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제2부 No.10 흔들리는 여심
- 환타지아 -
2-16. [[ 흔들리는 여심 ]]
카페를 나온 그와 영신은 작은 선착장 주차장에서 강을 바라보고 있었
다. 강의 한가운데에서는 너울너울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밤안개
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영신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당신의 그런 모습....정말 사랑스러워요..."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와 사랑한다는 말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신은 그에게서 나온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괜한 사념
의 꼬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아직 스스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휩쓸려가고 있는-그렇다. 그것은 휩쓸려가고 있다고 밖에는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의 홍수라니..- 스스로의 감정을 확인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영신은 생각했다.
영신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손에 온전히 얼굴을 기대었다.
그라면 이렇게 기대어도 좋을 법하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뺨을 어루만져
줄 수 있고, 언제든지 자신이 기대면 받아줄 수 있을 것이란, 이유를 알
수 없는 안정감이 그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영신은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을 잡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닥
커 보이지 않는 손. 오히려 남자의 손으로는 작아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손 어디에서 이렇게 커다랗고 넓은 안정감이 나오는 것일까?
그의 손을 펴고 영신은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려 보았다. 자신의 손가
락 끝으로 조금씩 큰 키를 뽐내는 듯 보이는 그의 손가락. 검지 손가락
으로 그의 손이 이루고 있는 선을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손가락과 손가
락이 이루는 깊은 계곡과 계곡에서 솟구쳐 올라온 가느다란 손가락의 군
상들. 손가락과 손바닥이 붙어있는 근처에 잡혀있는 희미한 못자국들.
영신은 그의 검지와 중지손가락에 나있는 깊은 상처의 흔적을 매만지고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상흔. 반달형으로 길게 나있는 그 상처는 하얀
띠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암벽등반을 하다가 떨어지면서 바위에 찢긴 상처에요. 한 육칠년 되었
죠..."
"암벽등반도..... 하세요?"
"네....가끔 산 위에 오르면 힘든 세상살이가 희미해져요..."
그의 손에는 잘디잘은 상처들이 더러는 희미하게, 더러는 아직 선명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얼핏. 그의 손바닥을 보다가 영신은 그의 손목
에서 희미하게 그어진 하얀 색의 긴 띠를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그 위
를 따라가 보았다. 손목을 횡단하는 길이의 하얀 띠. 뭔가 진한 아픔이
그 속에서 풍기고 있었다.
영신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잔잔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 그러나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그건.....철없던 시절에 만든 상처예요. 그때는 힘들다고 생각했었는
데......"
"지금은....아닌가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아니 살려고 애를 쓰죠....."
"당신은......"
-당신은 어떻게 그런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지요?
영신은 말을 삼켰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그에게서 느
껴졌다.
"당신은? 다음에는 뭐죠?"
대답 대신 영신은 그의 손목에 있는 상처에 입술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 아래에서 그의 손가락이 꿈틀 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
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영신은 그의 손가락에도 입을 맞추었다. 자신을
위해 랍스터의 껍질을 벗겨주었던 손가락. 소스를 잔뜩 묻힌 채로 그녀
의 입안으로 들어와서 놀던 손가락. 영신은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손가
락을 하나하나 빨았다..
"흐음......아..."
그의 숨소리가 커지더니 그녀의 입 속에서 그의 손이 빠져나갔다. 그녀
의 입을 빠져나간 손은 아직도 그녀의 타액에 젖은 몸으로 그녀의 얼굴
을 감싸며 그에게로 이끌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는 영신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김이 영신의 입술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이 남자가 나에게 무슨 말을 했더라.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해두고 싶
었는데,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생각했었는데....뭐였었지?..
영신은 자신의 자신감이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말
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기억력이 좋다면 삼생 전쯤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했을 거
라는 말....기억나요?.."
영신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기억하고 말구요. 저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을 것만 같았는
걸요...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추억을 포기하는 대신, 현재의 내가 간직할
수 있는 모든 기억 속에 당신을 저장하고 싶어요..."
-지금 이 남자는 무슨 말을 내게 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의미를 내
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 추억, 현재의 모든 기억, 모든 기억, 기
억.....
영신은 머릿속에 같은 단어들이 계속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너
무나 분명한 단어들. 너무나 선명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지는 단어
들, 말들...
-아, 모르겠어...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그런데 왜?....
영신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했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고 자꾸 맴돌고 있는데, 아무리해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비
행기를 탔을 때 귀가 멍해지는 것처럼 영신은 자신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영신은 입술과 콧등에 와 닿는 그의 숨결이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영신
은 그에게 키스를 했다.
-이 남자의 환한 웃음과 언뜻언뜻 보이는 그림자까지 공유하고 싶어.
그러나 영신은 자신의 바램이 큰 욕심이라는 걸 깨닫고는 조금 우울해
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유부녀.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그 글자의 굴레가 생각할수록 크다고
느껴졌다. 늘 적극적이지 못했던 자신의 삶. 최선을 추구하기보다는 차
선(次善)이나 차차선(次次善)에서 욕심을 접을 줄 알아야 한다던 부모
님의 뜻에 늘 순종하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처럼 후회스러울 수는 없었
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틀린게 있다면 차선
이 아닌 차악(次惡)쯤 되었을까.
자신의 입 속에서 부드럽게 헤엄치면서 때로는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며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지냈던 자신의 열정을 일깨우고 있는 그가 미웠
다. 영신은 그의 혀를 깨물었다.
"아!...."
감정에 휩쓸려 너무 세게 물었던 것일까? 혀끝에서 비릿한 그의 피맛
이 느껴졌다. 그는 아픔을 호소하면서도 영신을 밀거나 입을 떼지 않고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미안하다는 마음에 영신은 아직 자신의 임 속에 있는 그의 혀를 빨았
다. 그의 혀 일부분이 조금 벌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피맛이
계속 번지고 있었다.
"나쁜 사람이야...당신은....."
무심코 말을 하면서도 영신은 그가 왜 나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가야죠. 늦겠어요....."
영신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그는 시동키를 돌렸다. 차체가 잠시 부르
르 떨리더니 곧 안정감 있는 규칙적인 진동으로 변했다. 라이트를 켜자
길게 뻗어나가는 불빛에 안개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저......."
-날 좀 안아줘요.....
그는 영신에게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던졌다.
"늦지 않게 해드릴께요...."
강변까지 차 오르는 안개를 뿌리치며 차는 서서히 어둠 속으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