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아◀ 제13화 [그의 무릎 - 영신]
< 팔레스호텔 1203호를 잡아두었습니다. 열 시쯤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기다리지요.도망가지 마세요. >
그의 메시지는 시작도 끝도 없이 달랑 그 한 마디만 남아 있었다.
영신은 그의 메시지를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대해
몸서리를 쳤다.
-어쩐다? 나가야 할까 아님.....
시계를 보았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 그는 이제 호텔에 도착해
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영신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의 기다림을 무시하고 집에서
잠을 자던지 아니면 그곳으로 가서 그의 무릎을 빌리던지....
그의 무릎을 베고 눕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앞에서 허물어질 것 같은 자기자신이 더 두려운지도 몰랐다.
-섹스....를 하게 될까.....모르겠어....
영신은 차라리 사납게 자신 속으로 파고들던 남편의 고통스런 섹스
가 더 간절했다. 남편과의 섹스 중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으
니까. 그저 남편이 사정을 하고 빨리 몸 위에서 내려와주기만을
바라고 그 후엔 독한 위스키 한잔으로 잠을 청하면 됐으니까.
-어쩌면 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어지는 오랜 시간들에
너무 길들여진 것일지도 몰라.
영신은 속절없이 거실과 방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좀 나아질 꺼야
커피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는데도 영신은 손은 주책없이 흔들렸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은 손보다 더 떨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몸 안으로 퍼져가는 따뜻한 카페인의 안정
감이 느껴졌다. 비로소 그녀는 떨리던 자신의 손이 멈췄음을 알았
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당당하게 가서 그의 무릎을 베고 자는 거
야. 그것이 내키지 않으면 정중히 사과하고 돌아오면 돼.
커피 잔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모금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영
신은 애초에 좀더 많은 양의 커피를 타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고개를 들어 거실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보았다. 10시 35분. 영신
은 입술을 굳게 사려 물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똑똑.
노크를 하자 그는 한 손에 책을 든 채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얼굴
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미안해요..."
"전 늦으시기에 도망갔나 했지요.."
"아뇨, 그건..."
"이제라도 왔으니까 됐습니다. 계속 그렇게 서있을 건가요?"
"네? 아뇨.."
그는 자연스럽게 영신의 손목을 잡아 룸 안으로 이끌었다. 처음 만
난 여자의 손을 잡아끄는 그에게서, 그러나 낯설음은 느껴지지 않
았다. 영신은 그의 손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방안으로 들어서니 벽 앞의 작은 화장대와 창가의 작은 다탁자가
보였고 무엇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침대가 눈에 가
득 들어찼다. 침대를 보는 순간 영신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나가야해...
그러나 영신은 방을 나서지 못했다.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는 그의
말솜씨에 반해 그녀의 속마음을 조금씩 열어놓다보니 결국은 침대
위에 자신을 누이고 말았다. 이 방을 처음 들어설 때 보았던 바로
그 침대 위에.
처음 침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움추러 들었었다. 아니 몸보다 먼저 영혼이, 밤마다 남편의 거친
공격에 지쳐버린 그녀의 작은 영혼이 먼저 움추러 들었었다. 그러
나 침대 위에 눕자 자신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이렇게 해봐요.."
그는 영신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불편하지 않죠?"
"네........"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있자니 그의 손가락이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가볍게 머리카락을 만지기도 하다가 두피를 맛사지하듯 만져주는
느낌이 너무나도 좋았다.
"괜찮아요?"
"네.."
긴장이 풀리며 영신은 아주 편안함을 느꼈다. 남자의 손길이 이렇
게 따뜻하고 편안한 것이였는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듯 여겨졌
다. 편안함 속에서 영신은 자신의 마음 한켠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욕구를 느꼈다. 쉼없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녀의 머리를 만
져주는 그의 손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그의 손이 귓볼을 스칠 때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커져만 갔
다. 그러나 그의 손길은 머리카락이 있는 곳을 제외하곤 다른 곳으
로는 옮겨지지 않았다.
"음악 좀 틀어 주실래요?"
그가 침대 옆 협탁에 있는 라디오를 켜는 동안 고개를 들고 있던
그녀는 그의 자세가 다시 고쳐지자 옆으로 고개를 돌려 누웠다. 그
의 손길이 그녀의 귓볼에 닿을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려는 생각
에서였다. 영신은 예상대로 그의 손길은 귓볼에 자주 닿았다. 그의
손이 귓볼에 닿을 때마다 영신은 욕망이 커지며 안타까움 또한 커
지는 것을 느꼈다.
"귀가 참 예쁘네요"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영신은 짜
릿함에 항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요?"
"네. 참 이쁘게 생겼어요.."
그의 말을 들으며 영신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숨결이 뜨
거워진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