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공포 게임 메이드는 살아남았을까?
아이고, 머리야. 누가 내 목덜미에 대고 고무망치를 쾅쾅 내리찍는 것 같다. 머리가 얼마나 아픈지, 기절하기 전엔 계속 헛구역질할 만큼 속이 안 좋았는데도 거기에 비할 데가 아니었다. 딱 나아질 때만큼만 다시 기절해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근데 여긴 어딘데 이렇게 습하고…… 손발이 왜 이렇게 무겁지?
겨우 눈을 떠 봤는데 시야가 초록빛으로 번쩍거렸다.
컨디션이 아직도 안 좋군. 좋아, 그럼 다시 자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다 나아 있겠지.
「당신은 맹독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어서 해독하세요!」
「중독으로 자연회복량이 감소합니다.」
「중독으로 모든 이로운 버프가 해제됩니다.」
「체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아하, 독에 중독돼서 눈앞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거구나. 이유까지 상세하게 알려 주다니 시스템은 참 친절해…… 가 아니잖아! 내가 왜 독에 중독돼 있지?
“……드디어 깨어났군.”
음침한 목소리가 벽면을 타고 울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미친, 이 목소리는……. 제발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몸 상태가 꽝이라서 착각한 것이기만을 빈다.
“한참 일어나질 않아서 죽은 줄 알았지 뭐야, 하인.”
“당신……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그 전에 잠깐, 지난번에 못 했던 확인 먼저 해 봐야지?”
무슨 확인을 한다는 건지. 해리슨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으으, 두통만 좀 없어지면 살 것 같은데. 애써 정신을 차려 보려고 고개를 털고 눈을 떠 보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해리슨이 든 리볼버가 정확히 내 왼쪽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 지금 뭐…….”
질겁하며 물러나려 했으나 두 손이 결박된 채 쇠기둥에 묶여 있는 터라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설마, 아, 아니겠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이렇게 가까이서 총을 쏘진 않을 거야. 쟤는 범죄자만 죽이고 다니잖아. 나는 아직 평범한 하인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든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맨바닥에 발장구를 치고 있는데 끼리릭, 해머를 내리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들려왔다.
“웬 여자애가 방해하는 바람에 못 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가까이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게 됐으니.”
“자, 잠깐만. 지금 뭐 하는 거……!”
미친놈이 진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갈비뼈가 부서진 것처럼 엄청난 아픔이 밀려왔다.
아…… 악. 허파가 꽉 죄인 것처럼 일시에 숨이 다 빠져나갔다. 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지자 탄환이 옆으로 쨍강거리며 떨어졌다. 정말이지 딱 죽을 만큼 아팠다.
“그렇군. 너는 인간이었군.”
“흡, 으…… 흡.”
“엄살 부리지 마라. 이 성수 총알이란 거, 나도 내 발에 직접 쏴 봤으니까. 인간을 상대론 관통하긴커녕 간지럽지도 않던데, 꽤 아픈 척하는군. 하지만 이걸로 인간인 건 증명됐으니 뭐.”
“이게…… 아흑, 이게 무슨 짓…….”
이…… 미친 새끼. 독부터 총까지, 진짜 죽이려고 한 게 아니고서야…….
“성수 총알이란 거, 처음엔 사기당한 건지 긴가민가했는데 의외로 쓸 만하단 말이야. 몇 개 더 사 놓을 걸, 한 알씩 아껴 쓰려니 번거롭기 짝이 없군. 지난번에 그 조그만 여자애는 상처가 났던데, 그 여자애도 악마인가? 혹시 아는 게 있나?”
「당신의 몸에 흐르는 악마의 피가 성수에 반응합니다.」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자연회복량이 30% 감소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물리/마법 방어력이 60% 감소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근력이 40% 감소합니다.」
“크큭, 뭐. 이제 아무 상관 없지. 난 그 위대한 팔츠그라프 소백작님한테 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아니, 이제 백작님이신가?”
호흡이 모자라 눈앞이 어지러운 와중에 흰 글씨가 초록색으로 번쩍거렸다. 성수 총알이라니, 저런 이상한 건 또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르겠다.
작은 여자애라면 로지를 말하는 거겠지. 그때 총알이 스치며 화상 입은 게 영 신경 쓰이더니, 설마하니 성수 총알이었을 줄이야. 로지 괜찮겠지? 상처가 덧나진 않았을지 걱정이다.
이, 일단 해독부터 하자. 나부터 살고 봐야지.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한 채 끅끅거리며 눈을 돌렸다. 던전 클리어 보상으로 받았던 ‘만능 해독제’ 아이콘이 어서 써 달라는 듯 빛나고 있었다. 손은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 있었기 때문에 몸을 비트는 척, 턱으로 툭 건드리자 평소에 보던 정상적인 글씨가 떠올랐다.
「만능 해독제를 사용했습니다.」
「중독으로 인한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체력이 낮습니다. 포션을 사용하거나 휴식을 통해 체력을 회복하세요.」
알림과 시야를 진하게 물들여 가던 초록빛이 점점 옅어져 가고, 이내 완전히 말짱해졌다. 나는 겨우 숨을 몰아쉬며 곁눈으로나마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지하의 어두운 석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걸 보니 지상에서는 쉽사리 찾지 못할 만큼 깊이 박혀 있는 듯했다. 또옥, 똑.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들리는 전부였다. 납치하려고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다해 놓으셨구먼.
“경관들을 기다리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걸. 그놈들은 내가 준비해 놓은 사체를 검시하느라 바쁠 테니까. 해리슨 리지먼드로 완벽히 위장시켜 놨으니, 아마 지금쯤 파티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쿨럭, 그런 거 일일이 알려 줄 필요 없어요. 여기로 끌고 온 이유가 뭔지나 말해요.”
“아, 그거 말이지. 내가 백작님을 만날 수 있도록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제가 왜요?”
“같은 인간끼리 좀 돕지 그래. 너도 네 주인이 실은 악마라면 그 밑에서 일하기 싫을 거 아냐? 백작 부인이 지금의 백작을 악마라고 불렀다던데, 불길하지도 않나?”
“그건 어디서 들은 거예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네, 중요하죠. 팔츠그라프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려는 자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이니까요. 악마니 성수니…… 경감씩이나 하셨으면서 설마 그런 실체 없는 미신을 믿는 거예요?”
“그야 뭐, 직접 쏴 보면 알겠지. 하지만 이래저래 여의치 않단 말이야. 너희 백작님을 만나러 갔다가 웬 개한테 물려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해리슨이 투덜거리며 붕대가 칭칭 감긴 오른쪽 다리를 보여 주었다.
개는 무슨 개…… 앗, 설마 킁킁이? 모르는 새에 킁킁이가 그런 공로를 세웠단 말이야? 킁킁이 잘했어! 이런 기특한 짓을 했으면 곧장 보고했어야지! 최소 간식 열 개짜리인데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어야지……. 참, 걔 말 못 하지.
생각해 보니 훌륭한 실적을 낸 킁킁이와 달리 카지미어는 여행 내내 한 게 없었다. 돌아가면 에이브릴한테 러브레터 쓰는 일 외에 어떤 성과를 냈는지 소상히 보고받고 구박 좀 해야겠다.
“사실 한 번 기회가 있긴 했는데, 막상 만나니 흥분이 되어서 도저히 총을 쏠 수가 없더군. 많은 걸 묻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해서.”
뭐지, 훅훅거리면서 말하는 게 변태가 따로 없다. 여기까지 따라온 걸 보면 보통 집요한 변태가 아닌 것 같지만.
“그냥…… 그래, 믿고 싶었는지도 몰라. 내게 동료가 생겼다는 걸. 이 길은 꽤 외로우니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길이니까. 하지만 내가 옳아. 결국은 내가 옳다는 걸 다들 알게 될 거다. 범죄자 놈들을 처단하는 길만이…… 정의라는 걸.”
“…….”
“하지만 아무리 동료라도 자격 없는 처형을 한 거라면 죽어야지. 그게 정의니까, 내가 옳으니까…….”
해리슨이 까드득 이를 갈며 눈을 빛냈다. 단숨에 먹잇감을 낚아챌 맹수의 살기가 등골이 서늘할 정도인데, 어째 듣다 보니 코웃음 날 정도로 논리가 빈약했다. ‘내가 옳은 이유는 내가 옳기 때문이다’ 수준에서 벗어나질 않잖아.
으음, 정리해 보자면 이런 건가. 아이작한테 대신 신전 일을 증언시킨 걸 보면 아드리안의 살인은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문제는 살인의 이유를 과대 해석했다는 점에 있었다. 범죄자를 처단하면서 자기 나름대로는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하필이면 아드리안의 살인 장면을 봐 버렸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라고 여겼고, 동료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봐야겠고…….
뭐야, 이거. 평범한 과대망상증이잖아. 신념을 가진 미친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더니.
“그러니, 응? 네가 백작님을 모시고 와 줘야겠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요?”
“해야 할걸. 아까부터 몸이 뻣뻣해지는 게 느껴지지 않나?”
“…….”
“부담 느낄 필요 없어, 지정한 장소로 유도해 오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럼 이 해독제를 주지.”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병이 눈앞에서 찰랑거렸다. 거기다 악당의 미소까지.
으, 치사한 새끼. 독에 왜 중독됐나 했더니 이 새끼가 협박하려고 한 짓이었네. 나는 속으로 개소말돼지를 이용한 온갖 욕을 퍼붓고 개소말돼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어때, 목숨값치고는 싸게 먹히지 않아? 아무리 백작가에 충성을 바치는 하인이라도 제 목숨 아까운 건 알 텐데.”
해리슨이 짜증 나게 히죽거리며 말했다.
뭐 이 미친놈아. 나 이미 해독한 지 오래거든.
당장이라도 그 면상에 침을 뱉어 주고 일그러지는 꼴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적에게 유리한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아직 손이 묶여 있기도 하고.
“그렇죠, 듣고 보니 그러네요.”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가?”
시치미 뚝 떼고 끄덕거리자 해리슨이 눈을 번뜩였다.
“그럴 수밖에 없죠. 제 목숨이 달려 있는데 다른 선택지가 있겠어요? 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하인인 것을요. 돈 때문에 백작가에 붙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죽으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죠.”
“그래, 잘 생각했군.”
“그러니 이 손부터 풀어 주세요. 빨리 백작님을 모셔 와서 해독제부터 받게요. 꾸물거리다 늦어서 죽기는 싫거든요.”
재촉하듯 등 뒤로 묶인 손을 마구 흔들자 쇠사슬이 기둥에 부딪혀 철컹거렸다. 해리슨은 내 속내를 가늠해 보듯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기둥 뒤로 돌아가 손을 먼저 풀어 주었다. 놈이 내게 독을 쓴 건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순전히 내 말만 믿고 놔주진 않았을 테니까.
손발이 완전히 자유로워지자 나는 곧장 몸을 일으키며 손목부터 풀었다.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총 맞고 나니 제정신이 번쩍 들어서 괜찮았다.
어디 보자. 내가 가진 PVP 스킬은 ‘일격 승부를 위한 균형’ 하나. 아까 잡화 상점에서 산 주문서 스킬까지 합치면 꽤 넉넉한 편이다. 우선 맨 위에 떠 있는 스킬부터 써 볼까? 나는 오른편에서 빛나고 있는 스킬 아이콘 중 하나를 골라 눌러 보았다.
“독이 네 몸에 완전히 퍼질 때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빠르게 움직이면 그 시간 안에도 충분히 백작을 데려올 수 있을 거다. 접선 장소는…….”
퍼억. 어디선가 날아온 불타는 야구공이 그의 머리를 두들겨 패고 사라졌다. 소중한 듯 매만지던 리볼버를 떨어뜨릴 뻔하다가 겨우 붙들었다.
와, 저게 파이어 볼인가 봐! 진짜 불타는 공이네! 역시 스킬 쓰는 게 최고다 싶어서 이것저것 눌러 보자 해리슨은 억억거리며 맞더니 날 돌아봤다.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다섯 대나 얻어맞아서 황당한 얼굴이었다.
“방금 무슨…… 이건 뭐지? 해독제를 포기한다는 뜻인가? 죽고 싶은 건가?”
살의로 핏발 선 눈을 마주 보며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죽여 봐. 쉽지 않을걸. 그 전에 내가 널 죽여 버릴 거니까.”
“……하, 이거 일이 재밌게 됐는데.”
조용한 목소리와 달리 해리슨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해 갔다. 무도한 힘으로 카지미어의 목을 조르고 있던 그때가 떠올랐다. 모든 걸 찍어 부수던 광기. 방향을 잃은 투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번에야말로 아드리안을 만나면 성수 총알을 심장에 박아 넣을 심산이라는 걸. 아까 내게 한 것처럼 똑같이 하겠지.
죽이자. 죽여야겠다. 저 인간이라면 떼어 내고 떼어 내도 집요하게 따라올 테니까. 죽이지 않고서는 절대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나는 아직도 얼얼한 아픔이 남아 있는 왼쪽 가슴을 꾹 누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성수에 뒤덮여 전신이 타들어 가던 아드리안의 모습이 악몽처럼 어른거렸다가 사라졌다.
어둠 속 불빛처럼 발하는 두 눈과 살의로 마주친 순간.
「메인 퀘스트」
어?
「천적 살해」
…….
「악마의 조력자인 당신은 악마와 같은 천적을 갖게 됩니다.」
「이번에는 동맹 시스템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제거해야 할 천적은 ‘해리슨 리지먼드’입니다.」
「메인 퀘스트 - 천적 살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메인 퀘스트는 붉은 글씨로 떠올라, 상처에서 흘러내린 핏물처럼 내 눈을 할퀴었다.
살인마가 바로 앞에서 눈을 번뜩이는데도 나는 잠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미뤄 보려 했던 세 번째 퀘스트가, 피할 수 없는 순간 빠져나갈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나 버렸다. 어떻게든 마지막 퀘스트 안 띄우려고 노력했던 세월이 후루룩 떠오르며 허탈해졌다.
잠깐만,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아드리안이 해리슨을 죽일 순 없어, 천적을 죽이는 순간 그의 세상이 끝난다는 저주가 발현될 테니까. 하지만 해리슨을 살려 놓자니 저 성수 총알을 아드리안에게 쏠 테고, 내가 죽이자니 게임이 끝나 버리고. 게임이 끝나면 나는…….
“기세등등하더니 왜 얌전하지?”
“우아악! 깜짝이야!”
바로 앞에서 들리는 달갑지 않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옆으로 피했는데, 쇠파이프가 내가 방금까지 있던 자리를 휘이잉 갈랐다. 저, 저거 머리에 맞았으면 최소한 다시 기절이었다. 쇠파이프 끝에 이미……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것 같은데.
“죽여 보라며. 그 전에 날 죽여 주겠다며?”
스르르,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먹잇감을 해치우기 전 똬리를 푸는 뱀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치명 액션 스릴러물이 따로 없네. 거 너무 과몰입한 거 아뇨?
“그…… 건 사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겁먹어서 도망칠 줄 알고.”
“호오, 그래? 기세는 전혀 아니던데.”
아니, 진짜 생각할 시간 좀 주라. 보통 악당들은 주인공이 변신할 때뿐만 아니라 고민에 빠져서 독백 줄줄 늘어놓을 때도 가만히 기다려 주던데, 상도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저기, 경감님. 우리 이러지 말고 차분히 얘기를…… 우악!”
“안됐다만 여기까지 온 이상 널 살려 보낼 수가 없다.”
뒤늦게라도 사회적 교류를 시도해 보려는 나를 향해 다시 쇠파이프가 쇄도했다. 까아앙! 바닥을 내리찍는 살벌한 쇳소리에 팔에서 소름이 돋았다. 무슨 피치 못할 상황에 놓인 것처럼 말하네. 마을에 멀쩡히 있던 사람 기절시켜서 끌고 왔으면서.
하지만 정말 웬만해선 메인 퀘스트를 깨고 싶진 않았기에 포기하지 않고 외쳤다.
“이봐요, 진정하고 들어 봐요. 신전에서 뭘 봤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다 오해거든요. 보아하니 우리 백작님이랑 동료가 되고 싶은가 본데, 보자마자 총 쏘면 감정 상해서 그냥 가 버리실 걸요?”
“증명도 되지 않은 놈을 동료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아니, 그 동료라는 거, 그쪽이 일방적으로 원하는 거잖아요! 백작님은 생각도 없는데 자격이니 뭐니, 무슨 소용인데!”
‘총알 쏴 봤자 서로 감정만 상할 게 분명하다, 그 전에 아드리안은 자기가 동료 후보가 됐다는 것도 모른다, 알아 봤자 그럴 생각 전혀 없을 게 뻔하니 서로 갈 길 가자.’는 말을 눈물 나도록 완곡하게 돌려 말했는데 해리슨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이봐요, 내 말 좀…… 우악!”
「현재 체력이 전체 체력의 1/3보다 낮습니다.」
「적의 체력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가 휘두르는 쇠파이프 끝자락에 걸려 팔을 얻어맞자, 상단 체력 상태바가 빨간색으로 변해 깜박거렸다.
지금 내 레벨은 44, 총 체력 1332 중 441. 방금 살짝 맞은 탓에 420으로 쭉 내려앉았다. 해리슨은 레벨이 81, 총 체력 1546 중 현재 체력 1076……. 내 체력은 독 때문에 훅 떨어졌는데 이렇게 치사할 수 있냐. 해리슨은 그나마도 아까 주문서 몇 개 써먹어서 낮아진 거지, 처음엔 거의 풀피였나 보다.
피 차이가 이렇게 큰데 PVP라니, 네가 정말 정의를 수호한다면 체력 회복하고 다시 만나자, 비겁한 새끼야!
속으로 쉴 새 없이 쫑알거리는 와중에도 사실 해리슨의 공격을 다섯 번은 족히 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피 원피스라도 입고 나올 걸 그랬다. 실컷 회피하며 약 올리면서 틈을 보고 공격하는 게 내 체질인데!
“한낱 하인이 이렇게나 충성스러울 줄은 몰랐어. 주인을 위해서 목숨까지 던지겠다니……. 보는 내가 눈물이 날 정도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얼굴로 말하니까 신빙성이 영 떨어지는데요.
“그러잖아도 거슬렸는데 협박도 통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없애는 게 낫겠지.”
눈이 어째 죽은 생선 눈알처럼 흐릿했다. 내가 옳아, 나라도 죽이는 게 맞아, 사회가 심판해 주지 않으니까…….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는 그는 도저히 옛날의 총기 있고 날카롭던 경감같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설득하려고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게 이미 글러 먹은 것 같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했다.
“이봐요,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당신 처음부터 그럴 심산으로 경관이 된 건 아닐 거잖아요. 일반 시민인 제가 왜 여기서 당신한테…… 윽, 죽어야 하는 건데요?”
“말해 봐야 뭘 알겠어.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아무리 잡아서 처넣어 봐야 제대로 된 벌 하나 받지 않고 풀려나는 놈들을 보는 심정이 어떤지, 말해 봐야 누가 알아주겠냐고.”
“그거야 경시청 내부에서 해결할 일이지……!”
“원래 옳은 일엔 다소 희생도 필요한 법이지. 작은 희생을 주저하다가 대의를 그르칠 순 없다. 나는 백작을 만나서 검증만 해 보면 돼.”
대화를 나누면서 ‘그래, 그래. 세상사 다 그런 거지. 그런데도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더러운 세상 어쩌겠냐…….’ 하며 술 한잔 들이켜는 직장인들처럼 토닥이고 끝나는 엔딩을 바랐는데, 이런, 생각보다 깊은 고민이었다. 그래, 뭐. 들어 보니 회의감이 들 법한데, 나랑 아드리안이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67」
「크리티컬! -80」
「크리티컬! -93」
해리슨은 비참한 듯 중얼거리면서도 꾸준히 유효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내 체력은 꾸준히 깎이고 있었다. 위험한데, 체력이 순식간에 100대로 내려가 버렸다. 성수 페널티 때문에 체력은 도무지 차오르질 않고……. 이 이상 맞으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까앙!
쇠파이프가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바닥을 내리친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했는데 해리슨이 그걸 예상해서 뒤로 휙 피했다.
“어딜!”
하지만 피할 걸 예상하고 내가 뒤쪽으로 길게 다리를 휘두르자 또 그걸 예상한 해리슨이 반대쪽으로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벌릴 걸 예상한 내가 잽싸게 주문서 아이콘을 눌렀고, 그걸 또 귀신같이 예상한 해리슨이 불타는 야구공을 피했다.
하지만 소싯적 오락실에서 놀았던 경험을 살려 아이콘을 와다다다 누르자, 퍽퍽거리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해리슨을 두드려 팰 수 있었다.
「-20」
「-11」
「-32」
「-5」
「-46」
후우, 힘든 접전이었다. 그 와중에 파이어 볼 다 써 버렸네. 주문서 좀 더 사 둘 걸 그랬어. 빨갛게 반짝거리며 훅훅 닳는 해리슨의 체력을 흘끗 쳐다본 순간, 쭈그려서 얻어맞기만 하던 해리슨이 갑자기 내게 돌진해 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깜깜해지며 뒤로 훅 떠밀려 기둥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크리티컬! -89」
눈에 힘을 주어 겨우 치뜨자 시스템이 너 조졌다고 말해 주었다. 이제 남은 체력은 겨우 91……. 이쯤 되니 위기감도 드는데 이 불공평한 전투에 대해 마구 불평하고 싶어졌다.
아픈 건 둘째치고, 쟤는 평타도 높은데 치명타는 왜 또 이렇게 잘 터지는 건데? 저놈한테도 설마 숙면 스킬 있는 거 아냐? 저 커다란 코트 안에 행운 원피스 입고 있는 거 아니냐고!
“이봐요, 진짜 여기서 끝장 볼 거예요?”
“그래.”
“다른 사람들은…… 제프리 경사님은요? 어? 맨날 그렇게 같이 붙어 다니더니, 경사님이 투덜거려도 얼마나 당신을 따르는지 보였는데! 당신이 가짜 증인 들이밀어서 경사님이 얼마나 곤경에 처했던 줄이나 알아요? 그것도 대의를 위한 사소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냐고요!”
“…….”
그 찰나의 순간 놀랍게도, 광신도처럼 맹목적이었던 눈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해도 끄떡없었던 놈이……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감상할 시간이 없었던 난 얼른 스킬창에서 ‘몸통 박치기’를 눌렀고, 발 구르기 없이 곧장 뛰어갔다.
기절하거나 소지품을 떨어뜨리거나 어느 쪽이든 좋았다. 간다, 간다, 부딪친다, 으아아!
“으윽!”
쿵. 산과 산이 충돌하는 듯한 둔중한 소리와 함께 해리슨이 촤아악 미끄러져 벽에 부딪혔다. 1순위는 기절, 2순위는 성수 총을 떨어뜨리는 거였고 3순위가 쇠파이프였는데 아쉽게도 3순위에 걸렸다.
나는 얼른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일어나려는 놈의 목에 겨눴다.
“도로 앉으시죠. 이걸 박아 넣기 전에.”
금방이라도 꿰뚫을 듯 목에 갖다 대고 꾹 누르자 해리슨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내려갔다. 천천히 두 손을 드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턱짓했다.
“품에 넣어 둔 성수 총, 이리 내놔요. 총알도 모조리 다.”
“……여유로운데. 나라면 해독제부터 달라고 할 텐데.”
“그만 지껄이고 얼른 내요. 죽기 싫으면.”
한 손으론 쇠파이프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스킬 아이콘을 꾹 눌렀더니, 허공에 형체 없는 화살이 나타나서 해리슨을 노렸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심장을 향해 있어 위협을 느낄 만한데도 그는 입술을 비죽 끌어 올렸다.
“왜? 날 죽이고 가져가면 되지.”
“…….”
“이봐, 하인. 허풍 떨어 봐야 소용없어. 그렇게 망설여서는 평생 사람 하나 못 죽일 거다. 하기야 사람 죽이는 일을 아무나 하는 건 아니지.”
해리슨이 낄낄거리며 품을 뒤적거리더니 여유롭게 시가를 꺼내 물었다. 미친놈이 그 와중에 예리하기까지 하다.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며 쇠파이프를 꽉 쥐었다.
지금 이 상황만 놓고 보면 내가 유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니다. 절망스럽게도 나는 치명타 한 번 터지면 골로 가는 체력인 데 반해 해리슨의 피는 아직 900이 넘게 남아 있었다. 지금은 내가 독에 중독되어 있고 살인 자체를 망설인다고 생각해서 여유로울지 모르지만,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 해.
주문서도 몇 개 안 남은 마당에 그와 승부를 볼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일격 승부를 위한 균형’ 스킬을 쓰면 서로 체력이 1이 남는 공평한 상황이 되고, 누구든 먼저 맞으면 죽게 된다. 스킬 아이콘에 손을 대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해리슨에게 간파당했듯 나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해리슨을 죽이면 게임이 끝날 테니까.
심장이 터지도록 뛰었다. 단순히 죽이는 거라면 이미 죽이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아드리안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죽이려다가도 멈칫거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필사적으로 다른 길을 모색했다.
해리슨을 설득하는 길 외에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퀘스트가 바뀔 경우는 없나, 천적이 바뀌거나 그 전에 아드리안의 저주가 완전히 풀릴 수는 없을까. 하지만 모두가 모호하고 불확실할 뿐, 어느 것도 눈앞에서 붉게 빛나는 메인 퀘스트만 못 했다.
울분이 터졌다. 살인에 대학살, 거기다 천적 살해까지. 이 게임은 왜 자꾸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거야? 할 만한 다른 퀘스트도 많잖아! 공포게임이면 다냐고! 게임이 끝나면 다시 들어올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큭큭, 표정이 아주 볼 만한데. 그래, 사람은 아무나 죽이는 게 아니라니까.”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분한 나머지 손이 덜덜 떨리는데, 그걸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해리슨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눈에서 피가 나도록 해리슨을 노려보면서,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남은 메인 퀘스트들을 곱씹어 보았다. 살인, 대학살, 천적 살해……. 보통 메인 퀘스트는 게임의 목적이나 스토리에 밀접한 관련이 있도록 설계하곤 하는데, 이 게임은 영 아니었다. 스토리 기획자가 발로 썼나 보지…….
아니, 잠깐. 정말 연관이 없나?
이 게임은 원래 공포게임이었지. 사람을 죽여서 악마의 힘을 되찾게 해 주는 게임…….
“왜 그러지? 죽인다고 기세등등하더니, 막상 기회가 오니 못 죽이겠나 보지?”
“…….”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데. 가엾을 정도로군. 이만 포기하고 백작을 데려오는 게 어때? 죽이는 게 아니다, 확인하려고 하는 거지. 떳떳하면 죽지 않겠지.”
이제 알겠다. 내게 세 개의 메인 퀘스트가 뜬 이유…….
첫 번째 퀘스트 살인으로 아드리안의 목숨을 구했었지. 두 번째 대학살로 아드리안은 모든 힘을 되찾았고, 마지막 퀘스트 천적 살해……. 아드리안의 마지막 장애물인 천적을 없애, 게임의 목적을 달성하는 용도였다.
애초부터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저주를 끝낼 수 있으면 누구든 괜찮았던 거야.
당장 이걸 회피해도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타나겠지. 천적을 죽이라고 하든, 더 가혹한 퀘스트를 내놓든.
게임의 원래 목적에 맞게, 아드리안이 완전해질 때까지…….
“힐다.”
아드리안, 나는 널 구하기 위해 이 게임에 들어온 거야.
그녀를 찾는 건 쉬웠다. 미리 피를 먹여 둔 덕에 그 자취를 따라가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는 심지어 그녀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까지 되돌려 볼 수 있었는데, 순간순간을 따라가며 음미해 봤을 평소와 달리 지금은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힐다가 제 발로 떠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그녀라면 작별 인사 정도는 얼굴 보고 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른 인간에게 끌려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어떻게 처리해 줘야 할까. 그녀를 찾아가는 길 내내 아드리안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죽일 테지만, 얼마나 잔인한 끝을 낼지가 관건이었다.
그가 아는 모든 잔혹한 고문 방법을 떠올려도 성에 차지 않았다.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을 후회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꼭 그렇게 되도록 할 테고.
마침내 그가 도착한 곳은 어두운 지하의 석실이었다. 주인 없이 버려진 지 오래인 듯, 문을 열자마자 꿉꿉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둘.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순간 쇠파이프를 든 힐다가 보였다. 벽에 기대앉은 남자는 얼마 전 경시청에서도 만났던 해리슨……. 그의 천적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전에서의 학살 이후 늘 일정하게 유지됐던 외부의 힘이, 눈에 띄게 강해져 있었다. 운무처럼 힐다 주변을 검게 맴돌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녀와 한 몸인 양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시스템이 정해 놨다는 임무, 그중 마지막인 세 번째가 주어졌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힐다를 믿어야 해. 꼭꼭 눌러 놓았던 불안이 삽시간에 정신을 집어삼키려 했으나 애써 반대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끝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 힐다는 그의 곁에 남는 선택을 해 왔고, 여러 번 증명해 왔으니까.
손댈 수 없는 외부의 힘이 주위에 맴도는 걸 보면서도, 그녀를 가둬 두지 않는 건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이전에 보여 왔던 선택이 앞으로도 다르지 않으리라는 희망.
“힐다.”
하지만 지금의 힐다는 달랐다. 늘 강하고 확신에 찬 눈빛만 보여 줬던 그녀가 무척 슬퍼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로 차올라 흘러내릴 듯한 슬픔이 눈가에 가득 고여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힐다. 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해 놓고, 왜 곧 헤어질 사람처럼…….
그사이 어떤 결정이라도 한 걸까. 주변에 흐르던 외부의 힘이 강해지고, 그녀의 세상이 제 세상과 시시각각 달라져 가는 게 느껴졌다.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나는 너를 놓을 수 없는데, 너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제발 부탁이야. 내 손을 놓지 말아 줘.
‘그럼 죽여서라도 가져.’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끔찍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러붙어 속삭거렸다. 헉하고 숨이 멈춘 사이에도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저 여자애는 자기 세계로 돌아가면 당신 따위는 금방 잊을걸. 필멸자들의 마음은 그토록 가볍고 덧없는 것인데, 불쌍하게도.’
‘그녀는 금방 다른 인간을 사귀고 짝짓기할 테지. 당신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로 남을 거야. 당신만 혼자 남아, 하찮은 감정에 사로잡힌 채 평생을 보내겠지. 가련하기도 하지…….’
‘용납 가능해? 한낱 인간이 당신을 그렇게 지배하도록 놔둘 셈이야?’
‘잃는 게 싫으면 죽여야 해. 가지지 못하면 부숴 버려야지. 시체라도 남겨서 끌어안고 살아. 그게 우리들의 사랑이잖아.’
‘사랑해, 스승님. 사랑해, 사랑해.’
‘당신이 이제야 나를 온전히 이해하겠구나.’
이제까지 이 게임이 내게 살인을 종용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를 살릴 방법이 살인뿐이었기 때문이었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사실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데, 막상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자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해리슨은 끝까지 아드리안을 쫓아다닐 거다. 굳이 이번이 아니더라도, 저 놀랍도록 광기 어린 집요함으로 끝내 심장에 성수 총알을 박아넣겠지. 아드리안의 힘은 천적인 그에게 통하지 않을 테니 무방비할 테고. 해리슨에게 당하든, 해리슨을 직접 죽여 릴리트의 저주가 실현되든, 보이지 않는 적이 언제 총을 쏠지 몰라서 늘 가슴 졸이며 숨어 살든, 그러다 다시금 찾아온 질병에 고통스러워하며 여생을 보내든…… 해리슨이 존재하는 한 아드리안의 끝은 비극이겠지.
어쩌면 나는 세 번째 메인 퀘스트 따위 무시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호락호락 당해 주진 않겠지만, 운이 좋으면 죽을 때까지 게임을 끝내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드리안의 끝이 그런 비극이라면…… 내가 필사적으로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을 이유도 없어지는 셈이었다. 너 없는 세상에 나 혼자 살아봐야 뭐 하겠어.
해리슨만 없애면 아드리안은 앞으로도 무사할 거다. 그 해리슨을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고.
허탈했다. 선택지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처음부터 단일 선택지였다니. 이 게임에 들어왔을 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고 선택할 권리는 없었던 거다. 어쩌면 아드리안을 만난 순간부터 없었을지도 모르겠네.
게임을 끝내지 않을 수많은 이유를 떠올렸었다. 살인도 해 버린 마당에 다시 돌아가 봐야 사회 부적응자밖에 더 될 거냐고. 아드리안이 내가 없으면 얼마나 울지 모르겠다느니, 화나서 애먼 사람 죽이러 다니면 어쩌냐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부 변명이었다. 나는 아드리안만 있으면 그만이었고, 그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간절히 바랐지만.
“어차피 헤어져야만 한다면, 네가 네 세상에서 살아 있기를 원해.”
나는 아드리안을 떠나기 위해 게임을 끝내는 게 아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 게임을 끝낼 수밖에 없는 거지.
아드리안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를, 멀리 서 있는 그에게는 똑똑히 닿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아서 그는 줄곧 날 믿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드리안은 이게 피치 못할 선택인 건 알까. 버림받았다고 상처받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미안, 이제 보니 나를 믿지 못할 만했구나.
“미안, 아드리안.”
나는 힘없이 웃으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를 건넸다.
미안. 끝까지 못 지켜 줘서 미안. 사랑한다고 해 놓고 떠나서 미안. 약속 못 지켜서 미안.
“그래도 난 네가 더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누군가는 또 다른 최선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간이 한참 지나 이 순간을 문득 되돌아보며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생각을 정리하는 그 짧은 사이, 잠깐 잊고 있던 해리슨이 갑자기 날 밀치고 일어나 품에서 총을 꺼냈다. 뒤로 떠밀려 넘어진 사이 스킬은 허공을 강타했고, 해리슨의 총은 정확히 아드리안을 향했다.
해머가 끼리릭 내려가는 소리가 나는데도 아드리안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스킬창을 열었다.
「‘일격 승부를 위한 균형’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체력이 1 남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아드리안에게 총알을 박아 넣을 기세라, 나는 손에 닿는 아무거나 쥐어서 던졌다. 정신없이 던지고 나서야 그게 작은 돌멩이라는 걸 알았다.
따악! 타앙!
돌멩이가 해리슨 뒤통수에 맞는 소리, 그리고 그가 쏜 총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크리티컬! -1」
거대한 총소리와 함께 총알은 아드리안의 어깨를 뚫을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 문을 맞고 튕겨 나갔다. 무너지는 해리슨. 그의 머리 위에 남아 있던 체력 1이 빨갛게 깜박거리며 0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아드리안을 보고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었으나 시스템 알림이 주르륵 뜨며 시야를 방해했다.
「메인 퀘스트 – 천적 살해를 완료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모든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게임이 종료되어 로그인 화면으로 돌아갑니다.」
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가차 없이 게임에서 튕겨 나갔다.
‘죽여서라도 가져. 그게 우리들의 본능인걸.’
릴리트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희롱했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말았을 목소리였으나 지금만은 그럴 수 없었다. 짙은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고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호흡이 가빠졌다. 죽여서 그 시체라도 끌어안고 사는 게, 너를 떠나보내는 것보다 나을까. 정말 그럴까.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악마란 종족은 정말이지 그렇게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이니까.
너를 놓칠 바엔, 그래, 너를…… 죽여서라도.
본능적인 살의에 떠밀리듯 너를 보았을 때. 아. 맥을 툭 끊기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음산하게 물들였던 모든 잔인한 생각들이 일시에 증발해 사라졌다.
이해……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상대가 생기고 나서야, 애착이나 불안 따위의 감정을 깨달았다. 힐다를 향한 제 마음 일면에서 릴리트를 닮은 끔찍한 집착을 발견했던 것도 이미 수차례였다. 그래서 줄곧 증오스럽기만 했던 릴리트를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어. 나는…….
‘뭘 부정하는 거야? 간절히 바라고 있잖아!’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아냐. 아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해. 네가 날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 이상으로, 네가 죽는 게 싫어. 울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
네가 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날 믿고 사랑해 주었던 것 이상으로.
채 닿지 못한 목소리가 촛불 꺼지듯 사그라들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울고 있었다. 가식도 위장도 아닌 눈물이 막을 새 없이 쏟아졌다. 안개 낀 듯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져,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쩌면 악마로서는 자격 미달인지도 몰라. 나는 어느 세상에도 속하지 못한, 덜떨어진 회색이니까. 어디 있든 반쪽짜리니까.
“어차피 헤어져야만 한다면, 네가 네 세상에서 살아 있기를 원해.”
나도 그래.
“미안, 아드리안. 그래도 난 네가 더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그래, 힐다…….
네가 행복했으면 해. 네게 받은 사랑이 따뜻했던 만큼,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힘을 되찾고, 예전처럼 아프지도 않은데도 끔찍하도록 무능했다. 그녀의 결정을 사형 선고처럼 기다리는 일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윽고 모든 것의 끝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고, 힐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모든 색이 사라졌다. 갈 곳 없는 잿빛 몸뚱이만 남기고, 또다시.
천적인 해리슨을 죽이자 비로소 저주가 풀렸다. 오랜 세월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져, 자취 없이 사라졌다. 심장을 꽁꽁 옭아매던 밧줄이 끊기듯, 숨이 몰아서 터졌다.
저주는 완전히 풀렸지만, 그의 세상은 산산이 조각나 부서져 버렸다.
내 세상이 네가 아닌 그 무엇일 리 없는데.
셀 수 없이 긴 생을 살았지만, 짧은 순간 행복했다. 찰나처럼 느껴지는 잠깐의 시간 동안, 황홀하도록 행복했다.
모든 게 검고 희게만 보였던 세상이지만, 너와 함께 있을 땐 썩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아름답다고도 느껴졌던 것 같아. 봄의 강을, 여름 햇볕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느꼈어. 너와 보내는 가을과 겨울은 어떨까. 이번 겨울은 이왕이면 더 추웠으면 좋겠다, 차가운 네 손을 데워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간지러운 생각을 하며 남은 시간을 설레도록 기다렸어.
네가 있어야만 그 모든 게 의미 있었는데.
“…….”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 흘렸다.
내가 너를 놓친 거야, 힐다. 내가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해서 네가 떠난 거야. 네게는 아무 잘못 없이, 오로지 내 탓이야. 그러니 제발 다시 날 봐 줘. 데려가 줘. 이 추운 어둠 속에서 꺼내 줘, 항상 그래 왔듯이…….
그러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내가…… 너를 놓친 거니까. 따라가지 못했으니까…….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찾았다. 그저 한 움큼뿐인 피라서 희미하기 짝이 없었으나, 거의 다 지워져 버린 흔적을 끝까지 쫓아갔다. 그건 마치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넓은 홀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를 잡아내는 거나 다름없었으나, 작은 기척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죄다 훑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힐다의 존재가 엷게나마 느껴진다는 점이고, 절망적인 건 여기에선 무슨 수를 써도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까마득히 멀어, 자칫하면 완전히 놓쳐 버릴 수도 있었다. 실낱같은 기척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술법을 떠올렸다. 최근에 득달같이 읽어 댄 고대 서적들로부터 습득한 지식을 끌어 올렸다.
힐다, 너를 놓친 건 내 잘못이야. 그러니 네가 오지 못한다면 내가 가야겠지. 아득한 시공을 넘어 나를 찾아왔듯, 이번에는 내가 너를 찾아갈 차례야.
다시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외의 것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게 설령 세상일지라도.
앞뒤 분간 없이 광활하게 뻗은 백색의 공간. 시스템은 로그인 화면이라고 불렀던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해리슨…… 죽은 거 맞지? 마지막 퀘스트를 완료했다고 떴으니까 아드리안은 이제 안전해진 거겠지?
비록 우리는 헤어지게 됐지만, 천적의 위협 없이 살 수 있게 됐으니 충분해. 원래의 그는 강하고 내가 없어도 충분히 오랜 시간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사람을 넘어선 존재였으니만큼 나는 최대한 빨리 잊길 바랐다. 수많은 세월 속에 잠깐의 유흥거리였다고, 저주를 받아 약해지는 바람에 실수처럼 애틋해지고 말았노라고. 떠난 나를 실컷 원망해도 좋으니, 슬퍼하지만은 않았으면 했다.
“아드리안…….”
하지만 그게 안 된다는 거 알아. 떠날 때 그 울보는 이미 울고 있었는걸. 그의 힘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도, 속수무책인 양 지켜보고만 있었다. 체념한 사형수처럼, 제 목에 올가미가 덧씌워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이런 끝이 기다리는 줄 알았으면 더 잘해 줄 걸 그랬다. 당장 오늘 아침이 뼈저리게 후회됐다. 피 그깟 게 뭐라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화를 냈을까. 먹이고 싶으면 대야째로 가져오지 소심하게 와인 잔이 뭐냐고 할 걸 그랬다. 심부름 끝나면 가서 툭 털어놓고 얘기하겠다고 다짐만 하지 말고, 곧장 저택으로 가 버릴 걸 그랬다. 세 번 하고 더 이상 못한다고 자버린 날 밤, 네 번까지는 할 걸 그랬다.
오늘 아침 너의 품은 너무도 따뜻했고, 나를 어루만져 주는 손은 눈물 나도록 다정했는데.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데, 꿈속에서의 일처럼 이미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를 바라볼 때 애틋해지던 눈빛이 지금은 사무치도록 아팠다. 가슴을 퍽퍽 두드렸는데 도무지 아픔이 가시질 않아서 엎드려서 울었다.
띠로로롱.
아드리안…… 아드리안. 헤어졌더라도 여전히 널 사랑해.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더라도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띠로롱!
하지만 너는 날 잊었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나와 보냈던 모든 행복한 시간을 잊었으면 했다. 네가 추억을 되새기며 슬퍼하면 난 멀리서라도 더 슬퍼질 테니까…….
띵띠링띵!
……아니, 근데 아까부터 이게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울고 있는데, 분위기 좀 잡아 보려고 하면 방해를 하네.
「게임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음소거라도 해 둘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빰빠라밤! 하는 요란한 팡파르가 울리더니 사방에서 폭죽이 터졌다. 이어지는 배경음이 너무나 경쾌하고 발랄해서 눈물이 더 나려고 했다.
눈앞이 그렁거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스템이 눈치 없이 소시오패스짓 하는 것만은 알겠다.
이게 지금…… 축하할 때야? 유저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해 놓고 축하는 무슨 축하!
시스템 너 나한테 왜 이러냐고 멱살 잡고 싶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시스템은 축하 문구를 쓱싹 지우더니 새로운 글씨를 써 나갔다.
「‘힐다’는 당신의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플레이어 캐릭터(PC)입니다.」
「‘힐다’의 발자취
- 레벨 : 44
- 직업 : 하인
- 보유 스킬 : 7개
- 인벤토리 : MAX
- 완료한 퀘스트 : 3개
- 당신이 선택한 루트 : 악마의 조력자」
레트로풍 효과음이 발랄하게 흐르며, 허공에 흰 글자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이 엔딩 크레디트를 보여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스킵 버튼이라도 찾으려고 했는데 이런 유저 비친화적인 게임 시스템이 그런 걸 만들어 놨을 리가 없다. 엔딩 크레디트 같은 거 요즘 누가 본다고…….
「당신이 받았던 칭호
- 하찮은 일꾼
- 양심 없는 하찮은 일꾼
- 양심 없고 성실한 일꾼
- 악마의 예비 오른팔
- 악마의 오른팔
- 악마의 첫 연인
- 악마의 주인님」
지금 게임 기록이나 보여 줄 때냐고 어이없어하다가도, 하나씩 읽다 보니 점점 몰입하게 되었다.
맞아, 맨 처음 게임에 들어갔을 때 ‘하찮은 일꾼’이었지. 베개 좀 훔쳤다고 양심 없다고 칭호로 까이고. 아드리안이 타 주는 독차를 거부해 예비 오른팔이 됐다가, 살인하고 나서 정식 오른팔이 됐었지. 카지미어한테 저 오른팔 자리 안 뺏기려고 실랑이 벌였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연애까지. 나 은근히 게임에서 뭘 많이 했잖아?
「당신이 받았던 부칭호
- 사형 도우미」
아, 저거저거! 사형장에 밧줄 제공하면서 아드리안도 나도 꿀 빨았지.
「당신의 명성
- 명성 레벨 : 0
- 악명 레벨 : 17
- 악명으로 꼬신 악인 : 총 898명
- 스킬 강화로 사용한 악명 포인트 : 16」
처음 악명 시스템이 개방됐을 때, 그로버가 악수를 청해 오고 주변의 선인들이 내 눈치를 보며 달아났을 때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때 참 황당했는데…….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행복하고 해맑았던 시절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당신의 호감 대상들
- 에밀리 : (*´▽`*) 힐다를 기다리는 중……. lv.3 (10/30)」
그저 옛날 앨범 뒤적거리는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공백을 둔 다음 느릿느릿 떠오르는 친숙한 이름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에밀리…‥.”
어떡해. 에밀리가 날 기다리고 있대. 에밀리는 내가 사라진 줄도 모를 텐데. 아드리안과 갑작스럽게 헤어져서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눈물이 글썽거렸다.
에밀리, 기다리지 마. 나 이제 못 돌아간단 말이야.
에밀리에게는 내가 실종됐다는 소식이 전해질 텐데, 그러잖아도 착하고 여린데 소식을 듣고 얼마나 충격받을지……. 아드리안으로 인한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에밀리를 떠올리니 더 괴로워졌다. 이러다간 눈물에 질식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케이든 : |ˬ•`๑) 힐다를 기다리는 중……. lv.10 (MAX)
- 그로버 : |ˬ•`๑) 힐다를 기다리는 중……. lv.10 (MAX)
- 로지 : (´✪▽✪`)♡ 키가 0.3㎝ 컸다는 소식을 가지고 힐다 기다리는 중……. lv.10 (MAX)
- 델로레스 : (﹡ˆ︶ˆ﹡) 베개 선물을 사서 힐다를 기다리는 중……. lv.10 (MAX)」
에밀리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아끼던 사람들이 모두……
「당신과 인연 맺은 사람들
- 레티샤 : (。•́︿•̀。) 힐다를 찾아 헤매는 중…….
- 샬롯 : (。•́︿•̀。) 레티샤와 함께 찾아 헤매는 중…….
- 카지미어 : (。•́︿•̀。) 아드리안과 힐다를 찾아 헤매는 중…….
- 킁킁이 : (´;⌓;`) 힐다를 찾아 헤매는 중…….
- 삼색이 : ฅ(ΦㅅΦ) 간식 내놓으라냥」
날…… 기다리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사라지면 게임 속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게임 속 시간은 게임할 때만 흐르는 것이니만큼 내가 로그아웃하면 그들도 멈춰 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없어도 게임 속 시간은 꾸준히 흐르고, NPC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각자의 시간을 영위하며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게임 속 세계도 현실이었고, 그들도 사람이었던 거야.
「- 프리실라 : (´-`).。oO(아드리안과 힐다가 언제 도착할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중…….
- 올리비아 : (´-`).。oO(백작님과 힐다가 언제 도착할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중…….
…….」
게임에서 만난 이들의 이름은 계속해서 올라왔지만, 형편없이 눈물에 젖어 읽지 못하고 있었다. 속에서 끅끅거리며 올라오는 울음을 억지로 누르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계속 닦아 봐도 여전히 그렁그렁했다. 혼자 여기서 뭘 하는 건지 갑자기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날 기다리는,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저기 있는데.
기다리지 마, 이 바보들아. 마음 아파하거나 울지도 마. 달래 주러 못 간단 말이야.
「~END~」
「당신의 게임은 끝났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요?」
“왜, 왜 아드리안 얘기는 없는데. 아드리안도 보여 줘…….”
추억 하나라도 더 새기며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