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타지아◀ 제2부 No.2 (20/28)

                      ▶환타지아◀ 제2부 No.2 

      

       2-3. [[  회상 - 영신  ]]

     

     영신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머그잔을 손으로 감싸쥐고 입술을 가져

     갔다. 입술로 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영신은 상념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끝내 이름도 알 수 없었던 그 남자. 자신의 몸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던 그 남자. 그 남자의 섬세하고 집요한 손놀림에 오소소 

     일어나 아우성치던 숨막히게 전율하던 감각들. 부드러우면서도 거칠고 

     섬세하면서도 집요한 그의 손짓과 몸짓에 얼마나 여러번 정신을 놓아

     버릴뻔 했었는지. 

     

     섹스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등을 쓸어주던 그 손길은 얼마나 

     따뜻하고 자상했던가. 재빨리 등을 돌리던 남편과 달리 오래도록 여운

     을 끌어주던 그 느낌에 깜빡 잠이 들었었는데. 잠이 깨자 미소처럼 던

     져주던 짧은 키스, 그리고...그리고....

     

     "이제 팔 빼도 되죠?..."

     

     잠들 때 팔베개를 해주더니 자신이 깰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눈썹을 살

     짝 찡그리며 팔을 주무르던 그 남자. 화장실을 살짝 다녀오더니 날 안

     아 일으켰었지...

     

     "스타킹을 못쓰게 만들었군요. 미안해요..."

     

     끝끝내 벗겨주지 않아 더 안달하게 만들었던 스타킹과 팬티를 조심스

     럽게 벗기고는 화장실로 안고 갔었어. 욕조에 이미 온도를 맞춰 물을 

     받아두고서.  마치 세례를 받는 느낌이었어, 그의 손길이 다시 내 몸

     을 어루만지면서 조심스럽게 씻겨줄 때는.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서는 

     가볍게 뒤에서 안아줬었지.

     

     사실 그가 내 몸에 비누칠을 해줄 때 나도 모르게 다시 젖어들고 있었

     는데, 그래서 한번쯤 다시 안아주기를 바랬는데, 그러면서도 젖어들어

     가는 내가 부끄럽고 쑥스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는데 그가 뒤에서 안아

     주자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신음소리가 났었어. 비누거품을 헹구고 물

     기를 닦아 다시 안고 나오는데 눈물은 왜 나왔을까?

     

     "나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라고 그랬지. 그런데 왜 그말을 듣는 순간 울음이 터졌을까?

     그의 목을 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는데.

     

     "실컷 울어요..."

     

     등을 토닥여 주면서, 울으라고, 실컷 울어버리라고 그러는 그가 왜 그

     리 고맙던지.

     

     "지금은 실컷 울고 다음부턴...날 봐요...다음부턴 울지마요. 혼자서 

     밤에 술도 마시지 말고...당신은 웃는게 더 이뻐요.."

     

     그는 내 몸을 잘 알 듯이 내 마음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 

     같았어. 그의 가슴을 눈물로 온통 적셔놓은 나를 그가 얼마나 다정하

     게 안아주었던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었어.

     

     "자신을 사랑해봐요..."

     

     자신을 사랑해봐요, 자신을 사랑해봐요, 자신을...

     

     영신은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몇번인가 되뇌이다 커피잔을 놓고 방

     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오늘도 늦게 들어오는가 보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밝아진 모습의 여자가 미소를 물

     고 있었다. - 당신은 웃는게 더 이뻐요....

     

     영신은 옷장을 열고 서랍 속에서 찢어진 스타킹과 애액이 누렇게 말라

     있는 팬티를 꺼내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 남자의 체취가 묻어나올 것 

     같았다. 가만히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보았다. 희미하게 땀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 냄새는 영신의 육체가 가지고 있던 아찔했던 그날밤의 기억을 되살

     려 주었고, 다시한번 자신의 하체가 뻐근해지며 젖어드는 것을 느꼈

     다.

     

     -------

     

       2-4. [[  새로운 아침  ]]

     

     -내 침대가 아닌 것 같아...

     

     눈을 뜨기전 초희는 침대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아주 

     푹신하고 편안하던 그녀의 침대와 달리 조금은 딱딱한 매트리스의 느

     낌이었다. 감고있는 눈으로 화사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느껴졌다. 침대 

     속에서 초희는 기지개를 쭉 폈다. 나른하던 온몸으로 힘이 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푹 자고 일어난 느낌이었다.

     

     -오늘은 촬영이 없나? 왜 안 깨웠지?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통나무 서까래였다.

     

     -?? 어디지? 아..어젯밤..

     

     초희는 튕겨져나오듯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있는 옷을 입었다. 거실로 

     나오니 비어있는 와인 병이 안주접시들과 뒹굴고 있었고, 식탁엔 드레

     싱이 말라가고 있는 샐러드접시등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그래 맞아. 어젯밤에 안개 속으로 남자와 함께 왔었어...그 남자는?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서고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산책이라도 

     간 것일까? 주방에는 희미하게 커피내음이 떠다니고 있었다. 

     

     -커피라...좋지..

     

     커다란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따라 초희는 거실로 나와 쿠션을 등에 

     받치고 햇살을 감상하며 눈을 감고 홀짝이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대본

     을 외울 필요도, 타이트한 스케줄에 밀려 이리저리 바쁘게 이동하며 

     차 뒷좌석이나 대기실 소파에서 웅크리며 새우잠을 잘 필요도 없었다. 

     아침마다 지겹게 자기를 몰아가던 매니저도 당분간 안녕. 

     

     -아 ! 자유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초희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굳어있는 표정으로 자기를 보고 있었다.

     

     -맞아 저 남자야..

     

     초희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난밤에 그와 나누었던 질펀한 정사

     가 생각났다. 쑥스러운 생각을 감추려 미소를 지었다. 남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승환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던 그 남자는 침실로 들어갔다가는 곧 나와 

     주방 안을 서성거리다 거실로 나와 자기를 유심히 한번 쳐다보더니 집

     안을 돌아다녔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네? 아...아니요..조금..그게..."

     

     남자는 초희의 말에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고 있었다.

     

     "저까지 불안해서요. 왜 그러세요?"

     

     그제야 승환은 초희 옆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초희가 재차 묻자 승환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초희에게로 고개

     를 돌렸다.

     

     "당신....아침 뉴스에서 봤어요...진짜예요?"

     "뭐가요?"

     "당신...진짜 영화배우 초희냐고요.."

     "뭐라고 뉴스에 나왔어요?"

     "납치되었다고..난 그냥 이미지클럽인줄 알았었는데...믿어지지 않아

     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는 거....우리가 원했던 환상 아니던가요?....

     그래서 대가를 지불하고 이렇게 와있는 거잖아요.."

     "솔직히 굉장히 놀랐어요...무섭기도 하고..."

     "그 사람이 모든 것을 처리해 줄 거예요. 그를 믿었기에 의뢰했던 거

     잖아요. 저도 솔직히 조금은 의심을 했지만 지금은 그를 믿어요. 납치

     되는 순간까지도 저는 몰랐었어요. 모든 사람이, 저까지 완벽하게 속

     일 수 있었던 그 사람의 능력을 지금은 완전히 신뢰해요."

     "저도 그를 믿고 싶은데,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내 앞에 당신이 있다

     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또 두려워요."

     "우리 그냥 환상을 즐겨요.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환상은 아니잖아요"

     

     승환은 머리 속으로 자신의 휴가가 며칠이나 남았는가 생각을 해봤다. 

     오일간의 휴가. 어제까지 업무를 보았고 퇴근 후에 이리로 왔으니 초

     희와 오일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환타지아.

     

     이젠 그를 믿어야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체념에서 얻어지는 

     용기랄까 그런 게 솟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맘껏 즐겨야겠군요."

     "사이좋게 지내요, 우리..."

     "사이좋게....그것보다는 연인처럼 지내는 게 더 좋겠군요."

     

     승환의 얼굴에 성욕처럼 미소가 서렸다. 초희는 그의 말 뒤에 숨어있

     는 어젯밤의 정사를 떠올리며 수줍게, 그러나 조금은 요염하게 웃었

     다.

     

     "행복한 연인이면.... 더 좋겠어요.."

     "아침부터 해먹어야겠어요. 배가 무척 고파요."

     "저두요..."

     

     초희는 일어서서 주방으로 향하는 승환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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