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33)

공포게임 메이드의 신혼 일기

“마님, 차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

달칵. 집무실 문이 닫히고 하인이 나가자 나는 한참 만에 서류에서 눈을 뗐다. 태산같이 쌓인 일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진 걸 모르고 있었다.

으아아, 어깨 아파, 찌뿌둥해! 입시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지옥의 훈련을 거친 게 근 1년 전인데, 그보다 더한 풍파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대체 왜 이렇게 일이 많은 거야!

내 이미지 속 귀족들은 온종일 볕이나 쬐고 하하호호 산책 다니고 내일은 뭘 먹을지 고민하는 한량이어서, 나도 가끔은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전부 착각이었다.

하루하루가 일로 시작해 일로 끝났다. 할 일이 고작 청소뿐이던 하인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말도 안 되게 바빴다. 영지와 자택 관리는 물론이고, 세금 처리 및 선대부터 해 오던 자선 사업에 다른 집안과의 친교까지.

누구도 백작 부인 자리가 한가로울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사기당한 기분도 든다 이거다.

나는 마지막으로 보던 서류에 ‘힐데가르드 시에나 폰 로엔 팔츠그라프’라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이름을 길게 적어 놓고는 내려놓았다. 새 이름을 받을 때 아드리안이 이름의 구성이 각각 어디서 유래했는지 가르쳐 줬는데, 그러고 곧장 붙어먹느라 다 까먹어 버렸다.

저 기나긴 이름의 뜻은 다 알지 못해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여전히 힐다로 불리고 있었으므로 큰 변화를 느끼진 못했다.

길어진 이름을 막힘없이 쓸 수 있게 된 것만큼이나 나는 백작 부인으로 사는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적응하는 데 가장 시간이 걸린 건 역시 아랫사람을 부리는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전까지 동료였던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니 민망하긴 했다.

하지만 네가 어색해할수록 우습게 보이기 좋을 거라는 선 백작 부인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녀가 생전에 해 준 말을 떠올리면 좀 더 수월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은 이것만 끝내고 정리해 볼까?”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였다. 평소엔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진 않지만, 조만간 계획한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일을 앞당겨 처리해 놓아야 했다.

흑흑, 아드리안 보고 싶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남편 얼굴을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봐 줘야 하는데 어쩐지 결혼하고 나서 더 못 보게 됐다. 각자 일이 많아서 신혼여행도 못 간 게 말이 되냐고요.

“힐다. 들어가도 될까?”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보고 싶었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아드리안! 연일 격무에 시달려 찡그린 미간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던 내 얼굴이 저절로 활짝 피어나는 게 느껴졌다.

“아드리안! 오늘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더니! 일은 잘 끝난 거예요?”

내가 벌떡 일어나며 반기자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응. 얘기가 길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빨리 마무리됐어. 곧장 침실로 갔는데 네가 안 보여서 와 봤는데, 아직 일하고 있었던 거야?”

“네. 상납금 목록을 보고 있었어요. 숫자가 안 맞는 것 같아서.”

내가 움직이기 전에 아드리안이 먼저 빠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한없이 다정한 눈빛이 햇살처럼 내리쬈다.

“피곤해 보여. 보좌관이라도 곁에 두면 훨씬 편해질 텐데, 내 말을 듣지 않고.”

“일에 익숙해진 다음에요. 제가 일하는 법을 모르는데 아랫사람을 어떻게 부리겠어요.”

“부인께서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실 줄은 미처 몰랐지. 하지만 며칠째 속상해 있는 남편도 돌아봐 줘야지 않겠어?”

아드리안이 몸을 바싹 붙여 오며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요즘은 침실에 들어오지도 않고. 혼자서 잔 날이 며칠 됐는지 알기나 해?”

“기척 때문에 깰까 봐 그런 거죠. 그게 섭섭했어요?”

“이제야 겨우 같은 침실을 쓰게 됐는데 부인이 들어오질 않는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밤새 기다리다가 찾으러 왔는데 집무실에서 자는 널 발견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상상하지 못할 거야.”

“그랬어요? 미안해요. 일 때문에…….”

“나만 애탄 거지. 나만 사랑하고 싶은 거지. 또 나만.”

어깨로부터 목덜미까지 가만가만 맞춰 오는 입술이 노골적이었다. 살결에 들러붙는 듯한 숨소리에 그 부분만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떠밀리면서, 아드리안이 꽤 오래 참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프리실라와 여러 가지를 준비하느라 사실상 결혼 생활을 제대로 보낸 적이 없긴 했지. 결혼한 직후부터 지금까지는 제대로 자리 잡느라 시간이 필요했고.

선 백작 부인의 지휘 아래 공부를 시작했을 땐, 아드리안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회피 원피스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벗기려고 하면 회피 뜨는 바람에 아드리안을 여러 번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회피 성공 시 상대의 적중률을 낮추는 디버프 효과까지 있어서 아드리안이 애 좀 먹었지. 시스템을 닫은 후엔 아이템 효과가 소용없게 되었지만.

그 시절 아드리안이 새로 끄적거린 사랑의 시를 슬쩍 본 적이 있는데, 누가 보면 사별한 줄 알 만큼 절절해서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저도 당신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안고 싶었고.”

“나는 그보다 더 원해, 힐다. 그보다 훨씬 더, 날 원해 줬으면 좋겠어.”

“…….”

“내가 원하는 반만이라도 네가 날 원했으면 좋겠어…….”

애교스러웠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음산하게 뚝뚝 떨어졌다. 나는 진심으로 아드리안을 사랑하고 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래도 아드리안은 늘 부족한 모양이었다.

굶주림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이처럼 허기짐이 민낯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럴 때의 아드리안은 절대 말릴 수 없었다.

“잘 알겠으니까…… 오늘은 침실로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 있어요. 한 시간만 더 하면 하던 일이 마무리될 것 같아서, 아니, 30분만요.”

밀리고 밀려서 책상에 가로막혀 물러나지 못하게 되자 내가 하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상납금 계산까진 끝내고 자야 하는데!

“못 기다리겠어.”

“잠깐만…… 으앗, 잠깐만요!”

단말마의 비명 같은 외침을 싹 무시한 채 아드리안이 나를 훌쩍 들어 책상에 올려 두었다. 발목부터 무릎까지 슬슬 매만지며 올라오는 손길이 심상찮았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삐용삐용 울리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이, 일단 진정하고 침실로…… 읏.”

어떻게든 밀어내려 했는데 잡고 밀어낼 어깨가 없었다. 그가 이미 내 한쪽 다리를 잡아 올리며 치마폭 아래로 숨어 버린 탓이었다. 난데없이 집무실 천장을 마주 보고 눕게 된 나는 갑자기 아래가 시원해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아드리안!”

“응, 불렀어?”

치마폭 안에서 뭘 하는 건지 발음이 어눌했다. 허벅지 안쪽에서 뜨겁고 축축한 감각을 느끼고서야 그가 뭘 하는지 알았다. 다리가 공중에서 파르르 떨릴 정도로 열심히 허벅지를 핥고 깨물던 입술이 이윽고 속옷에 닿았다. 서늘한 감각에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아드리안, 대체 뭘…… 지금!”

그는 어깨를 걷어차려는 발을 간단히 붙잡아 내리고 골반에 있는 매듭을 풀었다. 사르르 떨어지는 끈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뜨겁고 미끈한 것이 비부를 파고든 건 바로 다음이었다. 아, 윽……. 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아야 했다.

“잠깐만, 곧 사람들이 돌아다닐 텐데…… 흡.”

입을 연 순간, 혀가 깊은 안쪽을 찔렀다. 특히 약해서, 그가 짓궂게 굴고 싶을 때 가장 집요하게 찔러 대는 바로 그 지점. 발작하듯 허리를 들썩거리자 혀 놀림이 더 농밀해졌다. 틈을 파고들어 연한 살갗을 긁고, 흘러내리는 액체는 아깝다는 듯 죄다 핥았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죽이려는 게 아니고서야.

“지나가면…… 들릴 텐데…….”

하반신에 힘이 꽉 들어가 의도치 않게 그의 머리를 조이고 말았다. 허공에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그가 여유롭게 어깨에 걸쳐 주었다. 복숭아뼈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무척 간지럽고 보드라웠다.

“백작이 틈만 나면 부인에게 흘레붙고 싶어 한다는 걸 모르는 사용인이 아직 있을까.”

“그래도, 읏…… 적어도 전부 다 잠든 다음에…….”

“그럴 순 없지. 난 네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제일 동하는걸.”

당당하면 더 흥분되겠지만.

미미한 웃음소리와 함께 혀가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등허리가 달싹거릴 만큼의 자극. 움츠러드는 손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치맛자락에 매달리듯 붙들었다. 이를 꽉 깨물었으나 헐떡거리며 새어 나가는 신음만은 막을 수 없었다. 틈을 비집는 혀는 너무나 뜨거워 닿는 곳마다 홧홧해졌다.

파고들고 문지르다가 한참을 핥는다. 이런 집요함이라면 아마 해 뜰 때까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드…… 리안.”

“응, 나 여기 있어.”

이윽고 눈앞이 하얗게 달아오르는 순간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마주 잡아 주었다. 평소보다 더 집착적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얽어 넣어 손바닥을 완전히 붙인다. 모처럼 흡족한 목소리였다. 나는 후희를 견디다 못해 바르르 떠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차례 파도에 휩쓸리고 난 후 나는 헐떡거리며 손을 잡아당겼다. 야시시하도록 예쁘게 웃는 얼굴이 눈앞으로 끌려 왔다.

“오늘 입은 셔츠는 어때, 네가 찢기 좋아하는 재질로 특별히 골라 봤는데.”

그가 손끝으로 자기 셔츠 자락을 잡고 살짝 들어 보였다. 이런 거에 약한 건 또 어떻게 알고. 답답하도록 정갈하게 매인 넥타이부터 잡아 뜯듯 풀어냈다. 나는 쉽게 불붙고 아드리안은 불을 잘 질렀으니, 이만하면 천생연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상납금 계산은 다시 하지 못한 채 침실에서 밤을 보냈다. 결혼한 후 가장 긴 밤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온몸에 근육통을 느끼며 겨우 눈을 떴을 때 아드리안이 문어처럼 휘감겨 있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늦잠 잤다.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 한참 걸렸다. ……정말 한참 걸렸다.

“아드리안, 이제 일어나 봐요.”

“…….”

“아침…… 아니, 점심 식사해야죠.”

문어 아드리안 때문에 곯아떨어졌다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점심을 훌쩍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잠결에 몇 번인가 문 앞에서 서성이는 인기척을 느껴진 걸 보면, 하인들이 식사를 준비해 놓고 쩔쩔매며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안 되겠어.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온종일 아드리안과 침대에 뒹구는 엔딩이 될 게 뻔했다. 내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마저 마무리해야 해. 애써 이성을 되찾고 몸에 감긴 문어 다리를 하나씩 떼어 내고 있는데 별안간 다시 끌려들어 가고 말았다. 탈출 대실패.

“이러고 조금만 더 있자. 우리 둘만의 느긋한 아침도 모처럼이잖아.”

그가 내 어깨에 느릿하게 입술을 맞추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겹치고 있어서인지 등허리에 뜨겁고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는데…… 우리 남편께선 일어나자마자 또 하고 싶나 보다. 그 죽지 않는 정력에 순수하게 감탄이 나오려고 했다.

저주가 완전히 풀린 뒤 건강해지고 나서부터 그는 좀처럼 시드는 법이 없었다. 부인으로서 흡족했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먼저 잠들었으면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체력이 고작 네 자리인데 아드리안 체력은 ??????이었잖아. 백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체력을 무턱대고 따라가려다간 진짜 가랑이가 찢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우리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걸요. 한참 전부터요.”

“기다리라지. 그게 그들의 일이잖아.”

“아드리안.”

“넌 필요 이상으로 남들 시선을 신경 쓸 때가 있어. 지금만큼은 온전히 내게만 집중해 주면 안 될까? 모처럼이잖아…….”

“그런 걸 세상에선 이성적이라고 해요.”

“그래. 이성적인 부인께서 외로운 남편을 좀 더 돌아봐 주길 진심으로 바라는 중이야. 오늘까지 소박맞긴 싫어, 힐다…….”

어깨에 이마를 슬슬 비비며 애원하는 투에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소박맞다니, 당신이 언제…… 아니, 근데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응, 카지미어가…….”

“뭐! 카지미어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에요?”

카지미어 이놈 시키, 감히 내 남편한테 그런 표현을 써먹어? 집사 시켜 줘서 요새 어깨 좀 올라간 것 같더니 선 넘었다. 옆에서 그런 말을 하니까 아드리안이 더 조급해하는 거 아냐!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아드리안. 제가 가서 혼쭐을 내고 올게요.”

“아냐, 괜찮아. 어차피 카지미어, 당분간 저택에 못 올 거야.”

“왜요? 무슨 일 있대요?”

내 남편 놀려 놓고 튀기까지?

“응, 다리가 부러졌거든.”

“네? 갑자기 다리가 왜…….”

“내가 부러뜨렸어.”

“…….”

“너한테 소박맞았다잖아.”

그렇지. 내가 이렇게 괘씸하게 여길 정도면 아드리안이 먼저 처리하고도 남았겠지. 그래도 다리를 부러뜨리다니……. 아드리안이 손을 댔는데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말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카지미어는 후환이 있을 거란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처맞을 짓을 골라서 했다.

하지만 카지미어라면 분노하는 아드리안, 짜증 내는 아드리안의 모습 등등을 수집할 법도 하지. 아드리안을 향한 충성심이 커진 나머지 위험한 취향에 눈을 뜬 건 아닌지…… 이쯤 되면 걱정스러웠다.

이번만큼은 나무라야 할지 애매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아드리안이 새끼 새처럼 쫑쫑거리듯 어깨에다 입을 맞추었다. 따지고 보면 아드리안이 이런 애정 결핍에 걸린 건 내 탓이었으니까. 소박맞았다는 소리에 발끈한 것도 정곡이 찔렸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라고 소홀해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원대한 선물을 기획하던 중이었는데.

“그래요. 원래 2주 뒤쯤 실행하려 했는데 그냥 오늘 해 버리도록 하죠.”

“응? 뭘 해?”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고요. 혹시 오늘 특별히 할 일 있어요?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 3주간요. 중요한 외부 일정이라거나.”

“없는 건 아니지만,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이야.”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드리안이 냉큼 대답했다. 그럼 일정 문제도 없다는 거군. 예정보다 빨라졌지만, 준비는 미리 해 놨으니 문제없을 거다.

“다행이네요. 그럼 오늘 오후에 바로 출발해요. 에밀리랑 델로레스한텐 미리 얘기해 놨으니까 냉큼 준비해 줄 거예요. 식사하고 출발하면 시간이 딱 맞겠는데요.”

“출발? 어딜 가는 거야?”

“그건 가 보면 알아요. 그 전에 그…… 등에 난 상처부터 치료해요.”

상처 치료 연고를 어디 뒀는지 떠올리며 일어나려는데,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드리안이 다시 당겨서 품에 가두었다. 두고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연고 하나 가져온다는 데도 이 지경이라니. 이 정도면 분리 불안 말기인데, 이제껏 참은 게 대견할 정도다. 장하다, 내 남편!

“아드리안, 떨어지기 싫은 건 저도 그러니 이해하는데 등에 난 상처는 치료해야 해요. 요즘 바빠서 손톱 다듬는 걸 깜박했더니…… 미안해요.”

“네가 낸 상처를 왜 없애? 기념으로 남겨 둘 거야.”

“안 돼요. 그러다 덧나요.”

“괜찮아. 그럴 일 없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랑을 나누면서 격렬해질 때가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긁곤 하는데, 심한 상처는 아니더라도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관계 후에라도 사과할 겸 직접 치료해 주려고 했지만, 아드리안은 도통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낸 상처가 몸에 남아 있으면 좋겠다나……. 다 나으면 아깝다는 말이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저는 당신 취향이…… 건강하지 않아서 항상 걱정이에요.”

“내 취향은 너야, 힐다. 너도 내가 취향이잖아.”

“흠, 꽤 자신만만하네요?”

“응. 몸은 거짓말을 안 하거든.”

배를 쓸고 올라온 손이 한쪽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문질렀다. 그 끝을 살짝 긁었다가 가볍게 비틀자 찌릿한 자극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만지는 대로 물렁거리며 변해 가고 이리저리 비벼졌다. 그러잖아도 어젯밤 내내 빨리고 꼬집혀 조금은 아린데도, 그 아픔 또한 형용할 수 없는 쾌락이 되었다.

“……그래요, 이건 부정할 수 없네요.”

“그렇지? 그래서 기뻐.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서.”

조금 전까지 기진맥진했던 몸이 거짓말처럼 달아오르고, 메말랐던 다리 사이가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그가 주는 자극에 이성이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게, 이대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어젯밤이 고스란히 재연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이건…… 엉큼한 아드리안 탓할 일이 아니잖아. 나야말로 짐승이라고 불려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알겠어요. 모든 걸 인정할 테니 얼른 일어나서 씻고 준비하죠. 과하게 제 취향인 서방님.”

“내 어디가 그렇게 취향이야?”

“따라 들어오면 가르쳐 주죠.”

감격한 아드리안이 팔에 힘을 푼 사이, 내가 얼른 일어나서 가운을 집어 들었다. 아드리안은 간식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졸졸 내 뒤를 쫓아왔고, 씻는 내내 자기의 어디가 취향인지 물어 댔다.

취향이 아닌 곳이 없다고 했더니 또다시 감격한 듯 침묵. 덕분에 난 빠르게 씻고 나갈 수 있었다.

내 취향인 신체 부위가 머리카락, 이마, 눈, 코, 입, 귀, 목, 가슴, 팔, 다리, 발이라는 걸 듣고부터 아드리안은 내내 싱글벙글했다. 입이 귀에 걸려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온 얼굴로 행복해하는 그를 보니 나까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게 그렇게 좋나.

“힐다, 이리 와서 단추 잠그는 걸 도와줄래?”

“왜요? 잘 안 잠겨요? 음, 단추는 문제없는 것 같은데…….”

“아니. 나 손이 떨려서 못 잠그겠어. 이거 봐, 응?”

“…….”

단추를 잠가 주는 내 앞으로 아드리안이 불쑥 손을 들이밀었다. 손이 달달달 떨리는 걸 보니 못 잠글 만한데, 아까까지 멀쩡했던 손이 왜 갑자기 떨리냐고요. 단추 잠가 달라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거절당하고 싶지 않을 때 아드리안은 특히 저런 방법을 쓰곤 했다. 순진하고 수줍은 얼굴 때문에 가끔은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얄밉거나 가증스러워 보이지 않으니, 나도 중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리 선언한 대로 나는 식사 후 아드리안을 납치해 마차에 태웠다. 조금 급작스럽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 관해선 에밀리와 꽤 오래 논의해 온 만큼 ‘예정보다 일찍 여행을 다녀오게 됐다.’라는 한마디로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며칠간 거의 밤샘하다시피 업무를 끝내 놨으니 아드리안과 한동안 여행 다녀오는 건 아무 문제 없다 이거다.

이번 여행엔 어떤 하인도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나중에 들어 보면 안다.

여행의 취지가 취지이니만큼 짐은 간단히 챙겼다. 아드리안과 내 옷, 생필품과 요리 재료들.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 넣고 나머지는 도착지 주변 마을에 가서 구할 생각이었다. 목적지가 추운 지방이라 두껍고 든든한 외투도 챙겼다.

물론 베개도 꼼꼼하게 챙겼다. 어차피 목적지에도 있을 테고 이젠 베개 없다고 침대에 못 눕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겠지만, 습관적으로 챙겼다. 어딜 가든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힐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미안한데 도착할 때까지 비밀이에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 쉿 소리를 내며 말하자 아드리안이 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도착하는데? 왜 말 안 해 주는 거야? 아직도 말해 줄 생각이 들지 않아? 아직도? 아직도? 나 궁금해 죽을 것 같아, 힐다. 30분 지날 때마다 아드리안이 질문 폭격을 날렸으나 나는 꿋꿋이 입을 닫고 비밀을 지켰다. 저렇게 신난 걸 보니 빨리 말해 주고 싶은데 깜짝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입을 다물었다.

어서 도착해서 얘기해 주고 싶다. 이 여행이 마음에 쏙 들 거란 건 확실한데.

아드리안은 내내 궁금해하고 나는 내내 말하고 싶어 하는 기나긴 여정 끝에, 우리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 어서 내려 봐요!”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뛰어 내려간 나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눈밭을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내가 아드리안을 납치해서 데려온 곳은 바로 글로스터 성. 선 백작 부인이 내게 선물해 주고 떠난 바로 그 성이었다.

겨울에 눈 오는 풍경이 그렇게 예쁘다더니 진짜였어. 우리를 반기기라도 하듯 하늘에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힐다, 여긴…….”

“글로스터 성요! 혹시 어머님 따라 와 본 적 있어요?”

“아니, 하지만 이야기는 자주 들었어. 건강해지면 놀러 오자고, 겨울 풍경이 그림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어렸을 적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거든.”

“결국, 건강해져서 왔네요. 어머님께서 기뻐하고 계실 거예요.”

여기가 목적지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드리안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내가 팔꿈치로 쿡쿡 찌르자 도로 닫긴 했지만. 뒤늦게 정신 차린 그가 마차로 다시 돌아가 짐승 털로 만들어진 두툼한 외투를 가져와서 나를 꽁꽁 싸매 주었다. 그리고 추워서 살짝 빨개진 손끝을 감싸며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그 다정함에 언 손이 순식간에 녹는 느낌이라 바보같이 헤헤 웃고 말았다.

“아드리안,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눈을 멈추게 할 수도 있어요?”

“응……. 하지만 너랑은 함께 눈 맞는 게 더 좋아. 눈이 멈췄으면 좋겠어?”

“아뇨,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저도 같이 눈 맞는 게 더 좋아요. 부부끼리는 통한다더니 우린 이런 것까지 통하네요.”

괜히 멋쩍어진 내가 하하 웃어 버리자 아드리안이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톡톡 털어 주었다. 함께 눈 맞고 싶다는 소망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드리안과 나에게 갖다 붙이면 왠지 특별해지는 것 같다.

“모처럼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데 눈싸움이나 해 볼까요? 해 본 적 있어요?”

“응? 눈…… 싸움?”

“해 본 적 없구나! 그럼 한번 해 봐요!”

마차에서 가지고 나온 목도리를 열심히 내게 둘러 주다 말고 아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싸움이 뭔지 모르는 눈치다. 하긴 지옥은 불과 어둠 속성이었으니 눈을 봤을 리 없고, 사람이 되고 나서는 몸이 아파 해맑게 뛰어다닐 새가 없었으니 당연하겠지. 그래서 나는 유년 시절을 잃어버린 남편에게 친히 눈싸움하는 법을 알려 주기로 했다.

“자, 봐요, 아드리안. 눈싸움은 어떻게 하는 거냐면, 이렇게 눈을 뭉쳐서…….”

“맨손으로 만지면 안 돼. 손이 차가워지잖아.”

“상대방한테 던지는 거예요. 이렇게.”

작게 뭉친 눈을 시범 삼아 살짝 던졌더니 검은 외투 위에서 부서져서 후드득 떨어졌다. 아드리안은 눈이 묻은 외투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내 손을 따뜻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어쩐지 눈싸움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나는 그를 조금 더 약 올려 보기로 했다.

“힐다, 어디 가는 거야?”

“이거 봐요! 이렇게 해도 안 할 거예요?”

손을 뿌리치고 멀찍이 뛰어가서 눈을 얼른 뭉쳐 던졌다. 보통이라면 상대에게 닿지 않고 중간에 떨어질 법한 거리였지만, 내 신체 능력은 여느 야구 선수 못지않았기에 한 대 더 맞추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벌써 두 대나 맞아 놓고 아드리안은 전혀 약 오른 표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내가 추울지만 염려하는 눈치다. 으음, 걱정 많은 남편이랑 놀기 참 어렵군.

“반격 안 하면 한 개 더 맞을지도 모르는데 그러고 있을 거…… 으아악!”

“힐다!”

아드리안에게서 더 멀어지려고 하다가 앞을 못 보고 나무에 부딪혔다. 부딪힌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원뿔 모양으로 높이 솟은 나무에 쌓여 있던 눈이 모조리 내 위로 쏟아진 건 문제였다. 빽 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머리끝까지 파묻혔다. 사람 살려…….

“힐다, 힐다!”

필사적인 아드리안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무덤에서 되살아난 시체가 이런 기분일까. 맨손으로 눈을 파헤쳐 꺼내 주는 아드리안에게 고마워졌다. 나는 눈 뭉치를 두 번이나 맞췄는데…….

“맙소사. 추워서 떨고 있잖아. 눈이 그렇게 좋아?”

“그게 아니라…… 명색이 아드리안 당신이랑 첫 여행이잖아요. 처음으로 같이 보는 눈이기도 하고,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단 말이에요.”

눈 무덤을 마저 파헤쳐 나를 발굴해 낸 아드리안이 눈투성이가 된 외투를 털어 주었다. 그런 거였냐고 아드리안이 픽 웃는데, 마침 기다란 속눈썹에 눈송이가 이슬처럼 맺혔다. 이물감 때문에 살짝 찡긋거렸다 돌아오는 눈매가 어여뻤다.

무심코 손을 뻗어 그를 만지려는 순간 또다시 후드득. 나무에서 쏟아져 내린 눈이 우리 머리 위에 고깔모자처럼 쌓였다. 어리벙벙해진 얼굴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머리 위 하얀 모자에 향해 있던 시선이 스르르 내려와 내게 닿자, 그의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맺혔다.

“그만 들어가자. 너 추워.”

“그러네요. 우리 둘 다 쫄딱 젖기도 하고. 그래도 눈싸움은 꼭 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추워서 재채기하는 사이, 모자는 물론이고 내가 파묻혀 있던 눈더미까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슬쩍 돌아보니, 우리가 서 있던 자리만 눈이 죄다 녹아 흙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아드리안이 한 거겠지…….

모든 힘을 되찾은 아드리안은 이렇듯 전지전능했지만, 정작 그 힘을 크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마음만 먹으면 글로스터 성엔 눈 깜짝할 새에 왔을 테고 내가 던진 하찮은 눈 뭉치도 맞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내 앞에서는 최대한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가진 힘은 얼마나 대단한 걸까? 하늘을 제 맘대로 바꿀 수 있는 데다 내가 살던 세계를 합치려고까지 했으니 상상 이상일 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를 무척 연약한 존재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다루었다. 비유하자면 아주 소중한 비눗방울 정도. 손대면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작은 힘조차 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와의 눈싸움은 글러 먹었다, 이거다.

그래도 눈싸움 정도는 받아 줄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눈 맞고 죽진 않을 거잖아……. 음, 아니지. 아드리안이라면 죽일 수도 있을까?

“마님, 명령하신 대로 짐은 성안으로 전부 옮겨 두었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도 될까요?”

성 입구에 다다르자 마침 짐을 다 옮긴 마부가 물었다. 이제 돌아가도 된다는 허락과 함께 마부가 떠나자 아드리안이 잠깐의 침묵 끝에 물었다.

“힐다,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이 성안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네, 맞아요. 관리인과 하인들 전부 휴가 보냈거든요. 말하자면 이 성에서 지내는 건 우리 둘뿐이라는 거죠.”

“우리 둘만?”

“네. 앞으로 음식은 우리가 해 먹어야 한다는 거죠……. 어서 들어와요.”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아드리안의 소매를 끌어당겨서 성안으로 들였다. 이곳 하인들의 시중을 받지 않을 거라면 왜 저택 사용인들을 데려오지 않은 건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 원대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성엔 아무도 있어선 안 됐다.

끼이익. 거대한 문을 꽉 닫고 자물쇠를 걸어 버린 후 그 앞에 서서 아드리안을 응시했다.

“문은 잠갔어요. 유일한 열쇠는 내 손에 있고요.”

“…….”

“당신은 이제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가요.”

열쇠 없다고 못 나갈 아드리안이 아니지만, 콘셉트가 중요한 만큼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러자 아드리안의 눈이 별을 심어놓은 듯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간다고? 그게 정말이야, 힐다?”

“네. 제가 당신을 여기다 가둔 거예요. 누구도 만나지 못하도록, 이 성에 고립시킨 거죠.”

“네가 날…… 가둬 준 거야?”

“…….”

“내가 네게 가둬지다니…….”

눈이 반짝거리다 못해 황홀해지고 단단한 입매가 허물어졌다. 내가 네게 가둬진 거야, 드디어, 내 바람이 이뤄졌어. 기묘한 열기를 품은 채 그가 중얼거렸다. 좋아하리라곤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하잖아.

“알아들었으면 아드리안, 어서 짐 가지고 방에 올라가 있도록 해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인기척이 들려도 창밖을 내다보거나 해선 안 돼요. 당신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눈 마주치거나 이야기 나누는 게 끔찍하게 싫거든요!”

“맙소사. 그래, 알았어. 창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을게.”

원래 아드리안이 했던 그대로 해 주려면 창문을 없애거나 검게 막아 두어야 했는데, 그럴 순 없으니 말만이라도 덧붙여 주었다. 그러자 아드리안은 기절할 것처럼 좋아했다. 여차하면 손목 묶는 서비스 정도는 하려 했는데, 이미 좋아서 미쳐가는 모습을 보니 이번엔 거기까지는 진도 안 빼도 되겠다. 결혼하고 첫 선물인데 너무 세게 나가면 다음부터 고달파질 수 있으니까.

아드리안의 건강하지 않은 취향이 쭉 걱정스러웠는데, 막상 저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건강이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서로가 좋으면 그만이지. 아드리안은 감금당해서 좋고, 난 행복한 아드리안을 보면서 좋고!

“힐다, 나 혼자 올라가게 내버려 둘 거야?”

아차, 감금할 만큼 집착하면 혼자 돌아다니게 할 리도 없겠구나. 하지만 나는 짐 정리를 빠르게 하고 싶었으므로 방에는 먼저 올려보내기로 했다. 저택에서 내내 연습하고 에밀리가 검수해 준 집착적인 눈빛을 띠는 건 잊지 않았다.

“제가 당신을 혼자 둘 리 있겠어요? 부엌에 짐을 갖다 두고 금세 올라갈 테니 한눈팔지 말고 곧장 방으로 올라가 있도록 해요. 어, 그…… 침실은 2층에 있을 거예요.”

“알겠어. 빨리 와야 해?”

대충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건가. 연기하면서도 어색해서 땀이 삐질 났는데 다행히 아드리안의 맘엔 쏙 들었던지 만족스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볼을 살짝 붉히며 수줍어하는 얼굴은 덤이었다. 으음, 막상 해 보니 집착하는 일도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이래서야 사람이 답답해서 어떻게 사나 싶은데 내 서방님 취향엔 맞는다니 맞춰 드려야지.

“어디 보자. 이쪽이 주방인가?”

음식을 챙긴 커다란 짐 가방 세 개를 내려놓을 겸 주방에 갔더니 하인들이 챙겨 놓고 간 여러 가지가 보였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음료, 거기다 요리법까지. 모처럼 휴가를 받았다며 좋아하더니 보답으로 남겨 둔 건가 보다.

프리실라가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을 텐데도 이 엄청나게 큰 성은 거미줄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만큼 하인들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성을 제집처럼 돌봐 온 거겠지. 포상 휴가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나저나 경치 한번 끝내주네. 한참 북쪽이라 그런지 사방이 끝없이 하얬다. 멀리 보이는 설산은 특히 절경이었다. 비교적 따뜻한 팔츠그라프 저택에서는 절대 보지 못할 경치였다. 매년 겨울을 이곳에서 보내도 괜찮겠는걸.

나는 창밖을 장식한 푸르고 하얀 침엽수들을 넋 놓고 구경하다가 젖은 옷이 팔에 차갑게 들러붙는 바람에 제정신을 차렸다. 외투에 묻어 있던 눈이 속옷까지 적시고 있었다. 으슬으슬 추운 게 이대로면 감기 걸리겠어. 짐을 대강 풀어 놓고 얼른 아드리안이 있을 방으로 올라갔다.

마침 문이 열려 있어 밀고 들어가려던 나는 안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옷을 갈아입는 아드리안의 모습이 미묘한 각도에서 들어찼다. 나는 어쩐지 태연하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여러 번 본 몸인데도, 갑자기 가슴이 뛰어서.

“…….”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서 크게 울렸다.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거지. 이미 잠자리까지 함께한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고 못 들어갈 건 뭐야.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어쩐지 문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러 밤을 보내면서도 비교적 그의 나신을 눈여겨볼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 어두운 밤이라 눈 대신 손으로 더듬거나, 안에 들어차는 체온을 더 자주 느끼곤 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긴장한 채 그의 넓은 어깨에서부터, 군살 없이 근육이 자리 잡은 등까지 더듬어 내려갔다. 처음 만났던 일여 년 전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것 같다고 가끔 느꼈는데, 멀리서 보니 키가 컸다는 걸 확실히 알겠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몸.

손끝으로 더듬으며 느꼈던 감각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 보니 가슴이 떨렸다. 남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다. 엄연히 말하면 나쁜 짓은 맞는데, 그래도 상대가 남편이잖아? 원래 부부란 건 재산을 공동 소유하는 거고, 남편 것은 전부 내 것이니만큼 남편 몸도 그런 법이니까. 내가 소유한 걸 보는 게 뭐가 큰 잘못이라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들어가려고 결심했는데, 숨을 한번 돌린 순간 문틈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기다란 손가락이 뱀처럼 손목을 휘감아 당겼다. 우어억, 순식간에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망했다. 30분 정도는 놀림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내 주인님께선 훔쳐보기를 좋아하셨군요. 옷 갈아입을 때마다 방문을 조금씩 열어 둘 걸 그랬나.”

“그게 아니라, 잠깐 당황해서…….”

“잠깐이라기엔 꽤 오래 보고 계시던데. 숨까지 참고.”

참, 얘 내 숨소리 들을 수 있었지. 엉겁결에 벽까지 떠밀린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앞을 바라봤다. 그런데 어쩐지 얼굴보다는 헐벗은 상체에 눈길이 뺏겨 버리는데…… 조금 전까지 멀찍이서 구경했던 근사한 몸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매끄러운 피부 위에 자리 잡은 수많은 흉터마저 그를 아름답게 조형하는 요소였다.

처음 흉터를 만졌을 땐 그렇게나 몸서리쳐 가며 싫어하더니 내가 하도 만져 대니까 근래엔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어서겠지만.

“보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보여 드렸을 텐데. 아니면 훔쳐보는 게 흥미를 더 돋운 걸까?”

놀림당하는 상황에서마저 저 피부를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건 내가 미쳐서일까, 아니면 진짜 짐승이라도 된 걸까.

“아, 아니. 그게…….”

“후자였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훔쳐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흥분해 버렸거든.”

“…….”

“입 맞춰 줘.”

가지런한 손끝이 내 턱을 부드럽게 쓸었다. 순정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내 마음을 애타게 녹였다.

“힐다, 나의 신. 부디 입술을.”

애타는 달콤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입 안에서 살살 녹을 듯 굴 때의 아드리안은 도무지 거부하기 힘들었다. 내가 깨물고 있던 입술을 풀자 그가 살짝 입술을 붙여 왔다. 부드럽고 감미롭게 한 번. 다음은 틈을 벌리고 들어와 깊숙이. 자기 입 안인 양 헤집고 다녔다. 그의 혀가 입천장을 부드럽게 쓸어 내자 턱이 몹시도 떨렸다.

“아직…… 낮인데.”

어깨에 걸쳐져 있던 외투가 팔을 따라 스르르 내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느새 등 뒤로 돌아간 손은 단추를 하나하나 빠르게 풀어 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이미 밤인걸.”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은 창살이 바닥으로부터 튀어나와 사방을 감쌌다. 빛 한 점 없는 밀실에서 보이는 건 오로지 서로뿐.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그가 “내 말이 맞지? 밤이야, 힐다.”라며 혀를 감았다.

“모처럼 가뒀는데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해 줘. 응?”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원피스가 바닥에 떨어지고, 얇은 속옷 너머로 뜨겁게 달궈진 그의 체온을 여실히 느꼈다. 맨살에 비벼지는 가슴이 아릿하게 달아올랐다.

“예뻐하고 귀여워하고. 아니, 실은 내가 널 귀여워해 주고 싶어.”

감금부터 잠깐 훔쳐본 것까지 모든 게 큰 자극이었는지 손길이 다소 급했다. 속옷 위를 간질이다가 볼록한 지점에 이르러서는 살짝 힘주어 자극했다. 둥글게 문지르자 온몸이 화끈거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겨우 신음을 삼키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아드리안의 손가락에 걸려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천이 맨살에 쓸리는 감각만으로도 다리가 달달 떨렸다.

“그냥…… 빨리.”

아드리안이 내 한쪽 다리를 팔에 걸듯이 들어 올렸다. 자세는 창피했으나 그의 것이 얇은 틈을 따라 살살 문지르기 시작하자 머릿속이 일시에 비어 버렸다.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어디가 가려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것을 비비고 있는 바깥, 아니면 안쪽……. 어느 쪽이든 빨리 들어와 줬으면 했다.

참다 못한 내가 허리를 내리자 끄트머리가 살짝 들어왔다 나갔다. 그의 체온이 갑자기 훅 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 힐다.”

탁한 숨소리가 귀를 긁었다. 가쁘게 숨을 내쉰 동시에 그가 아래에서부터 밀고 들어왔다. 그의 것이 한 번에 들어오는 게 무리라는 건 서로 잘 알고 있었기에, 열기가 반쯤 채워졌을 때 한 호흡 느리게 내쉬었다. 뜨겁고 습한 숨소리가 섞였다.

아드리안은 아직 땅에 닿아 있는 나머지 다리까지 받쳐 올려 허리에 감게 했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이번엔 가슴을 집요하게 빨고 혀로 비볐다. 내가 늘 처음을 버거워하는 만큼 그는 애무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반만 걸쳐져 있던 그의 것이 뒤로 빠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흠뻑 젖은 속살을 매끄럽게 가르고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반만 들어왔는데도 버거운 부피감으로 아랫배가 꽉 들어찼다.

끙끙거리며 어깨에 이마를 박자 그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낮에는 내가 늘 아드리안에게 잘한다며 칭찬해 주는 쪽인데 밤만 되면 왜 뒤바뀌는지 모르겠다.

“아…… 아드리안, 그렇게…….”

느릿하게 올려치는 움직임에 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얕게 들어왔다 나가다가도 가끔 더 깊숙이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내가 약한 부분 또한 솜씨 좋게 문질러 대서 아픔마저 쾌락이 되었다.

처음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압박감이 서서히 풀어졌다. 얕은 물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부터 왠지 모르게 나른해져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가 뜨겁고 미끈하게 문지르고 나갈 때마다 열 오른 숨이 터져나왔다.

“힐다, 얼굴을 보여 줄래?”

자꾸만 제 어깨에 기대서 늘어지려는 나를 그가 불러일으켰다. 그가 다시 가슴을 깨물며 입 안에 머금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담스럽기만 했던 압박감과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고 어느새 쾌락만이 남았다.

얕디얕은 흔들림은 안쪽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면서 긴장을 풀었을 뿐만 아니라, 식지 않은 열기로 차근차근 몸을 데워 나갔다. 가슴이 깨물리자 허리가 저릿해지며 더운 숨이 나왔다. 분명 이전에 몇 번이나 겪어 봤던 애무인데도 느낌이 달랐다.

고통과 가벼운 황홀함. 그 사이 어디쯤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고양감.

나는 이게 다 아드리안이 부린 술수라고 생각했다. 사람한테 최면을 걸 수 있다며. 그럼 어떤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쯤이야 간단하지 않을까.

“금세 딱딱해졌네, 귀엽기도 하지.”

“그런 말 좀…….”

머리가 완전히 이상해질 것 같다. 그가 가슴을 물고 사탕처럼 입 안에서 굴리는 순간, 아랫배를 확 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이러다간 미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달달 떨며 허리를 비틀었으나 아드리안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오히려 내가 몸부림칠수록 그를 더 흥분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온몸이 빨개졌네. 가슴은 또 얼마나 빨리 뛰고. 부끄러워?”

“…….”

“도망가지 말고 계속 안에 있게 해 줘. 네가 너무 따뜻해서, 너 없는 나는 얼음 호수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일 거야. 그러니까 날 봐 줘, 응?”

가슴을 문 채 웃는다. 얕은 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작게 찰랑거리는 소리가 귀를 적셨다. 누구의 것이랄 것 없이 체액이 끈적하게 섞이면서 서로의 흥분을 여실히 느껴 갔다.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아드리안에게, 모조리.

“아, 드리안…….”

“표정이 야해, 힐다.”

“…….”

“느끼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온종일 느끼게만 하고 싶어져서 어쩌지.”

아드리안은 내 눈 깜박임 한 번, 작은 신음이나 기척 하나하나 세세하게 주시하며 움직임을 조절해 나갔다.

신음이 터지는 입술을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왈칵 물었다. 입 안에 맴도는 신음과 숨결까지 모조리 삼키면서 아래로는 쿡쿡 쑤셔 올렸다. 한참 입 안을 탐닉하다가 겨우 떨어져서 볼을 깨물고, 그대로 내려가서 어깨. 이로 살짝 긁은 자리엔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안고 있는 게 제일 좋다면서.”

“하…….”

“왜 이걸 더 좋아하는 것 같을까.”

얕게, 깊게, 다시 더 깊게.

은근히 파고들어 휘젓는 열기에 나는 뜨겁게 앓았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는 찬찬히, 착실하게 무언가 쌓여 갔다. 한계까지 차올라 찰랑거렸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워 견딜 수 없었다. 가쁘게 헐떡거리며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파고드는 감촉에 익숙해지기 무섭게 새로운 자극이 날뛰어 대서 가만히 받아들이고 느끼기에도 바빴다.

그러다 문득, 나를 배려하느라 아드리안이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힘을 잔뜩 주어 치뜨고 아드리안을 바라본 순간.

“…….”

눈이 확 찔리는 줄 알았다.

늘 가지런하고 보기 좋은 모양으로 정렬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허물어져, 민낯이 드러나 있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해 빨개진 귀라든지, 살짝 주름진 미간, 나도 모르게 자극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입술이라든지…… 애정으로 반짝거리는 눈까지. 아드리안의 전부가 숨 막히게 날 유혹하고 있었다.

어둠을 머금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은 마치 별과 같았다. 나는 다소 충동적으로 고개를 내려, 사르르 접힌 눈꼬리에 키스했다. 살짝 빨아들이는데 단맛이 났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그를 조이고 말았는데, 어깨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하…….”

살짝 쉬어 버린 듯한 한숨. 아찔했다.

흥분을 견디는 모습에 이상하게 입이 말랐다. 불빛 속에 완벽하게 조형된 남자는 근사했고 그게 아드리안이었으므로. 바라보다가 오히려 매혹당해, 무모하게도 한 번 더 자극하고 말았다.

아드리안은 전에 본 일 없는 다급함으로 내 가슴을 물었다. 달콤한 맛이라도 나는 것처럼 빨아 당겨서 살덩이가 형편없이 뭉그러졌다. 그를 부르려던 찰나 단숨에 열기에 꿰뚫렸다.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존재감에 헉하고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젖혔다. 아드리안이 머리를 받쳐 주었지만 쳐올리는 힘에 어쩔 수 없이 계속 떠밀렸다. 귀까지 적시는 축축한 소리에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그를 잡고 매달렸다. 서로가 흘린 흥분의 증거로 흠뻑 젖어 그만 미끄러질 것 같았다.

“아, 아드리안…….”

“응. 나, 여기 있어.”

“너무 뜨거워서 이상…… 해질 것 같아…….”

“같이 이상해지는 거야, 힐다.”

터질 듯 부풀었다. 펄펄 끓는 듯한 뜨거움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서로의 자극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열 오른 신음이 되어 흐물흐물 녹은 혀 위로 미끄러졌다.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고, 다시 파고들고, 이번에는 애달프게 깊이.

거친 숨이 쏟아졌다. 한 번에 치고 빠지는 아드리안의 것에 내 속살이 딸려 나가는 듯했다. 위아래로 흔드는 감각이 노골적이라,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혀는 오히려 간지럽기만 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쏟아지는 달콤한 애정.

“하아,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어딜 만져 주면 좋을지 말해 봐.”

제 전부를 바치듯 밀어 넣으면서 그가 간절히 물었다.

“아, 힐다. 너는 정말로……. 느끼는 얼굴이 이렇게 예뻐서 어쩌지. 날 이렇게까지 애타게 만들면 어찌해. 나 좀 봐 줄래, 제발.”

“…….”

“내 앞에서만 이렇게 예뻐야 해. 늘 예쁘지 말고, 응?”

열기를 견디지 못해 바르르 떨고 있는 내게 아드리안이 험악함을 애써 가린 채 말했다. 네 눈엔 내가 뭐가 그렇게 예쁘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혀가 여전히 흐물거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급한 대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제야 입가가 둥글어졌다.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가득 차서.

“으응, 기뻐.”

눈물이 고인 눈꼬리를 핥으러 올라와서 더 깊은 곳이 쿡 찔렸다.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탄식을 그가 맛있게 빨아들였다. 아마 의도한 거겠지.

“네 안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영영 파묻혀 있고 싶어, 이렇게…….”

이미 더 깊어질 수 없는 곳까지 찔렸는데도, 간지럽고 허전해서 참을 수 없었다. 나야말로 이보다 더 그로 들어찼으면 좋겠다. 끝까지 꿰뚫려 그의 열기로, 체취로 가득해지고 싶었다. 어디든 좋으니 이 사랑스러운 사람과 영원히 연결돼있기를 바랐다.

기분 좋으니까, 더……. 목을 꽉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이자 올려치는 속도가 빨라졌다. 조금의 절제 없이 거칠게 파고드는 대로 흔들렸다. 아랫배를 적시듯 뜨거운 무언가가 퍼졌다. 눈앞이 하얘지는 걸 느끼며 나는 고개를 젖혔다.

다음 날 아침 먼저 눈을 뜬 건 나였다. 무겁게 감기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고풍스러운 패브릭 벽지가 시야에 들어찼다.

여기는 글로스터 성. 평소라면 하인들이 분주하게 복도를 오가는 기척이 들렸을 텐데, 지금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옆에서 잠든 아드리안의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흐음……. 나는 나른한 한숨을 쉬며 아드리안의 품을 파고들었다. 옷자락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라 추울 법한데도 그에게 안겨 있으니 난로를 옆에 둔 것처럼 따뜻했다. 어제 그런 난리를 피웠는데 몸이 깨끗한 걸 보면 아드리안이 뒷정리를 해 준 모양이었다.

관계 후에 자고 일어나면 항상 몸이 깨끗해서, 잠들기 전 마법을 이용해 씻겨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사랑을 나누고 먼저 잠든 나를 수건으로 직접 닦아 주는 걸 즐겼다. 그러다 보니 울혈이 몇 개쯤 더 생기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소중히 다뤄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베개에 흩어진 금색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건드리다가 만지고 있는데, 잠자코 있던 아드리안이 허리를 안아 바싹 끌어당겼다. 사실 나는 보송보송한 맨살을 비빌 때를 가장 좋아했다.

예민한 그가 이토록 무방비하게 자게 되기까지, 자다 깨어나서 가지 말라고 울지 않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지. 안정을 찾은 덕에 예전처럼 감금하려 들거나 피를 먹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위험한 취향이 때때로 드러나는 거로 봐서 타고난 성격이 그런 듯했다.

“잘 잤어요?”

“으응.”

반쯤 잠긴 목소리로 칭얼대듯 대답한 그가 고개를 내려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뺨과 목을 지분거리는 입술은 간밤의 열기를 되새겨 주다가 빗장뼈를 따라 내려가 곡선을 타고 올랐다.

쪽쪽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점을 몇 번 빨아 당긴 그는, 입 안에 살덩이를 가득 물고 혀로 희롱하기 시작했다. 아무 사심 없이 그에게 안겨 있던 때와 달리 순식간에 더워져 땀이 뱄다. 저절로 힘이 들어간 다리로 발버둥 치는 바람에 침대 시트에 주름이 잔뜩 그였다.

“아드리안, 저 힘들…… 어요.”

“잠시만 더 허락해 주면 안 될까, 힐다. 오랫동안 네게 굶주려서 자제가 안 돼.”

“으응…….”

힘들다고 했더니 다른 한쪽 가슴을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직 열기가 다 식지 않은 몸 곳곳이 쾌락을 원하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가슴을 머금고 부드럽게 핥기만 하던 혀가, 돌연 세차게 빨아당겼을 땐 눈물이 글썽거리며 맺혔다. 몸이 예민해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일어날 때부터 존재감이 확실하던 그의 것은 다리 사이에서 이미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그간 얼마나 참아 왔는지는 알고 있다. 후작가의 양녀 타이틀을 따내면서까지 결혼을 추진한 건 날 무직으로 만들어 언제 어느 때고 붙어 있기 위해서였는데, 하인일 때보다 백작 부인이 된 뒤 더 못 보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게 허덕이고 갈증을 느끼던 와중 자기 취향에 맞는 감금 여행을 선물 받았으니, 한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이래서야 여행 내내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생겼다. 물론 사랑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이번 여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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