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33)

Epilogue 2. 나의 게임 세계는 이윽고.

「‘팔츠그라프 백작가의 살인자’를 플레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팔츠그라프 백작가의 살인자’의 세계로 직접 이동해 플레이할 수 있는 베타 테스터로 선정되었습니다.」

「베타 테스트를 진행하겠습니까? 진행하지 않으면 베타 테스트 기회는 영원히 소멸합니다.」

「베타 테스트 진행을 선택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먼저 플레이어 캐릭터를 선택하세요.

1. 아이다 마을의 상인 (근력, 골드↑)

2. 팔츠그라프 가에 드나들 수 있는 경관 (생존 아이템 다수 소지, 생존 확률↑)

3. 팔츠그라프 가의 하인 (체력↑)

4. 신의 은총을 받은 사제 (악마 대적 아이템 다수 소지, 생존 확률↑)」

「‘팔츠그라프 가의 하인’을 선택하였습니다.」

「잘못된 곳을 눌렀습니다.」

「플레이어 캐릭터 재선택은 불가합니다.」

「눈을 뜨면 당신은 ‘팔츠그라프 가의 하인’으로 게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악마 조력자’와 ‘악마 사냥꾼’ 루트가 존재하며, 당신의 선택에 따라 메인 퀘스트 종류가 달라집니다.」

「레벨이 오르면 각종 스킬과 아이템을 얻을 수 있습니다.」

「메인 퀘스트 발동 조건을 숙지하세요.」

「메인 퀘스트를 완료하면 베타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곧 게임이 시작됩니다.」

「리소스 로드 중…….」

「게임 UI 글씨 모양 고르는 중…….」

「아이다 마을의 길을 닦는 중…….」

「팔츠그라프 저택 난로에 쌓인 먼지를 터는 중…….」

「저택 지붕에 구멍이 없는지 확인 중…….」

「구경꾼들을 내쫓는 중…….」

「골드를 세는 중…….」

「골드 뜯어낼 계획을 세우는 중…….」

「아이템 가격을 책정 중…….」

「퀘스트 준비 중…….」

「게임을 즐기기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게임이 시작됩니다.」

“힐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아침 식사 중 아드리안이 갑자기 던진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에 걱정이 다분히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식사 내내 굳은 얼굴로 샐러드만 쑤시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요. 그냥 어제 악몽을 꿔서.”

“무슨 일인데 그래. 아침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더니 그 뒤부터 내내 표정이 안 좋아.”

“아녜요, 정말 별일 아녜요.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나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으나 아드리안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물어봤다.

악몽을 꾸긴 했지. 꾸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경악했고 억울해서 땅을 치기도 했는데 일어나 보니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았다. 잊어버리고 살았던 언젠가의 기억이 떠오른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꿈에서 시스템한테 또 엿 먹은 거 아냐?

“힐다, 오늘 표정이 어두운데. 무슨 일 있어?”

정말 별일 없다고 둘러대며 아드리안을 일터로 몰아냈더니 이번엔 에밀리가 와서 물었다. 에밀리까지 저렇게 말할 정도면 표정이 안 좋긴 한가 보다.

“아냐, 그냥 악몽을 좀 꿔서. 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아?”

“너무 심각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 오랜만에 빗질해 줄까?”

“응, 부탁할게.”

내가 냉큼 의자에 앉자 에밀리가 빗을 가지고 와서 살살 빗겨 주기 시작했다. 우리 에밀리는 어쩜 빗질도 이렇게 잘하는지. 하나만 봐도 열을 안다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인장의 재능을 일찍이 보여 왔던 듯하다.

프리실라가 세상을 뜬 지 벌써 6개월. 저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나는 정식으로 아드리안과 결혼하고 백작 부인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었고, 에밀리는 하인장, 카지미어가 집사 자리에 올랐다. 레티샤와 앨번, 올리비아는 프리실라의 장례식이 끝나자 잠정 은퇴하고 별장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했다. 레티샤 다음으로 유력한 하인장으로 꼽히던 카타리나도 어머니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따라간다고 했다.

나는 에밀리가 벅찰까 봐 레티샤가 얼마간이라도 더 머물러 주길 바랐지만, 프리실라의 장례식 다음 날 머리가 새하얗게 세 버린 그녀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레티샤는 나와 에밀리 둘을 함께 두고 가서 그나마 안심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가분하게 저택을 떠났다.

하지만 그 많은 걱정에도 에밀리는 잘해 주었다. 하인들 사이에서 나이가 어려 무시당할 수 있는데도 기죽지 않고 하인들을 통솔해 나갔다. 마냥 순하고 착한 줄 알았는데 냉정한 결정도 내릴 줄 아는 면이 레티샤를 쏙 빼닮아 있었다.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 걸까. 어쨌든 자랑스럽다는 뜻이다.

이제는 모두가 대하기 어려워하는 위치에 올랐는데도 에밀리는 나와 둘만 남으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허물없이 대하다가도 눈치는 얼마나 빠른지, 신경 쓰일 만한 일은 미리 알아서 처리하곤 했다. 정말 유능하고 믿음직한 친구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내가 에밀리에게 직접 명령하는 건 꺼림칙해서 일 대부분은 델로레스에게 넘기고 있었다. 에밀리가 통제하기 어려운 하인들 통솔도 시킬 겸, 층 지배인 자리에도 앉혀 놨고. 걔도 나름대로 일 잘한다.

그간 달라진 점을 하나 더 꼽자면…… 아드리안이 드디어 평생의 소원이던 자기만의 식물원을 가지게 됐다는 거다. 모든 힘을 되찾은 만큼 이제 지옥에 다녀올 수 있게 됐다고, 악마의 꽃을 가져오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었지. 지옥 던전에 다녀오지 않았으면 무심코 그러라고 할 뻔했다.

이빨 잔뜩 달린 꽃잎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데 그걸 저택에 심는다고? 나는 당연히 안 된다며 기겁했고 아드리안은 그 일로 며칠간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그 바람에 식물원에서 키운 분재를 판매하는 사업 계획안은 들이밀지도 못했다. 자기가 고이 키운 식물을 팔려는 거냐며 경악할 게 분명한데. 하지만 비싸게 팔릴 물건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갖고만 있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되지. 흠, 이건 비밀리에 추진해야겠어.

“벌써 결혼식이 다음 주네. 얼마나 예쁠지 벌써 기대되는걸.”

“에밀리,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한 제안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끈 공예품 가게 여는 거 말이야. 지금이야 판권으로 수수료만 받아 챙기고 있는데, 네가 한다고만 하면 전부 넘겨줄게. 가게도 내가 차려 주고.”

“아이참, 그건 안 한다고 했잖아. 너를 혼자 두고 어떻게 저택을 떠나.”

먼 나라 이야기를 듣듯 에밀리가 픽 웃으며 한쪽 옆머리를 길게 땋아 주기 시작했다. 처음 제안할 때 끈 공예품 판권 수수료로 하루에 얼마나 버는지 말해 줬는데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하루에 많게는 4만 골드까지 받아 챙길 수 있다고까지 했는데! 내 친구야말로 무소유의 화신이었다.

“나도 물론 네가 여기 같이 있는 게 좋지. 하지만 저택보단 바깥에 있는 게 훨씬 자유롭고 좋잖아.”

“알겠어. 다시 생각해 볼게. 힐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말끝을 슬쩍 늘리면서 빗질을 멈추는 게 엄청 궁금한 것이 있나 보다.

“백작님 말이야. 청혼은 하셨어? 당연히 하셨겠지?”

“어? 어…… 그치. 하기는 했지.”

하기는 했는데.

“꺄! 정말?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

“그…… 게. 기억이 안 나네…….”

“뭐어? 그게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 있어? 백작님이라면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낭만적인 청혼을 하셨을 것 같은데!”

선생님의 첫사랑 얘기를 듣는 학생처럼 눈을 빛내던 에밀리가 금세 실망해서 항의했다. 내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미안하다고 하자 다음에 기억나면 얘기해 달라고 하긴 했으나 끝까지 샐쭉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건 내가 혼자 간직하고 싶다거나 말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청혼받았는데요. 못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정말 문자 그대로, 청혼받긴 했는데 하나도 듣지 못했다. 심지어 청혼을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받았는데 네 번 다 못 들었다. 매번 청혼이 근사한 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로맨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만 기억날 뿐.

내가 아드리안의 청혼에 주의를 안 기울인 게 아니다. 시스템이 하도 방해해서 못 기울인 거지. 시스템이 아드리안 싫어하는 거야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연애를 방해할 줄은 몰랐다.

「아드리안이 당신에게 청혼하러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이 청혼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수락’을 선택했습니다. 맞습니까?」

「‘네’를 선택했습니다. 취소하시겠습니까?」

「‘아니요’를 선택했습니다. 취소하시겠습니까?」

「아드리안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악마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서 골드와 경험치를 받으세요!」

「청혼이 마음에 드는지 아드리안이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칭호 업데이트 대기 중…….」

아드리안이 청혼할 때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알림을 쉴 새 없이 띄워 대는데 앞이 보여야 말이지. 띠롱띠롱 알림음까지 울려 대서 목소리가 묻히기도 했다. 네 번의 고백 끝에 내 기억 속에 남은 건 ‘힐다, 나와’, ‘평생’. 고작 이 두 마디뿐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청혼을 못 듣게 방해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 있냐고 묻고 싶겠지만, 진짜 있었다. 청혼은 일회성이니 그렇다 쳐도 사랑을 나누는 매일 밤 미친 듯이 알람이 뜨기 시작한 거다.

어느 순간부터 뻑하면 「침대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당신의 흥분도가 정상을 넘어섰습니다.」, 「아드리안의 맥박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부정맥’이 의심됩니다!」, 「아드리안에게 약을 건네세요.」, 「침대 내구도가 위험 수치까지 떨어졌습니다.」가 뜨는데 도무지 집중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한번은 일부러 알람을 무시해 보기도 했다. 무슨 소리가 나든 글씨가 뜨든 싹 무시한 채 불타는 밤을 보냈는데, 모르는 새에 내구도가 0이 돼 버려서 침대에서 튕겨 나가고 만 거다. 한창 하는 중에…… 말이다. 이게 말이 돼? 천 년의 발정이 다 식었다.

나는 언제까지 게임 시스템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걸까?

이러다간 내가 죽는 순간에조차 인생을 돌아보거나 아드리안과 다음 생을 약속하기보다 「당신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사신을 설득하여 살의를 낮추세요.」, 「어서 약을 먹고 생존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등의 알람만 보다가 죽게 생겼다.

물론 게임 시스템의 도움을 받은 부분도 분명히 있다. 선대 백작 부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도 온갖 템빨과 버프로 죽도록 공부해서 심화 과정까지 마치기도 했고 레벨업 버프 덕에 만렙 찍어서 스킬이 늘어나기도 했고.

템빨만큼은 인정할 만해서 고대급, 신화급 아이템을 잔뜩 쟁여 놓긴 했다. 옷장을 열면 20강짜리 고대급, 신화급 원피스와 드레스가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펄럭거리는데…… 쌓여 가는 재산만큼이나 흐뭇한 광경이라 심심할 때마다 열어 보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쓸모 있을 때의 얘기지. 지금은 저주가 풀려서 더 이상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어졌을뿐더러, 해리슨 같은 적이 있어서 아이템과 스킬이 필요한 상황도 아니다. 호감도 올려서 사람 부릴 만큼 궁핍하지도 않고.

나는 이제 시스템이 필요 없는데 정작 게임을 통해서만 세상을 마주하게 되니까 괴로웠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사람은 NPC, 물건은 아이템 취급을 하게 되고 나 스스로도 이 세계에선 영원한 외부인이 된 듯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언제 시스템이 횡포를 부리며 돈을 뜯어 갈지 몰라서 불안했다. 한 방에 뜯겨 본 경험이 없는 게 아니라 10억 외 모든 재산은 아드리안 밑으로 돌리고 있는데, 저택 살림을 꾸려야 하는 처지에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차명 계좌도 아니고 이게 뭐람.

나도 이젠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시야를 빼곡하게 채운 버튼들을 바라봤다.

“카지미어, 넌 네 아내에게 어떻게 청혼했지?”

“청혼요?”

“그래. 청혼.”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오는 늦은 오후. 마차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아드리안이 건너편의 부하에게 물었다. 그의 수하는 얄밉게도 석 달 전에 먼저 결혼식을 올렸고, 틈만 나면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을 자랑하곤 했다. 오늘 돌아가면 에이브릴은 얼마나 귀여울까 따위를 상상하던 카지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혼……. 저는 특별하게 준비해서 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꽃 주면서 고백했는데요.”

“그래? 그런데도 받아 주었다고?”

“그럼요. 에이브릴과 저는 이미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요. 서로를 향한 마음만 진실하면 청혼이 다 무슨 상관이겠어요.”

“마음이 진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네! 그럼요. 엇, 그런데 백작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는 걸 보면 어째 힐다가 청혼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였나 봅니다. 저런…… 결혼식이 다음 주인데.”

“…….”

“너무 심려치 마세요, 백작님. 백작님께서 뭐, 청혼을 형편없이 하고 싶으셔서 그랬겠습니까? 여자들 마음을 움직이는 감각은 타고난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요. 평생 한 번일 수 있는 청혼에 실망했다니 갑자기 힐다가 불쌍해지는데요. 에이브릴에게 위로라도 하라고 해 볼까요?”

죽일까?

우리 에이브릴은 위로도 잘한다, 예쁘다, 못 하는 게 없다며 눈치 없이 늘어놓는 부하를 보면서 아드리안이 조용한 살의를 불태웠다.

“그러게 왜 무턱대고 청혼부터 하신 겁니까, 백작님. 물어보고 하시지. 힐다도 낭만적이고 근사한 청혼을 원했을 텐데, 얼마나 실망했으면…….”

그래, 죽이자.

카지미어가 불길한 살기를 뒤늦게 느껴 입을 멈춘 순간, 확실한 살의를 지니고 움직이던 손도 동시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힐다가 카지미어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었지. 일을 잘해서 집사까지 시켜 놨는데 죽이면 대체할 인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머리를 식히고 나니, 1년 전 힐다를 꼬실 때 좋은 미끼가 되어 주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차하면 돈 벌어 오는 데 써먹을 수하를 그리 쉽게 놔줄 순 없지. 죽였다간 언제 다시 환생해서 쓸 만하게 클지도 모르는 일이고.

“카지미어.”

“……네, 백작님.”

“도착할 때까지 입 다물고 있도록 해.”

“네. 절대 열지 않겠습니다, 백작님.”

“입 다물라고 했을 텐데.”

“…….”

“감히 네가 내 말에 대답을 안 해?”

아드리안이 늘 지니고 다니던 펜이 카지미어의 이마를 호되게 강타했다. 아코코. 이마를 문지르며 펜을 들어 두 손으로 내밀자 또 한 번 딱 소리 나게 이마를 때렸다. 카지미어는 시킨 대로 입을 꾹 닥치고 마차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어금니 안 뽑힌 게 어디냐고 생각하면서.

수하에게서도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아드리안은 짜증스럽게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은 햇볕이 쨍하게 더운 한여름. 평소였다면 저 싱그러운 녹음을 보라며 감탄했을 풍경마저 짜증스럽다.

늦은 오후인데도 햇볕은 왜 이렇게 빌어먹게 따갑고 후덥지근한 것인지. 바람은 땀을 식히긴커녕 오히려 습하고 끈적해서 거슬렸고 저택까지 금방 도착하지 않아 더 화가 났다. 아침엔 힐다가 멋있다고 감탄해서 마음에 들었던 옷차림도 죄다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다. 저 강은 또 왜 저렇게 쓸데없이 빛나는 건지, 강물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말려 버리고 싶었다.

온 세상 만물을 둘러보며 홀로 짜증 내다가, 문득 이 짜증이 요즘 풀리지 않는 문제에 기인해 있음을 깨닫고 멈칫했다.

카지미어가 말한 것과 달리 그의 청혼은 꽤 그럴싸했다. 총 네 번 청혼했는데 네 번 전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힐다는 울지 않았다. 하늘에 기억을 펼쳐 주고 유리구슬에 담아 줬던 날은 감격해서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더니, 네 번의 청혼에서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아니, 울기는커녕 그의 말을 듣고 있지조차 않았던 것 같다.

어째서? 카지미어 말대로 평범하게 해야 했는데 너무 요란하게 일을 벌인 건가? 요즈음 이상하게 밤에 집중도 잘 못 하고…….

설마 내가 질렸나? 혹시 질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수를 써서 마음을 되돌리지. 너 없는 생은 이제 상상조차 되질 않는데…….

“엇, 백작님. 저기 힐다 아닙니까?”

힐다라고? 아드리안은 그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부하의 목숨을 거둬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카지미어가 가리키는 지점을 보니 진짜 힐다가 맞았다. 여기서부터는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 하나라 마중 나온 모양이라는 수하의 지껄임은 대충 넘기고 마차를 세워 내렸다.

등 뒤로 흩어지는 긴 갈색 머리카락. 옆머리를 얇게 땋아 내린 거로 봐서 오늘은 에밀리라는 친구가 머리를 다듬어 준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댄 채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마차 소리나 그의 인기척은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를 보자 세상이 변했다.

찬찬히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이 아름다워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길게 타고 넘실거리는 바람은 상쾌하고 기분 좋았다. 강물이 노을로 짙게 물든 채 빛나서 행복했다. 그렇게 예쁜 풍경 앞에 더 예쁜 그녀를 봐서 행복했다.

힐다, 너도 노을이 비치는 강물이 좋아? 더운 여름보단 선선한 가을이 좋아? 아니면 눈으로 덮여 하얘지는 겨울을 좋아할까?

나는 네가 궁금해진 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알게 됐어.

나는 네 웃는 얼굴이 좋아. 행복하게 눈을 반짝일 때, 그때의 기분을 솔직히 말해 줄 때 가슴이 녹아내려. 나를 안느라 낑낑거리며 드는 발뒤꿈치도 좋아. 그러다 안아 올리면 멋쩍어하며 흘리는 웃음소리가 좋아. 아기 같은 체온이 좋아. 따뜻하다고 품을 파고드는 네가 좋아. 내게 완전히 매달리고 기대 오는 무게감이 좋아. 한 손에 잡히는 골반이 좋아.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발목이 좋아. 오물거리는 입술과 따뜻한 입안이 좋아. 그런 네가 견딜 수 없이 좋아, 힐다.

“휴우…….”

지금 당장이라도 안고 싶어서 걸음을 뗀 순간 기나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녀가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아드리안은 다가가서 안아 주려던 걸 멈추고 그녀를 관찰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 무엇 때문인지 함께 고민하던 아드리안은 문득 그녀의 시선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귀찮고 피곤하다는 듯이 허공을 보는 일이 잦아졌지. 아무도 없는데 홀로 생각에 잠겨 불안해하기도 했다. 곰곰이 돌이켜 보니 늘 똑같은 지점을 올려다보며 한숨 쉬었던 것 같았다.

혹시 이것 때문일까?

아드리안이 찬찬히 손을 들었다.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은 예전에도 해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때의 감각을 활용하면 어려울 건 없었다.

아침부터 심란해 일이든 책이든 손에 잡히지 않아, 늦은 오후에는 아드리안을 마중하러 나왔다. 혼자 나가시면 안 된다며 들러붙는 사용인들을 겨우 물리치고 나와서 강변에 이르렀는데, 온갖 게임 버튼과 글씨가 걸리적거려 노을 구경하기도 마땅찮았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더 신경 쓰이는 느낌이다.

“휴…….”

나는 잔뜩 시무룩해져서 강 앞에 쭈그려 앉았다. 시스템이 끝까지 사라지지 않으면 어쩌지. 이대로 평생 보고 살아야 하는 건가. 시야에 거슬리는 버튼이나 글씨 없이 사람과 풍경을 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이렇게 10년쯤 살다 보면 적응이 될까. 수많은 알림이 뜨고 알림음이 귀를 때려도 태연하게 내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난.

이쯤 되니 그냥 시스템이 내 마음을 이해해 자진해서 사라져 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이 생각을 오늘만 백 번쯤 했는데 꿈쩍하지 않는 거로 봐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때였다. 노을에 물들어 주황빛으로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흰 글씨가 반짝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웬 알람이람. 왜, 또 뭔데 그래.

「스킬 기능이 닫혔습니다.」

「레벨 기능이 닫혔습니다.」

처음 보는 알림에 의아한 것도 잠시, 각각 내 시야의 상단과 좌측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이콘들이 사라지며 깨끗해졌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저게 갑자기 왜 없어지지?

「호감/적대 기능이 닫혔습니다.」

「부관 기능이 닫혔습니다.」

「부탁 기능이 닫혔습니다.」

「퀘스트/동맹 기능이 닫혔습니다.」

「아드리안이 호감도를 레벨 10으로 올렸습니다.」

「더 이상 호감도를 올릴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이 호감도를 레벨 20으로 올렸습니다.」

「WARNING! 외부 간섭이 감지되었습니다.」

「게임 컨트롤 권한을 빼앗겼습니다.」

「행동 제한 권한을 빼앗겼습니다.」

「골드 회수 권한을 빼앗겼습니다.」

「게임 UI가 완전히 닫혔습니다.」

스킬과 레벨 아이콘 표시가 사라진 후 남은 아이콘들도 하나씩 지워지더니 마지막 알림과 함께 시야가 완전히 깨끗해졌다. 단 하나, 나를 흐뭇하게 해 주던 전 재산만 제외하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버튼과 글씨로 가려지지 않은 세상이 근 1년 만이라, 어딘가 허전하고 텅 비어 보이기만 했다. 늘 보이던 게 사라지니 눈 하나를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공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맑고 깨끗했다. 잔뜩 끼어 있던 먹구름이 갠 듯 수많은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게임 없는 세상을 상상하며 손으로 작은 구멍을 만들어 들여다보던 때보다 훨씬 화사해서 말문이 막혔다.

“힐다.”

꿈결처럼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이 닿은 순간 숨이 멎었다.

게임 시스템 없이 보는 그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힐다?”

아드리안이 내 눈치를 살피며 한 번 더 불렀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안기며 대답을 대신했다.

자연스럽게 안아 드는 손길, 따스하게 스며드는 온기, 경배하듯 올려다보는 다정한 눈빛. 그 모든 게 눈물 나도록 찬란했다. 동시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고.

꿈꾸는 기분으로 그의 뺨을 더듬어 만졌다. 쉴 틈 없이 뜨는 알림 너머로는 늘 이런 눈빛과 얼굴이었을까.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은 시야 속의 아드리안은 평범하게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게임 시스템이 편리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다. 상대방의 상태와 호감도, 마음을 글로 나타내 주니 더 정확하고 상세하다고. 눈에 거슬리긴 해도 생존에 유리해지는 셈이니 최대한 이용해 보자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호감도가 없는데도 눈에서 사랑이 느껴졌다. 어떤 기분인지 알림으로 읽지 않아도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프다는 경고 대신 깊고 크게 뛰는 박동을 느꼈고, 호감도가 오르지 않아도 설레는 떨림을 공유했다. 굳이 상태 알림을 읽지 않아도 살짝 달아올라 빨개진 귀 끝과 등 뒤에서 간지럽게 꼼지락거리는 손이 그의 기분을 전해 주었다. 정확하진 않아도 진실했으며, 글자로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아도 감정이 전해져 벅차올랐다.

“힐다, 눈물이 고였잖아. 나 또 잘못한 거야?”

칭호로 정의되지 않은 우리는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평범한 연인일 뿐이었다.

“……아뇨. 이번엔 정말 잘했어요. 이거야말로 제가…… 원하던 거예요. 고마워요.”

“…….”

“고마워요. 저를 그렇게 간절히 불러, 당신의 세상에 데려와 줘서.”

그리고 끝내는 내 세상이 되게 해 줘서.

그 어떤 청혼도 이보다 멋질 순 없었다.

울컥 솟아오르며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나는 그의 앞섶을 모아 잡은 채 끌어당겼고 아드리안은 끌려오면서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틀며 입을 맞붙였다. 들숨과 날숨이 순서 없이 서로에게 먹혔다.

나의 게임 세계는 이윽고, 완전한 현실이 되었다.

‘공포게임 메이드로 살아남기’ (본편) 끝.

참고문헌

=> 6챕터 아드리안의 대사 중 “그녀의 색채 기법…… (중략) 실로 탐나는 인재입니다.”, “커다란 한 형태를 (중략)이 확고한 형태…….”라는 표현은 앵그르의 예술한담(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저, 북노마드, 2014년 07월 28일)을 발췌하였습니다.

=> 8챕터 레티샤 대사 중 “너희들! (중략) 그러니 매일 백작님께 감사하며 더 열심히 일하란 말이야!”에 나오는 하인들의 생활, “셀 수 없이 많은 은식기와 놋쇠 식기 (중략) 한번 해 보고 손이 퉁퉁 부어 버렸단 말이지.”는 영국 메이드의 일상(무라카미 리코 저/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 2017년 10월 11일)을 참고하였습니다.

=> 8챕터 아드리안의 대사 중 “최초이자 최후 시작이며 끝”은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the First and the Last, the Beginning and the End.(Revelation 22:13)”, “구원, 영광, 신에 속한 모든 힘이여.”는 “After these things I heard as it were a great voice of a great multitude in heaven, saying, Hallelujah; Salvation, and glory, and power, belong to our God.(Revelation 19:1)”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9챕터에서 아드리안이 친 고양이 왈츠 편곡은 유튜브 QBIC 님의 ‘이래도 고양이입니까 여러분?? - 고양이 춤’ 편곡에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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