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33)

8-1.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내 전설 베개!

이런 미친, 누가 훔쳐 갔어, 어느 놈이야? 나는 씩씩거리며 숙소를 박차고 나와 레티샤를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자, 마침 잠들 참이었던 듯 그녀가 잠옷 바람으로 나왔다.

“어머, 힐다. 왜 이런 늦은 시간에…… 혹시 도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아뇨,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오늘 마스터키를 가져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마스터키? 무슨 일인데 그러니? 표정이 좋지 않구나.”

“누가 제 방에 들어와 베개를 훔쳐 갔거든요. 분명 문을 잠가 놓고 갔는데 열어서 가져간 걸 보면 마스터키를 썼을 가능성이 있어서요.”

내 말에 레티샤가 입을 가리며 놀라워했다.

“세상에, 베개를 훔쳐 가다니. 그런 흉측한 짓을 벌였다니 누군지 꼭 잡아야겠구나. 어디 보자, 오늘 마스터키를 빌려 간 사람이…… 리차드가 창고 열쇠가 녹슬었다며 한번 빌려 갔었고, 앨번 집사님, 리오는 빌려 가긴 했지만 내가 옆에 있었단다. 그리고 델로레스…….”

“델로레스요? 걔가 언제쯤, 무슨 용무로 빌려 갔나요?”

베개를 안 훔친 사람은 있어도 한 번 훔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다. 내가 게임에 들어왔을 때 한번, 그전에도 몇 번 전적이 있는 델로레스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델로레스는 정오쯤 빌려 갔었단다. 방문을 실수로 잠그고 나왔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애는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고향에 가겠다고 오늘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레티샤 님! 저도 마스터키를 빌릴 수 있을까요?”

“응? 그럼 물론이지. 잠깐 기다리렴.”

문을 열어 놓은 채로 그녀가 다시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랍 여는 소리, 열쇠 무더기가 부딪히는 소리. 실내화를 끄는 발소리가 길게 따라붙었다. 구역별 마스터키가 커다란 쇠고리에 달려 짤그랑거렸다. 다시 돌아온 레티샤에게 마스터키를 받자마자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분명히 이 방이었지.”

노크를 해 보았으나 기척이 없어 열쇠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창문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걸린 커튼이 바람에 훅 일어났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역시나 범인은 이미 내빼고 없었다. 이걸로 델로레스가 범인일 확률이 10%는 넘게 올라갔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방이 너무 깨끗한데.

사람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아예 짐 싸서 나간 것처럼 깨끗한걸. 텅 빈 책상과 옷장. 그러니 내 전설 베개도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 귀성길에 오를 땐 이렇게 죄다 싸서 가는 건가? 아무리 1천 골드짜리라도 베개를 고향 가는 길에 가져가는 건 무리인 것 같은데.

하지만 베개 도둑의 생각 따위 내가 알 게 뭐람. 돌아오기만 해 봐. 내 전설 베개 깃털 하나라도 빠졌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델로레스의 남자친구는 마찬가지로 이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며 로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엔 헤어졌다는데 하인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예전에 베개 사건 있고 나서 옆에 서서 날 째려보던 건장한 남자가 그였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델로레스가 만약 이대로 잠적하거나 발뺌했을 때, 그도 함께 이용할 생각이다.

그나저나 내 베개에 흠집 하나라도 나 있기만 해 봐. 호감 대상에 추가해 놓고 천 골드 벌어 올 때까지 강도 5로 일 시킬 테니까. 악인들이 보고 감탄하는 악명의 힘을 제대로 보여 주마.

“힐다, 무척 피곤해 보이네. 어디 아픈 거야?”

아차, 아드리안과 함께 있었지.

노동자를 부려 먹는 100가지 방법을 되새기며 이를 갈다가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분노를 활활 불태우며 수프를 퍼마시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짐짓 걱정스럽다. 투명할 만큼 맑고 푸른 눈. 선량하기 그지없는 눈이 내 얼굴부터 손까지 빠르게 훑고 다시 올라왔다. 아까부터 저러고 있었는지 그의 수프는 단 1㎜도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그냥 어젯밤에 잘 못 자서 그래요.”

“정말이야? 나도 네 생각하느라 못 잤어.”

아앗, 갑작스러운 공격이 들어왔다. 나는 베개 때문에 화나서 못 잔 거였는데…….

햇살이 모여든 듯 반짝거리는 얼굴에 대고 차마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그, 그럼 정말이죠. 같은 마음이었다니 기뻐요. 그렇지만 밤에 잠은 주무셔야죠. 수면 부족으로 아프면 어쩌시려고.”

“하지만 자면 너를 못 보는걸. 힐다 네가 꿈에 나타나 주는 건 어때?”

우웃, 치명적인 공격이 또 들어왔다. 왜 저렇게 눈을 반짝이며 묻는 거야. 꿈에 나오고 말고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다분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현명한 대답이지만, 이번에도 입을 오물거릴 뿐 말할 수 없었다. 짧고 깊은 고민 끝에 그가 원할법한 대답을 떠올려 냈다. 대답하는 거야 돈 들지도 않으니까!

“네, 그럼요. 꿈꾸시려고 하면 나타나서 머리 때려드릴게요. 얼른 깊게 잠이나 자라고요. 꿈속이니까 아프진 않겠죠?”

“힐다 너는…… 정말 낭만이라곤 없구나.”

“그럼 꿈에 나와서 뭘 해요?”

“정말 낭만이라곤…….”

다소 서럽게 중얼거리며 아드리안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왜 저렇게 실망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로선 가장 애정 넘치는 대답을 해 준 것뿐인데. 거기다 꿈에서 만날 필요가 뭐가 있어, 눈 떠서 만나면 되는 거지.

그새 남은 수프를 깨끗이 다 비운 나는 메인 디시를 끌고 와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음, 오늘도 스테이크 품질 죽이고요. 소스는 환상적이고요, 입 안에서 살살 녹고요. 베개 때문에 몰려왔던 깊은 분노가 조금씩 누그러들려고 한다. 역시 사람의 인심은 배부름과 여유에서 오는 법이지. 고향에 다녀온 델로레스가 스스로 죄를 고백하면 자수감면을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드리안 옆에서 지낸 후 최고의 복지를 꼽으라면 단언컨대 식사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엔 손도 대지 않고 남은 식사가 아까워서 나머지 뺏어 먹었을 뿐인데, 서로 가까워지고 나서부터는 아예 내 몫의 식사도 함께 준비하도록 지시를 내려 주었다. 물론 3인분을 주문하면서도 나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아 의문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아드리안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니까. 덕분에 난 최고급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2인분씩 배당받아 끼니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었는데, 맛있게 먹는 모습이 아드리안의 식욕을 돋운다고 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힐다, 식사는 다 한 거야?”

“네? 네. 이제 디저트만 남았네요.”

내가 순식간에 메인 디시를 쓱싹하자 겨우 수프만 깨작거리고 있던 아드리안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배 속에 아귀가 든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은 눈치다. 저번에 물었을 땐 무슨 그런 농담을 다 하느냐고 대꾸했었는데 진담이었던 것 같다. 이건 다 내가 근육이 많아서 기초대사량도 높고 밤낮으로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인데. 억울하다, 억울해.

디저트가 남았다곤 하지만, 작은 체리 타르트라서 한입에 밀어 넣고 꿀떡 넘겼다. 고소한 아몬드 크림과 바삭한 타르트, 거기다 톡톡 터지는 상큼한 체리까지. 새콤달콤한 맛 사이로 스며드는 고소하고 바삭한 식감이 아주 좋고요, 일품입니다. 10점 만점에 100점 드리고요, 다음엔 조금 더 큰 거로 부탁해요.

“힐다, 식사를 다 했다면 나를 도와주겠어?”

평소라면 좀 천천히 먹으라고 했을 그가 의외의 요청을 해 왔다. 도움이라니?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숟가락이 거짓말처럼 미끄러졌다. 쨍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드리안이 힘겹게 입을 뗐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 아까부터 팔이 저려서…….”

“네? 팔이 저리다니, 어디 봐요. 마비 증세 아녜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심상찮았다. 나는 급하게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가면서도 왜 시스템 알림은 안 뜨는지에 대한 의문을 느꼈다. 호감 시스템이 막혔어도 병에 관한 알림은 쭉 떴었는데?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그냥 식사만 좀 도와주면 돼.”

“손이 이렇게 떨리고 있는데 식사만 도와달라고요? 제가 보기엔 가만히 두면 안 되겠는걸요. 나가서 의사 선생님 모시고 올게요, 당장요.”

“아냐, 힐다. 그럴 필요 없어. 마비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러는 거니까. 자, 봐. 떨림은 금방 가라앉았지?”

아드리안이 내 눈앞에 쫙 편 손을 보여 주더니 살짝 흔들어 보였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손이 어느새 멀쩡하게 돌아와 있긴 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거라면 시스템 알림이 뜨지 않은 것도 이해는 되지만……. 정말 단지 힘이 없는 거라고? 살짝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는데 웬일인지 아드리안의 눈빛은 더욱더 가련해지기만 했다.

“어쩐다,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대로라면 식사를 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뭐라도 먹어야 몸 상태도 괜찮아질 텐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식사를 도와달라는 거지. 자, 여기 앉겠어?”

기다렸다는 듯 덧붙이고는 옆에 마련된 의자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뭔가 이상한데…….

“……알겠어요. 고기 잘라 드리면 되죠?”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해.”

일단 옆에 앉아서 고기를 썰기 시작하긴 했는데 의심이 쉽사리 가시질 않는다. 적당한 크기로 고기를 잘라 내고 포크로 콕 집자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됐다. 고기를 잘라 준 것만으론 안 되겠지? 식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힘이 없다고 했으니 먹여 주기도 해야 하나?

“드, 드세요.”

어정쩡하게 포크를 든 채 고민에 빠져 있는데 아드리안이 쑥 다가왔다. 덜컥 놀랐을 땐 이미 포크에 있던 고기가 사라진 후였다. 슬쩍 눈을 돌리자, 입을 가리고 고기를 씹고 있는 그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먹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듯했지만, 기다란 손가락 밑에 가려진 입술이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다.

“맛은…… 어떠세요?”

“으응, 한 입 더 먹어 봐야 알겠는걸.”

“한 점 더요?”

적당한 크기로 썰어 낸 고기를 포크에 콕 찍어 내밀자 아드리안이 냉큼 받아먹었다. 그때마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반짝거리는 게…… 손에 힘이 없어서 그렇지 되게 먹고 싶긴 했나 보다.

먹을 걸 내밀면 받아먹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새끼 새 같고. 뭐, 까짓거 먹여 주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맛있다, 힐다. 네가 먹여 주니 더 맛있는 것 같아.”

조금 전까지 창백해서 쓰러질 것 같았던 그가 활짝 웃었다. 세상의 빛이란 빛은 다 모여든 것처럼 눈부시고 성스럽기까지 해서, 의심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런 맑은 사람을 의심하려고 했다니 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은 게 아닌가 하는 자책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 알림은 안 뜨더라도 진짜 힘이 없을 수도 있지. 별다른 이유 없이 식욕 없을 수도 있고. 하지만 밥 안 먹으면 또 아플 테고, 그럼 내가 간호해 줘야 하고……. 먼저 의심부터 하는 습관도 버리도록 하자.

정화된 마음으로 한 점씩 먹여 주다 보니 어느새 접시가 깨끗이 비워졌다. 내친김에 사이드 메뉴도 끌어와 먹여 줬더니 냉큼냉큼 잘 받아먹는다. 이렇게 잘 먹으면서 그동안 왜 다 남겼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아드리안, 혹시 옆방에 손님 오나요?”

아드리안의 식사까지 마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가 물었다.

“며칠 전부터 무거운 짐을 쿵쿵 내려놓거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요. 레티샤 님은 도련님께서 내리신 지시라 아는 건 없다고 하시고. 그냥 궁금해서요.”

사실 처음엔 나 때문에 방을 꾸미는 건지 김칫국을 마셨는데, 예상외로 소리가 오래 들리자 도로 뱉었다. 설마하니 나 하나를 위해서 옆방을 뜯어고칠 리는 없잖아.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가끔 저택으로 불러들이기도 하니 그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아주 귀하신 손님이 와 주셨으면 하지. 하지만 아무리 와 달라고 해도 와 주질 않으셔서, 방을 고쳐 보고 있었던 거야.”

“와, 도련님이 직접 청해도 안 오는 걸 보면 콧대 굉장히 높으신 분인가 봐요.”

“응. 나의 귀한 숙녀님이 콧대가 높으시긴 하지. 산책 한 번도 겨우 졸라야 갈 수 있으니까. 부탁하면 방을 구경해 주긴 할까?”

“아, 여자분이셨…… 네?”

“이리 와 봐, 힐다.”

짓궂은 미소와 함께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얼결에 따라 들어간 곳은 줄곧 큰 소리가 들려왔던 옆방. 등 뒤로 문이 조용히 닫혔다. 저, 어떤 것 같아? 내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정작 나는 놀란 나머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저 때문에 이 방을 꾸미고 있었다고요……?”

“응. 너를 들일 곳인데 허름한 꼴로 둘 수는 없어서 간단히 손을 봤지.”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요?”

“내 고백을 과소평가하는구나, 힐다. ‘고작, 이렇게밖에’지. 마음 같아선 하늘이라도 갖다 놓고 싶었거든.”

“……하늘요? 저 위에 있는 하늘요?”

“그 반응을 보아하니 안 하길 잘했구나.”

끝까지 긴가민가하던 문제의 정답을 이제야 알아냈다는 듯 아드리안이 환하게 웃었다. 화려한 방, 조금 전의 발언. 무엇에 더 놀라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아드리안은 고작 이렇게밖에 못 꾸며 아쉽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과할 정도다. 우선 내 숙소의 두 배는 족히 넘을 방 크기부터 누워서 세 바퀴는 족히 구를 수 있을 것 같은 침대. 눈이 번쩍 뜨이는 전설 베개. 글공부할 수 있도록 마련된 학습서와 로맨스 소설 잡지가 나란히 꽂혀 있는 책장.

그중에서도 ‘스위트 하트’, ‘키티, 어느 정원의 시’는 하인들 사이에서 인기 폭발인데 비싸서 못 구하고 있다고 에밀리가 칭얼댄 적 있어서 특히 눈에 띄었다. 하늘을 갖다 놓겠다는 말도 시적 은유가 아니라 진심 그대로겠지.

늘 옆방으로 옮기라, 하루만 자고 가라고 졸라 대더니 이렇게 진심이었을 줄은 몰랐다.

“힐다, 마음에 들어?”

푸른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 눈에 풍덩, 머리끝까지 잠긴 것 같았다. 그가 내 손을 꼭 잡지 않았더라면 한참 빠져 있었을 거다. 마음에는 들지. 마음에는 드는데…….

막상 여기서 지낸다고 상상하자 매일 아침 레티샤가 늘어놓는 일장연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너희들! 매일같이 팔츠그라프 가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기는 것 잊지 말아야 한다! 팔츠그라프 가가 우리 하인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해 보렴. 그 대단한 공작 가문조차 남자 사용인에겐 마구간이나 저택 지하, 여자에게는 최상층의 다락방에 모아 두지 않니? 안락의자 하나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자는 데 반해 이 팔츠그라프 가를 생각해 보렴. 이 많은 인원에도 1인 1실을 주는 대단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 않니? 그러니 매일 백작님께 감사하며 더 열심히 일하란 말이야!”

레티샤는 늘 팔츠그라프 가문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남녀 사이에 정분이 나는 사태를 우려해 왔다.

그런데 하인이 도련님 옆방을 쓴다? 백작가가 뒤집힐 건 불 보듯 뻔했다. 당장 날 불러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다그칠 테고 하인들은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험담을 하겠지. 생각만 해도 귀찮고 번거롭다.

지금 숙소도 딱히 지내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굳이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그럼 이제 방을 옮길 생각이 들었다고 봐도 될까?”

없는데…….

기대가 듬뿍 담긴 얼굴에 대고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으음, 어쩌지. 안 그래도 수없이 거절한 데다 이렇게까지 꾸며 놨는데도 외면하면 실망할 것 같은데. 견고한 나뭇가지가 은근슬쩍 갈대처럼 휘어진다. 잠깐 고민한 끝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마침 귀성으로 사람들이 저택 비우기 시작할 테니 당분간은 여기서 지낼게요. 보는 눈도 얼마 없을 테고.”

“그게 정말이야, 힐다? 거짓말 아니지? 무르기 없기야.”

고작 옆방일 뿐인데 저렇게 좋은가. 아드리안의 얼굴이 다시 한번 환해지자 심장박동도 은근슬쩍 빨라졌다. 실은 크게 대단치도 않은 결정인 것 같은데 꽃송이가 퐁퐁 튀어나올 듯 웃는 걸 보니 금세 쑥스러워졌다.

“몇 번 더 거절당할 각오 하고 있었는데 기뻐. 이렇게 빨리 받아 줄 줄 알았으면 외출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텐데, 아쉽기도 하지……. 혹시 모르니 이 방에 경호원을 세워 둬야겠는걸.”

“외출요? 어디 가세요?”

“으응. 사흘 정도. 들러야 할 곳이 생겼거든.”

은은한 빛이 수십 개 확 떠올랐다. 얼마 전 유리온실에서 보았던 등불이었지만, 주변이 아직 환해서인지 희미한 빛으로 떠 있다가 곧 녹아들듯 사라졌다.

“힐다, 저것들은 해가 지면 나타나서 네 곁을 지키다가 새벽이 오면 사라질 거야.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문도 열리지 않게 해 놨으니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어요. 그런데 사흘이나 어디…… 가시는데요?”

“조금 멀리. 지오반니 아카데미에 다녀올 거야.”

“왜요? 무슨 일인데요. 저도 가요?”

“내 귀한 숙녀를 험한 길에 동행시킬 순 없지. 준비하는 것만 도와주면 돼.”

아드리안이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이끌었다. 방에 돌아와 파티션 안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아카데미라면 그가 피후원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보낸다는 거기잖아. 어째서 굳이 직접 가는 걸까? 학비 떼먹는지 정찰하러 갈 리는 없을 테고…… 아니면 혹시.

“아드리안, 혹시 지금 가는 게, 하나씩 사라진다던 피후원자들 때문이에요?”

“응, 알고 있었구나. 누구에게 들었어?”

“해리슨 경감요. 요즘 툭하면 찾아와서 시비 걸어대는데 줄곧 백작님과 도련님을 의심해 왔거든요. 그 사람은 피후원자들의 실종에 두 분이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힐다, 이리 와서 준비하는 걸 도와주겠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파티션을 타고 넘어왔다. 참, 준비하는 거 도와달라고 했지. 번쩍 정신 차리고 급하게 파티션을 돌아갔다가, 내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왜, 왜, 왜. 왜 윗옷을 벗고 있는 건데. 히이, 익……. 볼품없이 새된 비명이 잇새를 새어 나가다 끊겼다.

“왜 그렇게 서 있어? 어서 이리와.”

그는 애간장을 녹이도록 예쁘게 웃는 법을 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사람이 얼마나 심장 떨리는지는 더 잘 알았다.

이대로면 심장 마비로 죽지 않을까? 벌써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지잖아. 갑자기 상체 탈의라니 무지막지하게 부담스러운 축복이다. 가슴 떨려. 진지하게 생명의 위협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정직한 욕망도 슬쩍 고개를 들었다.

긴장할 게 뭐가 있어? 준비하는 걸 도와주는 것뿐이잖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만져야 할 거고…… 전부 어쩔 수 없는 건데. 마른 목 너머로 침이 꼴딱 넘어갔다.

“옷…… 입으시는 거 도와드리면 되죠?”

“그럼.”

옆에 미리 준비된 셔츠를 얼른 집어 들자 아드리안이 순순히 팔을 뻗었다. 뜻 모르게 깊어지는 미소와 함께.

아래로 뻗은 팔에 맞춰 소매를 넣고 올려 주는데…… 사라락.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서인지, 옷감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손, 손목, 팔꿈치, 팔…… 그리고 어깨. 셔츠를 따라서 시선으로 더듬더듬 만졌다. 워낙 병약하다 보니 몸도 종잇장 같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탄탄한 몸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아픈 와중에 팔굽혀펴기라도 열심히 한 걸까. 튼튼하고 근육 가득한 카지미어의 몸보다 우아하고 완벽하게 조형된 이쪽이 내 심미안에 더 맞았다.

그러다 보니 옷을…… 입히기 싫어졌다. 조금만 더 벗고 있으면 안 될까? 보기만 할게, 보기만…….

“근데 도련님, 등에 이 커다란 흉터는 뭐예요?”

욕망 가득한 눈으로 더듬더듬 훑어보고 있는데, 왜 이제껏 못 봤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랗고 긴 흉터가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불로 지진 것처럼 시커먼 흉터가 양쪽 날개뼈를 따라 남아 있다. 으와, 엄청 아파 보여. 등에 횃불이라도 떨어뜨리면 저런 흉터가 남을 수 있을까. 팔과 몸통에 나 있는 수많은 자상은 그에 비해 약과일 정도였다.

“옛날에 난 상처야. 이젠 안 아파.”

언젠가 사탄에 대해 묘사했던 카지미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잿빛 머리카락에 붉은 눈. 영혼에 새겨진 날개 흉터.

“아니, 그래도…….”

“놀랄 것 없어. 본래 힘을 되찾으면서 영혼에 난 상처도 선명해지고 있을 뿐이니까.”

그럼 앞으론 더 선명해진다는 뜻이겠지? 이젠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이제껏 셔츠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던 게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였구나. 새카맣고 우둘투둘한 흉터 위에 나도 모르게 손을 갖다 댔다.

“간지럽잖아, 힐다.”

등 근육이 꿈틀거리며 아찔하도록 달콤한 웃음소리가 났다.

이 정도면 몸을 이용해 유혹하기로 작정한 게 아닐까.

“이제 보지 마, 흉측한 건.”

뒤에서 꾸물거리고만 있던 탓인지 그가 다른 쪽 팔을 소매에 마저 집어넣었다.

앗, 셔츠 입는다. 입는다. 입지 말아 줘…… 입었다. 또 벗어주라…… 딱 백번만 더…… 핫,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감상 끝났으면 넥타이를 매주는 게 어때?”

“감상…… 이라뇨. 그 무슨 말씀이세요.”

그가 단추를 잠그며 뒤돌기에 내가 뜨끔해서 항의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네 앙큼한 눈빛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면 한 번 더 벗든지……. 핫, 미쳤어, 미쳤어. 넥타이나 매주자.

“앙큼한 수작질을 할 땐 더 귀엽고.”

“그만 말씀하시고 턱 좀 들어 보세요.”

“들키면 괜히 뾰로통해지는 표정도 마음에 들고.”

“…….”

“사흘간 이 얼굴을 보고 싶어서 어쩌지. 그리워서 쓰러질지도 몰라.”

보고 싶어서 쓰러질 바엔 나도 데려가는 게 낫지 않나. 내 대답을 들은 양 미소가 짙어지는데도 끝까지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 뭐. 꼭 혼자 가겠다는데 붙잡을 필요는 없지. 조금 심통이 나서 넥타이를 엉망으로 매어줬는데, 아드리안은 거울을 보더니 “좋아, 완벽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저기, 혹시 위험한 일 하러 가는 건 아니죠?”

참지 못한 내가 다시 넥타이를 매어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오히려 저지당하고 말았다. 네가 매어줬으니 어떤 모양이든 완벽한 거라는 사탕발림과 함께.

“얼마 전 팔츠그라프 백작이 피후원자들을 죄다 내 앞으로 돌렸던 거, 기억하지?”

시스템과 씨름하느라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그런 내용을 얼핏 들은 것도 같다. 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안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나는 이 집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어. 그 말은 즉 어떤 죄를 지어도 뒤집어씌우기 편한 상대라는 뜻이겠지.”

“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힐다, 나는 이미 정답에 다다라 있어. 이번 외출을 통해 확신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러고 나면 너를 지킬 수 있는 길에도 도달하리라 생각해.”

“저를요?”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이야. 말 그대로 뭐든.”

사라지는 피후원자들 얘기에서 갑자기 내게로 이야기가 건너뛴다. 나를 지킨다니, 무엇으로부터? 내 몸이야 스스로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데다 나야말로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만, 아드리안의 의도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조금 더 근원적이고 절박한. 때로는 혼자만의 절벽에 내몰린 듯 애쓰는 게 안타까웠으나…… 물어봐야 대답해 주지도 않겠지.

“……다치지나 마세요. 식사도 거르지 마시고요.”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귓가를 살근거리는 손을 붙잡아 내렸다. 금세 뒤집혀 단단히 붙잡히고 말았지만.

“이럴 때조차 내 걱정이라니 귀엽기도 하지. 끼니마다 네가 먹여 준다 생각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 순간, 어울리지 않게 그가 내 눈치를 잠깐 봤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의아해한 순간 익숙한 장미향이 밀려들었다. 코앞까지 다가선 그를 올려다보기도 전에, 촉촉하고 따스한 입맞춤이 이마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봄볕처럼 따스하고 가벼운 입맞춤. 어느덧 화끈거리는 이마에 입술을 얹은 채 그가 웃는 게 느껴졌다.

“다녀올게, 나의 힐다.”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이마에 닿은 입술은 조금 더 내려와 눈꺼풀에, 속눈썹에, 콧잔등에 애틋한 입맞춤을 남겼다. 곧 헤어질 연인답게 애틋했지만, 동시에 집요하기도 했다. 독한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해져 간다. 어쩌지, 이대로면 심장이 터져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마에 입 맞추는 것 정도는 큰 의미 없잖아. 일상적인 인사나 다름없는걸. 그러니 심장도 이렇게까지 쿵쾅댈 필요가 없다.

이대로면 위험하겠어. 한참 지분대던 그가 겨우 나를 놓아주었다. 목소리에 미련이 뚝뚝 떨어진다. 어떻게 위험해지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실룩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느라 여유가 없었다.

웃지 말자. 나는 나무토막이다, 나무토막…… 얼굴에 힘을 주는 것만으론 안 돼서 있는 힘껏 인상을 찡그렸으나, 내가 귀엽다며 아드리안이 킥킥 웃었다.

원흉은 이렇게 늘, 반성하는 법을 모른다.

사흘이 다 뭐냐. 아드리안이 떠나자 반나절도 길었다.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났더니 지루해지기까지 해서, 미뤄 뒀던 일을 하나씩 해치웠다.

우선 레티샤가 달라고 노래를 불러 댔던 매듭 공예품. 1골드짜리 밧줄을 제작소에 넣으면 완성품이 뿅 튀어나왔지만,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었다. 이번엔 아드리안 콘셉트로 금술과 푸른 모조 보석으로 장식까지 했더니, 레티샤가 마무리 손뼉을 칠 정도로 좋아했다.

“힐다, 너는 어쩜 날이 갈수록 솜씨가 좋아지니? 금색 실에 이토록 영롱한 푸른 보석이라니. 공작 부인께서 보시면 좋아하시겠어.”

“마음에 드시면 다행이죠. 이번엔 좀 많이 준비해 봤는데요.”

과연 이게 다 팔릴지 의문을 품으며 공예품 서른 개를 내밀자 레티샤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머나! 이렇게 많이! 잘됐다. 마침 공작 부인께서 꽤 자랑하고 다니시는 바람에 귀부인님네들이 난리가 났거든. 제작자를 찾으려고 다들 혈안이 됐다지 뭐니.”

“혈안…… 그렇게나요?”

“그럼, 그럼. 어디서 숨어 있다 나타난 예술가냐며 난리가 났단다. 어떻게든 따라 만들어 보려고 다들 애쓰는 모양인데, 끈을 어떻게 엮어야 이런 모양을 만들 수 있는지 아직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더라. 호호, 잘된 일이지.”

「공예품(30개)을 판 골드와 일급(선불)이 들어왔습니다.」

「골드 +21,070G」

나는 한동안 화면 상단에서 반짝거리는 골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쌓인 돈 5,450골드에 이번에 받은 돈이 합쳐져 26,520골드라는 경이로운 숫자가 만들어졌다.

전 재산이 다섯 자리라니.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1골드짜리 밧줄을 제작소에 넣고 적당히 꾸미면 700골드짜리가 되어 나오다니. 이쯤 되니 케이든과 그로버가 벌어 오는 검은돈은 깜찍해 보일 정도다.

“요즘 큰돈 만져서 꽤 신났을 테지만, 힐다야, 내 말을 반드시 명심하렴. 네 재주가 귀족님네들 마음에 꽤 들었다곤 하지만, 혹시나 헛바람 들어서 여기를 박차고 나가지는 말렴. 그분들 유행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바람과 같지만, 이 팔츠그라프 가문은 쉽게 휩쓸리지 않는 나무 의자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내 말 잘 알겠지?”

레티샤가 팔츠그라프 가문에 충성스러운 편이긴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주식 대박 난다고 매달 꽂히는 월급과 복지를 쉽게 포기할 순 없으니까. 어차피 아드리안 때문에 저택을 떠나진 않을 테지만, 깊은 감명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자 레티샤가 대번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팔츠그라프 가문이 네게 해 주는 것들을 명심하도록 하고. 다음엔 이 끈 공예품을 더 멀리 팔아볼 생각을 해 보자꾸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도 있잖니.”

“음……. 그럼 잡지에 한번 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잡지에?”

“네. 귀족님네들 유행은 짧게 끝날지 몰라도 그들을 선망하며 따라 하려는 머릿수는 배로 많을 테니까요. 공예품에 처음 눈독 들이셨던 공작 부인 이야기를 써먹어도 괜찮겠어요. 실명은 쓰지 않되 누구인지 유추는 가능하도록요. 그럼 누군지 더 궁금해서 더 멀리 퍼지지 않을까요? 듣자 하니 요새 ‘스위트 하트’가 그렇게 인기 많다던데, 거기 실어 봐도 좋겠어요.”

“어머나,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어서 알아봐야겠어. 참, 힐다 너 요새 어디 아프니? 식사를 통 안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녜요. 요새 입맛이 없어져서요.”

“네가? 네가 입맛이 없어졌다고? 혹시 큰 병이 있는데 모르는 거 아니니?”

“그런 거 아녜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눈을 보니 양심이 찔리고 말았다. 사실 아드리안이 매끼 2인분씩 챙겨 주다 보니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건데. 도련님과 식사하리란 건 상상도 못 할 레티샤 눈에는 내 식사량이 극도로 줄어든 것처럼 보였을 거다. 의사 선생님을 불러 주겠다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키고 부엌을 나왔다.

“하, 날씨 좋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면서 정원에 나와 기지개를 쫙 켰다. 날씨도 좋고 오늘은 돈도 쓸 겸 마을에 나가 볼까?

“어머, 힐다. 어디 가니?”

마차를 얻어 타러 가는 날 세탁실 수석 하인이 발견하고 붙잡았지만, 애써 말을 돌리고 팔을 빼냈다. 아드리안이 자리를 비운 후 특히 세탁실과 부엌에서 날 일꾼으로 탐내고 있다고 레티샤에게 귀띔을 받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이 유급 휴가라고 명명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쯤 세탁실에 끌려가서 일하고 있지 않았을까.

부엌은 또 어떻고. 부엌의 수석 하인이 틈만 나면 꼬셔 대는데, 손만 고생하면 몸은 편하다는 속삭임을 난 절대 믿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은 식기와 놋쇠 식기, 구리 냄비를 비누와 식초로만 광을 내야 하는데, 소다에 녹인 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 보면 튼 살이 생겨서 여간 아픈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손이 퉁퉁 부어 버렸었지.

그 외에도 만찬실, 도서실, 응접실, 대기실의 난로 닦기, 카펫 쓸기, 침실 청소, 커튼을 떼어 내어 빨기, 가구 분해해서 닦기, 테이블보나 냅킨, 시트 바느질, 욕실 청소…….

저택 곳곳에서 같이 일하자고 불러 댔지만, 힘든 업무를 도맡아 한다고 해서 보너스를 주는 것도 아니라서 굳이 고생하긴 싫었다.

일해서 돈 받는 게 아니다. 돈 받는 만큼 일하는 거지.

투철한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나는 사방에서 쏘아 대는 구애의 눈빛을 무시하고 마차에 올랐다. 전설 베개 쓰다가 고급 베개 쓰니까 어깨가 영 결려서 간 김에 장비도 몇 개 더 사 올 생각이었다.

“아저씨, 아이다 마을로 가 주세요.”

마을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얼마 전에도 갔던 침구 가게. 전설 베개를 도둑맞긴 했지만, 굳이 델로레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되찾을 필요는 없었다. 수중에 2만 6천 골드나 있는데 더 좋은 베개를 마련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의 돈이 있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것,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헤맬 필요가 없다는 것. 지갑이 두툼해진 내가 굳이 도둑맞은 전설 베개에 집착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어서 오세요. 앗, 오늘도 베개를 보러 오셨나요?”

호쾌하게 천 골드를 내놓은 기억이 선명하게 남았는지 침구 상인은 날 곧장 알아봤다. 얼마든지 편하게 둘러보라는 접대성 발언을 뒤로하고 베개 진열장으로 향했다. 일반 베개, 고급 베개, 희귀 베개…… 이젠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낮은 등급 베개를 쭉 훑어보고 마침내 가장 상위 등급, 왕좌로 향했다.

「신화 베개 - 10,000G, 베고 자는 동안 천국에 다녀올 수 있다는 궁극의 베개. 대마법사 제니스의 수면 마법이 걸린 베개로 대륙에 단 하나뿐인 베개.」

하, 가슴 떨려. 숨이 잘 안 쉬어지려고 한다.

신화 베개, 궁극의 베개…… 읽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설명이다. 대륙에 단 하나뿐이라는 베개가 왜 이 작은 마을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젠 내가 신화 장비를 살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이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다.

대륙에 단 하나뿐이라는 베개의 주인이 바로 나! 밤마다 다녀온다는 천국,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저, 이 베개를 사길 원하는데요.”

“어머나, 세상에! 신화 베개 말씀이시죠? 지금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전설 베개를 고를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신화 베개일 줄은 몰랐다며 상인이 다소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녀는 손에 장갑까지 끼고 조심스럽게 진열장을 열어 베개를 꺼냈다. 황금빛 기운이 은은하게 떠도는 신화 베개는 성스러운 베개 가방에 담겨 성스럽게 건네졌다.

이제 내게도 신화 장비가 생겼다! 짤그랑 소리와 함께 1만 골드가 차감되어 16,520골드로 내려앉았지만, 전 재산은 여전히 역대 최고를 찍고 있었다. 내가 경건하게 신화 베개를 받들자 흰 글씨가 축복하듯 사라락 나타났다.

「신화급 아이템을 처음 획득하여 경험치 3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33으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첫 연인)」

「이제 고대급 장비를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두둥거리는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처음 보는 등급이 열렸다. 신화 장비가 최고 등급인 것처럼 보이게 해 놓고 막상 최강의 장비를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또 다른 길을 열어 주다니. 보통 매출 떨어지면 게임사에서 쓰는 방법 중 하나일 텐데, 어디서 못된 거만 배워선.

근데 고대급 장비는 얼마 정도 할까? 신화 장비만 해도 개당 1만 골드가 넘는데 그보다 더 높은 등급이면 10만 골드쯤 할까? 아무리 끈 공예품으로 돈을 날로 벌고 있긴 해도 너무 비싸잖아. 됐어, 나는 신화급 장비로 만족할래.

“저, 그리고 전설 베개도 두 개 더 주세요.”

“전설 베개를…… 두 개씩이나요.”

신화 베개에 이어 전설 베개를 턱턱 사 버리자, 상인의 입이 다물릴 새가 없었다.

전설 베개는 예비용이다. 비상시에 쓰거나 다리 올리고 자거나! 머리에 베고 자면 다음 날 놀랄 만큼 가뿐해지던데, 다리 혈액순환이 얼마나 전설적일지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다음은 옷가게!

구매한 베개는 가방에 조심스레 넣어 두고 힘차게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사실 유저에게는 장비 가게였지만, 편의상 옷가게로 칭하기로 했다. 1만 골드 넘게 남았는데 신화 메이드복을 살까. 그 고민을 처음에 잠깐 하다가 결국 전설 장비 몇 개 더 사는 쪽을 택했다. 전설 풀세트 효과를 포기할 수 없었던 데다 강화 시스템도 겸사겸사 사용해 볼 겸.

“그럼 이제 강화를 해 볼까.”

전설 메이드복 일곱 벌, 전설 장갑, 앞치마, 장갑, 구두, 머리띠를 샀더니 1만 2천 골드가 홀라당 나갔다.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 지갑을 스쳐 지나간 것과 다름없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돈 남겼다가 시스템에 뺏긴 적이 한둘이어야지. 장비 강화를 최대로 맞추고 나서도 돈이 남으면 다음엔 부동산에 투자해 봐야지. 내가 바로 적폐 꿈나무!

카페에 도착한 나는 커피를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어디 보자, ‘대장간’에서 강화하면 된댔는데.

「강화할 장비를 선택하세요.」

역시 강화의 꽃은 갑옷류지? 가방에 넣어 둔 전설 메이드복을 선택하자 ‘강화 재료를 선택하세요’라는 흰 글씨가 추가로 떴고, 또 다른 메이드복을 선택하자 ‘강화’ 버튼이 활성화되었다. 다행히 0강에서 1강은 100% 확정 강화였다. 강화 대상 장비 한 벌을 제외하면 운 좋으면 6강까지 쭉 갈 수도 있었다. 좋아, 손가락에 기를 모으고 얍!

「전설 메이드복이 찬란한 빛에 휩싸입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업무 효율 50% → 52%」

「전설 메이드복(+1)을 (+2)로 강화하시겠습니까?

강화 성공 확률 : 90%」

90%면 확정 강화나 다름없지. 자신 있게 강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망치가 두 개 나오더니 땅땅 내려친다. 강화 효과에 생각보다 꽤 노력을 들였다고 생각한 순간, 메이드복이 검은 연기에 둘러싸이더니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전설 메이드복이 찬란하게 빛나더니 깨져서 사라졌습니다.」

1강 메이드복과 강화 재료로 쓰인 메이드복이 흰 글씨와 함께 허무하게 사라졌다. 와, 이거 뭐야. 확률 90%에 실패 떠서 장비 깨지는 거 말 되냐? 실패하는 게 훨씬 어려운데 이걸 해내네. 운빨 망겜 수준 알 만하다.

개발자 개새끼…… 게임 개발사 침수돼서 확 망해 버리라지.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을 퍼부으며 다시 재료에 메이드복을 넣었다.

「전설 메이드복을 (+1)로 강화하시겠습니까?

강화 성공 확률 : 100%(확정 강화)」

「전설 메이드복이 찬란한 빛에 휩싸입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업무 효율 50% → 52%」

「전설 메이드복(+1)을 (+2)로 강화하시겠습니까?

강화 성공 확률 : 90%」

「전설 메이드복이 찬란한 빛에 휩싸입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업무 효율 52% → 55%」

「전설 메이드복(+2)을 (+3)으로 강화하시겠습니까?

강화 성공 확률 : 70%」

「전설 메이드복이 찬란한 빛에 휩싸입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업무 효율 55% → 60%

방어력 +10 (New)」

이번엔 70%에 강화 성공! 이게 바로 갓겜이지! 제가 바로 게임 개발사의 개돼지입니다. 어느 쪽으로 멍꿀멍꿀하면 되죠? 어서 절 받으시죠.

나는 동서남북 마음속으로 절을 올리고 몸가짐을 바르게 가다듬었다. 아까와 반응이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지 않냐고 할 수 있지만, 원래 확률 강화라는 건 몇 프로든 내가 성공하면 갓겜이고 실패하면 망겜인 법. 강화로 장비 몇 개 터뜨려 본 사람은 내 마음을 이해할 거다.

그나저나 3강 하니까 메이드복이 더 성스러워졌는걸. 신화 베개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은은한 금빛 기운이 모래알처럼 감겼다 흩어졌다. 나중에 20강까지 강화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더 생길지 궁금해지는걸.

생각보다 돈을 많이 쓰긴 했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강화 모조리 실패하고 장비 터져서 무과금으로 돌아가지 않은 게 어디야.

“……자네 도대체 요즘 왜 이래!”

남은 장비들도 확정 강화로 1강씩 맞추고 난 후였다. 몹시 화가 난 목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흰 글씨.

「적대 대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해리슨! 거기 서라는 대도! 내 말 안 들려!”

불길한 이름이 저쪽 큰길가에서 외면할 수도 없이 크게 들려왔다. 해리슨…… 또 너냐.

슬쩍 고개를 돌리니, 잔뜩 화가 난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해리슨 경감과 그 뒤를 쫓아가는 제프리 경사,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두 번째는 왠지 해리슨 직속 상관 같이 보이는데.

“도대체 자네 왜 그래? 어! 지난번 근신 때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했네만, 일반인을 이렇게 또 공격하다니!”

“경감님, 제발 용서를 비세요. 예? 조사차 나온 건데 이번엔 경감님께서 진짜 과하셨어요.”

“보면 몰라! 저자가 범인이잖아, 저자가!”

“어허, 해리슨. 자꾸 이러면 이번엔 근신으로 끝나지 않을 걸세.”

“모든 증거와 목격자가 방금 그 인간을 지목하고 있는데 외면하는 이유는 뭡니까? 예? 또 돈 드셨어요? 워낙 더럽게 살아와서 꼬투리라도 잡힌 겁니까?”

“경감니이이이이이임! 대체 경정님께 그 무슨 말씀을! 일단 진정, 예? 흥분 좀 가라앉히시고요.”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해리슨 때문에 고생하는 건 역시 제프리 경사가 아닐까 싶다. 어째 처음 봤을 때부터 편하게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 최고참 상사에게 대드는 상사를 말리는 부하 직원이라니, 지옥이 따로 없겠다.

이쯤 되니 해리슨이 경찰들 사이에서 어떤 존재인지 감이 왔다. 골칫거리, 문제아, 반항아, 처치불능……. 따돌림 안 당하나?

“말조심하게, 해리슨! 범인으로 몰고 가기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자네 진짜 요새 왜 이래? 무작정 의심부터 하고 뭐라도 나오면 곧장 범인이라고 달려들고. 옛날엔 이러지 않았잖아?”

“경정님, 제발 한 번만 봐주십쇼. 저희 경감님 정의감 넘치고 유능하신 거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습니까. 예? 제가 이분을 보고 경찰이 되기로 했을 만큼요.”

“그럼 라일리는요? 빌리는?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모건은요? 그들 다 제가 잡아 왔는데 경정님께서 놓아주시지 않았습니까? 추가로 희생된 희생자가 몇이나 더 있었는데요? 제발 도로 잡아넣어 달라는 동생과 어머니가 살해당했으며 홀로 남은 아버지는 목을 매 죽었습니다. 제대로 처벌만 내려졌더라면 죽지 않았을 테지요. 소중한 이를 잃었더라도 가족끼리 부둥켜 의지하고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데도 제가 범인을 잡아 와야 합니까? 도로 풀어 주길 바라면서요?”

“거, 참. 지난 일을 자꾸 들추고 그래! 그래서? 요새 아무 실적이 없는 핑계를 대고 싶은가 본데 악마 숭배자들 조사는 어떻게 됐어? 실종 사건은! 알아온 게 하나도 없잖아!”

“하하, 알아오면요. 보고하면요? 뭐 제대로 된 처벌이라도 내린답니까?”

“에이잇!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군. 꺼져, 꺼지게! 꼴도 보기 싫으니 꺼져!”

노호를 터뜨린 경정이 마구 화를 내며 자리를 먼저 떴다. 마찬가지로 분노에 휩싸인 해리슨. 그 사이에서 누굴 먼저 쫓아가서 달래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던 제프리가 이내 경정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뒤늦게 경사들이 우르르 무리 지어 나왔다. 동료들이 자기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수군거리는데도 해리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혼자서라도 정의를 지키니 뭐니 하더니 정말 외톨이인가 보네.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나야 알 길 없다만, 왕따당해서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니 안타깝긴 하다.

그래도 할 건 해야겠지. 해리슨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니 절호의 기회였다. 잽싸게 스킬창에서 ‘투시자의 눈’을 사용하자 길가 곳곳에서 알록달록한 악의가 떠올랐다.

이 작은 마을에 이렇게나 많은 범죄자와 다양한 악의가 숨어 있다니. 마을 통째로 아드리안의 냉장고이자 식료품 저장소라는 비유가 찰떡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번에 마주쳤던 살인마의 악의는 음울하고 짙은 보라색이었지.

커피 잔 뒤에 숨어서 몰래 해리슨을 훑어봤는데, 보라색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악의를 담은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가서 알은척하고 악의에 불타게 해야 하나? 적대 관계라 그런지 나만 보면 눈에서 살기가 돌던데. 하지만 웬만하면 가까이 가기 싫은데, 기분도 안 좋아 보이고…….

내가 잠깐 고민에 빠진 사이 해리슨은 휙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쉽긴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자. 앞으로도 여러 번 마주할 것 같으니까. 나는 빈 커피 잔을 손에서 굴리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경정까지 나서서 악마 숭배자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심각하긴 한가 보다. 그러고 보니 담벼락에 낙서가 더 많아진 것도 같고.

〈laudate satanas!

laudate satanaslaudate satalaudate satanas

laudateudate satanlaudate satanas〉

사탄을 찬양하라는 구호 위에 집착적으로 몇 번이나 덧써져, 원문이 무엇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광적인 집념과 숭배가 담벼락을 따라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내용이 이래서야 마을 전체가 사탄을 찬양하며 부르짖는 것 같잖아. 으, 소름 돋아.

“안녕하세여!”

낙서를 따라 쭉 시선을 돌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아래에서 힘차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이야. 고개를 내려 보니 웬 어린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친숙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이든! 너 혼자 따로 다니지 말라고 했지! 어? 힐다.”

“힐다! 힐다다!”

“안녕하세여! 힐다 안녕하세여!”

“저도 다시 안녕하세여!”

카지미어가 알은체를 하자 그 옆에 붙어 있던 애들이 인사를 하더니 내 앞에 있는 꼬마애까지 다시 배꼽 인사를 한다. 인사성이 밝은 건 카지미어와 에이브릴, 둘 중 누굴 닮은 걸까? 내가 아이들을 신기하게 관찰하며 인사를 나누는 사이 카지미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키가 얼마나 큰지 내 앞으로 파라솔이 펼쳐지는 것 같다.

“힐다, 여기서 뭐 해? 도련님도 안 계시는데 혼자.”

“도련님은 일이 있으셔서 외출하셨고 난 살 게 있어서 나왔어.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해? 그 후로 저택에 얼굴도 안 비추고.”

“나야 애들 산책시키던 참이지. 요새 동네가 흉흉해서 몇 명씩 나눠서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되거든. 저택 얘기는 도련님께 아직 못 들었나 보구나. 조만간 마을에 무슨 볼일이 생길지 모르니 여기서 대기하라고 하시던걸? 필요하면 바로 연락을 주시겠다고 말이야.”

“볼일? 무슨 볼일?”

“그야 모르지. 도련님의 깊은 뜻을 내가 어찌 헤아리겠어?”

카지미어는 크게 뽐내듯 말했지만,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대기하라니…… 그거 저택에 오지 말란 뜻 같은데.

“음…… 그래. 언제 생길지 모르는 정체 모를 볼일 때문에 여기서 대기하라고 하셨다는 거지? 도련님께서 직접.”

“그럼! 나만큼 믿을 만한 부하가 없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하하하! 몹시 자랑스러운 일이지. 힐다 너, 도련님께 편지 받아 본 적이나 있어? 만약 그런 영광을 받게 되거든 나처럼 벽에 편지를 걸어 놔. 그 우아하면서 힘찬 필체를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될 테지만 말이야.”

같은 게 아니라 확실하다.

카지미어, 너 아무래도 잘린 것 같은데.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도로 꾹 다물었다. 카지미어가 알면 큰 상처를 입을 것이므로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나중에 아드리안 돌아오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눠 봐야지. 앞으론 때리지 말고 잘해 주라고도 해야겠다. 쟤는 아드리안을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아드리안 말 한마디면 신화 베개 없이도 천국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잘됐지 뭐.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고아원에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거든. 자자, 얘들아, 저기 가서 잠깐 놀고 있어. 손잡고 다니는 거 잊지 말고.”

내 건너편에 앉으면서 카지미어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목줄 풀린 것처럼 ‘와아’ 하고 저리로 뛰어갔다. 말랑말랑한 조랭이떡이 굴러가는 것 같다. 귀여워라.

“근데 동네가 흉흉하다니? 무슨 일 있었어?”

“저 골목. 보기만 해도 알잖아. 악마 숭배자들이 판치고 있는 거. 저놈들 어린애를 가져다 제물로 바친다면서? 그래서 우리 애들도 조심해서 산책시키고 있지.”

얘는 무슨 애들을 강아지 산책시키듯이 말하네. 처음 봤을 때 민감하게 굴었던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고아원 아이들만큼 납치하기에 쉬운 상대는 없을 테니까.

“카지미어, 넌 저런 낙서 보면 무슨 생각 들어? 너도 일단은 악마잖아.”

“도련님 위대하신 건 또 어떻게 알아냈나 싶지. 역시 도련님의 위명은 어딜 가나…….”

“야, 흐뭇해하지 말고.”

“인간이 악마보다 더하다 싶지. 듣자 하니 배를 갈라 가죽을 벗기고 그 피로 기원제를 올리기도 한다던데. 악마는 아무리 그래도 어린 개체를 건드리진 않는데…… 독하다, 독해.”

“가죽을 벗기고…… 그런 짓을 도련님이 좋아하셨어? 그래서 쟤들이 저러는 거야?”

“아니. 그러니 멍청한 짓거리라는 거지. 정작 도련님께서 보면 불쾌해하실 텐데. 아니, 어떤 악마가 보든 그러겠지.”

악마 입으로 악마 숭배자들이 더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한데.

“근데 저 사람들이 도련님을 어떻게 알아? 옛날에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게 아니고서야. 쭉 지옥에 있었다면서?”

“글쎄. 도련님을 특정했다기보다 악마의 상징 정도로 다룬 게 아닌가 싶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푸른 식물을 키우고 싶다고 종종 올라오시곤 하셨으니까. 사방에서 다 말렸는데도 꿋꿋하셨지. 그러다 몇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다.”

식물을 찾으러 지옥에서 올라오다니. 식물 사랑이 옛날부터 유구했다 싶으면서도 너무나 그다운 행동이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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