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1. 뱁새도 열심히 뛰면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 뒤로 나는 이틀간 완전히 뻗어 버리고 말았다. 튼튼한 판금 갑옷으로 자연회복량과 체력을 회복하긴 했으나 그간 누적된 피로에다 세계를 넘나드는 큰일까지 겹쳐 몸이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인간의 몸이 버텨 낼 수 있는 양 이상으로 피를 먹인 것 같다고, 침대 앞에서 아드리안이 고해하듯 쏟아 냈다. 그럼 그렇지, 속이 이상하게 안 좋더라.
“괜찮으니 먼저 별장에 가 있어요. 낫는 대로 카지미어랑 같이 따라갈 테니까요.”
앓아누운 첫날, 아드리안은 하루를 꼬박 내 침대 옆에 붙어 떠날 줄을 몰랐다. 주인이 움직이지 않으니 하인들도 덩달아 호텔에 눌러앉게 됐는데, 레티샤 말고는 나 때문인 걸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카지미어가 전해 준 소식이라 믿을 만한진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하지만 저 때문에 언제까지고 일정을 늦출 수는 없잖아요. 마님께서 손꼽아 기다리실 텐데…….”
“너 때문에 일정이 늦어진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너 없이는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을 일정이었어.”
“그래도…….”
“힐다, 난 지금 당장 널 데리고 돌아가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어. 그러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쉬어 주면 안 될까? 이보다 더 아파하면 난 정말 돌아 버릴지도 몰라.”
나긋나긋한 말투였는데도 눈은 돌아 버린 지 오래라, 일어나려다가 도로 스르르 침대에 누웠다. 눈앞에서 사라졌던 것도 모자라 둘째 날까지 꼬박 앓아누웠다. 더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래도 예전이었으면 이미 몇 차례 큰일을 벌이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은 비교적 침착한 편이었다. 이제는 내 주변에 떠도는 외부의 힘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모든 맵을 닫아 감금하거나 히든 던전을 열고 잠수 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두 눈 시뻘겋게 뜨고 밤새긴 했지만, 그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지.
그렇게 꼬박 이틀을 끙끙거리다 다행히 셋째 날 아침에 열이 내려 몸이 가벼워졌다. 기본 체력이 받쳐 주는 덕이겠지. 침대에서 말짱하게 눈을 뜨자마자 쾌유를 축하하듯이 흰 글씨가 반짝 떠올랐다.
「사탄의 피가 완전히 흡수되어 수명이 늘어났습니다.」
「사탄의 피가 당신의 몸 3%를 차지했습니다.」
「사탄의 추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역시나 내가 앓아누웠던 건 감기 몸살보단 아드리안의 피 때문이었군. 피 한 잔으로 지분을 3%나 확보하다니. 한번 먹으면 체외로 배출되지 않는다니 서른 잔 넘게 마셔서 100%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마신 직후에야 좀 역겨웠는데 지나고 나자 별일 아닌 것 같다. 까짓거 3%야 내주면 그만이고, 좋게 생각하면 불의의 사고가 나더라도 과다 출혈로 사망할 일이 없다는 뜻 아닌가? 거기다 수명까지 늘려 줬잖아. 물론 범상치 않은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만큼 든든한 보험이 또 없었다.
내가 멀뚱히 보고 있자 흰 글씨는 알아서 사르륵 사라졌다. 평소라면 ‘닫기’ 버튼을 눌러 창을 없애 버렸겠지만, 얼마 전 사건 이후 나는 게임 시스템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메인 퀘스트 뜰 때마다 시스템이 두렵고 소름 끼쳤는데, 이 세상에서 튕겼다가 재로그인하고 보니 완전히 정점을 찍어 버린 거다.
메인 퀘스트가 끝나면 게임이 끝나는 건 아닌지 막연하게 생각해 왔는데, 정말로 게임과 단절되어 엔딩 크레디트를 확인하자 실감이 날 수밖에 없었다. 게임과 단절된 공간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 공간에서 벗어나면 예전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는 걸. 아드리안의 곁으로 돌아와 느낀 당장의 기쁨만큼이나 언제든 이 세상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공포심이 커졌다.
메인 퀘스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히든 퀘스트, 혹은 업적으로라도 다시 이 세상에서 튕겨 나갈 수 있다. 아드리안과 작별 인사할 잠깐의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가차 없이 내보내겠지.
그러고 보면 어느 세상을 선택할 거냐고 했을 때, 버튼을 누르지 않고 생각으로만 대답한 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었다. 그때 시스템이 ‘그럼, 그럼. 네 선택 잘 알지.’라며 다짜고짜 내가 살던 세계로 돌려보냈으면 어쩔 뻔했어. 가뜩이나 내 천재적 교섭으로 엄청 뜯겨서 앙심 품었을 텐데.
내가 직접 버튼을 눌렀어도 마찬가지다. 손가락 한번 삐끗했으면 곧장 헤어지는 거였잖아. 간단한 스킬 사용이라든지 호감 목록 확인조차 못 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시스템의 정체는 대체 뭘까? 누워 있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서버 선택권’에서 ‘아드리안의 세계’와 ‘당신의 세계’가 나온 걸 보면 아무래도 각각의 세상이 각자의 서버로 존재하는 듯했다. 그리고 각 서버를 총괄하는 허브(hub)로서, 내가 살던 서버에서 아드리안의 서버로 나를 이사시킨 게 바로 시스템. 플레이어 캐릭터(PC)인 힐다를 제공해 준 것도 마찬가지로 시스템이다.
그런 초월적인 존재에게 10억이나 뜯어내다니 나 자신이 이렇게나 장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어쨌든 플레이어 캐릭터라고 하는 걸 보면 내가 오기 전까지 힐다는 설정값만 존재하는 빈 껍데기였던 것 같다. 에밀리를 대할 때마다 내가 친구를 뺏은 건 아닌지 죄책감을 느끼곤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어진 거다. 이 세계에서 힐다는 처음부터 나 하나뿐이었던 거니까.
“힐다, 무리해서 일어나면 안 돼.”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아드리안이 급하게 다가왔다. 머리끝이 살짝 젖은 걸 보면 내가 깨어나기 전에 씻으려고 했던 모양이다.
“괜찮아요. 이제 다 나았는걸.”
“정말이야? 어디 봐.”
아드리안이 의심스럽다는 듯 냉큼 와서 이마를 짚었다. 열을 잴 줄도 몰랐던 며칠 전과 달리 손길이 꽤 능숙했는데, 앓아누워 있는 내내 초조하게 이마를 짚던 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누운 채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 내게 뭔갈 떠먹여 주거나 땀에 젖은 몸을 손수 닦아 주기도 했다. 평생 그런 건 해 본 적 없을 텐데. 서툴지만 정성스러운 그 손길이 연이어 떠올라 가슴이 찡해졌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요, 아드리안.”
“…….”
“안아 줘요. 빨리.”
내가 두 팔을 뻗은 채 기다리고 있자 아드리안은 꿈을 꾸는 것처럼 잠깐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 덮치듯 와락. 침대에 눕는 순간에도 벽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손으로 감싸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어린애처럼 그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며 파고들었다.
“힐다, 정말 괜찮은 거야? 나는 네가 쓰러지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정말 다시는. 그러니 거짓말하면 안 돼.”
힘주어 안으면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가 가볍게 안는 시늉만 했다. 그래서 내가 더 세게 꽉 안아 주었다. 그동안 얌전히 있었던 상은 줘야지.
“아픈 건 제가 아니라 아드리안 당신 같은데요. 심장 엄청 빨리 뛰어요.”
가슴에 가만히 귀를 대자 빠르게 쿵쿵대는 소리가 귀를 마구 두드렸다. 박동이 얼마나 큰지 매번 내 발끝까지 울렸다. 이미 백 번도 넘게 안아 익숙해질 법한데도 아드리안은 안을 때마다 이렇게 설레했다. 첫사랑에 흠뻑 빠진 소년처럼 순수하게.
“그렇게 좋아요?”
“더할 나위 없이, 정말 많이.”
“안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대단해. 네가 내 곁을 택해서 함께 있는 것, 이렇게 안겨서 말을 거는 것 전부.”
“…….”
“아무래도 난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났나 봐.”
행복에 푹 젖은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왠지 쑥스러워서 나도 그런 것 같다는 대답을 우물대다가 하지 못했다. 나는 손을 들어 이마에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넘겨주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오늘따라 예쁜 말만 골라서 하네요. 그런다고 떨어지는 것도 없는데.”
“예쁘면 상을 줘야지, 힐다. 더 예뻐해 줘야지.”
무심코 흘린 말을 홱 잡아채면서 아드리안이 눈을 빛냈다. 옷을 들추고 살금살금 등줄기를 따라 기어들어 오는 손길을 말릴 새도 없이, 그가 내 어깨에 입술을 묻고 문질렀다. 내가 허리를 비틀며 앓는 소리를 내자 모른 척 빗장뼈를 깨물거렸다. 그는 상처를 내서라도 몸에 흔적을 남겨 놓는 걸 좋아했고, 난 그게 싫지 않았다.
“잠…… 깐만요. 우리 이럴 때가 아닌데…….”
“예쁘대서 더 예쁜 짓 하려는 거예요, 주인님.”
“으…….”
“우리 둘이서만 시간 보낸 지 오래 지났잖아. 이대로 내버려 두면 난 네 사랑이 고파서 시들어 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한 번만 허락해 줘, 응?”
세상에 버림받은 듯 처량하고 가련한 목소리와 달리 손은 재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살을 모아 올려 주무르는 손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안 된다고 말하려는 찰나마다 손으로 가슴 끝을 튕기는 바람에 소리가 먹혀들어 갔다.
배 아래가 서늘했다. 옷이 어느새 둘둘 말려 올라가 맨살이 드러난 탓이었다. 이렇게 은근슬쩍 가슴을 깨물고 희롱하다 아래를 적시고 침입하는 게 그의 방식인 걸 알았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힘이 잔뜩 들어갔네, 귀엽게도.”
“안…… 된대도요!”
인간 힐다,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여 아드리안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고 있는 동안 아드리안의 눈은 아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참 후에야 끈적하게 위로 기어 올라와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욕망으로 짙어진 눈이 달콤하게 가늘어졌다. 내가 거절하니 멈추긴 하지만 언제든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여유로 가득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내가 성급했지? 미안해.”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기다리고 있어서 그래요. 이제까지 저 때문에 지체된 것조차 말이 안 되는데 이보다 더 늦을 수는 없어요.”
“그건 정말 염려하지 않아도 돼, 힐다. 사용인들이 안주인을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인걸.”
열이 올라 빨개진 얼굴로 후하후하 숨을 내쉬고 있다가 갑자기 멈추고 말았다. 방금 태연하게 엄청난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안주인요?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힐다 너지. 힐다 네가 또 날 놀리려고 하는구나.”
아드리안이 예쁘게 생긋 웃었으나 나는 여전히 눈이 커진 채였다.
“제가요? 안주인이라면 백작 부인인데요?”
“응. 왜 그렇게 놀라?”
“네에?”
“으응?”
우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놀라는 눈치에 아드리안도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힐다, 혹시 싫은…… 거야?”
아드리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핏줄이 비칠 정도로 창백해졌다. 와, 설마 했는데 진담인가 봐. 진담이라고 생각하고도 여전히 농담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나와 프리실라 백작 부인은 이미지부터가 너무 다르잖아.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의 백작 부인은 우아하고 타고나게 귀족적인 기품이 있었다. 내가 탱딜힐 중에 뭐 할지 헤매고 있을 때 백작 부인은 로얄 블러드 같은 히든 직업군에 속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런 백작 부인을 내가 한다고?
“왜…… 싫은 거야? 내가 잘못한 게 있을까? 설마 나와 보낸 밤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불만족스러워?”
“잠깐, 얘기가 갑자기 왜 그쪽으로…….”
“아닌데,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자지러지게 좋아했는걸. 이제껏 왜 안 해 줬냐고 타박하면서까지 더 해 달라고 했는데. 가슴을 만져 주면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만! 그마안! 그렇게 묘사하지 말라고 했죠!”
“힐다, 내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면 안 될까? 무엇 때문이든 당장 생각을 고치도록 해 줄 수 있어.”
혼란스러워하던 아드리안이 돌연 의욕에 활활 불타며 말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악마가 열정적인 밤을 약속한대. 이거 손해 보는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이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을지 잠깐 고민에 빠졌던 나는 어렵게 제정신을 차렸다.
“아녜요. 그게 아니라…… 하지만 그 기회라는 건 줄 생각이니까 잊지 말고 하도록 해요.”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일까? 혹시 이 저택이 싫은 걸까? 내가 이 저택에서 나가면 날 받아 주겠어? 물론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을 수 있지만, 카지미어가 벌어 올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어떻게든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선지 아드리안의 말이 몹시 빨라졌다. 나 때문에 가출하겠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으려니 헛웃음마저 나왔다. 왜 이제껏 고민하고 있었을까, 아드리안이라면 이렇게 말할 걸 알고 있었으면서. 막상 그의 반응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바보같이 실실 웃고 말았다.
“받아 주긴 무슨……. 청혼도 안 해 놓고 무슨 말이에요. 설마 방금 그게 청혼이었던 건 아니죠?”
“청…… 혼?”
“설마…… 안주인 얘기까지 하면서 안 하려고 한 거예요?”
“아니, 아니야, 힐다. 순서를 못 지킨 내 불찰이 커. 방금 얘긴 잊어 주겠어? 충분히 준비한 후에 근사하게 할 테니까.”
살짝 놀랐던 얼굴을 가다듬으며 아드리안이 상냥하게 말을 맺었다. 청혼은 생각해 보지 않은 눈치지만, 사람답지 않은 면모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이젠 뭘 봐도 놀랍지 않았다.
“싫은 게 아니라 다행이지만, 힐다…….”
“어어, 저 아직 좋다고 말 안 했는데요. 청혼 어떤 식으로 하는지 보고 정할 건데.”
“그래. 아주 근사하게 준비할게. 절대 거절 못 하도록.”
“저 눈 높아요.”
“열심히 준비해 볼게. 하, 아까는 정말 날 갖고 논 줄 알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내게 그렇게나 사랑한다고 해 놓고 안주인이 될 생각은 안 했다니, 먹고 버리려던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아드리안이 날 꼭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먹고 버리려는 사람을 위해 살던 세계를 버리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도련님과 하인 사이라면 보통 먹고 버리는 건 도련님 쪽 아닌가.
“사실 결혼을 전혀 생각지 않은 건 아닌데요.”
“으응. 그럼 왜 그렇게 놀랐던 거야? 말해 줄래?”
조금 쑥스러워져서 셔츠깃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말하자 아드리안이 사근사근 되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그야…… 아무래도 신분 차이가 있으니까요. 당신이나 내 마음이 아무리 진심이더라도 현실적인 벽을 무시할 순 없으니 첩이나 정부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했죠. 예전에 잠깐 그렇게 생각했어요.”
“…….”
“아드리안, 듣고 있어요?”
“……정부라고? 힐다…… 어떻게…….”
엇, 왜 말이 없나 했는데 큰 충격을 받았는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먹고 버리는 줄 알았다던 때보다 더한 얼굴인데.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힐다? 내가 너를 두고 그러리라고?”
늘 여유로운 미소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던 입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으음, 나로선 레티샤도 했던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건데.
“꼭 그렇다기보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거였어요. 당신은 이제 백작이고, 저는 일급 받는 하인일 뿐이잖아요.”
“내가 너를 두고…… 누굴 만나. 그런 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정부라니…… 너를? 내가 고작 그런 것으로, 너를…….”
“정말 예전에 잠깐.”
“내가 널 두고…… 내가?”
널 두고 내가, 널 두고……. 충격이 어마어마했던 듯 아드리안은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아드리안의 저런 모습을 보고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면 너무 이기적인 건가.
“……미안해, 힐다. 네가 그런 생각을 잠시라도 하게 한 내 잘못이 커. 네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는데, 배려가 부족했어.”
“아녜요. 사과할 것까진 없어요.”
“아냐. 이건 정말 내 잘못이야. 너 혼자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을지 생각하면……. 하아, 힐다, 이 문제는 내게 맡겨줘. 누구도 널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끔 해결할 테니까 믿어도 좋아.”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거지, 어디서 신분을 사 오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같은데. 하지만 사근사근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정해서 일찌감치 녹아 버린 데다 이쪽 돌아가는 사정은 아드리안이 더 잘 알 테니까 믿고 맡기기로 했다.
“알겠어요. 이번엔 당신에게 맡겨 볼게요. 근데 혹시 사람 죽여서 해결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안 돼요.”
“응, 이번엔 아니니까 안심해.”
“상태 이상 만드는 것도 하지 말아요. 목만 붙여 놓는다뿐이지, 죽이는 게 나을 정도던데.”
“하지만 힐다, 그걸 쓰면 일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알겠어. 안 할게.”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아드리안이 냉큼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 의사를 전했다. 나는 다시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말 잘 듣는 악마를 품 안 가득 안아 주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드리안, 저기가 별장인가 봐요. 드디어 도착이에요!”
“응, 그러네.”
한적한 길 끝, 산과 나무로 둘러싸인 거대한 저택. 빼곡한 숲과 나무 사이에 유일하게 솟은 파란 지붕. 저기가 팔츠그라프 가문 별장이었다. 이제 반나절이면 도착하겠다는 마부의 말을 들은 이후 쭉 창문에 붙어 밖만 보고 있던 나는 무척 반가워했지만, 아드리안은 그런 나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볼 뿐 별다른 감흥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그렇겠지. 성수 사건 이후 첫 만남인 데다 이번 방문은 어디까지나 작위 승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니까. 어쩌면 이번에도 백작 부인이 음모를 꾸미고 있진 않을지 경계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아드리안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는지 알고 있는 나로선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 온갖 폭언과 저주를 들으면서도 어머니를 위해 찻잔을 사던 아드리안이었으니, 희망이 있었다.
이윽고 별장 앞에 도착해 마차가 멈추었을 때, 아드리안이 먼저 마차 문을 열어 내리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뒤이어 멈춰 선 짐마차에서 하인들이 우르르 내려 몇몇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지만, 내 옆에 백작이 있다 보니 말을 걸진 못했다.
예전이었으면 신경 쓰였을 텐데 이제는 대수롭지 않았다. 사는 세계가 달라지는 범우주적 문제에 직면했다가 오니 신분을 초월한 사랑 정도야, 뭐. 살면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저택 주인이 왔는데 단 한 명도 얼굴을 안 비친다라…….”
아드리안이 근래엔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차갑고 냉소적인 눈으로 저택을 한번 스윽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은 악마였을 적부터 예절을 무척 중시했었지. 하지만 지금 아무도 안 오는 건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하나뿐이어서인데.
“힐다! 드디어 왔구나!”
아니나 다를까, 올리비아가 딱 맞춰 나타났다. 저택에서 늘 엄격하고 단정한 편이었던 올리비아가 계단을 쿵쿵 소리 내며 뛰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애타게 기다리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로 반겨 줄 줄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앞뒤 안 가리고 내 이름부터 부른 모양이다.
이게 얼마나 올리비아답지 않은 일이냐면, 뒤에 있는 레티샤도 “아니, 저 사람이?”라며 놀라워할 지경이었다.
“백작님, 무례를 범했습니다.”
거의 혼자 이 커다란 별장을 도맡아 관리하기 때문일까. 며칠은 빨지 못한 듯 보이는 거뭇거뭇한 앞치마가 눈에 띄었다. 온종일 집안일만 한 건지 흐트러진 머리와 옷차림까지. 하지만 생기 있는 표정은 오히려 보기 좋았다.
“백작님, 바로 다이닝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중에. 짐을 푼 다음.”
칼 같은 대답에 올리비아는 순간 혀가 잘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방금 주변 온도가 10도쯤 내려간 것 같은데.
“저, 하지만 마님께서 이미 다이닝룸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실은 며칠 전부터…….”
“방금 내 말을 듣지 못했나 봐, 올리비아.”
“무례를…… 범했습니다, 백작님.”
한층 더 싸늘해지는 말투에 올리비아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성수 사건 때문에 올리비아가 미운털이 박힌 탓도 있으나 아드리안이 이렇게까지 나오면 사실상 아무도 제지할 사람이 없다고 보면 됐다. 백작 부인의 이모티콘을 생각하면 다이닝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최선을 다해 자제한 결과겠지만, 아드리안으로선 또 다른 음모를 꾸미는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있을 거다. 만남 주선부터 이렇게 순탄치 않다니. 이 모자, 정말 쉽지 않군.
“레티샤, 뒷정리를 부탁하지.”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개 숙이는 레티샤를 뒤로하고 아드리안이 냉랭하게 자리를 떴다. 내가 흘끔 뒤돌아보자 레티샤는 얼른 따라가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드리안이 들어간 곳은 2층 중앙의 커다란 방. 이전에 와 본 적이 있는지 익숙하게 찾아 들어갔다. 내가 문을 마저 닫고 따라 들어가자마자 그가 돌연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잡았다.
“힐다, 조금 전 험한 모습을 보게 해서 미안해. 이 방은 어떤 것 같아? 편하게 지내기에 부족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해 줘.”
아까와 달리 부드러워진 눈빛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이렇게 좋은 방인데 부족한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음,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요.”
“예전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염려하는 거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고, 특히 네게는 손도 못 대도록 할게.”
역시나 백작 부인을 경계하고 있었군. 나는 그의 미소가 아름다운 만큼이나 뒤에선 무시무시한 계획을 꾸밀 수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되도록 지켜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얼굴 한번 안 보고 돌아갈 수도 있겠어.
똑똑.
아드리안을 설득해보려고 나서려던 찰나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나는 냉큼 손을 놓았고, 그는 아쉬워하는 눈으로 날 지켜보다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달칵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데…… 문틈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드리안…….”
햇빛이 무색하도록 찬란한 백금발. 아드리안과 똑 닮은 여인이 세상에 둘 있을 리 없었다. 한동안 생사를 넘나들었던 만큼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졌으나, 특유의 기품과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 예상 못 했는데. 돌아보니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드리안…… 이니? 정말 너니?”
예상대로 제 한 몸 가누기조차 힘든 건지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그녀가 힘겹게 걸음을 뗐다. 따라 들어오려던 올리비아는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아드리안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 갔다. 누구든 손쉽게 조종하고 죽일 수 있는 그가 이토록 긴장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드리안, 아드리안…… 정말 네가 맞구나.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비척비척,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없는 걸음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달달 떨리는 손끝이 그에게 닿은 순간, 아드리안은 불에 덴 듯 화드득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가장 먼저 나를 백작 부인의 시야에서 차단하는 바람에, 손이 내팽개쳐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의 발밑에서 스며 나온 음산한 기운이 그림자 속에서 넘실거리는 것만이 보일 뿐. 상대가 허튼짓이라도 벌이면 곧장 가시가 되어 뻗어 나갈 흉악한 기세였다.
등 뒤로 쭈뼛 소름이 돋는 바람에 돌아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 군데군데 내려앉은 어둠이 가지를 뻗어 가며 팽창하고 있었다. 저 어둠이 계속 커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익히 보아서 알고 있었다. 어둠에 침식되고 나서는 시간이 멈추고,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겠지. 말리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그래, 이 어미를…… 용서할 수 없대도 충분히 이해한단다. 그동안 네게 못할 말, 몹쓸 짓을 많이 했으니까.”
그때였다. 손길을 거절당한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던 백작 부인이 맥없이 주저앉은 건. 사실 자기 의지로 앉았다기보다 힘이 빠져 쓰러진 쪽에 가까웠다. 메마른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을 때, 퍼져 나가던 어둠도 우뚝 멈추었다.
“그래도 고마워. 어려운 걸음이었을 텐데…… 이 어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네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도…….”
“…….”
“……미안해, 미안하구나, 아드리안. 네가 미워서 그런 짓을 한 건 아니었어.”
허공에 뻗어 있던 손이 꽃봉오리처럼 오므라들었다. 그러고는 잠시나마 닿았던 온기를 되새기듯, 손끝을 애처롭게 어루만졌다. 납빛으로 새파래진 입술이 달달 떨렸다.
“내가 왜…… 몰랐을까. 처음부터 너였는데…….”
“…….”
“바뀐 게 아니었는데, 너는 처음부터 너였는데. 여신께서 줄곧 말해 주셨는데, 그 뜻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어…….”
끊어질 듯 말 듯 미약한 목소리가 울음에 푹 잠겼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주고 싶었으나 지금만큼은 둘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왜 네 말을 한 번이라도 들어주지 않았을까. 네 손을 잡아 주지 않았을까. 같이 심었던 작은 나무가 커질 때까지 너 홀로 키우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
“미안해, 아드리안. 미안하다. 너를 미워했던 그 모든 세월이……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백작 부인이 실신해 버리는 바람에 대화는 더 이상 나눌 수 없었다. 내가 문으로 뛰쳐나가 올리비아를 불러오고, 레티샤와 사용인들이 몰려와 백작 부인을 업어 방으로 옮길 때까지 아드리안은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게 마치 사람 손길에 얼어 버린 유기견처럼 보여서, 왜 가만히 있느냐고 타박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힐다.”
내가 곁에 다가가 조심히 묻자 그제야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힘없이 떨어져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핏기 없이 하얘진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마님께서 많이 우시던데. 다이닝룸에서 계속 기다리시다가 당신이 오지 않는다니 여기까지 오셨나 봐요.”
“…….”
“제가 보기엔 다른 꿍꿍이를 꾸밀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 당신이 보기엔 어때요?”
“…….”
“걱정되면 나중에 방으로 찾아가 볼까요? 먼저 찾아가면 무척 기뻐하실 텐데.”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간격을 두고 묻는데도 아드리안에게선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여섯 살 이후로 모자 관계가 쭉 서먹했던 만큼 갑자기 좋아지긴 어렵겠지. 그래도 이 정도면 좋은 출발이었다.
습관적으로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내 손을 그가 살짝 잡았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역시 말하길 잘했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해 준 아드리안에게도 고마워져서,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그로부터 나흘 뒤 우리는 백작 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첫 만남 이틀 뒤에 깨어났단 소리를 듣고 찾아갔는데, 아드리안을 보자마자 펑펑 울고 다시 실신하는 바람에 이틀이 더 소요됐다. 나흘째에는 충격 완화를 위해 내가 먼저 들어가 방문을 예고했고, 덕분에 울긴 했어도 기절까지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마음 여린 분이 어떻게 성수로 아들을 죽일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드리안…… 오면서 힘들진 않았니? 먼 길 오느라 피곤하진 않았는지…….”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요새 몸은 어떠니? 예전엔 오래 앉아 있지도 못했는데.”
백작 부인은 가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해졌으나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모자가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는 광경은 보기에 무척 흐뭇했지만, 백작 부인의 새빨개진 눈가와 뼈가 훤히 드러나도록 마른 손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얼마나 긴장하고 떨고 있는지 아까부터 찻잔이 받침과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저런데도 버티는 건 어떻게든 아드리안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겠지.
“이제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내가 너무 옛날 얘길 하였어. 주책이지, 참.”
아드리안이 시종일관 모르는 척해 주고 있기 때문인지 백작 부인도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런데도 가끔 콧잔등이 빨개지는 걸 보면, 말하다가도 옛 기억이 울컥울컥 솟아올라 어쩔 수 없는 듯 보였다. 실신만 안 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 아드리안.”
“말씀하십시오.”
“내가 생일을…… 쭉 계속 못 챙겨 주었지 않니. 그래서 이번에 작게 준비해 봤는데. 돌아갈 때 가져가 줄 수 있겠니?”
“그러겠습니다.”
성수 사건이 생일 당일 벌어진 만큼 예민한 주제였는데도 아드리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선물을 건네는 백작 부인이 더 주저하고 망설였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힐다, 네게 인사를 안 했구나.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
선물을 받아 준다는 말에 안색이 한결 밝아진 백작 부인이 내게 손짓했다. 그러자 아드리안도 고개를 돌려 닮은꼴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보게 됐다. 마침 햇살도 따사롭게 들어왔을 참이라, 보통 쿵하고 떨어지는 가슴이 이번엔 쿵쿵 떨어졌다. 하나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얼굴인데 붕어빵 두 명이 한눈에 들어오니 심장에 여간 해로운 게 아니었다. 웬만하면 한 번에 한 명만 봐야겠어…….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구나. 네가 보내 준 편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못 감았을 텐데. 그렇게 신세를 져 놓고 이제야 널 부르다니.”
“마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어요.”
죽는단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올리비아가 끼어들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 듯 금방 입을 합 다물었으나 아드리안은 이미 내게 온 정신을 쏟고 있었으므로 나무라는 일은 없었다. 백작 부인은 별다른 대꾸 없이 내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백작 부인은 내 덕분이라고 했지만, 사실 내 편지뿐이었다면 이렇게 바로 믿지는 않았을 거다. 여신의 신탁이 있었고 사제도 옆에서 확인해 주어서 빨리 진행된 거지, 아니었으면 내 속셈이 뭔지 의심하며 확인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백작 부인이 워낙 신실한 신도였으니 사실을 말해 준 것일 테지만, 이번만큼은 신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더 시간 끌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드리안을 곁에서 쭉 살펴 준 것도 고맙구나. 이 신세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마워.”
아드리안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언젠가 인사치레로 들었던 말을 이번에는 진심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들었다.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가슴이 찡해지기도 하고 어깨가 으쓱거리기도 했다. 그럼요, 제가 아드리안을 챙기긴 했죠. 비상 도시락도 열심히 챙겨 주고…….
근데 백작 부인이나 되는 사람이 하인한테 보통 이런 말을 하나? 하인이 상전 시중을 드는 건 당연한 일일인데…… 살핀다는 표현도 뭔가 이상하고.
“신세라뇨, 당치도 않아요. 백작님의 하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얘는. 네가 어디 다른 하인과 같니. 이미 아드리안에겐 하인으로 보이지 않게 된 지 꽤 된 것 같은걸.”
“…….”
“실은 나도 그렇단다. 네가 우리 아드리안을 계속 살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어머니 앞에서 뭔갈 숨기려 하면 안 돼. 둘이서만 있는 모습을 보인 게 아닌데도 이미 다 들켰잖아. 올리비아는 어리둥절한 눈치니 다행히 티가 많이 났던 건 아닌 듯한데. 백작 부인 짬밥 무시 못 한다.
“네게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아, 그렇지. 올겨울에 혼자라도 휴가를 보내고 오는 건 어떠니? 겨울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마침 내가 관리하는 성이 있는데, 놀러 가기 적격이란다. 원하면 준비해 놓으라고 이르마. 성 꼭대기에서 구경하는 설산이 볼 만해.”
「맵 개방! 글로스터 성으로 갈 수 있습니다.」
“힐다 휴가는 제가 챙길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글로스터 성 맵이 닫혔습니다.」
오, 직원 휴가지를 직접 챙겨 주는 상사라니. 처음부터 백작 부인이 맨정신이었으면 내 하인 인생도 그리 퍽퍽한 건 아니었겠다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백작 부인이 맵을 열자마자 아드리안이 가차 없이 닫아 버렸다. 이거 어째 굉장한 기시감이 드는데.
“아드리안, 저번에도 말했잖니. 아무리 곁에 두고 싶어도 힐다 생각도 해 주어야지. 늘 저택에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 말은 못 하겠지만 분명 그럴 거란다.”
「맵 개방! 글로스터 성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걸 알려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글로스터 성 맵이 닫혔습니다.」
“힐다,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내 말 들으렴. 저래서야 앞으로도 휴가는커녕 숨 쉴 틈도 안 주겠구나.”
「맵 개방! 글로스터 성으로 갈 수 있습니다.」
“계속 힐다에게만 들리게 속닥거리실 겁니까? 힐다는 제 곁에 있기로 했습니다.”
「글로스터 성 맵이 닫혔습니다.」
“어머나, 힐다는 엄밀히 말하면 내가 데려온 아이란다. 휴가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맵 개방! 글로스터 성으로 갈 수 있습니다.」
“…….”
「글로스터 성 맵이 닫혔습니다.」
아이고, 또 두 분이 열심히 맵 열고 닫고 난리가 나셨네요. 제 맵 좀 가만히 내버려 둬 달라고 하고 싶은데 모자 사이가 급격히 화목해 보여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째 내가 둘 사이에 낀 것 같긴 하지만…… 성수 퍼붓고 죽이려고 할 때보다는 훨씬 낫지, 뭐. 평화롭다, 평화로워.
“힐다, 네가 좀 말해 보렴. 남자는 그렇게 구속만 해서는 매력 없다고. 아무래도 네 입으로 직접 듣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을 것 같거든.”
“힐다한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어쩜, 저도 남자라고 목에 힘주는 거 보려무나. 기억나지, 힐다? 네가 아드리안을 처음 봤을 때 말투가 왜 저러냐고 했잖니.”
“정말 제가 그랬어요? 전 어렸을 때라 그런지 기억이 안 나거든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힐다.”
아드리안이 급하게 말리려 들었으나 백작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아드리안은 어렸을 때부터 누굴 닮았는지 말투가 근엄했거든.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어머니, 어머니하고 엄숙하게 부르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아프지만 않았으면 온 집안의 귀염둥이가 됐을 거란다.”
“귀염…… 둥이, 푸훗.”
“어머니.”
“이거 보렴. 손이 정말 요만할 때였거든.”
백작 부인은 내 손을 끌어다가 손바닥 반 정도 되는 지점을 살살 그어 주었다. 손목으로부터 그어 준 지점까지 손이라고 하면…… 그렇게 쪼끄만 아드리안은 한 번도 보지 못해서 아쉬워졌다. 나도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어차피 힐다의 과거야 설정값인데 기억의 도서관 같은 메뉴라도 만들어서 다시 보게 해 주면 안 되나?
“그러고 보니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겠니? 초상화가 하나쯤 남아 있었던 것 같거든.”
“정리해 놓은 짐에 끼어 있는 걸 본 것 같긴 한데요.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마님.”
“아니야, 내가 직접 찾는 게 낫겠어. 둘 다 여기 있으렴.”
백작 부인은 처음에 봤던 다 죽어 가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 넘치게 일어났다. 총총거리며 문을 빠져나가는 그녀와 “마님, 그렇게 빨리 걸으면 안 되세요. 마님…….” 하며 뒤따라 나가는 올리비아.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 힐다.”
아차,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네. 근데 어린 아드리안 얘기뿐만 아니라 초상화까지 볼 기회가 생겼는데 안 웃고 어떻게 배겨?
“네! 너무 좋아요. 우리 여기 한 달만 더 있으면 안 돼요? 얘기 들을 게 산더미처럼 남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 뭐가 됐든 네가 좋으면 그만이지만.”
웬만하면 그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벌써 백작 부인과 내가 자기를 두고 수다 떠는 데에 지쳐 버린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잔뜩 신이 난 채 백작 부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스템 협박할 때 아드리안의 과거 모습을 언제든 볼 수 있는 메뉴도 뜯을 걸 그랬어. 내가 너무 현물에만 집착했지. 물론 전 재산 10억 골드(억 단위 미만 생략)를 볼 때마다 마음이 풍족해지기는 하지만.
와당탕!
내가 디지털 지갑을 보며 행복해하는 동안 옆 방에서는 부부 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났다. 죄다 갈아엎는 소리가 나는데. 그냥 놔둬도 괜찮은 거겠지?
“자, 이거야, 힐다. 하나 남은 초상화지만, 원하면 얼마든지 가지렴.”
옆방에서 뭘 하다 왔는지 백작 부인의 옷이 군데군데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뒤늦게 쫓아와 백작 부인의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 내느라 올리비아가 고생이었다. 나는 백작 부인이 내미는 초상화를 보고 두 눈이 하트로 뿅 변해 버렸다.
“마음에 들다마다요!”
볼이 통통한 아기 초상화가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 눈앞에 있었으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힐다, 잠깐 그거…….”
“예?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아드리안이 뒤늦게 말려 보려고 몸을 일으켰으나 내가 초상화를 품에 꼭 안은 채 돌아보자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기나긴 한숨.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는 그를 백작 부인이 호호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올리비아 하나였다.
다음 날부터 나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백작 부인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내가 모르는 어린 아드리안의 이야기를 잔뜩 들었다. 그러다 운 좋게 초상화 두 점을 더 입수하게 됐는데, 아드리안 몰래 그린 것이니 절대 들키면 안 된다고 주의를 들었다. 서로의 비밀을 지켜 준다는 굳건한 약속을 하면서 백작 부인과 나는 동시에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여전히 병색이 짙은 백작 부인이지만, 나와 아드리안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예전의 생기를 되찾아 갔다. 세상 더 바랄 게 없다는 듯 행복해하다가도 이따금 옛날 생각이 나는지 눈물을 보이곤 했는데,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찔끔 울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백작 부인은 아무 잘못 없이 백작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라서 더.
“힐다, 울지 말렴.”
“아뇨, 마님께서 먼저 그치셔요. 저는 마음이 아파서…….”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눈물 나잖니…….”
“흐윽, 마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더 슬퍼져요…….”
문제는 우리 둘 다 남이 우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더 우는 기질을 타고났다는 건데, 서로 한 방울씩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면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눈물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가장 고생하는 건 나와 백작 부인을 둘 다 달래야 하는 아드리안이었다. 언제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몰라 항상 화장지부터 준비해 두었으며, 사건이 벌어지면 “울지 마, 힐다.”, “울지 마십시오, 어머니.”를 번갈아 말하며 한 장씩 뽑아 건넸다. 가끔 고생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몇 번이나 저를 달래 줬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나와 백작 부인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만큼 아드리안의 질투심도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듯했다. 어느 날 아침엔 또 어머니께 가는 거냐며 형형한 질투심을 드러냈지만, 나는 별걸 다 질투한다며 귓등으로 반사하고 놀러 갔다.
아드리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직 다 듣지 못했거든! 언제 별장에 다시 내려올지 모르는데 최대한 많이 들어 놔야 했다.
“힐다, 왔구나. 이리 와서 이것 좀 해 보렴.”
일주일쯤 지났을 때 백작 부인은 온갖 보석을 꺼내어 늘어놓은 채 나를 맞이했다. 가까이 가자 어쩐지 심상찮은 아이템 설명이 줄줄이 떴다.
「그레이스의 특별한 목걸이
토마스 산맥에서 소량 발굴한 레드 에메랄드로 만든 목걸이. 레드 에메랄드가 더 이상 채굴되지 않아 근래 들어 값어치가 10배로 뛰었다.」
「엠마가 세공한 보석 귀걸이
밝은 곳에서는 에메랄드색, 어두운 곳에서는 짙은 루비색을 띠는 귀걸이」
「앰버의 인생 역작 팔찌
타파이트를 작게 가공하여 박아 넣은 고가의 팔찌. 내구성이 낮아 가공이 어려운 보석이니만큼 보석세공사 앰버의 인생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마님, 이게 다…….”
“어머, 팔찌가 참 잘 어울리는구나. 아니다, 이게 더 잘 어울릴까?”
「베로니카의 팔찌
에레메이파이트를 투명 크리스털 모양으로 가공하여 박은 팔찌. 세계에서 가장 크게 커팅된 광물로, 세공사들이 직접 보고 그림을 그려 가곤 했다.」
내 손을 끌어다가 여러 팔찌를 이리저리 대보는데, 이거 엄청난 고가라고 소리치고 있는 아이템 설명과 달리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다. 딱 봐도 저 보석 몇 개로 저택 하나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저기, 저한테 살림 다 넘기시게요?
“이것과 이게 잘 어울리겠구나. 이 목걸이와…… 반지도. 흠, 팔찌도 세 개쯤 더 있는 게 좋겠지. 힐다, 이제 옷장에서 드레스를 골라 보겠니? 유행이 지나서 외출할 때 입진 못하겠지만, 실내에서 편하게 입고 활동하기에 좋은 옷만 선별해 놨단다.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둘러보렴.”
내게 줄 보석 장신구들을 은행 강도처럼 쓸어 담으면서 백작 부인이 말했다. 올리비아가 그에 맞춰 옷장을 훤히 열어 보여 주었고 아이템 설명도 경쟁적으로 떠올랐다.
「회피의 고대 드레스(백색)(+3)」
「적중의 고대 드레스(남색)(+5)」
「행운의 고대 드레스(분홍색)(+1)」
「민첩의 고대 드레스(붉은색)(+7)」
…….
최종 보스의 어머니라 그런지 아이템이 죄다 고대급이다. 신화급까진 사 봤어도 고대급 아이템은 아직 만져 보지도 못했는데. 거기다 강화도 꽤 돼 있잖아? 백작 부인이 직접 재료 넣고 강화했을 리는 없을 테니 처음부터 강화된 아이템을 산 거겠지?
“마음에 드는 게 있긴 할지 걱정이구나. 유행도 다 지났는데 괜한 주책이 아닐지…….”
“아뇨! 그럴 리가요! 다 좋은 옷들이라 오히려 고르질 못하겠는걸요!”
“그래? 고르지 못하겠으면 다 가지렴. 힐다, 이제 이리 와 보겠니?”
다 좋으면 다 가지라는 대부호의 엄청난 아량을 보여 준 백작 부인이 이번엔 지도를 내밀었다. 보석 장신구에 고대 드레스만으로도 눈 돌아가고 있던 나는 그녀의 배포가 이제 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설마 성이나 영지를 주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자, 여기, 여기, 여기에 내 소유의 성이 있단다. 정확히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것이지. 여기 북쪽에 있는 건 지난번에 말했다시피 설산 풍경이 무척 멋있고, 그 밑에 있는 건 사계절 내내 지내기 편하단다. 언제든 놀러 가도 휴양을 즐길 수 있지. 그리고 이쪽에 있는 건…….”
“마님, 이건 왜 제게 보여 주시는지…….”
“당연한 거 아니니.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보라는 거지.”
“네? 하지만 이건 너무 규모가……. 보석이랑 드레스와는 비교가 안 되는걸요. 이런 토지 재산은 백작님께 물려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가끔 10억 골드 보면서 흐뭇해하는 소박한 시민일 뿐인데요. 보석과 옷은 그렇다 치고 성이라니. 내가 기겁하며 묻자 백작 부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제 아버지께 모든 걸 물려받지 않니. 그걸로도 충분할 거란다.”
“그래도…….”
“힐다, 사양하지 않아도 된단다. 여자가 성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그 아이가 속상하게 하면 짐 싸서 놀러 갈 곳도 필요할 테고. 혹여나 찾아오더라도 문 열어 주지 말렴. 응? 신혼 때부터 기선을 제압하는 게 중요하단다. 이미 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와, 여자가 성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대. 오늘부터 백작 부인을 내 인생 롤모델로 삼기로 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렴. 너는 나를 살린 은인이나 다름없으니까. 보석이든 성이든 내게는 전부 필요 없는 것들이기도 하고. 정 그러면 하나만 가지는 건 어떠니? 대신 크기는 제일 큰 거로. 하나를 가지고 있더라도 알짜배기가 좋잖니.”
역시 글로스터 성이 좋겠다며 백작 부인이 북쪽 성에 크게 표시해 두었다. 관리인이나 사용인들은 그대로 일하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안식을 되찾은 듯 무척 평온해 보였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은 다 틀렸다. 며느리 사랑은 시어머니지! 적어도 나는 그래서 행복했다.
별장에 머문 지 3주 후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원래의 방문 목적이었던 재산 정리 및 작위 승계에 관한 일은 일찌감치 마무리됐는데 백작 부인과 놀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러다간 영영 눌러앉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아드리안은 귀환 일자를 과감히 결정했고 그 소식을 들은 백작 부인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래도 정식 작위를 넘겨받고부터 할 일이 많아진다는 걸 알고 있어서 붙잡지 않는 듯했다.
“잘 돌아가렴. 아드리안, 그리고 힐다 너도…….”
저택으로 돌아가는 날, 백작 부인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배웅하러 나왔다. 나와 아드리안이 머물렀던 3주간, 남은 생기를 죄다 끌어다 쓴 듯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이었다. 떠나보내는 길에 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지 입술을 꾹 깨물고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차피 밤새 울어서 눈가가 퉁퉁 부어 있는 바람에 숨겨 봤자 소용없었지만.
“조심히 잘…… 가렴. 길이 험난하니 중간에라도 꼭 쉬었다 가도록 하고.”
“네. 마님도 몸조리 잘하고 계셔야 해요. 그래야 저희가 또 내려오죠.”
내가 백작 부인의 손을 꼭 잡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자 그녀의 입술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희 걱정하지 마시고 몸을 더 돌보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다음엔 함께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아드리안의 입에서 나왔다. 조금씩 관계가 개선되고 있었다곤 하지만, 아드리안은 겪은 일이 있다 보니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물없이 지내는 건 나와 백작 부인뿐, 아드리안은 줄곧 한 발짝 떨어져서 관망하는 태도였다. 가련하게 굴다가도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하면서.
“조만간 다시 오겠습니다.”
아드리안이 처음으로 건넨 살가운 말에, 백작 부인은 끝내 눈물을 쏟아 버리고 말았다. 우는 백작 부인과 서툴게 달래는 아드리안. 두 사람을 지켜보는 내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돌아오기 전에 들은 건데 해리슨이 성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던 건 전부 올리비아가 실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안사람들도 다 알지 못하는 마님 얘길 어디서 그렇게 상세하게 주워들었나 했는데 출처가 여기였군. 따지고 보면 그녀 때문에 아드리안이 위험에 빠진 거나 다름없었으나, 해리슨이 총을 겨누고 협박했다는 말을 듣고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이기도 하고, 당장 죽게 생겼는데 버티기도 어려웠을 테고.
저택에 돌아오자 내 앞으로 편지가 와 있었다. 발신인은 ‘제프리’. 별장에 내려갔을 때 해리슨의 시신 위치를 알려 주기 위해 편지를 보냈었는데 그에 대한 답장인 듯했다. 나는 얼른 봉투를 찢어 편지를 열어 보았다.
〈힐다 씨에게.
경감님은 잘 수습하여 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 드렸습니다. 묘비는 세우지 못했지만, 원래부터 그런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셨으니까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분의 마지막을 아는 건 저뿐입니다. 경시청에선 경감님이 만든 위장 시체를 진짜라고 처리하고 묻기로 했습니다. 경시청 소속 경관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 사건이니만큼 빠르게 덮어야 해서요.
하지만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고 경시청 내부에서도 자정적인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거든요. 현실이 언제나 그렇듯, 금세 좋아지진 않겠지만.
힐다 씨가 어떻게 경감님의 시신이 어디 있는 줄 알았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제가 한 일도 비밀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힐다 씨가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에 관여했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경감님도 실은 멈추고 싶으셨을 거예요. 제가 아는 그분은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피해자를 가여워하셨으니까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순간에 경감님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 걸 멈추고 난 지금은 경감님도 힐다 씨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거예요. 물론 죽어도 입 밖으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