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第 七 章 (8/9)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객잔이었다. 문공자는 점소이에게 두

개의 방을 요구했고 송기무에게 한 방을 쓰게 하며 한마디를 던졌다.

  

  “네가 사라지면 곧바로 여자 의원에게 달려가겠다.”

  

  송기무가 도망치면 한수란에게 해코지를 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퉁명스럽게 대답한 송기무는 거칠게 방문을 닫고 객방으로 들어갔다. 

남들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만 하는 자신의 신세에 화가 난 

그는 다짜고짜 침상의 옆 부분을 걷어찼다. 

  

  “이런 개뿔!”

  

  단단한 나무로 짜여진 침상을 있는 힘껏 걷어찼으니 그 충격이 고스

란히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의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 나왔다.

  

  “이봐, 어서 나와.”

  

  문밖에서 문공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송기무는 문을 향해 짜증 가득

한 목소리로 물었다.

  

  “또 무슨 일이오?”

  

  “밥은 먹어야지.”

  

  “생각 없소.”

  

  “난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해. 뭐든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도 싫

어하고.”

  

  송기무는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당신은 여태껏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왔단 말이오?”

  

  문공자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어.”

  

  또다시 너무도 쉽게 긍정해버린 문공자의 말에 송기무는 왠지 자신

이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해졌다. 

  

  확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이나 청할까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이것저것을 따지지 않아도 제 몸을 건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객잔의 일층에 있는 식당에 들어서자 문공자는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송기무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기 위해

 나름대로 거칠게 의자에 앉았다.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문

공자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는 웅변이었다. 비록 무의미할지라도 송

기무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부잣집 귀공자로 자란 그의 마지막 자존

심이었다.

  

  “이름이 뭐야?”

  

  “...?”

  

  “말했지? 두 번 말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내가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한소저에게 달려갈 것이오?”

  

  “하핫! 지금 말싸움을 해 보자는 건가?”

  

  문공자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뭐든지 힘으로 해결하려드는 당신과 말싸움을 해서 무얼 하겠소? 

소생을 어찌할 것인지나 빨리 결정하시오.”

  

  문공자는 잠시 송기무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가 노골적으로 빤히 쳐

다보자 송기무는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흠흠.”

  

  어색해진 그는 헛기침을 했다.

  

  “아까는 여자를 위해 희생하는 대장부 흉내를 내더니 이젠 서생나부

랭이 흉내 내기인가?”

  

  “난 대장부가 될 자질도 없고, 서생의 흉내를 내고 싶은 생각도 없

소.”

  

  “그런데 뭘 믿고 무공을 익힌 내게 덤벼들은 거지?”

  

  송기무는 잠시 망설였다. 본인 스스로도 무슨 생각으로 문공자에게 

덤벼든 것인지 정리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공자의 말대로 대장부의 흉내 내기?

  

  의협심?

  

  한수란에 대한 애정?

  

  딱히 결론을 내리긴 힘들었다.

  

  그저 순간적인 행동이었을 뿐이고, 이성의 판단에 기초한 행동이 아

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구해내야 하니까.”

  

  “왜? 그녀가 널 치료해 줘야 하니까?”

  

  “...”

  

  그럴지도 몰랐다. 한수란이 문공자에게 해를 입게 되면 당장 자신을 

치료할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겠소.”

  

  갑자기 송기무가 힘을 주어 말했다. 문공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송기

무의 표정을 살폈다.

  

  “왜 달려들었는지 소생도 잘 모르겠소. 다만...”

  

  “다만...?”

  

  “아무리 소생을 치료하는 의원이라도... 아니오.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소.”

  

  송기무가 말을 하다 마니 문공자의 오른쪽 눈썹 끝이 하늘로 향했

다. 송기무는 순간적으로 문공자의 얼굴이 토라진 여인네의 얼굴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겠다는 거야?”

  

  “...”

  

  “하려던 이야기마저 하라고!”

  

  문공자의 신경질적인 재촉과 동시에 점소이가 음식을 들고 나왔다. 

  

  “음식이나 먹읍시다.”

  

  “말하라고 했어.”

  

  송기무는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공이 있으면 남의 입도 열게 할 수 있소?”

  

  “당연히!”

  

  문공자의 입 꼬리가 기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분근

착골(分筋錯骨)을 기본으로 한 수만 가지 고문법이 차례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며 세상 그 누구의 입도 열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당신은 정말 모든지 힘으로 해결하려 드는구려. 그러다 여인도 힘

으로 얻지 않을까 싶소.”

  

  “뭐야?”

  

  문공자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이며 눈 꼬리가 위로 찢어졌다.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송기무를 태울 듯이 노려보는 눈빛이었다. 송기무는 등골이 서늘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딱히 두렵다기 보다는 몸에서 오한이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죽었다 살아난 줄 알아.”

  

  문공자는 순간적으로 사나운 눈빛을 거둬들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잔뜩 식탁을 채운 음식을 보며 송기무는 망연자실했다. 

  

  ‘뭐... 저런 성질머리가 다 있지?’

  

  강호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즐비하다지만 송기무는 문공자가 그중

에서 성격의 괴이함만으로는 수위를 다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았다. 마치 영글대로 영근 석류마냥 건드리기만 하면 툭 터질 것만 같

은 성격이니 그럴 자격이 충분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날 송기무와 문공자는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뭐가 그리 급한지 

문공자는 꼭두새벽부터 송기무의 방문을 걷어찼고, 송기무는 씻는 듯

 마는 듯 고양이 세수를 하고선 방을 나서야만했다. 

  

  문공자의 얼굴에선 북풍처럼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다지 당연한 일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송

기무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하던 문공자는 갑자기 멈춰서며 획하니 뒤를 

돌아봤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 받네!”

  

  “...!”

  

  “내가 힘으로 여자를 얻어낼 사람으로 보여?”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 줄 알아?”

  

  “...”

  

  “여자한테 막 대하는 사람이야! 힘 있다고 여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

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런 내가 여자를 힘으로 다룬다고?”

  

  “설마하니 밤새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 거요?”

  

  “그래! 밤새 잠 한숨 안자고 생각했다.”

  

  “쯧쯧... 사내대장부가 그리도 소심해서야.”

  

  송기무는 상대가 계집애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 생각하니 저도 모르

게 대담해졌다. 

  

  “내가 말했지? 난 대장부니 뭐니 이런 거 모른다고!”

  

  “...”

  

  송기무는 이쯤에서 더 이상 그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를 그를 더 이상 자극해서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문공자는 집요했다. 

“말해! 내가 여자한테 막 대하는 사람처럼 보이냐고?”

“그만 합시다. 내가 실언한 거요. 사과하겠소.”

더 이상 문공자의 감정이 고조되면 좋지 않은 꼴을 겪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송기무는 한풀 꺾고 들어갔다. 문공자는 거친 숨을 내쉬며 송기무를 노려봤다. 그러나 송기무가 사과를 한 이상 더 이상 날뛰는 것도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어색하니 마무리를 짓기도 뭐했다.

“한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그따위 소리를 한다면 오체를 분시하여 길바닥에 버리겠다. 입 조심하는 게 좋아!”

소름끼치는 협박이었다. 송기무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날카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문공자의 시선에서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널찍한 등이었다. 

그 등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 귀계자(鬼計子) 제갈휘추(諸葛徽推)는 숨조차 쉬기 곤란한 패도적인 압력에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제갈휘추는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게 될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조아린 채 미동도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금니를 악다물고 있지만 애써 공손한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아직 인가?”

무거운 음성이었다. 억지로 얹어진 것은 아니었다.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감정임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음성이었다.

“네.”

많은 말을 하고 싶은 제갈휘추였다. 합당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변명은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그였다. 지낭(智囊)을 자처하는 그가 이토록 간단한 처세의 묘를 모를 리 없었다. 더욱이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도적인 기세는 긴 말을 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케 만들고 있었다.

“언제까지면 되겠는가?”

제갈휘추는 당황했다.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상관은 어설픈 추측 따위가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속하, 이번 일에는 자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그 짧은 순간동안 압도적인 시간의 무게가 생겨났다. 그다지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제갈휘추는 엄청난 전신의 모공이 닫힌 듯한 느낌에 괴로워해야만 했다.

“내가 무리한 질문을 했군.”

갑작스레 걷혀진 압력. 

제갈휘추는 조심스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의 안색도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십오 년을 모셔온 주군이었다. 그가 평상심을 회복했다는 것을 깨달은 제갈휘추는 그제야 소매를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사내가 몸을 돌려 제갈휘추를 바라보았다. 

제갈휘추의 허리가 더욱 깊이 숙여졌다. 

“교(敎)를 하나로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네.”

서른다섯의 사내가 불혹을 넘긴 제갈휘추에게 하는 하대였음에도 조금의 어색함이 없었다.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너무나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끌 일이 아니라는 조급한 마음에 자네에게 부질없는 채근을 했군.”

“아닙니다. 모두가 속하의 불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건 아니지.”

사내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가 말을 멈추자, 치장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검박한 서재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듯 했다. 제갈휘추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실수였던 것 같군.”

진심어린 어조였다.

“총교사(總敎師)!”

갈휘추는 진한 감정을 목소리에 실어 사내를 불렀다.

굳게 입술을 닫고 있는 사내, 일월신교 총교사 육전운(陸全澐)!

귀계자 제갈휘추가 십오 년 전 차기 교주의 재목으로 지목하고 스스로 수하로 들어간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었다. 뛰어난 오성과 무재(武才),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육전운만이 가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은 제갈휘추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교내에 있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칭해지는 총교사의 위에 오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않은 육전운은 실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의 실수라 말하는 것은 제갈휘추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나치게 서둘렀어.”

굵은 울림을 가진 육전운의 음성이었다.

“핍박받는 형제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다시금 육전운의 침묵이 이어졌다. 제갈휘추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였다. 

“내가 과연 옳게 가는 것일까?”

“총교사! 지금 그게…….”

“솔직한 심정일세. 어쩌면 내가 자의적으로 교의 분란을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어.”

제갈휘추는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될 말이었다. 

“총교사, 지금 수많은 형제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교단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어찌 지금에 와서 그런 회의를…….”

제갈휘추의 빠른 혓바닥은 한순간 멈췄다. 답답한 심정에 의중을 쏟아 내었다지만 자신의 설득이 필요한 육전운이 아니었다. 일월신교의 이인자라하나, 이미 절대자로서의 고독을 깊이 느끼고 있는 그였다. 내심을 털어 놓아 스스로를 정리하고자 할 뿐인 것이다.

“가야할 길이니 가야하겠지만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군, 그래.”

제갈휘추가 스스로의 실태를 깨닫고 당황하고 있을 때, 육전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교주님의 마음이 이해가 된 단 말이야.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까?”

“…….”

제갈휘추는 묵묵히 육전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육전운은 단풍나무로 짜인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깍지를 끼어 얼굴 앞에 가져갔다. 느릿하게 감겼다, 뜬 눈에서 불같은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내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한 듯 하군. 자네는…….”

“하명하십시오, 총교사.”

제갈총휘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일 년의 시간이면 되겠나?”

“충분합니다. 반드시 최단시간 내에 수아 아가씨를 모셔오겠습니다.”

“단!”

“……?”

“이번에는 강요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게. 실수는 한번으로 족하다네.”

“존명!”

제갈총휘의 두 손이 그의 가슴 앞에서 굳게 맞잡아졌다.

중원에서 하나의 인물을, 그것도 총명하고 무공이 뛰어난 여인이 숨고자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망망대해(茫茫大海)속의 바늘을 찾아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일년이란 기한이 길다할 수는 없었으나, 제갈총휘의 얼굴에는 완결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의 능력 범주 내에서 주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매만지는 소리가 여름날 소낙비처럼 지나갔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감상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소리였지만, 강희연의 다급한 마음은 그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알싸한 칼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통증조차 잊은 그녀였다. 

사부의 명을 마치고 자신의 정인에게 돌아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어야 했다. 한낱 부잣집 도련님에 불과한 송기무가 강호에 휘몰아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심장이 튀어나올 때까지 달리고 달렸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 송기무는 이미 행방불명이 된 후였다. 전대의 기인들인 음양쌍괴가 송기무를 납치해간 후였던 것이다. 백방으로 송기무의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사문으로 돌아가 송기무의 건사함만을 간절히 바라던 그녀에게 음양쌍괴가 운남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과 함께 강희연은 운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섬서(陝西)에서 사천을 지나 운남으로 향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쾌속(快速)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송기무의 안전을 확인코자하는 그녀의 간절한 염원은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있었다. 거품을 물고 쓰러져버린 말을 버린 채 달린지 벌써 이틀째. 내력의 부침을 무릅쓴 채 달리는 그녀의 표정에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두두두두

거칠게 땅에 흔적을 남기는 말굽들.

건조한 흙먼지는 봄날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사두(四頭)의 건마가 지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말의 거친 숨결은 하얀 김으로 장식되며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흩어진다. 

“연아야, 그리 급히 몰면 말이 버티지 못하질 않느냐?”

당일기가 당가연의 말에 따라붙으며 외쳤다. 그러나 정작 당가연은 부친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을 재촉할 뿐이었다. 당일기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갈 때, 당호엽의 전음성(傳音聲)이 귀를 파고들었다.

[내버려 둬라. 아직까지 우릴 원망하고 있는 게야.]

[하지만, 숙부님!]

당호엽은 차분히 말을 몰아 당가연의 뒤를 쫓고 있었다.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을 짐작한 당일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가문의 어른께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는 것은 당문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굴러들어온 복을 찬 것은 자신이었다. 딸의 말을 들었다면 송가의 음양신단은 저절로 당문으로 왔을 것이다. 딸을 내어 줄 수는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음양신단부터 챙기고 봤어야할 일이었다. 

당문이 정파의 기둥중 하나로 서 있었기에 애초에 계략이라는 것을 세우지 않은 것이 실수였을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송씨일가가 화를 당할 줄 알았다면, 오히려 선수를 쳐서 음양신단을 회수하는 것이 오히려 잘한 일일 수도 있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를 더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미친 듯 말을 모는 딸의 모습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긴 했지만 그는 묵묵히 그 뒤를 쫓았다. 그의 뒤로 당가이화 중 하나인 당수연이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상사지환(相思之患)에 헤매던 사촌동생이 연모해 마지않는 정인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일행에 따라나선 것이다. 자신에 못지않게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사촌 동생의 방심(芳心)을 훔친 사내가 대체 어떤 인물인지 눈으로 확인 하고팠던 것이다.

“거, 좀 천천히 좀 갑시다.”

불퉁한 목소리였다. 운남을 벗어나며 한껏 추워진 날씨였음에도 솜옷 안으로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이대로 땀이 식으면 고뿔이라도 걸릴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땀을 낼 정도로 걸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리가 풀리고 허리가 당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잘난 사내대장부께서 고작 이 정도에 복날 개 혀 내밀 듯 헥헥 거려야 되겠어?”

문공자의 비아냥이었다. 지난 사흘간 내리 이런 식이었으니, 송기무는 이제 당연히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계집애 소갈딱지!’

속으로 욕하는 이 한마디를 제외하곤 문공자의 시비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요? 행선지가 있긴 한 건지……?”

지겨운 음성이었다.

“잔소리 말고 따라와.”

“에구, 난 더 이상 못 걷겠소. 날 업고 가든 끌고 가든 마음대로 하시오.”

송기무는 될 대로 되라 식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사람의 감정이란 희석되는 법이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는 동안 어느덧 문공자의 무공에 대한 두려움도 무뎌지기 시작했다. 결국 송기무는 특유의 부잣집 도련님 응석을 조금씩 내비치고 있었다. 

“빨리 안 일어나?”

문공자의 다그침에 송기무는 아예 고개를 돌려 먼 산만을 봤다. 손바닥을 펼쳐 손부채를 만들어 차

가운 공기를 옷 안으로 밀어 넣으며. 문공자의 눈빛에 잠시 빛나는가 싶더니 송기무의 입에서 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이쿠!”

어느 사이엔가 문공자가 송기무에게 달려와 멱살을 틀어쥐고 끌어올린 것이다.

“자꾸만 내 성질 긁지 마. 정히 끌고 가길 원한다면 팔 다리를 잘라내고 굴려가며 갈 수도 있으니까.”

‘이, 이거 진심일까?’

세상에 그리도 잔인한 사람이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몸을 놓고 실험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협박 한마디에 꼬리를 말 수는 없는 일.

“환자에게 이게 무슨 행패요?”

“환자 좋아하네. 잔소리 말고 따라오라면 따라와!”

“못 가오.”

문공자가 멱살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었다.

“커억.”

단박에 호흡이 가빠오고 통증이 밀려왔다.

“크윽……! 죽이던 살리던 마음대로 하시오.”

아무리 무림인이라 해도 관도(官道) 한가운데서 무엇을 어찌할까 싶어 외친 소리였다. 그것이 쓸 데 없는 오기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퍽!

문공자의 주먹이 송기무의 아랫배에 정확히 꽂혔다. 일체의 내력(內力)이 실리지 않은 주먹. 그러나 송기무는 마치 내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듯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한순간의 만용이 가져온 결과였다. 상대는 칼바람을 타고 사는 무림인. 설사 잔인한 협박을 실행치 않는다 해도 몇 번의 주먹질을 망설일 리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계산을 마친 송기무였지만 이미 사건은 벌어진 후였다. 

-퍽!

문공자의 수도가 송기무의 어깨를 가격하고, 송기무는 마치 쇠망치로 어깨를 맞은 듯한 통증에 데굴데굴 굴러야만 했다.

“으윽!”

악다문 입술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이었다.

“대체…… 왜 때리는 거요?”

-퍽!

송기무가 던진 질문의 답은 무지막지한 발길질이었다. 문공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송기무를 때렸다. 지극히 고통스러운 곳만, 그러나 결코 치명적이지 않은 곳만을 골라서.

송기무에게 후회는 즉각적으로 다가왔고, 자신의 어리석은 만용을 자책하는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치미는 오기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근거가 오직 힘의 유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그에게는 꽤나 억울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것이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인 갈등은 송기무의 마음 속 끝자락을 강하게 잡아 당겼다. 이쯤에서 엄살을 피우며, 문공자의 뜻에 따라 얌전히 끌려갈 것인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끝까지 버텨볼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었다.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송기무가 허겁지겁 내린 결론은 너무나 간단했다.

‘내가 왜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천고의 명언을 잊고 있었단 말인가?’ 

구석구석 쑤시는 몸을 이끌며, 송기무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문공자의 뒤를 쫓아 주루로 들어갔다. 주루의 문턱을 넘어서며 그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용케 문공자가 얼굴은 때리지 않아 겉으로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굳이 누구한테 개 패듯 쥐어 터졌다는 것을 알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점소이는 양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겨울철 휴양지로 유명한 곤명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주루인지라 대목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지나면 땀이라도 주룩 흘릴 기세였다. 주루의 안은 수많은 사람들의 체열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점소이는 구석의 한 자리를 안내했고 문공자는 벽을 등지고 앉았다. 송기무는 조심스레 그의 앞에 자리했다. 그의 조심스런 태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모되었던 문공자에 대한 두려움이 뾰족하게 끝을 세웠다는 증거였다. 

점소이에게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한 문공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송기무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면 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겠다.”

그의 눈은 주루의 내부를 살피는 채였다. 송기무는 문공자의 난데없는 협박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껏 그와 함께하면서 이토록 조심스러운 음성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보려는 찰나에 문공자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쓸데없이 두리번거리지 마!”

송기무는 돌아가는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앞쪽으로 고정시켰다. 

“대, 대체 무슨 일이오?”

서서히 눈동자만 움직여 주루를 살피던 문공자의 시선이 송기무에게 돌아왔다.

“이상한 분위기.”

“그러니까 뭐가요?”

문공자의 눈치를 한껏 살피며 송기무가 물었다.

“손님 중 대다수가 무림인들인 듯싶다. 이 근방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난 걸까?”

“무림인?”

송기무는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갈 뻔했다. 그러나 문공자의 살기어린 눈초리가 그의 고개를 옭아맸다.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송기무는 호기심을 억누르느라 주먹을 말아 쥐어야만 했다. 

“대충 먹고 나간다.”

“…….”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면서 동의를 구하는 척 하지 말라고.’

점소이가 재빠른 솜씨로 탁자위에 주문한 음식을 늘어놓았다. 향긋한 냄새를 맡고서야 송기무의 불만은 사그라졌다. 무림인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뱃속의 식충을 달래는 일이 더 급했다. 한바탕 두들겨 맞는 동안 꽤 체력이 소모된 모양이었다. 

그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짚으려는 찰라에 주루의 사람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잘 튀겨진 고기는 입 앞에서 멈췄다. 문공자의 시선이 주루의 입구로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한 송기무는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주루에는 두 쌍의 남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한 눈에도 눈에 번쩍 뜨일만한 용모.

송기무는 잠시간 있던 술렁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젓가락은 여전히 입 앞에서 멈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준미한 남자들은 둘째치고라도 동공의 확장이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두 여인의 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도 나직한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간 여러 미인들과의 만남에 의해 나름대로 미의 기준이 높아져있다 자부하던 송기무였다. 그가  넋을 잃을 정도라는 것은 두 여인의 용모에 대한 부연을 부질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이었지만 단연 돋보이는 용모와 잘 어우러져 누구도 그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점소이가 손바닥을 비비며 네 사람의 앞으로 달려갔다. 눈치 없는 자라 할지라도 네 사람의 차림새를 통해 극진히 대접해야할 손님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터. 점소이 소교(小交)는 벌써 칠년 째 이곳에서 일을 해왔다. 손바닥이 비벼진다는 것은 그가 최선을 다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좀 넓은 자리가 필요한데.”

목은 고정시킨 채 눈으로만 주루의 내부를 훑어보던 사내가 말했다. 거뭇한 피부와 구레나룻이 눈에 띄는 사내였다. 다부지게 벌어진 어깨와 굵은 팔이 왼손에 든 대도(大刀)와 잘 어울렸다.

“헤헷, 손님 죄송하지만 오늘따라 손님이 많으신 관계로……. 그나마 앉으실 수 있는 좌석은 한 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요.”

점소이 소교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구레나룻의 사내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점소이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 지라도 사내답지 못한 어조가 그의 신경에 거슬린 것이다.

“다른 곳을 알아볼까요?”

구레나룻의 옆에 있던 피부가 하얀 청년이 그의 좌측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냥 식사만하고 나가시죠.”

편안한 목소리.

미인에게 충분히 잘 어울리는 음성이었다. 흰 피부의 청년의 입가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붉은 입술과 잘 어울리는 미소였지만 사내의 것이라기엔 어쩐지 어색해 보였다. 송기무는 문득 그의 용모가 백영이나 문공자의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자리를 내 주게.”

손님이 한꺼번에 밀려올 경우는 좌석의 배치와 관리가 중요한 법이었다. 요 며칠 좀 지나친바가 있긴 했지만, 수년에 걸쳐 곤명으로 향하는 휴양객들을 접대해온 요령이 있는 소교는 능숙하게 빈자리로 네사람을 안내했다. 입장과 퇴장의 관리를 위해 자리의 배치는 순서대로 하는 것이 편리했다. 네 사람은 자연스레 송기무와 문공자의 옆 좌석에 자리했다. 

문공자의 표정에서 못마땅한 기색이 드러났다. 송기무는 지레 겁을 먹고 음식을 먹는 일에 열중하는 척을 했다. 그러나 이미 두 명의 미인을 확인한 그의 시선이 자꾸만 옆으로 향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모용(慕容)소저.”

흰 피부의 사내가 왼쪽 눈 아래에 작은 점이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남궁(南宮)공자의 탓이 아닌데……. 사죄할 필요 없습니다.”

여인은 공손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녀의 대답에 옆에 앉은 여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언니는 아무데서나 잘 먹고 마시니 남궁공자께서는 그렇게 마음 아파하실 필요 없답니다.”

새침한 목소리.

남궁공자라 불린 사내는 겸연쩍은 미소로 눈 끝이 살짝 올라간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하핫, 우리 작은 모용소저께선 소생에게 불만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제 이름은 경(璥)이랍니다. 작은 모용이 아니고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모용경이 말했다. 

“하하핫, 이거 참.”

남궁공자, 남궁세민(南宮世旻)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 다시 모용경에게 말했다.

“소생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모용소저께선 남궁모(南宮某)의 실례를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색을 하고 하는 사과에 외려 모용경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심통을 부리긴 했지만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그녀의 언니 모용선(慕容璇)이 동생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사가 지나치구나.”

“하핫 아닙니다. 소생의 실수일 뿐이지요.”

남궁세민이 자신의 실수임을 강조하자 모용경의 혓바닥이 낼름 나왔다 들어갔다. 남궁세민 덕에 언니의 꾸지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남궁세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궁세민은 그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을 뿐이었다.

송기무는 어쩐지 그의 행동에서 가식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를 안다기보다 미인과의 동행 자체가 배가 아픈 일이어서 일지도 몰랐다. 더구나 문공자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자신의 처지와 쉽게 비교가 되는지라 질투의 폭은 컸다. 

“자, 자 어서 음식을 시키고 길을 재촉합시다.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않겠소?”

구릿빛 피부의 사내, 팽지호(彭志虎)가 주문을 재촉했다. 

어쩐지 시원한 목소리.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지만 송기무는 구릿빛 건강한 피부의 사내에게는 알 수 없는 호감이 느껴졌다. 

동경의 대상이랄 수 있는 무림인은 저래야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식사 다 한건가?”

문공자의 나직하지만 못마땅한 목소리가 송기무를 엉뚱한 상념 속에서 현실로 이끌어 냈다. 그는 허겁지겁 다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또 얼마나 걸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먹을 것을 챙기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손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젓가락으로 밥알을 쓸어 넣는 와중에도 눈은 절로 두 모용소저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문공자의 눈이 유난히 뜨겁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만약 그자가 이미 약을 복용했다면 어떻게 하죠?”

모용경이 오물거리던 음식을 삼킨 후 물었다.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자는 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으니까요.”

남궁세님의 여유로운 대답이었다. 정보를 쥐었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의 습관이 배인 탓이었다.

“당가에서 공표한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건가요?”

모용경이 재차 물었다. 자신도 소문 정도는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림인의 입에서 말한 당가가 어디를 지칭하는 지 모를 송기무가 아니었다. 당가연과 관련이 있는 말이 나오자 그의 젓가락은 다시 한번 허공에서 멈췄다.

“당가 측에서도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어쩌면 벌써 곤명에 도착했을 지도 모르지요.”

“사천 일대가 들썩했으니 그쪽 사람들이 더 기민하게 움직였을 것이오.”

팽지호가 끼어들었다. 자신들이 늦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 젓가락을 놀리는 그의 손이 분주했다.

“그깟 영약 하나에 전 무림이 들썩인다는 게 저는 잘 이해되지 않는군요.”

모용경이 아미의 경사를 세우며 말했다.

“영약의 효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소만, 여러모로 무림에 곤란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약이라더군요. 정도 측에서는 복용을 위해서라기보다 혼란을 방비하는 차원에서 약을 찾는 듯 합니다.”

“혼란이라고요?”

모용경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들께서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시더군요. 그저 약을 구하면 건들지 말고 무림맹으로 가져오라고만 하시니…….”

“효능도 모르는 약 때문에 이 난리라니. 정말이지 이럴 때는 무림인들이 한심해 보일 정도라니까요.”

“경아!”

모용선이 동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꽤 많은 무림인이 자리하고 있는 주루에서 함부로 말할 신분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의 신분을 짐작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주루의 시선이 일행에게 집중된 것은 비단 그들의 용모 때문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모용경은 혀를 낼름 내밀었다가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곤명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불가(佛家)의 몇 개 문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아닐까요?”

“얼굴도 모르는 자를 찾기 위해 곤명 전체를 뒤진다……. 대해에서 바늘을 찾는 셈이군요.”

“그와 함께한 음양쌍괴가 워낙 눈에 띄는 자들이니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남궁세민이 모용선의 말에 쉽게 대답했다.

송기무의 귀가 번쩍 뜨이는 한마디였다. 

영약과 당문, 그리고 음양쌍괴로 이어지는 단서는 하나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찾는다 해도 문제는 남아있지 않나요?”

“음양쌍괴 말입니까?”

“네. 그들은 전전대의 고수라 들었습니다. 무공의 깊이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는데…….”

모용선의 미간에 드리워진 것은 깊은 수심이었다.

“싸우자고 찾는 게 아니니까요. 무림맹에서는 최고의 예우로 그들을 모시려 할 것입니다. 배분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그 정도의 자격은 충분하지요.”

“그래서 맹의 어르신들이 한꺼번에 곤명으로 향하신 건가요?”

모용경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하신 것이지요.”

“어쨌거나 곤명에 큰 파란이 일겠군요. 구대문파에서도 각기 대단한 인물들이 나선 듯한데…….”

모용선이 말끝을 흐렸다. 

남궁세민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졌다.

“구대문파라 해도 무림맹의 행사를 방해치는 못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맹에서는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

무림맹과 구대문파와의 미묘한 관계는 언제나처럼 압도적인 무게로 분위기를 짓누른다. 이들이 아무리 오대세가(五大世家)의 혈통을 잇고 있다 해도 함부로 언급할 문제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침묵에 모용경의 볼이 부풀어 오른다.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천성적으로 발란한 그녀는 언니와는 달리 진지하고 무거운 대화에 묻히는 것을 싫어한다. 

“당가이화 중 하나가 그자에게 연정(戀情)을 품고 있다는데 어떤 사람일까요?”

“말 함부로 하지 말아라.”

모용선이 다시금 동생의 입을 단도리 한다.

“그저 평범한 상인의 자식이라 들었는데…….”

모용선이 만류했음에도 남궁세민은 모용경의 말을 받았다. 그의 어조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비췄다. 오만한 당가의 여식이 이름모를 상인의 자식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유쾌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감정은 잠시 얼굴을 스칠 뿐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당가이화인데. 혹시 남궁공자처럼 절세의 미남자일까요?”

“하하핫, 모용소저께서 갑자기 이 남궁모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 군요.”

남궁세민의 호방한 웃음에 모용경의 눈이 아련해 진다. 

“서두릅시다.”

이미 식사를 마친 팽지호가 일행을 재촉했다.

“하하핫, 우리는 뒤에서 지원을 하면 되는 일. 팽형은 지나치게 서두르시는구려.”

“어떤 자들이 모여들지 모르는 상황이오. 우리가 꼭 필요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소.”

팽지호가 무덤덤한 말투로 남궁세민의 말을 받았다. 남궁세민의 검미의 끝이 흔들렸다. 팽지호의 한마디로 자신이 의무를 잊고 놀기에 급급한 성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음양쌍괴가 지속적으로 이동 중이라고 들었소. 곤명에 도착하여도 그들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지 않소?”

“행여 이곳에서 만나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서둘러 그 흔적을 빨리 찾아내는 게 좋지 않겠소?”

짙은 눈썹 아래로 눈빛을 빛내는 팽지호였다. 우직한 그의 성품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남궁세민은 여전히 못마땅한 심정이었다. 모용가의 두 꽃 앞에서 자신의 인상이 흐트러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팽형. 우리야 남자니까 상관이 없지만 두 분 소저도 배려해야하지 않겠소이까?”

남궁세민은 넌지시 여인의 배려 쪽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

이야기의 방향이 틀어진 이상 팽지호가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만…….”

모용선이 꽃잎같은 입술을 벌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모용소저께서는 편하게 식사를 마치십시오. 팽형도 그 정도는 이해하실 겁니다.”

팽지호는 팔짱을 끼고 자세를 느긋하게 고쳐 앉았다. 재촉해서 될 일이 아니라면 기다리면 그뿐이었다. 

“그나저나 저 사람은 너무 무례하군요.”

모용경의 턱 끝이 옆을 가리켰다. 일행의 시선이 그녀의 턱을 쫓았다. 그 선상의 끝에 송기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거론되자 지나치게 시선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탁!

문공자의 젓가락 끝이 탁자를 때렸다. 송기무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남궁세민의 검미가 하늘로 향한 후였다.

“강호에는 수치를 모르는 자들이 많은 법이지요.”

남궁세민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비웃음.

그가 말하는 것이 자신임을 모를 정도로 둔한 송기무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이 포함된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본 자신의 실태가 있는 만큼 얼굴만을 붉힐 뿐이었다. 자신이 그쪽을 쳐다본 진정한 이유는 여색 때문이 아니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 앞에서 내가 당신들이 찾는 그 사람이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그저 답답한 심정으로 얼굴에 피어오르는 열꽃의 색채만을 더할 뿐이었다.

“하핫,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 뵈는 군요. 얼굴을 붉힐 줄도 아는 것을 보니.”

남궁세민의 비웃음은 비수가 되어 송기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짜릿한 통증과 함께 그의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흥! 주제에.”

남궁세민의 마지막 말을 송기무의 성격에 불을 지폈다. 이마에 불끈 솟아오른 핏줄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튕기듯 위로 솟구쳤다.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남궁세민을 노려보던 송기무의 시선이 느릿하게 문공자에 향했다. 내내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문공자가 고개를 들었다. 문공자의 못마땅한 눈초리와 마주친 송기무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용변 좀 보고 오겠소.”

몸을 돌려 탁자를 벗어나는 송기무의 귀에 파고드는 남궁세민의 웃음소리. 

틀림없는 조소였다. 

그의 입에서 갖은 경멸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송기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주루의 뒷문을 나섰다.

아무리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온 그라지만 앞뒤 못 가리고 만용을 부릴 정도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미 낮에 무력 앞에서의 객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몸소 체험하지 않았던가? 

무림맹 어쩌고 하는 것이 한눈에도 대단한 실력을 지닌 자들일 터. 자존심 때문에 무턱대고 덤벼들었다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보다 큰 수치와 모멸뿐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주루의 뒷문을 나선 송기무는 주먹을 말아 쥐고 벽을 세게 쳤다. 

아찔한 통증이 주먹에서 밀려왔다. 

한순간 머리가 텅 비어질만한 고통.

어떤 고통이 더 큰 것일까?

육체의 통증에서 비롯된 것? 

아니면 무참히 짓밟힌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

쓸 데 없는 상념이었다. 대처하지 못할 것은 빨리 사고의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스스로에게 이롭다는 것을 몸으로 익혀왔다. 어느덧 체념이라는 단어에 점차 익숙해지는 자신의 모습. 결코 원하지 않았던 변화였다. 

호기로운 남아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듯 휘둘리며 살아가는 인생 또한 그가 원치 않던 것.

그는 잠시간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벽에서 주먹을 떼어내고 팔을 접었다.

그리고 감정도...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내쉬길 반복한 후 몸을 돌렸을 때, 그는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사이 모용선이 주루에서 나와 그의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송기무의 눈이 재빨리 깜빡였다. 무엇인가를 감추려 하는 행동이었다. 티가 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여인의 앞에선 자로써 보다 완벽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

모용선의 서늘한 봉목(鳳目)은 깊이 있는 빛을 내고 있었다.

“동생의 언사가 지나쳤습니다.”

주루 안에서의 일을 말함이다.

“아, 아닙니다. 제가 실수를…….”

못난 실수였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인상일 텐데 장부가 여인의 앞에서 말을 더듬는 실수를 하다니. 그러나 송기무는 곧 자신의 실수가 말을 더듬었던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여색에 홀려 시선을 거두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생은 그저 일행이 하는 말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모용선의 아미가 살짝 각을 만들어 냈다. 

그 표정을 본 송기무는 더욱 당황했다. 마치 자신이 어설픈 핑계를 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평소 부친을 닮아 달변이라 생각했건만 모용선 앞에서 유독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한심해 보였다.

모용선의 봉목이 다시 한번 송기무를 살피더니 꽃잎과 같은 입술이 벌어졌다.

“무림인은 아니신 듯한데, 강호에서 호사(好事)는 호환(乎患). 타인의 일에 지나친 관심은 좋지 않는 습관입니다.”

이전에 비해 사뭇 차가워진 목소리였다. 

‘타인의 일이 아니오. 당신들이 말하는 게 내 얘긴데 어찌 관심을 두지 않는단 말이오?’

목을 넘어서지 못하는 외침. 

한차례 마음속으로 고함을 지른 송기무는 그제야 머릿속이 조금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잠시간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있었다. 

이들이 언급한 무림맹은 정도를 대표하는 무림의 단체였다.

협의(俠義)를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문공자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될 일이었다. 자신의 사부를 무림맹으로 모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 문공자의 무공이 높아 보이긴 하나, 출중한 외모와 자신감 있는 태도로 보아 이들의 실력 또한 기대할 수 있을 듯 했다. 

송기무가 갈등하고 있는 사이 모용선의 신형은 서서히 돌아서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송기무가 입을 열려는 순간, 하나의 신형이 주루의 뒷문을 나섰다. 준미한 생김과 살짝 들려진 턱을 보는 순간 송기무의 입술은 얼어붙었다.

준미한 사내는 송기무를 조롱하던 남궁세민.

어느새 자신의 이들에게 밝히고, 문공자에게서 벗어나려던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모용선은 남궁세민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주루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남궁세민은 흐트러짐 없는 곧은 자세로 송기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일정한 보폭과 가벼운 걸음걸이는 그가 상승의 무학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송기무의 주먹은 다시금 말아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환청과 같은 남궁세민의 조소가 송기무의 귀속을 맴돌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주루 안쪽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문공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갑시다.”

“식사는?”

“…….”

문공자는 잠시간 송기무를 응시하더니 행낭을 챙겨 느린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들자 예의 준미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가 훤히 드러났다. 

송기무가 들어오는 것을 남궁세민 못지않게 경멸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던 모용경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그간 자신이 보아왔던 사내 중에 가장 준미하다 여긴 것이 남궁세민이었다.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 가벼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건만, 남궁세민의 준미한 모습에 은근한 연정을 품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무가(武家)의 여식이란 단순한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무공실력이었다. 절세의 미남자라 할지라도 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외면을 받기 마련. 남궁세민이 아무리 절세의 미남자라 할지라도 그가 손꼽히는 후기지수가 아니었다면 결코 자신은 흔들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 겉모습에 현혹되는 여자라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의 외모는 정도를 넘어섰다. 저런 사내라면 일 푼의 무공도 없을 지라도 마음을 줄 수 있을 법 했다. 

좁은 어깨, 가녀린 몸, 그리고 밋밋한 태양혈.

아무리 좋게 봐줘도 고수는커녕 무공을 익힌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옥을 깎아 만든 듯한 얼굴은 자꾸만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에 비한다면 남궁세민은 결코 평범 이상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용경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고 부챗살 같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허나 무정한 사내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괜시리 입술이 바짝 마르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너른 천지에서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 보게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겉만 번드르한 사내일 뿐이라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모용경의 눈빛이 반짝였다.

계산을 마치고 주루를 나서려던 사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주루에는 백의를 입은 두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준미한 사내는 두 사람과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꽤나 자연스러운 동작이긴 했지만 계속 그를 주목하던 모용경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용경은 호기심을 느끼고 들어선 백의의 남자 둘을 자세히 살폈다. 불혹은 족히 되었을 중년의 남자와 서른을 갓 넘긴 듯한 남자. 

둘 다 안정된 걸음과 불쑥 솟아오른 태양혈을 가지고 있었다.

무림인.

모용경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무림인을 보고 고개를 돌린다함은 준미한 사내가 강호와 연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저 얼굴만 반반한 사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다 먹은 거야?”

모용선이 물었다.

“응, 언니.”

모용경은 사내가 막 주루를 벗어나는 것을 보느라 모용선에게 시선을 줄 틈이 없었다. 

그녀가 넋을 잃은 듯 어느 한 곳을 바라보자 모용선과 팽지호의 시선도 자연 주루의 입구로 향했다. 

“저들은!”

팽지호의 손이 재빨리 대도를 잡아갔다. 

“……?”

팽지호의 갑작스런 행동에 모용경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백의탈혼(白衣奪魂)!”

주루를 가득 채우는 팽지호의 낭랑한 외침.

한순간 소란스럽던 주루에 적막이 찾아왔다.

중인의 시선이 팽지호에게 쏠렸다. 그리고 팽지호의 시선을 쫓아 본 곳에 두명의 백의사내가 서 있었다.  

힘껏 들이쉬었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듯 중인들의 요란한 아우성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주루를 채우고 있던 손님의 대부분은 무림인들.

그들이 백의탈혼이라는 별호가 가지는 의미를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마치 썰물이 빠지듯 중인들은 두 사내의 반대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탁자가 넘어지고 의자가 부셔져 나갔다. 

주인과 점소이는 난데없는 소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두 명이 소란을 피운다면이야 나서서 말려라도 볼 터였다. 하지만 주루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손님 전체가 저 난리는 부리는 와중이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망연한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자신의 별호가 불려지자 백의탈혼 구양철산(九陽鐵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랜 강호의 경험은 그 외침 속에 담겨진 적의를 읽어 냈고, 상대가 아직 애송이라는 것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백의탈혼이라는 별호를 스무 살을 갓 넘긴 햇병아리가 함부로 불렀다는 것 자체에 모욕을 느끼는 중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청년은 정광을 번득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도병에 손을 가져다 댄 자세는 분명 청년이 제대로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너는 누구인가?”

“마교의 주구가 백주를 활보하다니!”

한겨울에 찬물을 끼얹은 듯 한쪽에 피해있던 사람들의 소란이 사라졌다.

청년의 외침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여인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녀린 몸매였지만 그녀들 역시 무공을 익힌 동작이었다. 

구양철산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한눈에도 남달라 보이는 세 명의 남녀.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감히 함부로 자신의 명호를 부르고 교를 비하한단 말인가?

그의 오랜 경험은 오래지 않아 대략의 추측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확신을 할 단계는 아니었다.

“어린놈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은 그가 아니지.”

구양철산의 말을 받은 것은 가무잡잡한 청년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주루의 후문 쪽에서 들렸다. 

구양철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루의 후문에는 주루 안이 훤해질 만큼 준미하게 생긴 청년이 섭선을 들고 서 있었다. 꽤나 화려한 옷차림이 한눈에도 행세깨나 하는 가문에서 자란 도련님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대체 오늘 무슨 날이기에…….”

구양철산의 나직한 중얼거림이었다. 

강호를 횡행하며 오늘과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한다하는 고수들조차 한수를 접는 것이 백의탈혼이라는 명호가 가지는 힘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아는 상대임에야 감히 저런 행동을 할 자는 아무도 없다여겨왔다. 그런데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 들이 강호의 금기나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저 누가 있어 강호에서 함부로 마교 운운하며 신교를 비하할 생각을 하겠는가? 적어도 목숨을 버리는 각오만으로는 해서 안 될 행동이었다.

“어린 것들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하나 그 정도가 심하구나.”

구양철산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냉혹했다. 

언제까지 호기심 따위에 연연할 수 없었다. 저들의 출신이나 연배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교를 모욕했다는 사실!

자신이 자비를 베풀고자 할 수도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하하핫!”

낭랑한 웃음소리는 뒷문 쪽에 서 있는 남궁세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마교의 개가 점잖은 척을 하다니. 어서 본색을 드러내는 게 낫지 않을까?”

구양철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그의 소맷자락이 한순간에 부풀어 올랐다.

“남궁세가의 장자인 본 공자께서 강호정의의 의미를 알려주마!”

남궁세민의 말에 일시 간 구경꾼들의 입이 열렸다. 

현 무림 후기지수 중 제 일좌를 다툰다던 남궁가의 장자가 나타난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즐긴다. 오늘의 사건은 호사가들이 몇 년에 두고 읊어댈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남궁세민과 백의탈혼 사이에서 일어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북팽가의 장손 팽지호도 강호의 정의를 세우는데 물러서지 않겠소.”

또다시 터져 나오는 중인들의 탄성.

도(刀)에 있어서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팽가의 장손마저 등장한 것이다.

“가문만 믿고 설쳐대는 피라미들이!”

자신의 짐작대로 저들이 오대세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한 구양철산의 입에서 노호가 터져 나왔다. 

교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무리가 바로 무림맹이었다.

그 주축을 이루는 오대세가의 후예들이라면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을 자초했으니 후회는 없으렷다.”

구양철산의 마지막 음성에 구경꾼들의 얼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그의 음성에 내력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몇몇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타합!”

선공은 남궁세민의 손에서부터였다.

어느새 섭선을 갈무리한 그의 손에는 청강검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순간 공간을 압축해 다가온 그의 신형은 구양철산쪽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흥!”

구양철산의 양장을 교차시키며 허리를 좌로 틀어 남궁세민의 검극을 피해냈다.

검은 허공을 갈랐으나 본래의 길을 잃지 않고 있었다. 수평으로 뉘인 검날은 구양철산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구양철산은 노련한 몸놀림으로 남궁세민의 몸 쪽으로 신형을 붙였다. 휘두를 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검인은 목표를 상실했다. 

구양철산의 우수가 남궁세민의 가슴을 가격하려는 찰라 날카로운 파공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남아있는 다른 상대.

구양철산은 팽지호를 기억해 냈다. 

예상대로 팽지호의 대도가 구양철산의 허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팽가의 도법은 엄청난 내력을 필요로 한다. 일도필살(一刀必殺)이라는 말을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팽가의 도법.

한손으로 도의 옆면을 튕겨낼까 하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도의 방향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심후한 내력이 실린 도는 구양철산의 몸에 깊은 상처를 만들 것이 분명했다. 

구양철산은 남궁세민을 포기하고 신형을 뒤로 물렸다.

팽지호의 도가 허공을 가르며 그의 허리를 스쳐지나갔다. 

도가 지나간 후에도 그 경력이 느껴질 정도의 위력.

구양철산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에 안도하며 새삼스레 팽가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라 감탄했다. 

약관을 막 넘어 보이는 젊은 녀석의 도법이라기엔 너무나 위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감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둘의 실력이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구양철산의 표정이 한결 진지해졌다.

대해와 같은 진기가 그의 팔을 타고 양수에 몰려들었으며, 이윽고 좌우수는 하늘과 땅을 가리켰다.

“탈혼수!”

주루에서 일어난 한바탕 소란을 밖에서 지켜보던 송기무의 눈이 크게 떠지게끔 하는 외침이었다.

귀에 익은 이름.

   송기무는 재빨리 문공자의 얼굴을 살폈다. 

        

      문공자는 송기무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고 커다란 눈빛을 빛내

      며 주루안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송기무의 시선도 다시 구양철산에게 향했다. 지금은 문공자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것보다 주루 안의 상황이 더 궁금했던 것이다. 잔

      뜩 신경을 집중해 주루를 살피는 문공자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늘과 땅으로 향했던 구양철산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송기무의 시선에는 그저 마구잡이로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

      다. 저리 손을 흔들어 대는데 무기를 든 두 상대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마치 벌레라

      도 씹은 것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이윽고 송기무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순간적으로 구양철산의 손이 여러 개로 늘어나는가 싶더니 그의 

      앞에 수십에 달하는 장영(掌影)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송기무는 수차례에 걸쳐 눈을 깜빡였다.

        

        혹시 자신이 환영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선명하게 떠 오른 수십 개의 장영은 아무리 눈을 깜빡여

      도 사라지지 않았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송기무의 솜털까지 일어나게끔 위험

      한 기운을 뿜어내는 엄청난 수의 장영.

        

      고수가 펼쳐내는 무공을 처음 접하는 송기무에게 있어서는 마치 

      환상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송기무가 넋을 잃듯 구양철산의 장영에 시선을 뺏기는 그 순간 

      남궁세민의 검이 흐릿해졌다.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절정의 쾌검식(快劒式)이 펼쳐진 것이다.

        

        문공자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남궁세민의 검은 지면과 수평을 이루고 앞으로 쾌속하게 찔러졌

      다. 

        

      그가 펼치는 무공의 이름을 알리 없는 송기무는 번쩍이는 청강검

      이 만들어낸 뒤늦은 잔영(殘影)을 보고 마치 번개가 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섬전십삼검뢰는 매식마다 두 번의 변화를 갖는다.

        

      절정의 고수가 펼쳐내는 일식에 두 번의 변화란 많은 것이 아니

      었다. 아니 지나치게 단순하다 할 정도로 적은 변화라고 말하는 것

      이 옳았다.

        

      그럼에도 남궁세가의 섬전십삼검뢰 무림 최고의 무공 중 하나로 

      꼽힌다. 이와 같은 이유는 변화를 머금은 검식의 속도에 있었다. 쾌

      속무비(快速無比)하게 펼쳐지는 검초는 무변(無變)의 직선과도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 냈고, 앞선 초식에 대한 방비는 이어지는 변화에 

      대비하기 힘들었다. 

        

      검술로 명성을 떨치는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그 이상의 변화를 만

      들어 내지 못함이 아니었다.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을 뿐이었다.

        

      그 명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궁세민의 검은 눈에 인식되는 검영

      의 번득임보다 빠르게 구양철산을 향해 쇄도했다.

        

        캉!

        

        맑디맑은 쇠 울음소리.

        

      송기무가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남궁세민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우

      측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로써는 어찌된 영문인지 잘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범인의 눈으로 고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백의의 중년인이 무엇인가 수를 썼음이 분명했다. 

        

        ‘맨손으로 검을 막아 냈단 말인가?’

        

        송기무는 생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주루 내의 싸움은 점차 흉험해지고 긴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백의 중년인, 구양철산이 남궁세민의 검신을 때려 튕겨내고 그의 

      뒤를 쫓으려 하는 순간 팽지호의 대도가 원을 그리듯 휘몰아쳐 왔

      다.

        

        연환탈백도법(連環奪魄刀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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