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제18화 안개 혹은 환상속으로 (제1부 완결)
근처에 저수지나 호수가 있는지 밤안개가 스멀스멀 길 위로 깔리고 있
었다. 콘테이너 안에서 공포감을 같이 겪으며 나누었던 대화가 길을
걸으면서 뚝 끊겨 있었다. 승환은 자못 그 무거운 침묵이 버거웠다.
새벽이라 그런지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길 위로 깔리던 안개는 어느
새 둘의 가슴 근처까지 올라오는가 싶더니 이내 둘을 안개 속에 가둬
버렸다.
"안개가 짙군요. 이러다 길을 잃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승환이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뿜어져나와 안개 속으로 섞여 들어갔
다.
"마치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아요.."
여자의 입에서도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환상 속으로....말을 할 때마다 안개가 조금씩 더 진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후후후...재미있는 표현이네요...어머 정말...후우-후우-"
여자는 입을 벌릴 때마다 뿜어져나오는 안개가 신기한지 자꾸 안개를
뿜어댔다.
"하하하...."
"왜 웃으세요?"
"그러고 있는 거 보니까 어린애 같아서요.."
"재미있잖아요. 한번 해보세요. 후우-"
승환은 여자가 시키는 대로 길게 안개를 뿜어봤다.
"하하하..."
"호호호..."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춥지 않아요?"
"네, 조금..."
승환은 조금전 같이 터뜨린 웃음에 용기를 내어 가만히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안개에 젖은 얇은 옷 속에서 여자의 몸이 잠시 움찔하더
니 상체를 그에게로 기대왔다.
"따뜻하네요...고마워요.."
승환도 여자의 몸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짙은 밤안개 속에서 어깨를
두른 채 걷는 동안 둘의 서먹함도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안개에 젖어드는 것은 비에 젖는 것보다 더 춥다는 것을 군 시절 터득
한 그는 이렇게 밤길을 걷게 만든 사내의 배려가 이런 것이었구나 생
각하며 새삼 사내의 깊은 배려가 고마웠다.
"저기 뭔가 보이는데요.."
안개 속에서 희끔한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통나무
집이었다.
"여긴가?.."
"그런가봐요.."
"여기 잠깐만 있어봐요.."
승환은 여자에게 말을 하고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혼자 있기 무서워요.."
"그럼 같이 들어갑시다."
승환은 현관 옆에 있는 우편함을 열어보았다. 사내의 말대로 열쇠가
들어있었다. 열쇠를 도어록에 꽂고 돌리니 아주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승환은 여자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리
니 깔끔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와..정말 좋다..."
여자는 탄성을 질렀다. 승환도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아주 맘에 드는
공간이었다. 벽난로 앞에 깔려있는 두툼한 러그카페트와 쿠션들. 벽장
을 장식하고 있는 갖가지 술과 글라스들. 여자는 연신 집안을 돌아다
니며 이곳저곳 살피고 있었다.
"여기좀 와봐요.."
승환은 여자의 말소리에 주방으로 가봤다. 여자는 주방에서 무슨 편지
를 읽고 있었다.
"냉장고 문에 붙어 있었는데요, 음..장작은 집 뒤에 있고 냉장고는 가
득 채워놨고...또 음식저장고는 주방 마루 아래 있다는데요...이건가
?.."
주방 바닥을 내려다보니 사각형의 문처럼 생긴 조그만 틈이 보였고 한
쪽에는 손가락 두세 개쯤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나와봐요.."
승환은 여자를 비켜서게 하고 마루에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위로
당겨봤다. 문은 아주 가볍게 위로 들렸고 그 아래 작은 나무 사다리가
보였다. 안으로 내려가 보니 각종 통조림과 갖가지 과일들, 그리고 외
국에서 들여온 듯한 살라미 소시지들이 가득했다.
"이거면 둘이 한 달도 넘게 살겠는데요.."
창고 안에 가득 저장되어 있는 음식들을 보자 승환은 저녁부터 굶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거 먹을걸 보니까 굉장히 배가 고픈데요.."
"저두요...저녁 먹다가 이리로 오게 되었거든요.."
"뭐좀 만들어 먹을까요?"
"네..그런데 요리 잘하세요? 전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저도요...아무렇게나 해서 먹죠 뭐.."
"그래요...샐러드는 제가 만들께요.."
"그럼 나는 프렌치토스트와 스크램블에그를 하죠.."
갑자기 집안이 수선스러워지고 있었다. 냉장고 문이 수시로 열렸다 닫
히고 그릇과 양념들을 찾느라 싱크대 전체가 몇 번씩 열렸다 닫혔다.
만드는 시간보다 그릇들을 찾느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들은 들떠 있었다.
초희는 냉장고에서 과일과 야채를 꺼내며 또 뭘 넣을까 고민하고 있었
다. 되도록 맛있게 만들어 먹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
들어 먹는다는 것이 얼마만인가?
씻어낸 과일과 야채를 썰어 우묵한 유리볼에 담으면서 초희는 싱크대
앞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사내의 등을 보았다. 우유를 묻힌
빵을 다시 계란물을 입혀 프렌치토스트를 만드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여 웃음이 나왔다.
"호호호...."
사내가 초희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뇨...하시는 게 너무 진지해 보여서요.."
사내는 그냥 씨익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빴어요? 그렇담 사과할께요.."
"그게 아니고 빵이 타잖아요..그리고..굉장히 재미있어요, 지금..마치
학생때 캠핑간 기분인데...이렇게 요리해본게 얼마 만인지..."
"저도요..."
"맛있게 만들어요. 잔뜩 기대하고 있으니까..."
"저도 큰 기대하고 있는 거 아시죠? "
"잠시 뒤에 서로 품평회 합시다."
"좋아요..내기할래요?"
"뭐 내기요?"
"글세, 뭐가 좋을까?.."
"손목맞기."
"O. K"
초희는 말과 함께 과일을 예쁘게 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싱크대에
선 연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샐러드가 참 맛있군요.."
"고마워요. 토스트도 맛있어요. 그런데 스크램블은 좀 짜지 않아요?"
"소금이 좀 많이 들어갔지요? 간을 어떻게 봐야할지 몰라서 대충 넣었
는데...먹기 힘들어요?"
"아니요...제가 좀 싱겁게 먹어서 그래요..맛있어요.."
"그럼 다행이고...이건 제가 진 걸로 하죠.."
"아니에요...토스트가 너무 맛있어요. 제가 진 것 같은데요.."
"그럼 무승부로 합시다. 좋죠?"
"네.."
환하게 웃는 그의 웃음이 보기 좋았다. 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마신 뒤
그들은 와인을 꺼냈다.
"우리 건배해요."
"그럽시다. 뭘 위해할까요?"
"환상을 위하여..."
"좋죠. 환상을 위하여.."
건배를 외치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이름은 승환이라 했다. 민
승환. 따뜻한 남자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와인 한 병이 다
비었다.
"저 졸려요.."
술기운이 흥분으로 잊고있었던 그 동안의 피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초
희는 자신의 말에 승환이 당황하는 것을 보았다.
"침실이 하나 뿐이던데...."
말꼬리를 감추는 승환의 모습이 귀여워보였다.
"같이 자요.."
술기운 때문일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입에서 그렇게 약간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말이 나갈 줄은 몰랐다.
"먼저 들어가요. 전 이것좀 치우고 들어갈께요.."
승환의 허둥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서른두살의 남자가 저렇게 순진한
면도 있구나.
"내일 치워요..."
초희는 그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서 그는 몹시 서둘렀다.
성급한 키스와 약간은 거칠게 느껴지는 애무.
"서두르지 말아요.."
초희는 그를 달래기 위해 말을 했지만 그 말이 더 그를 자극시켰는지
그는 이내 초희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헙...."
술기운을 뚫고 뜨거운 것이 아랫배에서부터 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충분히 젖어들지 않은 자신의 몸 속으로 성급하게 들어온 남자의
열정이 뜨거웠다. 남자는 그녀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세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천천히.."
낯선 남자의 몸이 자극이 되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뜻대로 이렇게 아
무도 없는 곳으로 와서 쉬게 되었다는 설레임 때문일까? 초희는 자신
이 흥분하고 있는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
았다. 자신의 소원은 이루어졌고, 이렇게 자신을 진정 좋아하는 남자
가 여기 내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으음....."
승환은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아 몸을 부르르 떨며
초희를 세게 안았다. 달빛 속에서 그의 허탈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이 남자 너무 흥분해 있었어.
"괜찮아요. 우리 이제 쉬어요. 저.....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초희는 승환에게 키스를 해주고 버릇대로 옆으로 돌아누웠다. 폭포수
처럼 잠이 쏟아졌다.
=====제 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