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자객과 내부의 자객이 있었다. 그리고 내부의 자객의 목표는 당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전망이었고, 이렇게 되면 일의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다만 내부의 자객 쪽의 움직임 역시도 계속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완전히 어둠이 깔렸을 때, 번서는 안개를 풀어 몸을 숨기고 저택의 안채까지 숨어들었다. 어떤 건물이 어디에 있으며, 거기에는 누가 있는지도 확실히 알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번서가 당여월을 발견했을 때는 저택의 탐색도 거의 마쳐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자시가 가까와 왔기 때문에 서봉이 배로 돌아가고 대신해서 그를 수행할 국무령이 오는 동안 안채의 출구 옆에 세워진 전각의 지붕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나와서 선 것이다. 그리고 번서가 뭘 어떻게 해 보기 전에 안개 속에서 신소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 늦었군. "
" 흥... 용건만 간단히 맗해. 너와 같은 집안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몸에 두드러기가 돋으려고 하니까! "
신소아의 가시돋친 반응에 당여월은 어께를 으쓱해 보였다.
" 이런이런, 권황이자 마왕으로 이름 높으신 진천권 공의 따님께서 그런 거친 언사를 쓰시다니, 저승에 계신 진공이 보시면 얼마나 안타까와... "
당여월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소아의 눈앞에서 금속성의 섬광이 번쩍였다. 재빨리 당여월이 받아낸 것은 새하얗게 빛나는 날카로운 날을 가진 유엽비도였다.
" 난 한번도 그가 내 아버지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닥치지 않으면 지금 이자리에서 네년의 뼈와 살을 분리해 주지. "
오호, 진(辰)씨였다는 이야기인가...
권황에 대해서는 무림으로 출도하기 이전의 번서도 익히 들어본 바가 있었다. 본시 무림에 속한 인물이었으나 대사막을 통해 쳐들어온 타골족의 무리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선대왕이 발탁을 받아 일개 무림인에서 마왕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윤숭의 무리가 권세를 잡은 후 모함을 받아 사사되었다. 그 대신으로 부임해 온 것이 지금의 마영달이었던 것이다. 그 진천권의 딸이라면 총을 어린시절부터 배웠을 것이라는 짐작도 들어맞고, 마영달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 진정하라고. 네가 마영달을 죽이든 말든 내가 알바 아니니까. 나는 다만 그의 돈에 관심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걸 가지고 있지. "
" 그렇지, 너같은 사교의 주구가 생각하는건 그정도겠지... 네가 원하는건 마왕성 내부로 통하는 비밀통로의 위치에 관한 정보겠지? "
곧이어 두명은 번서에게 들리지 않도록 전음으로 몆마디 나누었다. 그 내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전음입밀의 수법을 도청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번서는 진소아와 당여월의 목적을 대충이나마 알아낸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마침 그의 옆으로 날아와 앉은 국무령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숙소로 돌아온 번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가늠해 보았다.
당여월은 현상금보다는 마영달의 보물창고에 침입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기 위한 최고의 기회는 누구든 밤귀신을 붙잡아서 그가 성을 나오게 만드는 때가 될것이고, 마영달의 목을 노리는 진소아 역시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당여월과 같았다. 한편 번서의 경우, 만약 당여월이든 진소아든(물론 둘을 모두 손에 넣는다면야 더 바랄것이 없겠지만) 납치하기 위해서는 그녀들이 약해져 있어야 했다. 한눈에 봐도 그녀들의 무공 수위가 그가 방패로 삼고 있는 서봉이나 국무령에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움이 길어져서 쓸데없는 이목을 끄는 것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았다.
결국 밤귀신들은... 죽어야 할 필요가 있겠군.
무슨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일의 열쇠가 될 마영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들이 확실히 끝장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아주 몹시도, 마영달을 끝장내고 싶어할 그녀들 역시 모용휘를 잡아서 마영달이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할것이다.
물고 물리는게 꼭 지 꼬리를 쫒아서 뱅뱅 도는 강아지를 보고 있는듯한 형국이구만...
모용휘가 죽느냐, 밤귀신들이 죽느냐의 싸움이다. 제삼자인 번서는 굿을 보고 떡만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떡을 먹기가 쉽지만은 않을 예정이다. 떡을 먹다 급체로 죽고싶지 않다면 준비를 확실히 해야 했다.
갈천휘가 쓰는 진법들의 대부분은 기력을 빼앗거나 환상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두가지 효과를 동시에 가지는 것이었지만, 독특한 수법도 몆개인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종이를 잘라 만든 모형을 실제의 그것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도 술법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 시간제한이 있고 과격한 행동들(특히나 전투)은 수행할 수 없지만, 술법에 능통하지 못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뿐 아니라 이 가짜 인형을 통해 감각을 공유해 자신이 그 장소에 있지 않고도 정보를 얻을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번서는 이 술법을 사용해 종이로 작은 새를 만들어 저택의 곳곳에 배치했다. 종이인형은 그 크기가 클수록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고 집중력도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감시역으로 쓰기에는 작은 동물, 특히나 자유롭게 날아 위치를 바꿀 수 있는데다 대부분의 경우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새를 쓰는것이 적절했다.
계절이 건기에서 우기로 전환하는 시점이라, 이튿날은 하루종일 비가 왔다. 창 밖으로 천둥번개를 동반한 채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번서는 땅에 묻어둔 화탄은 무용지물이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경비도 느슨해지게 만든다. 그리고 밤귀신들, 확실히 그들이 저택 내에 정보원을 두고 있다면 필경 화탄이 묻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날은 그들에게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 준비해라. "
" 네 주인님. "
무릎을 꿇은 채 유방 사이로 그의 발을 끼워넣은 채 문지르고 있던 서봉은,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일어나서 옷을 갖춰 입었다. 번서는 그녀의 봉사를 좀 더 받았으면 했지만, 이미 노예가 된 서봉을 희롱하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포로를 잡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신발을 신고 일어나서 장포를 입고 자신의 무장을 점검했다. 서봉이 귀신같은 솜씨로 천정을 타고 오르는 동안, 번서는 거적을 이어 만든 우의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나 노예들이 입는 비단 장포는 방수처리가 된 제품이었지만 일부러 적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 공자님? "
뒤돌아본 자리에는 진소아가 서 있었다. 그녀 역시 우의로 완전무장을 한 차림새였는데, 화약이 젖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는 모양새가 확연했다. 저 아름다운 미모를 범해 흐트러뜨리고 마침내 노예로 삼는다면 그 자신의 유흥으로도 좋을 것이고, 총을 능숙하게 다루는 만큼 자신의 복수행에도 도움이 될것이다.
" 비가오면 총을 쓰기가 어렵지 않소이까? "
" 보통은 그렇지요. "
진소아는 꿍꿍이가 있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문득 그 웃음을 보자 그녀와 자신의 처지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복수를 위해 암약하고 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 복수의 목표가 다를 뿐. 그녀는 번서와는 달리 황국 자체에 죄를 물으려 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녀가 옳은가, 내가 옳은가?
다시 한번 번서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목표를 되짚어 보았다. 윤숭의 일족을 섬멸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정의는 구현되어야만 비로소 정의이다. 그 정의를 위해, 용기있게 옳은 말을 하던 사람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했던 비겁한 자들, 그리고 충성스럽고 의로운 신하를 알아보지 못하는 황국의 대왕가. 그 모두가, 그의 입장에서는 원수였고 적이었다. 황국의 통치를 받는 백성의 입장에서도,그런 불의한 통치는 사라지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다시한번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곱씹으며, 번서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 보여 주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해가 질 시간이 되자 기름을 먹인 횃불을 밝혀도 한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다른 무사들도 각자 자기 맏은 곳을 지키며 돌아다니느라 분주한 가운데, 다시 국무령이 서봉과 교대를 하기 위해 왔다. 그동안 진소아와는 몆번 더 마주쳤지만, 당여월은 안채를 경비하는 중인지 영 눈에 뜨이지 않았다.
문득 번서는 당여월의 자신감 넘치는 미모를 떠올렸다. 쾌락당은 그에게 있어서는 쓰레기들의 집단이고,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쾌락당의 당주까지 지낸 여자이니만큼 그녀라면 진소아와는 달리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잡아서 시원하게 범해준 다음 노예로 삼을 것이다.
번서가 속으로 그렇게 꿍꿍이를 진행시켜 가는 동안 저택의 후문 인근에서 소란이 있었다. 지나가던 인력거꾼이 신경이 날카로워진 경비들에게 붙잡혀 치도곤을 당한 모양이었다. 모시는 주인의 인품에 따라 부리는 개들의 행동도 영향을 받는 것인지, 모용휘나 마영달의 부하치고 변변한 자들은 본적이 없었다. 그것만이면 그냥 지나가는 작은 일화에 불과한 일이 되었겠지만,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와중에 그의 경계망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 후문의 담장을 지나 번서 등이 머물고 있는 건물인 객사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았던 것이다.
" 왔군. "
즉시 국무령을 객사의 지붕 위로 올려보낸 번서는 자신도 가세하기 위해 객사 맞은편, 안채로 통하는 통로의 지붕 위로 올라가 활을 꺼내 들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 전에 재빨리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협공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국무령이 저지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벌써 벌써 번서가 있는 곳 까지 날아들어와 있었다. 확실히 밤귀신 중의 한명이다. 번쩍이는 연검의 날이 날아드는 것을 활대를 써서 받아낸 후, 번서는 상대의 다리를 노려 서 한발의 강전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는 않아서, 번서가 활을 쏘아내는 것을 피하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왔다.
" 어딜 감히!... "
큰일났다 싶은 순간, 국무령이 번서와 밤귀신 사이에 끼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이미 노예가 되기 전부터 국무령의 검술 솜씨는 자산성 인근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고, 번서에게 안기는 동안 채화술을 통해 내공까지 증진된 상태인 그녀의 검술 솜씨는 실로 놀라울 정도여서, 단 일합에 적을 떨쳐냈을 뿐 아니라 두번째부터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챙!.. 챙!...
한번 검이 부딛칠 때 마다 밤귀신은 크게 낭패하며 뒤로 물러서는 형국이엇다. 국무령의 검은 빠를 뿐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힘도 무지막지하기 이를데 없어서 검을 부딛칠 때 마다 쥐고 있는 연검을 통해 팔 전체가 시큰할 정도의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밤귀신의 내력이 좀 덜 정순했고 국무령의 내공이 좀 더 강했다면, 검술로 격파되기 전에 내장이 진탕되어 피를 토해냈을 것이다.
" 타핫!... 끝이다! "
" 커흑!... "
번서가 국무령에게 미리 상대를 생포하라고 언질을 넣어놓지 않았다면, 첫 일격으로 상대의 목을 잘랐을 것이다. 그만큼 두명의 실력 차이는 컸다. 게다가 비가 오는 밤이라 발디딤이 나쁜것도 밤귀신에게는 불리했다. 수련의 경지가 높을수록, 내공이 강할수록 이런 상황에서도 더욱 안정된 자세를 취할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무령의 수련의 경지와 내공에 관해서라면, 번서의 노예로 재탄생되기 이전부터 일가를 이룰만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명치를 칼등으로 강하게 얻어맞은 밤귀신은 뒤로 나동그라졌고, 그대로 다시 뛰어들어간 국무령에 의해 혈도를 제압당했다. 그동안 번서는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 때문에 방금의 소음이 차단되어 눈치챈 자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밤귀신은 둘인데 어찌 하나만 나타났을까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이제 하나를 잡았으니 그 사정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번서는 자신을 대신하는 인형을 만들어 숙소에 두고, 국무령과 함께 배로 돌아갔다. 국무령의 옆구리에는 붙들린 밤귀신 포로가 축 늘어진채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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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령이 공을 세운 것에 서봉이 약간 질투를 하기는 했지만, 손가락으로 엉덩이의 구멍을 한번 찔러주자 이내 얌전해졌다. 포로를 감금실에 데리고 온 번서는 그녀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옷들을 해체하는 작업부터 착수해야 했는데, 피풍의에 우의까지 걸쳐 입은 덕분에 정말로 벗기는데 고생을 했다.
" 보기보다는 나쁘지 않군. "
전에 무역시에서 보았을 때는 변장을 위해 얼굴에 검은칠을 했었기 떄문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결국 데려와서 발가벗겨 놓고 보니 제법 괜찮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약간 앳된 인상을 주는 얼굴은 선이 곱고 참한 인상을 주고 있었고, 화장기가 없음에도 입술이 예쁜 붉은 색이었다. 황국 여인 특유의 검고 윤기나는 흑발을 단정하게 땋아 내려 어께까지 드리우고 있었고, 피부가 드러난 곳은 건강한 갈색으로 그슬려 있었지만 옷으로 가려진 부분은 여느 미인들과 같은 깨끗한 하얀색이었다. 유방은 아직 덜 여문듯한 모양새였지만 탄력이 좋았고, 깨끗한 붉은색을 띈 채 꽉 다물려 있는 보지를 검사해 보니 처녀였다. 연갈색의 항문 역시도 앙증맞게 보일 정도로,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몸이었다.
번서는 쉬운 취조를 위해 머리에 금침을 박아넣은 후, 단전에 내공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그녀를 깨웠다.
" 아으윽... "
괴로운듯한 낮은 신음성과 함게 깨어난 여자의 시선은 흐리멍텅했다. 번서가 그리 햇으니 당연한 일이다. 검은 눈동자가 촛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번서는 그녀의 귓전에 대고 질문을 시작했다.
" 이름은? "
" 경...운경... "
" 나이는? "
" 십육... 세... "
번서는 무릎을 쳤다. 이제 열여섯 밖에 되지 않았으니 소녀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소녀가 검을 들고 마영달을 노려야만 하는 사연이 무엇이란 말인가. 동정심까지 들 정도였지만, 일은 일이다. 그는 질문을 계속해서 그녀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경운경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부친은 경유외(經柳嵬) 윤씨들에 의해 숙청당한 마왕 진천권의 부장이었다. 진천권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진천권의 경도행(그가 숙청된 사건)에 동행했고, 경도에 도착하자 마자 체포당해 죽임을 당했다. 반역죄인의 가족은 연좌하는 법에 따라 그 부인인 유춘연과 딸인 경운경은 관노가 되어야 할 예정이었으나, 원래 무림의 여걸이던 유춘연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탁월한 검술 솜씨를 발휘하여 도착한 사자와 병사들을 죽이고 딸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일년동안 마영달의 악몽이 되었다. 경도에 가서 윤숭의 일족에게 복수하는 대신, 윤숭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마영달을 죽이는 것으로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원수인 윤숭의 오른팔이라면 그냥 둘 수 없다. 그때까지도 마영달을 살려둘 생각이었던 번서는 경운경이 제공한 정보 덕분에 마음을 고쳐 먹었다. 하지만 마영달을 머물고 있는 거성에서 꾀어내려면 역시나 [밤귀신들]의 목이 필요하다. 번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 너의 모친은 어디에 있지? "
" 어머니는... 당여월에게 부상을... "
시장에서 당여월과 나눈 일합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경운경의 스승이기도 한 유춘연의 검술 실력은 당연하지만 경운경 이상일 것이다. 이 두명을 한꺼번에 상대한데다 그 짧은 순간에 상대에게 요상을 요구할 정도의 부상을 입혔다면, 당여월도 보통 고수는 아니었다. 문득 서봉과 당여월은 같은 창천교 출신이라는 점이 생각난 번서는 그녀를 불러 물었다.
" 서봉, 당여월에 대해 아느냐? "
" 네 주인님. 그녀는 쾌락당의 창시자로, 검술 실력만큼은 창천교 내에서도 세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입니다. 검술 솜씨 만으로는 국무령과 호각 이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
" 그런 여자가 어째서 떠돌이가 된거지? "
" 아랫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당원들의 반란이 있었고, 축출됐습니다. "
번서는 쾌락당 무리들의 무공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합지졸들이 절정고수의 대열에 끼이는 그녀를 어떻게 쫒아냈을까가 궁금해졌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건지 서봉이 말을 덧붙였다.
" 부당주인 기달두(己獺頭)가 총으로 암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빈사의 중상을 입고 도망쳤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습니다. "
확실한 호체기공으로 대비하지 않는 한 맨몸으로 총알을 막을 방법이라고는 없는 것이 당연지사, 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경운경의 수혈을 짚어서 재운 다음 그녀의 모친인 유춘연의 문제를 처리하기로 하고, 서봉을 데리고 배를 나섰다.
번서가 잘못 판단했던 점은, 부상을 당했다는 말만 들었던 것이다. 서봉과 함게한 그가 경운경이 말해 준 은신처를 찾아갔을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춘연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암살자였고, 이런 류의 암살자가 가장 신경쓰는 일은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는 일이다. 게다가 그녀가 입은 부상은 보기보다는 중하지 않았고, 복수를 위해 딸인 경운경을 미끼삼아 먼저 보내어 경비를 느슨하게 만든 다음 그녀가 몸을 뺄 때(경운경은 경공 솜씨가 검술보다 우수했다) 자신이 경비하는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갈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이 작전을 딸에게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적을 속이기 위해 먼저 아군을 속여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운경은 소란을 일으키기도 전에 번서의 손에 붙잡혔고, 유춘연은 저택에 숨어들 수가 없었음은 물론 딸의 안위도 확인할수가 없었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저택 주변을 감시하던 감시꾼들에게 들켜서 칼부림을 펼친 끝에 도망쳤지만, 부상이 악화되었다. 은신처로 돌아갈 기력도 남지 않은 유춘연은 어느 허름한 폐옥 아래 숨어들어 최후를 준비했다.
아마 추적에 능한 서봉이 아니었다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드문드문 떨어진, 비에 희석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간 폐옥의 한켠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유춘연을 발견했을 때는 번서의 솜씨로도 손을 쓰는 것이 늦은 상태였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손에 쥔 검을 놓치지 않고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본 번서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 너는... 마영달의 무리인가?... "
" 운경을 만났고, 그를 죽일 거요. "
딸의 이름을 듣자 유춘연의 꺼저가던 눈빛이 되살아났다.
" 소협... 그 아이는 무사한가?... "
번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춘연의 얼굴에 잠깐 안도의 웃음이 걸렸다.
" 그 아이에게 도망치라고... 전해... "
말을 끝맺지 못하고, 유춘연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 딸은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잠드시오. "
번서는 유춘연의 시체를 끌어다 바닥에 눕힌 다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소지품을 챙겼다. 마영달을 꾀어내려면 아직 그녀가 필요했다. 아무리 고귀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단순한 고깃덩어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싫을 정도로 경험한 번서는,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에는 공감하지만 그녀의 시체를 훼손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알몸이 된 유춘연의 몸을 철저하게 검안한 번서는 그녀의 사인을 확인했다. 다른 작은 상처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왼쪽 젖가슴 아래에 나 있는, 찔러서 난 검상이 치명적이었다. 그것도 아물려던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다. 당여월이 남긴 흔적일 것이라, 그 상처를 살피는 것으로 번서는 당여월의 수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서봉과 국무령에게 가르치면 당여월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것이다.
알몸이 된 유춘연의 시신을 거적에 싸서 서봉에게 들린 번서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시신만을 모용휘에게 가져가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시체가 하나 더 필요했다. 그것도 유춘연을 알아볼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럴듯한 가짜를 준비해야 했다. 가장 좋은건 그냥 경운경을 죽여서 가져가는 거지만, 그녀 역시 번서와 같은 원한을 공유하는 처지다. 게다가 아직 어린티를 다 벗지도 못하는 소녀에게 손을 대는 것은 아무리 복수에 물불 가리지 않으리라 작심한 처지라도 못할 짓이다. 그런저런 고민을 하던 그의 뇌리에 한가지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다.
" 하긴, 꼭 죽여야 할 필요는 없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