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file2-08 너희들한테 원한은 없어. 물론 거짓말이지만
“이거 관절까지 전부 다 망가져서 변형이 아예 막혀버렸어.”
이대로라면 제대로 정비를 받지 않는 이상, 변형하면 그 자리에서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떨어질 게 분명했다.
X-38은 추가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이상, 헬기 상태에서 쓸 수 있는 무기라고는 머리에 달린 개틀링과 날개 부분에 장착된 기관단총이 전부였다.
게다가 한 번 더 돌격소총 탄이 헬기의 조종석을 뚫고 안으로 들어와, 이번에는 회장의 어깨에 정통으로 박혔다. 거기에 추가로 몇 발이 기체 내부를 마구 헤집은 탓에 X-38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컨트롤이 꼭 파워 글러브 수준이잖아. 말콤 씨?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X-38이 엉뚱한 방향으로 기울어지면서, 헬기의 배면이 건물의 뾰족하게 돌출된 외벽에 심하게 긁혔다.
장갑판 일부가 찢어지고, 내부 동력 배선이 끊어진 모양인지 또 한 번 경고 메시지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살아남은 이후. 저 T-117무리에 대응할 무기가 빈약한 것도 큰 문제지만, 지금 당장 들이닥친 상황이 더 급했다.
프로펠러가 제대로 돌지도 않고, 엔진 부분도 피탄된 모양인지 헬기가 폭풍우를 만난 범선처럼 심하게 흔들리고 있어. 추락할 때를 대비해야 할 상황이다.
“이런! 앞으로 좀 더 위험해질 테니 꽉 잡으시죠. 말콤 씨!”
회장은 그 와중에도 건물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회색 밀림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덕분에 이리저리 복잡하게 움직이는 T-117의 카메라 밖으로 벗어났다. 다수의 T-117이 퍼붓는 일제사격은 아직도 위협적이었지만, 회장의 헬기는 쥐새끼를 노리는 독사처럼 높은 건물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낮고 깊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회장이 빌딩 사이로 숨은 걸 본 붉은색 T-117이, 등에 짊어진 거대한 대구경화기를 두 손으로 들고 건물들을 직접 쏴 갈겼다.
탄약은 평범한 바주카 포탄이 아니라, 주사기처럼 앞에 기다란 바늘 같은 구조물이 붙어 있는 특이한 형태다.
포탄의 뾰족한 앞부분이 건물에 박히자 건물이 두 동강이 나며 윗부분이 밑둥 잘린 나무처럼 넘어갔다.
그렇게고층건물 두서너 개가 넘어가면서, 도시 전체가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회장이 탑승한 X-38은 산호초 지역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본체를 교묘하게 뒤틀고 옆으로 눕혀가며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를 피했다.
“호오 저런 것까지 있었던가?”
빌딩 버스터. 대 건물용 중화기로 제작된 시리즈 H 전용 무기다. 건물들 사이로 저공 비행하는 전투 헬기나, 건물들을 최대한 엄폐물로 사용하는 시리즈 H들을 잡기 위해 제작된 국지전용 화기다.
그 특성 탓에 마키비시와 함께, 도시 지역에서의 사용이 엄격히 금지된 무기 중 하나다. 혼닛츠처럼 회장이 앞뒤 안 가리는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도시에서 저런 무기를 사용할 기업 사설 경찰 따윈 아무도 없었다.
“역시 그 녀석들이군, 물증을 확실히 잡기 전까진 뭐라고 못하겠지만 이렇게 하나둘씩 꼬리를 남겨주다니 너무 친절하신데.”
그렇게 회장이 콧노래를 부르며, 잔해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동안. 뒤에 앉아 있던 말콤은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모니터를 노려봤다.
모니터에는 T-117 부대가 사람들이 있건 말건, 도시를 마구잡이로 부숴가며 X-38수색작전을 펼치는 장면이그대로 재생되었다.
T-117은 마치 ‘일부러’ 더 신나게 부숴 먹는 게 목적이라는 듯, 건물이 박살 나거나 말거나 기관총과 로켓탄을 퍼부어댔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닐 대기업 계열사 근처를 노려, 호버크래프트 주행으로 휩쓸어버렸다.
보통 사람은 미쳐버리거나 비명을 지를 상황이 베스파를 통해 X-38의 모니터로 흘러들어오는 중이다.
회장은 이미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지만, 뒤에 앉은 사람이 자신과 다른 일반인이라는 걸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이 광경을 안 보려고 눈을 감고 있는 건가? 계속 눈을 감고 있다가는 추락하거나 불시착할 때 크게 다칠 수도 있는데….’
회장은 혹시 하는 생각에 말콤이 앉아 있는 좌석 쪽을 향해 잠깐 눈을 흘겼다. 말콤 목사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니터 너머의 참상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어라? 이 상황이 별로 무섭지 않은 것 같네요. 설마 이런 게 익숙하신가요?”
“이런 곳에 살다 보면 나도 자네하고 비슷한 광경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네. 그리고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 미안하게 되었지만….”
말콤 목사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말을 끝맺지 않고 중간에 끊어버렸다. 회장은 말콤 목사를빤히 쳐다보며,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재빨리 눈치채고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숨기는 거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세요. 지금은 당신이 무슨소리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내 대답하겠네. 다만 내가 할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을 걸세.”
“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회장이 다시 한번 재촉하자. 말콤 목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열어 큰 소리로 회장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때 잭슨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총신에서 연기가 새어 나올 정도로 달궈진 경기관총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기관총탄에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긴 백인들의 시체가, 소시지 공장의 쓰레기장처럼 아무렇게나 내다 버려져 있었다.
그중 하반신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려 걸레짝처럼 된 백인 남자가 잭슨에게 묵직한 볼트를 던지면서 욕을 했다.
“이, 더러운 깜둥이 새끼!”
잭슨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날아오는 볼트 조각을 피한 뒤, 아직도 뜨거운 경기관총으로 그 남자의 머리통과 등 한복판을 노려 몇 초 정도 쏴 갈겼다.
그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토마토 페이스트처럼 으깨져 버렸고, 등에 큼직한 구멍이 뚫리면서 척추뼈와 내장 파편이 몸 밖으로 튀어나갔다.
“아 미안. 내가 깜둥이긴 하지만 너희들한테 별 감정은 없어. 그냥 시리즈 H 한 대가 필요해서 온 거니까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잭슨의 입가에는 즐거움과 만족감이 가득한 미소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잭슨은 경기관총을 내다 버린 다음, 옆에 세워진 기름 가득한 드럼통을 발로 차서 시체 무더기 아래로 기름을 흘려보냈다.
잭슨은 그 위에 성냥을 켜서 던졌고, 시체 무더기는 순식간에 캠프파이어로 변해. 고기 태우는 누린내와 함께, 단내가 나는 짐승 특유의 기름기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너희들이 흑인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거니까, 쓸데없는원망 품지 말고 곱게 지옥에 가서 몸 좀 덥히라고.”
그렇게 말한 뒤, 잭슨은 고개를 돌려, 조종석 해치가 열린 상태로 주저앉아 있는 워커-B 타입의 시리즈 H를 천천히 뜯어봤다.
“도시에 있는 높으신 흑인분들에게 복수하려고 준비한 물건인가? 이거 다른 주하고 완전 딴판이군. 보통은 도시에 있는 높으신 백인분들을 조지려고 황인이랑 흑인들이 조잡한 워커-B 타입을 개조하는데 말이야.”
고철 더미 옆에 적당히 세워둔 워커-B 타입 시리즈 H는 어깨와 양쪽 팔뚝. 옆구리에 추가 무장이 잔뜩 얹혀 있었고, 추가로 흉부 한복판과 하복부. 정강이 등에는 다른 시리즈 H에서 뜯어낸 장갑판을 덧댄 비공식 개조품이다.
“이건 한 대에 너무 많은 걸 구겨 넣어서 그냥 달리는 폭탄인데. 그래도 한 대 갖고 많은 적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지.”
하지만 주변에 있는 기체라고는 이것 한 대밖에 없는지라, 잭슨은 이제 막 개조와 보수가 끝난 워커-B타입의 조종석에 몸을 실었다.
마치 발기된 것처럼 세워져 있는 고간부의 조종석 해치가 닫히면서, 엎어진 것처럼 앉아 있던 중전차 같은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서구권 전차처럼 각진 흉부와 하체는, 마치 찌그러진 깡통처럼 피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각지고두툼한 본체에 칠해진 시가전 사양의 회색 디지털 무늬 위장도색은 상당히 많이 벗겨져 있어 별 효과가 없어 보이는 상태다.
게다가 추가로 붙인 무기 때문에, 흔히 사용되는 워커-B타입과 영 딴판인 모습이다.
어깨 안쪽에는 두 정의 120mm 레일건이 얹혀 있고, 등에는 화기 관제 시스템과 레일건 급탄 시스템이 갖춰진 백팩을 짊어지고 있었다.
둥근 돔에 방독면을 얹은 것 같은 머리에는, 추가로 독일군 헬멧 같은 장갑판이 뒤틀린 형태로 덧붙여져 있고. 어깨 장갑판에는 굉장히 크고 무거워 보이는 옥수수 모양의 기둥 한 쌍이 얹혀 있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양팔 하완부에는 휴대용 박격포까지 붙여놓은 데다가, 허리에 두 자루의 개틀링을 장착하고 발과 다리 부분에 대형 모터와 스파이크 롤러.
AP-16의 방패가 추가된 형태다. 전체적인 외형만 보면 워커-B 타입이 아니라 구 냉전 시대 소련에서 만든 다포탑 전차 같은 모습이었다.
“급한 상황이라서 별수 없군. 원래 이런 돼지같이 무거운 걸 썼다가는 회장님한테 한소리 듣겠지만 이 상황에서 멀쩡한 파츠가 죄다 저딴 물건이니….”
잭슨은 조종석 안에서 중앙 제어 시스템을 작동시킨 뒤, 회장과 통신 연결을 시도했다.
그때 네다섯 대 정도의 T-117 1개 분대가 잭슨의 워커-B 타입을 빙 둘러쌌다.
잭슨의 주변에 있는 T-117 타입들은 기동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어깨의 추가 장갑판과 팔 하완부의 장갑판.
심지어 복부 장갑판에, 호버 크래프트와 로켓노즐 주변을 보호하는 장갑판까지 전부 제거된 형태로 개조되어 있었다.
무기 역시 거의 권총이라고 할 정도로 작은 소구경 기관단총. 대 시리즈 H용 투척 나이프. 전동 나이프가 전부였다.
“기동성을 살린 접근전 위주의 T-117에 무기도 부담되지 않는 초 근접전 냉병기에 소구경 화기….”
다수의 고기동형 경장비 시리즈 H. 그리고 그걸 상대하는 워커-B 타입은 유폭성 화기를 잔뜩 실은 중무장 개조형.
누가 보더라도 T-117분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T-117 분대를 모는 조종사들 역시 자신들이 확실히 이길 것을 알고, 둘로 나뉘어서 잭슨의 워커-B 타입을 향해 달려들었다.
먼저 두 대가 앞에 서서 폭약이 설치된 나이프를 던지며 접근했고, 나머지 세 대는 뒤에서 기관단총으로 잭슨이 탑승한 워커-B의 발밑을 노려 움직임을 막았다.
“녀석들은 날 단번에 썰어 죽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갖고 노는 건가? 너희보다 몇 배나 더 빠른 혼닛츠의사설 경찰들이나 쓰레기더미에 교묘하게 숨은 노숙자들에 비하면 그냥 표적이나 다름없다고.”
잭슨은 피식 웃으며, 워커-B 타입의 레버를 뒤로 힘껏 젖히면서 그립을 꽉 눌렀다.
그러자 워커-B의 옥수수 심지 같은 어깨의 추가 장갑이 폭발했다.
동시에 수천 발의 작은 텅스텐 말뚝이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네 대의 T-117이 말뚝에 보디와 카메라를 얻어맞고 뒤로 밀려났다.
남은 한 대만 재빨리 본체를 높이 띄워 올려, 무작위로 쏟아지는 말뚝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잭슨의 워커-B는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려, 하완부에 장착된 박격포를 풀 오토로 맞춰놓고 하늘에 떠 있는 T-117을 향해 쏴 갈겼다.
잭슨은 일부러 세 발 정도를 빗맞게 만들어 착지 균형을 잃게 만든 뒤, 고간부의 조종석과 정강이. 어깨 장갑판. 발바닥 등에 장착된 내연기관을 맞췄다.
가뜩이나 인화성이 매우 높은 추진제와 전해질 용액을 사용하는 T-117은 유탄에 장갑이 뚫리고 폭발에 불이 옮겨붙자, 쓰레기장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대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워커-B 타입과 나머지 네 대의 T-117 분대원의 머리 위로 고르게 잔해를 뿌렸다.
이미 잭슨의 워커-B는 두꺼운 장갑이 잔뜩 덮여 있는 양팔 하완부를 높이 올렸다.
그 덕분에 머리 위로 떨어지는 파편들을 거의 다 막아냈다. 하지만 남은 네 대의 T-117 분대원들은, 이미 카메라와 전자기기 대부분이 망가져 버려. 하늘에서 쏟아지는 기체 잔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