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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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서는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합리라는 것은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몹시 합리적인 판단을 따르자면, 당여월의 미모는 서봉이나 국무령 이상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번서가 본 여자 중에서도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인이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기준을 가지지만, 그래도 같은 인류 끼리니까 그 기준 중에 어느 정도는 겹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번서 앞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당여월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미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 그 녀석들이 죽기 전에 기필코 범하겠다는 쓸데없는 말을 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 적이라도 반할 정도야. "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피부는 그야말로 [백옥같이 하얗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체모는 칠흑같이 검었고, 허리까지 드리워진 머리카락은 그 끝까지 윤기가 흘렀다. 화장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을 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붉은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는 가지런하고, 혀는 알맞게 붉은 색이었다. 코는 보통보다 높았지만 그 콧날은 색국인처럼 선이 굵은 직선 형태가 아니라 초승달이 연상될 정도로 우아한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있었고, 갸름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뺨 위로 살짝 홍조가 올라 가련한 인상마저 주고 있었다.

그 몸은 극상이었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왔으며, 적당한 골격에 알맞게 살과 근육이 붙어 있어 그야말로 여자다운 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과시하는것 처럼 보였다. 또한 번서가 가장 신경쓰는 부위 중 하나인 유방은 눕혀진 상태에서도 형태를 전혀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보기 좋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번서의 기준으로는 좀 작았지만, 보통 여자보다는 큰 편), 유두와 보지는 모두 깨끗한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보지 아래로 드러난 항문은 귀엽기까지 한 연보라색으로, 거기까지 화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될 정도였다. 또한 다른 무림인들과는 다르게 손톱과 발톱까지 세심하게 관리하는 모양으로, 검을 주로 쥐는 왼손에 약간의 굳은살이 박혀 있는 것을 제외하면 국무향이나 서봉보다 훨씬 더 여자다운 손발을 하고 있기도 했다.

다만, 처녀는 아니었다. 손가락을 집어넣기도 저어될 정도로 예쁜 보지 안으로 손가락을 굳이 집어넣어 검사를 해 봤을 때 걸리는 것이 없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약간 실망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사실 번서의 처음의 여자도 기녀다. 때문에 그는 여자의 정조(특히나 처녀성)에 대해서는 [처녀면 더 좋지만, 아니라도 흠은 아니다]는 관대하기 그지없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흠]으로는 등에 난 커다한 총상 흉터를 들 수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탄환을 맞아서 생긴것이 분명한 그 흉터는 총알을 빼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뒷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난 것이 분명했다. 완벽하다 싶은 그녀의 몸에 있는 유일한 옥의 티랄까. 번서는 상처를 다루는데도 일가견이 있고, 흉터를 지우는 시술도 할 수 있으니, 노예로 만드는 대신에 흉터를 지워주는 것이 괜찮은 거래(?)일 것이다.

" 정말 운이 좋군, 나는. "

그렇게 중얼거리며, 번서는 먼저 당여월의 상처(옆구리를 깊숙히 파고든 쇠 파편이 포함된)에 대한 치료부터 시작했다. 그것은 질 나쁜 철로 만들어진 도끼에 맞은 자국이었지만, 호체기공 덕에 치명상은 면하고 있었다. 다만 파고든 날붙이의 파편 때문에 감염증을 일으킬지도 몰라서, 파편을 빼 내고 깨끗한 물로 상처를 씻고 나서 봉합하고, 또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효능을 가진 약초까지 붙여 두는 이중 삼중의 배려를 했다.

그 다음은 이제 상처가 안정된 당여월의 전신에 흐르는 기혈부터 차근차근히 검사할 차례였다. 특별히 튀른 내공의 흐름은 없었다. 혹시라도 국무령처럼 특이한 체질인지 알기 위해서 피도 약간 채혈한 다음, 다른 노예들을 붙잡았을 때 처럼 감금실에 감금하고 침과 약으로 금제를 베풀어 두었다.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매달지는 않았지만, 침대에 구속한 다음 흥분제와 마비약을 먹여 두었다. 의식이 없을 때는 입이 아니라 항문으로 먹여야 하는 것이라, 이 또한 그의 소소한 재미 중 하나였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번서가 서봉의 시중을 받으며 당여월을 어떻게 [요리]할까를 놓고 즐거운 계획을 짜는 동안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선창으로 내다보니 이제 마영달의 죽었다는 소식이 이제 성 내부에 퍼진 모양으로, 선창 근처에서도 삼삼오오 모여서 의논하는 광경이 보였다.

" 이제 떠나야 할 때 겠지. "

내일 출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 번서는 마지막으로 놓친 것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뜻밖의 손님인 경운경 때문에 계속 국무향을 재워 둬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날은 국무령이 불침번을 서는 날이었다. 서봉을 침대로 끌어들인 번서는 한번 그녀의 자궁에 사정해 준 다음 젖마개를 빼낸 그녀의 유방에서 모유를 빨거나 만지기 좋게 말랑거리는 그것을 주무르며 즐기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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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번서가 갑판에 올라왔을 때, 번을 서고 있던 국무령이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난처하기 그지없다는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기에 사정을 물어봤더니, 경운경이 부엌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아침밥을 짓겠다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전날 불침번을 서지 않은 서봉의 담당이지만, 주인인 번서의 [손님]이라 함부로 막을 수도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괜찮다. 일단은 자도록 해라. "

" 아...네 주인님. "

혼자서는 잠들지 못하는 응석을 부리는 국무령을 선실까지 데리고 가서 재우는 것도 주인의 일이다. 그녀가 잠에 빠진 것까지 확인한 후, 서봉을 대동한 번서는 부엌으로 갔다.

" 흐억? "

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연기가 얼굴로 쏟아지는 통에, 번서는 잠깐 당황했다. 서봉도 이게 공격인지 사고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검댕 투성이가 된 경운경이 구르듯이 부엌에서 나왔다.

" 상공, 죄송해요!... "

번서의 옷자락을 잡은 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경운경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길 잃은 강아지보다 약 이만 배 쯤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야단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먼저 부엌의 창문을 열어 연기를 빼내고 불을 끈 다음, 자초지종을 듣자니 밥을 태웠다고 했다.

밥을 짓는 것을 포함한 신부수업은 고사하고, 열두 살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줄곧 손에서 검을 놓지 않고 살아왔던 경운경이 밥을 제대로 지을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물 조절과 불 조절을 동시에 실패해 밥을 태우는 바람에 완전 당황한 그녀는 우왕좌왕하다가 연기를 심하게 들이마시기까지 했다. 마침 번서가 부엌문을 열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 안에서 꼼짝없이 질식했을 것이다.

사고뭉치로군...

하지만 번서도 책임질 줄 아는 남자다. 한번 떠맡기로 했으니 끝까지 경운경을 돌봐줄 작정이었다. 밥 짓는 일을 서봉에게 맡긴 후 경운경을 다시 목욕탕으로 보낸 번서는 그녀가 몸을 씻는 동안 혼자 배를 출발시킬 준비를 했다.

" 이런 답답한 옷 밖에 없는가요, 상공? "

막 활대를 제자리에 고정시킨 다음 돌아보니, 번서가 노예들을 위해 주문한 비단옷을 경운경이 입고 있었다. 그녀의 단벌옷은 세탁 중이었고 새로 입으라고 내준 국무령이 입었던 실내복도 아침의 일로 검댕 투성이가 되어 빨래통에 집어넣었으니, 달리 입을 옷이 없었던 것이다. 번서가 갑판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 서봉이 궁여지책으로 꺼내 준 것이리라. 얼굴을 비롯해 전신을 가리는 그 복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헐렁해 보였지만 실은 이중 구조로, 안감은 각 노예의 몸 치수에 맞게 제작되어 있어서 아직은 소녀티를 내는 경운경에게는 몹시 헐렁하고 풍성했다. 게다가 전신을 가리는 것이니만큼 답답할 만도 했다.

" 그것밖에 없다네 소저. 내 동행들은 그 옷이 정복이거든. "

" 두 분 언니는 상공의 부인인가요? "

" 그냥 동행이라고 해 두는 편이 좋겠지. 내 편의를 봐주는 이들이니까. "

" 그분들은 왜 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가요? "

"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러하다네. 그녀들의 신앙에 따르면 나 이외의 남자에게 얼굴과 머리카락을 보여주는 건 죄악이거든. "

뭐가 그리 알고싶은것이 많은지 이것저것 캐묻는 경운경을 상대해 주면서, 번서는 마침내 출항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닺을 올리고, 돛대에 고정 작업이 끝난 활대에 감긴 돛을 줄을 당겨서 펼치기만 하면 바람을 받은 배가 움직일 것이다. 이때는 아침의 사고와는 달리 경운경도 제법 도움이 되었는데, 번서의 지시에 따라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했다. 그녀는 그것이 몹시 기쁜 눈치였다.

" 경소저. "

" 운경이라고 불러 주세요. "

" 운경소저. "

" 네 상공? "

" 가까운 친척들은 있소이까? "

번서의 질문에 경운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질문을 하고 나서 번서도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역모 혐의를 받은 죄인은 연좌된다. 아마도 가까운 친척은 모두 죽거나 아주 운이 좋았어도 몸을 피했을 것이다. 연락이 되는 친척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에, 번서는 솔직히 사과했다.

" 미안하오 운경 소저. "

" 아니에요... "

그럭저럭 하는 동안 아래쪽의 정리를 끝낸 서봉이 올라왔다. 그녀에게 키를 잡게 할 셈이었지만, 그전에 관인으로 보이는 자가 한명의 병사를 데리고 배 근처로 다가왔다.

" 멈추시오! 긴급한 왕령으로 모든 통행이 금지되었소! "

마왕인 마영달이 죽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괜한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번서는 부두와 연결을 위해 사용하는 배다리를 내려 주었다.

" 무슨 일이오 대인? "

갑판으로 올라온 관인에게 물었을 때, 처음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병사를 시켜 배를 수색하려 했다. 번서의 배는 숨겨야 할 부분이 많았고 지금은 포로까지 가둔 처지라 그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었다. 다 죽이고 배를 출발시킬까 하던 차에, 관인의 눈치를 살피니 쩐이 필요하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고 있었다.

" 어허, 역주(力走; 부두 관리인으로 관인보다 지위가 높다) 어른께 필요한 절차는 다 끝내 놓았는데 굳이 수고스럽게 또 이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

눈에 뜨이지 않게 관인의 허리춤에 일각 한개를 찔러 넣어 주자,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병사들을 불러들인 다음,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인정(人情)이 넘치시는 훌륭한 공자시구려. 확실히 말씀처럼 일을 번잡하게 중복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왕명으로 출항이 금지되어 있으니 당분간은 배를 정박해 두셔야 할게요. "

그것만은 아무리 뇌물을 쓴다 한들 관인이나 역주의 권세로는 어쩔 수가 없다. 번서는 그러마 하고 관인 일행을 돌려보냈다. 그동안 조마조마해 하고 있던 경운경과 서봉은 번서가 능숙하게 그들을 돌려보내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 십년감수했어요... "

안도하며 주저앉은 경운경의 모습이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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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안면을 틔운 부두의 거간꾼에게 배를 봐 주도록 돈을 주고 부탁한 다음, 서봉과 경운경을 데리고 무역시로 향한 번서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시장의 모습을 발견했다.

" 점포도 모두 닫혀 있습니다. "

확인차 거리 끝까지 달려갔다 온 서봉이었다. 경운경의 옷이라도 사 줄까 하고 나왔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잠시 난감해 하며 우두커니 서 있던 번서의 옆으로 지나가는 노인이 보였다.

" 어르신, 시장이 열리지 않은 이유를 아시는지요? "

" 공자는 소식에 어둡구먼 그래. 어제 마왕께서 피습을 당해서 어제부터 범인을 잡으러 병사들이 성 내부를 발칵 뒤집어엎었어. 성문도 모두 굳게 잠겼고 쥐새끼 하나 나갈 수 없도록 엄중하게 지키는 중이지. 상인도 드나들 수가 없고 손님도 오지 않으니 시장이 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

" 마왕께서는 무사하신 겁니까? "

" 거기까지는 내가 모르는 일일세, 피습 당했다는 이야기뿐이야. 듣자니 같이 있던 모용대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더군. "

설마 이놈이 안 죽은 건가?...

번서는 뒷목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치에 납탄을 맞은 데다 목줄기를 너덜너덜해 질 때 까지 찔렸었다. 불사신이라면 모르되 그런 부상을 입고서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왕령이라니 이건 무슨 조화인지 기가 찰 밖에, 같이 듣던 경운경도 어이가 없기는 번서 이상이었다. 자기 손으로 모가지를 거의 딴거나 다름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혔던 것이다. 그녀가 뒤집어쓴 피만 해도 한말 가까이 될것이다.

" 상공, 정말로 마영달이...? "

" 아니 그럴 리는 없지. 경소저가 직접 놈의 목을 따지 않았소이까? "

노인이 저만치 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번서와 상의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경운경의 얼굴에는 불안감보다는 불신과 적개심이 가득했다. 할 수만 있다면 한번 더 죽이고 싶다는 듯 한 얼굴이었다. 번서로써도 그의 죽음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마왕성 내부의 사정을 알아보기로 했다.

" 사실, 어머니께서 알고 지내시던 침모(針母)가 있어요. "

좀 더 사정을 듣자, 모용휘의 저택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번서가 의심했던 내부의 정보원은 그녀였던 것이다. 헌데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경운경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아마 지금도 연락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가 정보의 대가로 요구하는 돈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패물을 다 처분하셔야 했죠. "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라면 차라리 쉽다. 번서는 연락 방법을 묻고 나서 경운경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여러 가지 좋은 말을 해 주면서 그녀를 데리고 배로 돌아갔다.

연락 방법은 갈대를 잘라서 그 밑동에서부터 특정한 거리에 칼집을 낸 다음, 성을 빠져나가는 수로 옆의 통발에다 꽂아 두는 것이었다. 갈대 피리를 만드는 법과 비슷했기 때문에(그러나 착각하기도 어려웠다) 정말로 눈썰미가 좋지 않으면 눈치 채기 어려운 연락 방법이었다. 전달 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무척 연락이 빨랐다. 진시에 통발에 신호를 했는데, 오시에 약속 장소와 시각이 같은 갈대의 끝에 묶여 있었으니.

약속시간에 맞춰 통보받은 장소인 객잔 뒷길로 들어섰을 때, 번서는 수많은 인기척을 느꼈다. 그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서봉을 때맞춰 제지하지 않았다면 칼부림이 날 뻔 했다.

" 유춘연은 죽었고, 그 딸은 행방이 묘연하지. 누구로부터 얻어 들은 것인지 모르나 번지수를 잘못 골랐소 공자. "

그림자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성별을 종잡기 어려운 것이었다. 노인 같으면서도 아이 같고, 여자 같으면서도 남자 같았기 때문이다. 이내 번서는 그 목소리 자체가 일종의 음공이며, 그가 사용하는 환술처럼 듣는 이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하마터면 그 목소리에 말려들 뻔 했지만, 스스로에게 건 여러 가지 [강화]덕분에 가까스로 정신을 잃는 지경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봉의 경우는, 이미 번서에게 정신적으로 종속되어 있는지라 그런 종류의 현혹에는 완전하게 면역이 있었다.

" 정보를 거래하는 자 치고는 구구절절이 말이 많군. 거래를 하겠다는 거요 말겠다는 거요? "

" ... 놀랍군. "

다시 목소리가 들린 후, 인기척이 썰물같이 빠져 나갔다. 그리고 건물 그림자가 만든 어둠 속에서 따로 그림자가 하나 일렁이는 듯 하더니, 밝은 곳으로 나온 것은 서봉의 가슴께 밖에 되지 않을 만큼 앳된 소녀였다.

" 가격은 우리가 정하고, 흥정하는 법은 없어요. 원하시는 정보가 무엇인가요? "

그 목소리가 참으로 아름다워서, 번서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잊을 뻔 했다.

" 마영달의 생사를 확인해 주시오. "

다시 건물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고, 소녀는 전음을 듣는 듯 했다.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녀의 시선이 다시 번서 쪽을 향했다.

" 금편 여섯 개. 절반은 지금, 절반은 정보와 교환하시죠. "

딱 번서의 수중에 남아있는 돈 만큼이었다. 하지만 마영달의 죽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 돈보다 중요하다. 그는 선수금을 지불했다.

" 그럼 내일 같은 시각에 이곳에서 만나 뵙기로 하지요. "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소녀는 뒷걸음으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서 사라졌고, 어느 틈에 주변의 기척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 저런 자들이 있다니, 오늘 또 내가 안계를 넓히게 되는군. "

번서는 사실 지금까지 이룬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약간의 모략과 여자를 더한다면, 윤숭의 일족을 전멸시키고 황국을 구렁텅이에 빠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헌데 방금 그이 예상을 초월하는 자들을 보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그가 지금 가진 패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윤숭은 돈도 있고 권세도 있다. 번서는 물론 그의 노예보다 무서운 자들을 수하로 부릴 방법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윤숭이 지배하는 천하를 뒤흔들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절대적인 실력과 조력이 있어야 했다.

경도로 갈 마음이 사라진 번서는 자신의 실력을 좀 더 키울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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