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어시스트 킬이 인정됩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38/300)」
「적을 처치했습니다. (72/300)」
「적을 처치했습니다. (103/300)」
「적을 처치했습니다. (151/300)」
「적을 처치했습니다. (274/300)」
「적을 처치했습니다. (367/300)」
「더 이상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398/300)」
「더 이상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422/300)」
「더 이상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449/300)」
「더 이상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적을 처치했습니다. (501/300)」
「더 이상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적대 대상 루에이리가 사망했습니다. 적대 관계가 끊어집니다.」
「적대 대상 간의 동맹이 끊어졌습니다.」
「메인 퀘스트 - 대학살을 완료했습니다.」
붉은 글씨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올라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우뚝 멈추었다.
루에이리 사망, 메인 퀘스트 완료……. 모래알처럼 모여들었다 흩어지는 글씨가 멍한 동공에 비쳤다.
신전에서 깽판 치면서 기름칠해 두고 아드리안에게 쩔받은 덕에 큰 수고로움 없이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지만, 마냥 잘됐다고 하기엔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보통 게임은 메인 퀘스트 끝나면 끝나잖아. 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일까?
「메인 퀘스트를 완료하여 경험치 3000을 얻었습니다.」
「특별한 성장의 기운 버프가 적용됩니다.」
「레벨 39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첫 연인)」
「메인 퀘스트는 이제 1개 남았습니다.」
뭐? 하나 남았다니, 메인 퀘스트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다음 메인 퀘스트가 뭔데? 살인에 대학살, 그다음은?
메인 퀘스트가 고작 두 개로 끝나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미 앞의 퀘스트만으로 질려 있던 내겐 하나하나가 잔인하고 벅차게만 느껴졌다. 갑자기 뒤통수치지 말고 메인 퀘스트 주제라도 알려 주었으면 했지만, 붉은 글씨는 더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고 사라졌다.
이런 미친 게임, 생물도 아닌 시스템과 대화나 협상을 할 수도 없고.
“힐다.”
사박사박 잔디 밟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신전 계단을 타고 올라와 내게 다가온다. 5백 명 넘는 사람을 죽이고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 어두운 밤이 확 밝아질 정도로 해사한 미소를 띤 채였다.
메인 퀘스트를 완수한 게 내가 아니라 아드리안 같을 정도인데…… 어라,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왜…… 울고 계세요?”
누가 슬픈지 아닌지는 표정만 봐도 알지만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아드리안이 세상 행복한 듯 웃고 있으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볼이 왜 반짝거리는지 의아했다가 가까이서 보고야 눈물 때문인 걸 알았다.
그가 긴 다리를 굽혀 내 앞에 앉았다. 깊은 눈매에 고인 눈물이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나를 향한 미소가 아니었다면 아드리안 위에만 비가 내리는 줄 알았을 거다. 보는 내가 더 슬퍼져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왜 울어요…….”
“나 안 울어, 힐다.”
“슬퍼요?”
“…….”
아드리안은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자기가 울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왜 우는지 알 리가 없지. 슬픔과 기쁨이 완전히 따로 노는 듯 행복한 미소가 그저 안쓰러웠다.
아드리안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의 눈물은 아마 루에이리 때문인 것 같았다. 스스로 영혼을 부수면서 어머니를 살린 어린 도련님이 아버지를 죽여 놓고 멀쩡할 리 없지. 이미 가루가 되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했지만, 감정적인 영향은 주고 있는 듯했다. ‘투시자의 눈’으로 봤을 때도 이미 둘이 섞여 하나였으니 짐작이 맞겠지.
“힐다, 너 왜…….”
“네?”
“너 왜……?”
달래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드리안이 이상해졌다. 어딘가 내몰린 사람처럼 자꾸 왜 그러냐고 초조하게 묻는다.
왜냐니, 뭐가? 나 뭐? 내가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자 아드리안이 갑자기 허공을 움켜쥐었다. 정확히는 내 팔꿈치 옆.
엥, 뭐지. 모기라도 잡아 주는 건가? 울면서도 모기 안 물리게 잡아 주는 도련님, 착한 도련님.
“왜…… 안 떨어지는 거지?”
모기가 아니었나? 폈다가 다시 움켜쥐는 손을 보고 조금 머쓱해져서 그를 바라봤다. 도대체 혼자 뭘 보고 있는 건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희게 질려 있다.
귀신…… 진짜 귀신은 아니겠지? 덜컥 겁이 났다.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신전 안에서 대학살이 펼쳐졌고 영혼 하나쯤은 따라 올라왔을 것 같기도 하다. 거기다 이 게임 장르가 공포잖아? 귀신을 양념처럼 뿌려 놨을 수도 있지.
“제 옆에 뭔가…… 있나요? 귀신이라도 있는 거예요?”
용기를 그러모아 물었으나 아드리안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계속 뭔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휘젓기만 했다.
세상에, 귀신이 들러붙은 게 맞나 보다. 하지만 침착하자. 내 옆엔 악마가 있잖아? 아무리 대단한 원혼이라도 사탄을 이길 수는 없겠지. 아드리안이라면 날 귀신들린 채로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도무지…….”
헉, 퇴마 의식이 잘 안 통하는 걸까. 희게 질려 있던 낯이 더욱더 창백해지며 초조함이 더해졌다. 평소에 늘 여유 넘치던 모습을 생각하면 무척 불길한 징조였다.
몇 번이나 허공을 휘젓던 손이 돌연 툭 떨어졌을 땐 나도 창백해졌다. 설마 악마가 귀신한테 진 거야? 퇴마 의식 실패?
실이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늘어져, 눈만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눈물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완전히 고장 나 버린 기계처럼.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은데요.”
이젠 악령이고 뭐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조심스레 그의 팔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범죄 현장 바로 앞인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잘못해서 경관들이라도 몰려오면 릴리트의 저주 때문에 아드리안이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저기, 우리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
“아드리안, 아드리안! 내 말 듣고 있어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우리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거든요. 시간도 많이 늦었고 갈 길이 머니까 얼른 일어나요.”
“……힐다, 가지 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몸을 일으키며 채근하자 갑자기 아드리안이 소매를 붙잡았다. 그늘이 져서 반쯤 어둠으로 덮인 얼굴. 기묘할 만큼 이중적이었다.
“가지 마.”
소매를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조금 당황해서 할 말을 잠깐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드리안. 지금 우리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가지 마. 가면 안 돼.”
“저택으로 가야 해요. 이러다가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요.”
아버지 일이 충격적이었나.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드리안은 여전히 소매를 찌부러뜨릴 듯 꽉 쥔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이 바뀌었다. 저택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단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새카만 어둠에 휩싸인 팔츠그라프 저택을 돌아보았다.
“어…… 방금 그거, 도련님이 한 거죠?”
“…….”
아까는 그냥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려 보냈을 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마차로 와도 한참 걸리는 거리를 이렇게 단번에 이동시켰다고?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 에밀리만 숙소에 잠깐 데려다주고 올게요. 가뜩이나 험한 꼴 당했는데 계속 바닥에 둘 순 없어서요.”
“…….”
“저기, 에밀리를 데려다주려면 손을 놔야 하는데요.”
못 들었나. 말로 해도 꿈쩍하지 않기에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는데 허공에 우뚝 멈춰선 파르르 떨렸다. 본래 붙어 있던 것을 일부러 찢어 내기라도 한 듯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더는 땅에서 뒹굴게 할 순 없었기에 애써 외면한 채 에밀리를 업고 숙소로 향했다.
침대에 눕혀주고 나올 때까지, 아드리안은 빗속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인들의 숙소 앞에서 도련님이 기다리고 있는 광경은 언제 봐도 어색했다.
“괜찮아요? 아까부터 왜 그렇게 멍하게 있어요.”
“…….”
“혹시 백작님한테 다른 소리 들은 거예요? 아까는 울면서 나오고 지금은 말도 없이 지쳐 있으니까…… 걱정되잖아요.”
“…….”
“휴, 됐으니까 방으로 돌아가요. 데려다드릴게요.”
몸이 안 좋아 보이진 않는데. 신전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영 이상했다. 술 마시고 강화 질러서 20강 장비 세트 날려 버린 부랑자 같은 얼굴이잖아.
“아드리안.”
홀로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것 같은 손을 꼭 잡아 주자 그제야 눈에 희미한 초점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 백작과 무슨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아드리안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이 아저씨.
“저택 참 조용하다, 그죠? 귀성일이라더니 다들 일찍 갔나 봐요. 엄청 어둡고 조용하고. 저택에 저희 둘만 있는 것 같아요.”
“…….”
“으아아, 무서워. 방금 늑대 울음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어째 아까 거기보다 저택이 더 무서운 것 같아요.”
학살의 현장에 있다 와서 그런지 늘 오던 직장인데 이 침묵과 어둠이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 어두운 홀을 지나는 동안 들리는 게 우리 둘의 발소리뿐이라 더 그랬다. 아드리안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바람이 창틀을 퉁퉁 쳐 댔고 간간이 부엉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너무 무서워서 괜히 그에게 헛소리로라도 말을 붙여 봤지만, 어째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벽보고 얘기해도 이거보단 덜 무안하겠다 싶었는데 방에 오자 더 조용해졌다. 진짜 이상하네.
“옷 갈아입는 거 도와드려요?”
“…….”
“으음, 싫으면 침대 시트 갈아 놓고 전 나갈게요.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피곤할 텐데 자꾸 말 걸게 되는 것 같아서요.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마저 얘기해요.”
내가 너무 조잘대서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다. 그래도 기본적인 정리는 다 하고 떠나려 했는데 일을 시키지도 않네. 으음, 촛대에 불붙이고 침대 시트 갈고 얼른 떠나야겠다. 그렇게 결론짓고 침대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드리안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팔을 붙들었다.
“뭐 시킬 일이라도…….”
“힐다, 가지 마.”
쉬어 버린 듯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단지 느리게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추는 건데도 묘한 긴장감에 압도당했다. 내내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던 짐승이 서서히 움직이려는 느낌이었다.
“힐다, 가지 마.”
목소리가 더 낮고 분명해졌다. 가지 말라니?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고운 선으로 조각된 듯한 얼굴 위에 촛불이 일렁이며 날카로운 어둠을 만들어 냈다. 내가 입술을 달싹이자 손을 붙드는 힘이 더 단단해졌다. 쇠사슬을 두 겹, 세 겹으로 감아 놓은 듯한 무게였다.
“가지 말라니, 어디를요? 숙소라면 가긴 가야 하는데, 따로 시키실 일이 더 있는 거예요?”
“힐다, 가지 마.”
시킬 일이 없다는 건지, 있다는 건지.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늘이 져서 반쯤 어두워진 눈이 부드럽고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나는 애써 차분하게 되물었다.
“왜요, 왜 그러시는데요.”
“힐다, 가지 마.”
“어휴,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하지 말고요. 제가 안 가면 도련님은 언제 자게요? 오늘 일도 많았고 좀 쉬어야 할 텐데.”
“힐다, 가지 마.”
“에이이, 알겠어요. 제가 오늘 인심 한번 크게 쓸게요. 저택에 마침 사람도 없으니 오늘은 옆방에서 자 드릴게요. 하지만 귀성일이 지나고 나서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련님 옆방을 쓰는 건 상징적으로…… 그, 좀 그렇거든요. 물론! 도련님이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래서…… 가겠다는 말이야? 내 옆을 떠나겠다고?”
“예? 물론 이 방에서 나가는 거니까 물리적으로 가긴 가는 거죠. 하지만 옆방이면 겨우 벽 하나잖아요. 시킬 일 있으면 1분 만에 부를 수도 있을 걸요? 근데 자고 있으면 웬만하면 깨우지 말아 주세요. 저도 오늘 좀 피곤하거든요.”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요? 사람 민망하게.”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맞지? 제발 맞다고 해 줘.”
급하게 매달리는 묻는 말에 나는 얼굴이 붉히다 말고 멈칫했다. 어째 아까부터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나는, 나는…… 너를 보낼 수가 없어.”
팔을 쥐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내려와 손을 덮었다. 보기도 좋고 만지기도 좋은 손가락이 손등을 길게 가로지르며 붙잡았다. 원래 보기 좋은 것이 맛보기도 좋은 법이지.
“하지만 아드리안, 지금 시간이 많이 늦었고 여기 계속 있기는 여러모로 무리거든요. 까딱 잘못하면 졸아 버릴 수도 있는데, 저 베개를 베고 잘 순 없고…….”
“……미안해, 힐다. 미안해.”
「저택 외 모든 맵이 닫혔습니다.」
뜬금없이 왜 사과를 하는 건지 의아했는데 갑자기 두둥하는 거창한 효과음과 함께 흰 글씨가 떠올랐다. 지금 타이밍에 뜰 만한 알림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알림을 읽었다가, 신나게 나불대던 입이 절로 닫혔다.
저택 외 모든 맵이…… 뭐?
“나는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어.”
「저택 내 모든 맵이 닫혔습니다.」
연극이 시작되기라도 한 듯 세상의 불빛이 일시에 꺼지며 어두워졌다. 단 하나, 아드리안의 방만 제외하고.
“나 아파, 힐다.”
얼어 있는 내 손을 붙잡고 아드리안이 절박하게 속삭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한 건 난데, 길 잃은 미아처럼 구는 건 도리어 그였다. 엄동설한에 있다 온 양, 손이 차갑게 식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파, 힘들어. 나 외로워. 아파 죽을 것 같아.”
「아드리안이 호감도를 레벨 4로 올렸습니다.」
「스킬 개방 능력이 빼앗겼습니다.」
「더 이상 스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너무 아파서 어쩌면 혼자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런데도 날 두고 갈 거야?”
「아드리안이 호감도를 레벨 5로 올렸습니다.」
「호감 작업 권한이 빼앗겼습니다.」
「더 이상 호감 작업이 불가능합니다.」
“그건 너도 원하지 않겠지? 내가 좋다고 했잖아. 사랑한다고 했잖아. 응? 그러니 곁에 있어 줘. 네가 없으면 난 정말 죽을지도 몰라.”
「아드리안이 호감도를 레벨 6으로 올렸습니다.」
「부탁 권한이 빼앗겼습니다.」
「더 이상 부탁이 불가능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여서 시선을 맞춰 보려 애썼지만, 정작 나는 입을 벌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이게…… 뭐야. 두둥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아드리안 호감도 알림창이 연속으로 뜨더니 위쪽에 있던 스킬, 호감도, 부탁 아이콘 위에 줄이 쭉 그였다.
이게 뭐야, 이게 뭔데. 무슨 상황인 건데. 당황해서 굳은 머리를 애써 끼릭끼릭 돌려 보았다.
아까 분명 아드리안이 호감도 레벨을 올렸다고 떴었지. 이제까지 내가 봐온 호감 작업 알림 문구는 ‘누군가의 호감도가 레벨 몇으로 올랐다’였는데 왜 이번엔 주어가 아드리안이지? 아드리안이 호감도를 자발적으로 올려서 시스템에서 권한을 빼앗아 갔다고도 하고.
연필과 온갖 아부 발언으로 레벨 2로 올렸던 때와 달리 레벨 3은 나도 모르는 사이 올라 있었지. 그것도 아드리안이 나 모르게 올린 거였어? 얜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가? 어떻게?
나는 이제껏 호감 레벨을 올리면 말 그대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돼서 생존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해 왔다. 호감(好感)이라는 뜻 그대로.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드리안에 한해 호감 레벨이 오를 때마다 시스템 제어 능력이 하나씩 주어지고 있었던 거다. 호감도 레벨 2와 3은 맵 개방 및 폐쇄, 레벨 4는 스킬, 레벨 5는 호감 작업, 레벨 6은 부탁에 대한 권한을 받게 되는 거지.
그럼 레벨 7은? 8은? 아드리안이 시스템을 장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띵해졌다.
이걸 만약 호감 레벨 2, 3단계에서 알았다면 진작 호감 작업을 멈췄을 거다. 하지만 이젠 다 튼 거다. 어떤 수를 쓴 건지, 아드리안은 직접 자신의 호감도를 조작할 수 있으니까.
앞뒤 상황을 끼워 맞춰 추리하고도 경악스러운 상황이었다. 말도 안 돼.
차갑게 식은 손을 억지로 놓고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평소라면 푸른 정원의 풍경과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 보였겠지만, 지금은 막이라도 씌워진 것처럼 그저 시커멨다. 심지어 내 힘으로는 창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나는 이제 저택 밖으로도 나갈 수 없고 호감 대상은커녕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게 된 거다. 내 세상은 햇빛도 바람도 없는 아드리안의 방으로만 제한되었으며 보이는 건 오로지 아드리안뿐이었다.
“밤은 길어, 힐다.”
“…….”
“너는 나 때문에 추위를 타게 됐잖아. 악몽을 꾸며 힘들어하잖아.”
「WARNING! 외부 간섭이 감지되었습니다.」
「FATAL ERROR- FailedOperationException : 작업이 중단되었습니다.」
「FATAL ERROR- FailedRecovery : 복구할 수 없습니다.」
「FATAL ERROR- FailedThreadRestart : 스레드를 재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 악몽을 꾸지 않게 해 줄게.”
「WARNING!」
「WARNING!」
「WARNING!」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시스템을 복구할 수 없습니다.」
“네가 없는 밤이 너무 길어. 오늘은 도저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
“그러니 네가 와 줘. 내가 당기면 분명 아플 테니까.”
시스템을 환하게 밝히고 있던 불빛이 정전된 것처럼 깜빡거리다 이내 완전히 죽어 버렸다. 글자가 지지직거리며 흐려졌다 또렷해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나는 굳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드리안 발밑에서 길게 길게 뻗어 나간 검은 그림자가 벽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내 시야를 모두 덮으며 새까맣게 점령당했다.
와, 이거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응? 힐다.”
아드리안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최대한 인간답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를 향해 뻗은 손에 문득 눈길이 갔다. 잘 정리된 소매 아래 드러난 손목. 붉은 자상이 전보다 훨씬 선명해져 있었다. 이제 힘 대부분이 돌아왔다는 뜻이겠지. 그만큼 사람 하나 멋대로 휘두르는 거야 쉬워졌을 테고. 마음만 먹었으면 팔다리 다 부러뜨려서라도 옆에 둘 수 있었을 테고. 아직 믿기진 않지만, 게임 시스템 침입도 가능한 것 같으니까.
반 시체 모드로 다 죽어 가던 악마를 살려 놨더니 이젠 해킹도 하네. 어이가 없다.
“이게 대체…….”
왜 멋대로 사람을 고립시키냐고 화를 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성수를 뒤집어쓴 채 살의를 92%로 불태우다가 나인 걸 알고 0%로 내려갔던 그 순간, 오늘치 두려움까지 싹 다 날아갔었으니까.
거절 비슷한 말이라도 하면 죽어 버릴 것 같은 저 표정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질식해 가는 낯빛, 운 흔적이 남은 붉은 눈가,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이 안쓰럽기 짝이 없어서.
정작 무서워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황당했다.
“제발, 힐다…….”
처연하리만치 그가 애원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자기 옆에 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게 낫지.
그러니까 왜인지는 몰라도 아드리안은 내가 떠날까 봐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고, 가지 말라는 주어 없는 말만 되뇌다가 세상으로부터 날 차단했다는 거네. 정리해보니 더 황당한 한편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아닌 선택을 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믿지 않는 걸까?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줘.”
어떻게 하면 날 믿어 줄까? 오늘 곁에 있어 주면 괜찮아질까?
창문을 등지고 그를 향해 한 발짝 뗀 순간, 푸른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동공이 안정을 찾아갔다.
“조금만 더…….”
“…….”
“조금만 더.”
거대한 동굴에 들어서는 느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조마조마하게 애를 태우다가, 손끝에 닿자 순식간에 손목을 붙들었다.
더운 열기가 밀려오며 고조되는 흥분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내가 괜히 투덜거렸다.
“오늘이 추워서 그런 거예요. 따뜻하게 해 준다고 해서.”
아드리안 말대로, 밤은 기니까.
“악몽 꾸게 하기만 해 봐요.”
그렇게 안 해. 그가 조급하게 속삭이며 허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그대로 침대로 끌려갔다.
올리비아는 요즘 소소한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팔츠그라프 본가의 하인들은 그녀의 좌천을 두고 2주일은 족히 안줏거리 삼았을 테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물론 명망 높은 대저택에 사용인으로 고용되는 건 대단한 영광이고 그만한 봉급과 복지를 챙겨 주긴 하지만, 신분이 낮은 그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암암리에 파벌 싸움이 생기는 게 사실이었다. 저택에 들어온 시기나 연배가 비슷한 하인들끼리 경쟁 구도가 가장 흔하게 형성됐는데, 보통 집사, 하인 관리인, 작업실별 수석 하인이 정해질 때까지 피 터지는 정쟁이 벌어졌다.
올리비아는 어렸을 적 하인 직업학교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고 팔츠그라프 가에 온 만큼, 백작 부인을 바로 곁에서 모시는 수석 하인이 되었다.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면서 상전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처세술을 타고나, 같은 해 들어온 동기가 많았는데도 일찍이 집사 눈에 들었다.
나름대로 출세의 가도를 달려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 올리비아는 얼마 전 한 사건에 의해 크게 고꾸라졌다. 바로 아드리안 도련님의 생일 파티 사건.
표면적으로는 쓰러진 백작 부인을 곁에서 돌보라는 뜻이었지만, 강등당한 걸 알고 있었다.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백작 부인은 본가로 다시 돌아갈 일 없는 데다 곧 죽어도 이상치 않은 상태라, 실질적으론 해고된 거나 다름없었다.
“부인, 오늘은 신선한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부탁하신 양고기도 잊지 않았고요. 아! 루헤린 마을에 유명한 보석 장인이 만든 액세서리도 몇 개 가져와 봤는데 한번 구경해 보시겠어요?”
하지만 올리비아는 요즘 유독 마음이 편했다. 별장이 본가로부터 닷새는 꼬박 마차를 타고 와야 하는 만큼 시골의 시골에 박혀 있긴 하지만, 자연 속에서 한적하고 느긋한 생활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본가와 달리 인근 시설이 다양하지 않은 별장에서는 이따금 방문하는 보부상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아주 먼 지역까지 돌아다니는 덕에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좀 보시죠. 자아, 여기, 여기. 마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걸 특별히 좀 챙겨 왔는데 말입죠. 장식용 총…… 그리고 이거. 사파이어가 눈알만 한 반지. 그리고 브로치입니다. 마님께 보여 드리면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대단한 귀족 마님이 별장에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접했는지 보부상은 이따금 제 상상 속 마님이 좋아할 만한 상품들을 내밀었다. 장사 수완은 있는 편인지 개중에는 백작 부인의 눈에 들만한 물건이 분명 섞여 있었으나 올리비아는 단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다. 정신도 못 차리시는데 이런 걸 들이밀어 봐야…….
“이 목걸이는 꽤 괜찮아 보이는군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째서인지 프리실라에게 어울릴 만한 액세서리를 눈으로 훑으며 찾게 되었다. 자수정 보석이 꽃 모양으로 커팅된 화이트골드 목걸이. 영롱한 보랏빛이 본가에서 지낼 때 화병에 자주 꽂혀 있던 제비꽃을 닮았다.
“오!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보통 물건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건데 그게…….”
“안 파는 물건인가요?”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이건…… 그렇지, 제 성의로 마님께 잘 전해 주십시오. 앞으로 많이 애용해 주시면 그만한 영광은 없을 겁니다.”
“돈을 안 받고 주신단 말씀인가요?”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성의입니다, 성의.”
보부상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가져왔는지 실컷 뻐기려다가, 올리비아가 고지식하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목걸이가 싼값은 아니나 대저택의 마님을 단골로 모셨을 때 얻을 이익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철저한 셈을 하고 내민 것인데 올리비아의 반응이 시큰둥해 보였다. 대저택의 분들은 이 정도 거래는 크게 쳐주지 않는 건가?
“오늘도 감사합니다. 고기와 우유는 저쪽에 두고 가시죠. 전부 합해서 얼마 드리면 되나요?”
“헤헤, 헤. 3,040골드만 주시죠. 이게, 그, 저, 시장에 나가서 직접 사는 거랑 거의 차이가 없거든요. 저택에서 이렇게 편하게 받는데도 1할 넘게 차이가 안 난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수준이죠. 그만큼 제가 또 이 미천한 몸으로 귀하신 댁에 물건을 떼다 파는 영광을 잘 알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인, 모쪼록 마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 해 주셨으면…….”
“그러겠습니다. 잔돈은 여비로 챙겨 두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작 60골드 더 얹어 3,100골드 줬을 뿐인데 보부상은 허리가 부서지도록 굽실거렸다. 애초에 제시한 금액부터 2~3백 골드 정도 붙여서 불렀다는 건 알았지만, 보부상이 주는 이점을 참작하여 애교로 넘겨주었다.
오후 2시. 본가에서 프리실라는 보통 이 시간에 애프터눈 티를 즐기곤 했다. 여기 와서는 일정이랄 게 없었지만, 올리비아는 포기하지 않고 본가에서 하던 대로 모든 걸 챙겼다. 입에 대지 않는 차는 물론, 펼치지도 않는 책을 갖다 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꽃으로 장식했다.
언젠가 프리실라가 기적적으로 생의 의지를 다지고 일어났을 때,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올리비아는 프리실라가 가장 즐겨 마셨던 루이보스 티와 다과를 챙겨서 방으로 올라갔다.
“마님, 애프터눈 티를 챙겨 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똑똑.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매일같이 노크하고 허락의 말을 기다리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속으로 일정 시간을 세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님은 언제나처럼 죽은 듯 누워서 맞이했다.
오늘도 못 일어나신 모양이구나.
올리비아는 조금 침통해졌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마련된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오후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꾸며 놨지만, 정작 주인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차려놓은 그대로 치울 걸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그녀가 좋아하던 꽃까지 장식해서 자리를 완성했다. 그러고는 프리실라가 보통 티타임을 끝내는 시간까지 옆에 있었듯, 똑같은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별장에 온 후 프리실라는 내내 저 꼴이었다. 매일 주치의가 들러 영양수액을 몇 개나 달아놓고 갔지만, 자기 입으로는 물 한 모금 마시질 않으니 날로 앙상해졌다. 본래 살집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젠 거의 뼈밖에 남지 않아, 정신을 차리더라도 두 발로 설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었다.
주치의는 날이 갈수록 한숨이 짙어졌다. 배를 찌른 상처는 천만다행으로 아물었으나 애초에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스스로 살 의지가 없으니 치료는커녕, 자다가 죽지 않도록 숨을 붙여 놓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그조차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 같다며 한숨을 푹푹 쉬며 떠났던 게 오늘 아침.
올리비아는 프리실라가 기적적으로 눈을 떴던 얼마 전 아침을 떠올렸다.
“세상에, 마님. 깨셨어요? 깨어나신 거여요?”
“올리비아…….”
“네, 마님. 네! 제가 여기 있어요. 맙소사, 어서 주치의를 불러올게요!”
“올리비아, 나 왜 살아 있니?”
“…….”
“나 언제 죽니? 언제 죽을 수 있니.”
“마님…….”
“나는 왜 죽지도 못하고…….”
온 기력이 다한, 죽어 가는 얼굴로 그녀가 끊어질 듯 말 듯 속삭였다. 그러고는 올리비아가 말 건넬 새도 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별장에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리실라가 정신을 차렸던 순간이었다.
그 시간이 찰나와 같아, 도련님의 전속 하인인 힐다라는 아이가 부탁했던 편지는 건네 드리지 못했다. 설령 정신을 차리더라도 보여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프리실라는 지금 머리 위에 먼지라도 떨어지면 폭삭 무너질 것 같으니까.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내용인진 모르겠지만, 혹여나 프리실라의 정신에 조금이라도 충격이 주진 않을지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나쁜 의도가 없어 보이긴 했지.
올리비아는 떠나는 길에 부산스럽게 뛰어와 편지를 받아달라고 발을 동동거리던 하인을 떠올렸다. 꼭 마님께 전해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기에 얼마나 대단한 편지인지 내심 긴장했는데 의외로 짧고 별 내용 없어서 놀랍기까지 했다. 마님만 알아볼 수 있도록 적어 놓은 걸까.
그렇게 애타게 편지를 전하려 한 걸 보면 어쩌면 답장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어.
오늘의 티타임은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정리한 그녀는 다음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시간을 내어 편지를 썼다.
〈힐다에게.
마님께서 별장에 내려오신 후에 더 악화되어 아직 편지를 전해 드리지 못했단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잠깐이지만 정신을 차리셨어. 다음 기회가 있거든 반드시 전해 드리마.
올리비아.〉
정갈한 글씨체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봉투에 넣었다. 이 편지는 다음에 본가에서 일꾼이 오면 전해질 거다. 마님의 답장인 줄 알았다가 실망할 수 있겠지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거보단 낫겠지.
“너는 이 새끼야, 오늘부로 해고야!”
촤라락. 마르크 경정이 해리슨 앞에 수많은 서류 종이를 흩뿌렸다. 얼마 전 근신명령이 풀리기 전부터 맡겨 놨던 악마 숭배집단에 대한 조사 보고서였다. 말로는 보고서인데 실제론 헛소리만 줄줄 늘어놓은 빈 깡통이었다. 이딴 걸 들이밀고도 해리슨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태연했다. 저 새끼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맡긴 지 한 달이 훌쩍 넘어도 조사가 어떻게 진행됐다고 말 한마디 없어서 중간보고라도 올리라고 했는데 알아낸 게 거의 없다시피 하잖아! 아니면 알아내고도 보고하지 않는 건가?”
어느 쪽이든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전에 조사차 나갔을 때 해리슨이 일반인을 공격한 일이 불거져 입장이 곤란해진 차에 근무 태도까지 이러니.
내가 이 새끼를 계속 밑에 두고 있을 필요가 있나 싶어 내질렀는데, 어쩐 일인지 해리슨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무릎 꿇고 용서라도 빌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려 했는데 당사자가 꿈쩍도 안 하니 오히려 민망해진 격이다.
“경정님, 경정님! 진정하시죠. 네?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도리어 여기 왜 있는지 모를 제프리가 붙자고 늘어졌다.
“진정은 뭔 놈의 진정이야! 너 이 새끼야, 나 놀려? 이게 조사했다고, 보고서라고 가져온 거야? 다 집어치워, 이 새끼…… 너는 태도부터가 글러 먹었어. 그동안 네가 친 사고 뒷수습한 게 몇 개인 줄이나 알아! 너는, 시발, 앞으로 참고인 조사 같은 거 나다니지 마! 조사할 일이 있더라도 연락담당관을 통해서만 해!”
“그동안 경정님께서 뒷돈 받아 해먹은 건수는 몇 개고요?”
“뭐야?”
“얼마 전에 제가 목 졸랐던 참고인 말씀하시는 거면 그 새끼가 진짜 범인이 맞습니다.”
마르크와 제프리의 시선이 동시에 해리슨을 향했다. 하나같이 기가 막혀서 질린 시선이었다.
“딱 보면 모릅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한 겁니까? 알리바이가 없고 미리 준비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용의자를 지목한 데다 시종일관 눈을 가만히 두지 못했는데요?”
“저기, 경감님. 그것만으로 범인이라 하기에는 좀…….”
제프리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마르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개 같은 소리 그만 안 해! 말 몇 마디 나눠 본 거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다고 잡아들이고 사형하면, 어? 다 죽이자는 얘기밖에 더 돼!”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다 죽여 버리는 거.”
“뭐? 이거 완전 별 미친 새끼가…….”
“그러면 적어도 범죄는 안 일어날 거 아닙니까. 죽일 사람도 죽는 사람도 없으니 눈물 흘리는 유가족도 없겠죠.”
기가 막힌 나머지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분노도 덩달아 팍 식었다.
문득 해리슨이 처음 경관이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연쇄 살인마에게 여동생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던가. 숨어 있는 모든 범죄자를 찾아내 체포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눈을 매섭게 빛냈더랬지. 자기가 경관이 된 이상 누구도 피해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손으로 잡힐 듯 선명했다.
한 해에 신입 경관만 수백 명이 들어왔지만, 해리슨은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인재였다. 경관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범인들을 검거해 오는데, 사생활을 모두 반납하고 일에만 몰두하니 따를 자가 없었다. 선배 경관들은 잘난 후배 때문에 경정님 볼 낯이 없어졌다며 볼멘소리를 해 댔지만, 곧 해리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범죄자를 향한 분노와 경멸이 비정상적일 정도이니, 그만큼 미치지 않고서야 그와 견줄 엄두를 못 내게 된 것이다.
결국, 경관들 사이에서는 ‘해리슨은 완전히 다른 인종이나 다름없으니 우리와 비교 선상에 두지 말자’라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좀 넘었을까. 해리슨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채 경시청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경감님! 대체 어째서입니까? 왜 저자가 풀려나서 멀쩡히 경시청을 나가고 있는 겁니까?”
“……해리슨 경사, 이리 와서 앉아 보게.”
하지만 해리슨이 꿈꾸던, 모든 범죄자는 온당한 심판을 받는 세상은 현실에 없었다. 아무리 시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한다고 해도 이 나라는 어쩔 수 없는 왕정 체제였으며 최고성과 절대성을 갖는 주권은 오로지 왕에게 있었다. 왕에게서 뻗어 나간 가지, 귀족들에게도 그 절대성이 일부 계승되어 경관들이 감히 손댈 엄두를 못 내곤 했다.
혹시 귀족에게서 혐의점을 잡았더라도 까딱하다간 경찰 문제 왕립조사단에 의해 경시청 전체가 뒤집힐 수 있었으므로. 그 점을 뻔히 아는 범죄자들은 최대한 많은 귀족에게 돈을 대어 뒷배를 만들었다. 결국, 잡아넣을 수 있는 건 돈 없고 힘없는 시민들뿐이었다.
“이런 식은 아닙니다. 이건 제가 바라던 게 아니라고요. 이런 식으로 굴복하는 건…… 정의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해리슨은 이런 현실적인 한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범죄자든 잡아 처넣고 처벌할 수 있으려면 왕정이 먼저 무너져야 한다는 설명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범죄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바엔 차라리 왕정이 무너지는 게 낫지 않냐는, 시대를 앞서간 발언을 했다가 사방에서 꿀밤을 맞았다.
경사였을 때야 그나마 희망을 품고 버티는 듯했지만, 직위가 올라가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그가 넘을 수 없는 벽을 깨달아갔다. 깨닫기에도 수많은 제물이 필요했다. 잡아 둔 범죄자들이 온갖 이유로 풀려나고 피해자들이 늘어날 때마다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 갔다. 용의자 입에서 진술이 흘러나올 때까지 고문 가하는 걸 서슴지 않았으며 의심할 만한 정황 하나만 있어도 감옥에 처넣지 못해 안달 내곤 했다.
그런 그가 날이 갈수록 검거율이 낮아지고 근래 들어서는 실적이 전혀 없게 되었다. 마르크는 해리슨의 분노와 투지가 나이가 들면서 사그라진 거라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야 활기와 의욕이 넘칠 수 있지만, 사람은 으레 나이 들면서 세상에 타협하곤 하니까.
하지만 오늘 보니 자신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둔하게 다듬어지기는커녕 더 날카로워졌다. 형형한 눈빛은 거의 사람 하나 잡아 죽일 기세다. 마르크는 젊은 날 그의 투지가 다른 방향으로 발산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이 친구 이렇게 뒀다간 큰일 나겠군.
“……경찰 신분증 내려놓고 가도록 해, 해리슨.”
“경정님!”
“자네는 휴식이 필요해. 당분간 머리 좀 식히며 시골에 좀 내려가 있게.”
옆에서 제프리가 경악했지만, 마르크의 의지는 굳건했다.
해리슨이 유능한 건 안다. 지금이라도 범죄자를 잡아 오라고 하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용의자 두셋 정도는 끌고 오겠지.
하지만 저 눈, 예감이 좋지 않다. 정의감에 넘치는 건 이 세상에서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니까. 이 이상 가면 분명 위험해질 거다.
이건 해리슨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천성이 나쁜 친구는 아니니 범죄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그런 다음 다시 경시청으로 부를 생각이다. 일찌감치 휴식을 줬어야 했던 것을, 그간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죠. 저도 이런 소꿉장난은 그만두겠습니다.”
지금이라도 해리슨이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하면 다시 생각해 보려 했건만, 그의 반응은 오히려 담담했다.
“경감님!”
“잘 지내십쇼. 이럴 땐 그동안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의례상으로라도 못하겠으니 이해 좀 해 주시고요.”
닳고 닳은 경찰 신분증을 허공에 던져 버리고 해리슨이 경시청을 박차고 나왔다. 제프리는 마르크와 해리슨, 둘 중 누구를 먼저 말려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해리슨을 쫓아갔다.
불그스름한 노을빛에 묻힌 채 해리슨은 경시청을 등진 채 멀어지고 있었다. 애초에 제가 속할 곳이 아니었던 양.
제프리는 그 외로운 뒷모습을 향해 소리 질렀다.
“경감님! 진짜 이대로 가 버리실 겁니까, 예?”
절박한 목소리가 너른 골목을 왕왕 울렸다. 해리슨의 걸음이 미세하지만 잠깐 멈칫했다.
“제가…… 경감님 때문에 경관이 되길 선택하게 된 거 아시잖아요! 경감님처럼 되고 싶었다고요! 여기까지 겨우 따라왔는데 혼자 가 버리시는 겁니까? 예?”
“…….”
“경감님께서 뭐에 그리 화가 나셨는지 압니다! 하지만 경감님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많잖습니까! 경감님이 그렇게 열심히 범죄자를 잡아넣은 덕에 웃고,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런데도 혼자 가실 거냐고요!”
“다 옛일이야.”
“…….”
“제프리, 자넨 나처럼 되지 말게.”
쇠를 긁어내듯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해리슨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저런 끝을 보기 위해 따라온 게 아니었는데. 희미하게 멀어지는 우상의 뒷모습이 점차 흐려졌다.
제프리는 끝내 엉엉 울고 말았다.
해리슨은 경시청이 있는 루크벨 마을 옆,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인적 드문 마을에 살았다.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루 동안 백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 그 마을 안에서도 사람이 가장 살 것 같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해 홀로 살았다.
제프리는 그의 거처에 대해 말할 때마다 왜 그런 구석진 곳에 궁상맞게 혼자 살고 있느냐, 루크벨 마을로 이사 와라, 마침 자기가 사는 건물에 공실이 났으니 관리자에게 잘 말해 보겠다고 권했으나 해리슨은 끝내 이곳을 고집했다.
누구도 들여다볼 일 없는 어두컴컴한 석실.
그곳이야말로 범죄자를 끌고 와 처벌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니까.
끼이익. 녹슨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대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어이쿠, 이런. 자리가 모자라서 밀려났던 모양이다. 넘어져 있는 창대를 도로 세워서 그 끝에 잘린 손목을 꽂아 넣었다. 해리슨이 음침하게 웃었다.
“던컨, 너는 최소 4개월은 더 걸려 있어야 해.”
핏기 하나 없는 손바닥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DUNKAN, 강간 및 상해, 473.1.12’
생전의 이름, 죄목, 살해한 날짜.
던컨의 손을 끼운 창대를 적당히 세워 두고 해리슨은 방 안을 점검하듯 쭉 둘러봤다. 그의 방은 그야말로 사형대이자 수많은 범죄자의 사형장이었다. 던컨의 것 말고도 방 안엔 수많은 손목이 잘려서 창대에 걸려 있었고, 손바닥에는 각자의 이름과 죄목, 살해한 날짜가 들쑥날쑥 적혀 있었다.
사형 집행인은 오로지 하나. 해리슨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었더라,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 희미해진 기억을 훑어보았다. 맨 처음은 뒷돈을 주고 풀려나는 길에 해리슨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던 범죄자였다.
“이것 봐. 해리슨이라고 했나? 아직 포기 못 한 눈인데, 날 아무리 잡아넣어 봐야 안 될걸? 어차피 경관들이야 귀족의 허수아비일 뿐인 걸 잘 아는데.”
“…….”
“하하. 이제 나는 그 개년을 처리하러 갈 건데 너흰 아무것도 못 하겠지? 다시 잡아넣더라도 나오면 그만이니까, 다음은 네놈의 목을 잘라 줄게.”
개년……. 그는 경관 앞에서 자기를 감옥에 넣으려고 한 피해자를 손봐주러 갈 거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해리슨 내부에서 뭔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벽돌을 들고 있었으며, 앞에는 머리를 맞고 죽은 범죄자가 있었다. 바닥을 짙게 적셔가는 핏물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너무 쉽게 죽여 버렸다.
마음 같아선 마을 입구에 그의 시신을 걸어 본보기를 보이고 싶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었으므로 손목만 잘라서 창대에 걸어 놨다. 보는 눈은 저 하나지만, 이 볼품없는 효수(梟首)가 오히려 범죄자에게 어울리는 끝인 것 같다.
금제의 선을 넘었다는 죄의식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가 죽인다고 했던 이웃집 여자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딱히 잘못했다고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올바른 길 같다.
이건 실수가 아니다. 신이 내리신 기회야. 죽어도 싼 죄를 짓고도 정당한 벌을 받지 않았으니 죽인 것뿐이다.
“이게 정의야.”
그는 그렇게 범죄자 살해를 시작했다. 표적을 고르는 일은 경관인 그에게 몹시 간단했다.
범죄자를 죽이고 거둬들인 손목이 많아질수록 처음에 허접스럽게 세워 뒀던 나무 막대기 대신 창대를 사용했고, 누구의 것이었는지 금세 잊어버려 손바닥에 이름과 죄목, 살해 일자를 써두기 시작했다. 죄질이 나쁠수록 창대에 걸려 있는 시간이 길어져야 하므로 필수적인 조건들이었다.
수많은 손목이 효수되었다가 각자의 기간이 지나면 불태워졌다. 땅에 묻히는 안식 따위 범죄자에게 주어져서는 안 되는 사치였으므로. 항간엔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또 다른 범죄자가 나타났다며 불안하게 수군거렸지만, 작지만 안도하는 목소리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이 옳았다. 극단이 존재하면 반대쪽에도 똑같은 극단이 생겨야 균형이 맞춰지는 법.
이게 맞는 세상이다. 이게 정의지. 이게 옳은 길이다.
봐라, 쓰레기를 치우니 세상은 조금 더 깨끗해졌잖아. 사람은 고쳐 쓰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들이 죽어야만 선량한 시민이 웃고, 범죄자가 죽어야 비로소 유가족들도 제 삶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해리슨의 낙원은 그렇게 점점 견고해져 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모든 정의가 그를 향해 흘러들어 왔다.
그럴수록 낙원 밖에 있는 인간들이 점점 더 불합리하고 부도덕해 보였다. 처음에는 분명 범죄자만 골라 죽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용의자를 보면 죄다 범인인 것 같았다. 참고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범인이 경관들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 같았고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만 봐도 언젠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 죽여야 한다. 그래야 깨끗한 세상이 될 테니까.
“경감님, 얘기 들으셨습니까? 범죄자만 골라 죽이는 살인마가 이 근방에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답니다. 손목만 골라 잘라 간다고…… 그걸 잘라다가 어디다 쓰려는 걸까요? 역시 저희를 조롱하기 위해서겠죠? 미친놈.”
“왜? 그자가 있어서 우리 일이 덜어진 셈인데. 좋아해야 하지 않나?”
“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감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그놈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입니다. 대상이 누가 됐든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놈은 일부 시민을 선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악랄한 겁니다. 까딱하다간 누구나 자기 정의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게 정당화되는 혼란이 생겨 버린단 말입니다.”
“…….”
“그놈은 자기만의 정의를 세우고 영웅 놀이에 심취한 것뿐입니다. 어떤 정당성도 이유도 인정해 줘선 안 돼요. 언젠가 그놈을 잡으면 얼굴에 대고 똑같이 말해 줄 겁니다. 너는 영웅도 구원자도 아닌 한낱 살인마라고.”
하지만 세상은 그의 숭고한 뜻을 도통 이해해 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해리슨을 믿고 따르는 제프리조차 그를 손가락질했다. 넓은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것처럼 외로운 한편, 자기 뜻을 알아주지 않고 방해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워졌다.
제프리, 자네가 몰라서 그래. 이 세상은 썩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자네도 범인을 잡다 보면 참을 수 없는 회의감과 절망에 휩싸이게 되겠지. 그땐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네. 영웅 놀이에 심취한 게 아니야. 이렇게라도 해야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비록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지만, 기다리다 보면 그의 뜻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생길 거다. 어쩌면 함께 하는 동료가 생길지도 모르지.
해리슨은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이미 너무 멀리 와서 돌아갈 수 없는 기나긴 길. 처음엔 새하얗던 길은 점점 붉게 물들어 피로 된 강이 흘렀다. 그의 발은 피 웅덩이에 깊게 담겨 빼낼 도리가 없다. 피로 가득한 진흙탕 길이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그 모든 걸음마다 정의가 함께하고 있다는 거다.
내가 맞아. 내가 옳다. 이게 정의니까.
해리슨은 몸을 돌렸다. 기수를 잃어버린 경주마처럼 끝을 향해 달려갔다. 후회는 없었다.
그날 경시청에 다시 돌아간 건 지극한 우연이었다. 범죄자 사냥이나 나갈까 하다가 문득 사냥에 쓰던 칼을 경시청에 두고 온 게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아무도 없을 테니 칼뿐만 아니라 쓸 만한 총 몇 개쯤 빼낼 수 있을 거다. 독한 담배 연기를 흘리며 이른 새벽에 경시청으로 돌아갔다.
누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경시청 앞엔 웬 여자가 서성이고 있었는데, 꽤 험하게 당한 몰골이기에 말을 걸어 봤더니 경관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데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오늘 잘리긴 했지만, 어제까지는 분명 경감이었으므로.
이름은 델로레스, 팔츠그라프 가의 하인이라고 밝힌 그녀의 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팔츠그라프 가문에 악마 숭배자가 있었으며 그녀를 기절시켜 산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거다. 그리고 아까는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 루크벨 마을의 신전으로 가겠다는 말을 언뜻 들었다는 거다.
팔츠그라프 가문!
눈이 번쩍 뜨였다. 경시청에서는 쉬쉬했지만, 해리슨은 쭉 팔츠그라프 가문이 악마 숭배와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고 의심해 왔다. 이상할 정도로 증거나 증인이 없어 골머리를 썩였는데 이게 이렇게 풀리는군.
해리슨은 델로레스에게 이에 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입단속 시키고 경시청에 들어갔다. 총과 소형 폭탄 다수를 간단히 빼돌린 그는 곧장 신전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 신전은 고요하고 성스러웠다. 악마 숭배자들의 본거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만약을 대비해 신전 주변에 폭탄부터 깔아두고 있었는데, 재수 없게 문지기놈 눈에 띄고 말았다. 폭탄을 숨기는 데에 급급해서 그만 총을 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