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둔 1부 완결은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음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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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무협의 세계.
대륙을 통일한 국가인 황국(黃國)이 천하의 중심이라 이르던 경도(京都)에 도읍한지도 어언 211년,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세운 새로운 대왕의 세수는 이제 겨우 9살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는 태후 엄씨의 가문과 선왕의 총애를 받아 큰 권세를 누리던 환관들이 사이좋게 권세를 나누어 가지면서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세정이 문란해졌다. 그리고 내리 다섯해를 연이은 가뭄과 홍수로 농사를 망쳤지만, 세금은 줄어들 기색이 없었다.
가렴주구의 학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차례로 살길을 찾아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이렇게 황국의 천하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미신인 창천교(渾世敎)나 도적인 적고적(赤袴賊)에 투신하는 자들이 속출했고, 천하의 인심은 흉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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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아직 어린 대왕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으로부터 출발한다. 황국의 남쪽 해안에 있는 해운곡(海雲谷)에 위치한 작은 고을인 죽현(竹縣)에 사는 번양(幡洋)은 태학(太學)의 사도(師道)였던 학자로, 일대에서 그 학식과 인품을 알아주는 선비였다.
그 번양이 새로운 대왕에게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의 내용인 즉슨, 새로이 수렴청정을 하는 태후 엄씨의 동생인 엄숭 부자의 부정축재와 전력을 까발리고 그를 중용하지 말것을 간언함과 동시에, 선왕이 총애했던 아홉명의 내시들의 매관매직 전력을 까발려 탄핵하는 것이었다. 그 부정과 부패의 구체적인 정황까지 소상히 다 적혀 있는 탄핵의 상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상소문은 대왕에게 닿지 못했고, 번양은 사약을, 그 아들인 번서(幡瑞)는 먼 변방인 구암도로 귀양을, 남은 가족들은 경도로 압송해 관노로 삼으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남은 가족이래봐야 번양의 처인 서씨가 있을 뿐으로, 이 교지 한장으로 번양의 가족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난 셈이었다. 특히나 번양의 젊은 아들인 번서는 이제 막 초시에 합격한 진사로, 앞으로 전도가 유망하던 청년이었다.
아버지...어머니...
부친이 사약을 마시고 죽는 것을 지켜보며 대사막 구암도로의 귀양길에 오른 번서는 모친인 서씨마저 경도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꼭 살아남아 복수하리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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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를 걸어서 유배지인 구암도에 도착했을 때, 번서에게 떠오른 감정은 절망에 가까운 막막함이었다. 하늘에 까지 닿는듯한 높고 험준한 절벽이 맞닿아 서 있는 깎아지른 계곡 사이로, 절벽을 깎아내거나 나무 받침을 박아넣어 만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잔도가 걸쳐져 있었다. 그것이 구암도의 채석장, 즉 그의 유배지로 통하는 유일한 통행수단이었다. 그 광경을 보기만 해도 절로 공포심이 들 지경이었다.
쏴아아아아...
발 아래로 펼쳐진 깊은 계곡에서부터 올라오는 물소리조차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번서는 목에 씌워진 칼 때문에 아무리 발판이 불안정해도 제대로 벽을 짚거나 기댈 수 조차 없었다. 몆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나흘을 꼬박 걸어서야 그는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구암도 채석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죄수. 얌전히 지낼 것을 권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좋아.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을 테니까. "
유형지의 간수장 격인 독우(督祐)는 번서보다 머리 두개 정도는 더 크고 덩치가 세배는 되어 보이는 거한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나무 몽둥이의 굵기만 해도 어지간한 통나무랑 맞먹어 보였고, 거의 번서 만큼의 무게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번도까지 차고 있었다. 여기까지 그를 데려온 병사들에게서 인수인계를 마친 독우의 손에 이끌려 숙소로 안내된 직후에, 번서는 구암도의 악명높은 노역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다.
원래 번서는 평생 고된 일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었다. 부친은 청렴한 관인으로써 아주 넉넉하지는 않지만 모자람은 없을 정도의 생활이 보장되어 있었고, 그 부친을 본받아 관인을 지망한 그도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평생의 업이라 생각해 험한 일은 기피했던 것이다. 덕분에 채석장의 바위깨기와 잔도 수리 공사에 동원된 첫날의 밤, 그는 거의 피똥을 쌀 지경의 반죽음 상태가 되었다. 전신의 고통 때문에 그는 거의 자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식사는 하루 두 번, 건더기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멀건 죽과 소금보다 더 짠 절인 야채 비슷한 [무언가]그리고 구운 무우 두조각이 전부였다. 그중에서는 그나마 무우가 가장 먹을만한 음식에 속했다.
일터의 관리자들은 언제나 채찍을 가지고 다녔고, 거의 재미로 죄수들에게 그 채찍을 날리는 것 같았다. 첫 채찍을 맞았을 때도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의 바로 옆에서 일하던 나이든 죄수가 채찍을 맞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죽었던 것이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언제 날아올 지 모르는 채찍의 일격의 공포로, 다음 한나절과 저녁때 까지 번서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조차 몰랐다.
간신히 저녁식사를 마주대했을 때, 번서는 그것들을 무슨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죄수끼리의 대화가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죄수끼리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하루종일 배고픔과 고단함, 그리고 공포에 시달렸기 때문에 입을 열 기운조차 아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 며칠간은 번서도 그들처럼 보냈다. 텅 빈 공허한 상태로,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사는 상태로. 그래도 악착같이 정신줄을 놓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꼭, 살아남아서 윤숭과 그 일족에게 복수하고 말겠다는 복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복수심이 다시 살아났을 때, 번서에게 다른 죄수들과의 차이점이 생겼다.
첫 삼개월 동안, 번서는 다른 죄수들처럼 지냈다. 먹고, 일하고, 싸고, 잠자고. 그것의 반복, 그러면서도 번서는 관찰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살아남는 일 외의 것을 궁리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물론 탈출이었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망적이었다. 수천 길 높이의 낭떠러지 위에 불안하게 걸린 잔도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조심스럽게 두드려 가며 건너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잔도를 통해 도망친다고 해도 그의 탈출 소식을 알리는 전서구가 계곡의 출구에 있는 초소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굳이 번서의 출입을 가로막을 필요도 없이, 잔도의 출구에 있는 나무받침 몆개만 빼 버리면 그만이다.
절벽 위로 올라가도 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더 위험했다. 먼 천주산맥 꼭대기의 만년설이 녹아 생긴 차갑고 세찬 급류가 이 구암도의 깎아지른 절벽을 만든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급류 속에서 제대로 수영을 하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몸이 얼어붙어 버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라 오래 들어가 있다가는 속절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번서에게는 탈출을 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둘이나 있었다. 첫째는 물론 윤숭에 대한 복수고, 둘째는 이 구암도에 출입하는 창천교도들 때문이었다. 백무련(白武連과 함께 천하의 무림을 양분해 주름잡고 있는 창천교(渾世敎)는 마도와 사도에 빠진 무림인들의 무리였다. 예전에는 그들과 번서의 인생에 어떠한 접점도 없었지만, 지금은 있었다.
창천교의 무리 중에 구암도 인근에서 활동하는 무리들은 오락당(娛樂黨)이라는 이름의 무리였는데, 이들이 즐기는 것은 갖가지 종류의 유희였다. 그 유희란 것도 도박에서부터 시작해서 인신매매를 통한 매춘이나 유혈이 가득찬 싸움 구경까지 다양했는데, 그중에서도 유혈에 탐닉하는 무리들이 정기적으로 유형자들을 두명 [사서]구덩이에 몰아 넣고 누군가 죽을 때 까지 싸우도록 시켜 놓고는 돈을 거는 도박판을 매 달포마다 열고 있었다.
살아남은지 삼개월이 넘어서 겨우 몸을 추스린 시점부터, 번서도 이 오락당의 도박판에 [선수]로 끌려나가고 있었다.
첫 살인의 기억이란 천성적으로 살인에 탐닉하는 미친 자가 아닌이상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든 찝찝하기 그지없는 기억일 것이고, 번서에게도 그러했다. 영문도 모른 채 목에 감긴 쇠사슬에 끌려가 던져진 곳은 바위를 파낸 원형의 구덩이 안이었고, 주변에는 붉은 구슬을 허리춤에 찬 자들이 그를 내려다보며 돈을 걸고 있었다. 다른 무리들은 광기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싸워라 죽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바로 또 다른 누군가가 구덩이에 던져졌고, 그는 이 일이 익숙한듯 번서에게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위에서 덮쳐 누르고 목에 감겨 있던 쇠사슬을 써서 그를 목졸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여기서 죽는가 싶었지만, 마침 손 끝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그것을 쥐고 정신없이 휘둘렀다.
퍽!...
그것은 그가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벽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 조각이었다. 칼처럼 날카로운 그것이 머리에 박히는 바람에 상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고, 피와 뇌수를 흠쩍 뒤집어 쓴 번서는 비명을 지를 기력조차 없어서 그저 버르적거리며 물러서서 바위 벽에 기대어 앉았을 뿐이다.
치열한 싸움을 기대했던 오락당의 무리들은 약간 실망인 모양이었지만, 피를 보는 것을 즐기는 무리들은 대만족 한 모양이었다. 번서는 숙소인 허름한 오두막에 되돌려지고 난 다음 특식이 주어졌다.
난생 처음 사람을 죽이고 보상을 받은 것이다. 번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 걸신들린듯이 특식을 해치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저지른 일을 자각한 다음 측간으로 직행, 먹은 것들을 전부 토해 냈다. 자리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던 그는 며칠 동안이나 자신이 죽인 자가 머리가 깨진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게 다음 삼개월간 여섯을 죽였다. 운이 좋았다는 말 이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번서는 번번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점차 싸움과 살인에 무덤덤해져 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죄수들 중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살인에 무덤덤해지는 것에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달포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했다. 언제 자신의 운이 끝날지, 언제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하거나 운 좋은 죄수가 나타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복수하기 전에 여기서 죽겠다.
이 위기감이, 번서가 탈출을 감행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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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탈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번서는 계곡을 흐르는 급류를 자신이 탈출하는 수단으로 삼기로 했다. 절벽 위의 고원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차이 나는 살인적인 환경이었고, 잔도로는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탈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구암도의 계곡 아래를 흐르는 급류의 차가운 기운을 이겨낼 방법을 구하기만 하면, 급류는 그에게 빠르고 안전한 탈출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독우는 죄수들 사이에도 끄나풀을 심어 두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모두를 의심했다. 어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비밀을 나누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번서는 탈출 방법의 모색부터 준비까지 혼자 해결해야 했다.
우선은 식량이다. 구암도를 빠져나가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앞에 펼쳐진 것은 사막이다. 물은 물론, 체력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요했다. 죄수들은 가끔 쥐나 뱀 따위를 잡는 [행운]을 거머쥐는 경우가 있었는데, 번서는 자신이 잡은 것들을 즉시 소비하지 않고 화덕에 숨겨 훈제하고, 말려서 육포를 만들었다. 특식 중에서도 고깃조각들은 소금기가 진한 국물에 적셔 말렸다. 완성된 그 식량들은 작업장에서 나오는 톱밥과 나무 부스러기를 섞어서 만든 [포장]으로 잘 싸서 탈출로로 보아 둔 계곡과 가까운 바위틈에 숨겼다. 적어도 보름치의 식량을 모으는 것이 목표였다.
두번째는 옷과 밧줄을 구하는 일이었다. 밧줄은 언제 어디서나 유용한 도구고, 계곡을 오르내리기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번서는 작업장에서 죽은 죄수들을 매장할 때 그 작업을 자청했다. 시체들이 입고 있던 누더기들을 벗겨서 모으기 위해서였다. 또한 채석장에서 작업하는 동안 사용하는 거적들 사이에서 지푸라기 줄기들을 몰래 뽑아 숨겼다. 옷들은 물에 빠질 때를 대비해 두텁게 입고 가기 위해 필요했고, 재활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헤진 옷들을 찢어서 지푸라기 줄기들과 섞어서 밧줄을 짜면 물을 머금을수록 튼튼한 밧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발, 그것은 늘 부족했다. 그것 때문에 죄수들 사이에서 살인이 날 정도였다. 번서도 자는 사이에 신고 있던 신발을 도난당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몆번이나 오락당의 투기장에서 살아남은 죄수라 하여 다른 죄수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신발을 신고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한벌 만으로는 안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죄수들이 맨발인 상황에서 결국 무슨 수를 써도 여분의 신발을 가지는데는 실패해서, 찢어낸 옷과 새끼줄을 사용해 신발 대용품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불가능했던 일은 지도와 나침반을 구하는 일이었다. 특히 가도가도 사방의 풍경이 똑 같은, 마치 바다같은 대사막을 여행하는데 있어 그것은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절망해야 하는가 싶었던 번서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친 것은, 같이 일하던 죄수 중 한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였다. 하청(下請)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죄수는 조정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해 유배형을 받은 상인이었는데, 번서에게 특식 일부를 양보받을 희망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고 방위를 측정하는 기술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사막의 밤은 혹독하지만, 여행하기에는 낮보다 훨씬 낫다. 번서는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사막의 여행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이런 준비들은 육개월이 걸렸고, 그 와중에도 투기장에서 다시 열두번의 승리가 있었다. 이 육개월은 지금까지 번서의 인생 중 가장 냉혹하고 철두철미하게 생각을 짜내고, 준비하며,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그는 필요하다면 투기장에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다른 죄수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는,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냉혹한 존재로 변모해 갔다.
마침내 준비가 끝난 날, 번서는 그날의 마지막 작업을 마치고 죄수들이 휴식하고 잠을 청하는 막사로 돌아갔다. 보통 다들 정신없이 피곤해 눕자마자 잠이 들지만, 번서의 몸은 피로했어도 정신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졋을 때,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침구에 숨겨두었던 옷을 껴입고, 측간 뒤에 숨겨둔 밧줄을 꺼내어 허리에 감고, 식량이 숨겨져 있던 바위에 도착할 때 까지 세상은 그지없이 조용했다.
" !... "
식량을 숨겨두었던 바위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사방이 갑자기 환해졌다. 수십개의 횃불이 일제히 그를 둘러 싼 것이다. 순식간에 그는 채석장의 경비를 서는 병사들이 만든 창의 울타리 속에 갇혀 버렸다.
" 이걸 찾나? "
독우의 목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에게 별의 운행에 가르쳐주었던 하청이 독우의 옆에 굽실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그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여 숨겨왔던 비상식량이 들려 있었고, 이쪽을 향해 비웃는듯한 눈길을 보이며 그것을 야금거리며 뜯어먹고 있었다. 그가 독우가 심어둔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 진작부터 네놈의 눈치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보통이라면 그냥 죽이고 말겠지만 소중한 돈줄인 네놈을 죽일수는 없고... 독방 신세를 좀 지면 생각이 달라질게야. "
독우도 투기장의 도박판에 돈을 걸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는 개기름이 흐르는 우람한 체격을 흔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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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은 절벽 위의 고원에 만들어진 튼튼한 감금실로, 말썽을 일으킨 죄수들이 이곳에 보내어진다. 그 구조로만 보면 단순히 견고한 1인용 감옥일 뿐이지만, 그것이 지어진 위치가 고원이라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징벌이 된다.
[고원]은 한낮에는 돌 위에서 계란을 익힐 수 있고, 밤에는 물이 얼 정도로 격렬한 기온의 변화를 보인다. 사시사철이 한결같이 그런 혹독한 환경이라 동물은 물론 식물도 거의 없을 정도다. 이런 곳에 지어진 독방 안에서의 생활은 자연적으로 극한 지옥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건장한 죄수라도 이곳에서 사흘만 보내면 반 병신이 된다. 게다가 식사는 하루에 두번, 아침과 저녁 뿐이다. 이곳에 감금된 번서는 환경적인 고통과 굶주림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한밤중에 즉시 수감되어 수염에 서리가 달라붙을 정도의 추위에 떨면서도, 번서는 어떻게든 탈출해야 하다는 일념으로 끊임없이 궁리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아침식사를 가져다 주기 위해 간수가 방문했을 때, 독방의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독방의 문은 쇠창살이 아니라 두터운 나무에 철을 덧대어 만든 것이고, 바닥 근처에 식사를 넣어주기 위한 작은 여닫이 문과, 대략 눈높이 쯤에 손바닥 만한 들여다보기 위한 구멍이 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창문이 높아서 아침엔 어둡다.
" 음... 안보이는 데서 얼어 죽었나? "
엿보기 창으로 들여다 보았음에도 번서를 찾을 수 없었던 간수는 문을 열고 번서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문을 밀어서 열고 한발 들어가려는 순간, 문이 엄청난 속도로 되튕겨 왔다.
터엉!!...
문 뒤에 숨어있던 번서가 체중과 전신의 힘을 모두 실어 문에 몸을 던졌던 것이었다. 쇠를 덧대어 만든 두꺼운 나무 문짝은 그 자체로 거대한 둔기랑 비슷했고, 불시의 기습은 간수가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두걸음 정도 뒤로 튕겨 나간 간수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큰 대자로 뻗었다. 지극히 날렵한 동작으로 문 그림자에서 뛰쳐 나온 번서는 일단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통 독방에 갇힌 죄수들은 고원의 격심한 더위와 추위 때문에 거의 반쯤은 죽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독방에 갇힌 번서를 관리하는 간수도 단지 한명만 보낸 것이다. 하지만 번서는 탈출 준비를 위해 준비한 옷을 몆겹이나 껴입고 있었기 때문에 밤의 추위의 영향을 덜 받았던 탓에 간수 하나 정도는 충분히 감당이 가능할 정도로 팔팔했고, 이런 임기응변이 가능했던 것이다.
간수의 옷을 속옷까지 깡그리 벗겨내고 난 다음, 번서는 간수와 옷을 바꾸어 입었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깨끗하고 멀쩡한 옷에 번서는 잠시 유배생활을 하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금새 그 생각을 물리치고 나서 간수를 독방에 쳐넣고 문을 닫았다.
제복이란 이상한 성질이 있다. 확실한 제복은 그것을 입은 사람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그것을 입고 있던 개인의 인상도 희미하게 만든다. 간수의 제복을 입고 날이 두터운 만도(蠻刀)를 옆구리에 차고 수용소로 돌아갔을 때, 다른 간수들조차 번서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수용소장이 있을 만한 곳을 피하며 작업장과 간수들의 구역을 통과한 번서는, 그 와중에 여벌의 옷과 음식, 그리고 돈까지 챙길 수 있었다. 일년의 시간을 보낸 지상의 지옥의 입구를 뒤로한 채, 번서는 유유히 대사막으로 향한 잔도에 올랐다.
사흘을 거의 잠도 자지 않고 걸어 잔도를 통과한 번서는 잔도 끝에 세워진 초소를 통과한 후 눈앞에 펼쳐진 대사막의 경치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어께에 지고 있던, 음식과 돈이 든 행낭의 무게를 느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채석장을 벗어나는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아직 천하는 승상 윤숭의 것이고, 그는 그저 도망중인 죄수일 뿐이다. 혼자서 황국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 아버지, 어머니, 기필코 윤숭의 간을 꺼내어 두분의 영전에 바치겠습니다. "
대사막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번서는 다시금 복수심을 새로이 다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