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33)

10-1. 공포게임 메이드는 살아남았을까?

깊은 밤의 선술집. 길이 안개에 휩싸이고 차가운 한기가 몰아치는 시간까지 선술집에 머무는 건 으레 떳떳하지 못한 목적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다. 큰 노름판을 열 준비를 하거나 은밀한 거래를 트거나.

속삭이는 목소리가 오가는 가운데, 낡은 문이 열리는 소음이 밤안개와 함께 밀려들었다.

날카로운 경계를 숨긴 시선이 새로 나타난 이에게 꽂혔다. 어리바리한 눈으로 내부를 훑는 그는 특별한 용건 없이 잘못 들른 것처럼 보였다. 선술집 주인의 눈짓에 따라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한 발짝 내디딘 때였다.

“여기.”

누군가 새로운 손님을 불렀다. 해지기 전부터 가장자리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던 사내였다. 코트 깃을 세우고 모자를 푹 눌러 써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혼자 낸 술값이 꽤 되었으므로 주인은 다시 눈짓해 사내를 앉혔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새로 등장한 이는 바쁘게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반가움이 역력히 드러났다. 해리슨. 얼마 전 경시청을 박차고 나갔던 존경하는 선배가 이렇게 따로 불러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해리슨 경…… 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찍 오려고 했는데 도무지 나올 수가 없어서.”

제프리가 코트를 손으로 털어 내며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에 이미 빈 술병이 여럿 있었으나 해리슨 특유의 눈빛은 조금도 무딘 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게 우리 경감님이지. 제프리가 어깨를 은근히 으쓱거렸다.

“이해해. 갑자기 도망친 상관 때문에 일이 많아졌을 테지. 설마 탓하러 냉큼 나온 건 아니겠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제가 경…… 님을 감히요?”

“분위기 봐서 알겠지만, 원래 부르던 대로 불렀다간 여기서 바로 쫓겨날걸. 선배라고 부르든 마음대로 해. 아,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군. 난 이제 자네 상관이 아니니까.”

“그런 섭섭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 상부에 사직서는 냈지만, 아직 수리되진 않았습니다. 어느 누가 선배님을 쉽게 경시청 밖으로 내몰 수 있을까요. 누가 뭐래도 선배님은 선배님인데요…….”

“자네 빼고 모두가 그러길 바라고 있을걸.”

“아닙니다!”

제프리가 발끈해서 외쳤으나 해리슨은 킬킬거리며 빈 잔에 술을 따르기만 했다.

“애써 부정할 것 없어. 자네도 잘 알잖아. 이미 그곳에 내가 있기 바라는 이는 없다는 걸.”

“아닙니다. 아녜요. 설령 그렇대도 다시 돌아오시면, 시간이 지나면…… 그들 모두 선배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게 될 겁니다. 선배님 덕분에 더 큰 희생을 막은 일은 얼마든지 있는데요. 선배님 아니었으면 절대 못 잡았을 범죄자들도 허다하고요. 선배님 명성 한번 안 들어 보고 우리 청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명성은 무슨. 제프리, 난 대단하지 않아. 지금 보니 내 상관이 아니라 자네가 날 놓지 못하고 있는 거였군.”

“…….”

“자네는 내가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알잖나. 이제 그만 날 놔줄 때도 되지 않았어?”

순식간에 비운 잔에 술을 다시 따르며 해리슨이 다시 낄낄거렸다. 제프리는 그의 웃음이 유독 씁쓸하고 분노할 때 역류하듯 토해져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오르고, 비워지고, 차오르고……. 혼자서 얼마나 많은 술잔을 비웠을지, 고독했을 경감의 모습이 멍하니 떠올랐다.

“경시청에 잠깐 망령이 들어 있던 거로 생각해. 자네는 유령한테 잠깐 홀렸던 거야. 그거면 돼.”

“정말…… 돌아올 생각이 없으신 거군요.”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받아. 팔츠그라프 백작 가문을 조사해 온 것들일세.”

“예? 아니, 중단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분명 경정님께서 그만두라고 하셨는데요.”

“위에서 하란다고 다 했으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를 만나고 있었겠나? 잔말 말고 읽어 봐. 읽어 보고 말해. 아, 이것들도 잊지 말고 가져가. 중요한 증거니까.”

테이블 밑에 숨겨져 있는지도 몰랐던 커다란 가방이 테이블 위에 턱 하니 올라왔다. 맙소사, 이게 다 뭐야. 손에 든 조서와 가방을 번갈아 보며 얼떨떨해하는 사이 해리슨이 설명을 이어갔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팔츠그라프 백작이 악마 숭배 집단과 관련 있다는 정황 증거뿐만 아니라 피후원자들을 수차례 납치해 산 제물로 바친 증거도 있어.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니까 범죄자들까지 죽이게 된 거지. 기억나지? 자네랑 내가 쫓던, 범죄자들만 골라서 죽이던 살인마 말이야. 살해 흉기는 가방 안에 모아놨으니 확인해 봐도 좋아.”

“예에? 그 살인마가 팔츠그라프 백작님이라고요?”

“겨우 그런 거로 놀랄 때가 아니야. 그 팔츠그라프 백작을 죽인 게, 다름 아닌 그 아들이니까. 어떤 수를 썼는지 신문엔 마차 전복 사고로 죽었다고 떠 있던데…… 다 거짓말이란 말이야.”

“예에에? 몸이 약하다고 소문난 그 소백작 말입니까?”

“목격자도 있으니 믿어도 좋아. 목격자는 내일 바로 경시청으로 보내도록 하지. 관련된 진술을 해 줄 거야. 어때, 아무리 상대가 대귀족이라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선배님, 이걸 언제 다…… 조사하신 겁니까? 아니, 거기다 갑자기 살해 도구라뇨? 현장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걸 어떻게 가지고 계신 거죠?”

“어떻게 가지고 있기는, 그야 뻔하지 않나. 하나씩 상부에 던져 봐야 무시당할 게 뻔하니까 미리 빼돌려 모아 둔 거지. 뭐야, 지금 자네 날 의심하는 건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제가 선배님을 어떻게!”

얼마나 화들짝 놀랐는지 손에 든 조서까지 떨어뜨리고 말았다. 무심코 던진 질문을 되새겨 보니 정말 그렇게도 들릴 수 있는 발언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의심하다니, 누구도 아닌 그 해리슨 경감님을. 내가 누굴 보고 경관이 되기로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여전히 석연찮게 느껴지는 것들이 가시처럼 툭툭 찌르고 튀어 올랐지만,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경감님의 수사력이야 예전부터 알아줬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다.

“하지만 선배님. 이게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팔츠그라프 백작은 얼마 전에…….”

“그래, 뒈져 버렸지. 하지만 대귀족은 명예를 목숨만큼 중요시하는 놈들이잖아. 죽어서라도 유죄 확정이 나면 충분한 죗값을 치르게 되는 거겠지. 그리고 소백작은 아직 멀쩡히 살아 있지 않나? 백작의 죽음에 관해 캐낼 게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죽인 걸까요? 동기가 없잖습니까?”

“그거야 지금부터 파보면 될 일이지만. 사실 나는 그 둘이 공범이라고 생각해. 자선 사업이든 악마 숭배든, 같이 하던 뭔가 틀어져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거겠지.”

“공범요? 하지만 소백작…… 아니, 이젠 백작인가요? 그분은 몸이 약해서 저택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신다던데. 그 건장한 팔츠그라프 백작을 죽일 힘이 있을까요? 반대면 몰라도.”

“목격자가 있다니까 그러네. 믿을 만한지 아닌지는 내일 만나 보고 판단해.”

그 순간 해리슨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스쳐 갔지만, 제프리는 조서를 들여다보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넘겼다.

“알겠…… 습니다.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정말 놀랍네요. 왕실에서도 곱게 넘어가진 않을 텐데요.”

“그래,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왕족 출신 대귀족을 상대하는 건 꽤 까다롭겠지. 그러니 자네에게 맡기는 거야.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뜻을 이어줄 테니까. 그렇지?”

“경감님…….”

“물론 이건 자네를 위해서이기도 해. 이 건만 제대로 해내면 제프리 자네 앞길은 걱정할 게 없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어려운 부탁 하나 더 해야겠어.”

“또…… 무슨 부탁을.”

“아주 잠깐이라도 좋아. 팔츠그라프가 도련님을 소환했을 때, 나와 둘이서만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어 줘.”

“예? 조사 중에요? 그건 아시다시피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경정님께서 아시면 단순 징계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알지. 당연히 알아. 그러니 자네에게 직접 부탁하는 거 아닌가. 잠깐이면 돼. 아주 잠깐의 대화를 나눌 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숨 막히는 정적이 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 거야, 제프리. 이 이상 무리한 일은 안 시켜.”

처음 들어 보는 해리슨의 절실한 부탁이었다. 제프리는 곤란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았다곤 하나 해리슨이 멀쩡히 드나드는 모습을 마르크 경정이 두 눈 뜨고 보고 있을 리가 없다. 용케 팔츠그라프 가문의 귀하신 도련님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 철통같은 시선을 뚫고 틈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터.

“한번…… 해 보겠습니다.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다름 아닌 선배님께서 부탁하신 일이니까요.”

“고마워, 정말 고맙네, 제프리.”

불가능에 가까운 부탁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리슨은 그가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켜 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움직일 만한 포석도 깔아 준 것이고.

그제야 제프리에게 술 한 잔 따라주며 가방을 흘끗 봤다. 주변에 불빛이라곤 테이블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가 다였지만, 피로 불그스름하게 물든 가방 모서리는 유독 선명히 보였다. 저 가방은 진짜였다. 그가 범죄자를 처단하는 데에 썼던 흉기로 가득했다. 이것들을 세상에 내놓는 건 그로서도 크나큰 도박이었다. 끝내는 꼬투리 잡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백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테지. 팔츠그라프 가문의 견고하고 높은 담벼락 안에 꼭꼭 숨어서 살아갈 거다.

하늘이 내려준 정의의 수호자인지, 자격 없는 심판을 한 대량 학살자인지 판결받지도 않은 채, 세상 고귀했던 지금까지처럼.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지. 눈꺼풀을 내려 광기 감도는 눈빛을 겨우 가렸다. 이제는 익숙했다. 사회가 책임지지 않은 판결과 처벌을 내리는 것쯤은.

대신 그 전에 잠깐이나마 대화는 해 볼 생각이다.

사형수들에게도 마지막 한마디쯤은 하게 해 주는 법이니까.

아니면, 어쩌면, 운이 좋으면…… 동료가 생길지도 모르지. 신이 내려주신, 진정한 동료가 처음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전율이 짜릿하게 허리를 타고 흘렀다.

“……그럼 연락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조심히 가게. 제프리.”

이처럼 가슴 설레게 기다렸던 적이 없다. 어떤 악질 범죄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단죄의 철퇴를 휘두르는 순간에도 이러한 전율을 느끼지 못했다. 온몸이 가렵기라도 한 듯 잘게 경련이 일었다.

네 정체가 무엇인진 모르겠다만, 사람의 혼을 이토록 빼놓는 걸 보면 악마의 피가 흐르는 건 분명하구나.

만나고 싶어. 죽이고 싶다. 만나고 싶었다. 죽이고 싶었다. 한 마디라도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 듣고 싶다. 듣기도 전에 죽여 버리고 싶어서 어쩐다. 그 목이 얼마나 시원하게 날아갈지 벌써 기대됐다. 설명할 수 없는 온갖 희열과 기쁨, 분노가 울컥울컥 배 속에서 끓어올라 참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택에 뛰쳐들어가고 싶었지만, 고귀한 분을 뵙는데 그에 걸맞은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여겨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리슨은 주머니 속 성수 총알을 집착적으로 만지작거렸다.

거대한 그림자는 잠시 후 선술집을 떠났다. 올가미에서 풀려난 야수처럼 사납고 빠르게.

화창한 아침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창문부터 활짝 열어 눈부시게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했다. 역시 결핍이 만족을 부르는 법이라고, 방에 갇혀 있었던 한 달간 보지 못했던 햇빛을 시도 때도 없이 쬐었다.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낮에 일하는 동안 틈틈이, 해가 지기 전에 또 한 번 더. 나는 이 소소한 일상들이 무척 소중했고 그렇기에 아드리안과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저택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탁실이든 부엌이든 매일같이 전쟁터가 따로 없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백작가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았고 이제야 눈에 들어온 거겠지만. 주위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내게도 생긴 거겠지?

겉으로만인지는 몰라도, 요즘 내 인생은 굴곡 없이 평화로웠다. 기억을 되찾은 에밀리는 늘 도련님과의 연애사를 물으며 눈을 빛냈고, 델로레스는 날 은인으로 대하며 전설 베개값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킁킁이는 집안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얻은 간식을 모조리 삼색이에게 가져다주었고, 삼색이도 킁킁이가 싫지 않은지 예전보다 더 자주 놀러 왔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아드리안은…… 잘 모르겠다. 하늘을 담은 구슬을 주며 세상 로맨틱한 참회를 한 다음부터는 안정을 되찾은 것 같다가도, 그런 척 위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샌 때때로 사라져서는 한 손으로도 안 잡히는 두꺼운 책들을 우르르 들고 와서 미친 듯이 읽곤 했는데, 얼마나 집중해서 읽는지 옆에서 불러도 모를 정도였다. 또 기상천외한 계획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 책에 대고 번역기를 돌려봤는데 ‘알 수 없는 언어입니다’라며 포기해 버린 게 아닌가. 번역기도 판별 못 하는 언어를 읽어대는 아드리안은 대체 뭘까?

무슨 책을 읽는 건지 물어봐도 웃기만 하고. 아무래도 수상하다. 요즘 어떻게든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안 띄우려고 머릿속 텅 비워 놓으려고 노력하는데, 자꾸 생각하게 만든단 말이지.

“힐다. 차향은 어때, 마음에 들어?”

따사로운 햇살이 참 포근하다고 생각하며 차를 마시자 그가 감상을 물었다. 꽃이 만개한 정원을 배경으로 한 아드리안은 다른 날보다 훨씬 화사해 보였다.

“도련님이 타주신 차는 언제나 최고죠.”

말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엄지를 번쩍 치켜들자 꽤 흡족해하는 눈치다. 그는 여러 찻물을 섞으며 최상의 비율을 찾아내는 일을 즐기는 만큼 나의 평가도 꽤 중요시했다. 맛과 향이 1%라도 흐트러지면 죄다 버리곤 하는 그와 달리 나야 뭐, 독차만 아니면 그만인걸. 어느 찻물이 얼마큼 더 섞였는지도 보통 미각으로는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런데 힐다, 아까부터 뭘 기다리고 있는 거야?”

“기, 기다리다뇨? 갑자기 뭘…….”

느닷없이 정곡이 찔려서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까부터 대문 쪽을 흘끔거리던걸. 가려서 보이지 않을 텐데도. 초대한 손님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마침 아이들이 왁자지껄 까르르 웃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모든 게 풍족한 팔츠그라프 저택에서도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여서 이번만큼은 아드리안에게도 의아한 빛이 감돌았다. 정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잡아 오느라 바쁜 남자를 향해 내가 손을 흔들었다.

“카지미어, 여기야, 여기!”

“어, 힐다!”

“……카지미어?”

갯과라 그런지 멀리서 불렀는데도 정확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옆에 잡아다 놓은 아이가 다시 정원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분주해지긴 했지만, 가까스로 정리되자 에이브릴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도련님. 카지미어를 부르는 김에 가족도 같이 불렀는데요. 기억하시죠? 복직시키자고 한 거요.”

“응, 물론 기억하지.”

어째 아드리안의 눈빛이 심상찮아서 슬쩍 말을 붙여 봤는데 목소리가 한껏 낮아져 있었다. 조만간 부르겠다더니 역시 그럴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부른 거긴 하지만.

“도련님, 카지미어한테 잘해 주셔야 해요. 얼마 전에 도련님 찾으러 갔을 때 큰 신세도 졌다고요. 쟤가 미끼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흠흠, 도련님 잡지도 못했을걸요. 이번에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쯤은 해 주세요. 엄청 기뻐할 텐데.”

“어차피 그건 허상이었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힐다 네가 일부러 그를 만날 구실을 만드는 거 아냐? 그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저보단 다른 하인들이 그리워했죠. 쟤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 일하는 거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일당백이거든요. 솔직히 다른 하인들이 전부 관둬도 카지미어 하나만 있으면 저택은 무난하게 돌아갈걸요? 그러니까 도련님, 제가 잠시 후에 어떤 갑작스러운 제안을 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자고로 인재를 유치하는 데에는 그 자식들을 잡아 두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거든요.”

자녀가 회사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으면 좀처럼 이직이 쉽지 않은 법이지. 던전에서 미끼 노릇을 해 준 데 대한 보상도 해 줄 겸, 혹시 모를 조직 이탈도 막을 겸 카지미어의 복지를 좀 더 확충해 줄 생각이었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나 때문에 아드리안은 맹렬한 질투도 잊은 듯 보였다.

“도련님, 이렇게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우리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카지미어와 에이브릴이 도착해 버렸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으나 카지미어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감격에 북받쳐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아드리안이 누군지 몰라 멀뚱멀뚱 보기만 하던 에이브릴이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마, 맙소사. 백작님이셨다니…… 귀하신 존안을 알아뵙지 못하고 보고 말았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부디 관용을 베푸시어 용서를…….”

“우아아! 반짝반짝해!”

그때 정원 곳곳에 퍼져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뛰어왔다. 개미만 한 목소리로 사죄의 말을 올리고 있던 에이브릴은 깜짝 놀라 아이들을 저지했지만, 아이들은 이미 아드리안을 포위하듯 감싼 지 오래였다. 어, 이건 또 처음 보는 희귀한 광경인데.

“반짝반짝해. 사람이 어떻게 반짝반짝해?”

“와, 눈! 눈이 투명해! 왜 투명해? 하늘보다 더 예뻐! 저런 거 처음 봐!”

“우아, 속눈썹 만져 보고 싶어. 만져 봐도 대여?”

“나는 머리카락! 머리 만져 보고 싶어! 반짝반짝 금실!”

“나도! 나도 만져 볼래!”

“우리 줄 서자. 일렬로 줄 서 봐! 내가 일등!”

“네가 왜 일등이야! 내가 먼저 봤는데!”

“내가 더 빨리 봤거든!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만져 볼 거야!”

“얘, 얘들아. 잠깐만…… 이러면 안 돼. 저분이 누구신 줄 알고, 무례를…….”

서로 만져 보겠다고 줄 서는 아이들에게 에이브릴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엔 훨씬 엄하게 통솔했던 것 같은데, 감히 아드리안 쪽으로 손 뻗을 엄두도 못 내는 걸 보면 여간 당황한 게 아닌 모양이다.

“저기여, 천사님이세요? 저 동화책에서 천사님 그림 본 적 있는데, 어, 어…… 닮았어요.”

“나도, 나도! 나도 본 적 있어! 근데 더 예쁜 것 같아.”

“우아! 나 눈 마주쳤어!”

“카지미어, 카지미어! 이 사람도 우리 집에 데려가자! 여기 길가에 앉아 있는 거 보면 집이 없나 봐! 응?”

“그럼 우리 이제 가족이야? 이름은 뭐로 지어 줄까?”

보호자가 거의 쓰러질 지경인데 아이들은 천방지축으로 아드리안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 앞에 몰려 있는데 몇몇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에이브릴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흘끔흘끔 훔쳐보기도 했다. 음, 애들이라 그런지 반응이 열렬하고 순수하군.

“카지미어, 네 애들인가?”

뜨거운 찻주전자와 찻잔을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기며 아드리안이 넌지시 물었다. 갑자기 몰려들어 소리 지르는 애들 때문에 당황스러울 법한데도 예상외로 차분해 보였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보호하는 아이들이에요.”

“그렇구나. 적당히 구경시키고 데려가도록 해. 아까처럼 뛰어다니다간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네, 네네. 그러겠습니다. 너희들, 얼른 도련님에게서 물러나지 못해?”

“저, 도련님. 저 아이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창백해져서 쓰러지려는 에이브릴을 부축하며 내가 살짝 끼어들었다. 찻주전자를 안전하게 안쪽으로 밀어 놓은 아드리안이 곧장 나를 봤다.

“얼마 전부터 도련님께서 후원할 곳을 찾고 계셨잖아요? 늘 예술 쪽을 중점적으로 후원하셨던 건 알지만, 이번엔 고아원을 후원해 보는 건 어떨까 해서요. 색다르고 좋잖아요.”

“……저 애들 말이야?”

카지미어에게 저지당한 아이들은 뒤에서 다 같이 빼액 울고 있었다. 아드리안을 왜 자기들 집에 못 데려가는지, 왜 못 만지게 하는지, 왜 이름을 못 지어 주는지 항의하는 걸 보면 태반이 아드리안 때문인 것 같았다. 하여간 죄 많은 몸뚱이다.

“네. 우선 사는 곳부터 마련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참에 카지미어 가족을 저택 안에서 지내게 하는 건 어떠세요? 마침 자선의료원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생각이라고 하셨잖아요. 아이들이 지내기에 딱 맞을 것 같은데.”

“힐다, 그곳은 어떤 용도로 쓸 건지 얘기했잖아.”

하긴 했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나와 아드리안만이 지낼 수 있는 작은 별장을 만들 거라고 했다. 1층은 피아노와 함께 실내 식물원을 만들 거고 2층은 나만의 전용 공간, 3층은 노을 감상용……. 총 6층에 이르는 별장 건설 계획을 들으며 문득 카지미어와 에이브릴의 고아원을 떠올렸었다. 태풍 한번 몰아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판잣집.

아드리안의 마음은 물론 기쁘고 고맙지만, 내가 지낼 곳이야 저택에 널렸는데 뭘 굳이 또…… 이왕이면 더 의미 있게 공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직원 복지 향상과 자선 사업 확충도 겸사겸사 꾀할 겸.

“그렇긴 하지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보단 저쪽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카지미어, 이만 가 봐도 좋아.”

이런, 생각보다 반응이 완강한데. 카지미어 오기 전에 얘기해 두는 게 나았을 수도 있겠다.

“참, 카지미어. 수고했어.”

“네?”

“수고했다고 했어.”

내 부탁을 뒤늦게 떠올렸는지 아드리안이 뒤돌아가려던 카지미어에게 덧붙였다. 독려하는 건지 경고하는 건지 애매한 어조였으나, 어쨌든 내용은 훈훈하니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카지미어의 반응은 물론 열렬했다. 아드리안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만큼 거대한 감동 속에서 헤엄치며 그렁그렁해졌다. 나는 그가 5분 안에 운다는 데에 앞으로의 모든 뽑기 운을 걸 수도 있었다.

“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게 필요 없다니? 내 마음이 네겐 필요 없는 거야?”

그들이 애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아드리안이 다급하게 물었다. 때마침 “카지미어 운다! 카지미어 울어!”, “울지 마! 내가 달래 줄게!”, “내가 울어서 같이 우는 거야? 미안해! 우리 이제 뚝 그쳤으니까 카지미어도 뚝 그쳐!”라는, 훈훈한 대화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야 물론 아니죠. 도련님의 마음은 항상 고맙고 기뻐요.”

“그런데? 그런데 왜 네게 필요가 없어? 근사하게 지은 우리만의 공간에서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야? 나는, 나는 네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고…….”

“도련님도 참. 어차피 저한텐 항상 도련님이 곁에 있는데 무슨 집이나 방이 더 필요하겠어요. 이걸 꼭 말해야 아는 거예요?”

“…….”

“절대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카지미어네 일은 한 번 생각해 봐 주셨으면 해요.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요.”

대답이 의외였는지 아드리안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내 곁에…… 항상 내 곁에. 몽롱한 듯 되뇌는 목소리가 점점 끈적해졌다. 흐릿해지던 눈에 초점이 돌아온 건 그 말을 백 번쯤 중얼거린 다음이었다.

“……아냐, 그런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마. 힐다 너, 요즘 저녁 시간만 지나면 칼같이 숙소로 가 버리잖아. 내 방은커녕 옆방에서도 지내려고 하질 않는데, 그 말을 어떻게 믿겠어.”

“아, 그건…….”

“그건?”

아드리안이 조급하게 되물어오자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요즘 꼬박꼬박 하인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의도치 않게 전전긍긍하게 만든 것 같았다.

예전에야 옆방에서 잠깐씩 지내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느슨하게 생각하긴 했다. 여자 하인이 상전 옆방을 썼을 때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알면서도, 아드리안이 워낙 간절히 원했던데다 내가 떳떳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밤을 같이 보내는 사이가 되고 나니 그렇게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아드리안과 나 사이의 신분 차이부터 어떻게 해결할지 난감했다. 아드리안이야 조금도 개의치 않을 것 같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나와 있기 위해서라면 전부 집어 던져 버리겠지. 나 때문에 아드리안이 사교계 왕따가 된다면 보기 슬플 것 같았다. 그런 걸 원하고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뭐, 도련님이 절 한 달간이나 못 나가게 했던 데다 혼자 숨어 버리기까지 했잖아요? 남자친구 자격 박탈될 만하죠. 지금은 숙려 기간이라고 볼 수 있고요.”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어 일단 아무렇게나 둘러대 봤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전능한 악마에 백작까지, 아드리안에게 달린 화려한 타이틀을 생각해 보면 이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예의상 코웃음 한번 쳐 줄지나 모르겠다.

그때 느닷없이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찻잔을 떨어뜨린 채 고장 나 있는 아드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은 덤이었다.

“자격…… 박탈이라니.”

“…….”

“자격 박탈되면 뭐가 되는 건데?”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라, 먹히고 있다?

“남자친구 아래면…… 글쎄요. 남자 사람 친구겠죠?”

또 한 번 와장창창.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들었던 찻주전자까지 놓치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났다. 최고의 비율을 찾겠다고 오전 내내 노력한 결과물을 잔디가 다 받아마시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맙소사, 괜찮아요? 다 깨졌잖아, 손 안 다쳤어요? 어디 봐요. 아, 다행히 베이진 않았네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힐다.”

“문제가 아니긴요. 저 찻주전자 한 시간 동안 골라서 샀던 건데. 아까워라.”

그러고 보니 요즘 아드리안이 집안 살림 다 박살 내고 있잖아. 점점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사랑을 나누고 나면 가구 몇 개씩은 꼭 부서져 있단 말이지. 거기다 오늘은 찻잔과 찻주전자까지 깨뜨리고. 이러다 가세가 기우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힐다, 난 따지고 보면 사람이 아니잖아. 그럼 그냥 남자친구가 아닐까?”

깨진 유리 조각을 주우려는데 아드리안이 더듬더듬 잡아 일으켰다.

“나는 악마였잖아.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겠어. 그러니 남자 사람 친구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어?”

“나 참, 말장난하지 마시고요. 도련님은 사람이죠. 그러니 남자 사람 친구도 될 수 있고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을 지적했을 뿐인데 아드리안은 아플 때로 돌아간 것처럼 창백해져서 한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누가 보면 세상 무너진 줄 알겠네.

“더 이상 남자친구가 아니라고, 내가……. 남자 사람 친구일 뿐이라고.”

“…….”

“남자친구가 될 수 없다면 도대체…… 외모가 다 무슨 소용이야? 뭐가 예쁘니, 투명하니, 반짝반짝하니…… 너한테 안 통하는데 다 무슨 소용이냐고.”

“와, 지금 자랑하는 거예요?”

“네게 의미 없으면 내게도 의미 없어. 있어 봤자 자랑스럽지도 않고 거슬리기만 해.”

“…….”

“남자 사람 친구라니…….”

절망적으로 읊조리는 아드리안을 보자 실소가 흘러나왔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걸. 이미 과하게 통하고 있는데.

그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평범한 남자 사람 친구로 생각했으면 사랑한다고 말했겠냐고. 어? 키스하고 셔츠 찢고 다음 진도까지 뺐겠냐고.

장난친 거라고 말해 줄까 하다가 오늘만 두고 보기로 했다. 아드리안이 내 장난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게 재밌고 끙끙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해서. 그러고 보면 나도 조금은 악취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백작 부인 얘기는 언제 전해 준담.

나는 애피타이저에 나온 방울토마토를 한꺼번에 두 개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아드리안에게 전해야 할 말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가 카지미어, 다른 하나가 백작 부인에 관해서였다. 다행히 카지미어 처우 개선에 관해서는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백작 부인 일은 훨씬 난도가 높았다.

들으면 기뻐할지 슬퍼할지 노여워할지 놀랄지 전혀 가늠이 안 된단 말이지. 백작 부인 안부는커녕 그녀에 관해선 말 한마디 꺼내지 않는 거로 봐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걸까.

하긴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좋은 감정이 남아 있기 어려울 만은 하지. 백작 부인이 백작에게 당했다는 몹쓸 일들을 참작해도 말이다.

애피타이저를 열심히 먹는 척하며 슬쩍 아드리안을 살폈다. 늘 존재 자체만으로 상큼하던 도련님이 오늘 어쩐 일인지 아침부터 음울해 보였다. 어째 평소보다 더 안 먹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혹시 아드리안이 백작 부인 일에 대해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말 안 했으니 모를 거라며 넘어가기에 그의 눈치는 가끔 상상 이상으로 빠르기도 했으니까.

“저, 도련님. 애피타이저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까부터 포크로 헤집고만 있는 것 같아서요.”

“……으응.”

“앗,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제가 주방 가서 다른 샐러드로 바꿔올게요. 생각나는 메뉴 있으면 그거로 가져오고요.”

“아냐, 힐다. 그럴 필요 없어. 괜찮아.”

사양하는 아드리안의 얼굴이 어두웠다.

뭐지, 진짜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백작 부인 일을 일찌감치 알아차려서 마음이 상했는데 나한테 화는 낼 순 없어서 저러는 걸까?

“왜 그러세요, 도련님. 아침부터 쭉 표정이 안 좋잖아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

“왜요, 왜 그러는 건데요. 무슨 일인지 알아야 어떻게 해결할지 저도 같이 고민하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드리안은 사방에 먹구름을 드리운 채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백작 부인 일이 맞나, 그 일로 저렇게까지 우울해할 수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시무룩해져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라 심장이 덜컹거렸다. 진짜 무슨 일이지?

“아냐, 나는 그저…….”

“그저? 그저 뭔데요? 무슨 일인데요.”

“강등됐으니까…….”

“네?”

“나는 이제 너한테…… 남자 사람 친구일 뿐이니까…….”

답지 않게 말을 흐리며 그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몇 번 먹지도 않아 대부분 남은 음식 위로 무거운 한숨은 덤이었다. 남자 사람 친구. 저 말이 무슨 이유로 나왔는지는 조금 더 기억을 되돌려야 했다. 솔직히 나는 어제 이후로 까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지금까지 생각…… 아니, 진짜 그것 때문이라고요?”

“힐다, 내가 강등당한 게 바로 어제야. 이보다 중대한 일이 또 뭐가 있겠어.”

내내 어둡기만 하던 아드리안이 살짝 샐쭉해졌다.

“내가 더는 네 연인이 아니라잖아. 사람 친구라잖아…….”

금세 서글퍼지기까지. 그러고 보니 우울해하기 시작한 시점이 어제 강등 이야기를 꺼낸 이후였던 것 같긴 하다.

“너와 내가 완전히 남남이 된 것 같아 슬퍼. 아니, 남보다 더 못한 사이로까지 느껴져. 갑자기 너와 나 사이에 대륙 하나가 솟아올라 멀어져도 이보다 절망스럽진 않겠지.”

“…….”

“하얗게 몰아치는 눈발 속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아. 천 길 바다 밑에 가라앉은 것 같아……. 이게 릴리트가 남겨 둔 저주의 일부가 아닐까 싶을 정도야. 힐다, 이런 내 마음 알겠어?”

아드리안이 가련할 만큼 절절하게 호소했다.

아뇨, 전혀 모르겠는데요.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말을, 진지한 얼굴을 보고서 겨우 참았다.

“네가 차라리 더 탐욕스러웠으면 좋겠어. 지위나 재산, 힘 같은 것들에 더 도취됐으면 좋겠어. 나를 손에 넣어, 그것들이 전부 네 것인 양 우쭐했으면 좋겠어. 그랬다면 쉬웠을 텐데…….”

“그래서, 강등당한 채로 쭉 있으려고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하자 아드리안의 시선이 살짝 내게 돌아왔다. 부서져서 둥둥 떠다니는 빙하섬처럼 외롭고 쓸쓸한 눈이었다.

“되찾을 수도 있을까?”

“그야 도련님이 하기 나름이겠죠. 힘내 보세요.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예요.”

“하기 나름…….”

아드리안이 머릿속에 새겨 넣듯 곱씹었다. 이런 거에 재미 들리면 안 되는데, 이제 생각하는 게 눈에 다 보이니까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구는데 안 덮치고 배겨?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고민이 시답잖은 것임을 확인한 나는 마음 놓고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난 뭐, 또 심각한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그건 그렇고 도련님, 저도 말할 게 있는데요.”

“응, 뭐든 말해 봐.”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드리안이 냉큼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야?’ 하며 꼬리를 흔들어 대는 강아지처럼 눈이 유순하게 반짝거렸다.

이 정도면 말을 꺼내기 나쁘지 않은 타이밍 같지? 순식간에 수프를 비우고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며칠 전에 별장에서 편지를 보내왔거든요. 그, 마님께서…… 정신을 차리셨다고. 그 일이 있고 잠깐씩 눈을 뜨신 적은 있는데 이번엔 스스로 식사도 하실 수 있나 봐요.”

“그렇구나. 잘됐네.”

이런, 목소리가 대번에 무심해진다. 내 말에 초집중 돼 있던 관심이 떠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앗, 안 돼.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창 쪽으로 돌아가는 시선을 쫓아갔다.

“도련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마님께선 어쨌거나 피로 이어진 유일한 혈육이시잖아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신 후에는 계속 언제 죽을 수 있냐고 물으셨대요. 얼마나 상심하셨으면…… 진짜 마음 아파요. 도련님도 그렇죠? 네? 도련님? 듣고 있는 거죠?”

“응, 물론이지.”

대답은 착실했으나 어쩐지 심드렁하다. 실은 관심이 전혀 없지만 네가 말하니 듣는 척은 하겠다는 눈치다. 이런, 말을 길게 늘이면 안 되겠다.

“어쨌든 마님께선 도련님을 만나고 싶어 하세요. 예전 일 때문에 거절해도 이해하신대요. 그게 안 되면 멀리서 지켜보기라도, 편지라도 주고받길 바라고 계세요.”

“그건 드문 일이네. 늘 나만 보면 도망가려고 하셨는데 말이야. 답지 않게 변덕 부리는 걸 보면 정말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그건 아녜요, 도련님. 사실…… 사실은 예전의 도련님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고 제가 알렸거든요. 허락 없이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백작님만 아니었더라면 두 분 사이가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

“여, 역시 시기상조겠죠?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됐는데 괜한 말을 꺼냈나 봐요. 못 들은 거로 해도 괜찮아요. 뒷수습은 제가 할 테니까.”

“아냐, 그대로 둬도 괜찮아. 그러잖아도 한 번쯤 다녀오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네? 별장에요? 정말요?”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놀라고 있자 아드리안이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여전히 흥미라곤 없는 얼굴로.

“그래. 별장으로 쫓겨났다지만, 그녀에게도 이 저택의 재산에는 일정 부분 권리는 있으니까. 백작 위(位) 승계에 대해서도 공언을 받아 놓을 필요가 있고……. 날 보면 또 덜덜 떨어 댈 테니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어. 일이 훨씬 수월해지겠네.”

딱딱하다 못해 부스러질 듯한 말투였다. 마침 보러 가려고 했다는 말에 조금 부풀어 올랐던 희망이 푹 꺼져 버렸다.

백작 부인은 그 일 때문에 부르는 게 아닌데…….

나는 살짝 풀이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백작 부인에게 잘하라고 억지로 시킬 수도 없고. 어떻게든 진심으로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긋난 채 너무 멀리 와 버려서 돌이키기 쉽지 않아 보였다.

“괜찮아, 힐다. 걱정할 것 없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든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내 표정이 어두워진 이유를 다르게 해석했는지 그가 다정하게 덧붙였다. 백작 부인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고 설명해 봤자 지금은 먹히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뭐든 한 번에 해결되지는 않으니까! 일단 만나기로 한 게 어디야!

내가 금세 기운을 되찾으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아드리안의 얼굴도 밝아졌다.

“식사 다 했으면 슬슬 일어날까?”

하기 나름으로 남자친구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테이블을 가로질러와 굳이 에스코트까지 하는 친절함을 보였다. 이럴수록 내 버릇이 나빠진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힐다, 오늘 오랜만에 마을에 나가려는데. 어떻게 생각해?”

잡고 있던 손을 팔짱 끼도록 유도하며 그가 문을 열었다. 평범하게 마을 나들이 가자는 말을 이렇게 달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물론 난 좋지만!

“마침 날씨가 좋으니 얼른 가 봐요. 앗, 잠깐만요. 누가 와요.”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누군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기척이 들렸다. 들킬세라 빠르게 팔짱을 풀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다소곳이 섰다. 아드리안은 제 팔에서 떨어져 나간 손을 미련이 뚝뚝 흐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복도 중앙에 나타난 레티샤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도련님, 식사를 이제 막 마치셨군요. 제가 급하게 올라왔나 봅니다. 실례했습니다.”

“잠깐. 레티샤.”

주인이 불러세우자 레티샤는 충실한 시종답게 다시 뛰듯이 돌아왔다. 아드리안은 내 손에서 아주 느리게, 겨우겨우 시선을 떼었다.

“조만간 별장에 내려갈 생각이야. 오래 머물지는 않을 테지만 준비는 해 놔야겠지.”

“백작님, 외람되지만, 마님을 뵈러 가시는 건가요?”

레티샤의 물음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상전 앞에서 ‘예’라는 대답 말고는 다른 말을 하는 모습을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응. 상속과 작위 승계에 관한 일을 처리하러 갈 생각이야. 말했다시피 오래 걸리지는 않아. 마차와 닷새 정도 그곳에 머물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두면 되겠지. 자리를 비운 동안은 앨번이 날 대신해서 저택을 돌보도록 하면 될 거야.”

“그러면 백작님, 마님께 갖다드릴 음식을 여러 가지 준비해 봐도 괜찮을까요?”

이때다 싶은지 레티샤가 냉큼 말을 끼워 넣었다.

“음식이라니.”

“그게 말입니다, 백작님. 별장이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음식뿐 아니라 가재 하나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는 말이죠. 저도 몇 번인가 별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소매가 뜯어졌는데 바느질할 수 있는 바늘 하나가 없지 뭐여요. 그래서 별수 없이 보부상만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보부상이란 게 원체 정해진 일정 없이 돌아다니잖아요? 본가로 올라올 때까지 뜯어진 소매를 기우질 못했었죠. 이래저래 변변찮을 게 분명한데, 마님 입맛에 맞는 게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백작님께서 입 짧으신 점이 마님을 쏙 빼다 닮아서는, 연유하실 적 저희가 얼마나 애먹었던지요. 요즘은 잘 드신다니 여한이 없습니다만…… 에구머니, 방금은 실언을 했습니다.”

“…….”

“마님께 갖다드릴 음식을 좀 준비해 봐도…… 괜찮을까요?”

겉으로는 고분고분해도 레티샤는 아드리안보다 더 오래 이 저택에 머물렀고, 백작 부인을 곁에서 모셔 왔다. 모자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 실세는 아들 쪽이라 해도, 백작 부인을 마냥 외면하고 있을 만큼 정 없는 성격도 아니었다. 백작 부인을 안쓰럽게 여겨 이미 몇 번이나 몰래 음식이나 물건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런 그녀가 이번처럼 공식적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보는 나는 흐뭇했지만, 아드리안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건 굳이 이번이 아니더라도…….”

“와, 레티샤 님!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기력이 많이 쇠하셨다니 몸을 보할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게 좋겠어요. 마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지!”

아드리안이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찰나 내가 요란하게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제 주인이 입을 다무는 걸 미처 보지 못한 채 레티샤가 눈을 빛냈다.

“그렇지? 힐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별장엔 변변찮은 요리사도 없어서 올리비아가 고생깨나 하고 있을 거란다. 맛있는 걸 먹다가도 그 아이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파져서 말이다.”

“네! 마님께서도 직접 말씀은 안 하셔도 저택에서 매일 드시던 식단을 그리워하고 계실 테니까요. 정말 좋은 의견이에요! 도련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 나쁠 건 없겠지.”

한참이나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드리안이 끝내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레티샤는 크게 기뻐하며 아까의 나처럼 손뼉을 짝짝 쳤다. 말로는 ‘조금’ 준비하겠다고 했어도 자기 마음에 비해 조금이란 뜻이 분명했다.

아드리안은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잔뜩 떠안고 가게 된 셈이지만, 아무렴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백작님!”

그때였다. 누군가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기척이 화기애애한 공기를 갈랐다.

“집사님?”

무슨 일이지, 집사님의 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우리를 보고 부리나케 달려오는데…… 낯빛이 창백했다.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집사님이라 나조차 당황하고 말았다.

“백작님! 저, 지금 아래에 손님이 와 있는데 말입니다. 그게…….”

“손님이라니?”

“아드리안 백작님?”

몇 명분의 발소리가 계단을 다시 울리는가 싶더니 낯선 얼굴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멀리서나마 그들을 본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죄다 모르는 얼굴이지만, 그들의 복장은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던 까닭이었다. 얼굴에서 미소가 씻겨 나가고 목이 확 죄었다.

경관들…… 경관들이 왜 여기에.

“아, 아아. 여기 올라오시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백작님, 경시청까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막아서는 앨번을 밀어내며 그들이 다가왔다. 아드리안 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며 숨을 헐떡거리고만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때문에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뭐지, 뭐지. 경관들이 여기 왜 온 거지? 꼬리가 밟힌 걸까? 저지른 일이 너무 많아서 뭐 때문에 찾아온 건지 짐작도 안 됐다. 아드리안이 건강해진 만큼, 최근엔 벌인 일이 없어서 더. 그리고 대부분은 나도 공범이었는데, 왜 아드리안만?

“잠깐, 갑자기 경시청이라뇨. 뭐 때문인지는 설명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유감스럽게도, 돌아가신 팔츠그라프 백작님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셨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백작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이미 충분히 소명했을 텐데요! 마차 사고가 날 당시 동행자들도 있었는데 무슨 살인입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쪽도 목격자가 있어서 말입니다. 제보가 들어왔는데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라. 살인죄 외에도 피후원자 납치나 악마 숭배 등 여러 가지 의혹이 있어 조사차 동행을 요청하는 겁니다.”

“악마 숭배라뇨, 그게 대체 무슨……!”

앨번은 경악하여 말문이 막히고 레티샤는 입을 가리며 놀라워하다 듣는 귀가 없는지 황급히 살피고 있었다.

나는 땀이 밴 손을 초조하게 쥐었다 폈다. 팔츠그라프 백작 살인 혐의라니…… 목격자가 있다니.

분명 그 자리에 있던 신도들을 다 죽였다고, 깨끗이 처리했다고 했다. 누구도 아닌 아드리안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개미 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목격자가 존재할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경관들에게는 손을 댈 수도 없는데…….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아드리안 쪽을 바라봤는데 마침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하고 맑은 눈이 일순 반들거리며 빛났다.

“의혹이 있다면 풀어야겠죠.”

“백작님!”

앨번과 레티샤가 동시에 외쳤다. 설마하니 경시청에 순순히 따라가겠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 나까지 숨이 멎었다.

“힐다, 다녀올 테니까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별일 아닐 거야.”

덜덜 떨리는 손에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가 올라갔다. 왜일까. 그렇게 말하는 아드리안은 묘하게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드리안은 요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힐다에게서 괘씸한 시스템을 떼어내지는 못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게 완벽했다. 그녀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허덕이고 있으면 어김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었고,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 머무르다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떠날 수 있었는데도 떠나지 않았다.

그뿐이랴. 힐다를 가둬 두었던 시간들을 하늘에 흩뿌리고 구슬에 담아 준 후, 그녀는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그라고 끊임없이 말해 주었다. 에밀리라는 여자애도 아니고, 카지미어도 아니고 그를 제일 사랑한다고…….

아드리안은 잔뜩 신이 났다.

잠깐의 눈속임으로 이렇듯 환심을 살 수 있다면 태초부터의 시간을 모조리 담아서 구경시켜줄 수도 있었다. 무한의 시간을 담아 주면 힐다도 무한으로 사랑해 줄까. 만약 그렇다면 모든 생명체의 시간을 끌어다가 바칠 텐데.

그는 한동안 구름 위를 둥실둥실 떠다녔다. 땅을 딛지 않고도 걸어 다닐 수 있었다. 하루에 몇십 번이나 마음을 확인시켜 주는 말 말고도, 그녀와 살을 섞는 행위는 큰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힐다는 욕망에 솔직했고 아드리안은 그런 욕망을 사랑했다. 일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틈만 나면 서로를 안았다. 힐다가 먼저일 때도 있었고 아드리안이 더 적극적일 때도 있었다. 횟수로만 치면 엎치락뒤치락했다.

다치게 할까 봐 피했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만큼 좋았다. 천 년 동안 해도 모자라. 턱없이 부족했다. 끔찍하게 황홀한 나머지, 세상을 멸망시키고 둘만 남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잘해 주고 싶은 애정이 대부분이었으나, 때론 인내가 끊기고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가학성이 깨어나기도 했다. 엉망진창으로 울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다 보면 저도 모르게 힘이 날뛸 때가 있었는데, 그 바람에 부서진 가구들 때문에 힐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살림살이가 거덜 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녀는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깜찍했지만, 주의가 분산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힐다와 황홀한 시간을 보낼 때는 사방에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구를 부러뜨리는 빈도는 낮아졌지만, 예기치 않게 힘이 튕겨 나가는 바람에 저 멀리에 있는 산 귀퉁이를 몇 개 날려 먹고 말았다. 저택 근처에 있던 작은 산은 아예 소멸시켜 버렸지만…… 늘 그렇듯 힐다가 모르면 그만이었다.

부서지는 가구가 줄어드는 걸 보고 힐다는 그가 점점 힘을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사람 행세에도 익숙해져 가는 듯했다. 인간 사이에서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던 그가, ‘남자친구’가 연인을 뜻한다는 걸 깨닫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모든 게 완벽했다. 남자 사람 친구라는 몹쓸 단어를 듣기 전까진.

“그야 뭐, 도련님이 절 한 달간이나 못 나가게 했던 데다 혼자 숨어 버리기까지 했잖아요? 남자친구 자격 박탈될 만하죠. 지금은 숙려 기간이라고 볼 수 있고요.”

“자격…… 박탈이라니. 자격 박탈되면 뭐가 되는 건데?”

“남자친구 아래면…… 글쎄요. 남자 사람 친구겠죠?”

구름 위를 동동 떠다니던 아드리안은 갑자기 땅 밑으로 푹 꺼졌다. 사방이 암흑으로 물들고 절망에 휩싸였다.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지옥으로 변했다.

남자 사람 친구, 남자 사람 친구…….

그 몹쓸 단어를 들은 후 수천 번은 되뇌었는데 수천 번 기분 나빠지는 걸 보면, 세상에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우선 그 끔찍한 단어를 만들어 낸 사람을 찾아내어 죽이고 싶었다. 이미 죽어 없다면 지옥에서라도 영혼을 끄집어내어 사지를 절단해 주고 싶었다. 천국에 있는 경우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런 지독한 발상을 하는 인간이 천국에 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백작님, 경시청까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남자 사람 친구에 이어 파수꾼의 등장까지.

아드리안은 무척 짜증이 났다.

그러잖아도 완전히 남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강등당해 심기가 불편한 참이었다. 오늘 마을에 나가 물량 공세라도 해 보려고 했는데 가로막히다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