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33)

나의 게임 세계는 이윽고, 그 후.

띠로롱! 띠로롱!

아오, 이놈의 시스템이 또. 나는 아침을 뒤흔드는 요란한 알람 소리를 피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결혼식 참석자 목록을 훑느라 밤새는 바람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10분만 더, 아니, 5분만. 오늘도 아침부터 해야 할 일이 연이어 떠올랐으나 애써 외면하고 꿍얼거렸다.

띠로롱! 띠로로롱!

딱 5분만 더 자겠다는데도 이놈의 인정머리 없는 시스템은 더 큰 알람 소리로 이불 속을 후벼 팠다. 손으로 귀를 막았음에도 뚫고 들어오는 소리에, 참다못해 몸을 휙 일으켰다. 아침 해 뜨는 거 보고 침대에 누웠는데 5분만 더 자게 해 주지, 피도 눈물도 없는 시스템 같으니!

“……어, 시스템이 아니었네.”

원래대로라면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떠 있어야 할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낯설 만큼 깨끗한 시야 속에 보이는 건 오로지 협탁 위에서 따르릉거리며 울리는 시계뿐. 요즘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늦잠 자는 일이 많아 아드리안더러 만들어 달라고 한 알람 시계였다.

참. 게임 시스템은 아드리안이 닫아 줬었지. 난 또, 알림음이 비슷해서 시스템이 괴롭히는 건 줄 알았다.

나는 조금 멋쩍어져서 이마를 긁적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드리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방을 나섰는지 어제 벗어 놨던 옷만이 의자에 걸쳐진 채 허물처럼 남아 있었다. 그 또한 결혼식 준비로 나만큼이나 바빠서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결혼 후에는 여유가 생기겠지. 서로 이렇게 바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애써 착잡한 마음을 누르며 아드리안의 옷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놓았다.

오늘은 결혼식을 나흘 앞둔 날. 아드리안이 시스템을 닫아 준 지 사흘이 지난 날이기도 했다. 버튼과 글씨로 가득한 시야뿐만 아니라 행동을 제약했던 여러 제어와 구속에서 벗어난 덕분에, 그 후로 나는 원래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적응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게임 시스템에 인생을 점령당했던 만큼, 생활하면서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시스템이 떠오르곤 했다. 바로 방금처럼. 그사이 미운 정이라도 든 건가.

“어머, 힐다. 벌써 일어난 거…… 야?”

나를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던 에밀리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무심코 반말로 물으려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추는 모습이, 그녀도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진 않은 모양이다.

일어나긴 했지. 일어나긴 했는데…… 졸려 죽겠다. 내 체력을 게이지바로 볼 수 있었으면 반피도 안 될걸. 오늘도 할 일이 태산인데 어쩐다.

내가 무거운 눈을 끔벅이고 있자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피곤해서 어쩌니. 어제도 늦게 잤는데. 이거 마셔 볼래? 일어나서 마시라고 갖다 둔 뒤 나가려 했어.”

“응……. 이게 뭐야?”

“레몬차. 요새 피곤해 보여서 꿀 듬뿍 넣어서 만들어 봤어.”

뭐라도 몸에 좋은 걸 쑤셔 넣어 줘야 할 것 같아 단숨에 홀짝 마셨더니 상큼한 레몬향에 머리가 뻥 뚫렸다. 캬, 역시 피로엔 비타민C지. 여기에 체력 물약까지 먹으면 딱인데.

“고마워. 한결 나아진 것 같아.”

“마침 깨어났으니 하는 말인데. 힐다, 지금 밑에 다아시 부인이 와 있어.”

다아시 부인이라면 웨딩드레스 맞추러 왔던 그 호들갑스러운 사람 아닌가.

“그 사람이 왜 또? 웨딩드레스 벌써 나와서 받았잖아. 방 하나를 혼자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데. 대금 지급이 아직인가?”

“아니, 드레스 받는 날 대금 지급은 완료됐는데, 앞으로의 유행을 선도할 드레스가 새로 들어왔다고, 직접 보여 주고 싶어서 온 거래. 오늘 못 만날 테니 돌아가시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는데, 왜 못 만나느냐고 계속 따져 대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눌러앉는 바람에 마침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뭐야, 평범한 진상이잖아. 다짜고짜 찾아온 것도 모자라 눌러앉기까지. 에밀리가 상대하느라 꽤 지친 모양이다. 나한테까지 와서 말하는 거 보면…….

“근데 결혼식이 겨우 나흘 남았는데 새로운 드레스라니. 유행은 핑계고 그냥 둘 다 팔아먹으려고 수 쓰는 거 아냐?”

“아마 그렇겠지? 겸사겸사 너한테 잘 보이려고도 하는 것 같고. 팔츠그라프 가의 새로운 안주인께 얼굴도장 찍어 놔서 나쁠 거 없으니까.”

“아으…… 피곤한데.”

퀭해진 채 주섬주섬 실내복을 주워 입자 에밀리가 냉큼 와서 도와주었다.

“역시 무리겠지? 다시 가서 돌아가라고 말해 볼까?”

“아냐. 그 사람 나 만나기 전까지 절대 돌아갈 생각 없어 보이는데. 너한테 무례하게 행동하는 걸 보느니 내가 가서 몇 마디만 나누고 오지 뭐.”

내가 또다시 기나긴 하품을 쉬자 에밀리가 걱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안타까워했다.

으아아, 결혼식만 끝나면 한동안 푹 쉬어야지. 안 그래도 이곳 결혼 절차와 준비가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한국의 스드메 저리 가라던데, 느닷없이 재봉사까지 끼어들다니.

정말이지 귀족의 결혼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에밀리나 델로레스 등 하인들의 손까지 동원해 비교적 빠르게 처리해 나가고 있는데도, 초청장 보낼 하객을 골라내거나 그들을 접대할 음식 메뉴 고르는 일 등은 내가 한 번쯤 들여다봐야 해서 그것만으로 며칠을 홀랑 까먹었다. 오늘은 양부모님네 손님들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 세계엔 왜 스몰 웨딩이 없는지 모르겠다. 난 이렇게 크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도 되는데.

“어머나, 마님! 오랜만에 뵈니 더욱 자태가 아름다워지셨군요! 몰라뵐 뻔했습니다!”

다아시 부인이 있다는 방에 들어가자 그녀가 내게 쪼르르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누가 봐도 피곤에 절어서 퀭해졌는데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니. 귀족들의 선호도 1위 디자이너이자 재봉사인 이유에는 립서비스도 포함이었나 보다. 나는 아직 마님이 아니라고 하려다가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아 본론으로 넘어갔다.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드레스는 이미 완성해서 받은 거로 알고 있는데.”

“아유, 드레스 정하는 데에 어디 끝이 있나요. 더 예쁜 드레스가 생기면 식 올릴 땐 그걸 입고, 원래 정해 놓은 건 피로연 드레스가 되고, 피로연 드레스는 실내복으로 밀리고 하는 거지요. 세상사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기적의 논리를 펼친 다아시 부인은 애교스럽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필요 없다고 돌아가 보라고 해 봤자 대화만 길어지는 꼴이겠지. 그나저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반말 쓰는 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서 큰일이다.

“식이 나흘 전인데 새 드레스를 맞추는 게 가능한가?”

“백작 마님의 마음에만 드신다면, 저희가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지요!”

“그렇게나 자신 있다면야…… 보여 주게.”

“탁월한 선택이셔요, 마님. 어서 그 드레스를 마님께 보여 드리렴.”

내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하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조 재봉사가 바퀴 달린 마네킹을 끼릭끼릭 앞으로 끌고 왔다. 우아함에 놀라지 마시라는 다아시 부인의 말끝에 천이 확 벗겨지며 드레스의 실물이 드러났다. 어깨로부터 허리까지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박혀 있는 보석들에 눈이 부셨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와…….”

“엄청나지요, 마님? 역시 보는 눈이 높으십니다. 이 드레스로 말할 것 같으면 새로운 엘레강스 스타일을 선도할 고오급 드레스로, 원단부터 레이스까지 제 손이 거치지 않은 부분이 없답니다. 잘록하게 떨어지는 허리선과 우아하게 퍼지는 치마가 마님의 기품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줄 것으로 보이고요. 무엇보다도 이거, 보이시죠? 이 가슴선과 목선을 돋보이게 해 주는 보석 장식! 웨딩드레스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목선 아니겠어요?”

다아시 부인이 이때다 싶은지 신나게 드레스를 홍보해 대는데, 딱 봐도 원단이든 보석이든 고급 재료만을 쓴 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감탄한 건 완전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저 드레스, 얼마나 대단한 옵션이 붙었으면 저렇게 번쩍거릴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회피 옵션인데, 그게 웨딩드레스에 붙어 있는 건 이상하긴 하지. 딱 봐도 0강은 아닌 것 같은데. 태생 몇 강짜리일까? 웨딩드레스도 강화할 수 있나? 같은 급의 웨딩드레스를 몇 벌 사다가 강화하면 내 옷장 드레스들처럼 신화적인 금빛과 고대적인 무지개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겠지. 저렇게 비싸 보이는 드레스는 어떤 옵션을 타고났을지 궁금하다. 행운? 회피? 체력? 아니면 뭘까. 어쩌면 옵션이 두세 개씩 붙어 있을 수도 있어. 저건 좀 탐나는데…….

“어떠세요, 마님? 마음에만 드신다면 돌아가자마자 곧장 재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다아시 부인의 열정적인 목소리에 깜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저 드레스에 어떤 옵션이 붙었든 아무 상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 이제 게임에서 버프도 못 받잖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드레스는 예쁘긴 하지만, 이미 완성해 둔 드레스가 더 마음에 들거든. 그 드레스도 자네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었지 않아.”

“그래도……. 마님, 좀 더 자세히 보시지 그러세요. 한번 입어 보셔도 괜찮은데. 마음에 드시는 것 같더니.”

“자네가 갖고 온 물건인데 마음에 드는 건 당연하지. 하지만 저 드레스에게는 더 좋은 주인이 있을 듯하니 그분을 위해 양보하겠어. 그럼 조심히 돌아가게.”

어떻게든 팔아 보려는 다아시 부인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에밀리는 잽싸게 다가와 마음에 들면 사지 그러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거절했다. 내가 감탄했던 건 드레스가 대단한 버프 효과를 가지게 생겨서지, 다른 이유는 아니었으니까.

“힐다, 식사 먼저 준비해 놓으라고 할까?”

“응, 부탁해. 잠 깰 겸 정원 한 바퀴 돌고 식사하는 게 낫겠어.”

“알겠어. 참, 오늘 백작님께서 너랑 식사 못 한 지 너무 오래됐다고 속상해하셨다던데. 저녁에 말이라도 건네 봐. 백작님 그러다 병나시겠더라.”

에밀리가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하곤, 아래층에 이르자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식사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에밀리가 하인들 머리 꼭대기에 군림하는 실세인 만큼, 저택 구석구석의 모든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고 그중 쓸 만한 소식을 걸러서 전해 주곤 했다. 특히 아드리안에 관한 소식은 빠짐없이 내게 전달했다. 내 친구는 참 유능하기도 하지.

“마, 마님! 마님!”

1층 층계참까지 내려가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날 불렀다. 오늘 날 찾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마님, 도와주세요. 한스…… 우리 한스가.”

엇, 에이브릴이잖아.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들었다. 마주친 김에 축하 인사나 건네야겠다 싶었는데 어째 얼굴이 눈물범벅이다. 무슨 일이지? 임산부는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한스가 왜?”

“한스가…… 없어졌어요. 오늘 아침부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요!”

예전에 아드리안에게 요청한 대로 에이브릴과 카지미어는 자선의료원을 개조해 놓은 작은 별장에서 아이들과 지내고 있었다. 말랑말랑 조랭이떡 같은 아이들은 총 여섯 명으로, 한스는 그중에서 둘째였다.

어린 나이에 첫째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서,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나를 혼자 따로 찾아온 적도 있다. 이런 좋은 곳에서 살게 해 줘 고맙다고, 언젠가 카지미어와 에이브릴에게 좋은 집을 사 주려 모아 놓았다며 10골드를 건네주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한스가 사라졌다고?

“어딜 갔다고 말한 적도 없는 거야? 외출한 건 아니고?”

“모르겠어요. 아무도…… 한스가 어디 갔는지 몰라요. 놀러 나갔다가 길을 잃은 건지, 아니면 설마 누가 납치라도 해 간 건지…… 흐흑,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 우리 한스. 밤늦을 때까지 못 찾으면 어쩌죠. 어두워서 돌아오는 길을 못 찾으면, 이러다 영영 못 찾으면……. 도와주세요, 마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랑 카지미어만으로는 역부족이에요. 나중에 어떻게든 값을 치를 테니 도와주세요, 제발…….”

“진정해, 에이브릴. 울지 말고, 나쁜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사람을 풀어서라도 찾아 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감사…….”

도와주지 말라고 해도 도울 참이었다.

오열하며 비틀거리는 에이브릴을 에밀리에게 맡겨 두고 나는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요새 집사 됐다고 꽤 점잔 빼고 있던 카지미어가 노숙자 같은 꼴로 입구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한스를 찾으러 나서려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입술을 덜덜 떨었다.

“히, 힐다.”

맛이 갔네, 갔어.

“방금 에이브릴한테 듣고 왔어. 한스가 갔을 만한 곳은? 짐작 가는 데 없어?”

“어, 얼마 전에 마을에 놀러 가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가지 말라고…….”

“그것뿐이야? 다른 일은 없었어? 친구랑 다퉜다거나.”

“어, 없었어. 한스는 좀처럼 다른 애들이랑 싸우질 않으니까. 우리 한스는 마음도 넓고 착하거든…….”

흔들리는 목소리는 점점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어, 저러다 울겠네.

“그런 한스가 어, 없어졌, 흐, 흐흑…….”

어, 바로 우네. 평소라면 등 좀 두드려 주면서 위로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저렇게 우왕좌왕하며 혼자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할지 지시 내려 주는 게 최고지.

“카지미어, 넌 나랑 같이 정원을 찾아 보자. 저택 앞부터 마을까지 수색할 사람들을 보낼 테니까, 진정하고.”

“흐흑, 한스야…….”

“카지미어! 너 지금 정신 안 차리면 영영 한스 못 찾아. 알아들어? 울음 그치고 정신 바짝 차리라고! 네가 한스 보호자잖아!”

“아, 알았어…….”

“좋아. 너랑 나는 정원부터 뒤지는 거야. 알아들어? 한 구역을 다 돌고 나면 다시 여기서 만나는 거야.”

“으, 으응. 알겠어…….”

나는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지 못하는 카지미어를 먼저 정원으로 보내 놓고 사용인들을 불러 마을을 수색하도록 했다. 사람 찾을 땐 아이템이나 발자국 추적 스킬을 쓰면 금방 쫓아갈 수 있을 텐데. 행운 원피스 버프라도 있으면 이렇게 안 돌아다녀도 운 좋게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아, 하아……. 어디 있는 거지.”

한참 정원을 돌아다니다 말고 내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나와 카지미어만으로 이 커다란 정원 수색이 될까. 하지만 며칠 전 나가고 싶어 했던 마을에 있을 가능성이 크니, 저택 안은 둘이서 대강 훑고 마을에 같이 나가 보는 쪽이 맞겠지.

“한스는? 찾았어?”

“아니, 이쪽은 없어.”

“그럼 내가 저쪽을 찾아 볼게. 너는 반대쪽으로 가 봐.”

그가 나온 길로부터 사선으로 뻗어 나가는 길을 가리키자 카지미어가 그쪽으로 금세 내달렸다. “한스, 한스! 어디 있니! 대답 좀 해다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며 눈물을 흩뿌리는 모습이 짠하기까지 하다. 나도 이럴 때가 아니지. 카지미어가 간 반대쪽으로 돌아서 정원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무 근처, 산책로 곳곳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 온실까지 싹 훑었는데도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한스…….”

열심히 모은 건데 10골드밖에 못 드려 죄송하다고, 나중에 커서 더 많이 모아 나머지를 드리겠다고 열심히 설명하던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진짜 납치나 인신매매면…… 그때야말로 게임 시스템을 풀어서 20강 고대 회피 원피스의 매운맛을 보여 줄 때였다.

“너 같은 어린애가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럼 어쩌란 거야, 이제 카지미어는 내가 필요 없는데.”

한참 정원을 돌아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마을로 가 봐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저 멀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 작지만, 분명 어린애들 목소리였다.

이쪽인가?

나는 살금살금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예전이었으면 누군가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느냐고 이름과 함께 알림이 떠서 알아차렸을 테지만, 그런 기능이 없는 지금으로선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니지. 네 동생이 생기는 건데?”

“걔는…… 걔는 우리랑 달라. 걔는 우리처럼 고아에 짐 덩이도 아니고, 카지미어랑 에이브릴의 진짜 아이인걸.”

조금씩 가까워지자 한스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안도의 한숨이 몰아서 터지는데 소리를 낼 순 없어 속으로만 쉬었다. 하, 다행이다. 여기 있었네. 얼마나 놀랐던지 뒤늦게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잘 달래서 카지미어에게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친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진짜 아이? 그럼 넌 가짜 아이라는 거야?”

“나, 나는 고아니까. 진짜가 아니니까.”

“흐음.”

“왜…… 나는 카지미어의 아이가 아닌 걸까? 어차피 버려져서 카지미어랑 살 거였으면, 둘의 아이가 되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행복하게 웃게 해 줄 수 있을 텐데…….”

“…….”

“처음 본 것 같아.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

나무 기둥 뒤, 웅크려 있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나뭇잎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장총이 보였다. 우리 천재 살인청부업자께선 자주 우리 저택에 놀러 왔는데,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보단 저렇듯 정원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아드리안이 나타나면 사라지곤 했다. 어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했는데 의외로 로지가 대화 상대가 되어 주고 있었네.

“카지미어는…… 이제 우린 안중에도 없어. 에이브릴한테도 마찬가지야. 우린 이제 방해꾼일 뿐이야…….”

“요컨대 너는 그 아이가 미운 거구나. 둘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너희를 밀어 버리는 게 무서운 거야. 그게 싫으면 답은 간단해. 아기가 태어나면 몰래 죽여.”

“뭐, 뭐? 죽이라고?”

내내 웅크린 채 훌쩍거리고 있던 한스가 고개를 홱 들었다. 손으로 총알 굴리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응. 아기만 없어지면 끝나는 문제잖아? 죽이는 법은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상대가 약하고 무방비할 테니 어렵지도 않을 거야.”

“주, 죽이는 건 안 돼. 카지미어랑 에이브릴이 슬퍼할 거야.”

“슬퍼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않아? 방금 그 개…… 카지미어가 울면서 뛰어가는 걸 봤잖아. 넌 모르는 척 숨었고.”

“그…… 그래도 슬프게 하는 건 안 돼. 그건 안 돼.”

“하지만 지금 그들을 슬프게 하는 건 너인걸. 모르겠어?”

“그……건.”

“한스.”

내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작은 그림자가 움칠했다.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바라보자 로지의 눈이 대번에 별사탕처럼 반짝거렸다. 홀로 있는 한스에게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못 찾았을 수도 있었기에 난 눈으로나마 고마움의 인사를 건넸고, 로지는 기분 좋은 듯 까르르 웃었다.

“왜 여기 숨어 있었던 거야. 한참 찾았잖아.”

“마…… 님.”

몸을 일으킨 한스가 나를 보더니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원을 뛰어다니느라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자. 에이브릴이 무척 걱정하고 있어. 널 못 찾으면 어쩌냐고, 찾아 달라고 울먹거리더라.”

“…….”

“카지미어도. 카지미어는 많이 울었어.”

“…….”

“네가 어떤 마음인진 알겠지만, 두 사람이 그렇지 않은 거 이미 잘 알고 있잖아. 돌아가지 않으면 카지미어와 에이브릴은 슬퍼서 잠도 못 잘걸.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고, 어쩌면 다시는 웃지 않게 될 수도 있지. 정말 그러길 바라는 거야?”

“아녜요! 그런 건 절대로!”

두 사람이 슬퍼한다는 소리에 한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역시, 두 사람이 미워서 가출한 건 아니었어. 그냥 작은 소외감을 느꼈던 거구나. 나는 속으로 크게 안심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럼 이만 돌아가자.”

“돌아가면…… 화내지 않을까요?”

“글쎄,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기뻐할 거야. 너는 카지미어와 에이브릴의 둘째잖아.”

“…….”

“새로 태어난 막내가 둘째 형이나 오빠가 없어졌다고 들으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을 그렇게 걱정시켜서야 되겠어? 응?”

생긋 웃으며 말해 줬더니 한스가 머뭇거리다가 손을 맞잡았다. 음, 이렇게 큰일을 해 주었으니 카지미어에게 당분간 생색 좀 내야겠다.

그나저나 에이브릴이 아기 가진 걸 얼마나 기뻐했으면 애가 가출까지 하냐. 물론 고아원의 여섯 명의 아이들을 진짜 자식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했던 거겠지만. 한스가 말한 대로 가짜라고 생각했으면 진짜 자식 생겼다고 기뻐하지도 못하지.

“그런데요…… 아까 저 위에 있던 여자애 말인데요.”

한스가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자기가 숨어 있던 나무를 쳐다봤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그냥 가 버렸네요. 혹시 이름이 뭔지 아세요?”

“응? 아, 걔 이름은 로지야. 가끔 저택에 놀러 오곤 해.”

“로지……. 예쁜 이름이네요.”

한스가 작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 혔다? 이런 뜻밖의 로맨스 기류가?

“오……. 너, 로지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예? 아, 아뇨. 그런, 그런 거 아녜요. 그, 그냥. 걔가 아니었으면 전 제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을 거예요. 실은 애가 없어지길 바란 게 아니라, 제가 카지미어랑 에이브릴에게 그만한 기쁨이 되지 못해서 슬펐던 거거든요. 죽이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극단적으로 말해 주지 않았으면 끝까지 깨닫지 못했을 거예요.”

뭐…… 로지는 조언이라기보다 진심이었던 것 같지만. 남에게는 좀처럼 관심 없는 아이가 말까지 걸어 준 걸 보면, 나무 위에서 쉬고 있다 웬 남자애가 훌쩍거려서 시끄러웠던 거 같고. 겁을 줘서 쫓아 버리려던 속셈인 듯했지만, 의외의 충격 요법이었나 보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텅 빈 나무를 올려다보는 한스는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갰다. 이것 참. 봄이군, 봄이야. 나랑 아드리안도 저렇게 수줍게 얼굴 붉힐 때가 있었지.

“응, 아마도. 정원에 가끔 놀러 오니까 나무 위를 잘 찾아봐.”

“왜 나무 위에 있을까요. 떨어지면 위험할 텐데…….”

어, 이거 생각보다 더 진심인 것 같은데. 물론 로지가 귀엽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그만큼 험난한 길이 될 텐데. 보통 악명으로는 말 붙이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걸 카지미어가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 텐데. 카지미어와 로지는 아직도 가끔 마주치면 총질하고 주먹질하며 다툰단 말이지. 남의 집 정원에서 싸울 거면 둘 다 내쫓을 거라고 중재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둘 중 하나는 일찌감치 죽었을 거다. 음…… 어느 쪽이 이길지 궁금하긴 하군.

“한스!”

한스와 같이 저택으로 가자 입구에서 에밀리의 부축을 받고 있던 에이브릴이 울며 뛰쳐나왔다. 혼날까 봐 내 뒤에 숨으려 하는 한스를 꼭 안고는, 눈물을 펑펑 흘려 댔다. 뒤늦게 합류한 카지미어는 포효하듯 한스를 우렁차게 부르더니 셋이 안은 채 엉엉 울었다. 멋모르던 나머지 다섯 아이도 쫓아와 다리를 부둥켜안고 운다. 정말 조랭이떡 같은 가족이라니까.

“에밀리, 미안한데 마을로 간 사용인들 도로 철수하라고 사람 좀 보내 줄래?”

“응,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서 쉬어, 힐다.”

오해는 저들끼리 이야기해서 잘 풀 테니 내가 끼어 있을 필요는 더 없겠지. 애가 갑자기 사라졌다기에 악마 숭배자나 인신매매범에게 잡혀간 건 아닌지 마음 졸였는데, 별것 아닌 해프닝으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아이라…….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가. 에이브릴의 살짝 나온 배를 보고 한스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 나와 아드리안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여전히 시스템이 있었다면, 내가 언젠가 아이 낳을 땐 「아기를 낳고 있습니다. 마저 낳으시겠습니까?」 같은 알림창을 띄워 댔을 텐데. 열심히 힘주다가도 그런 알림을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주르륵 빠질 것 같다.

그러다 지금 장난하냐고 분노에 차서 오기로 순산하지 않을까. 아드리안은 옆에서 왜 그러냐고 당황할 테고, 나는 힘찬 기합 넣으며 애 낳고……. 그 상황을 상상해 보자 계단을 올라가던 중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어서 와. 오늘 많이 피곤해 보이네.”

낮의 소동으로 미뤄진 일을 모조리 해치우고 침실로 돌아온 건 늦은 밤이었다. 촛불 하나 켜 놓은 채 책장을 넘기고 있던 아드리안이 얼른 책을 덮으며 날 맞이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실비실 걸어가 침대 위로 폭 쓰러졌다. 금세 다가온 그의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청량감이 훑고 지나가면서 산뜻해졌다. 마침 씻으러 갈 기운도 없었는데. 마법 쓸 줄 아는 남편 만세.

“얼마나 피곤했기에 오자마자 쓰러져, 힐다. 무리하지 말래도.”

“으응, 그러게요. 오늘…… 유난히 일이 많았는데…… 아, 말할 힘도 없네. 팔베개나 해 줘요.”

혀에 힘이 풀려서 웅얼거리는데도 귀신같이 알아들은 아드리안은 오른팔을 쭉 뻗어서 머리를 괴어 주었다. 적당한 높이에 탄탄함, 따뜻한 온기와 그윽한 살내까지. 역시 신화 베개보다 아드리안 팔베개가 훨씬 좋다니까!

편하다, 편해. 게임 시스템이 살아 있을 때는 「베개가 아니라서 잠들 수 없습니다.」라는 방해 때문에 팔베개도 못 베고 잤었는데. 게임 시스템을 잠근 날 돌아와 아드리안에게 가장 먼저 해 달라고 한 게 팔베개인 걸 생각하면, 베개로 느껴온 서러움은 새벽 내내 말해도 부족할 거다.

전설 베개를 벴을 때의 전설적인 혈액순환을 맛보지 못하게 된 건 아쉬웠지만, 더 이상 베개에 집착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아드리안이 계속 팔베개를 해 준다는데 계속 거부당한 데다, 내가 베개만 베면 자 버리니까 섭섭해하는 눈치기도 했고. 참다 못한 아드리안이 내 베개를 숨겨 놓기도 했는데, 그때 최초로 부부 싸움할 뻔했지. 지금 돌이켜보면 전부 추억이다.

“있죠, 그 시스템 말인데요. 아드리안.”

“응. 말해 봐.”

잠에 취한 채 웅얼거려서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을 텐데도 아드리안은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코를 폭 박은 채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시스템 때문에 많이 힘들고 괴롭기도 했는데요. 오늘 생각해 보니 나쁜 짓만 한 건 아니더라고요. 의외로 이런저런 도움을 받고 있었어요.”

“응. 그랬구나.”

“네. 그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오늘은…… 순간순간 아쉬워지기도 했어요. 한스…… 를 찾는 데 시스템의 도움이 있었으면 더 편했을걸, 하면서요.”

“힐다, 네가 그렇다면 제어를 다시 풀어 주는 게 나을까?”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아드리안에게 부탁하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을 거다. 호감 대상을 추가하고, 부탁 목록을 관리하고, 부관으로 로지를 소환하고, 아이템과 버프를 마음껏 이용하던 그 시절로. 오늘과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도 훨씬 빨리 처리할 수 있겠지.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막상 없으니 아쉬운 건 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게 훨씬 좋아요. 저에 대한 것조차 수치로 환산하다 보니 더 무리하며 살아온 것 같기도 하고……. 시스템이 괜찮다고 하면 진짜 괜찮은 줄 알았으니까요. 이제야 사람으로 사는 기분이에요.”

“…….”

“이렇게 사는 게 자연스러워지면, 시스템이 있었을 때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게 되면…… 꼭 말해 주고 싶어요. 나는 너 없이도 잘 살고 있다고, 오늘도 잘 살고 앞으로는 더 잘 살 거라고요.”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말고 쉬라고.

“아드리안. 제가 행복하게 해 줄게요.”

“시스템 얘기하다가 갑자기 고백이야? 가슴 설레게.”

“으응, 끝내주게 행복하게 해 줄게요. 이게 제 청혼이에요.”

“나는 너만 있으면 늘 행복하지, 힐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살짝 넘겨 주기만 하던 그가 작게 웃으며 귓바퀴에 입을 맞추었다. 졸려서 무거운 눈을 살짝 떠 보자 곱게 미소 짓는 입술이 보였다. 예쁘게 휘어진 눈이라든지, 수줍게 발그레해진 눈가까지. 그리고 무척 오랜만에 보는 흰 글씨가 옅게 빛나며 떠 있었다.

「게임 업데이트 기능이 비활성화됩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떠오른 흰 글씨는, 왠지 외롭게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그게 아드리안이 미처 중지하지 않은, 유일하게 남은 기능임을 알았다. 스스로 마지막 기능을 닫은 게임은 그 메시지를 작별 인사처럼 남기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욕한 날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시스템이 있어서 여러 고난을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흰 글씨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자리를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네고 눈을 감았다.

그날 나는 ‘숙면’을 쓴 것처럼, 다른 날보다 더 깊고 편안한 잠에 빠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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