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그래서 에밀리를 어디로 보냈다고?”
“…….”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이미 몇 번이나 도망치려다 잡혔잖아? 너 자꾸 그렇게 나오면 네 친구처럼 만들어 주는 수가 있어.”
포기하라는 뜻으로 나는 카일의 무릎을 발끝으로 찼다. 맨바닥에 꿇어 앉혀 벌 세운 지 십 분도 안 지났는데 도망치려다 잡힌 것만 벌써 세 번째다. 두 팔을 든 채 눈을 굴려 대는 낌새가 심상찮아 보여서 찔러본 건데 정곡이었나보다. 로건은 아까 맞았던 게 치명타였는지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은데 막상 손댔다간 힘 조절 못 할까 봐 꾹 참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에밀리 어디다 숨겼어?”
“……이미 늦었어.”
“뭐라고? 좀 더 크게 말해 봐. 그렇게 웅얼거리면 하나도 안 들리잖아.”
“이미 늦어 버렸다고. 구하려거든 더 빨리 움직였어야지.”
“납치범이 어디서 훈계질인지 모르겠다, 그치?”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카일은 곧장 시선을 떨어뜨리며 두 팔을 빳빳이 치켜들었다. 저러면 안 때릴 거로 생각하나 보다.
“……에밀리는 이미 제물로 넘겼어. 곧 있을 의식에 수많은 제물 중 하나로 쓰이게 되겠지.”
이 새끼는 납치범인 주제에 더 빨리 왔어야 한다느니 입만 살아서 나불댄다. 그 뒤로도 몇 마디 더하기에 머리를 딱 때려 줬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이제부터 네가 하는 대답에 따라 네 목숨도 왔다 갔다 하게 될 거야. 그러니 대답이 더 신중해야겠지?”
그 즉시 카일이 입을 다문 건 잘한 짓이었다. 나는 진심이었으니까.
“에밀리, 죽였어?”
“아니! 절대 아냐! 나는 직접 죽이는 짓은 안 해! 그저 제물로 쓸 만한 걸 찾아다가 바칠 뿐이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야?”
“그래! 내가 넘길 때까지만 해도 정신만 잃었을 뿐 멀쩡히 살아 있었고…… 의식이 시작하기 전에 죽이진 않을 거야. 산 채로 바칠 제물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그 의식이라는 건 언젠데.”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오늘 저녁이라고 들었는데.”
목숨이 달려 있다는 협박 때문인지 카일은 꼬박꼬박 성실히 대답했다. 굽혔던 허리를 도로 세우며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겁에 질린 기색을 겨우 숨긴 채 흘끔흘끔 눈치 보는 걸 보니 거짓말할 배짱은 없어 보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마을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이 새벽 한 시쯤이니 아직 여유는 있었다.
“에밀리를 넘긴 곳은?”
“교구 건물 뒤편, 제물을 따로 가둬 두는 장소가 있어. 의식이 실제로 이뤄지는 곳과는 짧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지. 커다란 문이 있어. 제물이 산 채로 들어서고 죽어서 실려 나가는 문이지. 에밀리는 그 문을 통해 들어갔으니 나올 때는…….”
“지키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데?”
그것만큼은 말할 수 없다는 듯 카일이 입을 다물었다. 아까 맞은 게 약발이 다 된 모양이지. 몇 대 더 후려갈겨 줬더니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다.
“주기적으로 돌아보고 문을 지키는 사람 전부 합해서 열댓 명 정도.”
“교대도 하겠지?”
“저녁 6시. 전체 인원의 절반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야.”
“좋아. 그럼 이제 날 거기로 안내해.”
“뭐?”
“못 들었어? 얼른 일어나.”
원래 납치범들을 그림자 은신으로 쫓아가서 에밀리를 슬쩍 빼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작전변경이다.
“진짜야? 거기에 가겠다고? 네 발로 직접?”
“로건은 내버려 두고 가도 되겠지? 기절해선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잖아.”
카일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납치범 주제에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는 게 짜증 나서 발로 툭툭 찼더니, 위로 솟아 있던 두 팔이 흐물흐물 내려왔다. 그가 엉거주춤 일어나는 사이 나는 스킬창에서 ‘발자국 추적’을 찾아 ‘사용’ 버튼을 눌렀다.
‘발자국 추적’은 대상의 이동 경로를 발자국으로 보여 주는 스킬. 골목 끝에서부터 지금 카일이 서 있는 발밑까지 은은한 발자국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최대 12시간 전의 이동 경로까지 보여 준다고 하니 에밀리를 넘긴 교구 앞에도 발자국이 남아 있겠지. 카일이 제대로 안내하는지 확실히 확인해 볼 수 있을 거다. 납치범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무려 악마 숭배자들의 소굴로 들어가는 길이니 보험 하나 정도는 들어놔야 했다. 이런 상황에 부를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지. ‘부관 호출’을 쓰는 건 오랜만이네.
“언니! 절 부르셨나요!”
“로지. 빨리 와 줘서 고마워.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부관 호출을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날 찾아온 건, 바로 로지였다. 마을이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잖아. 카지미어는 그 소악마와 절대 다시는 상종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댔지만, 그거야 자기처럼 사이 안 좋을 때 얘기고. 아군이 되면 이만큼 든든한 사람 찾기도 드물다.
거기다 봐.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총총총 뛰어오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귀엽다고 폭 안아 줬을 거다.
“네, 언니. 저 사람을 죽이면 될까요?”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나를 피해서 로지의 고개가 스르르 기울어졌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카일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악마 숭배자도 진짜 악마를 만나면 무섭긴 한가 보다.
“아냐, 로지. 오늘 부탁할 건 다른 거야.”
“하지만 영혼이 무척 더러운걸요. 고문관들은 저런 영혼을 가장 아꼈어요. 고문하는 맛이 있거든요. 저게 지옥으로 가기 전 제가 먼저 맛보고 싶은데…….”
로지가 진심으로 입맛을 다시며 손끝을 움찔거렸다. 별사탕 눈이 휘어지면 험악해 보일 수 있다는 건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맛보는 건 다음에. 오늘은 내 부탁 좀 들어줄래? 딸기 주스 사 줄게.”
“네, 언니 요청이라면 뭐든요!”
로지는 예상대로 흔쾌히 수락했으나, 별사탕 눈은 여전히 희번덕거리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떻게든 다시 찾아내 맛볼 기센데. 그럼 카일의 처분은 로지에게 맡기도록 할까?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테니까.
“로지, 미안하지만 언니가 가 봐야 할 곳이 있는데. 상황에 따라 조금 위험해질지도 모르겠거든. 근처에 있다가 부르면 바로 와 줄 수 있을까?”
“그럼요! 전 지금 같이 가도 좋아요.”
“아쉽게도 그럴 순 없어. 제물로 잡혀 들어가는 척 잠입해야 하는데 하필 어린애들을 더 귀한 제물로 여긴다고 해서. 에밀리를 찾기 전 로지 네가 먼저 위험해질지도 모르고…… 그건 나도 원치 않아.”
“알겠어요. 언니 지시를 어길 순 없죠.”
“매번 어려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로지.”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약속했던 딸기 주스를 입에 물려주었다. 내가 부를 때까지 쉬고 있으라고 여관에 방을 잡아 주었는데, 좁은 어깨에 둘러메진 장총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긴지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다. 저게 몇 시간 전 총기 난사를 통해 얻은 신상 총기인 모양이지? 저 정도로 멋진 장총이면 총기 난사해서라도 가지고 싶을 만하네!
“…….”
로지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나오자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카일이 스르르 나왔다. 들썩거리는 입술을 보니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하지만 에밀리를 납치한 범죄자와 평화로운 잡담을 나눌 생각은 없었으므로 가던 길을 턱짓했다.
“마저 안내해.”
“안내하면 날 놔준다고 약속해 줘. 로건도.”
납치 운반 전문이라 그런지 행동 하나하나에 조건을 건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손봐주고 싶었지만, 에밀리부터 찾아야 하니까 봐주는 거다. 어차피 로지가 알아서 손 봐줄 테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은 크게 안도하며 다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밤공기, 구름에 흐려진 달, 풀벌레 우는 소리.
얼마 전 아드리안과 평화롭게 보냈던 날 밤과 같은 풍경인데 에밀리는 악마 숭배자들에게 잡혀 목숨이 위험한 처지라니.
“그런데 카일 너, 왜 하필 에밀리를 고른 거야? 저택에서 실종 사건이 일어나면 사용인들 전체가 의심받을 텐데.”
“딱히 그 여자앨 노렸다기보다 필요했을 때 마침 눈에 띄었을 뿐이야. 하인 주제에 남 의심할 줄은 몰라서 꼬셔 내기도 쉬웠지. 공은 좀 들여야 했지만…… 으, 으윽, 제발 때리지만 말아 줘.”
나도 모르게 손을 올리자 카일이 두 팔로 머리를 가리며 움츠러들었다. 간도 콩알만 해 보이는데 어떻게 납치범 짓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그, 그리고 너도 잘 알잖아. 아무리 경관들이라도 함부로 팔츠그라프 가를 넘보는 게 쉽지 않다는 거. 백작님께서 바라시지 않는 한 수사도 진행되지 않겠지.”
“왜 그렇게까지 사람을 납치하는 건데? 팔츠그라프 가가 봉급을 그렇게 짜게 주지도 않잖아? 누군가한테 털리지만 않으면.”
“돈 때문이 아니야. 구원받기 위해서지.”
악마 숭배자들의 소굴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며 카일이 대답했다.
“지옥에 떨어질 중죄를 지어도 제물을 바치면 구원받을 수 있다잖아. 지옥에 떨어져도 바로 사탄께서 구원해 준다잖아. 남의 목숨으로 벌을 면할 기회를 누가 마다하겠어?”
대체 왜 악마나 사탄이 사람을 구원해 주리라 생각하는 걸까. 정작 아드리안은 나랑 놀 생각밖에 없는데. 카지미어는 에이브릴과 고아원, 로지는 총기. 지옥으로 장소를 바꾼다고 그들의 관심사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커다란 식물원이라도 만들어 주면 또 모르겠지만.
“그래서 너는 무슨 대단한 중죄를 지었는데?”
“뭐, 대단한 건 아니야. 어렸을 때 아버지를 죽였지.”
“…….”
“어머니를 하도 개 패듯 패기에 칼로 찔러 버렸는데 그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지. 난 아마 죽어서 지옥에 가겠지? 영혼이 불탈 때까지 고문당할 테고. 어머니께서 독실한 교인이셨기에 잘 알고 있어. 신들의 가르침이 전부 그러하다는걸.”
“…….”
“하지만 어쩌면 이 짓을 계속하면……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바친 제물로 악마 하나쯤은 기쁘게 할 수는 있을 테니까. 날 구원해 주겠지.”
환상을 헤매는 듯 목소리도 표정도 몽롱해졌다. 그러니까 친부 살인이라는 중죄를 씻기 위해 납치 및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계속 저질러 왔다는 말이군. 정상인이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란 걸 잘 알 텐데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 말해도 통할 것 같지 않다.
아마 악마 숭배자 대부분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지 않을까.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서라면 남의 목숨 정도는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고.
“저기야. 들어가거든 내 원망이나 하지 마.”
“…….”
카일이 턱짓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겨 봤더니 어둠에 묻힌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아우로라 신전에 비해선 작고 아담하여 웅장한 맛은 없지만, 신을 숭배하는 장소 특유의 성스러움과 오랜 세월이 충분히 느껴지는 곳이었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얼마 전 신문에서 끊임없는 자선과 봉사로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며 대서특필됐던 바로 그 신전이었다.
진짜 저기에 악마 숭배자들이 숨어 있다니.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몇 대 더 갈겨보려고 했으나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발자국이 빼도 박도 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가장 깨끗한 물만 골라서 옮겨 다녀. 깨끗할수록 썩기 쉽고 더러워진 것들을 가리기에 편하거든. 덕분에 경관들이 죄다 나서도 우릴 찾아내지 못하고 있지. 운 좋게 단서라도 잡으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후일걸.”
이제까지 악마 숭배자들이 잡히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설령 알아내는 사람이 있었대도 신전을 건드리기는 쉽지 않았겠지. 신전 내부에서 양심적으로 밝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신성 모독죄로 잘려 나가지 않을까. 아무래도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야, 어서 묶어서 날 저리로 들여보내 줘.”
“이거만 하면 날 보내 준다는 거지?”
미리 준비해 놨던 밧줄을 손목에 둘러주며 카일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금은 보내 주지만, 나중에 사신이 찾아갈 거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무척 기뻐하며 손목을 마저 묶어 주었다. 겉으론 단단히 결박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자재로 손을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도록. 납치범 경력이 1, 2년이 아닌 만큼 묶는 것도 수준급이다.
그나저나 낮에 듣기로 경관들이 악마 숭배 집단에 대해 알아낸 게 전혀 없다고 했는데. 나는 몇 시간도 안 돼서 찾아낸 거로 봐서 의외로 소질 있을지도 모르겠다. 경찰로 전직 해 봐? 요지경인 세상이지만, 공무원이라는 점에서 딱히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카일 덕분에 나는 제물들을 가둬 놓는 감옥에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었다. 믿을 만한 운반책이라 그런지 이름이나 신분 확인도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어둡고 컴컴한 통로를 지나 내려가니 습기로 가득한 지하실이 나왔다. 돌계단 서너 개 내려갔을 뿐인데도 오래 고여서 썩은 듯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자 보이지 않는 장막을 넘은 듯, 차가운 새벽 공기가 지하실 속 매캐한 공기로 훅 바뀌었다.
「악마 숭배자의 본거지 던전 2구역에 진입하셨습니다.」
「던전 내에서는 치료 및 장비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악마 숭배자의 본거지 던전 2구역. 여기가 제물 대기실이라고 했으니 실제로 의식이 치러지는 1구역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제물 수용소라곤 하지만, 실상은 지하실에 커다란 철장 몇 개 갖다 놓은 게 전부였다. 서커스에서 대형 동물들을 가둬 둘 때 쓰는 케이지와 흡사해, 사람용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변변한 화장실이라곤 없는지 썩은 변과 오물, 구토물이 곳곳에 넘쳐 나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돌벽을 으스스하게 울린다.
엉거주춤 겁먹어서 굳은 척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있자 간수가 성큼성큼 다가와 팔뚝을 붙잡았다.
“저기요. 죄송한데 어디 들어갈지 제가 고르면 안 될까요?”
“…….”
나는 발이 삐끗한 척 비틀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에덴(악)이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역시 악명의 힘. 간수는 내 요청에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더 센 힘으로 팔을 움켜쥐고 당겼다. 친근감과 호감보다 간수로서의 사명이 앞선 모양이다. 아쉬운 일이군.
운이 없게도 나는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철창에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철창을 고르는 척 돌아다니면서 에밀리를 찾아볼까 했는데 실패해 버렸다. 아쉬운 대로 내가 있는 철창부터 쭉 둘러보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제물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몰골로 쪼그리고 앉거나 널브러져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에밀리……. 여기 있는 거지?
내 눈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애타게 찾아 헤맸으나 어째서인지 에밀리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목을 쭉 빼거나 다양한 각도로 틀어서 멀리 있는 철창까지 살폈는데도 없다. 제물들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고 있는데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고. 일단 아침까지 기다려 보자.
나는 무릎을 모아 쪼그리고 앉아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밤을 꼬박 새운 데다 육탄전까지 벌여서 피곤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두려움에 떨고 있을 에밀리를 생각하자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거기다 이 철창, 바닥까지 창살로 되어 있어 앉아 있기 몹시 불편했다. 별도로 화장실에 보내 주는 일이 없이, 변을 봐도 바닥으로 떨어지게끔 한 모양인데…… 으, 비위 상해서 다들 어떻게 자는 건지 모르겠다.
“먹어라.”
아침이 되자 간수가 철창문을 열고 널빤지 같은 무언가를 몇 개 던져 줬다. 다른 제물들이 눈을 번쩍 뜨고 달려들어 아귀처럼 입에 밀어 넣지 않았다면 저게 음식인지도 몰랐을 거다.
나도 먹긴 해야겠지. 에밀리를 구하려면 힘을 내야 하니까. 하나 남은 널빤지 조각을 주워서 조금씩 뜯어 먹는데, 딱딱하게 굳은 빵의 질감에 여물 같은 이상한 맛이었다. 식사라도 제대로 하고 올걸. 아드리안의 진수성찬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꼴에 음식이라고 다 먹고 났더니 꼬르륵거리는 소리는 멎었다.
그래도 식사 시간 덕분에 철창 내 사람들이 전부 깨어났다. 에밀리에 대해 아는 게 없는지 물어봐야겠다.
“저, 제 또래 여자애 하나 못 보셨나요? 어젯밤에 여기 왔을 텐데 하얀 프릴이 달린 남색 원피스를 입었거든요. 이름은 에밀리예요.”
“…….”
“혹시 못 보셨나요? 붉은 갈색 머리를 길게 땋고 있거든요. 암녹색 눈동자에 예쁘장하게 생긴 앤데.”
“…….”
손짓 발짓까지 해 가며 에밀리를 묘사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 뿐 시선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말을 못 하나? 아니면 내 악명 때문에 다들 겁먹은 걸 수도 있다. 일제히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날 보고 있었다.
“그 아이라면 내가 봤어. 좋은 제물로 쓰이겠다고 신성한 곳으로 먼저 옮겨졌지.”
며칠 굶은 듯 볼이 푹 파인 여자였다. 거슬거슬하게 일어난 입술엔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좋은…… 제물요?”
“제물로서 충분한 자질이 있기 때문이겠지. 대단한 영광인 걸 알아야 해.”
제물로서 자질이라니. 에밀리가 착하고 예쁘긴 하지만, 이런 분야에서마저 발군일 필요는 없는데. 처음엔 하인 두 명만 족치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점점 난도가 높아지니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 구역에만 있었어도 간수 두세 명만 악명으로 어떻게 구슬려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텐데.
“우린 곧 구원받겠지.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너희 모두 몸가짐을 바로 하고 기도나 올리고 있으렴. 우리는 살아서 가장 아름다운 채로 사탄께 바쳐질 테니까.”
“우리들의 피를 술로서 바치고 살갗을 옷으로 바쳐라. 그리하면 사탄께 구원받을 것이니.”
내가 물을 때는 입술 한번 들썩이지 않던 제물들이 기도문을 합창했다. 놀라운 건 여기서 기도문을 읊자 다른 철창에서도 돌림노래처럼 똑같이 제창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 텐데 이렇게 고분고분한 걸 보면 다들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워…… 말로만 듣던 광신도들을 직접 보다니.
“너도 여기 있는 걸 영광으로 여기렴. 살아 있는 우리의 피만이 죽은 제물들을 구원할 수 있으니까. 우리의 피가 그들을 적시면 그들 또한 살아 있는 제물로 바쳐지는 거란다.”
뭐라는 거야…… 눈이 완전 맛이 가 있다. 와, 진짜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우리들의 영혼이 떠나면 이 죄 많은 육신은 홀로 남아. 살가죽을 벗기고 기워서 사탄께 승리의 망토로 바치게 된단다. 망토를 걸쳐 입은 사탄께선 힘을 모아 지옥의 용암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 주실 거야.”
멀쩡한 살에 도대체 왜 그런 험한 짓을…… 피부가 그런 데 쓰라고 있는 부위냐, 미친놈들아. 내가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그들은 차례로 ‘라우다테 사탄’이라고 제창해 댔다. 혼이 나간 목소리가 겹치고 겹쳐서 성가처럼 울려 퍼졌다.
“놔, 이거 안 놔!”
「적대 대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소름이 오돌토돌 돋은 팔을 벅벅 긁고 있을 때였다. 사자의 포효를 닮은 고함이 노랫소리를 찢어 내고 지하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신성한 기도실에서 이 무슨 행패냐며 언짢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그조차 묻혔다.
덩치 큰 한 남자가 몸싸움을 벌이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쇠사슬로 칭칭 묶여 결박된 모습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저 남자가 어떻게 여기 왔지?
“제기랄, 놔! 안 놔? 손가락을 다 찢어 버리겠어!”
험악한 욕설을 씹어뱉으며 들이받는 바람에 양팔을 잡고 있던 간수들이 나동그라졌다. 중심을 잃고 비틀대는 그에게 간수 서넛이 더 달라붙어 힘 싸움을 했다. 한참 그렇게 난동 부리던 그는 결국 간수 다섯 명에게 질질 끌려와 철창 안에 나동그라졌다. 하필이면 내가 있는 철창으로.
“하, 제기랄, 빌어먹을.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광신도 새끼들.”
“……부축해 드릴까요? 경감님.”
상체가 결박되어 바닥에 버둥거리는 해리슨을 향해 내가 한숨 쉬며 물었다.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그가 움직임을 뚝 멈추더니 고개를 젖혔다. 핏발 서서 벌게진 눈은 어느 쪽이 악마 숭배자인지 모를 정도로 광기에 젖어 있었다.
“이야, 반가운 얼굴을 여기서 다 보는군.”
“저는 별로 반갑지 않은데요. 경감님이 왜 여기 계세요?”
“그야…… 보면 모르겠나? 어서 날 일으켜.”
“예. 경감님은 뵐 때마다 친절하고 신사적이셔서 참 기분이 좋아요.”
“어서 일으키래도!”
빈정거리든 말든 해리슨은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반말은 나이 차이가 있으니 그렇다 쳐도 매번 고함 지르고 무례하게 구는 건 너무하잖아. 민중의 지팡이고 뭐고 확 부러뜨려버릴까 보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리를 길게 뻗어 그의 등 뒤를 받쳤다. 그대로 몸을 지탱하여 일으켜줄 생각이었는데 해리슨이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한바탕 험한 욕지거리를 쏟아 냈다. 챙강!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를 빼내자 반쯤 올라왔던 몸이 도로 바닥을 뒹굴며 철창을 흔들었다.
“빌어먹을, 죽고 싶어?”
그가 시뻘게진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팔이 자유로웠으면 목을 졸랐을 기세였으나 나는 시큰둥하게 다리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다리에 힘이 없는 것도 죽어야 하는 사유인지는 몰랐네요. 여기서 나가면 절 체포하실 건가요?”
“그거야 나가서 볼일이고! 그만 닥치고 일어나는 걸 돕지 못해!”
“송구하게도 경감님, 아까부터 틈만 나면 욕설하시고 소리 지르니까 귀가 먹먹해서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네요.”
“후우, 그래. 욕…… 안 하고 소리 안 지를 테니까 어서 일으켜. 언제까지 이 더러운 바닥에 날 처박아둘 셈이야? 으, 바닥이 오물투성이잖아.”
“참 나, 경감님이 굴러들어와 놓고 왜 저한테 신경질이에요? 그러게 간수한테 곱게 좀 하지 그랬어요. 괜히 큰 소리 내서 굳이 여러 대 처맞고, 더럽게 뒹굴기나 하고.”
“그럼 경감씩이나 돼놓고 광신도한테 굽신대라고?”
“뭐, 들어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민중의 지팡이가 광신도한테 굽신대고 있으면 믿음이 안 갈 테니까. 내가 다시 다리로 등을 받쳐주자 이번엔 비교적 수월하게 몸을 일으켰다. 사막처럼 건조한 시선이 날 위아래로 훑었다.
“그런데 넌 왜 여기 잡혀 있지? 백작과 한패가 아니었나?”
“뭘 물으세요. 경감님과 같은 이유로 끌려왔겠죠.”
“너 같은 하인에다가 누굴 갖다 대는 거야? 나는 신고자의 제보를 받고 엄연히 수사하러 왔다고, 수사. 그러고 보니 신고자도 팔츠그라프 가의 하인이었는데, 네가 보낸 거냐?”
“델로레스를 만나셨나 보네요. 제가 보낸 건 맞는데 경감님 혼자 오시길 원한 건 아니었거든요. 저, 다른 경관들도 마저 오는 거죠? 설마하니 광신도 집단 수사하겠다면서 혼자 오셨을 리는 없잖아요?”
“……그 설마가 맞아.”
“네?”
“그 설마가 맞다고. 신고자는 내게만 진술했고 나 말고 더 들은 사람도 없어. 그러니 더 올 사람도 없는 거지.”
“……왜요? 왜 혼자 오셨어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요? 경감님 혼자 저 사람들 전부랑 싸우시게요?”
황당한 나머지, 안 들리게 소곤거리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혼자 쳐들어온 거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야 에밀리 하나 빼돌리러 온 데 반해 해리슨은 이 집단 전체를 수사하기 위해 온 거잖아. 공권력을 휘두를 만한 충분한 증거와 증인이 마련된 상황에서 아무 준비 없이 맨몸으로 뛰어든 거다. 놀랍고 무식하게도. 기가 차서 입을 못 다물고 있자 해리슨이 무안한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총을 뺏긴 건 실수였어. 뺏기지만 않았어도 다 죽일 수 있었는데.”
“체포가 아니라…… 죽이러 오셨다고요?”
“어린애들을 납치해다가 배를 찢어 죽이고 그 가죽을 바치는 놈들이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법의 심판을 받을 필요도 없지. 저놈들은 죽어야 마땅해. 어차피 잡아서 처넣어 봐야 제대로 된 벌도 안 받는다.”
“아니, 근데 죽이러 왔다가 지금 잡히셨잖아요.”
“그래. 죽여야 해. 사람은 고쳐지는 법이 없고 아무리 잡아넣어도 죽일 놈들은 계속 생기니까. 이 연쇄 고리를 끊어 내려면 누구든 해야 하는 일이야. 이게 정의니까. 정의는…… 내게 있으니까.”
처음엔 나에게 하던 말이 점점 혼잣말로 흩어지더니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졌다. 와씨, 범죄자 잡으러 왔다가 잡혔으면서 지금 정의가 문제냐.
이제까지는 참 정의감 넘치는 형사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지금까지 상황을 놓고 보니 도무지 경찰 같지 않았다. 법의 집행을 위해 범죄자를 잡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죽이러 온다고? 요새 실적 0건이라더니 실은 이런 식으로 다 죽이고 다닌 거 아냐?
“이봐, 하인. 그래서 너는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인데, 말해 봐.”
엉덩이를 질질 끌어서 내 옆에 온 해리슨이 속닥거렸다. 왜 갑자기 친한 척이지, 불길하게. 가까이 온 만큼 뒤로 빠지며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안달 나서 세차게 속삭였다.
“꿍꿍이가 있으니 지금 그렇게 태평한 얼굴일 거 아냐? 그걸 내게도 알려 달라고. 설마 너 혼자 살아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글쎄요. 꿍꿍이가 없을 수도 있죠. 경감님도 혼자 무작정 오셨는데 고작 하인한테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젠장, 그러지 말고 말해 봐. 어서.”
같은 적을 두고 있으니 지금은 동지로 봐야 할까. 내가 잠깐 고민하고 있자 그가 한쪽 입술을 비뚤게 올렸다.
“오호,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 좋아. 입 열 때까지 추궁해 주지. 범인에게 자백받아 내려고 내가 최장 몇 시간까지 버텼는지 몸소 보여 줄 때가 왔군.”
“……그런 거 굳이 안 보고 싶고요. 저도 별 뾰족한 수는 없어요. 이것밖엔.”
다른 제물이나 간수들의 시선이 잠시 떠난 틈을 타, 빠르게 손을 보여 주고 다시 등 뒤로 숨겼다. 느슨하게 묶인 매듭에 손목을 끼워 놓고 다시 한번 더. 해리슨은 잠깐 놀란 듯 보다가 ‘호오, 손목이 자유롭단 말이지.’라고 입 모양으로만 벙긋거리며 자기 어깨를 턱짓했다. 자기도 풀어달라는 뜻이었다.
“안 돼요. 그건 간수가 직접 채워 둔 거잖아요. 열쇠가 없으면 못 열어요.”
“제기랄.”
“저녁 6시에 교대한대요. 무슨 뜻인지 알죠?”
간수들이 교대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거나 어수선해지면 틈을 파고들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제물들이 대체로 고분고분해서 그런지 손이 자유로우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을 만큼 허술했고. 에밀리까지 챙겨야 하는 나와 달리 해리슨은 탈출하기 훨씬 수월할 거다. 먼저 빠져나가서 경관들을 데리고 돌아오면 큰 도움이 될 테고.
“호오.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군. ‘고작 하인’인데 말이지.”
“쓸데없이 엮지 마시고요. 전 구해야 할 친구가 있어서 들어온 것뿐이에요. 아쉽게도 다른 구역에 있는 것 같지만요.”
“구역이라니. 오호, 마침 저기 통로가 보이는데. 저걸 통하면 다른 구역으로 갈 수 있나 보지?”
해리슨이 입구 반대쪽에 있는 통로를 눈짓했다. 나도 오자마자 발견하고 쭉 관찰해 왔는데, 희미한 빛이 통로를 잠깐씩 비추거나 말소리가 들리는 거로 봐서 아마 저쪽이 던전 1구역인 것 같았다.
“아마도요. 여긴 대기실로 쓰고 실제 의식은 저쪽에서 이뤄지지 않을까 싶어요.”
“하하, 웃기지도 않아. 이런 더러운 진창에 날 처박아놓고 광신도 놈들은 옆방에서 고고한 척 기도나 하고 있을 거라니.”
해리슨이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돌연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몸부림치다가 반대쪽 창살을 발로 쾅쾅 걷어찼다. 얼마나 힘이 센지 커다란 철창이 흔들거릴 정도였는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던 제물들도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곤 했다.
보아하니 범죄자들에 대한 분노가 남다르고 자기만의 정의감과 사명감이 강해 보이는데, 광신도를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잡혔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했을까 싶긴 하다. 웬만하면 아까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랐지만, 감정 추스르는 데만도 바빠 보이니 제외하는 게 낫겠다.
그러게 조력자 서너 명쯤은 데리고 왔어도 됐잖아.
“제기랄, 내가 왜 이런 곳에 온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진상 아저씨의 투덜거림은 내내 끊이질 않았다. 간수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통로 저편에서 소리가 울릴 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보를 수집하는데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지나가는 간수에게 괜히 시비 걸다가 시선이나 받게 하고, 이걸 먹으라고 준 거냐고 간수 발에다 침을 뱉기도 했다. 참다못한 간수가 케이지를 열자 그 틈을 타 머리로 들이받아 기절시키기까지 했다.
간수 서넛이 들러붙어 일방적으로 구타당했는데도 해리슨의 사나운 기세는 누그러들 줄을 몰랐다. 머리를 수차례 얻어맞아 선혈이 흐르고 입술까지 터졌는데도 발로 간수들을 걷어차 나뒹굴게 했다.
“살면서 이런 미친놈은 처음 보는군.”
“퉷.”
그러다 직접 침을 뱉기까지 했다. 침을 맞은 사내는 험상궂게 일그러졌지만,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등을 돌렸다.
철창에 도로 들어온 해리슨은 굴하지 않고 간수들을 향해 험한 욕설을 쏟아 냈다. 하지만 이미 그에게 질려 버린 간수들은 흘끔거리며 돌아볼 뿐, 누구도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다들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얽히면 골치 아픈 새끼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그도 기력이 다했는지 주저앉아 버렸는데 왠지 모르게 더 불안해졌다.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올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아서.
나는 엉덩이를 살짝 끌어 그로부터 최대한 멀어졌다. 이제부터라도 웬만하면 엮이면 안 된다는 불길한 예감에.
“아아, 이런 개 같은.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 이봐, 하인. 네 친구가 있다는 곳으로 데려가 주지.”
“네?”
“이것 봐! 이것 보라고, 미친놈들! 당장 교주를 내 눈앞에 가져다 놔! 아니면 나를 너희 교주에게 데려가든지!”
그리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터져 버렸다.
쾅쾅쾅쾅쾅!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철창을 마구 걷어차는 통에 제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두려움에 떨었다. 정작 그를 통제해야 할 간수들은 기에 눌린 채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해리슨은 급기야 머리를 철창에 박아 대며 자학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말을 무시해? 좋아, 이러고도! 내 말을! 무시할 수 있나 보자고!”
쾅! 쾅! 쾅! 인간 같지 않은 힘으로 박아 대니 이마에선 금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포악해진 곰처럼 날뛰어대는 그에게 감히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맙소사, 저 사람 갇혀 있다가 완전히 돌아 버렸나 봐.
“내가 비록 이렇게 꼴사납게 붙잡혀 있지만, 난 경감이다! 해리슨! 리지먼드! 경감! 너희 같은 악질 범죄자들을 수백 명이나 이 손으로 잡아 가뒀단 말이다! 너희 같은 악질을 잡으러 오면서 대비책 하나 마련해 두지 않고 왔을까? 응? 이러고도 무시해! 이러고도!”
미친놈을 이길 수 있는 건 똑같은 미친놈뿐이라고, 여기에 해리슨만큼 미친 사람은 없었는지 간수들도 팔꿈치로 서로를 찌르며 네가 가 보라고 미루고 있었다. 마지막에 차출된 간수가 마지못해 철창으로 다가왔다. 일곱 발짝은 족히 떨어진 채 그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너 같은 졸개한테 해 줄 말은 없다. 교주놈에게 나를 데려가. 그러지 않으면 경관들이 몰려와 교주고 뭐고 다 좆 될 테니까. 아니면 이 철창을 부숴 줄까? 내가 못 할 것 같아? 응?”
“…….”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한 보고야. 해리슨 리지먼드 경감이 교주, 혹은 수뇌부를 만나길 바란다고 전해. 거절하려거든 얼마든지 해 봐. 경관들이 신전을 뒤집어엎은 다음 후회할 건 너희들이니까.”
어둠 속에서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혼자 무작정 쳐들어온 실상을 알고 있는 나조차 한순간 허풍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흘끔 간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을까에 대해 의심이 들겠지만, 마냥 무시하기에는 그의 신분이 마음에 걸릴 것이다.
잠깐 고민하던 간수가 이윽고 등을 돌렸다.
“……잠시 기다리시오.”
뚜벅뚜벅 규칙적인 발소리가 차가운 돌바닥을 울렸다. 그가 향한 곳은 아까 해리슨과 내가 말한 통로. 1구역과 2구역은 역시 저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오시오. 그분께서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신다는군.”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온 간수가 철창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향해 기어가는 해리슨을 다소 염려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왔다면서 어쩌자고 저런 허풍을 친 건지. 어쨌든 이대로 간다니 다행이었다.
“이것 봐. 저 여자도 같이 데려가지. 내 동행이다.”
“너도 나와.”
간수가 문을 닫으려다 말고 내게 손짓했다.
이런, 다행인 게 아니었잖아?
“저요? 왜요? 전 저 사람이랑 모르는 사이예요. 생판 처음이에요.”
“끌려 나오기 전에 네 발로 나오는 게 좋을 거다.”
“간수님, 저 나가고 있어요. 거의 다 나갔어요. 네, 저 사람과 달리 전 얌전하거든요. 조용히 따라갈게요.”
머리채라도 휘어잡아 끌고 나올 준비를 하기에 나는 한껏 비굴하게 철창에서 기어 나갔다. 간수를 따라 통로로 걸어가면서 해리슨이 날 살짝 돌아보았다. ‘그러게 내가 1구역으로 데려다준댔지?’라는 눈빛으로 으스대는데, 마음 같아서는 달려들어서 수염을 다 뽑아 놓고 싶었다.
아아, 왠지 계획이 모조리 물거품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악마 숭배자의 본거지 던전 1구역에 진입하셨습니다.」
「던전 내에서는 치료 및 장비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간수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이윽고 던전 1구역이 나왔다. 2구역보다 크고 어두운 1구역은 벽면 곳곳에 달린 촛불로 겨우 내부가 밝혀지는 정도였다. 훨씬 차갑고 소름 끼치는 공기. 간수가 어깨를 내리누르는 대로 해리슨 옆에 꿇어앉으며 재빨리 둘러보았다.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건 피에 물든 제단이었다. 깨끗이 닦인 검은 대리석에 얼마나 많은 제물이 올라갔는지 불그스름한 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제단 양쪽으론 뭐에 쓰는지 모를 수많은 나무통이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고 넓은 홀은 신도들이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새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면을 따라 내걸린 사람 가죽. 이미 죽은 채 쌓여 있는 제물들. 어떤 용도로 쓰는지 뻔히 보이는 수술대……. 단지 시야에 담는 것만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날카롭게 코를 찔러와 헛구역질이 났다.
산처럼 쌓인 제물 밑에 철창이 있었다. 에밀리!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파리한 얼굴에 눈을 감고 있긴 하지만, 몸이 상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아직 호감 관계가 끊기지 않았으니 단지 정신을 잃은 것뿐일 거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큰 안도감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이곳에 오는 내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걱정이 훨씬 컸다. 이미 늦은 거면 어쩌지, 에밀리가 몹쓸 짓이라도 당하고 있으면 어쩌지…… 수많은 끔찍한 생각이 홍수처럼 범람해 감당 안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됐어. 이제 안전하게 탈출하는 일만 남았다.
“저기 네 친구가 있어? 혹시 벽에 걸린 저 가죽인가?”
빈정거리며 속삭이는 해리슨을 깔끔히 무시하고 이번엔 제단 쪽을 살폈다. 거대한 붉은 십자가 밑에 다윗의 별이 새겨진 왕좌가 있다. 왕좌를 호위하듯 몸으로 둘둘 감싸고 있는 검은 뱀. 왕좌에는 염소 머리에 검은 가죽 날개가 달린 악마 조각상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째 의자를 둘러싸고 쌓여 있는 수많은 해골이 심상찮다.
“저기요. 저 해골들 말인데요. 설마…….”
“나도 지금 막 본 참이야. 저 염소 대가리는 조각상이 확실한데 해골은 아니군. 인간의 실제 해골과 뼈야.”
“…….”
“족히 삼천 명분은 넘어 보이는데. 파악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잖아. 미친 광신도 놈들.”
옆에서 어금니를 까드득 갈아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말로 들을 땐 영화 줄거리 듣는 것 같더니, 막상 눈으로 보니까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존재하는지도 모를 악마에게 구원받겠답시고 사람을 저렇게 많이 죽이다니.
와, 이거 아드리안 도시락 구하러 나온 거였으면 잭팟이었는데. 신도들로 성공적인 제물 수급을 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너도 네 친구를 구한 다음에 빨리 벗어나는 게 좋겠군. 아까 거기 그대로 있었으면 꼼짝없이 저 중 하나가 될 뻔했어.”
“…….”
“그나저나 교주놈 얼굴 한번 보기 힘들군.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저 제단을 난장판으로 만들면 헐레벌떡 뛰어나올까?”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시면서 큰소리는 잘 치시네요. 그런데 경감님은 안 무서우세요? 전 너무 으스스한데…….”
“이런 것들이 무서우면 경감 노릇은 어찌하나? 바락바락 대들기에 대담한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순 겁쟁이였군.”
해리슨이 대놓고 조롱했으나 나는 움츠린 어깨를 펼 수가 없었다. 차라리 사람을 상대하는 게 낫지, 해골과 뼈, 사람 가죽으로 장식된 공간에 오르간 소리까지 섬뜩하게 울려 퍼지니 오금이 저렸다. 공포 영화에서 살인마나 귀신이 나타나기 바로 직전 쥐죽은 듯 조용해져서 긴장감만 흐르는 그때 같다. 으으, 차라리 교주랑 1:1 PVP 뜨게 해 주세요. 몸통 박치기 하고 튀어 버리게.
「적대 대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까마득한 시간을 공포 속에서 떨면서 보냈을까. 드디어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면서 잠잠하던 시스템이 적대 알림을 보내왔다.
뭐…… 적대 대상?
나는 잠깐 당황하고 말았다. 적대 대상과 처음 만날 때만 알림이 뜨는 걸 생각하면 해리슨 때문은 아닌데. 그럼 지금 내려오는 악마 숭배자 중에 적대 대상이 있단 말이야? 남은 건 고작 둘뿐인데 어느 쪽이라도 놀랍다.
“…….”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입구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응시했다. 총 여섯 명. 모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로브를 둘러쓰고 있다. 맑은 발소리가 지하실을 울리며 다가왔다.
그들이 나타나자 끊임없이 불만을 쏟아 내던 해리슨의 입도 멈추었다. 간수들이나 제물을 보고서도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조차 살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멀찍이서 걸음을 멈추었다. 불행히도 난 그가 누군지 알아 버리고 말았다. 남은 적대 대상 두 명 중 저렇게 큰 키를 가진 사람이라면.
백작…….
백작이 악마 숭배자였어.
“난동이 벌어졌다고 들어서 와 봤더니 의외로 다들 구면이군요.”
로브가 젖혀지고 백작의 얼굴이 드러났다. 빗어 넘긴 짧은 갈색 머리, 얇은 테의 외눈 안경, 주름이 깊게 파인 미간, 투박한 듯 강인하게 빛나는 눈. 백작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도 나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와, 이게 무슨. 백작이 진짜 악마 숭배자라고? 부인이 그렇게 독실한 신자인데?
“이럴 줄 알았지, 백작. 어쩐지 당신이 영 수상하더라니까. 당신이 후원하는 인간들만 유령처럼 사라지는데, 큭, 하하, 죄다 쉬쉬하는 바람에 제대로 파보질 못했거든. 뭔가 있으리라곤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종교 활동을 벌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백작 네놈이 교주냐?”
나는 놀라서 입도 못 다무는 사이 해리슨은 강에 빠져도 둥둥 떠 있을 주둥이로 열심히 나불거리고 있었다.
“교주라뇨. 저는 그저 미천한 신도일 뿐입니다. 위대한 분의 존재를 믿고 헌신적으로 따르는 신도.”
“말 같잖은 소리.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죽이면 악마가 더 기뻐하리라 믿는 게 개인의 신앙이라고?”
“허허, 본디 깊은 신앙심이란 건 범인(凡人)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니까요. 원하신다면 친히 악마의 왕께 인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생전에 정의로운 분이셨으니 사탄께서도 몹시 기꺼워하실 테지요.”
“미쳤군. 완전히 돌아 버렸어.”
해리슨의 말에 내가 동조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만큼은 격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매번 저택 주위를 알짱거리며 쓸데없이 트집 잡는다고 생각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하긴 백작은 평범한 NPC이라기에 수상한 점이 많았다. 해리슨이 나타날 때마다 방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라든지 백작 부인을 과할 만큼 핍박하거나 아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점. 호감 대상으로 추가하기 어려웠으면서 금세 적대 대상이 되어 버린 부분까지. 그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뒤통수가 다 얼얼해졌다.
“마침 잘된 일이지요. 저 하인이나 당신이나 무척 거슬리던 참이었으니. 틈만 나면 저택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었거든.”
“그래서? 우리도 제물로 바칠 셈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악마라는 놈을 위해서? 푸흡, 큭큭. 진짜 웃기는 일이야. 자선 사업으로 칭송받는 그 대단한 팔츠그라프 백작이 실은 악마 숭배자였고 피후원자들을 제물로 빼돌리고 있었다니.”
“말조심하시지요. 그분은 실존하십니다. 적당한 성소가 마련되지 않아 강림이 늦어지는 것뿐.”
온갖 모욕은 다 당한 것 같은데 분노를 느끼는 포인트가 뜻밖에도 악마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습군. 증거라도 있나? 그 악마 새끼가 진짜 존재한다는 증거 말이야.”
더 긁었다간 불같이 화낼 것 같은데 파멸의 조동아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버지 사탄께선 실제로 지상에 몇 번이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간증할 자도 넘쳐 나 확실한 증거도 있습니다.”
“증거…… 증거라.”
“……벽면에 내걸린 것들을 보시지요. 미천한 우리는 아직 믿음이 부족해 내용을 읽을 순 없지만, 그건 분명 우리에게 남기시고 간 가르침이자 예언입니다. 사탄께서 곧 강림하시리라는 묵시.”
해리슨이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거리자 과몰입 신도가 오기를 부렸다. 그러고 보니 벽면에 액자가 줄줄이 걸려 있긴 했는데 으레 종교적인 내용이겠거니 싶어 대충 넘겨 버렸다.
얼마나 대단한 계시인가 싶어 슬쩍 봤는데, 과연 이 세상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문자들이 낡은 양피지 위에 새겨져 있었다. 문자 하나하나에서 기이한 마력이 느껴져 누가 양피지를 보든 악마가 남겼다고 여길 만했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일부러 인간들에게 뭔갈 남길 것 같진 않은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빤히 보고 있자니, 고풍스러운 액자 위로 아이템 설명이 주르륵 떴다.
「메모지(소)
사탄이 인간 정원사에게 식물 키우는 법을 배워서 성실히 적어 놨다가 깜박 놔두고 간 메모」
사탄이 식물 키우는 법을 배워서 적어 놨다가…… 깜박 놔두고 간 메모.
「번역기 사용이 완료됐습니다.」
「열흘에 한 번 관수, 물이 잎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흙을 적실 것. 야생에서 자라던 나무이므로 바람이 중요함.」
아니, 진짜 진지하게 식물 키우는 법 메모였잖아. 저런 메모를 악마의 계시랍시고 비싸 보이는 액자에 넣어서 대대손손 보관해 왔다고 생각하니까…… 심각한 분위기인데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저게 악마가 남긴 계시래. 가르침이자 예언이래.
우, 웃지 마. 웃으면 안 돼. 백작은 심각하단 말이야…….
“저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문자입니다. 비록 신도들의 믿음이 부족해 문자를 해석하진 못하고 있지만, 사탄께서 강림하시면 직접 가르침을 전수해 주시겠지요.”
“푸흡…….”
“그래, 뭐. 광신도들이 뭘 어떻게 믿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니까. 이제 궁금증이 다 풀렸으니 날 보내 주는 건 어때? 잡아야 할 놈들이 아직 저 밖에 차고 넘치는데 죽긴 이른 것 같거든.”
“그건.”
“그래, 물론 이대로 내보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겠지. 그러니 협상을 하자고. 날 살려 주면 앞으로 내부에서 당신을 도와주지. 어때?”
“아쉽게도 그건 협상 카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들 내부에서 날 돕는 이는 얼마든지 있고 원하면 얼마든지 매수할 수 있으니까.”
“흐음, 그럼 이건 어때? 지금 경관들 사이에서 당신을 의심하고 조사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 그 대단한 위명 때문에 말이야. 그런 내가 없어지면 곧장 당신에게 의심이 쏠리지 않겠어? 잘 생각해 봐. 경관이 없어진 건 피후원자 하나 사라진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야. 경시청 내부에 아무리 당신 편을 심어 놨어도 꽤 성가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
“대신 날 살려 주면 여기서 알게 된 모든 것들을 비밀로 묻어두고 당신을 조사하는 것도 그만두지. 오히려 내부에서 협력하겠어. 당신에 대한 혐의점이 나오기라도 하면 즉시 전달해 주도록 하지.”
쥐도 새도 모르게 여기서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싶었는데, 어라, 의외로 먹히고 있다. 처음부터 물어뜯고 싸우기만 했던 두 사람의 동맹 전선이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광신도를 죄다 불살라 버릴 기세였던 해리슨이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의외지만, 백작의 태도가 훨씬 의문스러웠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문득 오래전에 봤던 문구가 생각났다.
적대 대상끼리…… 동맹을 맺을 수 있다.
“당신을 기억하고 있겠소, 해리슨 경감.”
「적대 대상끼리 동맹을 맺었습니다.」
철컹, 철컹. 말이 끝나자마자 간수가 다가와 해리슨의 몸을 포박하고 있던 족쇄를 풀어 주었다. 오로지 게임 규칙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 동맹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전개였다. 백작이라면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더니, 갑자기 동맹이요?
“그럼 저 하인은?”
백작의 차갑고 건조한 시선이 나를 잠깐 스쳤다.
“아뇨, 하인의 처분은 백작께 맡기겠습니다. 어차피 백작저에서 일하는 하인 아닙니까?”
“이봐요! 지금 여기 온 게 누구 때문인데 혼자!”
“그렇게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지 마. 친구 있는 곳에 데려다준다고 했지, 나가게 해 준다곤 안 했으니까. 앞으로 볼일 없겠군. 하인.”
자유로워진 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가 혀를 찼다. 기가 막혀서 입이 안 다물어졌다. 뭐 저런 개새끼가…….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백작님. 앞으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참, 그리고 저 하인 손목 한번 확인해 보시죠. 간수들 교대하는 시간도 알고 있는 걸 보니 그냥 뒀다간 성가시겠던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백작과 경감의 상상도 못 했던 연합 전선이 이뤄지면서 내 앞에는 더 아득한 지옥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해리슨이 떠나며 남긴 말에 백작이 건조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뒤에 서 있던 신도 중 하나가 내 손목을 확인해 보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오, 저 해리슨 새끼 앞으로 내가 도와주나 봐.
묶여 버리면 에밀리 구출이고 뭐고 끝장이다. 나는 손목을 털어 내며 얼른 일어났다. 어떻게 공격할지 생각할 새도 없이 가까이 와 버리는 바람에 그냥 냅다 밀쳐 버렸다.
쿠당탕! 보이지 않는 폭풍에 휩쓸린 듯 신도는 저 멀리 훅 날아가 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그를 보고 다른 신도들은 황당한 기색이었다.
회피 원피스에 붙은 근력 옵션 최고.
“뭣들하고 섰어? 얼른 잡아!”
「회피했습니다.」
「회피했습니다.」
「회피했습니다.」
「회피했습니다.」
「릴리안(악)이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루카스(악)가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안토니(악)가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신도들이 여럿 달려들었으나 누구 하나 나를 잡지는 못했다. 간혹 회피가 뜨지 않을 때는, 내 악명에 친근감을 느끼고 주춤하는 사이 밀쳐 버렸다. 좋아, 이대로 잘만 하면 탈출할 수도 있겠어.
“……성가신 하인이군.”
그 순간이었다. 잔상만 남기고 미친 듯이 회피하던 나를 누군가 붙들었다. 단단히 잡아 비틀며, 망설임 없이 부러뜨리려 했다.
“손목을 다시 묶어 둔다 해도 또 장난질을 치면 곤란하겠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과 마주친 것도 잠시, 놀라운 힘에 떠밀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눈앞이 번쩍할 만큼의 충격이라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오른손이 구두에 밟혔다.
“아…… 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