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33)

10-2. 공포게임 메이드는 살아남았을까?

천적이 나타난 지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아드리안이 직접 손을 댈 수 없다면 남이 처리하면 그만이지. 지금쯤 경관들이 사방을 샅샅이 뒤지며 찾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그래서 아드리안 곁에 카지미어와 킁킁이를 보디가드로 붙여 놨다.

무려 악마 둘에 지옥견 하나, 거기다 나까지. 아무리 천적이라 해도 쪽수로 밀어붙이는데 제깟 놈이 어쩔 거야. 여차하면 로지도 불러서 뒤에서 엄호를 부탁할 예정이었다. 앞으로 아드리안이랑 만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넷은 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항상 함께였다. 식사할 때도 함께, 정원에서도 함께, 티타임도 함께. 그렇다 보니 처음에 천적 때문에 난리 칠 땐 흐뭇해하던 아드리안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킁킁이야 가끔 삼색이 꽁무니 쫓아다니느라 사라지곤 했지만, 카지미어는 사명감에 맹렬히 불타는 바람에 화장실까지 따라가다가 처맞았기 때문이다. 처맞고 우는 카지미어를 “알지, 알지. 네 충성심이야 내가 모르겠어? 아무리 그래도 화장실은 너무 했다.”라며 위로해 주는 모습을 보고 나선 더더욱 안 좋아졌다.

“어라, 손님이 온 모양인데요.”

며칠 뒤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해 보려고 정원에서 작게 티파티를 열고 있는데, 카지미어가 귀를 쫑긋하며 말했다. 다음은 킁킁이가 털을 세우며 외부인을 경계했고 아드리안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평온하게 차를 마셨다. 평범한 사람인 나만이 누가 왔다는 건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람의 경지를 넘어선 이들과 있으면 대부분 편했지만, 이럴 땐 혼자 눈치 없는 새끼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쟤들이 사기급이고 제가 정상이거든요.

“복장을 보아하니 경관들 같은데. 넷…… 아니, 다섯. 힐다, 먼저 가서 내쫓아 버릴까?”

“아니, 경관들이라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 보자. 킁킁이도 너무 으르렁거리지 말고.”

혹시 해리슨 소식을 들고 왔을 수 있으니 침착하게 그들을 진정시키자,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나서던 카지미어와 킁킁이가 뒤로 물러섰다.

우리 애들은 너무 호전적이라서 참 걱정이다.

그나저나 경관들이 또 뭐 하러 왔대. 해리슨 소식이라면 좋을 텐데, 설마하니 또 아드리안 잡아가려고 온 건 아니겠지?

아드리안 데려가려면 나도 같이 가둬라, 이놈들아!

물론 날 가두려고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백작님.”

이윽고 다가온 경관들이 아드리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장 앞에 있는 경관은 제복에 별이 세 개나 달려 있고 마르크 경정보다 앞에 서 있는 거로 보아 언젠가 찾아뵙겠다던 청장이 분명했다.

윗대가리가 온 걸 보면 체포하려는 건 아닌 것 같지? 그건 죄다 말단들 부려먹을 테니까. 나는 안심하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었는데 늦었습니다. 얼마 전에 의도치 않게 큰 실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저희 때문에 미편해지신 곳은 없는지 염려가 됩니다.”

워, 머리 희끗희끗한 경시청의 높으신 분이 아드리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분 사회에서 신분이 깡패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근방의 치안과 안전을 책임 살피시느라 늘 바쁘실 텐데 직접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또한 경시청에서 늘 밤낮으로 힘써 주시는 덕에 안심하고 살아가는 시민 중 하나이니까요. 얼마 전의 일은 크게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착오였지만,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만약이라도 짚고 가려는 경시청의 노력을 비난해서는 안 되지요.”

팔츠그라프 가문의 위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크게 문제 삼을 수 있었던 일이라, 아드리안의 말은 관용적이다 못해 따사롭고 자비로울 정도였다.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드리안이 저런 멀쩡한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아팠을 때도 자선 사업은 손에서 떼놓지 않았다니 공적인 업무는 줄곧 해 왔을 테지만, 어쩐지 처음 보는 모습이라 가슴이 뛰었다. 내 남자가 공사 구분을 할 줄 알았다니!

“백작님께서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실은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까 봐 걱정했습니다만.”

“제 마음은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이 일의 발단에 대해선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과거에 경감으로 있었던 자가 벌인 일이니만큼,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경시청의 명예가 크게 실추되지 않겠습니까? 실은 경시청이 배후거나 공범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 경관들이 철저하게 일을 처리하려다 실수한 거라고 마냥 이해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 그런! 절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상냥하지만 단호한 말투에 청장이 혀가 잘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청장이 어버버 하고 있자 뒤에서 마르크 경정이 나왔다.

“그 건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청장님.”

“어? 그, 그래. 그래 주게. 크흠.”

“백작님, 이 건은 오로지 백작님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이며 아직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사안이라 비밀 유지 의무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사교 파티에 가서 나불대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도 됩니다.”

“네. 그러시다면……. 우선 증인 매수 건과 관련해 수배령을 내리고 해리슨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아직 잡진 못했지만, 도주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으니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리고 그 건을 수사하다가 놀랍게도, 우리가 줄곧 찾던 또 다른 범죄의 용의자가 해리슨일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범죄라니.”

“긴 세월에 걸친 연쇄 살인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손목만 기념품으로 잘라 가던, 아주 악질 중의 악질이죠. 그런데 도무지 증거를 남기는 법이 없고 목격자도 찾을 수 없어 애를 먹고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의 정체는커녕 성별이나 인상착의조차 파악하지 못했죠. 경시청에서도 줄곧 주시하며 쫓았던 사건이었던 만큼, 우리 청은 용의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희생자들의 손목이라도 찾은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해리슨의 집안에서 발견됐습니다. 가능성이 있다고는 말씀드렸지만,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끔찍한 사건이군요. 해리슨은 잡히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 겁니까?”

“그저 범인을 잡는 역할이라 확신할 순 없지만, 저희 사이에선 사형일 거라는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워낙 희생자가 많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해리슨이 그 살인마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말 안 해 줬네. 늦게라도 알아내서 다행이다. 나야 알려 주고 싶어도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추궁하면 둘러댈 말이 없었거든. 살의의 색이 같았다고 말해 봐야 알아들을 리도 없고.

그나저나 몇 년간 쫓았는데 증거도 목격자도 없었다니…… 유능한 형사였던 만큼 뭘 남기면 안 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실행에 옮겼나 보다. 실력 좋은 경관이 살인자로 돌변하면 옛 동료를 이렇게나 애먹게 하는구나.

“그런 자인지도 모르고 믿고 아래에 두고 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의도치 않게 민폐를 끼쳐드려 백작님께 깊은 사죄를 올립니다. 해리슨 아래에 있던 부하가 워낙 그를 존경해서, 그가 건넨 것들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나 봅니다. 해당 경관은 근신 조치했으며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제프리 경사님 말이구나. 투덜거리긴 했어도 매번 해리슨 곁에 있었던 걸 보면 정말 가까운 사이였겠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같이 수사하러 다니던 사람이 실은 살인범이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충격받았을까. 자기를 범죄의 도구로 이용했으니 배신감도 클 테고. 근신이라곤 하지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겠군.

“저런. 그렇다면 더 빨리 체포해야겠군요. 청장님께서 신경 쓰실 게 아주 많으시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신속히 체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아드리안이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얌전히 올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주 근사한 미소였지만, 하루라도 빨리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적당한 위협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 말에 청장은 물론이고 경관들이 하나같이 움찔했는데, 뭐 어쩌겠어. 자기들이 잘못한걸.

나는 경관들에게 그 무서운 범죄자를 꼭 잡아달라고 부탁한 후, 카지미어와 함께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우리는 얼마간 한가로웠다. 해리슨은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아드리안과는 정다웠으며 카지미어와 킁킁이는 보디가드 역할을 무척 잘 해냈다. 아드리안이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쁠 때는 에밀리와 시간을 보냈고 가끔 로지를 저택으로 불러 맛있는 음식을 먹였다. 그러고도 할 일이 없으면 글공부를 이어가거나 피아노를 쳤다.

아, 로지의 키 크는 영양제 중간보고를 하자면, 슬프게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며칠만 먹어도 금방 효과 날 거라더니! 약장수가 영 사기꾼 같아 보였는데 역시나였다.

쓰레기 영양제에 들인 비싼 돈이 뼈아팠던 나머지, 원래는 키가 줄어들었어야 했는데 영양제 덕에 유지라도 한 거라는 정신 승리를 하기 시작했다. 멋대로 로지를 더 작게 만들어서 미안한데, 그냥 그러기로 했다.

“힐다, 소식 들었어? 오늘 헤일리 언니가 그만두고 나간대.”

점심께에 에밀리가 살짝 우울해하며 말했다. 점심 간식으로 토스트를 쓱싹하던 난 놀라서 물었다.

“정말? 왜? 여기서 집사까지 할 거라더니.”

“저번 주에 리디아가 나간 이유와 같지, 뭐. 이번 주만 해도 벌써 네 명이 나갔네. 저택이 갑자기 휑해진 기분이야.”

에밀리가 살짝 우울해하며 말했다. 으음, 역시 그 이유 때문이었군. 나는 남은 토스트를 입 안에 마저 밀어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배가 침몰하기 전에는 쥐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고들 하지. 요즘 저택이 그랬다.

청장과 경정까지 와서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는데도, 아드리안이 경관들에게 체포되어 가는 장면을 보여 준 것만으로도 사용인들은 너무나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위대한 팔츠그라프 가문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해 왔는데, 그 주인께서 살인 용의자로 지목당해 끌려가셨으니 말이다.

어차피 무혐의니 상관없지 않냐고도 물어봤지만, 때론 진실보다 외부에 비치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며, 팔츠그라프는 왕실의 먼 후손이자 수십 년간 자선 사업과 기부로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이었던 만큼 작은 흠집도 엄청난 흠결로 받아들여진다는 거다. ‘이미 마을에 소문난 것 같던데 내년 귀향일엔 팔츠그라프 가문에서 일한다는 자랑도 못 하게 생겼다’라며 한탄하는 소리도 종종 들렸다.

웃긴 건 그렇게 그만둔 하인 몇몇이 성추행으로 유명한 마르쿠트 후작가로 이직했다는 거다. 거긴 원래 소문이 더러우니 더 더러워질 것도 없다나. 이래서 평소에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나 보다.

체포 사건 이후로 관둔 하인이 벌써 스무 명이 넘었으니, 저택 사용인도 두 자릿수로 풀썩 내려앉았다. 이러다 헛소문이 나면 어쩌나 아드리안에게 넌지시 말해 봤는데, 그는 오히려 잘 됐다고 했다. 마침 사용인들을 줄이려고 했다며, 나중에 더 필요해지면 돈 주고 또 데려오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지금 저택엔 가문에 충성하거나 높은 급료를 포기하지 못한 이들만 남게 되었는데, 대상이 어떻든 결과적으론 충성스러운 사용인들만이 남았다고 봐도 좋았다.

저택이 파란만장한 변화를 겪을 동안 별장에 내려갈 준비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는 주인의 의도와 달리 너무 거창하게 준비되고 있었다는 점, 그게 출발하는 날 아침에야 전달됐다는 점이었다.

“레티샤…… 이게 다 뭐지?”

주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팔츠그라프 가문의 충실한 종, 레티샤는 젊은 주인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답했다.

“전부 마님께 전달할 것들입니다, 백작님.”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냐. 대체 왜 이렇게 많은 거냐고 묻는 거지.”

아드리안이 말한 대로 레티샤가 준비해 놓은 짐 마차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줄이 저택 앞에서부터 정원까지 돌아서 쭉 이어질 정도면 대충 상상 가리라 믿는다. 마님과 올리비아를 위해 ‘좀’ 준비해 본다더니. 와, 마차가 총 몇 대냐. 풀어놓으면 거의 한 집 살림이겠네.

“마님께서 워낙 급하게 내려가셔서 챙겨 드린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둘씩 챙기다 보니 그만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레티샤, 자네는 복장이 그게 뭐지? 뒤에 대기한 하인들은.”

“저 많은 짐을 백작님께 덜렁 들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도착해서 짐을 내릴 일꾼도 있어야 하고, 정리할 키친 메이드와 그들에게 지시를 내릴 총괄자도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걸, 출발 당일 아침에 내게 알렸다고.”

“송구합니다.”

레티샤가 준비한 건 줄줄이 이어지는 짐 마차뿐만이 아니었다. 레티샤 본인도 외출복을 입은 채였고 그 뒤엔 짐을 내리거나 부엌을 정리할 하인 스무 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었다.

레티샤가 딱히 명을 어기거나 괘씸한 짓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별장에 보낼 물건을 ‘좀’ 준비하겠다고 허락은 분명 받았으니까. ‘좀’의 기준이 아드리안과 레티샤, 서로가 달랐을 뿐.

아드리안은 짐 마차와 레티샤를 쭉 둘러보다가 이내 나를 흘끗 돌아봤다.

지금껏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드리안은 이번 여행을 나랑만 오붓하게 갈 생각이었다. 날 놀라게 해 주려고 몰래 여정까지 짜둔 모양이던데, 대망의 첫날부터 뜻하지 않게 방해받았으니 표정이 어두울 수밖에.

“후…… 레티샤. 이번엔 나와 힐다만…… 윽.”

레티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내가 등을 콕콕 찌르자 아드리안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아직 미련이 남은 듯했으나 이렇게까지 된 거 다 같이 가는 게 나았다.

이게 다 백작 부인에게 줄 선물이잖아? 준비야 누가 했든 백작 부인은 아들의 성의로 받아들일 테고. 그럼 아드리안이 아무리 냉랭하게 굴어도 혼자 위안 삼을 수 있을 거다. 아프다는데, 죽어 가다가 겨우 일어나서 아드리안을 기다리고 있다는데 마음의 상처까지 받게 할 순 없었다.

“……백작님?”

“아무것도 아냐. 얼른 출발하도록 하지.”

아드리안은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를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백작 부인과는 아주 오랜만에 어렵게 만나러 가는 거고, 나랑 여행은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으니까. 다음 여행은 내가 먼저 근사하게 준비해서 가자고 해 봐야겠다.

“힐다, 어디 가니? 어서 이리 오렴.”

아차, 생각에 잠겨 있다가 평소대로 그만 아드리안의 마차를 탈 뻔했다. 그 즉시 U턴해서 하인들이 타고 있는 커다란 짐 마차로 돌아갔다.

“힐다, 너 방금 백작님과 함께 마차를 타려고 한 거니?”

이대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는데 레티샤가 날카롭게 물었다. 어, 이미 아드리안과 마차는 여러 번 같이 탔는데 한 번도 못 보셨구나.

어쩐지 여기서 꼬투리 잡히면 성가실 것 같아 말간 얼굴로 고개를 저었는데 레티샤의 눈은 가늘어져만 갔다…… 분위기 안 좋은데, 이거.

“힐다? 거기서 뭐 해?”

거기에 아드리안이 마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종지부를 찍어주셨다. 나는 팔을 마구 휘저으며 외쳤다.

“도련님! 제가 약을 가지고 있어서 찾으신 거죠! 저는 여기 있는 짐 마차! 다른 하인들과 같이 타고 갈게요! 혹시 약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지 부르시고요.”

“…….”

둘만의 여행이 좌절된 마당에 웬만하면 마차는 같이 타주고 싶었지만, 마지막에 마음을 바꾸었다. 레티샤도 걸렸지만, 사실 지금 내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재채기 나고 으슬으슬 추운 게 감기 같은데.

돌이켜보면 요즘 몸을 혹사하긴 했다. 앞뒤 안 가리고 지옥 던전까지 다녀왔으니 이쯤 돼서 몸살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나야 빠르게 약을 먹었으니 금방 낫겠지만, 아드리안은 아니었다. 둘이서 마차를 탔다간 농탕질하다가 옮을 게 뻔하고, 내구성이 약해서 낫는 데 한참 걸릴 테지. 사실대로 말하면 죽지 말라고 눈물 펑펑 쏟아 낼 것 같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아플 테고……. 그래서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아 갈 때쯤 슬쩍 말해야지.

“그런데 너 혹시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백작님과…….”

잔뜩 실망해서 도로 들어가는 아드리안을 지켜보고 있자 갑자기 레티샤가 팔을 붙잡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술만 달싹달싹.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얼른 마차에 타렴.”

“네, 레티샤 님.”

순순히 고개 숙이고 마차에 오르려는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딱히 아드리안과 애정 느껴지는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는데, 저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들킨 것 같지?

“그리고 힐다, 이제 도련님이 아니라 백작님이다. 호칭에 주의하도록 하렴.”

“네, 알겠습니다. 주의할게요.”

아까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는지 마차에 오르자마자 다시 트집이다. 들켰네, 들켰어. 역시 하인장 내공 우습게 볼 게 아니라니까. 그러잖아도 저택에서 남녀 정분 나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분인데, 하인과 주인이라니…… 눈이 뒤집힐 만하지. 앞으로 좀 더 성가셔질 수도 있겠는걸.

탁. 등 뒤로 마차 문이 닫혔다.

짐 마차는 겉으로 보기엔 컸지만, 뒤쪽에는 짐이 쌓여 있고 마차에 탄 하인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 있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가방은 품에 안은 채 하인들 사이에 겨우 끼어 앉았다. 음료 진열장이 따로 없는데,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꽉 끼어 있으니 옛날 출근길 지하철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거 나름대로 운치 있고 좋은데?

덜컹!

하지만 마차가 곧 출발하며 크게 흔들리자 추억과 운치가 동시에 박살 났다. 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엉덩이에 박히는 것 같은 충격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는 추억 속 지하철 운운하며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아구구, 엉덩이 아파.

마차가 멈추자마자 나는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렸다. 덜컹거리는 맨바닥에 앉아 내내 쭈그리고 오는 바람에 엉덩이는 아리고 다리엔 쥐가 났으며 어깨는 뻐근하고 등이 결렸다.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워낙 크고 거슬려서 이명이 들릴 정도였다.

아드리안의 마차와 달리 하인들이 타는 짐 마차는 상차감, 하차감, 탑승감이 두루 좋지 않은 특하급이었다. 내가 개인 자가용처럼 막 불러서 타고 다니던 게 실은 특 5성급이었다니, 매번 자동차랑 비교하면서 느리네 어쩌네 불평했던 게 다 배부른 투정이었다니.

감기 기운 있는 채로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오니 속이 더부룩해졌는데, 카지미어는 더없이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며 내리고 있었다. 쟨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숙면을 할 수가 있었을까. 에이브릴 벌써 보고 싶다고, 앞으로 어쩌냐고 징징대며 괴롭히더니……. 해맑은 얼굴이 괜히 얄미워져서 팔을 몇 대 패줬다.

“힐다, 거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얼른 다른 사람들을 도우렴. 너 빼고 전부 짐 내리고 있는 게 보이지 않니?”

‘왜 이렇게 세게 때리냐’, ‘때릴 만하니까 때리지!’, ‘그래도 조금만 살살 때려 달라’라며 카지미어와 투덕거리고 있자 레티샤가 엄하게 지시했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라고 의아해하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넵,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백작님 식사 준비와 방 정리는 나와 샬롯이 할 테니 너는 부엌에서 다른 아이들을 돕도록 하렴.”

“넵! 알겠습니다.”

나는 옛날 직장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넵넵거렸다. ‘네’는 싸가지 없어 보이고 ‘넴’, ‘넹’은 가볍고 장난치는 것 같지만, ‘넵’은 비교적 빠릿빠릿하고 순종적으로 보여 트집 잡는 상사에게도 쓰기 좋단 말이지. ‘넵’에 이어 의욕과 적극성을 강조한 ‘넵!’까지 썼더니 다행히 레티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떠났다. 여기나 저기나 사람 대하는 방법은 똑같다니까.

흠, 아무래도 레티샤가 나와 아드리안을 못 만나게 할 생각인가 본데. 별장까지 사흘 정도 걸린다던데 내내 저럴 셈인가. 나도 나지만, 아드리안이 더 염려스러웠다. 둘만의 여행이 좌절된 데 이어 마차도 따로 탄 데다 식사까지……. 아드리안이 사흘을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밤이라도 당장 보러 가야겠다. 가서 조금이라도 달래놓지 않으면 세상에 재앙이 닥칠지도 몰라.

당장 보러 가려고 했는데 다시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아침이었다.

엥, 내가 언제 누웠지?

산새 소리에 깬 나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봤다. 술 한껏 마시고 필름 끊어진 사람처럼 더듬더듬 어제의 기억을 되돌려 보았는데, 짐 마차에서 필요한 짐을 내리고 옮기는 일을 돕고 부엌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식기를 설거지하다가 눈앞에 핑 돌았던 것까지 떠올랐다.

감기 기운이 도는데 노동까지 해서 그런지, 갑자기 열이 확 오르면서 이대로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약을 먹고 아드리안을 보러 가려다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5분만, 아니, 10분만 누워있자고 계속 타협하며 웅얼거리다 눈을 감았는데, 정신 차려 보니 지금이다.

“힐다, 뭐 해?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야. 힐다, 힐다? 너 듣고 있어?”

옷을 갈아입다 말고 샬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작은 호텔을 통째로 빌려서 넉넉하게 두 명씩 한방을 쓰라더니, 어제는 쟤가 내 룸메이트였나 보구나.

“아…… 응. 그렇구나. 일어나야지.”

“어머, 너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아파?”

「피로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샬롯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하얀 글씨가 둥둥 떠올랐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총 체력 1322중 837까지밖에 안 차오른 걸 보면 몸이 안 좋긴 한 모양이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알림창을 계속 띄웠지만, 오히려 더 성가셔서 한꺼번에 닫아 버렸다.

“아무것도 아냐. 괜찮아. 그보다 샬롯, 너 어제 백작님 식사 시중들었었지?”

“응, 그랬지. 왜?”

“저…… 괜찮았어?”

“응? 뭐가?”

스카프를 매며 나갈 준비를 하면서 샬롯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아니, 백작님께서 특별한 일 없이…… 식사 잘하셨는지 궁금해서. 알다시피 내가 전속 하인인데, 어제는 곁에 있질 못해서.”

“힐다 너도 참. 백작님께 무슨 특별한 일이 있겠어? 백작님께선 식사 잘하셨어. 평소보단 덜 드셨다곤 하더라.”

실없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그녀가 픽 웃었다. 아드리안은 다행히, 그리고 의외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레티샤 님 화내시기 전에 빨리 준비하고 내려오라는 말과 함께 그녀가 떠나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침 요기부터 할까 하다가, 아직 열이 덜 떨어져서 어질거리는 바람에 약부터 집어 먹었다. 내내 튼튼하다가 하필이면 지금 감기 걸릴 게 뭐야.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힐다, 더 빨리 내려왔어야지, 다들 기다리고 있잖니.”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내려가니 엄한 레티샤가 먼저 날 맞이했다. 조금 숨 막히는 기분이 들어 고개부터 숙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얼른 타겠습니다.”

“잠깐만, 힐다. 백작님께서…… 후우. 널 보자고 하셨단다. 어서 가 보렴.”

레티샤는 더없이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드리안이 날 찾았다고! 가라앉았던 기분이 확 들뜨며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아드리안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입가가 막을 새 없이 허물어졌다.

“힐다.”

“백작님!”

낯선 호칭 때문인지 잠깐 멈칫한 아드리안이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한없이 다정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눈이었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약해진다던가. 단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킁킁이도 창문으로 쑥 고개를 내밀었다. 출발하기 전에는 삼색이 보러 가려 몇 번이나 돌아가려고 해서 말리느라 혼났는데, 이제 아드리안 곁을 얌전히 잘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얼굴이 빨개. 몸이 안 좋은 거야?”

“아뇨, 아무 일도 아녜요. 신경 쓰실 일 없어요.”

금방 나을 건데 뭐. 괜히 아픈 거 알렸다간 죽니 마니 하면서 난리 칠 게 뻔했다. 얼굴을 만지려는 것처럼 뻗어 오는 손을 슬쩍 피했다. 내가 뒤로 물러날 줄은 몰랐는지 손은 허공에서 멈추더니 씁쓸하게 돌아갔다.

눈을 흘끔 돌리자 이쪽을 깐깐하게 지켜보는 레티샤가 보였다. 으음, 사내 비밀연애를 하면 이런 느낌이군.

“정말 괜찮은 거야, 힐다? 내게는 뭐든 말해도 돼.”

“…….”

내가 입을 꾹 다무니 아드리안이 아련하게 응시했다. 말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마차에 태우든 식사를 같이하든 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할뻔했다. 혼자 남은 아드리안이 무척 쓸쓸해 보여서 충동적으로 그만.

하지만 사장이랑 사귄다고 직속 상사를 일러바치는 치사한 짓을 저지를 순 없었으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 괜찮았다. 상사의 트집에 기죽을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지. 아드리안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건 아쉽긴 했지만, 나중에 그 이상으로 채우면 되니까!

그리고 신기하게도 아드리안을 보자 열이 확 내려가고 없던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사랑의 힘’ 버프가 적용되고 있다고 알림이 뜰 만한데 잠잠하군. 참, 시스템은 아드리안이랑 원수졌지.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기나긴 한숨. 아드리안은 내가 짐 마차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어제처럼 다른 하인들 사이에 끼어 앉고 나서도 출발하지 않는 걸 보면 한참 그렇게 보고 있었나 보다.

별안간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면서 둘째 날 여정이 시작됐다. 둘째 날이라고 해도 첫째 날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탑승감이 몹시 안 좋은 짐 마차에서 도 닦고 있으면 한참 뒤에 해가 저물었고, 굴러떨어지듯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으으, 목이고 어깨고 등이고 안 결리는 데가 없다. 해가 지면 곧장 근처에 숙소를 잡기에 망정이지, 밤낮으로 달렸으면 일찌감치 돌하르방이 됐을 거다.

“힐다, 오늘도 식사 준비는 나와 샬롯이 할 테니 너는 짐 정리를 돕도록 하렴.”

“저, 레티샤 님.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뭘 하고 있니? 어서 가 보지 않고.”

마침 저 멀리 샬롯이 레티샤를 부르는 바람에 내 말은 듣지 못하고 휙 가 버렸다. 거참 너무하시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몸 안 좋다는 말도 안 듣고 가 버리면 어찌합니까. 거기다 아무리 하인과 주인이 엮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대도 공식적인 업무까지 방해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드리안 챙기는 건 원래 내 몫이었는데!

“으아악, 쏟았어! 어떡해, 이거!”

“이 멍청이야, 그렇게 한 쪽으로 들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 줄줄이 이어진 짐 마차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와글와글 모여든 하인들을 따라가서 슬쩍 발을 들어 보니, 마님을 위해 레티샤가 바리바리 싸 둔 음식과 양념장이 마차 바닥에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저녁 식사를 위해 안쪽에 있는 보관함을 꺼내다가 우르르 넘어뜨린 모양인데, 왜 하필이면 유리에다 담아서 온 건지 모를 일이다.

“이거 다 어떡해! 곧 식사 준비해야 하는데!”

“거, 거기.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와줘!”

바빠지기 전에 다 같이 치우자는 거였다. 하긴 유리와 음식, 양념장이 범벅돼 있는 바닥을 혼자 치우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고, 그러느라 공백이 생기면 레티샤에게 혼나는 건 전체일 테니 다 같이 빨리 해치우는 게 나았다. 할 일이 넘칠 때 사고 치는 애들이 꼭 하나씩 있지.

“후…….”

열심히 마차 바닥을 닦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또 훌쩍 지나 있었다. 뒷정리하는 하인들을 뒤로하고 잠깐 어두운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나무를 짚은 채로 주르륵 내려앉았다.

피곤해. 왠지 저택에 있을 때보다 훨씬 피곤한 것 같다.

마차 타고 별장 한 번 갔다 오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할 일이 정말 많았다. 우선 해리슨이 얼씬대지 않는지 주변을 경계해야 하고 레티샤의 트집을 실시간으로 견뎌내야 했으며 삼색이 보러 가려는 킁킁이를 막아야 했다. 아드리안이 괜찮은지 살펴야 했고 사명감에 과하게 불타는 카지미어를 달래고 에이브릴을 보고 싶다는 그리움 섞인 한탄도 들어줘야 했다.

으아아, 피곤해! 아드리안만 아니었어도 지금 당장 혼자서라도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몸이 고됐다.

안 되겠다. 가서 몸이 안 좋다고 말하고 오늘 밤이라도 푹 쉬어야지.

“엇.”

그렇게 생각하고 벌떡 일어났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다리가 순간 후들거렸는데, 어, 이거 심상찮다. 조금만 더 앉아서 쉬었다 가야지. 나는 나무를 짚은 채 조심해서 무릎을 굽혔다.

“어쩌지, 가만히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눈앞이 살짝 휘청거린다 싶었는데 실제로는 뒤로 넘어가던 중이었나보다. 익숙한 온기, 다정한 목소리. 양옆에서 두 팔이 나와, 허리를 교차하듯 감싸고 잡아당겼다. 턱 하고 뒤통수가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고, 그대로 끝없이 기울어졌다. 볼을 차갑게 얼어붙게 하던 밤공기는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폭신한 천의 질감이 느껴졌다. 어라, 여기는.

“내 주인님은 참 너그럽고 자비롭기도 하지. 나한테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아드리안의 방이었다. 공간 이동이라니, 한 발짝도 걷기 싫었는데 엄청 편하잖아? 실생활에서 편리하게 쓸 만한 마법은 아드리안에게 전수받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의지할 만큼 미덥지 못한 걸까?”

“아윽, 잠깐만요…….”

“못 기다려. 이제 한계야.”

누가 들으면 몇 달은 못 본 줄 알겠네, 고작 하루였다. 그런데도 아드리안의 손은 더할 나위 없는 초조함으로 앞섶을 파헤쳤다. 빗장뼈로부터 예민한 살에 이르기까지 능숙하게 쓸어내리며 몸을 붙여왔다. 짜르르 울리는 감각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잠깐만, 백작…….”

“힐다, 내가 너라면 지금 날 그렇게 부르지 않을 거야.”

둥글게 모아 쥐었다. 내가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 하자 그가 살짝 혀를 찼다. 손이 불길처럼 뜨거워서 스친 자리마다 한기가 느껴졌다. 어깨로 집착적으로 따라붙는 숨결에 온몸의 솜털이 다 일어났다.

“내게는 그런 호칭으로 거리를 벌려 놓고, 다른 이에게는 잘도 웃으면서 말을 건네던걸. 날 애타게 해서 죽이려는 게 분명해. 그렇지?”

“제가 언제, 으…….”

“바로 조금 전 짐 마차에서 있었던 일인데 모른 척할 셈이야?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고, 웃어 줬지. 내가 아닌 남자에게. 내 질투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거지?”

“그건 그냥 짐 옮겨 달라고 한 건데…….”

“네가 다른 남자와 웃으며 대화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힘들고 피곤해서 웃을 여력도 없었는데 누가 언제 웃었단 거야. 맛 간 아드리안은 날조의 대가였다. 그 부분에 대해 상세히 따져 보고 싶은데 끙끙 앓느라 그러지도 못했다.

“일부러 멀리 있었던 거 아녜요. 혹시라도 감기 옮을까 봐.”

“감기라고? 어디 봐.”

아픈 몸도 흥분시키는 환상적인 기술을 펼치고 있던 아드리안은 그제야 깜짝 놀라서 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 그가 아플 때 혹시 열나냐고 내가 이마 짚어 주던 걸 따라 하긴 했는데, 열 재는 법을 몰라 멀뚱멀뚱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열 잴 줄도 모르면서 손만 대고 있으면 어떡해요. 근데 제 몸 뜨거운 거 몰랐어요? 어떻게 모르지? 그렇게 오래 아팠으면서,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녜요?”

“으응, 그야 만져주면 네 몸은 항상 이 정도로…… 아니, 더 뜨거웠는걸. 우는 건 또 얼마나 귀여운지,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을 정도야. 방법이 없을까?”

“그 입! 입!”

“출발을 늦출 걸 그랬어. 몸이 안 좋은 줄도 모르고.”

내가 뒤돌아 누워서 입을 막으려 들자 능숙하게 피하며 그가 침울해했다. 그러고는 놓칠 수 없다는 듯 손을 잡아서 간지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제 내숭 떠는 건 안 하기로 한 건가. 악마가 점점 능글맞아져서 큰일이다.

“이제 알겠죠?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 옮을까 봐 그랬던 거라고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가 볼게요. 이러다 진짜 옮아요.”

“힐다, 나 벌써 옮은 것 같아. 그러니까 안아 줄래?”

“아니, 그 무슨…….”

“안아줘. 지금 당장.”

날조에 이어 억지 부리는 백작님을 어이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아드리안은 천연덕스럽게 팔을 벌리고 있었다. 안아 주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안을 기세였다. 안 되는데, 진짜 옮으면 어쩌려고. 진짜 안 되는데……. 내가 한숨과 함께 팔을 벌리자 와락 끌어당겼다. 누가 누굴 안아 주는 건지 모르겠네.

“이러다 진짜 옮아도 난 몰라요.”

“옮으라지.”

“벌써 옮았다면서요.”

“으응, 그랬지. 더 꽉 안아도 돼? 숨 막힐까?”

밀어낼세라 품에 꽉 가두며 그가 속삭였다. 거짓말에 영 성의가 없지만, 아프다고 해서인지 내가 남자한테 웃어 줬느니 하는 날조는 쏙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품이 너무나 포근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가슴팍에 기대고 말았다.

“좁아요.”

“딱 붙어 있을 수 있어서 더 좋은걸. 저택의 침대도 이 정도 크기로 바꾸는 건 어떨까?”

“뭘 바꾸기까지 해요. 진짜 유난이야…….”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그의 입술이 이마에 살포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더니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이번엔 더 숙여서 입술을 맞부딪히려고 해서 내가 기겁하며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손목까지 간지러워지고 말았지만.

“입술엔 하지 마요. 안 괜찮다니까, 사람 말을 안 들어. 또 아프면 어쩌려고.”

“으응, 그냥 내가 대신 아프면 안 될까? 이 몸으로 아픈 건 지긋지긋한데, 너 대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뭐? 절대 안 돼요.”

“알겠어.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줄래? 뭐든 들어줄게.”

전혀 상관없는 앞뒤가 어째서 ‘그러면’으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아드리안이 대화를 유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서 듣고 싶은 이름이 있는 거겠지. 내가 누구 앞에서 눈치를 보는지, 왜 식사 때나 침실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지 정도는 일찌감치 눈치챘을 테니까.

“정말 뭐든 말해도 좋아. 너는 그저 소원을 말하는 것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돼. 실수로 읊조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사고를 당해도 네 탓은 전혀 없을 거야.”

듣기 좋은 목소리로 세뇌하듯 속닥속닥 귀에 흘려 넣는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그의 문제 해결 방식은 다소 과격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가끔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있어서, 나는 의도치 않게 온건한 평화주의자가 돼가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옆에서 박살 내며 날뛰고 있으면 오히려 말리게 되는 것처럼…….

사실 나라고 레티샤의 방해 공작이 거슬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티샤는 하인장으로서 하인인 나를 관리하는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거라서 딱히 원한 품고 싶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내 신분이 문제인 거지, 술 마시고 들어온 몸의 신분이 하인인 걸 어쩌겠어. 그건 정말이지 누구 잘못도 아니었다.

“몰라요. 원하는 거 없어요.”

생각하기도 귀찮아진 나는 그의 품을 파고들며 웅얼거렸다. 예전에 레티샤가 저택에 꼭 필요하니 건드리면 안 된다고 지나가듯 얘기해 두길 잘했다. 큰일 날 뻔했네.

“정말? 정말 원하는 게 없어?”

“으음, 굳이 말하자면 이대로 자고 싶어요.”

“고작, 그거면 돼?”

“고작이라뇨. 따뜻하고 포근해서 좋은걸요. 역시 아드리안이 최고야.”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아드리안은 잠깐 숨을 멈추더니, 이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포근해서 잠이 솔솔 오는데,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아 눈에 가까스로 힘을 주며 참았다.

“졸린데…… 안고 있는 게 아까워서 못 자겠어. 어쩌죠…….”

“…….”

“떨어져 있어서 힘들었던 건 오히려 저였나 봐요.”

아드리안이 무슨 일을 벌일까 봐 염려했는데, 이번에 더 불안정했던 건 나였다. 누가 누굴 걱정했는지 모르겠네. 이 상황이 조금 웃기기도 해서 작게 웃고 있자 아드리안이 등 뒤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간지럽게.

“……이렇게 있는 게 좋은 거야? 힐다.”

“응. 좋아요. 엄청 좋아요.”

“…….”

“심장 소리 엄청 커졌네. 그렇게 좋아요?”

아드리안은 나를 꼭 껴안아 주며 대신 대답했다. 쿵쿵 요란스레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도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다고 말하자, 아드리안은 맑게 갠 날의 해바라기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도련님, 저 자장가 불러 줘요. 오랜만에 들으면서 자고 싶어요.”

“도련님이나 백작님 같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으면 생각해 볼게.”

“아드리안, 자장가 불러 줘요.”

“저번에 가르쳐 준 노래면 될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안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고, 전에 가르쳐 준 ‘엄마가 섬 그늘에’를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불러 줬다. 목소리가 좋고 노래도 썩 잘 불러서 그런지 잠이 솔솔 왔다.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해서, 이대로 그의 온기에 녹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도련님과 그 여자 사이엔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잖아요? 저는 도련님을 사랑하잖아요.”

믿어.

“제가 도련님의 전부를 사랑한다고요.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불평하거나. 심지어 죄책감 느껴서 도망친 것까지 전부요.”

믿어.

“그러니까 저 좀 믿고…… 집으로 돌아가요. 여기 공기 답답해서 싫단 말이에요.”

믿어야만 해.

“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가르쳐 줘서 고마워요. 후회하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워요.”

“힐다, 내가…….”

“그만 사과해요.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한마디면 됐어요.”

감금에 대해 나름대로 사과를 건넸을 때 힐다는 눈물을 흘렸고, 마음이 통했다고 기뻐했으며 다시 그러지 말라고 단단히 다짐을 받아 갔다. 이젠 널 믿겠노라는 말을 듣고 눈부시게 피어나는 얼굴에, 믿음이 뭔지 모르겠다는 진실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믿어야 해. 굳게 믿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실제론 믿지 않더라도, 속은 홀로 썩어 문드러져 갈지라도 믿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그는 이제까지처럼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땐 불안은 잠깐 잊고 기쁨을 느꼈으며 행복에 취해 벅찼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았고 품에 가둬 놓으면 어찌할 도리 없이 들떴다. 이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태생적으로 믿음을 모르는 그라도 어쩌면 믿음에 보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품었다.

하지만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서 힐다가 곁을 떠나면 불안은 어김없이 시작됐다. 하루를 반짝반짝하게 채웠던 희망이 해가 지듯이 스러지고 눈앞엔 짙은 안개가 꼈다. 아무리 곁에 남을 거라고 약속했대도, 그녀를 데려가려는 외부의 힘은 여전히 확연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여전히 네 옆에 있어, 힐다.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수천 번 삼켰다.

자신이 아닌 무언가를 바라보는 그녀가 싫었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순간이 싫었다. 조금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으면 이전에 있었다는 세상을 떠올리는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타고나길 의심 많은 그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대를 사랑하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홀로 사랑의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니 차라리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게 나을 성싶었다. 증오는 때론 사랑보다 강렬하며 쉽게 식지 않으니까. 복수할 거리라도 만들어 주면 떠날 걱정 따위는 영영 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니면 이용하기 쉬운 도구가 되어주는 방법도 좋겠다. 도구는 쓸모없지 않은 이상 버리지도 않을 테고, 그가 다시 힘을 잃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도구가 있다가 없으면 허전할 테니 한 번쯤 더 뒤돌아봐 주지 않을까.

아아, 그것도 아냐. 차라리 네가 날 먹어줬으면 좋겠어. 네게 완전히 녹아 버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됐으면 좋겠어. 불안이라곤 느낄 새 없이 한 몸이 되고 싶어. 네 안은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할까…….

“도련님은 가끔 보면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며 사는 것 같아요.”

그가 의도치 않게 불안감을 내비치면 힐다는 시원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웃을 땐 그도 인형처럼 따라 웃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늘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어, 힐다. 난 네가 저택에서 나갈 때마다 하늘과 땅을 살피곤 하는걸. 그래서 웬만하면 지난번처럼 방 안에만 가둬 두고 싶었지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받은 터라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일부러 멀리 있었던 거 아녜요. 혹시라도 감기 옮을까 봐.”

감기라니. 순간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힐다 앞에서는 미래의 차분함까지 죄다 끌어와 여유로운 척했지만, 그녀를 재우고 나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병을 다 가지고 살았던 그는 가벼운 감기로도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넘었다 돌아왔기 때문에, 지금 힐다가 얼마나 아플지만 생각하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실제로 울면 힐다는 어처구니없어할 테지만,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힐다, 네가 죽으면 어쩌지.

눈물을 애써 삼키며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손가락 여기저기에 없던 상처가 생겨 있는 걸 보고 다시 위기감이 들었다. 짐 마차에서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었는데 문에 튀어나와 있던 나무 가시에라도 찔렸던 것 같다. 얼마나 아팠을까. 치미는 슬픔을 애써 억누르고 조심조심 상처를 없앴다.

열을 잴 줄은 모르지만, 이마를 짚어 보자 아까보다 조금은 차가워진 것 같았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면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에 빠진 채 한참이나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문득, 초조함에 타들어 가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눈가가 화사하게 휘어졌다.

그는 힐다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와인 잔부터 준비했다. 그리고 칼……. 가방에서 찾아 꺼내자마자 손바닥을 깊게 그었다. 양옆으로 벌어진 살점 사이를 검붉은 피가 비집고 나왔다.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꽉 쥔 채 다시 테이블로 가서 와인 잔에 쏟아 냈다. 적당량 차오르자 옆에 준비된 수건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달뜬 눈으로, 잔을 타고 흐르는 피를 지켜봤다.

내일 깨어나면 먹일 생각이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그의 의지를 담은 피는 영원히 몸속에 머물며 그녀를 지킬 거다. 한 번에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만들진 못하더라도 감기 따위에 쓰러질 일은 없겠지.

이번 기회에 수명도 조금 늘려놓는 게 좋겠다. 수명이 길어지고 길어져서 내 곁 말고는 갈 곳이 없어지면 기쁠 테니까. 영원의 시간이 주어져도 우리라면 행복할 거야, 그렇지?

처음엔 한 잔으로 시작할 생각이었다. 악마의 피는 인간에게 독이겠지만, 치명적이지 않을 정도로 해독하고 와인을 섞어 두면 감쪽같겠지. 하루하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늘려 가다 보면 언젠가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가 모두 제 것으로 바뀔 거다. 그때가 비로소 너와 내가 진정한 하나가 되는 순간일 테지. 부정할 수 없는 확신으로 매일 행복할 거야.

다만 이 사실을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된다. 이 배은망덕한 마음을 들켜서도 안 돼. 그녀가 자신을 믿어 주길 바라는 만큼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작정이었다.

아드리안은 의자에 앉아 잔을 들어 올리고 진짜 와인이라도 되듯 둥글게 흔들었다.

제 일부가 곧 그녀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하니 오싹할 만큼 좋았다. 이 피가 네 몸에서 흐르면, 심장으로 스며들어 박동 치면, 네 숨이 되어 새어 나오면.

언젠가 네 눈으로 세상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네가 보는 세상은 어떨까, 훨씬 아름답고 생기 있겠지. 그러다 완전히 네가 되어 버린다면, 그만한 기쁨은 없을 텐데.

황홀한 상상에 빠진 채 아드리안은 밤을 꼬박 지새웠다.

아침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거리다가, 찾는 사람이 없는 걸 깨닫고 고개를 반짝 들었다.

“아드…… 리안?”

“힐다, 깼어?”

기다렸다는 듯 침대 한쪽이 살짝 꺼지며 이마에 다정한 모닝 키스가 쏟아졌다.

“벌써 일어나 있었어요?”

“으응, 몸은 좀 어때? 졸리면 더 자도 괜찮아. 오늘 출발은 미리 말해서 늦춰 놨으니까.”

“음…… 아뇨, 푹 자서 그런지 어제보다 훨씬 나아요.”

837이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체력 게이지가 916이었다. 풀피에 비하면 여전히 백 단위로 떨어져 있지만, 앞자리가 바뀌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어제는 약도 안 먹었는데 말이지. 이틀 전보다 나아진 걸 보면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그럼 힐다, 일어나서 앉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이제 완전히 다 나은 것 같은걸요?”

내가 씩씩하게 벌떡 일어나 앉자 아드리안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모처럼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서 기분 좋은데, 아침부터 샤랄라한 아드리안을 보자 저절로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준비해 봤는데, 마음에 들까?”

“와…… 이게 다 뭐예요? 직접 준비한 거예요?”

언제 준비했는지 토스트와 와인이 놓인 반상이 내 무릎 위에 놓였다. 토스트가 무려 세 개! 1인분이라기엔 많은 양이라 직접 준비한 거냐 물었더니, 아드리안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어제 아무것도 못 먹고 자 버렸잖아. 일어나면 배고플 것 같았어.”

“와……. 유니콘이 여기 있었어.”

“유니콘?”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했지만, 나는 감탄하느라 유니콘이 뭔지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옛날에 드라마에 나오는 아침 차려 주는 남편 보면서 저런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유니콘이나 희귀종 아니냐고 친구랑 얘기했었는데 내 애인이 바로 그 유니콘이었다니! 희귀종이었다니! 객관적인 지표로도 이미 일등 신랑감인데, 모닝 키스로 깨워주고 아침 식사 대령하기까지. 크흑. 나 진짜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거 아냐?

“그런데 킁킁이랑 카지미어는 어디 갔어요? 도련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는데.”

천둥 치는 배를 달래 주기 위해 토스트를 한 개 뚝딱 먹으며 묻자 아드리안이 선선한 바람처럼 웃었다.

“오늘은 네가 있잖아. 상냥하게 돌려보냈으니 걱정하지 마.”

“상냥하게…… 요? 정말요?”

“그럼.”

그럴 리가 없지. 카지미어 또 어디 박혀서 울고 있겠네. 나중에 찾아서 맛있는 거 먹이고 달래 줘야겠다.

“토스트만 먹지 말고 와인도 마셔, 힐다. 그러다 목 막히겠어.”

순식간에 토스트를 두 개째 뚝딱 하자 아드리안이 친절하게 와인 잔을 건넸다. 아침부터 와인을? 귀족들은 여행 와서 다 이렇게 먹나 보지? 밤이었으면 ‘와, 오늘 밤은 낭만적으로 보내려나 보다!’라며 기대했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잔을 건네받은 나는 마침 목이 말랐던 참이라 한 번에 쭉 들이켜 원샷해 버렸다. 캬, 무알콜 와인이라니 아침 토스트와 딱이고요. 애인의 센스가 넘치면 이렇게 호강하는 법이다. 아침부터 식사를 준비해 준 성의만큼 호탕하게 먹어 치워서 그런지 아드리안도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이렇게 준비해 주는 아침이라면 몇 날 며칠이고 먹어 줄 수 있었다!

남은 토스트 하나를 마저 해치우기 위해 잔을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뜬금없이 와인 잔 옆에 하얀 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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