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file-02 토라 토라 토라
상처투성이 소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나지막하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이에 단정한 차림새의 잭슨이 어울리지 않게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사라는 선글라스 낀 흑인 남자 잭슨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래서 정말로 저런 녀석을 거둬들이겠다는 겁니까?”
잭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소녀를 이리저리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상처가 많은 걸 확인한 뒤 눈살을 찌푸리며 회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 잭슨. 우리 회사야 돈이 썩어날 정도로 넘치잖아. 개 한 마리 키운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회장은 소녀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보이며,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 앞에 한 번씩 내밀었다. 지금 회장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강아지를 키우게 해달고 떼쓰는 어린애 같았다. 이에 사라와 잭슨이 한마디씩 던졌다.
“전에도 그랬다가 얼마 못 갔던 거 기억 안 나요?! 게다가 회장님은 손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고 우리가 다 뒷감당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정작 강아지를 키울 생각도 없는 사람이 대체 무슨 변덕입니까! 정말로 당신에게 강아지를 맡겼다가는 사흘 만에 굶겨 죽일 겁니다.”
그러자 로날드가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뭐 어때. 회장님은 저지르고 우리가 다 뒷감당해주고, 그거 때문에 고용된 거 아냐 다들?”
로날드의 가벼워 보이지만 뼈 있는 한마디에, 나머지 두 사람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회장은 로날드 앞에서 소녀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 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물어보고 있었다. 그 때 잭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한마디 흘렸다.
“또 그렇게 하나 키워서 예비로 쓰려는 건가? 대체 이번에는 몇 년이나 버틸지 참. 그러고 보니 회장님 며칠전에 누군가하고 몰래 통화를 하던 것 같은데….”
회장은 잭슨이 흘리듯 말한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마리화나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크게 했다. 잭슨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여러 가지 번거롭고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작전 완료 후에 처리하라는 명령도 들어왔을 텐데, 위쪽에서는 별말이 없군. 뭔가 우리 몰래 뒷거래를 벌였겠지.’
그러자 사라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흑인 남자의 옆구리를 찌르는 시늉을 했고,잭슨은 눈을 확 뜨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미안. 혹시 회장님이 듣지 않았겠지.”
그리고 의사 가운 입은 여자아이는 슬그머니 눈알을 굴려, 회장의 표정을 살펴봤다. 회장은 근육질 남자 앞에서 상처 입은 소녀를 이리저리 들어 보이다가, 잠깐 의사 가운 입은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사라는 헛기침을 하며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러자 회장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전부 찬찬히 훑어보다가, 테이블을 기세 좋게 내리쳤다.
“좋아 이러면 당장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으니,이 자리에서 빨리. 그리고 공평한 결정을 할 수 있게 투표로 넘기자고!”
잠시 후. 테이블 중앙에 빈 홀로그램 모니터가 떠올랐다. 모니터는 두 개로 나뉘어 있고, 하나는 녹색 원에 불이 들어오는 구조. 다른 하나는 붉은 가위표에 불이 들어오는 전광판 형식이었다.
회장은 느긋하게 마리화나 하나를 입에 문 채 자리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회장을 한 번씩 힐끔힐끔 쳐다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런 걸 다른 의견 교환도 없이 그냥 투표로 결정하자고? 회장? 뇌가 조인트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거 아냐?”
사라는 콧방귀를 뀌는 것 같은 투로 비아냥거렸다.
“또 투표입니까? 자유 합중국다운 방식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중요한 사안을 이런 안이한 애들 소꿉놀이로 결정하려 하다니. 그만둘 수 없는 건가요?”
잭슨이 안경을 고쳐 쓰면서 한숨을 내 쉬자, 로날드는 이번엔 술잔 드는 시늉을 하는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며 웃어댔다.
“그럼 진짜 자유민주주의 방식대로 무한경쟁을 하고 싶은 거야? 전부 다 모여서 배틀 로얄이라도 한 판 할까? 하하하하!”
이에 사라는 코를 막으면서 짐승 보는 시선으로 로날드를 쳐다봤고, 잭슨은 가볍게 웃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양합니다. 회사의 귀중한 전력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군요.”
“또 땀내 나는 소리 한다. 넌 뇌까지 근육 트레이닝을 하냐. 로날드?”
사라가 또 한 번 로날드에게 예의 같은 걸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것 같은 말을 던지자. 슬슬 시비를 거는 투로 나오던 로날드가, 질렸다는 듯 잭슨과 사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회장 쪽을 쳐다보며 질문을 건넸다.
“뭐 어때! 그러면 투표로 가는 건가?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는데. 아참 회장? 비밀투표가 맞지?”
그러자 회장은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비밀투표라고 해봤자 결과 확인은 내가 다 하잖아. 게다가 한 번 정해진 건 두 번 다시 딴소리하지 않는다. 이게 우리 회사 방침이고.”
회장이 기세 좋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을 꺼내자, 로날드를 제외하고 다들 질렸다는 듯 한숨부터 내 쉬었다. 그러자 회장은 큰 소리로 웃으며 모두에게 어깨동무하는 흉내를 냈다.
“어차피 이 동네는 민주주의 흉내만 내지, 알맹이는 정 반대잖아? 비밀투표가 아니라도 결과가 나오면 나라도 입 딱 다물 테니까, 뒷탈 걱정은 말라고.”
뒷탈이라는 말에 회의장에 있는 사람 전부. 심지어 로날드마저 깜짝 놀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정작 회장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던졌나?’ 싶을 정도로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테이블 중앙의 전광판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편. 훼이첸 주 중심인 테이진 시의 야경. 그곳은 훼이첸 안에서도 유독 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기저기에서 네온사인 빛이 번득였다.
그곳은 훼이첸 주에서 유일하게 화약 냄새. 그리고 불에 타고 남는 재와 연기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곳은 전 세계 합병 이후. 훼이첸 주 안에서 그나마 이전 시대의 ‘도시’ 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빌딩 숲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도로는 거의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전기 차량이 반딧불처럼 뒤꽁무니에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단 도로와 인도 옆에 굉장히 두꺼운 벽이 댐처럼 건물과 도로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철벽 건너편에 차량 네다섯 대가 한꺼번에 달릴 정도로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곳은 차나 사람이 돌아다닐 곳이 아니었다.
경적과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그리고 서로 떠드는 소리가 거리 전체를 가득 매우고 있는 중에, 두터운 벽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거리 전체를 뒤덮었다.
발바닥에 붙은 주행용 롤러 특유의 요란한 모터 소리와 주행 보조용 호버 크래프트만이 낼 수 있는 소음.
뒤이어 벽 너머로 거대한 터렛 카메라 타워 같은 게 빠른 속도로 길옆의 빈 공간을 달리고 있었다.
터렛 카메라 주변은 시위 진압용 헬멧처럼 검은 망이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 부분의 아래로는 경찰용 장갑차 같은 외형의 흉부 윗부분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미식축구 선수처럼 크게 부푼 어깨 장갑 부분에는, 마치 피아노 건반이나 이전 시대 컴퓨터의 키보드같은 직사각형의 반응 장갑이 빼곡했다.
자유 합중국의 딕 체니 사에서 가장 최근에 생산한 인간형 병기. 시리즈 H AP-16 타입이었다. 훼이첸 주에서도 보기 힘든 고가품이다.
벽 안쪽의 사람들은, 벽 건너편에 12미터의 살인병기가 질주하는데도 불구하고. 차창 밖으로 팔을 꺼내거나, 안경에서 카메라 모니터를 꺼내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제각기 저게 신형이네 다음에 언제 또 돌아다닐지 궁금하다. 등등 마치 새로운 장난감 발매 광고를 보는 아이들처럼 떠들어댔다.
벽 바깥쪽의 AP-16의 파일럿들 역시, 기체를 조작해서 벽 안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거나 경례를 붙였다. 그 동작만큼은 막 군대에 입대한 신병. 혹은 처음으로 출근하는 회사원보다 더 인간답고 자연스러웠다.
“여기요! 이쪽도 보고 손 흔들어주실래요!”
늘씬한 스포츠 카 안에서 젊은 여성이 상반신을 내밀었다.
그리고 GPS 네트워크 접속용 선글라스에 내장된 카메라 모니터를 켜자, AP-16 한 대가 그녀를 향해 받들어 총 자세를 취했다.
젊은 여성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자 모니터가 번쩍이면서 그 장면을 카메라 안에 담아냈다. 상반신만 내밀어 불안정한 상태에, AP-16은 육안으로 흐릿하게 보일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니터가 잡아낸 모습은 흔들림 하나 없이 정확히 멈춰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옛날이라면 정치나 경제 따윈 내팽개치고, 군사력에만 모든 걸 처넣은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중전차나 전투기 같은 전쟁 병기가 평일에 대놓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은, 살면서 다섯 번 이상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유 합중국에서는 모든대도시마다 매일같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모습도 그나마 돌아다니는 게 이제 막 대중들 앞에 공개된 신형이기 때문일 뿐.
만약 저 기체가 돌아다니는 모습이 익숙해진다면, 사람들은 도로 안의 매끈한 스포츠카나 인도를 걷는 미인과 잘 생긴 남자에게 더 시선을 주게 될 것이다.
시리즈 H를 사용한 범죄가 도시 안까지 퍼지며, ‘도시의 치안’만을 지키기 위한 사설 경찰들 역시 시리즈 H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결국 범죄와의 전쟁이 시리즈 서로 시리즈 H를 사용할 정도로 확장된 끝에, 도로 곳곳에 시리즈 H 전용 주행로.
도시 이곳저곳에 시리즈 H의 전투나 보급을 위한 공터까지 따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시내를 순찰중인 AP-16 무리가 가끔씩 안쪽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도시 전체를 돌아보던 중….
몇몇 고층 건물의 위쪽 외벽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지면서, 유압식 유탄발사기 특유의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도시 외벽이 피격 반응! 모두 넓게 퍼지면서방패 펴!!”
그와 동시에 큼직한 쇠구슬 여러 개가, 도시와 실직자 구역을 나누는 벽을 꿰뚫었다. 동시에 대도시 한복판을 순찰 중인 AP-16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