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상대는 검을 자기 손발 다루듯이 하는 무림인인데... "
" 나는 살만큼 살았어. 그리고 소위 영달에도 관심을 끊었지. 그러니 저런 꼴을 보고 침묵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마영달 놈도 자기 이득이 있으니 날 어쩌진 못할 것이고... 그나저나 자네는 더이상 여기 있으면 안돼겠어. 이젠 심부름하는 꼬마들까지 잡아가려 드니 병자라고 언제까지 예외로 삼아줄지 알수가 없으니까 말일세. "
석매리의 권유와 재촉에 따라, 번서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날 채비를 했다. 석매리는 적지 않은 돈을 노자로 쓰라며 주면서, 경도의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번서에게 맏겼다.
" 내 제자라고 하면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을게야. "
한사코 번서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석매리는 그의 등을 떠밀다시피 초옥 밖으로 내쫒았다. 마지막으로, 번서는 진심을 담아 석매리에게 절을 했다.
" 스승님 안녕히... 다음에 뵐 때 까지 부디 몸 건강히 계시길. "
" 영영 못볼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가, 어서, 후딱 가게! "
그리고 몆 리를 가다가, 번서는 석매리에게 마지막으로 저녁이라도 해 드리고 가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도중에 붕대의 매듭이 느슨해 지는 통에 다시 동여매느라 시간을 잡아먹어서, 도착한 것은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번서는 피비린내를 맏을 수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본 번서는 급히 그에게 다가가 일으키려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급소에 칼을 맞아 이미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는 노인과 아이들을 포함한 주민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석매리의 초옥은 비어 있었다. 번서는 미칠듯한 심정이 되어 시신들의 얼굴을 일일이 다 확인했으나, 석매리는 없었다.
"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
번서가 다른 생존자가 없는지 찾아보려는 찰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일남일녀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검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기 때문에, 번서는 곧바로 그들이 이런 일을 벌인 원흉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이놈이 그놈인가 보군. 잘됐어, 찾으러 가는 수고를 덜었군. "
" 대체 무슨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헉!... "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칼자루로 명치에 일격을 맞은 번서는 그대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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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다른 마을 주민들이 다 죽는 와중에도 아무말 하지 않고 있지만 어떨까, 네놈의 제자가 죽어도 그럴 수 있나? "
" 더러운 놈. 백무련에 네놈같이 사악한 자가 기생하고 있다니, 세상이 참 썩어도 많이도 썩었구나! "
깨어나자 마자 들려온 석매리의 음성에, 번서는 눈이 번쩍 떠졌다. 눈앞에 의자에 묶인 석매리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던 번서는 자신도 석매리와 똑같이 의자에 묶여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스승님, 무사하셨군요! "
" 이제 깨어났군, 이 답답한 제자야, 내가 얼른 경도까지 가라고 했잖으냐... "
곧바로 여자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등 뒤에서 들려온지라 누구라고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가 무척 낮이 익었다.
" 눈물겨운 사제 상봉이로군. 그럼이제 내 문제를 좀 해결해 보실까?... "
" 사매, 여기서는 내게 맏기게. "
" 그러지요 사형. "
곧이어 눈앞의 복면인이 으스대는 듯한 느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번서는 그가 자신의 명치에 일격을 먹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번서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그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그는 지금 붙잡힌 상태고, 아마도 무림인일 이 복면인의 상대가 죌 수 있을것 같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스승님을 살리기 위해, 그는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꾹 눌러 참고 굽히기로 했다.
" 뭐든 할테니 스승님을 풀어주시오. "
" 오호, 이쪽은 좀 더 협조적이군 그래. "
복면인의 용건은 간단했다. 어제 낮에 번서의 손에 붙들려 석매리에 의해 이마에 [凶]자가 새겨 진 곽부의 얼굴을 원상태로 고치는 방법을 실코하라는 것이다. 비로소 번서는 이 복면인들의 정체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 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면, 스승님을 무사히 가게 해 드릴 것이오? "
" 흠, 노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군... 좋아, 약속하지. 그 방법을 말해 준다면, 나는 저 노인을 풀어주고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
번서는 뭔가 약간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당장은 믿는 수 밖에 없다. 그는 석매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곽부의 이마에 쓰인 글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이야기 해 주기로 했다.
" 월영초 달인 물로 사흘동안 아침 저녁으로 세안을 하면 글자는 사라질 것이오. "
" 간단한 일이었군. "
" 이제 약속을 지키시오. "
" 그래 노인을 풀어 주지. "
복면인은 칼을 휘둘러 석매리를 묶고 있던 밧줄을 끊었다. 하지만 석매리가 손목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번서의 등 뒤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 으악!... "
석매리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뒹굴었다. 번서의 등 뒤에 서 있던 곽부가 칼을 휘둘러 그를 찌른 것이다. 눈앞에서 스승이 살해당하는 것을 본 번서는 분노에 차 외쳤다.
" 약속을 하지 않았나! "
" 흥, 그는 약속했지만, 나는 약속한 적이 없어! "
곧이어 번서는 등으로부터 화끈한 작렬감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가슴 앞으로 하얀 칼날이 삐죽히 나와 있었다. 곽부가 그도 찌른 것이었다. 다시 칼날이 빠져 나가며, 번서의 의식은 급격하게 흐려졌다.
" 창천교 비적 놈들의 짓으로 보이게 마을을 좀 더 어질러 놔야겠어. "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곽부의 간드러진 웃음과 복면인의 푸념 비슷한 혼잣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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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드문 경우지만, 선천적으로 심장이 가슴의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치우친 인간이 있다. 번서가 그런 특이한 체질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먹은 영약들, 그것들이 가슴이 관통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을 부지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가슴에 거의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거기에 눈앞에서 석매리가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광경까지 보아야 했다. 그의 몸은 회복했지만, 그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렸다.
번서가 다시 깨어났을때, 그는 석매리의 초옥 앞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 으윽... "
남자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는 비적떼의 습격을 받은 것 처럼 위장하기 위해 자신을 여기로 끌어다 놓았을 것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후 겨우 상처를 확인한 번서는, 석매리의 집으로 기어 들어가 가슴의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전신을 다시 붕대로 싸맸다. 지극히 고통스럽고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끝내고 나니 간신히 몸을 일으킬 정도로 회복될 수 있었다. 실제로 그의 회복력은 보통 인간의 그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이르러 있었는데, 그를 태양광에 민감하게 만들어 준 체질 변화의 부산물이었다.
" 스승님... "
석매리는 거실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해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기는 했지만, 번서는 자신이 쫒기는 몸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그래서 챙길 수 있는 만큼의 약재와 석매리가 쓰던 도구들만 챙기고 나서, 석매리의 시신을 침실에 안치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화장으로 대신한 것이다.
" 곽부와 그 복면인에게 꼭 복수하겠습니다... 스승님. "
차마 편히 잠드시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석매리가 편히 잠들기 위해서는 곽부와 복면인이 그 죄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 불타오르는 초옥 앞에서, 번서는 정중하게 세번 절을 올렸다. 그리고 텅 빈 마을을 뒤로 했다.
어느새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멀리 유가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착한 번서는, 길에서 꽤 떨어진 바위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해 보았다. 칼에 맞은 상처가 욱씬거리며 새삼스럽게 감정이 북받쳐서, 번서는 한동한 복수 생각만 했다. 하지만 이윽고 냉정을 찾았다. 그가 복수해야 할 대상은 일단은 백무련에 속한 무림인들이고, 궁극적으로는 황국 전체다. 돈도 무공도 세력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중에 없는 것을 불평할 것이 아니라, 수중에 있는 것을 어떻게 활용해서 자신이 없는 것을 채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다행하게도, 그는 구암도에서 탈출할 당시와는 달리 완전한 맨주먹은 아니다. 그에게는 석매리로부터 사사받은 고명한 의술이 있다.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보다 조금은 뛰어난 지력이 있다.
번서는 품 안에 있던 석매리로부터 받은 삼화옹의서를 펼쳤다. 그 죽간의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자신의 의술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 어떻게 무공에 대항할 수 있는가를 곰곰히 연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번서는 문득 삼화옹의서가 죽간 치고는 너무 무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모조모 살펴보던 그는 죽간을 이루고 있는 각 대나무 조각 중 하나의 안에 뭔가 무거운 것이 들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문제의 조각은 미완성으로 여겨지는 죽간의 마지막 장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 내부를 알아볼 다른 방도가 없어서, 확인하려면 꼼짝없이 죽간을 파손해야 했다.
" 스승님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것을... "
하지만 죽간 안에 새로운 발견이 있다면, 마냥 스승님의 유품이라고 애지중지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석매리도 그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번서는 잠시 숙고한 후에, 손칼을 사용하여 죽간을 깎아 내기 시작했다.
" 오호라... "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 번서는 한 다발(12개)의 금침과, 그 금침을 감싸고 있는 몹시 얇은 비단 두루말이를 얻을 수 있었다. 비단에는 금으로 글씨가 써져 있었는데, 고문체로 씌여진 그 글은 그냥 보기에는 내용이 없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숨겨져 있으니 아무런 내용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 암호겠지... 아니면 이런 횡설수설을 이렇게 꼼꼼하게 숨겨두었을 리가 없지. "
번서는 이 의미없는 단어의 나열에 숨겨진 암호를 풀 만한 단서가 없는지 다시 한번 죽간의 내용을 꼼꼼하게 재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각 죽간의 첫 글자와 끝 글자가 비단 두루말이의 각 단어에서 지워야 할 글자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오랜만에 상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 그럼 그렇지. "
해석을 하고 나서도 지극히 난해하기 그지없는 두루말이의 내용은 번서의 지식욕을 자극했다. 휴식도 배고픔도 잊은 채, 그는 비단 두루말이의 내용에 심취했다.
두루말이의 내용은 삼화옹이 단순한 의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의사로써, 그는 영생을 얻을 방법을 연구했던 것이다. 물론 영생을 얻는데는 실패했기에 지금 그의 유품이 번서의 손에 넘겨진 상태지만, 그 연구는 완전히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삼화옹은 인간의 기와 신경, 그리고 특히 뇌의 활동과 그 작용에 대해 시대를 초월해 다른 모든 의사들을 압도할 정도의 경지를 이루었고 그 결과가 비단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기술은 너무나 대단해서, 더이상 의술이 아닌 일종의 선술(仙術)이라 보아도 좋을 정도였다.
" 영생에, 거의 한두발짝... 모자라는군. "
번서는 비범한 수재지만 천재는 아니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삼화옹의 의술에 심취하지 않고 그의 연구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고, 한가지에 몰입한 천재가 빠트리기 쉬운 부분도 알아챌 수 있었다.
" 너무나 인간의 기와 사고의 흐름에만 집착해 있다. 건강의 유지에는 신체의 단련도 중요할진데, 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어... 이점만 어떻게 보완할 수 있다면, 영생까지는 몰라도 수명을 크게 늘릴 수 있겠군. 그리고 여건만 된다면 이 연구를 좀 더 발전시켜서... "
번서는 무력이 없다. 무공도 모르고, 무예를 하는 지인도 없다. 하지만 무공을 모른다고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 없지는 않다. 권력이 있는 자들은 무예를 잘하는 수하를 부리면 되고, 돈이 많으면 무공을 하는 자들을 호위로 고용하면 되니까. 마찬가지로 삼화옹이 남긴 의술을 조금만 방향을 달리 해 응용한다면, 인간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해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고강한 무예를 지닌 자를 지배해서 수하로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까지 미치자, 번서는 자신이 사악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 하긴, 독해져야지 독한 놈들을 잡지. "
번서는 쓰게 웃으며 복수심을 새롭게 했다. 그리고 깎아낸 죽간 조각을 이용해 모래바닥에 글을 쓰면서 삼화옹이 남긴 의술을 자기식으로 재해석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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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번서는 사막에서 살았다. 멀리 유가촌의 폐허가 보이는 바위산의 동굴에서 거주하면서 의술을 연구하고 신체를 단련하며 복수를 위한 기초적인 포석을 다졌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막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용했지만, 옷이나 신발이 필요해질 때를 대비해 폐허가 된 유가촌을 몆번 더 들락거려야 했다. 그동안 마영달군이 조사를 위해 두번 다녀갔고, 주민들의 장례를 치뤄주기 위해 자산성에서 장의사들이 왔다 간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사막에서의 은둔 생활이 육개월째에 접어들 무렵의 번서는 삼화옹의 의술을 완전히 습득하고 자기 형태로 개량 발전시키기까지 했다. 그보다 더한 발전을 위해서는 의술을 [실습]할 대상이 필요했다. 체질을 강화하고 감각을 향상시키며 뇌 활동을 활성화 시키는 비법 등은 자신의 몸으로도 실험할 수 있었지만, 뇌의 혈을 통제해 인간을 조종하는 방법은 자기자신에게는 실험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그는 바위산 인근의 사막길을 지나는 민간인들에게 손을 쓰는 것은 피했다. 그들은 무척 손쉬운 상대였지만, 아무리 독해지고 잔인해 진다 마음 먹어도, 무고한 자를 제물로 삼아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만은 그의 최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림인이나, 관부에 종사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손을 대기 싫었다.
그러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어느날, 번서가 머물고 있는 바위산 아래서 큰 소란이 일었다. 병장기가 부딛치는 소리와 시끄러운 함성, 그리고 모래 바람 소리까지 상당히 다양한 소음이었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가며 산을 내려가보니 산 기슭의 큰 공터에서 한 노인이 백무련 소속이 분명한 십여명의 무림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노인은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다리에 상당히 엄중한 부상을 입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백무련의 련도들은 그에게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 조심해라, 이쪽이다!... "
" 여긴 막다른 곳이다... 우와아아아 이게 뭐야?!... "
아니 가만히 살펴보니, 백무련의 련도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칼질을 하고 있거나, 혹은 당황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중이었다. 제자리에서 엎어져서 허우적거리는 자도 있었다. 번서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다 더 상황을 분명하게 알아보기 위해 더 가까이 가려는 순간, 바로 옆에서 나직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 목숨이 아깝다면, 거기서 움직이지 말게나 젊은이. "
놀라서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게 어찌된 일인지 두리번 거리던 번서는 주저앉아 있던 노인이 이쪽을 보면서 싱긋이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전음입밀의 수법을 모르는 것을 보니 자네는 무림인이 아니구먼. "
" 아... 네, 그렇습니다. "
" 음, 날 도와줄 생각이 있는가? 강요하진 않겠네만. "
" 저는 백무련에 원한이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백무련에 쫒기고 계신 거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
" 잘 됐군. 그러면 일단 나를 좀 끌어올려 주게. 다리가 이모양이라 일어설 수가 없어. "
노인을 바위 위로 끌어올린 후 자신이 사는 동굴까지 부축해온 번서는 그에게 우선 물을 대접했다. 노인은 나무 그릇에 담긴 물을 한잔 시원하게 마신 다음, 번서가 능숙한 솜씨로 응급처치를 마치는 동안 침착하게 기다렸다.
" 후아, 이제야 살 것 같구만. 고맙네, 내 이름은 갈천휘라고 하네. "
" 제 이름은 번서라고 합니다. "
동굴을 훝어본 갈천휘는 이곳이 본격적인 거주지라는 사실을 알고 약간 놀란 눈치였다.
" 놀랍군, 여기서 사는 겐가? "
" 네, 보시다시피 제 꼴이 이렇고, 또한 관인들에게 쫒기고 있는 중이라서요. "
" 허, 관인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리 된 것인가? "
" 설명하자면 좀 길긴 합니다만... "
" 일단 시간이 남는 것 같으니 해보게나. "
번서는 자신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부모님의 원한, 스승의 원한,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 등. 그것을 듣고 있던 갈천휘는 석매리의 이야기를 듣자 무릎을 쳤다.
" 이런, 석매리! 그 친구가 그리 갔구만... "
" 스승님을 아십니까? "
" 알다마다. 성질이 더럽기로는 황국의 의원 중 제일이었지. 그래도 의롭고 올곧아서 늘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어... 그리 비명에 갈 사람이 아니었는데, 참 말세로군... "
몆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갈천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하나의 책과 하나의 피리였는데, 피리는 재질이 옥으로 이뤄져 있었다.
" 은혜와 원한을 갚지 않는다면 남아가 아니지. 내 자네를 직접 가르쳐서 석매리나 자네 부모님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지만, 당장은 내 사정 때문에 그러기가 힘드니 대신 이것을 주겠네. 이 책은 내 심득이 담겨 있는 것이고, 이건 옥적(玉笛)이라고 내가 젊은 시절에 얻었던 보물로 이 안에는 오뢰천강(五雷天强)의 비술이 잠자고 있다는 전설이 있어. 유용하게 사용하길 바라겠네. "
번서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 이런걸 얻자고 어르신을 도운건 아닙니다. "
"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주는 거야. 이런 흉흉한 세상에서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백무련 무리들에게 맞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같은 노인을 도와줄 자는 흔치 않으니까, 그것만으로 자격은 충분하이. "
갈천휘의 의사는 명백했다. 더 거절하면 결례가 될 것 같아, 번서는 그가 내미는 물건들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 동굴에서 떠나 줘야 겠어. "
" 네? "
" 백무련의 무리들이 곧 이리로 몰려울게야. 어디든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게나. "
" 어르신께서는 어쩌시려고요? "
갈천휘는 빙긋이 웃었다
" 아까도 봤잖은가. 가만히 앉아서도 그놈들을 골탕먹일 수단은 많아. 하지만 자네가 있으면 그러기가 어렵거든. "
확실히 무공을 모르는 번서가 갈천휘의 싸움에 끼어들면 방해가 될 뿐일 것이다. 번서는 그의 재촉에 얼마되지 않는 짐을 꾸려서 동굴을 나섰다.
" 흔적을 남기지 않게 조심하고, 며칠 후에 다시 오게나. 만약 운이 닿는다면 자네에게 남길 다른 것이 있을게야. "
" 제발 몸조심 하십시오. "
" 걱정하지 말래도. "
번서는 백무련의 무리들이 소란을 피우는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산을 내려갔다. 바대편 산기슭에도 그의 또다른 은신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은신처에 도착하자 마자 갈천휘가 그에게 넘겨 준 책을 펼쳐 들었다.
갈천휘가 남긴 것은 무공이 아니었다. 부적이나 주문들, 진법과 환술에 관한 연구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번서가 즉시로 배울 수 있었다. 다만 옥적에 대해서는, 당장은 그도 그 안의 비밀을 풀 수가 없었다.
" 만사에는 다 때가 있는 법... 삼화옹의 죽간이 그러했듯이, 아마도 노력과 인연이 닿는다면 이 피리의 비밀도 얻을 수 있겠지. "
갈천휘의 환술을 응용해서 자신의 은신처 앞에 진법으로 바위 벽의 환상을 만든 후, 번서는 사막 여우의 가죽으로 만든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