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file-17 건맨vs사무라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혼닛츠 본사 건물에서 일본 무사 형태의 대형 시리즈 H가 튀어나왔다. 일본 무사 갑옷을 입은 시리즈 H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노비 무리 위로 높이 뛰어오른 뒤. 블랙 맨티스 부대의 집중포화가 쏟아지는 지역에 사뿐히 착지했다.
사무라이를 닮은 시리즈 H의 조종석에 앉아 있는 덥수룩한 수염의 히로시는, 방금 전 직원에게 들었던 상황들을 전부 다 떠올리며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하필이면 마지막 전장을 사우스 스네이크 사의 회장과 붙게 되다니, 도조 회장답지 않게 내게 너무 큰 선물을 줬군.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그녀와 싸워볼 일도 없으니까.”
히로시는 기쁨과 회한. 그리고 울분과 고통이 한꺼번에 담긴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무라이 형태의 시리즈 H를 조작해, 양어깨와 허리 아랫부분의 널찍한 판자 모양 장갑판을 정면으로 이동시켰다.
그 상태 그대로 허리와 어깨의 두터운 장갑판은, 머리의 카메라와 상반신의 엔진 블록 같은 총격에 약한 부위를 감쌌다.
“분명 사우스 스네이크 회장이 항상 사용하던 기체가 이 녀석이었지?”
히로시는, 카메라를 켜고 눈앞에 득실득실하게 몰려 있는 블랙 맨티스 부대를 죽 훑어봤다. 대부분 다이다라봇치의 포격과, 자기들끼리 총격을벌이거나 넘어진 탓에 상태가 말끔한 기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걸로 그자와 마지막 승부를 대등하게 펼 수는 없겠지. 조금 더 상태가 괜찮은 녀석은 없는 건가?”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던 히로시는, 얼마 가지 않아 막 뽑아낸 것처럼 말끔한 블랙 맨티스 한 대를 발견했다.
동시에 사무라이의 페달과 부스트 버튼을 조작해, 사무라이 같은 시리즈 H는 다시 한번 높이 뛰어올랐다.
밤하늘 공기를 가르고 도약한 사무라이 시리즈 H는 블랙 맨티스 부대 앞으로 착지한 다음, 그중 상태가 가장 멀쩡한 기체 한 대를 낚아채서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굳이 싸울 필요 없으니까,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쫓아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사우스 스네이크의 직원들.”
일본 무사 갑옷 모양의 시리즈 H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 한 번도 뽑지 않고, 무작정 도망가고 있었고. 시노비 무리와 블랙 맨티스 부대 양쪽은 아주 잠깐 전투를 중단하고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사라는 레클루즈를 조작해 곧바로 일본 무사 같은 모양의대형 시리즈 H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사라의 레클루즈가, 사무라이 같은 시리즈 H에 접근한 순간. 레클루즈의 호버 엔진이 깔끔하게 두 동강 나, 레클루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사무라이 시리즈 H는 시노비 부대에 합류하는 게 아니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예전에 함께 싸웠던 인연이 있으니 여기에서 끝내주는 거다. 뒤에도 적이 많겠지만, 너희들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을 거다.”
히로시는 카메라만 살짝 뒤로 움직여, 반파된 레클루즈의본체를 힐끔 쳐다보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미련 없이 목표 지점을 향해 무작정 질주했다. 그 모습을 본 잭슨은 크게 놀라면서도, 일단 불스아이를 움직여 대형 시리즈 H의 등 뒤에 붙었다.
불스아이는 내부 동력고갈 직전에, 다리 부분이 파편에 의한 피격까지 겹쳐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잭슨은 불스아이를 완전 수동으로 조작을 돌린 다음. 사무라이 형상의 시리즈 H를 조준한 뒤, 대 시리즈 H 저격소총으로 대형 시리즈 H의 다리 부분을 노려 쐈다. 하지만 주변의 공기가 뒤틀리는가 싶더니 탄환이 두 동강 나면서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잭슨은 다시 적을 조준한 뒤, 저격소총을 반자동으로 재조정했다. 그리고 다섯 번 정도 연속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 때마다 총알이 갈라지면서 바닥에 흩뿌려졌다.
잭슨은 곧바로 사격을 중단하고 블랙 맨티스의 하반신 파츠를 레클루즈 쪽으로 던졌다. 레이저 라이플로 저격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동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시리즈 H의 장갑을 녹일 정도의 위력이 나오는 걸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불스아이가 던져준 파츠를 받은 레클루즈는, 아직 서너 개 남은 보조 팔로 두 동강이 난 호버 엔진을 떼고 블랙 맨티스의 하반신 파츠를 이어붙였다.
그 사이에 사무라이는 두 사람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리즈 H나 베스파의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게 되었다.
“진짜 사무라이라도 되는 건가? 무협지에서나 볼 법한 짓을 시리즈 H로 하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사라는 레클루즈의 하반신을 완전히 교체한 다음, 곧바로 사무라이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잭슨은 사라가 움직이기 전에 바로 음성 통신을 보냈다.
“추격은 포기한다. 이 상황에서 더 움직이면 오히려 반격당할 때 찍소리 못하고 죽게 될 거니까. 게다가 저 녀석 우리하고 싸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라고.”
사라가 그래도 무리해가면서 사무라이의 뒤를 밟으려 하자, 잭슨이 통신을 보내 그녀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빌어먹을! 이 썩을 좆대가리 눈깔 새끼들! 좆을 뽑아서 후장에 처박아버리겠어!”
사라는 주먹으로 조종석 벽을 치면서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몇 번이고 조종석을 발로 차고 때리다가, 지칠 대로 지친 뒤에야 잭슨에게 상황을 물어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잭슨? 내 레클루즈의 시야랑 레이더가 좋지 않으니까 네가 한 번 확인해줄 수 있어? 무슨 이유로 저 녀석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달아나는 건지?!”
이에 잭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기들을 전부 떼어낸 뒤, 파손된 블랙 맨티스의 머리에 붙은 조준경과 레이더를 뽑아서 연결했다.
블랙 맨티스의 탐색장비는 불스아이의 어깨에 장착되자 마자 넓게 펼쳐지며 먼 곳에 있는 상황을 잭슨에게 그대로 보여줬다. 그리고 그의 얼굴표정은 당혹감으로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가는 곳 근처에 회장님이 있다. 그것도 시리즈 X도 없이 맨몸으로 말이야!”
“뭐라고?!”
사라와 잭슨은 자신들의 기체가 대파되었다는 사실도 잊고, 곧바로 사무라이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둘 다 등 뒤에 있던 시노비 부대의 집중공격에 얻어맞고, 두세 발짝도 떼지 못한 채 기체가 엎어져 버려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서 폭발음과 함께 눈부신 주황빛 섬광이 치솟았다.
“이런! 이미 늦어버린 건가?!”
두 사람이 폭발을 보며 한탄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몰래 수직 이착륙식 전투기HAV-11을 띄워놓고 있던 블라디미르 역시 폭발을 지켜봤다.
“이보쇼 영감. 저 정도면 다 끝난 거 아닙니까?”
반투명 캡슐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뭐 끝나거나 말거나 도와는 준다고 했으니까 걱정은 마시고.”
블라디미르는 씩 웃으며 반투명 캡슐을 뒷좌석에 놓은 뒤, 천천히 전투기를 몰아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그곳은 사우스 스네이크 본사 뒤편. 즉 지금 다이다라봇치가 공격을 퍼붓는 곳의 반대 방향이었다.
방금 전 폭격이 회장과 야스쿠니 사설 경찰 시체가 있던 곳을 휩쓸고 간 폐허에서, 등이 터진 벌레 같은 블랙 맨티스 잔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블랙 맨티스의 잔해가 번데기 껍질처럼 갈라지면서, 전동톱을 든 회장과 그녀에게안겨 있는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소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회장은 몸에 박힌 뼛조각과 유리 파편을 나이프로 대충 빼낸 뒤, 팔과 다리를 몇 번 정도 간단히 움직여봤다. 그녀의 팔과 다리는 마치 기름을 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뻣뻣하게 움직였다.
“역시 관절에 몇 개 박힌 게 빠지지 않았고, 근육이랑 신경선 몇 가닥이 끊어졌어. 사람 뼈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었잖아. 그나마 세워둔 블랙 맨티스 밑으로 숨어 들어가서 이 정도로 끝난 건가?”
그녀는 코웃음을 친 뒤, 소녀 쪽을 돌아봤다. 소녀는 얼굴과 몸 곳곳에 검댕이가 조금씩 들러붙은 걸 빼면, 어디를 긁히거나 살이 째진 곳이 없었다. 회장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기막힐 정도로 운이 좋네. 별로 다친 것도 없는 것 같고.”
소녀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 회장의 코트 자락을 꼭 붙잡았다. 뼛조각이 폭발했을 때, 순식간에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회장이 맨몸으로 자기 앞에 서서 감싸줬던 걸 떠올렸던 모양이었다.
회장은 피식 웃으며 소녀를 살짝 뒤로 밀어낸 다음. 상황을 더욱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베스파의 카메라와 연결된 선글라스형 단말기를 눈에 직접 연결했다. 폭발이 일어난 곳은 사우스 스네이크 본사 바로 앞이었다.
“젠장. 그 덩치 큰 물건이 벌써 여기까지 도착했다고? 그러면 저것들은 애초에….”
회장은 이미 잘게 다져진 레어 햄버그가 된 혼닛츠의 사설 경찰들을 슬쩍 한 번 훑어봤다.
그리고 대규모 부대로 움직이던 야스쿠니 사설 경찰들을 그저 ‘시간벌이’용으로 사용한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며 발밑에 널브러진 두개골과 뇌수 조각을 걷어찼다.
“자 그러면 아가씨? 다시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어서 아무거나 집어 탈 준비….”
그 때 회장의 귀에 시리즈 H 특유의 롤러와 제트엔진 주행 소음이 들어왔다. 뒤이어 제트엔진의 열풍까지 느끼자, 탱크에 새총 쏘는 수준이나마 일단 항상 허리에 차고 있는 민스 미트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일본 무사 갑옷과 비슷한 경사장갑을 덮어쓴 대형 시리즈 H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걸 확인했다. 회장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시리즈 H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면서 욕설을 뱉었다.
“씨팔. 집에 돌려 보내줄 생각이 없군 그래. 그래 어디 누가 집에 못 들어가고 여기에 뻗어 눕나 한번 보자고!”
잠시 후. 제트 엔진 소리가 줄어들면서, 회장의 눈앞에 혼닛츠제 대형 시리즈 H 한 대가 멈춰 섰다.
널찍한 삼각형 헬멧에 날카로운 두 개의 사람 눈 모양 파란 카메라가 번득였고, 입 부분은 배기구와 에어 덕트가 붙어 있어 진짜 숨을 내뿜는 것처럼 배기가스를 배출했다.
어깨와 허리 아랫부분은 치메리트 처리가 된 두꺼운 판자를 그대로 이어붙였으며, 흉부는 검도 면갑 같은 둥글넓적한 장갑판을 통째로 사용했다.
정강이 부분은 하카마를 입은 것처럼 펑퍼짐했는데, 아래쪽에 연료 탱크와 한데 연결된 로켓 노즐이 잔뜩 달려 있었다.
등에 장착한 거대한 박스 모양 백팩 역시 장기적인 주행용이나 예비탄창. 보조 무기나 에너지 병기에 사용하는 발전기가 아니라, 순간 추진력을 올려주는 니트로 부스터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게 세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크고 화려한 일본 무사의 투구 뿔 같은 안테나.
다른 하나는 백팩과 허리에 장착한 무기들이 전부 근접 격투용이라는 것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아무리 시리즈 H라도 총기류 한 정 장착하지 않는 건, 시대착오를 떠나서 거의 자살테러나 다를 바 없는 발상이었다.
HN-0 시작형 전위 근접전투용 시리즈 H. 영식 ‘사무라이’라는 명칭의 기체였다.
다만 근접전투용이라고 해도, 기관단총이나 돌격소총. 중기관총 정도는 장착하는 게 보통이지만, 지금 회장의 앞에 서 있는 녀석은 그런 총기류를 본체 안에도 숨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 등 뒤에 거대한 컨테이너를 하나가 끌려오고있는데, 아마 저 안에 다른 무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사용할 무기를근접전으로만 맞춘 괴상한 물건을 당당하게 끌고 온 모습에, 회장은 일단 다른 걸 다 집어치우고 비아냥거림부터 흘렸다.
“이건 또 뭔데? 대체 뭔데 지금 같은 시대에 곰팡이 냄새 나는 사무라이가 돌아다니는 거야? 게다가 혼닛츠 놈들 꼭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디자인으로 뽑아서 내는 건가? 저런 게 돌아다니면 집중포화 처 맞기 딱 좋을 텐데 말이야.”
적어도 20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대형 시리즈 H가 회장의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그녀는 어차피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민스 미트를 뽑아 들어 물총이라도 쏘듯 사무라이의 흉부 장갑판을 향해 겨누고 점사로 몇 발 쏴 날렸다.
가뜩이나 대물 화력이 약한 대인용 작렬탄을 사용하는지라, 민스 미트의 탄환은 장갑판을 두들기자마자 유리구슬처럼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