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14 (14/41)

원래 내공이란 시간을 들여 가며 쌓아올리는 것이다. 몆년이니, 몆갑자니 하는 것이 기준인 이유도 전통적인 수련 방법인 토납법으로 어떤 경지 까지의 내공을 쌓기 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니 내공에 관한 시간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익히 짐작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들이는 만큼 확실하게 보답해 주는 것 또한 내공이다. 같은 무공을 사용한다면 내공 수위의 고하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며, 평범한 무공이라 해도 내가고수가 펼친다면 그 위력과 기세의 차이가 분명했다. 물론 이 경우엔 그만한 효과를 보기 위해 무공 전반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수반되지만, 대체로 내가 고수의 경지에 달할 정도의 수련을 거치면 초식의 운용의 묘는 자연히 깨닫게 되는 법이다.

게다가 큰 문제가 없는 한 수련을 하면 할수록, 내공은 나이와 무관하게 강해진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신체 능력이 떨어지고 약해지는데, 내공 기초가 튼튼하다면 그것을 벌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어느 정도 이상의 내공 수위를 쌓게 된다면,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것처럼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는 것도 가능하다.

때문에 무림인들은 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갈구한다. 영약이든 내공심법이든 이 과정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이 곧 더 강해지는 길이기에, 내공에 대한 욕구는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는 본능적인 것이다.

번서는 처음부터 무림인으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공을 시작한 것도 성인이 된 다음의 일이라, 이런 무림인들의 무조건적인 내공 욕심에 물들지 않았다. 아무리 내공을 쌓아 봐야 자신의 근골로는 상승무공을 펼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구암도에서의 탈출과 의술을 배우면서 깨우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 방식은 그에게 무공에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일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깨닫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번서는 부족한 무공 실력을 메꾸어 줄 방법도 많았다.

우선 환술(幻術)이다. 환마라고 불리울 정도로 뛰어난 갈천휘의 진전을 전부는 아니지만 제대로 배웠고, 번서 자신이 가진 다른 능력(특히나 의술)로 그것을 강화시키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가 구사하는 진법은 실제같은 환각을 보여줄 정도고, 술법으로 불러오는 안개에 독을 풀면 군대조차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의술의 경지는 황국 제일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타고난 지력과 좋은 스승, 그리고 도덕의 굴레 따위는 벗어던진 생체실험의 반복으로 번서는 의술의 경지에 있어서만은 황국 제일, 아니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앞서의 환술까지 더해진 그의 독특한 의술은 환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의 기억(정확히는 꿈)에 자유롭게 파고들 수 있고, 감정과 감각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가 있었다. 그의 손에 떨어진 여자들의 철저한 복종과 충성은 그의 이런 재주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도구가 있었다. 금삭이나 젖마개 같은 도구를 고안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번서는 이런 쪽에 무척 재능이 있었다. 사실은 구암도를 탈출하기 위한 궁리에서부터 비롯된 이야기지만, 기존의 자원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수련한 번서에게 있어서는 손에 잡히는 모든것이 비밀무기나 다름없었다. 당장 그의 회색 장포만 해도 온갖 암기와 비밀 도구가 들어찬 병기고나 다름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고안과 발명의 경지는 더더욱 정교해져 갔다.

이와 연계된 무기의 선택에 있어서, 특히나 그는 활을 선호했는데, 이는 내공을 쓰지 않으면서도 멀리 있는 적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거리 문제와, 철포와는 달리 커다란 소음을 내지 않는다는 은밀성을 고려한 결과였다. 태엽과 용수철을 적용한 접이식 활(활대에 철판을 이용해 장력이 크다. 장거리용)과 깃까지 모두 강철로 만들어진 강전을 옷 안에 숨기고 다녔는데, 장포에서 꺼내서 한번 탁 치는 것으로 활이 펼쳐지면, 다음 순간 화살이 장전되고 조준까지 끝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오십 보(약 30m) 거리에서도 목표를 맞히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지만, 재미를 붙이고 손에 익들 정도로 연습을 거듭한 결과 백보(70m 정도) 거리에서도 특정 부위를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한 궁사가 되었다.

근접전에 대비해서는 작은 암기들이 있었다. 유엽비도를 던지는 수법은 서봉에게 배웠고, 수전(짧은 화살을 용수철의 힘으로 쏘아낼 수 있는 장치)도 구했다. 수전에 대해서는 이미 여섯 발까지 연발로 발사되는 매화수전(梅花袖箭)이라는 장치가 있었지만, 번서는 많이 쏘기 보다는 치명적인 일격을 주는 쪽을 더 선호하였으므로 단발수전의 발사력을 강화시켜 사용하였다.

그 밖에 호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고안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비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무림인들은 호체공, 혹은 호체신공이라는 것을 익혀 도검이나 작은 암기, 심지어는 탄환까지 막아 왔지만 이 방법에는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대비하고 있을 때만 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호체신공을 익히면서 그점을 절감한 번서는 자신의 장포에 여러가지 비밀 주머니 이외에도 심맥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슴과 등 부위의 안감 속에 철판을 덧대었는데, 이는 역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결국 보다 더 확실하게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

.

.

원래 번서는 국무령의 조교를 끝마치는 대로 경도로 갈 예정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옛 격언에 따라 경도 내부에서부터 자신의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무령의 조교를 끝내고 무기나 다른 필요한 물건들의 고안과 제작도 그럭저럭 끝나 경도로의 여행 준비를 마쳤을 무렵, 번서는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번서는 하루 3교대로 노예들과 함게 행동했다. 우선 자시(子時; 23~01시)부터 축시(丑時)와 인시(寅時)를 거쳐 묘시(卯時 05~07시)까지는 침실에서 쉬는 시간이다. 서봉과 국무령 중 한명이 불침번을 섰다. 진시(辰時; 07 ~ 09시)부터 사시(巳時), 오시(午時)를 거쳐 미시(未時; 13 ~ 15시)동안에는 밤에 불침번을 서지 않은 노예와 국무향의 시간이다. 그리고 신시(申時; 15 ~ 17시)부터 유시(酉時)와 술시(戌時)를 거쳐 해시(亥時; 21시 ~ 23시)까지는 다시 낮에 번서를 수행하던 노예가 빠지고 낮에 잠을 자던 노예가 번서를 수행한다. 어제 국무령이 밤 불침번을 서면 오늘은 서봉이 밤의 불침번을 서게 되는 구조다. 물론 불침번 겸 수행하는 노예는 항상 번서의 곁에 붙어 있게 된다. 이 수행노예는 번서의 유흥을 돕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그를 지키는 일이었다.

낮에 외출할수도 있지만, 해가 느즈막히 넘어가는 시점부터 활동하기를 선호하는 선호하는 번서는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기 위해 무역시에 들렀다. 여행 준비란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부족한 법이다. 식량, 옷, 침구, 배의 수리를 위한 도구들 등등. 사막 여행자들의 출발지이기도 한 무역시에는 여행용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고 물품도 다양했다.

한 포목점에 들린 번서가 색목인들이 쓰는 올이 굵은 모직과 털가죽으로 이뤄진 두꺼운 망토를 구매하던 중에(밤 날씨는 쌀쌀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필요했었다), 그녀가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길 건너편 소면같은 간단한 음식을 파는 노점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두명의 여자들은 그런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차림새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매지간처럼 보이는 여자 두명,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주변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남루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움직임, 주변을 경계하는 빈틈없는 시선은 무림인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치렁치렁한 피풍의(避風衣) 아래 숨겨진 단검이 번서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확신하긴 어려워도 허리춤에 차고 있는 요대도 옷에 어울리지 않는 재질인 것으로 보아 연검 같았다.

흠...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렇게 단단히 무장을 하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지?...

번서의 생각이 끝난 그때였다. 주변을 물리치는 길앞잡이의 외침소리가 그를 현실세계로 되돌려 놓았다.

" 물렀거라!~ 모용휘(模用麾) 대인의 행차시다~ "

번서는 이미 그 이름을 들어본 바가 있었다. 모용휘는 마영달의 부장이었다. 실질적으로 마영달의 탐관오리 행각을 보좌하는 최측근이자 군사격인 자로, 두뇌 회전이 빠른 이상으로 사납고 모진 성정에 재물을 좋아해 돈을 받고 죄인을 풀어주는 등의 악행을 저지른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저자를 노리는 모양이군.

문득, 번서는 밤귀신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영달을 노리는 두명의 자객들. 마영달과 함게 탐관오리 행각을 벌이는 측근이라면, 그들의 목표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모용휘를 태운 교자(뚜껑없는 가마 비스므레한 의자, 일반적으로는 네명의 교자꾼이 메고 움직인다. 원래는 신분이 높은 고관들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의 행렬이 가까와 졌을 때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 타핫! "

" 죽어라아앗!... "

" 크아악!..."

" 으억!... "

연검을 뽑아들고 교자를 향해 달려든 두명의 여자들의 기합성이 시끌벅적하던 시장통을 뒤흔들었고, 삽시간에 그녀들 앞을 막아서던 네명의 호위병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피를 본 백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 팔방으로 흩어지는 동안, 반대편에 서 있던 병사들이 급히 모용휘의 앞을 가로막아 섰으나 그들의 실력도 앞서 쓰러진 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탐관오리의 책사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것인가.

" 타핫, 물러서라!... "

카카캉! 채챙!...

번서가 나서야 할까 저울질하고 있던 그때, 그가 서 있던 점포의 지붕으로부터 낭랑한 목소리가 울리며 하나의 붉은 그림자가 어지럽게 흩날리는 연검의 검광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검광과 금속성의 파열음, 그리고 적당한 불꽃이 튀긴 끝에, 그 붉은 그림자는 마침내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오호...

붉은 비단 경장을 입은 여자는 척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생김새로 따져보자면 눈매가 날카로운 점이 국무령과 비슷했지만, 스스로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서봉과 분위기가 비슷해, 타고난 요염함을 풍겼다. 그녀는 왼손으로 쥔 칼을 하단으로 늘어뜨린채 천천히 원을 그리듯이 휘둘렀는데, 방금의 습격자 두명은 큰 낭패를 본 기색으로 몆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 너는 당여월!... 창천교 쾌락당의 당주가 언제부터 관부의 개가 되었더냐? "

습격자 중 나이가 많은 쪽의 여자가 자신을 알아보자, 당여월이라 불린 여자의 눈가로 살짝 웃음이 스쳤다. 그리고 번서는 [쾌락당]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 그 잡놈들이 세상에서 사리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쾌락당 타령... 지금의 나는 그런 잡졸들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선량한 백성일 뿐이야. "

" 하, 네가 선량한 백성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다가 허리가 부러지겠구나! 쾌락당 놈들의 패악질이 하늘에 미쳐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함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줄 알았거늘, 하늘도 무심하시지... "

점잖지 못한 언사가 오가는 동안 저 멀리서 병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습격자들은 분통하다는듯이 입술을 깨문 다음 당여월을 향해 일갈했다.

" 비통하구나! 하지만 오늘만 날이 아닐 터, 언젠가는 탐관오리 마영달과 그 주구들의 목을 베어 세상의 정의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릴 것이다! "

퍼엉!!...

젊은 쪽의 여자가 품 안에서 꺼내서 바닥에 던진 검은 구체는 폭음을 내며 주변을 매케한 연기로 뒤덮었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었을 때 그녀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저들이 [밤귀신] 들인가 보군... 그리고 쾌락당의 당주였던 계집이라...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경도로 출발할 계획을 미루며, 번서는 앞으로 어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

.

.

어떤 일을 하자면 계획이 필요하다. 그리고 계획을 짜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수다. 번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해가 지기 전에 모용휘가 머무는 관사로 갔다.

" 웬놈이냐? "

" 밤귀신을 퇴치하기 위해 사람을 모은다는 방을 보고 왔소이다. "

호패를 보이자 문지기격인 병사는 문 안으로 방문자가 온다는 신호를 했고, 곧이어 예쁘장하게 생긴 시동 한명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 일행이 두분이십니까?... 절 따라 오시지요, 대인. "

시동이 앞장서자 비로소 문이 열렸다.

모용휘의 저택은 규모가 상당했다.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돌을 깔아 바닥을 만든 연무장을 겸한 넓은 마당이 나왔는데, 번서가 알기로는 모용휘는 무용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필시 예전의 집주인이 사용하던 연무장이리라. 이름높은 탐관오리(?)니 만큼 남의 집을 빼앗았을 것이라 생각하던 와중에 자신이 살던 해운곡의 집이 생각났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담긴 그 작은 집도 이제 필시 주인이 바뀌었으리라. 복수를 마치고 나면 기필코 돌아갈 것이라 맹세하면서, 번서는 고향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콰콰쾅!...

폭음이 들리는 곳을 돌아보자 연무장 한켠에서 병사들이 과녁을 향해 총을 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색목인 무역상인들이 전래한 무기인 총은 무서운 병기다. 화약의 힘으로 추진되는 납 탄환은 가벼운 갑옷 따위는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고, 어지간한 호체신공도 뚫는다. 은밀성을 더 중시해 활을 연습하고 있었던 번서였지만 새삼 그 광경을 보니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끌리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방금의 습격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용휘는 직접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집사가 번서의 맞아 이름과 유파를 물어왔다.

" 가전의 무술을 약간 하고 있소이다. "

수행하는 서봉도 떳떳하지 못한 신분임에는 틀림없고, 무공의 스승격인 환마도 백무련에 쫒기는 사람이니 유파을 댈 만한 상황은 아니다. 번서의 대답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는지, 집사는 시동에게 나머지를 맏긴 채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 죄송합니다, 아까 시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집안분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져 계세요. "

" 괜찮네.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것 같군. "

시동을 따라 도착한 곳은 허름한 단칸방이었다. 세평이나 될까싶은 좁은 방 안에 대충만든듯한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 의자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것을 보니 그 주인의 사람됨을 익히 짐작할 만한 것이라, 번서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권세를 잡아야 황국이 빨리 멸망할 것이다.

" 필요하신게 있으시다면 이 줄을 당기십시오. 제가 달려오겠습니다. "

" 바쁠텐데 얼른 가 보게나. "

시동을 보내 놓고 나서 번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척 봐도 [나 별것 아니요]라는 칭호를 이마에다 써붙여 놓은 것 같은 무뢰한들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는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번서는 산책을 겸해서 저택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병사를 두면 지키기 수월할텐데...

저택은 보기에는 경비가 삼엄했지만, 번서의 눈에 뜨이는 헛점만 해도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비에 구멍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이곳저곳 둘러 보는데 갑자기 서봉이 경계반응을 보였다.

" 이봐 당신, 이런데서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구. 거기는 화탄이 묻힌 자리야. "

낭랑한 목소리에 돌아 보니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미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색목인 특유의 금발 사이로 드러나 있는 환한 인상을 주는 이마 아래로 일직선으로 시원스레 뻗은 코와 서글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고, 이쪽을 향하고 있는 시선의 근원인 눈동자는 바다를 생각나게 하는 푸른 색이라, 보는이로 하여금 상쾌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 여자의 무기는 총이었다. 등에는 장총이 한정, 허리춤의 요대에는 단총이 두정. 피풍의 곳곳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는 필시 탄환과 화약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 아, 그러했구려, 감사하오. "

" 척봐도 무림인같아 보이지 않는데 이런곳엔 왜 온거죠? "

확실히, 번서의 지금 차림은 무림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헐렁해 보이는 장포 하나를 걸쳤을 분 무기고 뭐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장포 아래는 완전무장이지만, 투시력이 없는 한 옷 위로 봐도 접이식 활을 본다 해도 그게 무기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니까.

" 무예보다는 잡기에 능해서 말이지요. 싸움을 하는건 이쪽입니다. "

번서는 서봉의 존재감을 잠시 어필해 보였다. 확실히 서봉은 그때까지 자신이 쓰던 두자루의 철편 대신에 강철을 제련해 만든 묵직한 사슬 두개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걸치고 있는 헐렁한 차림의 장포에 요대삼아 걸쳐져 있었던 것이다. 척 봐도 무게가 보통이 아니라 장식이 아닌 무기라는것을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 그렇군요. 실례지만 공자의 존함이?... "

" 심강이라고 합니다. 삼대째 여기서 살아온 토박이지요. "

" 저는 ㅈ... 아니 신소아(新昭娥)라고 해요. "

뭔가 약간 수상쩍게 자기소개를 나누고 나서, 번서와 신소아는 몆마디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일상적인 대화에 불과했지만 번서는 그녀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낌새를 받았다.

총은 소리가 큰 무기다. 그리고 어느정도 거리 내에서는 활보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이지만, 사거리 자체는 활보다 짧다. 연속으로 쏠 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씨의 영향을 너무 직접적으로 받는다. 비라도 내리면 화약이 눅눅해져 불이 붙지 않는 일이 예사로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화약도 총도 모두 몹시 비싸다. 

능숙하게 쓰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하고, 그 비용과 장소를 구하는 일 자체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앞서의 결정적인 단점 때문에 언제 어디서 싸워야 할지 모르는 무림인의 병기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무림인들 중에서 총을 쓰는 이가 몹시 드눈 것은 이에 기인한다.

이 신소아라는 여자의 자세를 보아 하니, 날림으로 사격을 배운 것 같지는 않았다. 총도 고급품이었다. 그렇다면 어린시절부터 총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인데, 적어도 총이 무림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만큼 무림에 속한 집안은 아닐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시점에서 다시 번서의 귓전으로 폭음이 들려 왓다.

타타탕!...

안뜰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번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신소아는 무장의 집안에서 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반 백성으로 취급되는 무림인의 부류는 아니고, 좀 더 지체높은 집안의 자식일 것이다. 그런데 현상금을 노리는 일을 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물론 한방의 수입이야 현상금 사냥꾼이 더 쏠쏠할지는 모르겟지만, 집안의 체면을 깎는 일이 된다. 거기에 자기소개를 할때 약간 머뭇거리던 것을 기억해 낸 번서는 무릎을 쳤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그녀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또다른 자객일까?... 자객이라면, 이미 모용휘의 집안으로 들어왔는데도 거사를 치르지 않는 것을 보면 목표는 그가 아니다. 모용휘가 목표가 아니라면...

남는것은 모용휘의 위에 앉아 있는 자, 마영달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밤귀신]을 잡고 나서 포상을 받기 위해 마영달과 대면한 순간을 노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번서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채 담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섬칫한 살기가 느껴져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 ... "

살기는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저만치 앞에 서서 멀리 자산성의 내성(마왕이 머무르는 궁전)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소아가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번서의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