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타지아』 제2부 No.9 카페에서 (27/28)

                 『환타지아』 제2부 No.9 카페에서

                                                  - 환타지아 -

         2-15. [[ 카페에서 ]]

     

     "랍스터도 먹었는데 향기 짙은 차를 안마실 수는 없겠죠?"

     "커피는 제가 살께요..."

     "그거 아주 신나는 일이군요..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영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닥 놀러 다니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성격

     이라 아는 곳이 별로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면, 가만 있자... 좀 늦게 들어가도 돼요?"

     

     뜻밖의 질문에 영신은 그를 돌아봤다.

     

     "...왜요?..."

     "양평으로 가면 아주 근사한 곳이 있어요. 친구와 몇 번 같이 갔었는데 

     여자친구가 생기면 꼭 한번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그런데 조금 

     멀어서...."

     

     영신은 고개를 숙여 시계를 보았다. 8시 반. 

     

     "괜찮아요..우리 그리로 가요.."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공사 중이었다. 군데군데 깊게 패여있는 

     도로에는 자갈과 모래가 드러나 있었고, 더러는 공사에 맞추어 도로의 

     중앙선을 이리저리 옮기느라 이차선 도로에 중앙선이 서너 개씩 그려진 

     곳도 있었다. 우측으로는 북한강이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오며 때로는 깊

     게, 때로는 야트막하게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강바람이 시원했다. 

     

     "가끔 답답하거나 우울할 때면 오는 곳이예요. 밤이면 물안개가 자주 서

     리는데 그럴 때 안개 속을 달리다보면 몽환적인 생각이 들어요. 이 안개

     가 언제까지 나를 가둬둘 것인가. 이 안개를 뚫고 나가면 거기 또다른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가 카세트를 밀어 넣자 경쾌하면서도 차분한 피아노 소리가 흘러 나왔

     다. 

     

     "쇼팽입니다. 이런 것 좋아하나 모르겠네요."

     

     "좋아하는 곡이에요, 녹턴..."

     

     영신은 피아노 소리에 맞춰 가만히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기 시작했

     다.

     

     "설국이라는 소설의 첫머리를 보면 이렇게 시작되죠. 터널을 빠져나가자 

     온통 하얀 은색의 세계가 펼쳐졌다....

     

     가끔 안개 속을 다니다보면 이 안개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

     까...

     

     끊임없이 안개가 펼쳐져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소설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온통 안개와 이슬비만 일년 내내 계

     속되는 곳이 있대요.

     

     축축한 대기, 축축한 인생, 축축한 사랑....

     그래서 저마다 가슴속에 불씨 하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곳....

     

     불씨가 사그라들면 또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곳....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안개를 벗어나면 갑자기 선명해지는 중앙선

     이며 사물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해요...."

     

     -우리도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겠죠? 이 안개 속을 벗어나면 이런 

     행복한 기억 때문에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거예요....그렇겠죠?

     

     영신은 그의 따스함이 때때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중했기에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러는 영신의 눈가에 물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영신의 침묵 속으로 그가 손을 뻗어왔다. 영신의 작은 손을 힘있게 쥐어

     주는 그의 손길에 영신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뻔 했다.

     

     "우울하죠, 이런 얘기?...."

     "...아니요..."

     "괜찮아요?..."

     "............"

     

     자신의 우울함이 그에게도 전염된 것일까. 그도 말을 멈추었다. 영신은 

     자신을 잡고있는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자기의 손에도 힘을 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해.

     

     영신은 그의 손을 들어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양평교를 넘어 시내로 진입하자마자 차는 왼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건물

     들이 사라지자 작은 건널목이 나왔다. 건널목을 건너니 호수 한가운데로 

     이백미터쯤 길이 뻗어 있었다.

     

     "안개가 잔뜩 서려 있을 때 이 길을 달리면 기분이 묘해져요....죽음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영신은 그의 말에 좌우로 보이는 호수가 안개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그러나 실감나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

     다.

     

     이따금 마주 오는 차들을 제외하면 길은 조용했다. 차창 밖으로 이따금 

     지나가는 집들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조용하네요...."

     "................."

     

     목적지에 거의 다 왔는지 차는 도로를 버려두고 작은 마을 속으로 뻗어

     있는 작은 농로로 접어들었다.

     

     "여깁니다...."

     

     차에서 내리자 작은 토담집이 보였다. 'ㄷ'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토담집

     의 입구엔 높은 솟대가 서 있었고 그 위에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 두 마

     리가 북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이엉을 덮어쓰고 산에 등을 돌린 채 가

     만히 웅크리고 있는 토담집은 얼핏 보기에 카페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습

     이었다. 적당히 거칠고, 적당히 다듬어진 채 풋풋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들어가요.."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초록색 문을 열자 김영동씨의 음악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목가(牧歌)? 이 집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음악이야.

     

     "이 집 주인 아저씨는 풍류계의 대가 같은 모습이에요. "

     벽난로 앞에 멍석을 둘러쓴 통나무 의자에 앉으며 그가 빙긋 웃으며 말

     했다.

     

     ".........?"

     무슨 뜻이냐고 눈으로 묻는 영신에게 그는 여전히 미소만 보내고 있었

     다.

     

     "커피? 커피 두 잔 주세요."  

     주문을 하고 영신은 다시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주인 아저씨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저걸 보면 조금 

     알 수도 있을 겁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대들보였다. 거칠게 대패질이 되어 반듯하지 않고

     군데군데 짙은 밤색의 껍질이 남아있는 투박해 보이는 대들보의 밑면엔 

     검은 색 먹글씨가 있었다.

     

     -이곳에 오는 연인들을 위해 사랑을 모아 상량을 하다.

     

     그리고 대들보 아래 띠방이 있는 토벽엔 작은 물고기들의 모습이 숱하게 

     음각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벽난로에도 작은 물고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얘네들은 겨울에는 좀 뜨겁겠어요..."

     "아...그렇군요. 아저씨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봐야 겠네요. 하하하..."

     

     "여기는 어떻게 아셨어요?"

     

     담배를 입에 문 그는 경쾌한 동작으로 라이터를 켰다.

     

     "안개가 잔뜩 낀 날 무턱대고 돌아다니다가 길을 잘못 들어 발견했죠. 

     술이 무척이나 마시고 싶은 날이었는데, 여기에 들어오니 술보다는 커피 

     생각이 더 간절해지더군요. 주인아저씨의 인상도 수더분해서 좋았구요..

     .."

     "그랬군요..."

     

     영신은 커피를 젓던 티스푼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런 날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있거나, 아니면 아주 모던하게 생긴 카페

     를 찾아갔더라면 아마 술에 취해서 사고를 냈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와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더

     군요. 그 후로 여기 단골이 됐죠."

     

     "자주 오셨나봐요?.."

     "오늘로 다섯 번째입니다..."

     "엉터리...단골이라면서...."

     "마음의 단골이요..."

     

     담배연기를 내뿜는,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듯 차분한 표정의 그를 보며 

     영신은 그가 참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티없이 밝게 

     웃는 모습도 그랬지만 지금 이 표정도 그에게 아주 어울렸다. 갑자기 입

     구가 어수선해지더니 남자 한 명이 장작을 잔뜩 팔에 안고 들어와서는 

     벽난로 옆에 쌓아 두었다. 

     

     저 사람이에요? 라는 뜻으로 영신이 그를 보자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

     였다. 영신은 주인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회색의 마치 승복

     처럼 생긴 개량한복을 입고 검은 색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다듬지 않은 

     덥수룩한 콧수염과 역시 며칠은 면도를 하지 않은 듯 보이는 턱수염. 

     

     "뭐 필요한 것 없으세요?"

     

     그들에게 말을 건내며 보여주는 순박해 보이는 웃음과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주인남자의 큰 특징은 머리의 상투였

     다. 기름을 발라 틀어올린듯 가지런하게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장작을 팰 때 튄 듯 그 위에 더러 박혀있는 작은 나

     무조각들. 

     

     "풍류계보다는 도인 같은 모습인데요..."

     

     영신은 주인남자의 모습이 집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아니 집이 주인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미소.

     

     "이 집도 직접 지으신 거래요.."

     "그래요? 어쩐지..."

     "뭐가요?.."

     "이 집, 주인아저씨하고 많이 닮지 않았어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참 아늑하고 정감 있어요.."

     "괜찮은 사람이지요?"

     "네..둘 다요.."

     "저도 포함되는 겁니까?"

     "주인아저씨가 포함되는 거지요.."

     

     말을 해놓고도 영신은 자신이 한 말이 부끄러웠다. 

     

     -어머..난 몰라...

     

     영신은 달아오르는 고개를 떨구고 괜시리 손만 만지작거렸다.

     

     "................."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신은 자신의 얼굴을 그가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

     다. 그에 의해 고개가 들려지자 그의 미소 띤 그의 얼굴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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