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_02 (2/41)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지도도 없었고, 나침반도 없었다. 그리고 별을 통해 길찾기도, 처음 해보는 것이라 신통치 않았다. 

아껴서 먹었지만 물과 식량은 속절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물이 떨어졌을 무렵, 번서는 모래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는 징조도 몰랐으니 피할 수 있을리도, 숨을 장소도 없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모래바람에 떠밀리다시피 몆 리나 걸었을까, 그는 바람에 떠밀려 무언가 단단하기 그지없는 것과 강하게 충돌한 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죽었을 테지만, 번서의 운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아니면 악운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깨어났을 때 번서가 처음 생각한 것은 [아직 죽지 않았구나]하는 사실이었다. 머리의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려 얼굴과 옷을 더럽힌 상태였지만, 그는 옷을 찢어 아물어가는 머리의 상처를 싸매고 봇짐에서 다른 옷을 꺼내어 입었다. 그가 부딛친 것은 우물을 지키기 위해 돌을 쌓아올려 만든 벽이었다. 두레박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극심한 갈증을 느끼던 그는 두레박의 줄을 타고 우물 바닥으로 내려갔다. 마지막에는 거의 굴러 떨어지다시피 했지만 결국 도착한 우물 바닥의 부드러운 흙에는 아직 습기가 남아 있었고, 그는 두레막으로 그 부드러운 흙바닥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 아아아... "

무릎까지 들어갈 정도로 파내려가자 파낸 구멍으로 흙탕물이 고였다. 번서는 바가지를 써서 물을 퍼낸 후 흙탕물에 섞여 있언 흙 알갱이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며 애를 태운 후에야, 마침내 달디 단 물 한잔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구덩이에 고인 물도 차츰 탁기가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양껏 물을 마신 후 머리의 상처를 씻기까지 한 번서는 다시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이 마냥 쉽게 풀리려는 것은 아닌듯, 그가 타고 내려왔던 두레박 밧줄을 잡아당기자 마자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두레박의 줄이 끊어져 버렸다.

" 허... "

잠깐 기가 차서 끊어진 새끼줄을 보고 있던 번서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제 이 우물에서 나갈 수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간수에게서 빼앗았던 번도와 짐도 모두 우물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 끊어진 새끼줄만 가진 맨주먹 상태였다.

어떡한다?...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을까 해서 주변을 둘러본 번서는, 우물의 바닥이 일종의 동굴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물의 벽에 사람이 드나들 만한 바위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위틈 사이로 먼 곳에 약간의 빛이 보였다. 되든 안되든 우물에서 나가야만 하는 번서는 그 빛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하고 바위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바위틈은 처음에는 걸어서 드나들 수 있을만큼 컸지만, 점점 줄어들어서 마침내는 기어서야 겨우 통과가 가능할 정도의 너비가 되었다. 그리고 한참을 기어서 도달한 [빛]의 정체는 머리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바위 틈새였고, 그 너머로 은은한 황색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워낙 구암도에서 고생한 덕분에 깡마른 체격이 되어 있었던 번서는, 제법 오랫동안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 바위틈의 구멍을 돌파할 수 있었다.

" 엿차... 어엇!... 어어어어... "

간신히 바위 구멍에서 발까지 다 빼내었을 때, 번서는 붙잡고 있던 바위 틈을 놓치고 말았고, 그대로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언가 단단한 것에 몆차례 부딛쳐 이리저리 튕기고 난 다음, 번서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 으음... 으윽!... "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온몸을 죄어오는 고통이었다. 눈앞의 돌벽에서 한참 높은 곳에 자신이 빠져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바위틈이 보였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차례로 바위테 부딛쳐 퉁긴 덕분에 강한 타박상들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죽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겨질만한 높이였다. 아니 그대로 떨어졌다면 바위에 패대기쳐진 개구리 꼴로 즉사했을 것이다.

먼저 번서는 실망해야 했다. 간신히 빠져나온 곳이 또다시 사방이 막힌 동굴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이 밝은 이유는 그의 발치 언저리의 바위 바닥을 지나는 물 속에서 금색의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몸을 돌려 엉금엉금 기어간 후 목을 양껏 축인 후에야, 번서는 그 광채의 원천을 알아볼 수 있었다.

" 물고기인가?... "

그것은 하나의 고기가 아니라 한 떼였다. 빛을 발하는 작은 금색 고기들이 수로 아래위를 무리를 지어 오르락 내리락 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은 몹시 차갑고 유속이 느렸다. 그리고 수심도 가장 깊은 곳이 번서의 발목까지나 올까... 허기를 기억해 낸 번서가 잡으려 해 봤지만, 금색의 고기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것 마냥 요리조리 빠져나가곤 했다. 잠시 더 노력해 보다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하고 단념한 번서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전신의 뼈가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시무시한 아픔이 덮쳐와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온몸을 매만져서 확인해 본 결과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지만, 타박상이 뼈에까지 미쳐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기도 어렵고, 물은 있으나 식량이 없었다. 주변은 수직 원통형의 바위 굴로 발목까지 잠기는 수로 하나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 더 막막한 상황이 닥쳐왔던 것이다. 잠시 번서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한탄해야 했다.

" 꼼짝없이 갇힌 셈이로구나, 이래서야 구암도에 있던 것보다 더 나쁠지도 모르겠군. "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한탄하던 번서의 눈에 물가 바위에 붙어 자라는 이끼가 보였다. 보기에도 [나 먹으면 재수 없소]라고 말하는 듯한 칙칙한 회색의 이끼였지만, 극도로 배가 고픈 번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뭐라도 뱃속에 집어넣은 후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돌아가던지 새로운 탈출 방법을 강구해 보아야 한다.

" 음... "

시장이라는 반찬 때문에 그랬을지도 몰랐지만 그 이끼는 몹시 맛있었다. 마치 번서가 어릴적 생일에 선물 받아 먹었던 길쭉하고 휘어 있는 노란색 껍질에 싸여 있던 서역의 신기한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몆움큼인가 집어먹고 난 다음 번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바위에 붙어있던 이끼 중 절반 이상을 이미 먹어 치운 상태였다. 이끼를 한번에 다 먹어 버리면 다시 먹을 것이 없다(고기를 잡지 않는 한은). 당장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한 조금이라도 남겨 두고 자라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번서는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면서도 물러났다.

잠깐 후엔 격렬한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에, 마른 바위 위로 올라간 번서는 팔베게를 하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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몆시간이나 잤을까, 다시 깨어났을 때 번서는 이상하게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온몸에 칙칙한 검은 색으로 드러나 있던 멍들이 사라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이 전보다 한결 가벼웠다.

" 이끼의 효과일까?... "

시력도 좋아져서, 동굴 안의 사물들도 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보였다. 수로 근처만 확인할 수 있었던 아까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사방의 벽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 번서는 본격적으로 탈출할 길이 없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관찰한 결과로 번서는 몆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아까는 몰랐지만, 이 동굴은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완전히 인공은 아니고, 자연적인 바위굴에 손을 대어 만든 것 같았다. 수로는 동굴이 생긴 후 나중에 생겨난 것으로 보였다. 바닥을 침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천정에는 사람 하나 정도가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다.

" 내가 무림인이었다면... "

번서는 예전에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무림인들을 본 적이 있었다. 한번에 작지 않은 집 지붕을 훌쩍 뛰어넘는 그들의 [경공]이라는 것을 보며 무척 놀라워 했을 때, 그들은 어린 소년이던 그에게 [내공]이라는 힘을 이용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 가르쳐 주었다.

번서는 유배지 생활을 하면서 [학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여정 동안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은 학문이 아니라 억척스런 의지와, 지난 일년여간의 혹독한 노동으로 단련된 체력이었다.

" 복수를 하기 위해서도, 학문은 쓸데없겠지. "

혼잣말을 하면서, 번서는 무림인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생애 처음으로 품게 되었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생계 문제에 부닥친 번서는 동굴 안에서 그 후로도 얼마간의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얼마동안 피나게 연습한 끝에 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고기를 잡을수 있게 되어서 이끼보다 더 만족스럽게 허기를 채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이 누더기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에, 번서는 예전에 본 작은 구멍으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동굴 벽을 잘 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암벽타기의 마지막 단계가 고역이었는데, 벽을 타고 올라간 끝에 있는 천정 부분에서 하나 혹은 둘의 바위틈에 손가락을 끼워넣은 채 전신의 체중을 지탱하고 움직이기까지 하는 것은 초인적인 정도는 아니라도 상당한 훈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천정에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 그는 구암도의 채석장에서 일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근력이 진보하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내 원하는 목적지였던 천정의 구멍에 도착하게 된 번서는 그것이 몹시 매끄럽지만 기어오르기 불가능할 정도는 아닌, 약간 구부러진 비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길고 구부러진 비탈 바깥으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 이번에야 말로... "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번서는 동굴을 천천히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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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읏!... "

때는 한낮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마자 번서는 지독한 눈부심으로 눈을 뜰 수 없었고, 전신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가파른 비탈을 굴러 떨어졌다. 구르는 것을 멈추었을 무렵에는 눈이 빛에 적응했지만, 전신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그는 태양빛을 피해서 가까운 바위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 으으으... 이게 어찌된 일이지?... "

바위 그늘에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니 누더기 사이로 드러난 맨살은 정말로 화상을 입은것 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그늘 속에서 한참을 쉬자 피부는 원래대로 되돌아 왔지만, 해가 높아 지면서 숨어 있던 그늘 자체가 점차 좁아졌다. 주변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 채 잡석들로 뒤덮인 평탄한 지대로, 그가 숨어든 바위 그늘을 제외하고는 달리 달리 그늘을 제공해 줄 만한 것이 없었다. 그가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에도 그늘은 점차 좁아졌고, 결국 그는 순전히 살기 위한 일념 하나로 맨손으로 잡석들을 헤치고 드러난 모래가 섞인 흙을 파 내려갔다.

그 작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뤄졌는데, 자신의 몸이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하나 파고 나서야 번서는 자신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굴러떨어진 일도 그러했다. 그가 떨어져 내려온 곳은 거의 절벽에 가까운 바위 경사면이고 떨어진 바닥도 울퉁불퉁한 잡석이 깔린 돌바닥이었는데, 그는 거의 전혀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긁힌 상처가 몆개 생겼지만 어느새 딱지가 앉아 있었다.

" 분명 그 이끼나 물고기에 무슨 조화가 있었던 것이다... "

자신의 근골이 강해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태양 아래 노출되면 화상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번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곰곰히 따져 보면서, 태양에 드러날 만한 부분을 돌과 모래를 덮은 채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산지에서는 해가 빨리 진다. 산 너머로 해가 넘어가 그늘이 깔렸을 때, 번서는 비로소 바위 그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일단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우선이라 번서는 무작정 비탈을 아래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얼마나 더 갔을까, 한참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바위 산과 모래 사막의 경계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이미 날은 저물어 밤 하늘에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번서는 이 바위산이 낮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처음 유배지로 올 때 보았던 산이었던 것이다. 가까이에는 사막을 여행하는 자들을 위해 돌을 깎아세워 만든 이정표도 찾을 수 있었다. 비로소, 번서는 사막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낮에는 여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밤에만 걸었다. 곳곳에 있는 우물이나 오아시스에서는 쉬어갈 수도 있었다. 일년이나 지났지만 번서는 자신이 온 길을 대체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고, 이제 그 방향을 되짚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하청이 가르쳐 준 별을 보고 방향을 정하는 방법도 결국은 도움이 되었다. 그에게서 배운 기술을 쓰면서, 문득 번서는 자신이 숨겨놓았던 쥐고기 육포를 뜯으면서 행복해 하던 그의 한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의지도 희망도 없이, 그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배신을 일삼으며 얻은 소소한 떡고물에 만족해 안주하는 자들...

문득, 번서는 부친이 죽을 당시가 기억났다. 평소에 부친을 존경해 마지않는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자들, 부친에게 학문을 사사받은 이들, 심지어 부친이 추천해 학사가 된 관원들까지 모두 정작 그분이 사약을 받고 모친이 노비로 끌려가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었다. 다들 자기만 아니면 된다는 듯이 철저하게 침묵하고 고개 돌려 외면했다. 그렇게 인간들이란 권력 앞에 비겁한 종자들인 것이다.

" 복수할 것이다. 그 모두에게. 가능하다면 황국이라는 나라를 이 지상에서 지워 버리겠다. "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생생한 기억과 복수심을 반추하면서, 번서는 그렇게 하늘을 향해 나직히 맹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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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를 징검돌 삼아 대사막을 건너는 일은 낙타나 말이 있는 사람에게도 수월치 않은 일이다. 체질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번서는 여전히 도보로 사막을 횡단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들보다 훨씬 불리했다. 게다가 수중에 있는 것도 거의 아무것도 없다. 이러니 그의 사막 여행은 몹시 힘겨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라는,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얻는 것도 이 환경에서는 상당한 위험과 수고를 요하는 일이었다.

이미 구암도의 채석장에서 인간 세상의 바닥을 경험하며 쥐나 뱀, 심지어는 구더기 등 일반인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들을 먹거리로 삼아 본 적이 있는 번서다. 그리고 사막을 여행하는 동안 그 목록에 전갈과 사막 거미가 추가되었다. 그것들은 독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몰랐다. 그리고 뭔가 이상을 느낄 때 즘에는 이미 그의 몸에 쌓인 독기가 정도를 넘어 있었다. 대사막을 거의 벗어난 시점의 관도 위에서, 그는 독기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번서는 하얀 벽을 보고 이제 자신이 죽어서 저승에 와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 온 목소리가 그를 현실 세계로 되돌렸다.

" 정신이 드는가? "

돌아본 곳에는 지긋하게 나이든 노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로소 번서는 하얀 벽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석회를 바른 천정이고,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마침 전갈과 거미 독의 해독제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죽을 뻔 했어. 대체 어쩌다가 두 독에 동시에 중독이 된 것인가? "

노인의 이름은 석매리(石賣吏)로, 대사막의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해서 먹고 사는 마을인 유가촌의 의원이었다. 번서는 자신이 사막 대상 일행에 속해 있었지만 비적의 습격을 받았으며, 사막을 건너 돌아오는 길에 거미와 전갈을 먹어서 중독된 것이라고 둘러댔다.

" 그놈의 비적들, 마영달이 부임한 후로는 더 날뛰는구만. "

" 마영달은 누굽니까? "

" 아 자네, 아직 소식이 늦구만. 마왕(馬王) 진장군이 역모를 꾀했다고 경도로 압송당했고, 마영달은 그 후임자라네. 최근 하는 짓이 몹시 진상이지. "

듣자니 진천권이라는 장군은 대사막 일대를 다스리던 마왕(馬王)으로, 번서의 부친처럼 누명을 쓴 모양이었다. 선정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공정한 통치를 했던 그가 경도로 압송된 직후 그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고, 새로 부임한 마영달은 탐관오리의 화신 같은 놈이라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 탐관오리의 필두라 할만한 윤숭이 정권을 잡은 국가에서 탐관오리가 출세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무튼 마영달은 세금을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염집의 여자를 함부로 탐하고, 요로에 올릴 진상품을 구하기 위해 대사막 일대의 여러 유적지들을 파헤치는데 군사들을 동원해 국경의 경계까지 허술해진 덕분에 그 틈을 노린 적고적 소속의 비적과 창천교의 무리들 중 불량한 패거리들의 강도짓이 창궐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무역로의 안전도가 떨어져 사람의 왕래가 뜸해진 유가촌도 경제적인 타격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이런데도 꼴에 촌장이라는 유색(乳穡)이라는 할망구는 자신이 유가촌 촌장이 되었다는 교지 한장 받았다고 마을 주민들까지 유적지 파헤치는데 동원하질 않나... 말세야 말세. 아무튼 경과를 더 봐야 하니 무리하지 말고 좀 더 누워 있게. "

생전 처음보는 타인을 붙잡고 한탄할 정도로 사정이 안좋았던 것인지, 석매리는 혀를 차면서 방을 나갔다. 곧 약 달이는 향이 풍겨왔다.

번서는 석매리의 집에서 쉬면서 사막 여행에서 받은 갖가지 피해들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석매리의 집에서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쩐지 자연스럽게, 석매리는 그를 자신의 제자 삼아 의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의술은 인간의 신체와 기운을 연구하고, 병과 상처를 고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쌓는 지극히 실용적인 학문이다. 명분과 왕도, 혹은 천지의 도리 같은 소위 [정학(正學)]에만 몰두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결과를 내는 의술에, 번서는 심취했다. 가르치는 쪽도 침술과 약초학으로는 황국 제일이라 일컬어지던 의원이고, 배우는 쪽은 겨우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수재다. 훌륭한 가르침에 재능과 열정이 더해지다 보니 그 성취는 실로 놀라워서, 채 반년도 되지 않아 번서는 석매리의 밑천을 털고 있었다.

" 자네는 정말 재능이 넘치는군, 내가 가르치기 아까울 정도야. "

"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스승님 같은 분의 훌륭한 가르침이 없었던들 어찌 제가 이만큼이나마 할 수 있었겠습니까? "

훌륭한 제자를 보는 것은 스승의 기쁨이기도 하다. 번서가 자신의 침술 이론을 한층 더 발전시켜서 응용안을 내 놓았을 때, 석매리는 번서에게 자신이 결코 숙달할 수 없었던 의서인 삼화옹서(三化翁書)를 건네 주었다. 푸른 비단 보자기에 싸인 오래된 죽간(竹刊)인 그것은 황국이 생기기도 전에 대륙 최고의 의원이라 불리우던 삼화옹이 직접 저술한 일곱 권의 죽간 중 하나로, 석매리 자신의 의술의 기초이기도 했다. 이것을 번서에게 전해준다는 것은 석매리 자신이 그에게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 삼화옹의 의술이라면 지금 자네의 몸에 벌어진 이상한 현상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지도 모르네. "

" 이 중한 것을... 정말로 감사합니다 스승님. "

" 나야말로 고맙지, 이런 뒷방 늙은이의 기술을 열심히 배워 대물림을 해 줬으니 말이야. "

일찍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석매리가 약간 코끝을 붉게 만드는 동안, 감격하며 죽간을 받아 든 번서는 그것이 마치 무슨 금덩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다루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비단 포대기를 벗긴 후 그것을 펼치고 읽어내려가는 동안, 석매리는 자신이 해석한 부분에 대해 주석을 달아 주변서 그의 공부를 돕기 시작했다.

" 음!... 아침이 되었군. "

어느틈엔가 석매리도 잠을 자러 가고, 밤을 잊은 채 독서에 몰두하던 번서는 아침이 온 것을 깨달았다. 얼굴과 팔이 드러난 맨살에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닿자 타는 듯한 감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대로 두면 화상을 입는다. 급히 세수를 하고 난 후 자신의 전신을 약물에 적신 새 붕대로 감싼 번서는 석매리가 일어나기 전에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 놓기 위해 그의 오두막을 나섰다.

유가촌은 사막의 마을이라 물이 귀하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이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하루종일 물을 긷는 사람들이 오가는 그곳은 마을 아낙들이나 어린아이들의 사교장이자 놀이터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번서를 석매리가 새로 들인 환자 겸 제자 쯤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촌장에게는 전염되는 병이 아니라고 석매리가 해명하기는 했지만, 그의 전신을 감은 붕대 때문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그를 피했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번서는 도망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피해 주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하지만 그날의 우물가는 평소와 달리 완전히 한산했다. 한 무리의 병사들과 무림인들이 마을 안을 들쑤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사막 유적지에서 일할 사람들을 강제로 징발해 가는 것이다. 물론 [촌장의 동의 하]에서다. 그동안 번서는 몆번이나 그들과 마주쳤지만,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은 환자까지 끌고 갈 정도로 담이 큰 자는 없었기에 오늘도 그러려니 하며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긷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나절을 마을 안을 뒤지고 돌아다녔어도 수확이 없자, 병사들은 꾸준히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고 있던 번서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석매리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번서를 빙 둘러싸고 질문을 퍼부었다.

" 네녀석, 혹시 병자로 가장한 것이 아니냐? "

번서가 아무 말 없이 손목에서 끝나는 붕대 매듭을 풀어서 멀쩡한 손을 보여 주자 그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지만, 그 손이 금새 발갛게 익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 보시다시피... "

다시 붕대를 차분하게 감은 번서는 병사들이 자신을 피해 가기를 바랬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중 무림인이라고 생각되는 한 여자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 즉, 그 붕대만 감고 있으면 일반인과 같다는 말이렸다? "

" 붕대의 약물이 떨어지기 때문에, 하루마다 새 붕대로 갈아 줘야 합니다. "

옥식각신 하는 동안 석매리가 자신의 집에서 나왔다. 그는 번서를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 사지 멀쩡한 유씨 촌장네 다섯 아들놈들은 보고도 못본체 하면서, 이제는 하루하루 약이 없으면 운신도 못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노역을 시키려는 건가? 니들은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나? "

석매리는 인근에서 가장 고명한 의원으로 마영달 군의 군의들을 가르치는 일을 맏고 있고, 경도에도 의원과 환자 관계로 안면을 튼 관리도 많아서 마영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신랄한 비난을 쏟아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병사들이 돌아보는 동안 그는 병사들 중에서 백무련의 제목을 입고 있는 여자를 보고 다시 한마디 날렸다.

" 의협을 추구한다는 백무련에 속한 녀석이 하는 짓이라고는 권력의 개가 되어 병사들과 몰려 다니며 무고한 백성들이나 핍박하니, 적고적에 속한 비적떼보다 못하구나! "

석매리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여자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 닥쳐라 노인, 우리는 황국의 법에 따라... "

" 황국의 법 어디에 백무련이 관부의 개 따라지라는 조항이 있던가, 새로 추가됐나? 백무련 련주인 유리부인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이겠구만, 내 오랜만에 경도에 올라가서 유리부인께 너희들이 여기서 벌이는 짓거리를 하나 하나 고해 바쳐 볼까? "

노여움에 이성을 잃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유리부인으로부터 추궁당할 일이 두려웠던 것인지, 놀란 여자가 칼을 뽑아 들었을 때, 번서는 비로소 일이 잘 못 되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 닥쳐라 이 영감이!... "

그녀가 칼을 뽑아 들고 석매리를 찌르려는 순간, 번서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그녀의 무릎 뒤 급소를 걷어 찼다. 물론 의술에 대해 배웠기에 그곳이 급소라는 것을 아는 것이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몹시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속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 으악!.. ."

다리에 힘이 풀린 여자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동안, 놀란 병사들이 번서를 포위하고 있던 원을 흐트러뜨렸다. 번서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을  빼앗은 다음 그대로 그녀의 어께 급소를 무릎으로 눌러서 그녀를 땅바닥에 개구리처럼 붙박아 제압했다. 귀양지의 생사를 건 싸움에서 수개월이나 살아 남고, 물기가 있어 매끄러운 동굴 벽과 천정까지 탈 수 있을 정도로 근력이 강해진 번서다. 거기에 제대로만 하면 아무리 고강한 무림인이라도 제압될 만큼 격렬한 고통을 유발하는 급소를 두군데나 연이어 공격당한 여자는 모래흙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꼼짝하지 못했다.

" 스승님, 이 여자가 스승님께 칼을 휘두르려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 아...경도의 유리부인이 보면 통탄할 만한 일이야. 백무련이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하지만 목에 힘 주고 다니는 것 밖에 못배운 이런 막돼먹은 어린 것이 꼴에 백무련이라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싸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지. "

어쩔 줄 몰라하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린 석매리는 조용하게 한마디 더 첨언했다.

" 마영달 장군께 가서 유가촌에는 촌장 할망구의 집 이외에는 더이상 노역을 시킬 만한 청년이 없다고 사실 대로 고하거라. 그리고 이 계집은 감히 나에게 검을 들이댔으니 내가 조금 손을 본 다음에 돌려 보내 주겠다. "

그래도 우물쭈물 하던 병사들은 번서가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자 비로소 달아났다. 그들에게 있어서 백무련의 무림인들은 바위를 부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선과 같은 존재인데, 그런 무림인을 힘 안들이고 제압해버린 번서를 맞상대 할 용기는 아무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 그 계집을 데리고 오너라. "

" 네 스승님. "

번서는 어께의 혈도를 손으로 누르고, 팔을 뒤로 꺾어 올려서 이중으로 제압을 확실히 한 후에야 깔려 있던 여자를 일으켰다. 비로소 모래바닥에서 얼굴을 일으킨 백무련의 여자는 입안의 모래흙을 뱉어내고 나서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석매리가 턱의 혈도를 제압하자 금새 조용하게 되었다.

" 내 평소에 백무련의 몆몆 인사들과는 교분이 있거든. 유리부인도 어릴적에는 내 거실에 놀러와서 날 [아저씨]라고 불렀었지... "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자는 보다 큰 권력에 약한 법이다. 진료실까지 끌려온 여자의 눈에 비로소 공포가 어렸다.

" 그 친구들에게 고해서 네년의 앞길을 완전히 아름다운 팔진도 안으로 밀어넣을 수도 있지만, 그래 봐야 내 발이랑 입만 고단해 질테니 관두기로 하지. 하지만 감히 이 석매리에게 칼을 들이대었으니 그만한 댓가는 치러야겠지? "

석매리는 침갑을 꺼내어 들고 여자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백무련의 여자는 이름이 곽부(廓芙)라고 했다. 그녀의 직위는 대사막 향단 소속의 [집행자]로, 중간 관리직인 호법 바로 아래에 있고 상맹원부터 하맹원 까지를 두루 부릴 수 있는 일종의 하사관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인품을 따진다지만 일반 맹원들 위에 있는 집행자로써 그 요구되는 무위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젊은 나이로 미루어 보건데 어릴적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온 무림 명가의 여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의 이마에 붉은 글씨로 흉(凶)자를 새겼으니, 당사자는 물론 보는 제 3자인 번서도 놀랬다.

" 그 글씨는 문신이 아니야. 지워지지도 않지. 네가 정말로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게 된다면 지워 주마. "

" 이 수치는...이 수치는 잊지 않겠다!... "

마을 밖에서 풀려 날 때 까지도 표독을 떨던 곽부는 그래도 번서의 손속이 무서웠는지 풀려나자 마자 경공으로 몸을 날려 잽싸게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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