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file-08 기립하시오 인터네셔널이오
잠시 후. 지하 밑바닥의 텅 빈 격납고 앞에 선 붉은 머플러의 남자는, 격납고 전체를 간단히 둘러봤다.
격납고에는 전갈을 뒤로엎어놓은 것 같은 형상의 전투기가 몇십 대 넘게 세워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전투기에 장착할 수 있는 기관포와 미사일. 열선 병기와, 헬기 저공비행 시 사용하는 화염방사기 등의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건 꼭 배트맨 비밀기지 같은 광경이구만. 회장이라는 녀석이 이런 걸 일일이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조지고 다녔다는 건가? 헛 참. 돈 많으면 못하는 게 없군 그래.”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폭발물 다발을 만지작거리면서, 격납고 중앙의 메인 컴퓨터 테이블 앞까지 걸어갔다.
컴퓨터 테이블 주변에는 마치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느다란 기계 팔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다. 그 남자는 무성한 숲 같은 기계 팔 사이를 지나, 반투명 캡슐 모양의 메인 컴퓨터 바로 앞에 섰다.
반투명하게 가공한 유리 케이스 안에는, 마치 고깃덩어리를 뭉쳐놓은 것 같은 회색 물체가 액체에 잠긴 채 둥둥 떠 있었다.
“이거 상태가 오래 갈 것 같지 않은데, 세포가 많이 상했고 신경도 둔해진 것 같군. 굴지의 대기업 사우스 스네이크가 이런 관리를 소흘히 할 리는 없을 텐데?”
그 남자는 반투명해서 잘 보이지 않는 케이스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 물체의 상태를 유심히 점검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포기했다는 듯 혀를 찼다.
“카를 니콜라우스! 접니다. 블라디미르 스탈린. 당신의 혁명 동지입니다. 저를 불러오기 위해서 혼닛츠 놈들에게 사우스 스네이크의 정보를 다 팔아넘기셨죠?”
그렇게 외치며 스탈린은 머플러 안에 숨겨진 케이블을 메인 컴퓨터 안에 강제로 꽂아 넣어, 그 안의 프로그램과 접속했다.
그러자 하얀 수염이 거의 목까지 내려올 정도의 노인이, 홀로그램 영상으로 스탈린 앞에 나타났다. 스탈린은 머플러 안에서 헤드셋까지 꺼내 귀에 갖다 댔다. 그리고 메인 컴퓨터를 향해 기관단총을 겨누며, 무겁고 걸쭉한 게 잔뜩 낀 것 같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대체 뭣 때문에 그런 자본주의 돼지 같은 놈들 밑에 있는 겁니까? 이 세계를 말 그대로 짐승들만 사는 동물원으로 만든 게 바로 그 기업 연합 놈들 아닙니까?”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니콜라우스는 슬며시 웃으며 입을 움직였다. 그러자 스탈린이 기관단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총구를 본체 앞에 바짝 갖다 댔다.
“그저 돼지 년에게 받은 옛 은혜 때문은 아니겠죠? 옛 은혜 때문이라고 하면, 당연히 이 건물을 박살 내는 건 물론 당신도 숙청 대상입니다.”
블라디미르는 이미 알면서도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알던 니콜라우스라면 진짜 은혜를 갚는 동안에 사우스 스네이크의 정보들을 적에게 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홀로그램이 입을 벙긋벙긋 하며 뭔가 말하는 것 같은 흉내를 냈고, 블라디미르는 다 알아들었는지 눈썹을 슬며시 올리면서 그에게 물어봤다.
“예? 그녀의 목적 말입니까? 아직 그것까지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니콜라우스의 홀로그램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고, 블라디미르의 미간에는 서서히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대체 그녀의 목적이 뭐길래….”
니콜라우스의 홀로그램은 짧게 대답하듯 잠깐 입을 움직였고, 블라디미르는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어댔다.
“하, 하하, 하하하하! 이거 걸작이군요. 그저 단순한 자본주의 암퇘지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미친 또라이 새끼라니.”
블라디미르는 컴퓨터 앞에 세라믹 담배 하나를 놔둔 다음, 컴퓨터에 연결된 케이블들을 다시 뽑아서 머플로 안에 숨겼다.
“좋습니다. 상태를 보니 당신도 얼마 가지 않을 것 같고, 게다가 그녀의 목적이 진짜라면 당분간은 건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그렇다면 당신을 모셔가도록 하죠.”
블라디미르가 컴퓨터의 반투명 본체를 가져가려 하자, 여러 개의 기계 팔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리고 팔 끝에 붙은 네일 건과 용접기. 절단기와 전동톱이 블라디미르의 몸에 닿았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뒤이어 홀로그램 영상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내 인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남은 삶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니 건드리지 마라. 네 생각은 훤히 알고 있으니까 모셔간다는 말도 필요 없다. 블라디미르.’
“그렇게 말해도 저는 당신을 모셔가겠습니다. 당신은 사실상 제 아버지니 말이죠. 그러니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블라디미르가 등을 돌려 나가려고 할 때, 컴퓨터의 반투명 케이스 안에서 기포가 일면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 거품 일어나는 소리가 블라디미르의 귀에 들렸는지, 그는 다시 한번 머플러에서 케이블을 꺼내 컴퓨터에 연결했다.
“또 뭔가 할 말이라도 남은 겁니까?”
“예?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을 모셔가는 대신 그 미친년을 도와달라는 겁니까?”
블라디미르는 마치 똥에서 기어 나온 구더기를 집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결국은 적 아닙니까? 지금 제게 노동자들의 적을 도와달라는 겁니까? 그것도 기업 연합의 앞잡이나 다름없는 인간을?”
그는 한참 동안 주먹을 들어 올린 채 본체의 반투명 케이스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결국 손에 힘을 풀고 한숨을 내 쉬었다.
“뭐 좋습니다. 이번 단 한번만입니다. 지금 당장은 어디까지나 ‘동지’라고 불러야 할 처지니까 말이죠. 그러면 안녕히 계시길.”
그는 케이블들을 전부 다 정리한 뒤, 머플러 안에 숨긴 채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반투명 케이스 안의 고깃덩이는 뭔가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다시 한번 기포를 일으키며 해파리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블라디미르가 본사 건물 안에 도망가 있는 동안. 시리즈 X 블랙 맨티스는, 다시 헬기 모드인 X-38로 변형했다.
그리고 사우스 스네이크 본사 건물 근처까지, 건물 사이사이에 숨어가며 이동하고 있었다.
다만 헬기의 배 부분에 예의 그 거대한 무기가 붙어있고, 엔진 옆과 앞부분. 꼬리 부분 등에도 여러 가지 무기와 추가 장갑. 보조 장비를 잔뜩 장착해, 속도부터 꽤 느릿느릿했다.
그 모습은 먹이를 잔뜩먹어치운 뱀처럼 부풀어 있어 다소 불편한 움직임이었다.
“아. 이거 욕심껏 가져간 건 좋은데, 이렇게 크고 무거우면 움직이기 힘들어.”
조종석 안의 회장은 마치 자신이 중무장들을 직접 짊어지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들어줄 사람 없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메인 카메라와, 베스파의 이동식 카메라가 비춰주는 주변을 전부 다 살펴보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주변에는 AP-16의 잔해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게다가 잔해 근처에는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목이 없는 시체가 일렬로 늘어선 참상이 회장을 반겼다..
즉석 오프너. 포로의팔 다리를 구속해서 일렬로 세우고, 그 한 줄을 서로 일어나지도 도망가지도 못하게 따로 줄로 묶는다.
그리고 병사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하나하나 차례대로 목을 날려, 옆 사람들의 얼굴에 동료의 피가 튀게 해 잔뜩 겁을 집어먹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다가올 때마다 서서히 미쳐가는 포로의 표정과 비명을 즐긴다.
“어쭈? 우리 쪽 사람들을 저런 식으로 처형했다 이거지?!”
회장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시체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혼닛츠 사의 야스쿠니 특유의 포로 처형법이다.
혼닛츠 사의 근본이 인권이나 기본 전략. 효율적 행동 같은 걸 내다 버린 미개한 군대가 있던 국가에 속해있던 탓인지. 포로를 잡아두면 사기 증진. 혹은 흔히 말하는 ‘의지’를 기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이상한 짓을 벌여왔다.
풀어주거나 몸값 교환으로 주고받는 게 기본인 기업 연합 법은 버려두고. 전부 총기나 약물도 아닌 칼로 참수하는 게 혼닛츠 사 내부 규정으로 잡혀 있었다. 아마 지금도 그 사기 증진 의식을 치르는 중일 것이다.
아마 저 목 없는 시체들은 사우스 스네이크 사의 정찰팀과, 아직 대피하지 못한 도시 노동자들의 시체일 것이다. 실제로 목 없이 피를 쏟아내는 시체 중, 절반 넘는 이들이 자신이 지급했던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시체 무더기 중에는 어린아이나 여성의 시체도 제법 쌓여 있었다. 순간 회장은 날카로운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그녀의 뒤에 앉아 있던 소녀는 이를 악문 채 뒷좌석에서 회장의 모습을 보며 눈이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게 시대가 바뀌고 사용하는 무기까지 변했는데도, 예전의 미개한 버릇을 못 고쳐서 저런 짓을 벌이나? 멍청한 녀석들.”
회장은 코웃음을 치며 주사기 하나를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주사기 피스톤에서 압축공기 빠져나가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회장은 눈을 감으며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을 때처럼 신음을 흘렸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경고음이 흘러나오고 새로운 모니터 화면이 조종석에 떠올랐다. 혼닛츠의 야스쿠니 사설 경찰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미 사우스 스네이크의 사설경찰들은 다 사살한 모양인지, 이제 평범한 도시 사람들을 붙잡아 포박시킨 뒤 발목의 힘줄을 끊어 억지로 주저앉혔다.
그리고 이제는 장식용으로도 쓰지 않을 섬나라식 칼로 사람들의 목을, 마치 잡초처럼 가볍게 베어나가고 있었다. 회장은 입가의 미소를 싹 지운 다음. 모니터에 비춰진 야스쿠니 사설 경찰들 무리를 검지 손톱으로 가볍게 찌르며, 면도칼로 살가죽을 베듯 죽 그어나갔다.
그러자 아스쿠니 패거리 위에 떠 있는 베스파의 꼬리에서, 불길한 흑철색 총구가 튀어나왔다. 베스파는 기관총 꼬리를 앞으로 세운 채, 사람 목을 잘라대며 술을 퍼마시는 사설 경찰들을 겨눴다.
“이야 역시 이 맛에 사설 경찰 한다니까. 약탈자 놈들도 참 멍청하단 말이야.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회사에 들어가서 사설 경찰을 할 일이지. 뭐 하러 모가지에 현상금까지 붙어가면서 쓰레기나 주워 먹고 사는 거야 하하하하!”
그렇게 떠들어대는 사설 경찰 간부는, 정작 손에 칼 대신 술병과 마약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구경으로만 즐길 생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술과 마약에 취해 있다면, 비상사태가 벌어질 때 제때 시리즈 H에 탑승하기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또한 자세히 보면 목을 자르는 인원 중, 좀 나이를 먹은 일부만 능숙하게 벼 베듯 포로들의 목을 치고 있었다.
오히려 사형 집행을 하는 사설 경찰의 대부분은, 뒤에서 술과 마약을 즐기는 이들의 눈치를 보는 어린애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목을 제대로 자르지 못해 네다섯 번씩 내리치고, 도끼로 나무를 베듯 들쭉날쭉 엉터리로 베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놈들을 꽁꽁 묶어놓고 죽이는 건 언제 봐도 좋은 안줏감이잖아! 야 신삥놈들! 깔끔하게 자르라고! 칼 쓰는 게 그 모양이면 약탈자 놈들은 어떻게 잡으려고 그래?”
뒤에 서 있는 선배 사설 경찰들은 술이 들어있던 팩을 던지며 후배들에게 야유를 보냈다.
이미 모든 무기가 총으로 바뀌고, 이제 보병 화기조차 씨알도 먹히지 않아. 너도 나도 시리즈 H를 탑승하는 이상. 칼이라는 건 거의 전멸 직전이나 모든 물자를 죄다 소모해버릴 때에나 쓸 만한 무기가 된 지 오래였다.
심지어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거나, 총알도 안 먹히는 갑옷을 입고 다니는 게 기본이다.
당연히 고열이나 전동톱 같은 식의 칼날이 아니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칼을 잘 다뤄야만, 시리즈 H의 조종도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식의 미신을 햇병아리들에게 구겨 넣고 있었다.이제 막 사설 경찰의 길에 들어온 소년들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윗사람들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