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자시가 가까와 왔을 무렵, 진소아는 번서의 방문을 받았다. 안개를 깔고 몰래 숨어들기는 했지만, 제대로 창문을 두드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녀가 옷매무새를 수습할 시간은 주는 신사적인(?) 방문이엇다.
"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지요? "
" 제안할 것이 하나 있소이다. "
단총을 등 뒤에 숨긴 진소아가 문을 반쯤 열고 무슨 제안인지 물으려는 찰나, 그녀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번서의 등 뒤, 서봉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거적에 싸인 사람의 발이었다. 한눈에 봐도 시체임이 분명한지라,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좋은 일은 아닌것 같군요. "
" 아니, 소저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오. "
진소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번서에게 방문을 열어 주었다. 거적에 싸인 시신을 방 안에 들인 다음 서봉이 지붕위로 올라가고 나서야 번서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 이 사람은?... "
거적안에 들어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유춘연의 시신이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시신이다. 그녀는 눈을 찌푸렸지만,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 시신의 몸에 난 상처자욱을 알아보았다.
" 설마 이 여자가 밤귀신? "
" 두명 중의 한명이지요. 그리고 다른 한명도 여기에... "
곧이어 번서의 등 뒤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원래 입고 있던 피풍의 차림의 경운경이었다. 두 손이 등 뒤로 돌려 묶인 채로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하는 기색은 없었다.
" 진 소저. "
번서가 자신의 진짜 성씨를 부르자, 진소아는 화들짝 놀라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번서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도 상관하지 않고 거적으로 유춘연의 시신을 덮은 다음, 경운경의 손을 묶고 있던 밧줄도 풀었다. 그녀가 자신의 입에 물려진 재갈을 푸는 동안, 번서는 다시 돌아서서 진소아를 마주보았다.
" 당신도 이들처럼 마영달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이다. "
" ... 데체 그걸 어떻게?... "
" 이곳저곳에서 보고 듣는 것이 많다 보니... "
그는 붙임성있게 웃어 보인 다음 경운경을 불렀다. 그녀는 선선히 그의 옆에 와서 섰는데, 소녀다운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경 소저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소. 그리고 진 소저의 목표 역시 마영달의 목. 그렇다면 두분이 협력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소이까? "
이미 경운경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번서는 그녀에게 모친의 죽음을 알렸고, 자신의 계획 또한 말해 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담한 계획이었고 진소아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기 힘든 것이었다.
" 내가 뭘 하기를 원하시죠? "
" 마영달을 불러내는 역할을 맏아 주시길 바랍니다. "
번서의 계획은 이러했다. 진소아가 유춘연과 경운경 모녀를 추격하여 치명상을 입은 그녀를 발견하고 경운경을 제압해 붙잡은 것으로 하고, 포상금을 주기 위해 나온 마영달을 저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계획이군요. 마영달의 앞에 가면 무장을 해제당할 것이 분명할진데 무슨 수로 그를 저격하라는 거죠? "
" 그걸 고인께서 담당할 것이오. "
산 자는 신체검사를 할지언정 죽은자를 검사할 리는 없다. 유춘연의 뱃속에 단총을 숨겨 들어가라는 것이다. 경운경을 위해서는 입에 물린 재갈 안에 암기로 쓸 수 있는 단검을(접어서 펼치는 것으로 극히 짧은 것이었지만, 알맞은 부위에 사용한다면 치명적인) 준비해 두고 있었다. 대담하기도 했지만 사자를 모독하는 행위다. 그런데도 낮빛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계획을 도면까지 그려 가며 설명하는 번서를 보며, 진소아는 벌린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 퇴로는 소생이 확보해 드릴 것입니다. 보다시피 눈속임을 하는 하찮은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말이지요. "
" ...안개를 일으키는 술법을 구사할 줄 아시는 분이 겸손하시기도 하시군요. "
그리 오래 고민할것도 없이, 진소아는 동의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번서의 제안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유춘연의 시신을 욕보이는 일이 걸끄럽기는 했지만, 복수를 이룰 수 있다면 그녀도 용서해 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석해서 제공한 단총 두자루를 죽은 유춘연의 보지와 항문 안에 숨기는 일도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 이제 내일이면 여러분의 복수가 이뤄질 것입니다. "
" 그러길 바래 보죠. "
" 그리고 그 전에 소생이 필요한 정보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
" 무엇이죠? "
[당여월에 관한 겁니다]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당여월의 일을 묻자, 진소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진 소저의 정체를 함구하는 대신 요구한 정보가 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
[그래요. 무슨 좋은 수라도 있나요? ]
[소생은 남이 꾸미는 일을 망치는데도 약간의 재능... 이 있어서 말입니다. 특히나 당여월 같은 악인의 꿍꿍이를 망칠 수 있다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
[알았어요.]
번서가 짐작한 대로, 진소아가 당여월에게 제공한 정보는 마왕성의 비밀통로의 위치였다. 하지만 그녀가 당여월에게 제공해 주지 않은 정보도 있었다. 그 통로는 탈출 전용이라 안쪽에서는 성내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없다는 점 말이다. 당여월이 성내로 통하는 문을 여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틈에, 그녀는 밤귀신의 시체를 확인하고 현상금을 수여하러 나타난 마영달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 넣고 멀리 가 있을 계획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번서는 모처럼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진소아 역시 호락호락한 여자는 아닌 것이다.
[훌륭하시군요.]
[과찬이세요.]
서로 웃음을 교환한 다음, 번서는 진소아의 숙소를 나왔다. 지붕 위에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서봉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자신의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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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 진소아가 가져온 하나의 시체와 한명의 포로는 평소 늦잠을 자는 것이 취미던 모용휘의 새벽잠을 날려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에는 마영달까지 그의 저택에 와 있었다.
" 훌륭하다, 잘 해 주었다! "
" 황국의 백성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장소는 모용휘의 집 안마당이었다. 정원 한가운데 엎드려서 마영달에게 예를 취해 보이고 있는 진소아의 좌우로 유춘연과 경운경 모녀가 있었다. 알몸 위에 거적 하나만 덮여 있는 유춘연의 시신은 그녀의 오른쪽에, 번서의 조작이 가해진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재갈이 물려져서 꿇어앉혀져 있는 경운경은 그녀의 왼쪽이었다.
그런 그녀들에게서 여섯간 정도 떨어져서 한단 높은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모용휘의 정원을 내려다보던 마영달의 비대한 몸이 출렁였다. 자기딴에는 호쾌하게 웃는 모양새를 연출한 모양이었지만 제삼자가 보기에는 비계의 출렁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단총의 유효 사거리는 약 다섯간(間; 1間 = 2m 정도), 진소아의 위치는 마영달이 시체를 직접 확인하거나, 적어도 계단 아래까지는 와야 확실하게 그를 사살할 수 있었다. 바로옆에 가로놓인 유춘연의 시신에서 총을 꺼내는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가까울 수록 좋았다.
멀리서는 번서가 안개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운경이 가지고 다니던 연막탄을 터트리면 군중들이 그곳에 시선이 집중될 것이고, 그때 연막탄에 섞어서 안개를 퍼트리면 순식간에 장내를 전부 뒤덮을 것이다. 물론 지금 그를 수행하고 있는 서봉은 일이 벌어지면 즉각 그를 보호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여월은 이미 행동에 들어갔는지 군중의 무리 속에 있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년이군 그래.
급하게 행동하면 놓치는 일이 생긴다. 번서는 구암도의 채석장에서부터 살아 나오는 동안 이 법칙을 몆번이나 뼈저리게 느낀 바가 있다. 당여월이 무엇을 흘렸을지, 어떤 것을 놓칠지를 생각하는 동안, 자신을 그렇게나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밤귀신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마영달의 비대한 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 그래, 경유외의 처와 딸이라고?... "
" 그렇다고 합니다. 딸년은 올해 열여섯이지요. "
모용휘의 설명을 전해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마영달의 시선이 경운경에게 향했다. 재갈이 물려져 있어 그 생김새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본시 여색을 즐기면서 비열한 성격을 가진 자들일수록 반항적인 여자를 강제로 범하는 일에 맛을 들이는 법이다. 마영달도 예외는 아니어서, 권력으로 [찍어 누른]여자들을 일렬로 세운다면 자산성을 한바퀴 감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 올해 열어섯이란 말이지.
쿵, 쿵...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조차 둔중하기 그지없다. 그 흉물스러운 모양새는 돼지랑 비교하면 돼지에게 모독적일 정도였다. 번서는 자신도모르게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그와 마영달의 거리는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영달이 계단을 다 내려와서 한걸음 더 내딛었을 때, 진소아는 유춘연의 시신을 덮고 있던 거적을 걷어올렸다.
죽은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신이다. 창백하고 상처투성이긴 했지만, 여자의 나체는 남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바가 있었다. 무슨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모르는 마영달의 시선이 죽은 유춘연의 시신에 쏠렸을 때, 경운경의 두 손을 묶고 있던 새끼줄의 매듭이 끊어졌다.
" 타앗!... "
펑!.. 퍼벙!...
짧은 기합성이 울린 다음 진소아의 양손에는 단총이 들려 있었다. 마영달이나 모용휘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두발의 폭음이 연속해서 울렸다.
" 커흑!... "
" 컥!... "
진소아의 사격술은 진짜였다. 발사된 탄환은 각각 마영달의 명치와 모용휘의 왼쪽 가슴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마영달에게 달려든 경운경은 입에 물고 있던 단도로 그의 목줄기를 찔러서 그의 죽음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호위병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번서는 손에 숨기고 있던 연막탄을 진소아의 발치에 던졌다.
퍼엉!...
메캐한 연기와 피어오르고 진소아가 그 연기 속에 몸을 숨기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 동안, 경운경은 집요하게, 몆번이나 마영달의 목줄기에 칼날을 박았다. 마영달의 목줄기에서 뿜어져 나온 피를 뒤집어 쓴 그녀의 형상은 귀신같이 변했고, 이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은 병사들이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창을 꼬나들고 총을 겨누었을 때, 연막 속에서 뻗어나온 진소아의 손이 경운경의 뒷덜미를 잡아서 연기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주변은 순식간에 어두운 안개로 뒤덮였다. 물론 번서가 쓴 술법이다.
자기가 쓴 술법에 자기가 걸려드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번서의 시야는 안개 속에서 제한되지 않고,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향을 잃고 바닥을 기는 진소아와 경운경의 손을 붙잡아서 아직 혼란에 빠져있는 군중들 속에서 그녀들을 빼냈다.
" 고마워요. "
" 감사합니다 은공... "
" 내가 약속했지 않소, 두사람 살길은 찾아 주겠다고. "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자산성 밖에 있는 숲까지 내달린 세명은 거기서 한숨을 돌렸다. 진소아와 경운경. 그중에서도 경운경은 마영달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 쓴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번서의 앞에 엎드렸다.
" 원수를 갚는데 도움을 주셨으니, 평생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은공... 시비로라도 받아 주세요. "
번서는 잠시, 그러니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그래도 경운경을 노예로 삼는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경운경은 제법 아름답고 열여섯이라는 나이도 슬슬 적당한 혼처를 찾아볼 나이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녀는 번서와 같은 원수를 가진 동지인 셈이다. 그가 노예로 삼는 것은 처벌의 일종이고, 그의 적에게나 할 일인 것이다. 그는 손을 써서 경운경을 일으켜 세웠다.
" 소생도 마영달을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실행한 것은 진소자와 경소저 두명이지 내가 아니오. 그러니 오히려 내가 두분에게 신세를 진 셈이지. 경소저의 마음은 알겠으나 내 시비가 되겠다는 뜻은 거두어 주시구려. "
" 하지만... "
사실 진소아의 경우 자기 앞가림은 혼자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자였지만, 이제 고아가 된 경운경은 어릴적부터 모친과 함께 복수행을 하느라 그런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노예로 삼을 것 까지는 없었지만 일단 그녀의 뒤를 봐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후견인으로) 하는데 생각이 미친 번서는, 그녀가 자립할 수 있을 때 까지는 그녀를 돌봐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키운 다음에 잡아먹으실 작정인가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구려...]
진소아의 짖궂은 전음을 받아 넘기며 그녀와 헤어진 번서는, 경운경을 자신의 배로 데리고 돌아왔다. 자산성에서 소동을 일으켰으니 몸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잠시 그와 동행하면서 적당한 자리에 가게가 딸린 집이라도 한채 구해서 살게 할 생각이었다. 국무향은 숨기고 국무령과 서봉에게는 옷을 입혀야만 했지만, 일단 그녀를 목욕시킨 다음 선실에 재웠다.
지금쯤이면 당여월이 열리지 않는 문을 상대로 기운을 빼고 있겠지.
아직 마영달이 죽은지 두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비밀통로를 찾아 들어간 당여월이 당황하고 있는 것을 너구리 잡듯이 꾀어낸다면 오늘 그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될 것이다. 서봉에게는 배를 지키며 경운경을 돌보도록 지시를 내린 후, 국무령을 대동한 번서는 진소아가 알려준 비밀통로의 출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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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에 도착한 비밀통로의 입구는 왠지 피바다였다. 베이고 찔린 시신들은 대부분 무림인으로 보였는데, 누군지 알수는 없었어도 시신에 나 있는 상처는 낮이 익었다. 당여월의 솜씨였던 것이다. 시신의 몸에 남은 체온으로 계산해 본 결과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안 번서는 국무령을 준비시켰다.
비밀통로의 입구를 가리고 있던 위장을 걷어내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에서 쇠붙이 끼리 부딛쳐서 나는 날카로운 소리와 사레들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자세를 낮추어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얼마쯤 더 전진했을 때, 비로소 번서는 싸우고 있는 자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쪽은 물론 당여월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맞서고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양손에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척 봐도 좋은쪽에 속하는 무리는 아니었다.
" 당여월, 이 앙칼진 고양이 같은 년... 하지만 오늘 네년의 제삿날이 될것이다. 골반이 으스러질 정도로 범하고 나서 죽여 주지. "
" 흥, 내가 대줘도 못할 부실한 놈이 입만 살았구나. 빨간 바지를 입은 개 같으니... "
그러고보니 바깥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도, 지금 당여월과 대치하고 있는 자들도 모두 빨간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번서의 뇌리에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적고적(赤袴賊). 최근들어 급속히 그 수가 늘어가고 있는 도적의 무리들이다. 제복삼아 붉은 바지를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원래는 빚과 세금에 쪼달려(세금을 내기 위해 빚을 지는데, 그 빚의 이자가 불어나 도저히 갚을 수가 없게 된다) 유랑하던 자들이 도적으로 변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느새 전국에 널리 퍼진 하나의 조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수라고 할 만한 자들도 적고 무장도 형편없지만, 이들은 수가 많았다. 그리고 몹시 집요했다. 이 적고적의 원한을 사서 목숨을 잃은 이야기는 셀수 없을 정도였다.
적고적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한이 자신만만한 이유도 곧 알 수 있었다. 통로의 한가운데서 앞뒤로 포위되어 있는 당여월 발치에는 피가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경장 차림이라 어디를 당한 것인지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제법 중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거기에 지금 서 있는 위치조차 앞을 치면 뒤를 맞는 형국이라, 앞으로든 뒤로든 나가고 물러나는데 극히 불리했다. 좁고 천정이 달려 있는 통로라는 환경 때문에 검술을 펼치거나 자리를 잡는데 유용한 경공을 자유롭게 펼치기도 힘들었으니, 지금 상황으로만 보자면 당여월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차례일까?...
번서는 저런 상황에 처했어도 당여월이 금새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배에 남겨두고 온 경운경의 문제도 있고 해서 여유롭게 봐줄 시간도 없었다. 다시 국무령을 앞세워 비밀통로를 나온 번서는 비밀 통로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젖은 나무를 듬뿍 끼얹어서 풍성한 연기가 나도록 만든 다음, 근처에 쓰러져 있던 자들의 피풍의를 벗겨서 그것을 부채 삼아 연기를 비밀통로 안으로 밀어넣었다. 물론 품 안에 들어있던 마비약을 연기에 섞은 것은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콜록콜록... 콜록!... "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검댕 투성이가 된 너구리 꼴이 된 당여월이 비밀통로에서 튀어나왔다. 따르는 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같이 있던 적고적 무리들은 모두 처리한 모양이었다. 국무령이 그녀를 제압하는 동안, 번서는 모닥불에 모래를 끼얹어서 불을 껐다.
" 처리했습니다 주인님. "
혈도가 제압되고 난 다음 손발을 꽁꽁 묶이고, 대나무 재갈까지 물려진 당여월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국무령에게 그녀를 어께로 떠메어 들도록 한 다음, 번서는 배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