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33)

9-1. 공포게임에 감금 이벤트가 있다고는 말 안 했잖아요.

“백작님. 하워드, 해밀턴, 뷰포트 가문에서 서신을 전해 왔습니다. 돌아가신 백작님의 부고에 애도를 표하면서 장례식에 참석해 백작님을 만나 뵙고 싶다는 뜻도 함께 밝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장례는 가족끼리 조용히 지내기로 했다고 전해. 인사는 그 이후로 적당히 미뤄 버리고. 당분간은 남아 있는 일 정리만으로 바쁠 테니까.”

“알겠습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앨번.”

아드리안은 등을 돌리려다가, 용무가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머무는 집사에게 물었다. 앨번은 왠지 모르게 시큰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에이리의 죽음을 처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기억을 조작해 놓은 이가 앨번이었으니, 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익히 짐작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병약했던 도련님이 백작 작위를 이어받는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하고 안쓰럽겠지. 최근에 연달아 부모를 잃은 셈이니 더욱더. 슬프지만, 집안의 의무를 그저 내팽개쳐둘 수만은 없어 아버지의 집무실을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다.

“아닙니다. 늠름하신 모습을 뵈니, 주제넘게도 대견하여서 그만…….”

앨번이 무심코 속마음을 털어놓다 화들짝 놀랐다. 이제 어엿한 집안의 주인이신 분을 무심코 예전의 도련님처럼 대하고 말았다. 노련한 집사는 금세 제 주제를 깨닫고 얼굴을 정리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늙은이가 주책을 부리고 말았군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신지요?”

“지금은 없어. 하지만 당분간은 계속 부탁할 일이 생길 듯해. 아버님께서 남겨 두고 간 일이 많아서 정리가 필요하거든.”

“도울 수 있다면 크나큰 영광일 겁니다.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더는 정중할 수 없는 태도로 그가 예의를 차렸다. 아드리안이 아직 정식으로 작위를 받진 않았으나 사실상 백작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이미 백작으로 부르고 있었다. 앨번이 공손히 방을 떠나자 아드리안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빠르게 넘겼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해먹은 게 많은 거야.”

거기다 허술하기까지 했다. 단지 심증만 가지고서 저택을 떠났던 사흘 동안 악마 숭배에 대해 알아낼 정도였다면 말 다 한 거지.

이제까지 경관들이 건드리지 않은 게 더 신기할 정도다.

아드리안은 집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인 증거물들을 차곡차곡 불태웠다. 혹시 누군가 심증을 가지고 저택을 뒤지더라도 증거를 찾을 수 없도록.

이틀 전 루에이리의 목숨을 거두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게 제 알리바이와 목격자를 만드는 일이었다.

루에이리가 죽은 바로 그 시각에 아드리안과 함께 있었다고 진술해 줄 화가, 루에이리의 마차를 끌던 마부,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과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갔던 하인들까지 죄다 만들어 놨다. 마부는 심지어 멀쩡한 몸인데도 자기가 그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고 세뇌당해,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다니기도 했다.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해 놔야 한다. 혼자 어찌 되든 상관없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힐다와 함께할 미래가 필요하니까. 어떤 위험도 조금의 가능성도 용납할 수 없었다. 힐다에게서 정체 모를 외부의 힘을 뜯어낼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더더욱.

‘그것’은 뜯어낼 수 없었으나 침범할 수는 있었다. 눈으로 정확히 확인할 순 없었으나 아드리안에겐 그 모든 걸 간파할 수 있는 직관력이 있었다. 그의 힘을 순식간에 주입하여 일부는 마비시키고 다른 일부는 망가뜨렸다. 쉽게 침투하다가도 어느 순간 벽에 턱 가로막히고 말았지만, 힐다를 제어하기는 충분했다. 그녀가 예상외로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 힘을 빌리고 있었다는 점은 이번에 새로 안 사실이었다.

힐다가 그것으로부터 이득만을 취하고 있었다면 모른 척 내버려 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모든 힘을 되찾자 때맞춰 힐다를 끌어당기는 힘도 강해진 걸 보니 참아 넘길 수 없었다.

가둬 둘 수밖에 없었어.

그때의 아찔함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떤 계기로 힘이 강해졌는지 모르니 조급함도 거세졌다. 다행히 힐다가 큰 반항 없이 얌전히 이틀째 지내서 추가적인 조치는 하지 않았지만, 불안함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미 늦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계 밖으로 떠내려가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느껴졌으나 애써 부정했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통제하면 붙잡을 수 있을 거야. 작은 가능성까지 전부 틀어막으면…….

모든 힘은 되찾았으나 아직 저주가 풀린 건 아니다. 마지막 살인 후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몸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할 테니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똑똑.

아드리안이 초조하게 손을 접었다가 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미 문밖에 누가 와 있는지 알고 있었다. 2층에서 한참 머뭇거리더니 결국 용기를 내어 올라온 모양이다.

“들어와.”

“…….”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살짝 열렸다. 차마 긴장되어 더 열 수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한창 망설이고 있었다. 주춤주춤, 용기를 박박 긁어내서 겨우 들어오는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지켜봤다.

“저…… 저, 도련님, 아니, 백작…… 님. 여쭤볼 게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왔습니다.”

“뭐지? 말해 봐.”

“힐다…… 어디 있나요?”

에밀리라고 했던가. 힐다가 제 앞에서 여러 번 언급해서 기억하는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집무실에 들이지도 않았을 거다. 생각해 보면 힐다가 신전에 간 게 저 하인 때문이니 책임을 물어야 맞았다.

그런데도 죽이지 않는 건, 얼마 전에 상기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거의 자신을 세뇌하듯 그 이유를 떠올리며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 냈다. 제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 저렇게 벌벌 떨면서 힐다의 안부를 물으러 온 걸 기특하게 여겨야 한다며.

“힐다를 왜 내게서 찾아?”

하지만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 불필요한 장면을 봤을 수도 있으니까.

늘 웃던 대로 상냥한 미소를 지어 주자 에밀리가 시선을 찔끔 내렸다.

“힐다가 어디 있는지 내가 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거야? 나도 힐다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이틀간 못 봤거든.”

“하, 하지만 분명 들었는걸요.”

“뭐를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의자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감정이 격해질 때면 그의 힘이 포악하게 날뛰며 주변을 파괴하고 다녔으므로. 사실 이 의자도 다섯 번 정도 으깨버렸다가 복구한 전적이 있었다.

“잠결에, 그러니까…… 어딜 다녀왔는진 모르겠지만, 힐다 목소리를 들었어요. 절 무척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깨어나서 힐다부터 찾았는데 이틀째 보이질 않아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도련님 목소리도 들은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오는 건 크나큰 무례라는 건 알지만, 힐다는 제 소중한 친구예요. 호, 혹시 실종된 거라면 신고해서 찾아야 해요.”

“신고하겠다니,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 갸륵한걸.”

아드리안이 눈살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잔뜩 겁을 먹어 바닥에서만 맴돌던 눈이 희망을 품고 그에게 향했다.

“그, 그럼 어디 있는지 아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아마 난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누구? 네가 찾는 게 누구지?”

“네?”

“네가 찾고 있는 게 누군지 기억이 안 나서 말이야. 못 찾으면 신고까지 하겠다고 했는데. 네 친구 이름을 다시 말해 주겠어?”

그 순간 아드리안의 시선이 정확히 에밀리에게 닿았을 때, 머릿속 가장 깊은 곳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암녹색 눈동자가 잠깐 흐려졌다 돌아왔을 때,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던 걱정과 애처로움도 감쪽같이 씻겨 나갔다.

“제가 누굴 찾고 있었나요? 그러고 보니 제가 왜 여기에 있죠……?”

“네 친구를 찾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제가요?”

에밀리는 홀린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전 찾을 사람이 없는데……. 어머나,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렇게 찾아와서는.”

“그래?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야. 그럼 저기 있는 찻잔을 치워주겠어? 테이블을 정리하려고 널 불렀거든.”

“아! 네네, 그랬죠. 백작님께서 절 부르신 거죠. 내 정신 좀 봐…….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용서를 구한 에밀리가 빠르게 테이블을 정리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이제 저 하인이 힐다를 찾거나 신고할 일은 없을 거다. 기억 속에서 힐다를 완전히 지워 버렸으니까.

그녀뿐만 아니다. 모든 이의 머리에서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

힐다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만 남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날 선 노여움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그가 되살리지 않는 한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는 일은 없을 터다. 기억을 지운다는 건, 남의 일기장을 은밀히 훔쳐서 바닷속 깊은 동굴에다 숨겨 두고 창살을 세워 막아 두는 일이었다. 그 누가 드넓은 바다에서 심해의 작은 동굴을 찾아서 감옥을 뚫고 기억을 되찾아 올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힐다가 알면 화낼 수도 있지만…… 모르게 하면 그만이니까. 방에서 나갈 일도 없으니 알 기회도 전혀 없을 거다.

만에 하나 알게 되어 그를 미워하더라도 기쁠 것 같다. 그래도 그 순간 그녀가 곁에 있다는 뜻일 테니.

이게 내가 널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네 눈을 가리고 팔다리를 꽁꽁 묶어 두는 것.

방에 홀로 우두커니 남은 그녀를 떠올리며 황홀한 만족감을 느낀 것도 잠시.

‘네가 릴리트와 다를 게 뭐지?’

창대처럼 불쑥 솟은 질문이 무방비한 머리를 길게 뚫고 들어왔다. 무심코 힘이 들어간 손이 기어이 의자를 부수었다. 잔인한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 포장하든 결국 너만의 사랑 방식을 강요하고 어떻게든 가지려 들었잖아? 릴리트와 다를 바가 없어.’

아니야, 나는. 나는 그저. 힐다가 중요했을 뿐이야. 지키려는 것뿐이야……. 구차하게 긁어모은 변명이 우수수 흩어졌다.

‘네가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사랑의 형태를 그녀에게 그대로 퍼붓고 있는 거야. 어때, 더 끔찍하지?’

끔찍해. 나마저 내가 이렇게나 끔찍한데 네 눈에 비친 나는 얼마나 추악하고 흉할까. 옅기만 하던 온몸의 자상도 힘을 전부 되찾으면서 짙어졌는데, 이걸 보면.

끝없는 자기혐오가 기생충처럼 이성을 갉아먹었다. 릴리트를 보면서 느낀 경멸과 혐오가 정확히 힐다가 제게 느끼고 있을 감정일 거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죄는 제 손으로 지어 놓고 속이 다 긁힌 행세를 하고 있다. 릴리트를 보던 눈이 도리어 제게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실은 새장 속 새처럼 가둬 두고 싶지 않았다. 너는 아무도 띨 수 없는 색을 가진 빛이었으니까.

네 주위로는 빛이 가득한데 내 주변에만 비가 내리고 있어, 힐다. 비가 멈추지 않아. 아득하고 막막해 견딜 수가 없어.

아드리안이 초조한 기색으로 손을 쓸다가, 문득 이틀 전에 그녀를 안았을 때와 같은 온기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곁에 없으니까 그저 차가워,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할퀴듯이 벅벅 문지르다가 기어이 살갗을 벗겨내고 말았다. 조금 따갑긴 하지만, 화끈거리는 열감이 있으니 그나마 나았다. 무심코 눈을 내렸다가 손목에 가득한 흉터를 보고 집착적으로 소맷부리를 내렸다.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지켜야 해…….

아드리안은 조급한 강박에 휩싸여서 루에이리의 집무실을 마저 뒤졌다. 힐다와의 미래를 망칠 수 있는 건 하나도 남겨선 안 된다.

곁에 있는 유일한 온기를 앗아가려 한다면, 그는 세상이 일컫는 모든 악의 형태를 띨 수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서 그녀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그게 설령 힐다 본인일지라도.

“지루하다, 지루해.”

침대에 드러누운 채 내가 중얼거렸다. 이 집은 어떻게 천장까지 저런 고풍스러운 무늬로 장식해 놨을까. 이 저택 매매가가 얼마일까? 아드리안의 방에 갇힌 이틀간 이 생각만 서른 번은 족히 한 것 같다. 심심하다는 말은 한 100번, 아니, 200번? 지루하다는 말은 300번쯤 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만 했다. 아드리안이 들으면 질식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을 테니까.

아드리안이 호감도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게임 시스템이 오류 메시지를 연달아 띄웠던 게 이틀 전. 그 이후 나는 쭉 이 방에 갇혀 있었다. 둥둥둥 효과음과 함께 세상의 빛이 차례로 꺼지면서 마침내 아드리안과 그의 방만이 덩그러니 남은 그 순간이 사진처럼 찍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 세계가 붕괴되는 와중에도 덜덜 떠는 아드리안만 보고 있던 나는 미친 걸까?

게임 시스템은 계속 에러를 뱉어 내고 나는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실상 내 세계가 아드리안에 의해 완전히 제어 당하는 셈이지만, 따지고 보면 포상 휴가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일하지 말고 쉬라는 거잖아? 고용주의 뜻이 저러니 난 합법적으로 방에서 빈둥거릴 수 있었다. 유급 휴가라고 확언받았으니 시스템이 제정신 차리면 돈도 꽤 쌓여 있을 테고.

여유가 생긴 김에 나는 하인들 사이에서 폭풍적인 유행을 끌고 있다는 로맨스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물론 하루가 넘어가자 그마저도 조금 지루해지고 말았지만. 어떻게 된 게 로맨스 소설 주제가 죄다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이루어진 사랑이라, 현대의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를 즐겨 온 내게는 매우 밍밍하고 싱겁게만 느껴졌다.

이런 내 미적지근한 반응 덕에 아드리안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이틀 전엔 혼자 뭘 봤는지 얼굴 하얗게 질려서 손을 벌벌 떨어 대더니 다행이지 뭐야.

안정을 찾아간다곤 해도 이따금 극도의 불안에 빠져 버릴 때가 있었는데, 저택 주변이 음침해진다거나 비바람이 몰아친다거나 지진이 나는 듯하면 말 한마디씩 꼭 걸어 주어야 했다. 그러면 금세 진정되면서 진동이 멎곤 했는데, 내가 자는 사이 그러고 있을까 봐 걱정됐다. 멀쩡히 잘살고 있던 바깥사람들은 무슨 죄냐고요.

그가 이렇게 날 가둬 두긴 했지만, 여전히 무섭진 않았다. 몸이 다 타들어 죽기 직전에도 나는 절대로 못 죽이는 모습을 봐 버렸으니까. 살의가 92%에서 0%로 폭락하던 그때, 아드리안은 이미 자기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꾼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애가 나한테 손을 댈 수 있길 하겠어, 죽이길 하겠어?

솔직히 내가 나간다고 큰소리치면 아드리안은 눈물 뚝뚝 흘려 대며 애원하다가 결국 열어 줄 게 뻔했다. 자해 공갈이라도 하면 애원할 새도 없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근본적인 해결은커녕 불신만 더 커질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내가 모르는 사이 쓱싹 해낼 수 있는 일이 워낙 많으니까. 가끔 상상 못 한 일들을 몰래 하고 와서 천연덕스럽게 있는 걸 보면, 게임 마비시킨 것도 양반인 셈이다.

하긴 아드리안은 숙면 걸어도 6초 만에 깨는 이 게임 최강자에다 악마 속성이잖아? 이 정도 음모가 없는 게 이상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사실 조금 놀라긴 했다.

백작 부인이랑 맵 개방 폐쇄 배틀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호감도 올린답시고 연필을 주는 게 아니었다. 없는 돈 긁어모아 연필 10자루씩 챙겨서 호감도 올렸던 게 화를 부른 거지. 이날의 화를 불렀어…….

그러고 보니 악마의 예술혼 조각인지 뭔지 네 번째 조각만 쌓이고 세 번째 조각은 코빼기도 안 보여서 완성하지 못했는데, 뽑기 잘했으면 큰일 날 뻔한 거였잖아? 어쩌면 감금 이벤트 시기가 더 당겨졌을 수도 있겠다. 운이 나빠서 결과적으론 운이 좋아진 경우였다니.

「ProtocolException : Could not open a connection to Server.

DEBUG - 2764.2568 mil elapsed in LoadMapData

DEBUG - 4085.0766 mil elapsed in LoadNPCData

FATAL – ShowException : System.Threading.ThreadAbortException : 중단되었습니다.」

속으로 헛소리만 잔뜩 해대고 있는데 갑자기 하얀 글씨가 눈앞에 반짝 떠올랐다. 이틀간 내 유일한 친구였던 에러 메시지. 대충 서버에 연결할 수 없고 데이터를 불러내다가 실패했다는 뜻인 것 같은데. 시스템은 일부 마비가 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복구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듯했다.

「복구를 진행합니다…….(0/1698)」

「WARNING!! 복구할 수 없습니다.」

「WARNING!! 복구할 수 없습니다.」

「WARNING!! 복구할 수 없습니다.」

난리 났다, 난리 났어. 이쯤 되니 시스템이 자기 좀 살려달라고 징징 우는 것 같은데. 시스템에겐 미안하지만,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아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에밀리가 잘 있는지라도 확인하고 싶은데 버튼들은 죄다 비활성화됐고 스킬이나 제작소도 못 누르게 막혔으니 소일거리조차 없었다.

「WARNING! 복구할 수 없습니다…….」

뭐야, 왜 갑자기 아련한 말 줄임표를 쓰는 건데. 악랄한 게임 시스템도 저러니 불쌍해 보이기도 하네.

“하……. 나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순 없는데.”

시스템이 끊임없이 복구를 시도하듯 나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아드리안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그가 붙잡아둬서가 아니라 내 의지로 곁에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 아드리안의 불안과 불신에 끊임없는 애정으로 답하다 보면 결국은 제 손으로 세상을 열어 주리라 믿었다. 같이 산책하고 마을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음식 먹으러 다니는 걸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언제까지고 가둬 두고만 있을까? 아드리안과 나 사이에 그 정도 신뢰도 없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건 내가 도망가서도, 화를 내거나 협박당해서도 아니어야 한다. 아드리안 손으로 직접 풀게 해야 했다.

그러려면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

나는 단단히 마음을 굳히고 창밖을 보았다. 이 방만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창문 밖이 온통 새카만 바람에, 대략적인 기상 상황은 작게 새어 들어오는 소리와 미묘한 밝기 차이로 짐작할 수만 있었다. 햇빛 한 점 없이 컴컴하고 스산한 바람이 들어오는 걸 보니 오늘도 날씨는 잔뜩 흐림. 아드리안이 이성을 잃어버린 이틀 전부터 저 꼴이다.

이틀 전…… 이틀 전 밤.

“아, 또 생각났잖아.”

나는 손으로 눈을 덮고 끙끙 앓았다. 그러니까 이틀 전 말이다. 아드리안은 내게 밤을 같이 보내자고 했고 나는 고민하다 승낙했다.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으나 결코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악몽 꾸게 하지 않겠다고 속삭이곤 안겨서 침대에 끌려갔는데…… 정말 놀랍게도 그대로 방치당했다. 아드리안은 심지어 침대에서 자지도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틀째 잠을 안 자고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는데, 세상의 모든 색기는 다 끌고 와서 요망하게 굴 때는 언제고 막상 판이 깔리자 내빼는 형국이다. 심지어 어제는 진지하게 물어볼 뻔했다.

너 왜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해? 기껏 자기 방에서 자 준다는데 혼자 내버려 두면 내가 뭐가 되는 건데. 적어도 입맞춤까지는 진도 빼야 하는 거 아냐?

악마는 원래 색욕 넘치는 종족 아니었냐고 카지미어 붙잡고 닦달하고 싶은데 만나지 못하니 혼자 그 이유를 추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 그렇게 붙어먹지 못해 안달이었잖아?

혹시 흥분하는 키워드가 사람과 다른가? 귀엽게 들러붙는 거랑 성적인 욕망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 아니면 도련님이 의외로 샌님일 수도 있어. 어렸을 때부터 오늘내일하며 아팠으니 기본적인 성교육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렇게 온갖 추리를 하다 보면, 식물 키우기를 가장 좋아하는 순수한 도련님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아니야, 나는 순수하고 학구적인 의문을 품는 것뿐이다. 몸은 괜찮아졌는데 왜 더 멀리하는 건지 궁금해서.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창 애정행각 할 시기에 오히려 내외하는 게 이상해서.

신뢰를 쌓는다는 목적에서 은근슬쩍 속물적으로 변해 가는 것 같지만, 나는 절대 밝히는 게 아니다. 다만 아드리안이 어떤 신체적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 세계의 장어를 찾아 사다 줄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크흠.

그때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간격을 두고 문이 열렸다.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건 나 외엔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머리를 정리했다. 온갖 생각을 하면서 뒹구느라 침대가 엉망진창이었다.

“아드리안. 이제 왔어요? 오늘은 늦었네요.”

문을 열자마자 곧장 인사를 건넸다.

사실 곁방에서 책 읽는 데 집중한 나머지 아드리안이 들어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아드리안이 날 찾으러 오는 걸음걸음마다 밖에서는 천둥 번개가 쳐 난리가 났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지내라고 곁방을 내주었지만, 막상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이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 후부터는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곤 웬만하면 나와 있었고, 그게 아드리안을 크게 안심시켜 주는 것 같았다.

“힐다, 오늘은 어떻게 보냈어? 혼자 심심했겠다.”

“그냥 모자랐던 잠 실컷 자고 책도 보고, 이것저것요. 심심한 거 알면 좀 빨리 오시지 그랬어요.”

“미안해. 생각보다 아버지 관련으로 처리할 일이 많아서.”

일부러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칭얼거리자 딱딱했던 입가가 슬며시 풀어졌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손을 꼭 잡아 주는 인사가 이제 꽤 자연스러웠다.

아버지 일이라면 악마 숭배에 관한 일이었겠지? 하필 후원하는 일엔 아드리안도 엮여 있었으니 정리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싶었다. 해리슨이 냄새 맡은 걸 보면 다른 경관들도 조사해 보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고 보니 해리슨 이 양아치 같은 새끼,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정의를 그렇게나 부르짖더니 혼자 도망치고는 끝내 동료 경찰 한 명 보내 주지 않았잖아. 아드리안이 와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다. 물론 죽진 않았겠지만, 에밀리까지 구해야 하는 그리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단 말이지. 경찰이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한 구석이 많은 아저씨다.

“무슨 고민이 있어서 이렇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

톡톡. 검지가 미간을 건드렸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듯 그를 보았다. 문득 아드리안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드리안. 저 말할 게 있는데…….”

“응, 식사하면서.”

“짧게 말할 수 있어요. 해리슨 경감 말인데요. 도련님을 노리고 있거든요.”

“안 돼. 식사부터 해. 너 요새 야위었단 말이야. 널 볼 때마다 얼마나 속상한지 알기나 해?”

“누가요? 제가요?”

해리슨 경감이 얼마나 기막힌 인간인지 미주알고주알 이르려던 입이 뚝 멈추었다. 누가 야위어? 금시초문이다.

“이 손목 좀 봐. 툭 치면 부러지게 생겼잖아.”

내 손목은 9시간 동안 걸레질해도 멀쩡할 정도로 튼튼하다.

“내가 저택을 비운 사이에 얼마나 잘 못 챙겨 먹었기에…….”

삼시 세끼 꼬박꼬박 거하게 잘 챙겨 먹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속상하다는 투라서 말이 안 나왔다. 얼굴만 보면 내가 님보다 잘 먹은 것 같은데요.

“그러다 말라서 사라지겠어, 힐다.”

“…….”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냐면, 이틀간 먹기만 하고 방 안에서만 있다 보니 살이 피둥피둥 오르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었단 말이지. 매일같이 하던 집안일에선 손을 뗐지만 먹는 건 그대로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지금은 내 어마어마한 기초대사량이 필사적으로 막아 내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일주일만 더 지내면 얼마나 우람해질지 가늠이 안 갈 지경이었다. 거울 보고 얼굴이 동그래진 거 같다고 생각한 게 오늘 아침이었는데 뭐요?

“그래서 말인데, 힐다. 오늘은 특별히 더 많은 요리를 준비해 두라고 일러뒀어. 가서 마저 얘기할까?”

하지만 아드리안의 걱정이 더 맛있는 식사로 이어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살이 찌든 말든 지금 행복하면 그만이다.

“듣고 보니 배가 엄청 고프네요. 다이닝룸이죠? 얼른 가요.”

내가 벌떡 일어나자 아드리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머리로부터 뺨으로 가볍게 쓸며 내려오는 손길이 퍽 다정하고 고양이 쓰다듬듯 부드러워서, 그만 가슴이 뛰어 버리고 말았다.

창문도 문도 열 수 없는 지금 방에서 나갈 기회는 하루에 딱 세 번이었다. 식사를 위해 다이닝룸으로 이동할 때였는데, 아드리안이 문을 열어 줘도 특정 맵이 개방되었다는 알림이 따로 뜨진 않았다. 눈이 먼 것처럼 아드리안의 소맷부리를 잡고 걸어가면 우리 주변으로만 불빛이 들어오는 식이었다.

다이닝룸에 들어갈 때마다 커다란 식탁에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서빙을 위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그리웠는지 조금 아쉬웠으나 복도에서 아드리안의 손을 놓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을 상기하며 나를 위로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식사는 정말이지 끝내주는군!

고소한 육즙이 고기를 씹을 때마다 입 안에서 팡팡 터지는 게 일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다이닝룸에 오자마자 해리슨을 고자질하느라 바빴는데, 이야기가 길어지자 보다 못한 아드리안이 고기를 썰어 입에 넣어 주기 시작했다. 넣어 주는 족족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 인간이 갑자기 철창에 머리를 막 갖다 박는 거 아니겠어요? 우두머리를 만나게 해 달라나 뭐라나. 미친 줄은 알고 있었는데 저까지 끌고 들어갈 줄 몰랐던 거죠. ……거기서 백작님을 만나 뵌 거예요.”

그 대목에서 혹시 아드리안이 또 슬퍼할까 싶어 살짝 눈치를 봤다. 다행히 그는 지금 내가 먹는 속도에 맞춰 고기를 써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더니…… 우움, 고기 정말 맛있네요. 경감이 백작님과 동맹을 맺더니 저에 대해 치사하게 일러바치지 않겠어요? 손목이 자유로우니 다시 포박하는 게 좋겠다면서.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그래도 경감님이시니까 혼자라도 나가시라고 교대 시간도 알려 줬는데.”

“힐다, 앞으론 그렇게 무모하게 움직이지 말도록 해.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갔으면 어쩔 뻔했어? 손목은 내가 치료할 수 있을 수준이었기에 망정이지, 그 이상이었다면 그리 편하게 보내지 않았을 거야.”

“……뭐, 그래도 경감 아니었으면 그렇게 다칠 일도 없었을 거여요.”

시스템 메시지로만 확인했던 그날의 진상이 아드리안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잠깐 멈칫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작은 고기 한 점이 냉큼 들어왔다. 맛있게 냠냠 씹어먹으면서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 경감이란 자부터 혼내줘야 했구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해. 그자의 가지고 싶은 신체 부위가 있을까? 방법을 말해 줘도 좋아. 그대로 실행하고 와서 설명해 줄 테니까.”

딸기잼 발라줄까, 버터 발라줄까 물어보는 억양으로 물어봐서 나도 모르게 ‘귀요!’ 하고 대답할 뻔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복수해 달라고 말한 건 아녜요. 그냥 조심하시라고요. 그 사람이 줄곧 도련님한테 집착하고 있어서요. 미친개한테 물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그래. 네가 말한 거니 명심하도록 할게, 힐다.”

“생각해 보면 만날 때마다 시비 걸어대서 이상하긴 했어요. 설마하니 에밀리 찾으러 갔다가 보게 될 줄은…… 참, 혹시 에밀리 보셨어요? 처음 볼 때 머리 맞고 기절해 있었거든요. 잘 깨어났는지 궁금해요. 아픈 곳은 없는지도요.”

“…….”

“음, 모르시겠죠? 저택으로 돌아온 후에 쭉 바쁘셨을 테니까, 하인 하나하나 돌볼 여유는 없으실 테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몰래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늘 한 번 안에서 걸러져서 나온 듯한 얼굴이었지만, 곁에 머무른 시간이 적지 않다 보니 미묘한 차이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눈동자의 움직임, 손동작, 어조, 목소리의 높낮이 등등.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법한 차이가 그에게는 의미 있는 지표였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레티샤에게 하인 하나가 사라졌다가 돌아와서 회복 중이라는 보고는 받았어. 다친 덴 없다니, 힐다 네겐 좋은 소식이겠지?”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원하면 내일 더 자세히 알아봐 줄 순 있어.”

“아녜요. 무사하기만 하면 됐어요.”

나는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고 아드리안은 “그래…….”라고 느리게 대답하며 반쯤 눈꺼풀을 내렸다. 순순히 대답해 주면서도 느릿한 걸 보아 마음에 걸리는 뭔가 있는 듯하다.

레티샤에게 보고받은 건 확실히 거짓말이고, 아무래도 에밀리를 직접 만난 것 같지? 그런데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흠, 아무래도 내가 예상했던 여러 시나리오 중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를 지워,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러지 않길 바랐지만, 아드리안은 아무래도 이 길을 택한 것 같다. 케이든과 그로버를 상태 불능으로 만들고 카지미어를 피떡으로 만든 데서 그의 극단성은 이미 확인했었기에 그리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죽이지 않은 게 놀라운걸. 주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들어준 거겠지.

지금은 불안감에 길을 헤매고 있을 뿐.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안 되면 모레. 그러고도 안 되면 한 달, 혹은 그 이상. 아드리안은 그의 진심과 나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길을 찾을 거다. 그 정도 시간을 못 기다려 줄 정도로 내 사랑은 약하지 않았다.

“힐다, 천천히 먹어도 돼.”

그리고 차려진 음식을 남길 정도로 내 위는 작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요리를 입 안에 밀어 넣는 수준으로 먹고 있자 아드리안은 감탄하듯 보고 있다가 덩달아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아드리안 방으로 돌아와 티타임을 즐기고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시계를 보고 잠시 후 자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달은 내가 건너편에 앉은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 저 잠옷이 필요해요. 방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잠깐 다녀와도 될까요?”

회피 원피스를 입은 채 갇히는 바람에 사실 난 변변찮은 옷가지가 없었다. 회피 원피스는 부지런히 빨아서 말려뒀지만, 방에 뒹굴면서 입을 옷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틀이나 사흘 정도면 적당히 열어 주지 않을까 했는데 최악의 시나리오로 진행되는 걸 보니 나만의 희망이었던 것 같다. 장기전이 된 만큼 이제 나도 옷가지라든지 생활용품을 챙겨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이야 급한 대로 옷장에서 긴 언더튜닉을 찾아서 입었는데, 아무래도 키 차이가 있다 보니 내가 입으면 허벅지 중간까지는 충분히 감쌀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하면 한없이 말려 올라가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힐다, 네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여기서 지내게 된 건데 내가 배려가 없었구나.”

옷자락이 올라가지 않도록 꼭 잡은 손을 뒤늦게 발견한 아드리안이 뒤늦게 탄식을 흘렸다.

“괜찮아요. 잠옷만 가지고 금방 돌아올게요. 약속해요.”

“아냐. 너는 여기 있어. 내가 다녀올게.”

“네? 도련님이요?”

당연히 내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드리안이 돌연 찻잔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일어섰다. 아드리안이 나 대신 방에 가서 옷가지를 챙겨온다고? 상상도 못 한 제안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도련님이…… 다녀올 수 있겠어요? 정말로요? 괜찮겠어요?”

“응, 뭘 가져오면 돼?”

말이 좋아 대신 갖다주는 거지, 이건 다시 말해 귀족 도련님이 하인의 심부름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방을 다 틀어막은 탓이었으나, 아드리안과 내가 함께 있을 때 움직이는 건 항상 내 쪽이어서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와 달리 정작 아드리안은 태연한 태도였다. 자길 이름으로 부르라는 제안도 먼저 한 걸 보면 생각보다 개방적인 귀족 도련님일지도 모르겠다.

“저 잠옷이 필요한데요. 그게 어디 있냐면…….”

어디 뒀더라? 빨아서 널어놨는지 옷장에 넣어 놨는지 가물가물했다.

“옷장 먼저 봐 주세요. 제 방에 한번 와 보셨으니까 어디 있는지 아시죠? 도련님 옷장보다 훨씬 작은, 이만한 크기인데요. 거기 두 번째 서랍 열면 발목까지 늘어질 만큼 길고 흰 네글리제가 있어요. 가장 왼쪽에 세 벌 정도 개어져 있을 텐데 전부 가져오시면 돼요.”

“길고 흰 네글리제.”

“네. 그리고 바로 첫 번째 서랍에…… 아냐, 아녜요. 이건 못 들은 거로 해요.”

미쳤지, 아무리 그래도 그걸 아드리안이 갖고 오게 할 순 없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아드리안은 알아들은 건지 “첫 번째 서랍.”이라고 중얼거리며 방을 나갔다. 잘 다녀올 수 있을까? 아드리안은 어렸을 적이나 지금까지 심부름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텐데. 악마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처음으로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킨 누나처럼 방을 서성이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걱정을 접었다. 밖에 나갔다 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숙소에 다녀오는 건데 별일이나 있겠냐며.

그사이 얼른 씻고 나오자. 아드리안은 왠지 내 방에서 한참 헤맬 것 같으니 시간은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드리안 방에 딸린 욕실에서 얼른 샤워했는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오다 말고 멈칫했다. 놀랍게도 아드리안이 벌써 돌아와 있었던 거다. 미리 찾아 놓은 언더튜닉을 입고 나오길 망정이지,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

그런데 이미 민망해진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시선을 마주친 순간부터 얼어붙은 것처럼 서로 말이 없다. 나는 어렵사리 눈을 내려 그의 품에 가득 담긴 옷가지를 봤다. 잠옷만 가져오랬더니 옷장을 죄다 쓸어왔네.

“힐…… 다. 네가 가져오라는 게 이게 맞을까?”

옷장에 있는 걸 전부 가지고 왔는데 물론 그중에 섞여 있겠지. 그리고 왠지, 가져오지 말라던 것도 가져왔을 듯한 불길한 느낌이 진하게 들었다. 내가 굳은 목을 겨우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심부름을 완수한 데 대한 뿌듯함이 만면에 가득했다.

“다행이야. 사실 네가 말한 게 뭔지, 죄다 흰색이라 찾지 못했거든……. 이것들은 옷장에 정리해 두면 되겠지?”

“아, 아녜요. 그거 전부 저한테 주세요!”

“왜? 내가 직접 넣을 수 있는데.”

“묻지 마시고 얼른 주세요!”

내가 수건까지 집어 던지고 급하게 다가가자 아드리안은 다소 어리둥절하게 옷더미를 넘겨주었다. 이제 됐다고 안심한 것도 잠깐, 옷더미 사이에 끼어 있던 뭔가가 툭 떨어졌다. 아, 안 돼. 잠깐이나마 손가락을 스쳤던 감촉이 심상찮았다.

“힐다, 이건 뭐야? 처음 보는 건데.”

흰색, 레이스 달린 천이 그의 손 밑으로 작게 펼쳐졌다. 그걸 또 천연덕스럽게 뭔지 물어보는 아드리안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왜 하필 저게 떨어진 건지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옷가지를 와르르 내던지고 손을 뻗었다.

“그거 이리 주세요! 어, 얼른요!”

“응? 으응. 뭔데 그렇게 놀라는 거야? 얼굴도 빨개.”

“도련님은 모르셔도 돼요!”

성교육을 안 받은 게 분명해! 이 순간 강하게 확신하며 나는 잽싸게 아드리안의 손에 들린 걸 낚아챘다. 장비 버프만 있었어도 얼른 주워서 숨길 수 있었을걸, 이런 대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메이드복을 입고 살아야 할지 고민되기까지 했다.

남의 속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이 순진한 도련님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빛내며 나를 쫓아다녔다. 뭔데? 뭔데 그래?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눈빛이 아주 시끄럽다. 왠지 가만히 두면 잘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 같은걸.

“……옷요.”

“응? 잘 안 들리는데.”

“속…… 옷이라고요. 여자들이 입는.”

“아.”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듯 그가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흐르는 침묵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뻥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해졌다. 속옷이 뭐 어때서. 따지고 보면 세상 사람들 다 입는 건데. 나도 입고, 아드리안도 입고…… 아, 방금 건 괜히 생각했어.

“미안해, 힐다. 내가 실례를 범했네. 열어 보니 전부 흰색이라서 뭘 가져와야 할지 몰랐어.”

“뭐, 뭐 또 그런 걸 사과하고 그래요.”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혼란스러워, 속옷을 옷더미 속에 파묻고 대강 옷장 안에 쑤셔 넣었다. 민망한데 맵이 닫혀 있으니 방을 나갈 수도 없고.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방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차, 나 씻고 나왔지.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건데, 힐다.”

목소리는 바람처럼 훅 다가왔다. 내 위를 덮는 그림자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올리자,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먼저 보였다. 천천히 올라온 손은 내 어깨를 살짝 덮었다. 미끄러지듯 빗장뼈. 가볍게 훑어서 목까지. 나는 그제야 새로 꺼내 입은 셔츠가 생각보다 앞섶이 벌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물기가 남은 피부를 훑고 내려간 손이 앞섶을 조심히 모았다.

“너 너무 야해.”

약한 듯 강한 듯 다시 약하게. 목 아래가 훤히 드러나지 않도록 여며주려다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저 쥐고 있기만 했다. 조심조심하는 손길에 얼굴이 미미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에 입은 옷보다 길이도 훨씬 짧아서 춥지 않은지 걱정돼.”

“…….”

“아, 그래서 방에 다녀온다고 한 거구나.”

수줍은 미소가 시야에 예쁘게 번져 갔다. 그가 스르르 고개를 내려서 콩 소리 나게 이마를 부딪쳤다.

“아까보다 더 빨개졌어. 입술은 왜 떨어?”

코끝이 부드럽게 비벼졌다. 그가 내뱉는 숨을 그대로 받아마시는 것 같다. 취할 듯 다디단 숨. 낮은 웃음이 간지러웠다.

“아까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부끄러운 말 하게 해서 미안한데, 빨개진 얼굴이 귀여워서 딱히 후회되질 않네. 어쩌지.”

나쁜 손이 내 등허리를 휘감더니 느리게 끌어당겼다. 이내 밀착. 내 다리는 그의 다리 사이에 얽혔다. 내가 아무 저항을 하지 않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빤히 바라보는 눈은 수줍어하는 척하면서 나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나 이렇게 버릇 나쁘게 길들여도 되는 거야? 감당 못 할 텐데.”

“누가, 누굴 길들여요.”

“네가 날 살렸잖아. 그러니 네가 길들여야지.”

말끝에 입술이 짧게 닿았다. 그 감촉이 화끈거리며 남았다. 세찬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등허리를 짚은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옷자락이 젖어 있는 탓인지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됐어요. 도련님은 심부름에 재능 없으니까…… 다시 한다고 하기만 해 봐.”

“아아. 다음엔 더 잘할 테니까 화내지 마, 응?”

아랫입술을 꽉 깨물자 아드리안이 애달프게 속삭이며 입술을 살살 비벼 왔다.

가슴이 삐끗했다. 정말이지 나는 그의 이런 예쁘게 사근거리는 표정과 목소리에 약했다.

“제발. 이런 가혹한 길들임은 너무 아파, 힐다.”

그가 윗입술을 살짝 적시며 빨아 당겼다. 꽉 다물린 입을 열어 달라는 신호였다.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긴장을 풀어주듯 부드러운 손길인데 어쩐지 몸이 떨렸다. 손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꽉 쥐기도 하고 어깨에 올려놓기도 하면서 허둥지둥. 어떻게 해도 어설펐다. 가만히 나를 살피던 아드리안이 예쁘게 눈웃음을 쳤다. 꾹 깨문 입술이 천천히, 느리게 풀리고 있는 걸 느꼈기 때문이겠지.

어찌할 바 모른 채 눈을 내리깔고 방황하고 있자, 그도 수줍다는 듯 잠시 주춤했다. 나는 저게 왠지 내숭인 것만 같다. 여우 같은 악마. 잔뜩 얼어붙은 입술을 천천히 가르고 혀가 침입했다. 거부할 수 없는 농염함이 입술에 스며들었다. 긴장해서 굳은 혀를 달래듯 얽으며 가볍게 빨아들였다.

그리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코끝이 살짝 부딪히고…… 입술과 입술이 비껴가는, 습한 소리가 질척하게 울렸다. 입속을 부드러이 헤집는 감촉에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얼어붙은 채 가만히 있던 혀를 살짝 움직여 보자 그가 웃는 것도 같았다. 기특하다는 듯, 멈춰 있던 만큼 따뜻한 숨결을 불어 넣어 주었다.

할딱할딱 들썩이는 가슴이 요란했다. 진정시켜 주려는 듯 몸의 무게로 내리눌렸는데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쿵쿵 뛰어대는 심장 소리만 들려준 꼴이다.

어설프게만 있던 두 팔은 어느새 그의 목에 감겨 있었다. 내가 먼저 감았나? 아니, 그가 인도한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같은 온도로 달아오른 채 완전히 겹쳐져 있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눈을 뜨자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푸른 눈이 감당 못 할 만큼의 애정을 퍼부었다. 그의 입맞춤과 애정에, 눈빛에 온몸이 푹 젖어 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거의 그에게 매달려 있다시피 했다.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떨어지려는데 번번이 무산되었다.

“더 간지럽혀도 될까요, 주인님?”

뭐라 대답할 새 없이, 옷을 가볍게 들추고 손이 들어왔다.

파고드는 손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움푹 파인 허리와 등, 어깻죽지. 습하고 뜨거웠다. 공기 속 수증기가 모조리 우리 둘에게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맨살을 짚는 손길에 데일 것 같았다. 뜨거운 게 나인지 아드리안인지 알 수 없었다.

으……. 정성스러운 입맞춤에 흐물흐물 늘어지자 아드리안이 놀라운 힘으로 날 받쳤다. 입술이 빗겨나가는 틈에 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다시 혀가 얽혔다. 입속에 수없이 많은 거미줄이 쳐지는 것 같았다.

“이젠 숨 쉬는 것도 야하잖아.”

“…….”

“이쯤이면 유혹하는 거지, 일부러.”

색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건 자기면서 자꾸 남 탓한다. 내가 애처로울 만큼 헐떡거리자 아드리안은 그만 자비를 베풀겠다는 듯이 혀를 놓아주고, 대신 부드러이 입천장을 문질렀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혀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렇게 키스를 잘하면서 이제까지 왜 안 한 건데…….

내가 다른 생각에 빠진 걸 들켰는지 혀끝이 살짝 깨물렸다. 뒤이어 아랫입술. 잡아먹을 듯 다시 혀를 삼킨다. 살살 문질러 대는 간지러움 사이로 날카로운 자극이 끼어들 때마다 몸이 움칠거렸다.

이상해. 머리가 진짜 이상해져 버릴 것 같다. 다시금 얽어오는 혀를 피해서 허겁지겁 뒤로 빠졌는데 악착같이 쫓아왔다. 무자비하게 달콤한 애정.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하자 아드리안은 우뚝 멈추고 입술을 떼었다. 쌕쌕거리는 가쁜 호흡이 침묵을 녹이기를 잠깐. 내 표정을 슥 훑어본 그가 생긋 웃었다.

“배려가 부족했네. 서 있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바닥에서 번쩍 발이 들렸다. 본래 내 힘으로 서 있던 건 아니었으나 아래가 허전하고 다리가 덜렁거리는 느낌에 눈이 커졌다.

아드리안의 걸음으로 침대까지는 단 몇 발자국이면 충분했다. 부드러운 천의 질감이 엉덩이에 닿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몸 위로 그가 기어 올라왔다.

이번 입맞춤은 조금 전과 달리 짧고 산뜻했다. 젖은 입술이 느리게 내리눌렀다가 떨어지고, 대신 이번엔 목덜미. 하롱하롱 흩날리던 촛불이 훅하고 꺼졌다. 눈앞이 컴컴해 보이지 않아서인지 목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더욱 생생했다. 혓바닥을 내어 핥기까지 하자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웠다.

“괴롭히지…… 마요.”

작게 앓자 그가 이를 세워 목을 살짝 깨물었다. 신음에 자극당한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있어 달라는 어리광인 것 같기도 하다.

“미안, 일부러는 아냐. 온몸이 빨개진 게 귀여워서 그만.”

옷자락을 들추고 올라오는 손길 때문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질끈 눈을 감으며 어깨를 움츠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목덜미에 파묻혔다. 무언가를 갈구하듯 퍼붓는 입맞춤에 나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의도치 않게 그를 조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힘을 풀자 또 한 번 웃음. 순진한 소년처럼 웃는데 입술은 뜨거웠다. 목덜미에서 좀 더 끈질기게 지분거리는 묘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로, 빗장뼈로 흘러내리는 숨이 뜨거웠다.

“더 만져도 될까?”

목덜미에 콧잔등을 살짝 비비며 그가 앙탈 부렸다. 사락사락, 어둠을 머금어 짙어진 금색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혔다. 정작 나는 다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온 신경이 쏠려 끙끙거리고 있었다. 뜨겁고 간지러워. 온몸의 신경이 쭈뼛 곤두서다가 눅진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허락해 줘, 응? 나는 늘 네게 굶주려 있는데, 지금도 구석구석 맛보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는걸. 이것마저 안 된다고 하면 난 정말 쓰러질지도 몰라. 분명 며칠간 못 일어날걸…….”

“이제까지…… 맘대로 해 놓고.”

“허락해 준다니, 내 주인님은 참으로 관대하시지.”

“그, 주인이라는 이상한 소리 좀…….”

“네가 아니고서야 누가 내 주인이 되겠어.”

반쯤은 타박이었건만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얌전히 머무르기만 하던 손이 골반까지 쓸어 올라왔다. 살짝 튀어나온 골반을 풀어주듯 살살 문지르는 손길이 꽤 조심스럽다.

그에게 손을 뻗은 건 충동적이었다. 그가 나를 만지듯 나 또한 만지고 싶어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매끄러운 살결에 어울리지 않는, 움푹 파인 자상 흉터가 손끝에 먼저 닿았다. 어, 그런데 지난번에 만졌을 때보다 더 선명해진 것 같다. 500명 넘게 죽였으니 흉터도 깊어졌겠거니 하며 손끝으로 더듬고 있는데, 아드리안이 붙잡아 내렸다.

“이런 건 만지지 말자, 힐다.”

“네? 왜…….”

“……흉한 건 만지지 마. 보지도 말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완강한 거부 의사를 느꼈다. 팔은 도로 내렸다만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흉한 거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맥상 그 자신을 뜻하는 것 같았지만, 내게 아드리안은 흉하다는 표현과 완전히 대치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그를 보고 흉하다고 먼저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멀쩡한 눈을 가졌다면 말이다.

“뭐가 흉하다는 거예요.”

“흉하지. 상처투성이인걸.”

나는 다시 말문을 잃었다. 골반으로부터 살금살금 기어 올라오는 손이 노골적이어서.

맨살을 더듬어 올라가는 자취마다 불꽃이 일었다. 뼈마디 하나하나 어떻게 생겼는지 가늠해 보듯, 섬세하게 짚어 올라갔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니, 힐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아드리안이 어르듯 말했지만, 나는 창피해서 팔을 눈가에 올려놓고 피했다. 그가 고양이처럼 어둠 속을 잘 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옆구리를 슥 훑어 올라가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배에 힘이 들어갔다. 요즘 방에만 박혀 있느라 살찐 것 같다고 생각한 게 오늘 아침이었는데. 아까 덜 먹을 걸 그랬나. 어지러운 와중에도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평평하고 나붓하게 올라오던 손이 곡선을 탔다. 아래에서부터 지지하듯 모아 올리는 정성스러운 애무. 커다란 손에 전부 다 덮였다. 어느새 정점. 자지러지듯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발가락이 구부러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 바둥거렸으나, 아드리안은 그런 나를 달래며 목 여기저기를 긁어 물었다.

“기분 좋게 해 줄게.”

손톱 끝이 정점을 살살 긁어내렸다. 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눈앞이 번쩍였다.

아, 아.

“쉬이. 괜찮아, 힐다. 아, 예쁘다. 너무 예뻐. 좀 더 소리 내볼래, 응.”

“아드…….”

“응, 내가 곁에 있어. 내 이름 한 번만 더 불러 줄래…….”

헐떡였다. 단 한 번의 호흡도 어려워서.

“여기에 키스해도 될까, 녹아 버리기 전에.”

몽롱하게 울렸다. 가쁜 숨소리, 살결을 빨아 당기는 질척한 소리만이 더운 공기를 가득 메웠다. 거세게 퍼부어지는 애정 표현은 나를 계속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긁고 비비고 문질렀다. 끝에서부터 자극해 오는 희열. 허리를 타고 오르는 짜릿한 감각을 견딜 수 없었다.

어깨를 살짝 비틀어 몸부림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득한 어둠 속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온몸이 흐늘흐늘 녹아서 흡수되는 것만 같다. 푹 잠긴 채 헤어나올 수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