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12/28)

눈부시도록 새하얀 배경이 펼쳐졌다. 땅이 발에 닿았는지 허공에 떠있는 모를 정도의 기묘한 기분, 마치 내가 죽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느낌인데 기분이 매우 좋다.

“카시아? 아- 아- 아 -”

조용히 소리친 목소리가 길게 메아리 쳐졌다.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안개처럼 하얀 배경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났다. 황금 잔디위에 살색 빛을 머금고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이.

“으잉? 무슨 잠자리들이 저렇게 커?”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모두 어디갔는지도 잘 모르겠고 나 홀로 남아 이상한 지역에 도착해 버린 것 같다. 상처는 어느새 다 나아있었고 눈앞엔 거대한 살색 잠자리...

“흐엑? 모, 몬스터!”

화들짝 놀라며 허리에 손을 짚었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건 없었다. 그렇구나. 검이 부러졌었지... 대신 왼손을 꽉 움켜쥐며 경계를 취했다. 나를 힐끗 쳐다보고 무심코 지나치는 그들을 보며 크게 공격적이지 않은 종족이란 점에 크게 감사를 하며 좀 더 침착히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게 거대한 세상이다. 저들이 달라붙은 꽃도 거대하고, 나무는 둘레가 어마어마한 거목들인데 놀랍게도 달린 잎사귀조차 내 키와 맞먹을 정도로 거대하여 색조가 수수한 나무임에도 정말 끔찍하게 보인다. 바닥은 아름다운 금빛이었는데 발에 밟히는 느낌이 매우 감미롭다.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식물인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주변이 잘 정돈 돼 있어 자갈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인간?”

나를 보며 잠자리 인간들이 처음으로 입을 열며 관심을 표현했다. 그러니까 놈들의 외모를 묘사하자면 이러하다. 잠자리 같은 투명한 두 쌍의 날개가 달려있는데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뽀얀 가루가 흩어 뿌려 졌다. 사람과 비슷한 몸을 하고 있었는데 옷은 모두 벗고 있어 투명한 살색이 그대로 드러났고 성기는 아무것도 달리지 않아서 언뜻 보면 아주 어린 여자아이 같은 몸매를 가졌다. 그렇지만 역시 갈라진 틈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생식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뭐 이런 종족이... 무슨 종족일까. 너무 아름다워서 몬스터라고 보기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보기엔 말도 안 돼는 외모였다. 왜냐고? 곤충도 가지고 있는 생식기가 없잖아! 하하하!

내 앞으로 어느 한 녀석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처럼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놈의 날개만 유난히 네 쌍이 달려있었다. 로리안의 모녀보다도 더 짙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치장이 다른 놈하고 달리 더욱 화사한 걸로 보아서 역시 이들 중에서도 뭔가 영향력 있는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 여왕님이 말한 그 인간이야?”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1&WTV1471013=144197678&WTV1392781=25584141&WTV1357910=273489&WTV1357911=2325769&WTV246810=62&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7. 정령왕&WTV9172643=선뜻 대구하기가 불안해진다. 행여 그렇다고 말을 꺼내면 ‘역시 여왕님이 말하던 인간이 맞구나. 으앙! 잡아먹겠다!’라고 변신하며 달려드는 게 아닐까?

“뭐어...? 여왕?”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주변을 한가로이 거닐던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이 인간 여왕님이 말한 그 인간 맞아.”

“맞아. 그 남자랑 비슷한 냄새가 나.”

“우와와와와왕 그럼 우리 여왕님 결혼 하는 거야?”

“아닐걸! 아까 그 남자도 거절당했잖아! 히히히히히”

“냐하하하하하하하”

뭐가 저렇게 좋은지 단체로 웃고 난리다. 그런데 여왕이 결혼한다니?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르겠네. 이곳은 또 어딜까... 갑자기 카시아... 서리하. 그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보고 싶어져... 물고기의 입을 거쳐 하늘나라에 도착한 얀스도. 

“이리와 인간! 이리와!”

“빨리! 빨리! 빨리!”

내 주위를 둘러싼 녀석들이 어린아이들 마냥 내 팔을 잡아당겼다. 눈동자가 황금색이며, 피부가 더없이 투명했기 때문에 역시 인간과 비슷한 외모였지만 인간 같지 않았다. 놈들의 힘이 강한 건 아니었지만, 딱히 이곳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놈들에게 저항해봤자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으며, 경계와 달리 나를 환영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손이 참 부들부들한 녀석들이군.

“엇... 저건...?”

거대한 고목나무의 밑단이 뚫려있었다. 나무기둥의 곳곳엔 창문이 붙어있었고, 두꺼운 가지 군데군데에는 움막이 지어져 있었다. 그곳을 드나드는 잠자리 종족들이 수없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나를 보자 그 수많은 무리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소곤거렸다.

“인간이다 인간!”

“그 인간이야!”

“그러게! 호호호호호! 여왕님은 좋겠다! 인기 많아서!”

몽환적인 세상. 엄청난 불균형이 자리 잡는데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역시 지금 난 꿈을 꾸는 게 확실하다. 어서 깨어나야 할 텐데... 내손을 잡아끄는 녀석들이 모두 고목의 입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딱히 서있기도 뭣해서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짐작은 했지만 들어선 거목의 안은 이들의 거주지였다. 어느 곳은 꿀 향기가 짙게 번져 나오는 창고였고, 또 어떤 곳은 그들이 생활하는 침실이었다. 이 기발한 발상이 내가 생각한 꿈이라니... 난 참 동심의 소년인가보다.

“도착했다!”

내 앞을 달리던 녀석들이 환호했다. 그들의 앞에서 꽃향기가 물씬 풍겨 나오는 핑크빛 문이 닫혀있었다.

“들어가! 여왕님이 불러!”

여왕이라... 그래봤자 생식기도 없는 녀석들인데 뭐.

조용히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꿈을 벗어나려면 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할 것 같으니까.

“어엇...?”

문들 열고 들어오니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로 아찔한 향기가 전신을 자극했다. 귀족들의 약탈품 중 고급향수가 많았지만 이런 향기는 맡아본 적이 없다. 무슨 향수이길래...! 황홀한 분위기에 심취해 꿈에서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마저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여왕의 방이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대단한 장식이 곳곳에 꾸며져 있었다. 역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투명한 하얀 천으로 가려진 침대다. 그 안에 누군가 있다.

“누구...”

“왔구나?”

“에...”

침대를 가리고 있던 천이 걷어지며 그 안에서 끔찍할 정도로 예쁜 잠자리 한 마리... 아니, 천사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정말 여자잖아...!”

“네가 랑스가 맞지요?”

“네... 네에? 아 예. 맞아요. 제가 랑스입니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날개가 굉장히 많았다. 포개어진 날개를 대충 세어보니 자그마치 일곱 쌍이다. 피부는 다른 놈들이 그러했듯이 티끌하나 없이 맑게 빛났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발끝까지 내려온 풍성한 물빛머릿결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놀랍게도 여성의 전유물인 유방이 달려있었다. 인간의 아름다운 차원을 넘어선 빛깔이 가슴 끝에 선홍색으로 맑게 빛났다. 몸매를 쓸어내리며 하반신에 시야를 집중 시켰다. 놀랍게도 풍성한 물빛 음모가 삼각꼴을 이루고 있었다. 내 남성이 미친 듯 발기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앞의 그 존재도 내 시선에 불쾌감을 느꼈는지 미간을 지푸리며 자세를 약간 틀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움직일 때마다 내 정신을 마취시키는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역시 인간의 코란 쉽게 무디어진다. 향기는 여전히 좋았지만 어느새 원래 공기냄새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자연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훅스턴이라는 인간이 다녀갔답니다.”

“뭐... 뭣!”

약간 건방지게 내뱉은 그녀의 말에 모든 몽환이 일말의 잔여물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달아나버렸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역시 이 경계는 모호하다. 생생하지만 믿을 수 없는 배경. 난 다른 세계로라도 이동되어 온 것일까.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천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훅스턴... 그자가 다녀갔다고요? 이곳은 어디입니까.”

“...요정의 나라.”

그렇다면 당신은 요정입니까? 라는 진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내 뇌가 모든 질문과 답을 유추해 내기까지는 매우 빠른 시간이 걸렸고, 그 결과 이 세계가 진짜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결론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일단 요정의 나라에 온 걸 환영해요 랑스.”

“그렇다면 당신은...”

“요정들의 여왕 페르시아스. 인간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페어리라고 부르죠.”

훅스턴이 다녀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놈은 이곳에 다다르기 위하여 전이의 문을 사용했다는 것인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미 북부 해적단은 멸망했는데. 확인사살을 위해서 옥토퍼스라는 극강의 해산물 몬스터까지 풀어놔뒀고, 가만 옥토퍼스는 도대체 어디서 얻어낸 것이지? 그 전설은 벌써 몇 천년 전부터 거슬러 왔다고 들었는데... 페어리라... 나로선 그 이름을 처음 듣는 것이다. 하지만 요정은 당연히 안다. 육백년을 살아온 백발의 류지아, 어린 마녀 시르케에 이어서 드로우 엘프라는 남자 놈까지 만났고, 결국 난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전설인 요정까지 만난 셈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요정치고는 굉장히 큰 걸?

“훅스턴... 그자가 이곳에서 얻어간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하반신에 민망하게 팽창한 내 것을 수줍게 가린 채 진중하게 지은 내 표정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칠지 고민 따윈 하지 않았다. 훅스턴... 그자가 가는 곳마다 끔찍한 일,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놈이 이곳을 찾았다면 부끄럼 따위에 깊게 빠져들 시간 따윈 없었다.

“훅스턴이란 인간은 저를 얻어가려고 이곳에 왔어요.”

“예? 당신을... 하긴, 이해합니다. 나조차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제 힘을 얻어가려고 한 것이죠.”

“힘? 힘이라고요?”

힘이라... 겉보기에는 아무런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여왕이라는 권의와 페어리라는 이름, 날개가 달렸어도 단지 내 눈엔 연약한 여인처럼 보일 뿐이었다.

“저희들에 대해서 잘 모르세요? 훅스턴이란 자는 너무 자세히 알아서 당신도 모두 다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뇨, 전 당신을 처음에 잠자리를 대상으로... 아니 아니, 그냥 저희와 다른 종족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키도 크고...”

무심결에 흘린 잠자리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심하게 당혹하는 그녀였다. 내가 얼버무린 잠자리란 말은 곤충을 일컫는 말인데 그녀는 침대에 누워 무언가를 하는 행위를 떠올린 모양이다. 결국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고 허둥거리다 뒤로 헛걸음치며 바닥에 풀썩 넘어져 버렸다. 훗... 귀여운 구석이 있다.

조용히 손을 건네서 그녀를 일으켰다. 요정의 손은 정말 따뜻하구나...

“아, 아무튼 인간들 보다 저희들은 힘이 조,좀 쎄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 데요?”

요정 페르시아스는 당황한 모습을 유지한 채 피식 웃는 날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조금만 보여드릴까요? 네.

그 순간 창문도 열려있지 않은데 엄청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눈에 보일정도의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소용돌이가 사람의 눈에 보이려면 먼지라도 휩쓸며 휘몰아쳐야 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부분만 제외하고는 주변은 모두 쥐죽은 듯 잠잠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도 휩쓸지 않은 소용돌이가 내 눈에 보이는 이유는 이러하다.

“으아아아! 화염 폭풍이다!”

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1&WTV1471013=146563011&WTV1392781=25591060&WTV1357910=273489&WTV1357911=2326397&WTV246810=63&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7. 정령왕&WTV9172643=“그만하세요. 셀레멘더, 실프.”

페르시아스의 말이 끝나자 방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화염 소용돌이가 둥글게 몰아치던 바닥은 아무런 그을림이 없었다. 괴물 잠자리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저희 페어리들은 자연 속에 스며든 정령들을 다룬답니다. 훅스턴은 이런 저를 얻어가려고 찾아왔었죠.”

- - - - - 해적 - - - - -

잠시 멍한 상태로 눈앞의 페어리를 바라보았다.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가냘프고 아름다운 그녀의 몸에서 옥토퍼스의 위용마냥 엄청난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이런 괴물 같은 요정을 훅스턴이 고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크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 대단하네요...”

“별로요. 사실 전 아무런 힘이 없어요. 정령들에게 말을 걸었을 뿐이죠.”

“그, 그렇군요.”

잠시 이렇게 불편한 자세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결국 긴 시간 끝에 이곳을 어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일행들이 걱정된다.

“돌아가겠어요. 어떻게 돌아갈 수 있죠?”

“제가 보내드릴 수 있어요. 당신을 데리고 온 것도 제가 그렇게 했으니까요.”

“그럼 보내주세요.”

“당신... 훅스턴하고 사이가 매우 안 좋죠?”

“네.”

“이상하네요?”

“뭐가요?”

“보통 인간들은 가족들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요?”

“예. 예에에에!?”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뭐 반드시 가족이라는 단어를 나와 훅스턴을 대상으로 연관시키지 않아도 괜찮지만 난 검을 쓰는 해적으로서 그렇게 눈치 없진 않다. 페르시아스가 말하는 가족이란 대상은 틀림없이 훅스턴과 나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훅스턴과 제가 가족사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아...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훅스턴이란 사람하고 당신하곤 매우 비슷한 냄새가 나서... 물론 당신에게선 다른 냄새도 많이 섞여 있어요. 특히 드로우 엘프들의 악취도 나고, 또 많은 여자들의 냄새도 나는데요?”

“그건 훅스턴과 제가 한때... 매우 친밀했기 때문에 그의 냄새가 배어버린 겁니다.”

페어리라는 종족 참으로 사람을 놀라 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코가 이토록 민감한 종족이라니...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와 어쨌든 사이가 안 좋은 게 확실하죠?”

“네. 전 그를 반드시 죽일 겁니다.”

“그래요? 그를 정말 죽일 거예요?”

“네.”

“그럼 당신... 저와 계약 맺어요.”

“무슨 계약이요?”

페르시아스가 약간 수줍은 듯이 날개를 떨었다.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주인이 되어주겠다는 계약이요.”

“네에에에에!?”

“제 주인이 된다면 당신은 저를 통해서 정령들을 부릴 수 있어요. 물론 아까 전에 제가 부렸던 것처럼 아무렇게나 힘을 남용할 순 없어요. 인간들 세계는 이곳과 달리 마나가 남아있지 않으니까 당신의 힘에 기댈 뿐이에요. 아무리 제가 정령왕으로 칭송받지만 당신들 세계의 마녀들보다 떨어질지 몰라요. 뭐 당신의 잠재된 위력으로 제 힘이 결정되겠지만...” 

정령왕이 무슨 의미냐고 물어볼 겨를이 없다. 너무 갑작스럽게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 겪는 당사자로선 그것이 정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고로 난 지금 매우 정신이 없고, 또 이런 경우는 대부분 두뇌보다 몸이 알아서 먼저 움직인다. 내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 끄덕 끄덕 끄덕 끄덕 끄덕 끄덕 - 

“고개가 아파요?”

인간들의 관습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만큼 강조하며 입을 열였다.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좋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면 눈을 감아요...”

“네? 뭘 하려고...”

“계약을 맺어야죠!”

계약이 어떤 방식을 치러야 이루어지는지 나는 잘 모른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내 앞으로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 아아... 이러한 상황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리... 하지만 난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어...? 왜...?”

“이유라도 알고 하자고요.”

“무슨 이유요?”

“훅스턴이 왔을 땐 거절했다면서 왜 그를 죽이겠다는 제 말을 듣고 선뜻 호위를 제시하는데요.”

“그가 미망의 섬에서 옥토퍼스를 불러냈으니까요.”

눈을 크게 떴다. 미망의 섬에서 옥토퍼스를 불러냈다고!? 옥토퍼스가 그곳에 잠들어 있었다고? 뭐야. 훅스턴 놈은 해적들을 말살하러 섬을 침략했던 게 아니란 말인가? 페르시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곳에선 저를 얻으려 했어요. 이 섬에서 저를 숭배하는 인간들을 모두 죽이면서 까지요.”

“이 섬이라면...?”

“당신이 핏빛해적단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거주지요. 사랑스런 그들은 호수에 숨어사는 절 숭배했었어요. 그리고 또 훅스턴이란 자는 또 동쪽으로 향하겠죠. 그곳에 사는 인간들을 말살하고 잠든 강력한 고대의 종족을 깨우려고 해요.”

“강력한 종족이라면...?”

“저도 거기까진 잘 몰라요. 어쨌든 기분 나쁜 자라서 혼줄을 내주려고 했는데 지금 우리세계에선 생물을 죽이는 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젠장... 동쪽 섬에도 뭔가 잠들어 있다고? 아주 합리적인 방식을 이용하는군. 방해가 되는 해적들도 처리하고 동시에 힘까지 얻겠다? 동쪽 섬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거다 훅스턴!

“그자를 죽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어요.”

“예... 제길... 빨리 계약 하죠. 힘 좀 빌려주세요. 놈의 사지를 잘라버리게요.”

내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날개를 떨었다. 처음 그녀의 요구대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향기, 그리고 입술에 전해져 오는 따뜻한 감촉... 눈을 부릅떳다.

“쪽... 쪼옥...”

“하아...”

이런 게 계약인가? 키스를 나누는 게... 매우 좋은 계약이야. 손을 뻗어 페르시아스의 몸을 더듬었다. 맞닿은 투명한 핑크빛 봉우리, 그것이 내 가슴에 짓눌러졌다.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다 한없이 부드러운 머릿결에 손이 미끄러지며 깊이 파고들었다. 매끈한 등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난 이미 여자에 눈을 떠버린 남자, 순진한 요정 페르시아스는 계약의 절차로 나로선 결코 주체하지 못할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등을 쓸어내리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나의 손길은 무시한 채 격렬하게 혀만 놀린다.

“쪽... 쪼옥... 하아...”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1&WTV1471013=148957376&WTV1392781=25602753&WTV1357910=273489&WTV1357911=2327459&WTV246810=64&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7. 정령왕&WTV9172643=페어리의 팔이 내 품을 감싸온다. 부드러운 가슴이 내 몸을 짓눌렀다. 내 양손은 이미 그녀의 온몸을 쓰다듬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또 다른 손은 엉덩이를 움켜쥐며 꽉 쥐었다.

“하앙...!”

한없이 키스를 나누던 페르시아스가 못 참겠다는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뒤로 꺾었다. 미치겠다. 아름다운 날개 달린 여성의 몸이 나의 몸을 짓눌러 왔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뒤쪽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노리는 곳은 바로 뒤편에 있는 아름다운 침대. 풀썩.

“하아...”

무게가 없는 낙엽처럼 늘어지는 요정, 그녀의 날개가 꾸겨지지 않을까 신경 쓰였지만, 내 걱정보다 요정의 날개는 질기고 탄력 있었다. 그녀위에 포갠 내 몸을 아래쪽으로 미끄러트리며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또 골반을 거쳐 아래쪽으로 내려 그녀의 허벅지를 잡았다.

허벅지가 어찌나 가냘픈지 작은 내손에도 꼭 들어오는 싸이즈다. 손가락에 닿는 매끈하고 촉촉한 피부, 사람의 피부와는 달리 더욱 체온이 뜨겁고 물렁한 푸딩이라도 집어든 느낌이다. 콱잡으면 뭉개지지 않을까 무심결에 고민이 될 정도였다.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종아리로 거슬러 내려왔다. 거친 숨소리가 내 가슴에 닿는다. 새초롬한 그녀의 콧망울과 반짝이는 붉은 입술, 연지라도 찍었는지 붉게 물든 양볼과 춤추는 물빛 머릿결이 조화를 이룬 모습은 역시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요정... 페어리. 그들의 여왕을 내가 차지한다! 

“하아... 이거... 계약 맞는거죠?”

말이 없었다. 얼굴에 닫힌 입술과 감긴 눈은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럼 감사히... 

종아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양손으로 발목을 잡았다. 위로 쭈욱 들어올렸다. 옷을 벗을 틈도 없어서 바지를 절반가량 내렸다. 물론 속옷도 함께 붙잡아 내리는 걸 잊지 않았다.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소름끼치는 갈급함이 모두 하반신에 몰려들었다 요정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어떤 여자의 은밀한 부분도 헤집을 자신감이 폭발할 지경이다. 서서히 고개를 내려 내 것을 붙잡았다. 바라보기도 아까워서 아껴놓았던 그녀의 소중한 그곳을 드디어 바라보았다.

“어...?”

이상하다. 분명 이러한 자세라면 여성의 비밀스런 곳이 모두 드러나야 하는데 지금 내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뭐... 뭐야!? 새하얗잖아! 그리고 서서히 배경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조금만 더 빨리 시작하는 건데!

- 파앗 -

빌어먹을... 난, 이토록 중요한 순간 처음 이곳으로 전이되어 올 때의 하얀 배경에 둘러싸여버렸다. 하아... 미치도록 아쉽지만 그래도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군. 이대로 한참을 거슬러 가야겠지. 그 시간동안 휴식을 취하려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 - 해적 - - - - -

품안에서 무언가 간지러운 느낌이 난다. 가슴을 꼬집기도 했고, 작은 동물이 피부를 무는 것 같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어떠한 작은 손이 나를 일어나라며 보채는 것 같기도 하다. 지그시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보았다. 꿈틀거리더니 그것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요 주인님.‘

“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고, 내 가슴에 붙어있다 놀라며 허공에 날아오르는 페어리를 바라보았다. 

“페르시아스... 당신... 작아졌어...”

‘여기는 제 세상이 아니니까요. 예전엔 주인님을 부르려고 몸을 작게 만들었을 뿐이에요.’

“주인님...?”

‘저와 계약을 맺었으니 주인님이죠. 말도 편하게 하셔도 돼요. 원래 계약상 규칙이 그러하니까. 저는 당신의 요구에 무조건 복종도 해야하고... 또...’

페르시아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출렁이는 배안인 줄 알았는데 어이없게도 나무로 지어진 어느 건물의 방안이었다. 이 건물이 언덕위에 자리 잡은 것인지 창밖으로 보이는 정경은 바다가 넓게 펼쳐져 우리 카린소 섬만큼이나 좋았다. 항구마을인지 배가 여러 척 있었고, 돛에 그려진 문장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정확히 보이진 않는다. 평화로워 보이는 항구마을이다.

“페르시아스, 날 어디로 옮겨온 거예요? 전이의 문을 사용했던 우리 동료들은?”

‘그게... 사실...’

무언가 심각하게 불안한 기분이 든다. 이 아름다운 잠자리 여인은 도대체 날 어디로 옮겨왔단 말인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어어?” 

‘아! 화내지 마세요. 주인님이랑 함께 전이의 문을 사용했던 동료들은 모두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되돌려 보냈어요. 당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남쪽 섬으로 이동되어 갔고, 또 거의 절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안으로 전이되었어요. 주인님의 경우에는... 생각 외로 부작용이 많이 따라서...’

“부작용 이라고?”

‘아마도 주인님이 드로우 엘프랑 지내셔서 그런가 봐요. 정령들이 드로우 엘프의 냄새 때문에 쉽게 적응을 못했고, 또 주인님이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에 전이될 때 제가 사용할 수 있었던 마나량도 극 소수여서... 그러니까 제가 계약 맺을 때 말했잖아요. 계약을 맺게 되면 제 힘은 주인님 능력에 따라서 결정된다고요. 피힝... 나한테 화내고...‘

침착하게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울상을 짓는 바람에 나 조차 민망해져 그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마나는 또 뭐고 정령들이 뭐라고 하는 건가. 사람과 덩치가 비슷했던 페르시아스는 정말 잠자리마냥 조그맣게 줄어들어 버렸고 계약을 맺으면 그녀가 부렸던 화염소용돌이를 단번에 불러낼 수 있을줄 알았는데 이건 뭐 변한 게 없다. 뭐, 신기하긴 하다. 작은 요정이 내 어깨에 내려앉아 재잘거리는 게 아마 선원들이 보면 서로 만져보겠다고 난리를 치겠지.

일단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보다 엉뚱한 곳에 와있다는 것이며, 선원들 또한 멀리 흩어지지 않고 대부분 카린소 섬이나 선박으로 이동한 것 같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곳이 먼저 어디인지 알아야하며 서둘러 동쪽에 위치한 핏빛 해적단으로 가야한다. 내 배야 뭐, 근처로 전이된 카시아나 레이하이딘이 어떻게든 끌고 오겠지. 내 배를 굳이 끌고 오지 않는다 해도 일단 훅스턴의 다음 목적지인 동쪽 섬으로 향하는 게 현명하다.

그전에 눈앞에 보이는 궁금증부터 해결해볼까.

“페르시아스.”

‘네?’

“너 다시 커질 수 있어? 예전처럼...”

‘네. 제가 작아진 건 주인님의 무의식 적인 생각이 저에게 투영된 거라고 생각하면 되요.’

“그럼 내가 다시 커져라하고 원하면 인간처럼 커질 수 있는 거야?”

‘네. 근데 그러기 전에 반드시 저에게 먼저 귀띔해 주셔야 해요. 갑자기 모습이 커지면 당황스러워져서...‘

“풋... 그렇군!”

‘얼굴이 붉어졌는데요? 어디 아파요?’

“하. 하하? 그런가.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돼.”

내 코앞에서 팔랑이며 마주보는 그녀가 더 없이 사랑스럽다. 자세히 보니 역시 옷은 하나도 걸치지 않았고, 작지만 아찔한 정도로 아름다운 나신이 그대로 내 눈에 쏘옥 들어왔다. 그래... 다시 커질 수 있단 말이지. 후후후.

‘누가와요!’

“엇...?”

나무로 지어진 집이라 그런지 발자국 소리가 또렷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체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것 같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가 잠잠해지자 가벼운 성인으로 짐작되는 몇 명의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들어온다! - 끼이이익 -

애초 누워있던 침대에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고, 페르시아스는 나의 바지주머니 안으로 몸을 숨겼다. 무기는 이미 부러졌기 때문에 OPG를 낀 왼손에 힘을 주었다.

긴장감이 맴도는 순간, 누군가 내 이마를 쓸어 올렸다. 손이 거칠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여인의 손이 분명하다. 역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미! 그 환자 깨어났어?”

이어서 에이미라고 지목된 어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그래... 이 꼬마, 해적 맞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씻길 대 보니까 팔목에 문신이 있더라고...정말 어려 보이는데...”

“혹시 이 해적 카린소 해적단 아닐까? 왜 있잖아. 키리우스 백작을 물리친 위대한 영웅해적 말이야!”

해적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까발리는 두 여인의 목소리 때문에 벌떡 일어나 사살을 해버릴 뻔 했지만, 이어지는 호감섞인 말투 때문에 내 몸은 미세하게 요동쳤을 뿐이다. 젠장, 죽은 시체놀이 하는 것도 지겨워. 그녀들은 해적에게 은근히 호감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자. 눈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떳다.

“앗...! 정신이 들어요!?”

- 오늘도 밤새도록 달려봅시다 -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2&WTV1471013=151297185&WTV1392781=25604854&WTV1357910=273489&WTV1357911=2327649&WTV246810=65&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8. 검술 대회&WTV9172643=“으... 음...”

눈을 살짝 비비며 이제야 막 깨어난 척 연기를 떨었다. 두 명의 여인, 한명은 에랄다처럼 약간 성숙해 보이는 여자였는데 비녀를 꼽아 위로 틀어 올린 잿빛 머릿결이 인상 깊었고, 한명은 어깨까지 내려온 단정한 오렌지색 머릿결을 가진 내 또래의 여자 아이였다. 둘 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둘 다 몸에 쫙 달라붙는 일체형 드레스는 입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골반라인에서 찢어진 옆트임에서 섹시한 다리가 요염하게 드러났다. 내 또래로 짐작되는 오렌지 머리색의 소녀 또한 같은 옷을 입었는데, 원래 얼굴이 수수하게 생겨서인지 조금 더 복장이 청순해 보였고, 그녀들의 가슴부분에는 둥근 원안에 오망성이 그려진 문장이 있었으며 또 그녀들의 목에 걸린 목걸이의 심벌 또한 옷에 그려진 그것과 같았다. 허리에 검을 차지 않은 걸로 보아 기사들도 아니고... 태도가 상당히 공손해 보이는데 뭐하는 여자들일까. 

“다, 당신들은...?”

“안녕하세요. 전 에이미 라이빌리아.”

“전 칼리오페 라일라. 이곳 신전에 소속된 고아원을 담당하는 사제이며 에이미는 제 밑에서 일하는 수행사제죠. 에이미가 문밖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이곳으로 옮겨왔답니다.”

“사... 사제...”

허! 참 세상이란 오묘하게 꼬여있다. 해적이 사제를 만났다. 해적이 신전에 발을 디뎠고, 고아원에서 잠을 잤다. 그녀들이 입은 건 신성한 사제복... 푸핫! 사제복이 저렇게 섹시했구나. 푸하하하!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어나는 걸로 애써 대처하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이곳은... 그러니까 이곳은 어디입니까?”

“수도 파라이소하고 가까운 켄베라 항구요.”

뭘까 이 기분 나쁜 느낌은. 켄베라... 별로 들어본 적 없는 도시이름인데... 아니, 수도 파라이소라면 들어본 적 있다. 설마...?

“지파르그... 그러니까 설마 이곳이 대륙의 북동쪽에 위치한 지파르그라는 나라가 맞습니까?”

단정한 오랜지 머리색의 에이미가 입을 열었다. 수수하지만 동시에 볼이 통통해서 상당히 귀여운 얼굴이다.

“네. 잘 아시네요?”

“허억...”

“왜요?”

“아... 아닙니다.”

내가 안정된 걸 확인한 그녀들은 편히쉬라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바로 밖으로 나갔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어이없게도 전이의 문에 들어간 날짜와 동일했다. 페르시아스와 만났던 순간의 시간들은 경이롭게도 인간들의 세상에 인과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다. 페르시아스를 만져보았다. 작은 무게는 느껴지는데 미동이 전혀 없어 깜짝 놀라 불러보았더니 잠든 걸 왜 깨우냐며 투덜거렸다. 그녀를 독촉하여 정령을 부리는 방법에 대하여 묻고 싶지만 일단 더 심각한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서보자. 

그게 무슨 문제냐면 난 지금 돈이 땡전 한 푼도 없다. 더군다나 동쪽으로 항해할만한 배도 없다. 동쪽에 위치한 해적들의 섬으로 향하는 미친 선박은 해적을 제외한 정상적인 어느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다. 배를 얻어봤자 배를 운행할 선원들은 또 무슨 돈으로 모은단 말인가! 젠장... 품안엔 키리우스의 서재에서 빼앗은 지도가 한 장 있지만, 나로선 이걸 읽을 줄도 모른다. 팔아봤자 값어치를 모르는 도구 점에선 골동품 취급할게 뻔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부터 흰 독수리라도 부르는 법을 배워놓는 건데...!”

우리 해적들 끼리 서신을 주고받는 휜 독수리는 해적 왕이 되어서야만 배울 수 있다. 나는 너무 갑작스럽게 해적왕이 되었고 임무를 부가 받는 바람에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어둑어둑해지는 초저녁, 창문을 열었다. 2층이나 되는 높이였지만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내려 마을로 향했다.

- - - - -  해적 - - - - -

내가 머문 신전이 도시와 떨어진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긴 내리막을 걸어야만 했다. 지루했기 때문에 정령들에 대해 물어볼 겸 페르시아스를 깨웠다.

‘아음... 주인님 왜요?’

“페르시아스. 나도 네가 부린 화염 소용돌이... 그것 좀 가르쳐줘.”

‘지금 주인님의 힘으론 그런 수준급의 정령들을 못 불러 모아요.’

“왜?”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 만났던 세상은 저희들이 만들어낸 세상이에요. 인간들이 머물 수 없는... 그러니까 뭐랄까. 차원이 다른 작은 이계나 마찬가지예요. 그곳엔 정령들이나 마나가 충족할 만큼 많고, 또 제가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정령이든 쉽게 부르고 조합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곳은 안 그래요. 아니, 제가 이미 종속되어버린 주인님이 안 그래요. 저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주인님의 힘이 턱없이 모자라요... 인간이 가진 마나가 이렇게 미약할 줄이야...’

“제길... 너 요정 여왕이라면서... 어떻게든 안 되는 거야?”

‘네. 여왕이라는 권위는 아무리 상급정령이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정령왕이라고도 불리는 권위인데... 실질적으로 제게 공급하는 힘이 있어야 저도 그걸 부릴 수 있어요.“

“어쨌든 내가 약하다는 뜻이구나...”

‘상심하진 마세요. 땀을 식힐 정도의 바람을 일으키거나 모닥불을 피우거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정도는 되니까요. 아, 몸이 지저분해지면 물을 만들어서 깨끗이 만들 수도 있어요.’

“에휴... 신기하긴 하지만 싸움에는 유용한 게 없네? 이래 가지고 훅스턴을 언제 잡아... 피휴...”

‘피... 아무튼 잘 들어요. 바람을 일으키는 정령은 실프, 불은 셀레멘더, 물은 운디네, 대지는 노움. 아무 이름이나 한번 불러봐요.“

“실프”

조용한 공기가 차갑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손을 뻗자 내 손안에 바람이 맺히는 것 같다. 셀레멘더라고 부르자 느닷없이 손바닥이 화르륵 타올라 깜짝 놀라버렸고, 운디네를 부르자 머릿결이 흠뻑 젖어버렸다. 노움을 불렀을 땐 평평한 땅이 기괴하게 뒤틀려 버려서 콰당하고 넘어져 버려서 페르시아스는 실소를 머금었다. 또 정령들을 그냥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력이 적잖게 소모된다. 허억...

‘아무튼 주인님이 원하는 대로 정령이 따라 움직일 거예요. 또 제가 다치거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고요. 전 어쨌든 소중히 다뤄주세요.’  

“피식... 그래 소중히 다뤄주고 말고.”

페르시아스를 향해 손을 뻗자 살며시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느새 사람이 북적이는 마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어떻게든 돈이 될 만한 구실을 찾는다!

내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주민들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내가 정확히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녀석들의 눈에는 역시 내가 이국적으로 보이는 가 보다. 

“이국적이라...”

만약 해적이 나의 국적이라고 밝혀진다면 녀석들의 표정은 어떠할까. 그들을 비웃으며 또 한편으로 의식하며 고개를 숙이고 거리를 걸었다.

“아얏...”

이런... 고개를 숙이고 걷다보니 어느 여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쿵! - 털썩

“어라?”

“어어... 너...”

이러한 상황, 참 공교롭기도 하지. 마치 말 안 듣는 동네 꼬마가 된 기분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하. 그랬지.

“칼리오페 라일라...”

“꼬마... 어떻게 빠져 나온거야? 지키는 사람이 많아서 쉽게 나올 수 없었을 텐데... 몸은 괜찮니?”

뒤로 넘어진 탓에 옆선이 크게 트인 치마가 옆으로 걷어 올려졌다. 가슴이 워낙 풍만한 탓에 달라붙는 사제복이 작아 보일 지경이다. 사제복이 약간 조이는지 짓눌러져 흘러내리는 살결이 더욱 부드럽고 요염해 보인다. 사제복 치고는 너무 가슴부분이 파여진 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나라 사제복은 최고다. 

칼리오페... 그녀의 얼굴은 주름이 있다거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은연히 풍겨져 나오는 성숙미 때문에 삼십대 중반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묘하게 어울리는 잿빛 머리카락, 이 여자의 외모에 묘한 중독성이 있다. 예쁜 것도 예쁜 거지만 매력이 있다고 말해야하나. 어쨌든 아픈 환자가 창문을 통해 도망 나왔고, 그런 환자를 간호해주던 착한 마음씨의 여인이 도주한 환자를 발견하는 공교로운 상황에 처해져 버리고 말았다.

“뭐 하러 나왔니? 오늘 하루는 쉬는 게 좋아요.”

“아... 아니에요.”

몸을 일으킨 칼리오페가 내 귓가로 입술을 뻗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풋... 역시 해적이구나.”

부정할 필요는 없다.

“네. 해적이 맞습니다.”

“배고프지 않니? 신전 밥은 맛이 없어서... 나도 몰래 도망 나왔단다. 후훗... 따라와!”

- - - - - 해적 - -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