 구조의 기둥에 연결되어 있었다. 원래 이 기둥은 벼락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설치된 것이지만, 성에 불이 나거나 하는 긴급시에 대피하는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겠다 싶었던 전전대의 성주가(즉, 진천권 앞의 마왕이다) 이 기둥에 쇠줄을 걸어 연결했었던 것이다.

이 쇠줄을 타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르레 장치가 필요했는데, 진소아가 그 장치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장치를 이용해 탈출하는 동안, 내성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화약을 곳곳에 설치한 번서는 다시 예하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하악...하악... "

열심히 보이지도 않는 놈들이랑 싸우고 있군 그래...

예하랑의 숨은 턱에까지 차 있었다. 이미 보법이 흐트러지고, 손에 들린 부채의 움직임도 더없이 느려져 있어 그녀의 공력이 바닥나 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공격에 맞아 박살나는 식귀들이 보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자신만만만하게 깔보던 [저급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식귀를 부르는 술법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몹시 정교한 소환진과 함께 불러낸 식귀에게 공격받는 사태를 막기 위한 주의깊은 준비가 필요한 고급 술법이었고, 예하랑에게 맞은 여파에 의해 바닥에 뿌려진 피로 그런 세공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번서가 사용한 것은, [피]라는 재료가 주는 불길한 느낌과, 적절한 거짓말이다.

강력한 환상이 동반되기는 했지만, 그녀 정도 되는 고수가 침착하게 대응하면 그 수법을 알아내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분노로 평정심을 잃었고, 그 상황에서 번서가 귀신을 불러내자 당황했다. 그래서 번서의 설명에 따라 눈앞에 나타난 식귀들이 진짜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단 믿어버리게 되면, 아무리 허접한 거짓말이나 환상도 실제가 된다.

소위 [절정고수]들을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오른 [고수 위의 고수]인 예하랑은, 그렇게 손자뻘도 안되는 번서에게 농락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농락의 마지막 단계로, 번서는 금침을 날려 그녀의 혈도를 제압했다.

" 아으윽!... "

마비가 오면서 바닥으로 쓰러진 예하랑은, 비로소 자신이 본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번서의 장황한 설명에 말려들어 믿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공이 온전하다면 그가 날린 침 정도는 쉽게 튕겨 내고 제압당한 혈도도 스스로 풀 수 있었겠지만, 한시진이나 계속해서 전력으로 무공을 펼쳤던 덕에 그녀의 내공은 이미 고갈된지 오래였다. 번서는 앞으로 엎어지듯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가 발로 밀어서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분노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와 시선을 맞춘 다음, 그녀의 머리에 금침을 꽂았다.

예하랑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 그녀를 완벽하게 제압한 번서는 국무령에게 그녀를 들리고 함께 탈출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전각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 그럼 이제 오늘의 일과는 이걸로 끝내야겠지. "

마지막으로, 번서는 화섭자를 써서 땅바닥에 뿌려진 화약에 불을 붙였다. 화약이 타들어가는 동안 예하랑을 행랑 메듯이 떠멘 국무령이 먼저 도르레 장치에 몸을 실었고, 그가 뒤를 이었다.

펑!... 퍼버버벙!... 콰콰쾅!!!...

외성문에 도착하자 마자 등 뒤로부터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치 축제에서 쓰는 폭죽이 터지는 것 처럼 성대한 불꽃과 함께 마왕성 내성에 속한 전각이 불이 붙은 채 하늘로 치솟는 광경을 보며, 번서는 씨익 웃었다. 아직 부어오른 얼굴이 화끈거리고 얻어맞은 자리가 쑤셨지만, 그것은 예하랑이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