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33)

9-2. 공포게임에 감금 이벤트가 있다고는 말 안 했잖아요.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친구가 갑자기 연락 끊고 잠적해 버렸습니다. 기다릴까요, 아니면 찾아가 보는 게 좋을까요? 구질구질하게 왜 찾아오냐고 화내진 않을까요?

부엌에서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으며 방구석에 넓게 퍼진 어둠을 응시했다. 일단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판단에 이틀간 살펴본 결과, 저것에 침식된 건 이 방 하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어둠은 이곳에 뿌리를 둔 채 거대한 덩굴처럼 저택 전체를 감싸고 자라나 있어, 원하면 언제든지 저택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끝없는 밤이 도래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잠들어 있었고 시간은 멈추어 식물도 자라지 않았다. 바람 한 점, 햇빛 한 조각 새어 들어오지 못하는 완벽한 어둠. 그 안에서 깨어 있는 건 오로지 나뿐.

다행히 나만은 내 발로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둠에 주시당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럴 거면 왜 숨은 건지 모르겠다.

저택이 꽤 처참한 상태라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염려했는데, 어쩐지 사람들은 마치 저택이 없는 것처럼 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이것도 아드리안의 힘일까? 이곳만 뚝 떼서 세상 밖으로 밀어낸 것 같았다.

이틀간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아드리안은 처음 가뒀을 때부터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시간으로 정신이 붕괴되면서 흘러나왔던 속마음으로 미뤄 보면 자기가 그 여자 악마 같다고 생각해서 더 고통스러워했던 모양인데. 4주간 혼자 끙끙 앓다가 방을 나가겠다는 말을 듣고 극단적으로 터져 버린 것 같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의지가 없었던 이유도 이제야 알겠네. 첫날부터 강제로라도 붙잡아 두고 이야기해 볼 걸 그랬나.

「아드리안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아드리안의 상태를 알려 주던 왼쪽 아래 표시창은 복구된 이래로 쭉 저 문구로 대체되어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드리안에 한해서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이번엔 아드리안이 숨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지점을 응시했다. 쿠웅, 쿵. 붉게, 때로는 검게 맥박 뛰는 어둠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위로 설명이 떴다.

「히든 던전 – 심연의 어둠

등급 : ???

속성 : 암흑, 불

클리어 보상 : ???

특징 : 심연에서 끌어온 어둠」

“좋아, 이제 가 볼까?”

햄과 치즈를 푸짐하게 넣은 샌드위치를 마저 챙기고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불 속성을 막기 위한 물 보호막 주문서, 어둠을 밝히기 위한 손전등, 사람을 찾아 준다는 탐지기, 아드리안이 산처럼 쌓아 놓은 원피스로 ‘행운’ 수치를 강화한 전설 원피스, 탐험하는 동안 배를 채울 식량.

사람을 찾아 준다는 탐지기는 아무리 봐도 수맥탐지기처럼 생겨서 썩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준비한 거겠지?

「히든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한번 진입하면 클리어 전까지 나올 수 없습니다.」

꿈틀거리는 어둠 앞에 서자 흰 글씨가 반짝 떠올랐다.

실은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살아도 된다. 아드리안은 숨었고, 저택의 시간은 멈추었으니 나쁜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이 상황을 이용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이전처럼 답답하게 감금되는 일 없이, 언제 뜰지 모르는 메인 퀘스트에 내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게 있다면 내 행복은 아드리안을 빼놓고는 성립할 수 없다는 거였다. 아드리안은 날 약하게도 했지만, 대부분 한없이 강하게 만들었다. 그를 찾기 위해서라면 몇천 킬로라도 걸어갈 수 있었다. 나로 인한 불안보다 더 큰 행복을 주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만나면 그 하얀 셔츠를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예’를 누르자 사방이 확 시커메졌다. 단 한 번 숨을 쉬는 것만으로 콧속부터 식도까지 훅하고 달아올라, 얼른 가방에서 물 보호막 주문서를 꺼내 찢었다.

「심연의 어둠(히든 던전)에 진입하셨습니다.」

「던전 내에서는 치료 및 장비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입니다.」

「스탯 패널티를 받습니다. (자연회복량 -30%)」

물 보호막을 쓰고서야 겨우 숨이 트여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투명한 하늘색 막 너머로 본 세상은 내가 살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본 적은 없으나 한 번쯤은 상상해 본 세계.

붉게 타오르는 화산, 짙푸른 하늘, 검은 불야성, 흩날리는 화산재,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

“여긴 설마…… 지옥?”

지옥을 죽어서 온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산 채로 온 걸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분위기만 봐도 죽어서 오기는 안 좋은 곳이니까 잘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부터 잡았다. 축축한 공기에 뭔가 끊임없이 타는 냄새, 고무가 녹는 듯한 악취에 거기다 독한 유황 냄새까지 더해지니 숨 쉴 때마다 코가 아팠다.

와, 내가 진짜 셔츠 하나 벗기러 지옥까지 오다니. 아드리안 찾으면 이렇게까지 고생시킨 값은 꼭 받아 내야지.

「‘아드리안’을 찾았습니다.」

혹시 해서 탐지기 먼저 꺼내보았는데, 동서남북 어디를 가리켜도 똑같은 메시지만 반복해서 나왔다. 처음 봤을 땐 이렇게 바로 찾을 줄 몰라서 놀랐는데 아무리 살펴도 아드리안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아서 알았다. 이 아이템 버그 났다. 하, 어쩐지 수맥 탐지기 같이 생겨서 믿음이 안 가더라니.

잠적한 악마를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마음먹으면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꼭꼭 숨었겠지만, 반대로 내가 여기 올 줄 모르고 있을 테니 의외로 방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드리안의 집…… 여긴 지옥이니까 사탄의 집을 찾아봐야겠다.

지옥에서 사탄은 어디쯤 살고 있었을까? 조용한 걸 워낙 좋아하니 화산 쪽으로 먼저 눈이 갔지만, 사탄은 여기서 꽤 높은 지위였다고 하니 산속에 숨어 살긴 어려웠을 것 같다. 지옥의 군주인지 뭔지가 신임했다니 최대한 가까이 두려고 했겠지.

“일단 저쪽으로 가 볼까?”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성. 그 밑에 자리 잡은 거대한 군락을 점찍고 걸음을 옮겼다.

「물 보호막 지속 시간이 9시간 38분 남았습니다.」

지옥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생각하면 물 보호막은 내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으음, 재정이 빠듯해서 충분히 못 샀는데. 공기부터 불 속성인 줄 알았으면 강화용 재료를 팔아서라도 몇 장 더 사 올 걸 그랬다.

9시간 38분…… 지옥은 처음인 데다 아드리안이 어디 있는지 감도 못 잡는 지금,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던전 시작이 산 중턱이었기 때문에 군락으로 내려가기 위해선 꽤 오랫동안 걸어가야 할 것 같다. 처음으로 한 걸음 뗀 순간,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칼을 들이대듯 선연한 감각에 움찔하며 주변을 돌아봤는데 내 눈에 보이는 건 화산재와 바위뿐이었다.

하늘인가?

고개를 젖히자 비구름 잔뜩 머금은 어두운 하늘이 시야에 들어찼다. 왠지 저 짙푸르게 일렁이는 안개 뒤로 수천 개의 눈이 나를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세계가 온 힘을 다해 주시하는 느낌. 이곳은 진짜 지옥이 맞을까?

이내 앞을 보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는데 어쩐지 군락과 가까워지는 느낌이 나질 않았다. 가끔은 산을 기어 올라오는 살모사, 목이 아홉 개 달린 큰 뱀을 만나기도 해서, 커다란 바위 뒤에 한동안 숨어 있기도 해야 했다.

「물 보호막 지속 시간이 6시간 12분 남았습니다.」

세 시간 꼬박 걸었는데도 어찌 된 건지 커다란 성과 마을은 산 위에서 건너다보는 것처럼 멀었다. 왠지 미로 안에 갇힌 느낌인데.

속성이 불과 암흑이라서 그런지 체력이 떨어지는 속도도 엄청났다. 내 체력은 총 1233. 시야 왼쪽 위 레벨 표시창 오른쪽에 새롭게 붉은 상태바가 생겼는데, 감금된 동안 새로 개방된 기능인 듯했다. 새로 개방된 스킬과 관계가 있다며 알림이 계속 떴는데 지금은 시스템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남은 체력은 891.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 자연회복량이 깎였다더니 시간이 지나도 체력이 차질 않았다. 챙겨온 샌드위치로 틈틈이 보충해 주지 않으면 보호막이 다하기 전에 죽게 생겼다.

체력을 1100까지 채워 놓고 저 군락까지 어떻게 갈지 고심하는 중에 눈앞에 뭔가 작은 게 꿈틀댔다. 또다시 뱀 떼인가 싶어 얼른 숨으려다가, 웬 작은 여자애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여기 사람이 멀쩡히 살 리는 없으니…… 악마겠지?

“넌 뭐야?”

어려도 악마인 이상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 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순식간에 확 다가오는 걸 봐선 바위 뒤에 숨었어도 소용없었겠군.

“너 같은 건 처음 봤어. 이건 또 뭐야?”

보석을 박아 넣은 듯 선명한 자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나보다 날 감싼 보호막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꾸욱 꾹 누르는 대로 들어갔다가 다시 뿅 돌아오는 데에 재미가 들렸는지 손가락을 푹푹 쑤셔 보기도 했다.

“그건 물이야.”

“물?”

“응. 그럼 이제 내가 물어봐도 될까? 넌 누구야? 여기선 뭐 하는 거고?”

“내 이름은 릴리트. 스승님의 지엄한 가르침에 따라 모종을 찾고 있었어.”

“……릴리트? 설마 그, 군주님의 딸 릴리트? 스승이 사탄인?”

“내 이름을 듣고도 더 설명이 필요해? 특이하네.”

아드리안의 옛 여자…… 옛 여자라기엔 뭐하지만, 어쨌든 서사가 꽤 오래되고 깊은 여자를 만나버렸다. 그런데 얘 죽었던 거 아닌가? 왜 어린애 모습이고 사탄을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과거이거나 혹은 아드리안의 기억이거나. 어느 쪽이 더 쉬운 건지 헷갈리는데.

“있잖아. 이거 말이야. 나 주면 안 돼? 내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니까 가져야겠어.”

아드리안의 기억 속이라면 그래도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을까 추측하던 중에 어린 릴리트가 그 생각을 정면으로 배반했다. 연한 하늘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물컹한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콱 잡아서 당긴 거다. 순식간에 멀리까지 쭉 늘어뜨리는 바람에 보호막이 흐릿해졌다.

「물 보호막이 해제되려고 합니다.」

“안 돼, 이건 못 줘! 그 손…… 얼른 떼지 못해!”

놓으라고 하니 오히려 더 잡아당기기에 손을 쳐 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보호막은 탄성 있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경고 알림도 사라졌지만, 싫다는 대답이 릴리트의 심기를 어지간히 거스른 모양이었다. 천천히 올라오는 눈이 심상찮게 이글거렸다.

“왜? 왜 안 돼? 왜 못 줘?”

“왜 못 주냐니…… 이건 내 거야. 지금 내게 무척 중요한 거고.”

“내가 달라고 하면 줘야 해. 그게 규칙이야. 여기 속한 그 무엇도 자기 거라고 주장할 수 있는 악마는 없어.”

“잘 들어. 이건 애초에 여기 속한 물건이 아니야. 여기 오기 이전에 일찌감치 값을 내고 산 거라고. 네가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있었던 건 네 주변 악마들이 배려해 준 덕이겠지. 아니면 네가 크나큰 착각에 빠져 있거나.”

“내가 원하는데 못 갖는다고?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어?”

“…….”

으음, 어린애라서 말이 안 통하는 건가 싶었는데 카지미어에게서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커서도 이 정도 논리에서 벗어나질 않았던 것 같다. 논리가 아니지, 이건 생떼였다.

“이걸 어디서 얻었든 너는 지금 이곳에 있으니 내 명령을 들어야 해. 바보 천치구나.”

아드리안에겐 실례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라 어쩐지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릴리트가 가지고 싶었던 걸 무조건 손에 넣어 왔듯, 아드리안도 한 번도 넘어진 적 없는 무한한 삶을 살아온 셈이니까. 쟤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듯 그 또한 자기 앞에 놓인 단 하나의 돌부리가 치명적이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고 단 몇 마디 나눠 본 것만으로 릴리트가 얼마나 고집쟁이인지 알겠다. 사고방식이 완전 독재자잖아. 크면 더하겠네. 군주님, 자식 교육은 이렇게 하면 조져요. 그러니까 딸한테 반역이나 당하지…….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이 얘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고. 이번 일도 그래. 과거에 안 좋은 트라우마를 만들어 놓는 바람에 땅을 더 깊게 파다가 이렇게까지 된 거잖아?

나는 주먹을 들어 릴리트에게 꽁하고 꿀밤을 먹였다. 꿀밤을 맞고 고개가 푹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올 때는, 히죽거리던 미소 대신 섬뜩한 살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날…… 때렸어?”

보호막을 가져가려고 들었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날…… 때렸어. 여기선 누구도 날 때릴 수 없는데.”

“때릴 만하니까 때리지. 남의 걸 함부로 탐내면 못 써.”

커다란 충격으로 홉뜬 눈이 서서히 물기에 젖어 들었다. 손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어느새 전신으로 번졌다. 입술까지 덜덜덜. 어어, 뭔가 심상찮다.

“……할 거야.”

“뭐…….”

“너, 못 만나게 할 거야!”

갑자기 릴리트가 빼애애액 소리 지르자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귀가 저릿저릿하게 울려서 이건 무슨 음파 공격인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그게 시작이었다. 바닥에 널린 화산재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릴리트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자 거대한 허리케인이 형성된 거다. 바로 내 앞에.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우어억…… 사람 살려!

휘오오오. 어린 악마가 터뜨린 대성통곡에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화산재와 같이 종잇장처럼 날아다니는 통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어, 어지러워. 이러다가 하늘 끝까지 날아가거나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거 아닌가. 귓가에 바람 소리가 거칠게 휘몰아쳐서 고막이 찢길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죽게 될지에 대한 수십 가지 엔딩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던 중, 흰 글씨가 반짝거렸다.

「행운의 전설 원피스(보라색) 버프가 적용됩니다.」

「크나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랜덤한 지점에 떨어집니다.」

순간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 랜덤한 지점에 떨어져? 지금 여기가 고도 몇인데 떨어뜨린다는 거야? 죽으라는 거지!

황급히 눈을 돌려 ‘버프 해제’와 같은 버튼을 찾아봤지만, 역시나 이 게임이 그런 유저 친화적인 기능을 제공할 리 없었다.

떨…… 어진다! 휘몰아치는 허리케인에서 거짓말처럼 뚝 떨어진 나는 그대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크나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나무에 걸려 충격이 완화됩니다.」

“커억! 우악! 아악!”

쿵, 쿵, 쿵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배, 등, 엉덩이 순으로 어마어마한 힘으로 강타당했다. 나무에 걸려 충격 완화되는 거 맞아? 그냥 쥐어패는 거 아니고?

쿵! 게임 설명에 의하면 충격을 완화해 준다는 나무는 내 다리를 길게 긁고 놓아주었다. 그대로 떨어진 게 하필이면 깊은 구덩이 속. 뜬금없이 왜 이런 게 길가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함정이었다.

지옥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순 없겠지만,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방금까지 날아다녔던, 까마득히 높은 하늘을 멍하니 보며 생각했다. 벽을 잡고 기어 올라갈 수 있을까. 릴리트가 앙심 품고 쫓아오진 않아서 다행이다.

“거기…… 누구 없어요?”

「크나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도와달라는 목소리가 닿습니다.」

누구 하나라도 위에서 나 좀 끌어당겨 주면 좋겠다. 탈력감에 축 처져서 중얼거렸는데 그놈의 행운 버프가 다시 발휘되었다.

아, 안 돼. 그냥 발휘되지 말아 줘……. 힘없이 중얼거리는데 이 간절함은 닿지 않았던 건지 어둠 속에서 세 쌍의 눈이 반짝였다.

강아지라고 했지? 지옥에도 강아지가…….

“크르르…….”

있었지. 지옥견. 켈베로스.

저건 강아지보다 마물에 가까운 거 아닌가요?

차라리 한 번에 죽이지, 이렇게 단계별로 엿 먹일 필요는 없잖아. 갈고리 같은 거대한 발톱으로 땅을 찍으며 다가오는 켈베로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건 뭐 도망갈 데도 없고 끝이다. 쟤를 무슨 수로 이겨.

이럴 줄 알았다. 언젠가 이 게임 시스템이 날 죽이는 데에 성공할지 알고 있었다고. 이쯤 되면 세 번째 메인 퀘스트가 ‘당신은 너무 오래 버텼습니다. 이만 죽으세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시스템 너 나한테 감정 있지…….

“크르르르…….”

켈베로스의 머리 하나가 이 구덩이만큼 컸기 때문에, 가장 먼저 들어온 가운데 머리를 빼놓은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머리 세 개가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광경은 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다가 세 등분으로 사이좋게 나눠서 먹자는 결론에 이르기라도 하면 나는 아주 끔찍한 몰골로 죽게 되겠지. 한번 아프고 말 일을 세 번에 나눠서 받게 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깨끗하게 한 번에 죽여주세요, 제발!

커다란 콩자반이 코앞까지 다가온 걸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이어질 아픔을 각오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쩐지 입김이나 침 대신 귓가에서 킁킁거리는 콧김만 잔뜩 느껴졌다. 으으, 가습기를 얼굴에 직접 쐬는 것 같다.

킁, 킁킁. 조금 더 센 콧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 얼굴 위에 잔뜩 내려앉았다. 뭐, 뭐야. 뭔데. 이런 마물도 와인 마실 때처럼 향을 먼저 맡는 습관이라도 있는 건가.

때마침 나를 향해 쩍 벌어진 이빨과 마주칠까 싶어서 조심스레 실눈을 떠 봤는데, 켈베로스는 내가 아닌 무언가의 냄새를 맡느라 바빴다. 앞발을 못 쓰는 대신 코로 어떻게든 꺼내보려는 움직임이 꽤 필사적이었다.

날 먹으려는 게 아니었어?

“저…… 이거 먹을래?”

가방에서 냄새 맡을 만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켈베로스가 코를 박고 있던 가방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햄치즈샌드위치를 꺼냈다. 뜨거운 콧김이 훅 멈추며 콩자반 같은 코가 흥분해서 씰룩거렸다. 개 짖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 보니 여기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머리 두 개가 불만스럽게 항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운데 머리는 내가 내민 샌드위치를 씹지도 않고 먹어 치웠다. 그러고도 탐욕스럽게 빛나는 눈은 더 먹고 싶은 의지로 충만해 보였다.

“더…… 먹을래?”

하나 더 내밀어봤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먹고 있었다. 그러고도 또 초롱초롱한 눈. 샌드위치를 안 주면 내가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또 내밀었는데, 질리지도 않고 계속 먹는다. 그렇게 열다섯 개를 먹어 치웠다.

작작 좀 먹지, 아드리안 주려고 챙겨둔 샌드위치까지 동나버렸잖아.

「지옥의 켈베로스가 당신에게 호감을 표합니다.」

텅 빈 가방을 보며 울상짓고 있는데 켈베로스, 정확히는 가운데 머리가 만족스러운 듯 입을 쩝쩝 다시더니 내게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언뜻 듣기엔 훈훈해 보일지 몰라도 거대한 대가리가 나를 짓누르는 거나 다름없어서 진지하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날 먹으려 들진 않아서 다행이지만…… 숨 막혀!

“잠깐만. 기분 좋은 건 알겠으니까 진정하고 옆으로 좀…… 앗뜨! 뜨뜨!”

조심스레 머리를 밀어냈는데 어째 그 새 흥분한 건지 갈기가 확 타올랐다. 뜨겁잖아! 물 보호막을 두르고도 손바닥이 살짝 빨개진 정도인데 없었으면 최소 화상이었겠다. 내가 요란하게 손을 파닥거리다가 후후 불고 있자 켈베로스는 갸웃거리다가 불을 집어넣었다.

“저기, 너 사탄이 어디 사는지 알아? 알면 안내해 줄 수 있을까?”

샌드위치도 다 뺏겼겠다, 지옥의 생명체가 호감을 보인 김에 냅다 물어봤더니 켈베로스는 대답 대신 자기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잡고 올라오라는 뜻일까? 가방을 단단히 메고 주둥이를 타고 올라갔는데, 경사가 있다 보니 열심히 올라가다가도 주르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코도 걷어차고 털을 잡고 버티느라 몇 가닥 뽑아 버렸지만, 다행히 불타는 갈기를 꺼내 들지는 않았다. 켈베로스의 관대함에 고맙다가도, 바친 햄이 몇 개인지 생각하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겨우 귀 사이까지 기어오르자 켈베로스가 머리를 치켜들었었다.

우와악.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바람에 머리서부터 목덜미까지 주르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두툼한 꼬리로 막아 주지 않았다면 털을 잡을 새 없이 바닥에 처박혔을 거다. 다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목덜미에 자리를 잡고 앉자 몸이 꿀렁거리며 움직였다.

타박타박. 느리고 여유롭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땅을 박차고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30분 동안 걸을 만한 거리가 휙 지나가더니 다시금 쿵. 발붙일 시간 없이 다시 날았다.

“와.”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감았던 눈을 가까스로 떠 보자 감탄이 나왔다. 켈베로스가 높이 뛸 때마다 주변 광경이 빠르게 바뀌는 게, 마치 세상이 내게로 돌진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쯤 되면 주변 풍경에 감탄이 나올 법도 한데, 우중충한 하늘에는 불타는 운석이 연달아 쏟아지고 유황 냄새는 점점 짙어져만 가니 역시 지옥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으음, 돈 주고도 못 볼 처참한 광경이군. 빨리 아드리안을 찾아서 나가야겠다.

켈베로스의 등에 타고 보니 아무리 걸어도 멀어 보이던 군락도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쩐지 내가 3시간 동안 걸어서 내려오기보다 켈베로스가 10분 뛰는 게 더 나아 보이는데. 공물로 바친 샌드위치가 아깝지 않은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도착한 군락은 산에서 보던 것과 또 다른 풍경이었다. 몇몇 괴이한 생김새의 마물이나 악마가 지나가다가 눈이 마주치긴 했으나 다행히 딱히 적의나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켈베로스 등에 타고 있어서 그런 건지, 이 던전 자체가 내게 호의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켈베로스의 웅장한 발걸음은 거대한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여기가 사탄이 사는 저택이야? ……아니, 안 물어봐도 알겠다.”

내가 등에서 내려오자 켈베로스는 얌전히 앉아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머리가 세 개나 달린 데다 눈은 새빨갛고 무시무시한 송곳니와 한 대 맞으면 즉사할 거대한 발을 가졌지만, 이렇게 보니 꽤 귀여운걸.

여기까지 데려다주느라 수고했다는 의미로 가운데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자 양옆에 있던 머리가 가운데 머리를 밀어내려고 싸우기 시작했다. 정확히 똑같은 시간 동안 순서대로 쓰다듬어 준 다음에야, 세 개의 머리는 싸움을 멈추었다.

이것 참, 질투심 많은 강아지 세 마리를 같이 키우는 기분이군.

켈베로스를 겨우 진정시키고 저택으로 눈을 돌렸는데,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아드리안이 사는 곳이란 걸 알 수 있는 외관이었다. 아무리 돌아봐도 식물과 덩굴에 뒤덮인 저택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아마존 정글이야, 뭐야…….”

아드리안이 늘 거대 식물원을 가지는 게 꿈이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런 식의 식물원이라면 난 결사반대다. 게다가 담장을 따라 걸으면서 자세히 봤는데, 어째 식물이라기엔 죄다 기괴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꽃잎에 수없이 많이 달린 저 희고 뾰족한 건 설마 이빨일까? 질질 흘러내리는 건 침이고? 어째 죄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 같은데. 살기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저택을 둘러싼 정원이 저 꼴이니 발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무시무시한 식물로 가득한 저택에 어떻게 잠입할지 고민하며 도로 입구로 돌아왔는데, 훤히 열린 대문 앞에서 바닥을 살피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키가 훤칠하고 덩치가 제법 큰 게…… 묘하게 낯이 익은데. 저 심상찮은 팔 근육이 특히.

“저, 혹시 카지미어?”

“응? 너 날 알아? 난 처음 보는데.”

어, 맞았다. 이걸 어떻게 맞춘 거지. 맞추고도 얼떨떨하다. 그야 얼굴이라든지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데 팔 근육만으로 알아본 거니까. 어떻게 안 거냐고 묻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만나니 더 반가운데. 벌써 한 달 만인가? 영문 모르고 당황하는 눈을 보자 친숙함이 확 몰려왔다. 악마일 때나 사람일 때나 정말이지 한결같은 눈망울이었다.

“응, 알아. 사실 나 저 저택에서 일하고 있거든.”

“사탄께서 사용인을 들이셨다고? 이상한데.”

“진짜야. 의심스러우면 뭐든 물어봐도 돼.”

“흐음. 저 저택의 방이 몇 개지?”

“서른두 개.”

예전에 카지미어와 경쟁할 때, 지옥에서만 국한된 지식을 활용하는 건 반칙 아니냐고 말다툼한 적이 있어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해 놓길 잘했군. 내 거침없는 대답에 카지미어가 제법이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대결할 때 늘 보이던 경쟁심 가득한 눈이었다.

“그럼 지옥에서 처음으로 사탄께 결투를 신청했던 악마의 이름은?”

“아스타로트.”

카지미어한테서 열 번은 더 들은 무용담이었다.

“사탄께서 식물을 키울 때 버릇은?”

“본인만 아는 이름을 식물마다 붙여 놓으시곤 하지.”

처음에 듣고 얼마나 기겁했는데…….

“사탄께서 주무시기 전에 꼭 하시는 일은?”

“수집한 조각상과 그림을 한 번씩 꼭 둘러보고 오시지.”

자러 간다더니 나타난 거 보고 처음엔 몽유병인 줄 알았다.

“너, 저택에서 일하는 게 맞았구나.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의심스러웠는데.”

망설임 하나 없는 대답에 카지미어가 인정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제 입으로 알려 줬던 거지만, 상관없었다. 여기는 아드리안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던전이었으니까. 과거인지 기억인지 헷갈리다가 카지미어를 보고서야 확신하게 됐다.

“근데 넌 저택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뭘 찾고 있는 것 같던데.”

“아차. 난 작은 메모지를 찾고 있었어. 어차피 지금은 저택에 못 들어가기도 하고. 인간 정원사에게서 배운 조경 지식을 써놓은 건데,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지옥이 발칵 뒤집혔어. 인간계의 조경 지식을 탐낸 누군가가 빼돌린 게 분명하다고 말이야. 악령들이 사탄께 얼마나 추궁당했는지 스스로 성불하려는 악령도 생길 정도야. 어서 찾아야 할 텐데…….”

카지미어는 자기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왜 반말을 쓰는지 알아내기보다 메모 찾는 일이 더 급해 보였다. 그런데 조경 지식을 써놓은 메모라면 신전에 대단하게 모셔져 있던 그거 아닌가? 루에이리 백작이 사탄께서 존재하는 증거라며 자랑하던 그 쪽지.

“야, 그만 찾아. 그거 어차피 지상에 있어서 아무리 뒤져도 못 찾아.”

“뭐? 그게 정말이야? 어쩐지 온 지옥을 뒤집어도 나오지 않더라니…….”

“근데 지금 저택엔 왜 못 들어가는 거야? 출입금지라도 당했어?”

“저기 이빨 드러내고 있는 꽃, 보이지? 쟤들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들어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신체 일부를 뜯기고 말걸. 모르고 당한 악마가 얼마나 많은데, 넌 저 저택에서 일한다면서 그걸 아직 몰라?”

악마의 신체를 뜯어 가는 꽃이라니. 아드리안은 대체 왜 저런 꽃을 키우고 있는 거지. 취향을 알면 알수록 식물원은 절대 못 짓게 하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 갔다.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여태껏 저 꽃들이 잠든 사이에만 오갔었나 봐. 그런데 잠들 때까지는 얼마나 남은 거야?”

“글쎄.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 한참 멀었을 텐데. 반나절쯤 기다리면 되려나.”

반나절이라니! 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물 보호막 때문에라도 더 지체할 순 없었다.

저 끔찍한 식인식물의 주의를 끌 미끼가 필요했다. 덩치가 커서 되도록 많은 수의 눈길을 끌 수 있는 무언가가…….

나는 흘끔 카지미어를 돌아봤다.

“저기. 잠깐 이것 좀 봐줄래?”

“……그게 뭔데?”

가방에서 꺼내는 기다란 물체에 카지미어의 눈이 홀린 듯 따라왔다. 200골드나 주고 샀지만 이제 쓸모없어진 탐지기. 기다랗고 끝이 구부러진 게 잘 던지면 부메랑처럼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걸 그의 눈앞에서 살짝 흔들다가 있는 힘껏 던졌다.

“카지미어, 물어와!”

다름 아닌 식인 꽃들이 득실거리는 정원으로.

원반처럼 회전하며 허공을 날아가는 탐지기에 홀려버린 워울프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았고…… 침을 질질 흘리던 식인 꽃들의 시선을 일제히 모았다.

이때다! 카지미어, 미안!

모처럼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택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전설 신발 버프를 받았다지만, 정원이 넓은 만큼 나도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탐지기를 낚아채 지상에 착지하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카지미어가 고함을 크게 내질러줘서 다시 시선을 모아주었다.

하하, 혼자 지나가기 어려운 던전에서는 역시 남을 제물 삼는 게 최고지. 퀘스트 아이템이 안 나올 땐 다른 유저 털어서 얻으면 그만이고. 상대방에게서 듣는 말 중 ‘와, 님 게임 진짜 개같이 하시네요.’가 유저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들리는 카지미어의 욕설은 내가 최고의 플레이를 했다는 증거였다.

이번엔 아는 사람을 미끼로 써서 양심이 좀 찔리지만, 현실에서는 복직시켜 줬잖아?

따지고 보면 이건 괴상한 식인꽃을 대량으로 키우고 있는 사탄 잘못이었다. 몰라, 아무튼 사탄 잘못이다.

……돌아가면 카지미어한테 잘해 줘야지.

정원에서 울려 퍼지는 처참한 비명을 뒤로하고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악마 시절 무슨 악취미가 있었던 건지 식인 꽃들이 저택 안에도 바글바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도(照度)가 달라서인지 꽃이 죄다 잠들어 있었는데, 꽃잎을 넓게 펼친 바깥과 달리 이곳의 꽃들은 오므리고 있어 통마늘처럼 보이기도 했다.

깨우지 않게 조심해서 가야지. 그런데 사탄의 방은 어디 있을까? 방이 한두 개가 아니니 전부 돌아다녔다간 한세월일 텐데. 꽃 한 송이 깨우지 않고 살금살금 2층에 도달한 나는 적막에 휩싸인 복도를 돌아봤다.

“조용하네.”

여기 아드리안이 있긴 한 걸까. 끝방부터 쭉 둘러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복도에 드리워있던 그림자가 쓱 사라졌다. 어, 방금 누가 방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잘못 봤나?

“저기, 누구 있어요?”

〔안녕.〕

내가 가려던 방향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얼음 숨결이 귓가에 훅 들어와 온몸이 얼어붙었다. 목소리에 발목 잡힌 사이, 쫓아가려던 기척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으로 가선 안 돼. 이리 와.〕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리자 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멀쩡하던 모든 것들이 휘어지고 갈라졌다. 시공간이 뒤섞인 듯 엉망으로 찌그러지고 틀어지던 시야가 겨우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은 감히 던질 수 없었다. 그는 앉아서 책을 읽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겠지만, 존재 자체에서 흘러넘치는 존귀함에 압도당해서.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바로 찾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도망간 본인이 불러서.

“안녕.”

“…….”

“예의를 갖춰야지, 초대받지 못한 손님.”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쇠를 긁듯 허스키하고 낮은 음성이었다.

“안녕하세요. 그 모습으론 처음 뵙겠습니다.”

알맹이는 아드리안이겠지만, 이쪽은 어째 대악마라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내가 예의를 차리자 뒤늦게 사탄의 눈이 내게 향했다. 느릿느릿, 칼끝으로 낱낱이 훑는 느낌. 굳이 적개심이나 살의를 표하지 않아도 저절로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는 게, 아드리안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지옥에 속하지 않은 영혼을 보는 건 오랜만이야. 이곳에 온 이유는?”

“누굴 좀 찾으러…… 왔어요.”

“내 저택에서?”

그의 말투가 가벼워지자 머리를 내리누르던 공기도 한결 견디기 쉬워졌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근사하게 가늘어진 눈을 보고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 붉은 눈. 으레 악마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색을 그가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공포게임에 갓 들어와서 허둥지둥하면서도 아드리안을 보고 놀랐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노을의 가장 짙은 빛깔을 띤 부분을 발라내어 겹겹이 포개면, 수천 겹쯤 겹치면 저런 색이 나올까. 검은빛이 감도는 진한 핏빛. 자연 어디에서도 그처럼 잔인하고 아름다운 색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드리안을 만나기만 하면 그놈의 셔츠부터 찢어 버려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는데 사탄 버전으로 만나니 저절로 겸손해졌다. 이런 위압감을 느끼는 건 또 오랜만이네.

“헛걸음했구나. 이 저택에는 나뿐인데. 그래도 손님이니까 차 한 잔쯤은 대접해드리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그가 일어섰다.

아드리안이 청초한 미인형이라면 이쪽은 차가운 냉미남이라고 해야 할까. 퇴폐적인 어둠이 묻어나오는 눈매와 달리 몸짓 하나하나는 다분히 귀족적이고 우아했다. 얜 뭐 영혼 프로필에 ‘뭐로 태어나든 반드시 잘생겨야 함’이라고 새겨져 있기라도 한 건가. 악마여도 인간이어도 홀릴 정도로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찾아온 건 아니라서요.”

“나를 찾아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사실은 그런데요. 막상 보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생각해 보진 않아서…… 왜 잊었지? 워낙 장엄하고 요란하게 정신이 무너져서 그런가?”

“내가 무너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구나.”

가볍게 픽 웃는 미소에도 무게가 느껴졌다. 사탄이 안내하는 대로 창가 의자에 앉자 그가 솜씨 좋게 차를 우려내어 따라주었다. 겉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솔직히 다른 사람 같은데, 아드리안은 아드리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탄 입장에서 난 불청객이나 다름없는데 차를 대접한다는 걸 보니.

“나를 찾아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설득하고 달래서 집에 같이 돌아가려고 했어요. 못했던 대화도 하고 오해도 풀고.”

패기 넘치는 대답에 사탄이 희미하게 웃는 듯싶었다.

“어리석은 결심이구나. 너와 함께하려 했다면 나는 이미 네 곁에 있었겠지.”

“그야 그렇지만.”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됐을 거야. 내가 먼저 너를 찾았을 테니까.”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혀 보려는 노력이 깔끔한 거절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아드리안은 스스로 날 떠났다…… 아픈 데를 찌르고 들어오네.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이번은 조금 예외인 상황이라서요. 아까 말했다시피 정신이 성대하게 붕괴되는 바람에.”

“내가 뭣 때문에?”

“저 때문에요. 사실 그쪽이 절 무척 사랑했거든요.”

사탄은 이제 아주 희한한 생명체를 대하듯 날 보고 있었다. 기억상실 걸린 님 입장에선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전부 진짜거든요.

“내가 너를?”

저 눈빛 뭐냐.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네! 그러다 보니 길을 좀 엇나갔는데 죄책감이 심해서 숨어 버렸거든요. 그 결과 여기에 온 거고요. 지금은 기억 못 하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혹시 기억나는 거 없어요? 저, 그쪽 줄려고 꽃반지도 만들어 왔거든요. 이건데…….”

“이건 무슨 장난질인지 모르겠는데, 망상이 지나친 건 확실하구나.”

아드리안이 스스로 걸어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는 이틀 동안 열심히 만든 꽃반지를 내밀어봤는데 차가운 일갈만 돌아왔다. 이젠 비웃음마저 흘리지 않는 걸 보면 웃기지도 않는가 보다. 나는 꽃반지를 도로 가방에 넣고 등받이에 툭 기댔다.

“후…… 그렇죠? 망상 같죠? 근데 저도 같은 기분이거든요. 지금 그쪽이 저를 잊었다는 망상에 빠진 게 아닌가 싶어서요.”

우리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느냐는 구시대 드라마 대사가 나올락 말락 했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뭘 말하든 저 서릿발 같은 얼굴에 마구 짓밟힐 것 같단 말이지.

아드리안 얼굴이기라도 했으면 말이 더 잘 나왔을 것 같은데. 이거 완전 다른 사람 찾아와서 헛짓거리하는 거 아냐.

“기대를 저버리는 대답이겠다만 나는 널 본 적이 없어. 그러니 기억을 지운다거나 망상에 빠질 일도 없으며 함께 돌아갈 일도 없겠지. 먼 길 온 듯한데 헛수고만 했구나.”

“…….”

“한시라도 빨리 되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그 연약한 몸으론 이곳에서 길게 버티지도 못할 테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상실에 걸려 차갑게 대하면 마음이 아플 법도 한데 어째 멀쩡하다. 내가 현실 회피 중인 건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얼굴이라 실감을 못 하는 걸까. 이보다 더 깔끔하고 빠르게 실패할 수가 없는데 어째 실패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보다 이상하지, 아드리안을 쫓아 들어와서 기껏 사탄까지 찾아냈는데 다른 인기척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게.

“저, 하나만 물어볼게요. 아까 분명 저택에 저희 둘뿐이라고 했죠?”

“그랬지.”

“그쪽이 저택의 주인이시니, 주인 모르게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을 테고요.”

“방금까진 있었지. 초대받지 못한 손님.”

“그런데 전 왜 누가 계속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아까부터 자꾸 입구 쪽에서 그림자가 얼씬거렸다 사라지는 것 같고…….”

“착각이겠지. 여긴 너와 나 말곤 누구도 없어.”

“착각…….”

착각일 리가 없다. 던전에 들어온 이후 내게 쏠려 있던 온 세상의 시선이, 저택에 들어오는 순간 더 강하게 느껴졌으니까. 간절한 열망, 비 오는 날의 끈적함, 데일 듯한 열기.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집착적인 감정들이 쫓아와서 내 등을 두드리고 사라지곤 했다.

“힐다, 난 이제까지 있을 곳이 없었어.”

달밤에 산책하다가 아드리안이 내 손을 꼭 잡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제까지 있을 곳이 없었다고. 그에겐 근사한 저택이 있었으므로 물리적인 공간을 뜻하는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네 곁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래도 될까? 늘, 내가 있어도…….”

“나 참, 지금 옆에 있으면서 새삼 무슨 소리예요. 도련님은 뜬금없는 말을 잘하신다니까.”

왠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호탕하게 웃고 넘겼지만, 아드리안은 내 대답에 꽤 행복한 듯 보였다.

늘. 늘 곁에……. 아, 이제 알겠다.

탐지기는 고장 난 게 아니었다. 어디를 향하든 아드리안을 찾았다고 뜨던 알림창도 거짓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아드리안 그 자체였으므로.

처음부터 아드리안은 나와 함께 있었던 거다.

나는 앞에 놓인 찻물을 단번에 들이켜고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피를 머금은 듯 붉은 눈동자가 나를 따라 올라왔다. 가면이라도 쓴 듯 딱딱한 얼굴을 향해 빙긋 웃었다.

“차, 잘 마셨어요.”

“포기하고 가는 거니?”

“가는 건 맞는데, 포기한 건 아녜요. 계속 날 모른다고 해서 상처받을 뻔하긴 했는데…… 알아차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제가 데리고 돌아갈 사람은 그쪽이 아니었네요.”

“…….”

“어쩐지 본인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 눈물 한 방울쯤 날 것 같았는데 멀쩡한 게 이상하더라고요. 미안한데 좀 시끄러울 수도 있겠어요. 지금 제가 좀 필사적이라서요.”

“무슨……?”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옛날 모습도 궁금했었거든요.”

아드리안의 옛 모습을 다시 한번 새겨 넣고 나는 빠르게 방을 나섰다. 나가자마자 또다시 복도 끝에서 휙, 그림자가 사라졌다. 복도 끝까지 얼른 뛰어가 방 안을 살폈는데 안쪽 방으로 스며드는 그림자가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 있는 힘껏 쫓아가자 또다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그림자가 넘어간 방의 옆방으로 먼저 옮겨가 문을 확 열자 그제야 마주할 수 있었다. 한 걸음. 발을 떼기가 무섭게 코앞에 새로운 문이 쿵 소리 내며 나타났다.

문 안에 문. 또 그 안에 문. 수많은 문이 연달아 생기면서 겨우 따라잡은 거리가 확 벌어졌다.

아드리안 발견하면 ‘어서 달려와서 제게 안겨요!’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쳐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술래잡기나 하고 있을 줄 몰랐다. 도망 다니면 누가 포기할 줄 알고?

「크나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합니다.」

만 겹으로 넓어지던 거리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당황한 그림자가 사람 모양으로 확 솟구치더니 다른 문을 향해 미끄러졌다. 끼이이. 나를 막기 위해 닫히는 문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서, 문틈으로 사라지는 손을 간발의 차로 잡을 수 있었다.

“꼭두각시 세워 두고 숨어 있으면 누가 못 찾을 줄 알고.”

손으로부터 팔꿈치, 팔뚝. 점진적으로 올라가 꽉 붙들었다. 그에게는 뿌리쳤으면 그만일 힘이었겠지만, 망설이는 걸까? 움찔한 채 굳어 있었다. 어찌 됐든 내게는 기회였다.

“다 잊어버린 척, 미운 말만 골라 하면 내가 포기하고 갈 줄 알았어요? 여기 있는 내내 떠나지 못했던 건 자기면서.”

나를 차마 내치지는 못하는지 그는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발목까지 기어서 올라온 암흑은 이틀 전과 같은 방식으로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뒤에서 그를 와락 안았다. 무릎까지 올라오던 어둠이 내게도 스멀스멀 옮겨붙었다. 어쩐지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어둠 속에 숨겠다면, 그래야 불안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해요. 대신 이번엔 저도 함께해요. 나락에서 우린 항상 함께였으니까.”

“…….”

“미움받을 각오하고 가뒀으면 어쭙잖은 죄책감에 도망치지 말아요. 만약 또 도망치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당신을 가둘지도 모르니까. 알아들어요? 꼼짝달싹 못 하게 속박해서 방에 가둬 놓는 거, 당신만 할 수 있는 거 아니라고.”

“…….”

“언젠가 우리의 끝을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런 식은 아니야. 내가 싫어진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비겁하게 도망칠 수는 없어. 내가 싫어졌으면 가도 돼. 온갖 저주는 다 퍼붓겠지만, 기분 한 번 더러워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끝내 떠나지 못할 거라면…… 얌전히 옆에 있으라고.”

마음이 급하다 보니 설명과 협박, 애원이 번갈아 섞여 반말로, 존대로 줄줄 흘러나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또 새로운 던전이 소환될 것 같아서. 나 이제 주문서 살 돈도 없단 말이야!

“아니면…… 진짜 제가 싫어진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또 무슨 생각을 혼자 하고 있을지 몰라서 슬쩍 던져 봤더니, 다행히 대답이 돌아왔다. 허벅지 즈음까지 차올랐던 암흑이 멈칫하더니 찬찬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이 슬슬 통하는 것 같지?

“그런데요. 왜 자꾸 도망가는데?”

“내가, 네게…….”

“릴리트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요?”

“…….”

“뭐, 그래요. 도련님이 그 여자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그래서 더 예민하게 발작하는 거 이해는 가는데요. 방에 얼마간 가둬 놓은 건…… 물론 잘못했지만, 그거 한 번으로 도련님이 그 여자가 되진 않아요. 죽이려고 하길 했어, 끔찍한 저주를 걸길 했어? 아직 한참 멀었다고요. 그리고 도련님과 그 여자 사이엔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잖아요?”

“뭐…….”

“저는 도련님을 사랑하잖아요.”

“…….”

“제가 도련님의 전부를 사랑한다고요.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불평하거나. 심지어 죄책감 느껴서 도망친 것까지 전부요. 그러니까 저 좀 믿고…… 집으로 돌아가요. 여기 공기 답답해서 싫단 말이에요.”

어떻게든 한 번은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한 협박과 설득을 마구 던져댔는데, 하나라도 먹히길 간절히 빌었다. 물 보호막을 확인할 때마다 지속 시간이 시간 단위로 뚝뚝 떨어져 있는 게, 시한폭탄 터질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리는 기분이란 말이야.

아드리안은 한동안 미동이 없었다. 흐려진 눈으로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구름이 개면서 해가 드러나듯 어둑한 기운이 차츰 물러나는 걸 보고서야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어둠이 사라지자 이윽고 저택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물을 끼얹은 수채화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친숙한 공간이 드러났다.

아드리안의 방.

이틀 전으로 돌아간 듯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리된 모습이었다.

「던전 클리어 보상 정산 중…….」

「WARNING! 외부 간섭이 감지되었습니다.」

「FATAL ERROR- FailedOperationException :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시스템을 복구할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이 돌아오면서 시스템엔 빨간불이 들어오고, 환하게 밝아졌던 맵도 어두워지면서 내 세상이 다시금 좁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드리안과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뻐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 드디어 집이구나. 숨쉬기 답답해서 죽을 뻔했네. 기억 속에서가 그 정도인데, 진짜 지옥으로 갔으면 보호막이고 뭐고 아무 소용 없이 질식해서 죽었을 것 같다. 다음부턴 아드리안 정신이 무너지지 않게 미리 잘 살펴봐야지.

지친 나머지 옷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푹 쓰러지고 말았는데, 나를 눈으로만 좇고 있던 아드리안이 슬금슬금 옆으로 기어들어 왔다. 면목 없다는 듯 눈은 못 마주치는데 안고 싶긴 한가 보지.

내가 목을 조르듯 꽉 안아 주자 그가 손끝으로 손등을 살살 간질였다.

“저기, 힐다. 숨 막히는데…….”

“좀 막히면 어때요. 길들이라고 해 놓고 내빼기나 했는데.”

“그렇지? 나도 네 손에 죽을 수 있다면 그만큼 황홀한 끝은 없을 거야.”

말을 말아야지.

내가 한숨 쉬며 팔을 풀자, 아드리안은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더니 침대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살다 살다 악마가 풀 죽은 모습도 다 보네.

“……실은 네가 거기까지 따라올 줄 몰랐어. 인간에겐 위험한 곳인데.”

“음, 원래 제가 하나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그런데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다시 만나면 하려고 했던 건데.”

“응, 뭐든.”

“정말 영영 거기 숨어서 나 안 보려고 했어요? 인형까지 세워서 다 잊었다고 속이려고 하고.”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힐다. 실은 그곳에 내 의지로 들어간 건 아냐. 네가…… 나가겠다고 하니까 일순 혼란스러워져서, 주체가 안 됐어. 내가 너를 지치게만 하는 것 같아서. 날…… 미워할까 봐 겁이 났어. 그런데도 도저히 놓을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도련님, 진정하고 제 말 들어요. 도련님은 그 여자랑 달라요. 이것만은 수백 번 말해 줄 수 있어요.”

어엇, 조금 더 안정된 다음에 물었어야 했나 보다. 다시금 눈이 흔들리려고 해서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다. 흐려진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자 느리게나마 초점이 돌아왔다.

“아까 해 준 말 기억하고 있죠? 저는 도련님을 사랑하니까, 그 여자랑 똑같다고 생각 안…… 으읍.”

다급하게 겹쳐 오는 입술. 느닷없이 강하게 짓누르는 힘에 고개가 젖혀지자 목덜미를 감싸 당겼다. 헤엄치듯 입 안을 쓸어내는 혀 놀림에 숨이 콱 틀어막혔다. 혀가 애절하도록 감기며 호흡을 얽었다. 고개를 살짝 틀면서 생긴 틈으로 짠맛이 번졌다.

또 울고 있잖아.

눈을 떠 보자 그의 눈이 흠뻑 젖어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에 방울방울 걸려 뚜욱 뚝. 눈가를 닦아주자 손가락이 금세 축축해졌다.

그러고도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떨어져, 반쯤 감겨버리는 푸른 눈. 애처롭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해. 너는 나를 정복하기 위해, 무릎 꿇리기 위해 신이 보낸 존재가 아닐까 하고.”

한 차례 입맞춤 후에 잠시 물러난 아드리안은, 눈물로 젖은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 깊숙이 입술을 묻었다.

손바닥 안쪽, 손목, 가쁘게 뛰는 맥박 위. 되새기듯 두 번. 미련이 뚝뚝 떨어지게 다시 한번. 영원히 떼지 않을 것처럼 지그시.

나도 가끔 생각할 때가 있었다. 어쩌면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질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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