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18 (18/41)

한편, 마왕성의 내부의 모처에서는 일남일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고모할머님, 기필코 이 흉적들을 잡아야 합니다. "

" 걱정 말아라 아이야. 내 힘닿는데 까지 도울 것이니... "

남자는 마영달의 아들인 마봉춘(馬烽椿)으로, 외모와 알맹이 모두 마영달의 풀빵이라 할 만한 자였다. 마영달이 초로의 나이였던 만큼 마봉춘 역시 나이가 적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이름은 예하랑(藝河琅). 죽은 마영달의 당고모뻘 되는 여자로 백무련의 창시자 중의 한명이며, 이미 오래 전부터 오색림에 은거하고 있었던 은거고수였다.

이미 십대 초반에 무명을 널리 떨쳤다고 알려져 있고, 창천교의 발호를 제어하기 위해 그녀가 참가했던 초대 백무련이 탄생한지가 한 갑자(60년)조금 못되었으니 그녀의 지금 나이는 적어도 고희(古稀) 이상일 것이지만, 척 봐도 젊고 아름다운 미부인인 그녀는 손자뻘인 마봉춘 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녀를 아는 이들이 그녀를 높여 부르기를 금선진인(錦扇眞人)으로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나이를 먹지 않는 자는 오직 진인(眞人)만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 고모할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일단 부친의 죽음을 숨겼습니다. "

그뿐이 아니다, 이미 죽은 마영달을 대신해 꼭 닮은 마봉춘이 그의 대역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예하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 그렇지, 그리하면 이 흉수들은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으로 어떻게든 숨어들어오려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확실하게 붙잡을 준비란다. "

" 그때 할머님께서?... "

마봉춘의 질문에 예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영달과 예하랑이 오촌지간이 된 사연은 이러하다. 예하랑에게는 예수랑(藝秀郞)이라는 이름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무림에 뛰어든 누이와 달리 이 예수랑은 학문을 닦아 관부로 나갔다. 그리고 마씨 집안의 아내를 맞아 혼약을 올렸던 것이다. 마영달은 이 마씨 부인의 오빠의 아들, 즉 예수랑의 조카였다. 때문에 예수랑의 여형제인 예하랑과의 촌수는 5촌이 된다. 이 예수랑은 제법 청렴한 관리였지만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은 부인은 친정이 있는 마씨 집안으로 돌아갔지만 한년 전에 죽었다.

이미 마영달의 생전부터 예하랑은 자주 마씨 집안과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죽은 동생인 예수랑 외에는 달리 친족이 없는 예하랑은 오촌 조카가 되는 마영달과 그 형제들을 무척 귀여워했다. 마영달도 어린 시절에는 천진난만한 남자아이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관례를 올린 마영달이 결혼을 하고 관직에 진출해서 권세의 맛을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예하랑도 자기 일 때문에 교분이 서로 뜸해졌기 때문에 근 십년동안 교류가 없었지만, 그가 피습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예하랑은 마왕성을 다시 찾았던 것이다.

마영달이 아무리 포악한 탐관오리였다 할지라도, 은둔하고 있어 저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던 예하랑에게 있어서는 한때 무릎위에 앉히고 귀여워했던 조카일 뿐이다. 이제 그 아들이 복수를 하겠다는데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공만큼이나 책략에도 잔뼈가 굵은 예하랑은 우선 마영달과 꼭 닮은 마봉춘으로 하여금 그의 대역을 담당하도록 하고, 그의 사망 사실을 숨기도록 했다. 성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던 그의 사망 소식이 갑자기 [피습]으로 바뀌게 된 것도 그녀가 손을 썼던 것이다. 황국의 왕위는 세습되지 않는다. 마영달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곧바로 그를 대신할 새 마왕이 임명될 것이고, 마봉춘은 요새화된 마왕성에 거주할 권리가 사라지게 된다. 대역을 세우고 장례를 미루면서까지 시간을 번 것은 마왕성이라는 곳을 함정으로 이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 안개를 일으켜 본다 한들 이곳을 빠져나가지는 못해. "

그 말 대로였다. 자산성은 황국의 최선선 방어 기지고, 이곳은 그 전선 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마왕과 그 가족이 머무는 거처이다. 날아다니는 새조차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요새화된 마왕성은 암살자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환경이었다. 

일단 탁 트인 곳이 없다. 내성의 정원조차 성이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위치에 세워져 있었고, 그나마도 두꺼운 문과 벽으로 성 내부와 격리되어 있었다. 통로는 좁고, 몸을 숨길만한 어두운 구석도 하나 없다. 곳곳에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그들은 서로를 볼 수 있는 정도의 거리와 위치에 있어 누군가가 습격당한다면 곧바로 경보가 울린다. 성벽은 물론 누각의 외벽도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돌 벽이고, 그 문과 창틀의 살은 나무가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술 더 떠서 창틀에 덧댄 것은 보통의 창호지가 아니라 투명한 강옥을 얇게 깎아 만든 판이다. 지독하게 비싼 물건이지만, 이 강옥 판유리는 어지간한 화살이나 단총의 납단 정도는 튕겨낼 정도로 단단하다. 게다가 묘하게 빛을 산란시키기 때문에, 강옥 유리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외부로 드러난 하수구는 없고, 화장실 문제도 성주부터 말단 병사까지 요강과 변기를 사용했다. 그것을 포함해 드나드는 사람과 물건은 일단 성문에서부터 철저하게 검사된다. 성 자체도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어 내성의 입구에서 다시 한 번 검문이 이뤄진다. 경비를 서는 병사들의 명부는 매일 추첨하며, 장교는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고 병사들끼리도 서로 얼굴을 알기 때문에 그 사이로 누군가 숨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녀를 포함해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사돈의 팔촌까지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로만 이뤄져 있고, 추첨으로 근무지를 교대하는 것은 병사들과 같았다. 신체검사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철저하다.

게다가 성의 구조도 훌륭해서, 안개의 술법을 일으켜 본들 외성의 벽에서 막힐 뿐이다. 종이접기로 만든 새를 통해 성의 이곳저곳을 염탐한 번서는 막막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말로 작은 새라면 모를까, 아니 작은 새라도 내성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일단 외성 벽을 넘는 일 부터가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모험이었다.

번서는 비로소 단총으로도 정확한 저격 솜씨를 선보이던 진소아가 어째서 마영달을 성 밖으로 꾀어내야 했는지를 절감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살아 보았기 때문에 번서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총기가 넘치는 여인이다. 그럼에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아마도 그것은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 생사를 확인한다 하더라도 후속처리를 할 방법이 없구먼 그래.... "

멀리 서 있는 마왕성을 올려다보며, 번서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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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여월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부상을 당한 채 적고적 무리와 대치하고 나서 연기가 그녀를 덮쳤던 것, 그리고 간신히 연기를 뚫고 마왕성의 비밀통로를 탈출했던 것 까지는 기억할 수 있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까만 암흑 속이었기 때문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이 새까만 암흑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가림이 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언가에 의해 반듯하게 누운 자세인 채로 전신을 꼼짝할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잊고 있었던 옆구리의 상처의 고통도 되살아났다.

" 우우우... "

입에는 재갈이 채워져 있었다. 단단한 대나무 같았다. 다행히(?)누운 자세였기 때문에 입가로 침을 질질 흘려내는 추태는 피할 수 있었지만, 재갈이 신경쓰는 바람에 숨을 쉬기가 약간 어려워졌다. 기혈은 정상이었고, 내공을 모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딱히 특별히 약이 먹여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내공을 모아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구속을 풀어 보려 시도했지만, 그녀의 손발에 대어져 있는 구속구는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아 고통만 더 심해졌을 뿐이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는 구속 상태 속에서, 당여월의 불안감과 초초함은 더해만 갔다.

번서가 당여월을 보러 내려온 것은 경운경이 잠자리에 든 다음의 일이었다. 감금실 겸 조교실은 방음이 잘 되어 있지만,  그래도 역시 그녀가 깨어있는 시간 동안 이런 일을 벌이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는것이다.

당여월은 깨어난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모양인지, 그녀의 백자 같은 하얀 피부에는 미세하게 땀이 맺혀 있었다. 손발을 구속하고 있던 철심을 박아 만든 가죽 구속구의 주변 피부도 붉게 쓸려 있어 그런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역신 자신이 살아오지 않는 한, 이런 식의 구속을 풀기는 불가능하지...

근본적으로는 당여월은 서봉과 비슷한 여자다. 남자를 알고,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이런 여자를 굴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식은 번서로부터가 아니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에 중독되게 하는 것이다. 서봉 같은 경우 인간이 아닌 애완동물로써 일거수 일투족 하나가 모두 관리되는 쾌감이다.

당여월 역시도 비슷하게 갈 수 있을 것이지만, 모든 인간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먼저 국무령에게 했던 것 처럼, 그녀의 심층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두려움과 쾌락을 살펴보기로 했다.

" 우으... "

머리에 금침이 꽂히자, 당여월의 의식은 순식간에 흐려졌다. 몽롱해진 그녀의 입에서 재갈을 풀어낸 다음, 번서는 그녀의 귓전에 숨을 불어 넣었다. 청각 일체를 담당하고 몸의 균형을 조절하는 귀는 보기와는 다르게 몹시 민감한 성감대다. 그렇지 않아도 기혈을 보하고 성적인 감각을 날카롭게 하는 약재의 효과가 완전히 돌기 시작한 당여월은 귀에 따스한 숨이 불어넣어지자 어께를 부르르 떨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 이름은? "

" 당...여...월... "

" 나이는? "

" 이십...구... 세. "

당여월은 약간 망설이기는 했지만, 다른 여자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의 제압술이 위력을 확인하며, 번서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당여월은 들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분좋게 부는 미풍 사이로 은근한 꽃향기가 실려오는 녹음이 가득한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의 손에는 헝겊을 꿰메어 만든 인형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인형을 몹시 애지중지 했었다.

" 예령아~ "

예령(藝鈴)은 그녀의 어릴적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 모두 죽고 없었다. 그런데 누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일까? 돌아보니 이제 중년 초입에 들어서는 아름다운 미부인이 그녀를 향해 팔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 엄마! "

주저 없이 달려가서 그녀의 품에 안기자,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가 코 끝을 파고들었다. 안심되는 냄새. 엄마의 냄새다.

" 너무 멀리 가면 안된다고 했잖니. "

" 하지만 아빠가 오시는걸 빨리 보고싶단 말이에요! "

예령의 아빠는 [전쟁]이라는 것을 하러 갔다고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비로소 전쟁이 끝났고, 아빠가 돌아오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한밤을 자면 아빠가 돌아오시냐고 하루에도 한번씩 엄마를 보챌 정도였다.

" 아빠!~~~ "

" 예령아!... "

그로부터 다시 며칠 후, 매일밤을 내일은 아빠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 끝에, 마침내 예령의 아빠가 돌아왔다.

전쟁은 모진 것이다. 그리고 특히나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다. 예령의 가족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돌아온 아빠는 예전의 아빠가 아니었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지만, 이내 전쟁이 남긴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인과 아이를 학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믿고 사랑하고 있던 [아빠]에게 처음 욕을 들었을 때 예령의 나이는 겨우 여덟살이었다. 그 일은 그녀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마음의 상처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욕으로 풀리지 않는 경지가 되자 폭력이 시작되었다. 가장은 가솔을 보호해야 한다. 보호해야 할 [책임]가 있는 가장이 그 부인과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인종이라는 증명일 뿐이다. 매일 예령의 팔다리에, 심지어 얼굴에까지 멍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런 생활이 열두살 때 까지 계속되었다. 4년 동안의 학대를 거치며 예령은 이미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웃으면 기분 나쁘다며 때리고, 울면 시끄럽다고 때렸기 때문이다. 숨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그 나이때의 소녀에게 있어서 그 작은 집만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모친이 그녀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감행한 것은 예령의 나이가 열두살 되던 해의 추운 겨울 밤이었다. 하지만 여자의 몸에다 애까지 딸려 있으니 도망치는 것도 여의치 않다. 그녀들은 이틀을 도망쳤으나, 고갯길을 넘어가던 중에 한 토지신의 사당 앞에서 결국 따라잡혔다. 엄마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아빠의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 안돼!... 아빠!... 엄마!... "

달빛을 받은 칼날이 번득였고, 모친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부친의 충혈된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소녀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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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아아!... 으아아아아!!!... "

거기까지 보았을 때, 번서는 큰 충격을 받고 당여월의 정신에서 [추방]되었다. 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벽에 기댄 채 술법이 깨진 충격에서 회복하는 동안, 당여월은 배가 흔들린다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손발을 구속하고 있던 철심이 박힌 가죽 띠 사이로 피부가 찢어져 피가 배어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고통스러워서라도 그만 둬야 할 상황임에도 아랑곳 없이 거칠게 몸부림치는 그녀를 보며 이래서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번서가 수혈을 짚었지만, 격렬한 반탄력을 맛보았을 뿐이다. 궁여지책으로 삼화옹의 금침을 꺼내 그녀의 목과 머리 혈도에 꽂고 나서야(그것은 몹시 난이도있는 시술이었다), 비로소 그녀의 퍼덕거리던 몸의 경련이 잦아들었다.

" 아... 으으으... "

당여월의 눈이 뒤집히고, 입가로 마른 거품이 새어나왔다. 뇌로 가는 기혈을 차단해 잠깐 뇌의 기능을 정지시켰던 것이다.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기는 했지만 당장 격렬한 경련은 진정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금침을 뽑고 수혈을 짚은 다음에야, 비로소 당여월의 팔다리를 풀어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수 있었다.

여자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은 아빠다. 그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는 진리였다. 그 무조건적인 존경과 사랑의 대상에게서 4년이 넘게 학대를 당해 자폐증에 걸릴 정도가 되었고, 마침내는 모친까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 기억을 반추시켰으니 이정도의 거부반응은 오히려 가볍다 할것이다.

" 아... 우우... "

분명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면서도 울고 있었다. 방금전 기억을 되살린 여파일 것이다. 번서는 잠든 당여월의 몸을 뒤집은 다음 그 항문에 마비약을 발라 넣었다. 뇌에 있는 신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혈에도 금침이 박혔다. 가죽끈으로 구속할 수 없었으니 약과 침으로 몸을 제압해 두려는 것이었다. 다시 반듯하게 누여진 당여월은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 번서는 당여월의 꿈을 통해 침입해 그녀에게 가장 신뢰하는 이성으로 가장한 다음, 그 사람과 자신의 존재를 일치시킴으로써 무리한 제압술을 쓰거나 하는 일 없이 그녀를 조교에 협조적으로 만들 셈이었다. 헌데 잠재의식 속에 이토록 큰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이런 상황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술법이 깨지면 술자는 타격을 받는다. 금방 깨닫지는 못했지만, 갑판의 통로로 나온 번서의 앞섶이 흘러내린 코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국무령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을 정도였다.

" 주인님, 피가!... "

그제사 내려다보고 상황을 깨달은 번서는 당황하는 국무령부터 진정시켰다. 가볍게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는 당여월의 조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냥 서봉처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쾌감으로 물들여버릴까 하다가, 왠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으므로 그녀의 꿈 속에 다시 쳐들어 가 보기로 하고 침실로 국무령을 불러들여 즐기면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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