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악마 앞에서 질투를 논하느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게 낫다.
“이제 좀 괜찮아? 좀 더 나으면 움직여도 되는데.”
“……응, 괜찮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카지미어가 웅얼거렸다. 살인마와 마주친 골목길에서 꽤 멀리 와서 진정할 시간을 주었는데도 아직 얼굴이 하얗게 떠 있었다. 목에 났던 자국은 물론이고 그간 아드리안의 가르침으로 인해 생겼던 멍도 어느새 깨끗이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 괴물 같은 회복력이다. 몸의 충격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더 큰 것 같지만.
“도련님의 가르침까지 받아 놓고 한낱 인간한테 당하다니…… 난 그분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런 생각 하지 마. 들어 보니 당할 만했던데, 뭐. 갑자기 칼 들고 덤비는데 어떻게 피하겠어? 몸집도 어마어마하던데.”
“도련님께서 이걸 아시면……. 난 죽어야 해. 죽어도 싸. 인간한테마저 당하는 부하가 그분 곁에 있는 건 말도 안 돼. 당장 이 자리에서 머리 박고 죽어 버리겠어.”
“야, 야아! 잠깐만, 잠깐만 진정해!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게 있잖아!”
갑자기 카지미어가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머리 박으려고 했다. 어우, 무거워. 온 힘을 다해 팔을 잡아당겨도 바닥에 이마가 닿기 직전이었다.
“친히 도련님 곁에 머물 수 있는 영광을 내려 주셨는데,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다니. 그래, 이 쓸모없는 몸뚱이는 죽어 버리는 게 나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어쩌면 쓸모 있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고도 쓸모없으면 다시 죽고, 또 죽고…… 그렇게 여러 번 태어나다 보면 언젠가 쓸모가 생기겠지. 그러니…….”
인간으로 지금 신체보다 좋은 조건으로 태어날 확률은 낮을 것 같은데. 으어어, 이번엔 진짜 바위에 박으려고 한다! 갑자기 자살 루트라니!
“카지미어, 잘 생각해 봐. 도련님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모르시잖아? 나도 얘기 안 할게. 모르는 척한다니까? 내 손 아직 벌벌 떨리는 거 보이지? 어휴, 꼴사나워. 그런데 넌 멀쩡하잖아! 대단한 거지! 도련님 곁에 있기 딱이다, 딱이야.”
“모르는 척한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진 않잖아? 난 죽어야 마땅해. 죽음으로 충성을 완성해야 해.”
“어, 어어. 너 이대로 죽으면 그, 그 에이브릴은? 분명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네가 다시 태어나면 에이브릴은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괜찮겠어?”
“에이브릴?”
격렬했던 몸부림이 뚝 멎었다. 갑자기 바로 서는 바람에 반동으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으나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그렇지. 나는 에이브릴이 어떤 모습이건 알아보겠지만, 에이브릴은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당황할 수도 있고.”
“맞아, 많이 당황할 거야. 그러니까 진정하고 돌아가자. 오늘은 밤도 늦었는데 고아원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건 어때? 오랜만에 에이브릴도 보고!”
“뭐? 그래도 돼?”
으, 귀야. 얼마나 흥분했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나는 얼얼해진 귀를 문지르며 슬쩍 물러났다.
“그럼, 너 숙소 모자라서 지하에 있는 방을 받았다며. 그동안 편히 못 잤을 거 아냐? 도련님껜 내가 돌아가서 잘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오늘은 고아원에 가서 푹 쉬고 와.”
“그럼 힐다. 나랑 같이 고아원에 가 주겠어? 사실 내가 백작가에서 일한다는 말을 안 하고 나왔거든. 에이브릴 분명 많이 화났을 거야.”
“뭐? 그럼 너 지금 실종 상태인 거야?”
“음……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그러니까 네가 같이 가서 말 좀 해 줘. 나는 에이브릴이 화내면 귀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테니까, 제발.”
말하자면 그런 셈이 아니라 완전히 그런 건데? 이건 실종 신고 들어가서 백작가에서 잡혀가도 할 말 없는 거다.
“사고는 네가 쳐 놓고 말은 왜 나더러 하래? 가서 차분히 잘 얘기해 봐. 그래도 좋은 곳에 취직했으니까 좋아하지 않겠어? 급여도 전부 고아원에 쓸 거라며.”
“그 말을 하기 전에 막 화낼 것 같아서 그래. 잠깐이면 돼. 힐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소맷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는데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죽을 뻔했던 애를 모른척할 수도 없고……. 어느새 밤하늘에 환하게 떠 있는 달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잠깐만 들렀다 간다? 말만 하고 곧장 올 거야.”
“좋아! 이쪽이야, 힐다. 이쪽!”
이미 멀리 뛰어간 그가 내게 손짓했다. 고아원 가는 게 저렇게 좋을까. 보이지 않는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것 같다. 아드리안 들여다보기도 바빴는데 손 많이 가는 강아지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다. 문제는 둘 다 싫지 않다는 거지.
고아원은 마을 외곽으로 나가서도 한동안 언덕을 오르고 나서야 끄트머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가 길어서 그런지 언덕 중턱쯤부터 숨이 차올랐다.
집에 돌아와 신난 강아지는 일찌감치 언덕을 다 올라 고아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헥헥거리며 기다리는 카지미어를 향해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하자 뒤돌아서 문을 두드린다. 문 열고 나오는 사람은…… 아마 에이브릴이겠지?
“이 개 같은 새끼! 멋대로 나가놓고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천천히 뒤따라가면서 훈훈한 재회를 지켜보면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심한 욕설과 함께 카지미어의 배에 주먹이 꽂히는 게 보였다. 퍽 소리와 함께 그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엥. 이건 설명과 좀 다르잖아? 예상치 못한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나도 당황해서 멈추었다.
“아, 아야야. 에이브릴, 미안해. 나, 너 보고 싶었…….”
“미친놈아! 보고 싶었다는 새끼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어? 어디 가면 간다고 말하라고 했어, 안 했어! 그 몸뚱이 어디서 굴리다 돌아왔는지 당장 말 안 해!”
“으, 으윽. 나 팔츠그라프 저택에…….”
“뭐? 그런 곳을 너 혼자 갔단 말이야? 이기적인 새끼, 그냥 뒤져, 응? 그냥 뒤져 줘. 나는 너 찾아다니느라 사흘째 잠을 못 잤는데!”
얼핏 들으면 여자친구의 사랑 넘치는 타박이었지만, 귀여운 커플 싸움으로만 보기엔 명치 등 급소만 골라 때리는 것 같았다. 쟤가 바로 그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는 에이브릴이구나.
으음, 화내는 모습만 보면 주머니에 넣었다간 옷을 다 찢고 탈출할 것 같은데. 아까 분명 화내면 귀여워서라고 했는데, 실은 말할 틈 없이 처맞아서 변명할 기회가 없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에, 에이브릴. 정말 보고 싶었…….”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편지 한 통이라도 보내지 그랬어! 어떤 사정으로 어디 와 있다고 한 줄 써서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 멍청이, 바보 천치!”
처음엔 어떻게 만나자마자 사람을 저렇게 패나 싶었는데 듣고 있자니 짠하기도 하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저런 폭력과 욕설을 일삼을까. 잘 생각해 보니 카지미어는 늑대 종족이었기 때문에 개새끼가 딱히 욕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저런 여자애가 때리는 것 정돈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테고, 다쳐도 괴물처럼 회복할 테고.
다른 건 몰라도 회복력 하나는 부럽단 말이야. 난 어디 다치면 고치는 데도 골드 뜯기는데. 나중에 큰 병에라도 걸리면 1억 골드씩 내라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와아아! 카지미어다! 어디 갔었어, 이 바보!”
“카지미어 왔다고? 카지미어, 카지미어!”
그때 고아원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 애들이 차례로 그에게 들러붙었다. 에이브릴을 말려 주려나 싶었는데 웬걸, 다리에 붙어 똑같이 때리기 시작했다. 모처럼 쉬라고 집에 데려다줬더니 또 맞고 있네. 카지미어는 어딜 가든 맞는 역할인 걸까?
“다 비켜, 나 목말 태워 달라고 할 거야!”
“잠깐 기다려. 지금 누나한테 맞고 있잖아. 누나가 때릴 때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
“나도, 나도 때릴래!”
“나도 때릴 거야!”
“나도!”
“우리 순서를 기다리자. 자, 일렬로 줄 서 봐!”
그것도 모자라 애들이 카지미어 때리겠다고 줄을 선다. 아직 에이브릴이 패고 있어서 순서가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으음, 내가 대신 설명해 주기로 하고 따라온 건데 더 낄 틈이 없어지잖아.
“이 바보, 멍청이, 얼마나 걱정했는데!”
“울지 마, 에이브릴. 내가 잘못했어. 응? 더 때려도 되니까 제발 울지 마.”
“멍청아,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갑자기 훈훈해진다. 보기 좋은 사랑싸움이다.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카지미어가 배를 처맞고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잠깐만, 이거 가만히 지켜볼 일이 아니잖아?
“저기, 실례합니다.”
“낯선 사람이다!”
“낯선 사람, 낯선 사람!”
“낯선 사람은 따라가면 안 돼! 사탕 줘도 따라가면 안 돼!”
내가 슬쩍 다가서자 카지미어를 때리겠다고 일렬로 서 있던 아이들이 와르르 에이브릴 뒤에 가서 숨었다. 주먹을 스르르 내리며 그녀가 날 바라봤다. 노을을 닮은 눈동자.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걸 보니 진짜 걱정하긴 했나 보다.
“누구……?”
“제 이름은 힐다예요. 카지미어 씨의 동료로 팔츠그라프 백작가에서 일하고 있어요.”
“앗, 앗. 몰라봬서 죄송해요. 카지미어가 폐를 많이 끼쳤죠?”
“죄송해요!”
“폐를 많이 끼쳤지요!”
“미안합니다!”
“바보야, 어른한테는 미안하다고 하는 거 아냐!”
“미안하다고 해서 미안합니다아!”
에이브릴이 급히 사과하자 뒤에 있던 애들도 하나씩 쏙쏙 나와서 말을 따라 했다. 작은 입술을 열심히 움직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가족, 총체적으로 귀엽다. 고아원은 다 쓰러져갈 정도로 작고 낡았지만, 내심 서로를 아끼는 에이브릴과 카지미어, 둘을 따르는 아이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허름한 고아원을 보고 잠깐 안쓰럽게 여겼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아녜요. 사실 카지미어 씨가 경황없이 저희 저택에 스카우트 됐거든요. 오자마자 저택에서 처리할 일이 많아서 미처 연락할 새가 없었을 거예요. 숙소가 부족해 지하방에서 자느라 불편했을 거고요.”
“앗……. 그랬군요.”
“네. 그리고 오늘 카지미어 씨가 큰일을 겪으셔서요. 저택에서 일어난 일은 비밀 유지가 기본이라 말하진 못하겠지만, 푹 쉬었으면 해서 집에 돌려보낸 거랍니다.”
며칠 못 봤다고 울 정도면 살인마한테 목이 졸렸다는 이야기는 안 듣는 게 낫겠지?
“큰일이라니, 무슨 일이야? 아니, 말하진 못한다고 했지. 어디 다쳤어? 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
“괜찮은 거야, 카지미어?”
“카지미어가 아프대!”
“아프지 마, 우리가 잘못했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카지미어의 바지를 잡고 늘어졌다. 바깥 소란에 자다 깨어난 듯 눈을 비비며 나온 아이도 그에게 달라붙었다. 아이들 몇 명이 들러붙든 카지미어의 시선은 에이브릴에게 박혀 떠날 줄을 몰랐다.
자기 아무렇지 않다고, 다친 곳 하나 없다고, 원래 튼튼한 거 알지 않냐고 달래는 데에 여념이 없다. 훈훈하다, 훈훈해. 이제 내 역할은 끝인 거지?
“카지미어, 그럼 난 간다. 도련님께는 대신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쉬어.”
“히, 힐다. 고마워!”
“고마워, 힐다!”
“힐다 고마워!”
“나도 고마워! 또 와!”
“힐다 님, 살펴 가세요!”
카지미어가 인사하자 아이들과 에이브릴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뒤따랐다. 나는 크게 손을 흔들어 주고 뒤돌아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 카지미어 쪽은 해결했겠다, 이제 어떻게 돌아간담? 살인마 다시 만날까 봐 무서운 건 둘째치고 길을 모르잖아. 마차를 빌릴 데도 없어 보이던데. 어떡하지, 기억을 더듬어서라도 찾아가 봐야 하냐.
“하…… 좀 피곤한데.”
오늘 안 그래도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해리슨 만나고 카지미어가 친 사고 수습하고 로지랑 카지미어 개싸움 말리고 살인마랑 상대하고. 막상 나열해 보니 어마어마한 하루다. 그래도 마지막은 따뜻해서 좋았지. 투덕거리긴 해도 보기 좋은 한 쌍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들을 보며 정작 다른 생각을 했다는 거지만.
나는 잔디를 사박사박 밟고 언덕을 내려가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사실 에이브릴과 카지미어가 너무나 단란하고 행복해 보인 나머지 나와 아드리안을 대입해서 상상하고 만 거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금방 관뒀지만, 그와의 미래를 그렸다는 것만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늘 게임에서 나갈 생각만 하던 나인데.
마을로 들어서자 인적 하나 없이 불빛만 아른거리는 길이 내 앞에 펼쳐졌다. 우선 마차 빌릴 곳부터 찾아봐야겠다. 여관에 마차를 타고 온 손님이 있으면 얼마를 내서라도 빌릴 수 있을 텐데. 시간이 많이 늦어서 물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상보다 더 늦어 버렸는데 아드리안, 화나 있진 않을까…….
“……저택까지 걸어가려고? 내일 아침에 도착할 셈이 아니고서야.”
그 순간 화난 아드리안이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도련님?”
“…….”
“도련님 맞아요?”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이젠 헛것을 보는 건가. 졸린 눈을 비비고 다시 봤는데 진짜 아드리안이었다. 길 한가운데 마차를 세워 놓고 어딘지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놀랍도록 아름다워서 그만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밤이 깊어 어두운데도 그 혼자 푸르고 환한 풍경 같다.
“응, 나 맞아. 힐다.”
멍했다. 짜증스럽게 일그러진 고운 눈매, 입꼬리,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백금발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 가슴이 벅차올라서. 그러다 눈을 마주하자마자 가슴이 쿵하고 울리는 게…… 와, 나 어떡하냐. 진짜 아드리안 좋아하나 보다.
“여긴…… 웬일이세요? 이 늦은 시간에.”
정말 가까스로 물었다. 솔직히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늦은 시간에 왜 여기 혼자 있는 거야? 이 마을에선 살인 사건도 종종 일어난다고 들었는데. 내게 미리 말했어야지.”
참, 그렇지. 늦을 줄 몰랐다곤 해도 상사에게 일절 보고 없이 외출한 건 잘못이다. 퍼뜩 정신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카지미어와 같이 수습하느라 늦고 말았어요. 그렇더라도 말씀드리고 자리를 비워야 했는데 제 불찰이어요.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난 그저, 하……. 카지미어는 어디 있어?”
“……카지미어 고아원으로 돌아갔어요. 마을에서 일이 좀 있어서 오늘 하루만 쉬라고 했어요.”
또, 또 카지미어. 카지미어 얘기 없이는 나랑 말을 못 해? 마냥 좋은 기분이 5분을 채 못 간다. 아드리안은 이럴 때조차 카지미어 타령이구나. 밥줄이 끊길 위기에도 경쟁자를 미워하지조차 못하게 되어 버렸으니 이보다 더 처량할 수가 없다.
“카지미어……. 그래, 이 모든 건 그로부터 시작이었지. 힐다, 마차에 먼저 타고 있겠어? 나는 잠깐 그를 만나고 와야겠어.”
말이 이어질수록 뚝뚝 떨어진 목소리가 바닥을 쳤다. 우아하게 신경질적인 그의 태도가 낯설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련님, 혹시 화나셨어요?”
“아니, 내가 네 앞에서 어떻게 화를 내겠어. 전혀 화나지 않았어.”
가끔 봐서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한 인공적인 미소가 덧그려진다. 똑같은 눈웃음, 똑같은 입매, 한 치의 오차 없이 똑같은 각도. 왠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는 빨간불이 켜졌다.
“잠깐만요, 도련님. 저…… 오늘 카지미어는 내버려 두는 게 어떨까요? 큰일 겪기도 했고 지금은 가족이랑 함께 있거든요. 갑자기 찾아가면 많이 당황할 거예요.”
“힐다…… 지금 카지미어를 감싸는 거야? 내 앞에서?”
내게 열어 주려고 잡고 있던 마차 문고리가 우두둑하면서 부서졌다. 세상에, 애먼 문고리를 부서뜨리는 모습이 어쩜 저리 늠름할까. 청초한 얼굴을 하고서 픽픽 쓰러질 때와는 또 완전히 다른 면모가 내 가슴을 쿵쿵 뛰게 했다.
옛날이라면 성질 더럽다고 욕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온통 매력적이기만 하다. 이게 바로 콩깍지구나. 투명한 콩깍지가 내 눈 전체를 덮고 팔랑거리고 있었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서로 이름 부르고 친근하게 굴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갑자기 짜증이 울컥 솟아올랐다. 쟤는 왜 저렇게 잘생기고 성스럽고 귀엽기까지 하지. 눈이 나한테만 달린 것도 아닐 텐데. 저 빛나는 얼굴로 밖을 나돌아다니면 죄다 홀리고 다닐 거 아냐. 저러다 어디서 프러포즈라도 받고 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이제 카지미어를 살려 둬야 할 이유도 없는 거겠지.”
“예? 카지미어를 죽인다고요?”
요즘 핫하게 떠오르는 오른팔을 갑자기 죽인다고? 정신을 번쩍 차리며 묻자 아드리안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호수를 얇게 덧씌운 듯 투명한 눈이었다.
“나로선 당연한 일이야. 그가 온 뒤로, 네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으니까.”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하더니 턱을 당겨 물었다. 뜻 모를 분노가 칼로 베어 내듯 스쳐 지나갔다. 지금 자기 얘기 하는 거지?
“지금 도련님 말씀하시는 거죠? 도련님께서 카지미어를 생각하느라,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나 말고 너. 힐다 널 말하는 거야.”
“예? 아니, 그건 도련님이시죠. 제가 뭘.”
“모르는 척하지 마. 너는…… 예전부터 쭉 그랬어. 비단 카지미어뿐만이 아냐.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우선했지. 은밀히 만나러 다니는 것도 모자라 사방에 호감이나 뿌려 대면서, 내게는 고작 얼마 전에야 진심으로 웃어 줬었지. 우는 아이 달래듯 가끔 보여 주는 그 얼굴에 나는…… 하아.”
“…….”
“그래도 나는 오로지 네가 웃는 게 좋아서, 그것만을 생각해 왔는데.”
화를 겨우 억누르며 쏟아 내는 것 같은데 어째 이해가 하나도 안 간다. 내내 카지미어 타령만 하던 게 누군데, 누가 누구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누가 통역 좀 해 달라는 생각만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마지막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만요. 저도 도련님 웃는 거 좋아해요. 아마 제가 훨씬 더할걸요?”
“……난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힐다. 어쭙잖게 견줄 생각 하지 마.”
“얼마나 오래전요? 모르긴 몰라도 제가 더 오래됐을걸요? 저는…… 그렇지, 이불 빨래 널 때! 그때부터였거든요?”
“우습기도 하지. 난 마구간 일이 있기 전부터였어.”
“…….”
“거봐. 내 말이 맞잖아.”
내가 입을 다물자 아드리안이 의기양양해졌다. 분하다, 내 패를 먼저 까는 게 아니었는데.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넌……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우선하지. 나는…… 항상 네가 먼저였는데.”
“도대체…… 제가 언제요? 언제 도련님보다 다른 걸 우선했다고.”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늘 아드리안이 먼저였던 것 같은데, 억울하기 짝이 없다. 내가 얼이 빠진 채 묻자 아드리안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살의 넘치는 미소였건만 내 얼굴은 이상하게 달아오르기만 했다.
“발뺌할 셈이야? 힐다, 난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댈 수도 있는데. 네가 호감을 뿌리고 다닌 상대들 말이야.”
“그래서요? 도련님이 그 사람들보다 뒷전이라고 누가 그래요?”
“…….”
“제 마음속엔 도련님밖에 없는데.”
어조가 차분한 탓인지 아드리안은 처음엔 내 말을 듣고도 냉랭하다가 차츰 변해 갔다. 새벽에서 한낮으로, 노을로, 밤으로 물들어 가듯 느리지만 분명한 경계로.
“힐다, 혹시 그건…….”
“네, 전 처음부터 끝까지 도련님밖에 없었어요.”
“…….”
“하지만 도련님께선 늘 카지미어만 찾으셨잖아요. 제 모든 일을 넘겨주고 쫓아내려고도 하셨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도련님이 왜 뒷전이냐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만 보면 맨날 카지미어, 카지미어 노래를 불러놓고…….”
“…….”
“옆에 있고 싶었던 건 저뿐이었던 거겠죠, 아마도.”
말하다 보니 꽁해져서 투덜거리는 어조가 되고 말았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멍멍이만 찾던 사람이 누군데. 내 앞에서 카지미어 타령하던 장면을 하나씩 되감다 보니 참을 수 없이 섭섭해졌다. 아직 반쯤 얼이 빠져 있는 아드리안을 스치듯 보고 마차에 올라섰다. 의자에 앉고 나서야 아드리안이 급하게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왔다.
힘 조절이 안 되는 건지 문고리에 이어 문까지 박살 낼 기세다. 한심한 건, 방금까지 부루퉁하게 있었으면서 또 그 늠름함에 가슴이 뛰어 버렸다는 거다. 나중엔 사람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쩜 목을 그렇게 시원하게 꺾어 버릴 수 있냐고 손뼉도 칠 수 있을 것 같다.
“힐다, 나…… 뿐이야? 정말?”
“왜 따라오세요? 카지미어 보러 가신다면서요.”
“대답해 줘, 제발.”
그가 내 손을 잡더니 애타는 눈빛을 쏟아 냈다. 어쩐지 손끝이 떨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했던 말을 반복해 주었다.
“네, 맞아요. 도련님뿐이라고 했어요.”
“…….”
“도련님? 들으신 거 맞죠? 저! 도련님밖에! 없어요! 도련님! 뿐이라고요!”
못 들었나? 대답이 없어서 몇 번 반복해 줬더니 그가 갑자기 다리가 풀린 듯 내 앞에 주저앉았다. 두 무릎 사이에 이마를 묻기까지 하는 걸 보고 내가 깜짝 놀랐다. 기세가 싹 바뀐 것도 모자라, 느닷없이.
“도련님! 의자 놔두고 왜 바닥에 꿇어앉아요? 혹시 어지러우세요?”
“네가 말할 때마다 심장이…… 아파서.”
그가 갑자기 손으로 가슴 부근을 움켜잡았다.
“숨이 안 쉬어질 지경이야. 힐다 너, 날 죽일 셈이지…….”
세상에, 심장 아프대. 그때 봤던 부정맥인가? 역시 휴버트도 모르던 숨겨진 지병이 있었던 건가?
“도련님. 저 봐요. 숨 안 쉬어지세요? 제물 구해 올까요?”
“아니, 아냐……. 그냥 너무 기뻐서 그래. 기뻐서, 너무 기뻐서……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아서.”
놀라서 일어나려다가 기뻐서 그런다는 말에 멈칫했다. 크게 안도하며 내쉬는 숨이 정강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무릎에 닿아 있는 그가 뒤늦게 의식돼 발가락이 한껏 오므라들었다. 내 마음을 말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막상 기쁘다는 말을 듣자 이상한 긴장감으로 허리가 뻣뻣해졌다. 눈앞이 살짝 어지러워지는 건 졸음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힐다, 들어줘. 나는 그저…… 언제부턴가 네가 카지미어의 뒤만 따라다니니까 견딜 수 없어졌을 뿐이야.”
“…….”
“카지미어는 애초에 네 일을 대신할 역할이었을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어. 네 일이 많아질수록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짧아지는 게 싫었거든. 그런데 어째서인지 네가 그의 뒤를 쫓아다니고,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지내기 시작해서.”
친근했다니, 그런 적이 있었나? 카지미어와 있을 때 대부분은 쫓아낼 거리 없는지, 텃세 부릴 거리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던 것 같은데.
“그러다 깨달았지. 그는 나와 달리 저주를 받지 않은 완전한 존재니까, 나처럼 제물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건강한 육체를 가진 수컷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걸.”
“건강한 육체를 가진 수컷…… 요? 도련님, 저는 카지미어를 그런 눈으로 본 적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그럼 팔은 왜 그렇게 만져 댔던 거야? 근육이 근사하다고도 했잖아.”
“그야 자꾸 제 일을 뺏어 가니까 화나서 때릴 구실을 찾은 거죠. 팔이 널따래서 때리기 좋았거든요.”
“…….”
“엄청 세게 팼는데 못 보셨구나.”
의심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갈수록 풀리다가 내 말이 끝나자 머리 위에 느낌표가 띵하고 떠올랐다. 퀘스트 NPC 같아서 귀여웠다.
그런데 이상하다. 카지미어가 완전하다는 말은 아드리안은 불완전하기라도 하단 소린가? 아드리안이 저주를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 때문에 불필요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건강하든 병약하든 좋아했을 텐데. 사실 창백해져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가슴속 어딘가가 불끈 달아오르기도 했는데. 이건 아드리안이 알면 기겁하며 도망갈 수 있으니 숨기도록 하자.
“그래서 언짢으셨던 거예요? 제가 카지미어랑 친해 보여서.”
“어땠을 것 같아?”
“못해도 저만큼은 섭섭하셨을 것 같아요.”
“섭섭하다니, 표현이 귀엽기도 하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서 그가 날 올려다봤다. 사라락 내려앉은 머리카락이 무릎을 은근히 간지럽혔다. 기억 어디쯤을 떠올렸는지 형형한 기운이 흘러나오는데,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내가 옛날에 어떻게 아드리안을 무서워했는지 모를 정도로 예뻐 보여서.
“그러니까 둘 다 오해하고 있었던 거네요. 저는 도련님께 제가 필요 없어진 줄 알고……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그런 거 아냐. 네가 없어도 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속상하게 했다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부디 용서해 주겠어?”
전부 오해였네. 김이 팍 새서 허탈해하는 나를 향해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말하는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그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아드리안이 까마득한 상사라는 걸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그림이었다. 나는 급하게 일어나며 손을 파닥거렸다.
“도련님, 어서 일어나세요. 누가 지나가다 마차 안을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내가 이렇게 간청할게, 힐다.”
“용서는요. 오해하긴 저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어서 일어나세요, 어서요.”
내가 소매가 펄럭거릴 정도로 잡고 흔들자 그제야 아드리안이 못 이기는 척 일어났다. 얘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구는 것 좀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 나도 둘이서만 이야기 나누고 싶었던 참이야. 저택으로 가자.”
“예? 이야기는 가면서 마저 해도 괜찮아요.”
“쉿, 네 목소리를 마부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목소리를 잔뜩 낮춘 속삭임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입술이 귓불을 살짝 스치며 저릿한 온기를 남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키며 손으로 귀를 가렸다. 심장박동이 귀에 옮겨붙은 듯 요란하게 쿵쿵거렸다.
그런 나를 보고 아드리안은 짧은 미소를 남기고 마차 창문을 열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드리안이 보조 걸쇠를 잠그고 내 옆에 앉아 의자를 톡톡 두드렸다. 얼른 앉으라는 권유였다. 나는 의자에 앉고서도 한참 귀를 가리고 있다가 그가 끌어다가 잡는 통에 강제로 손을 내려야 했다.
“제 걱정할 시간에 도련님이나 자중하는 게 어떠세요? 보니까 사방을 다 홀리고 다니시던데.”
그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교차하듯 얽어 넣어 손바닥을 빈틈없이 밀착시키는 걸 좋아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꽉 잡힌 상태에서 나는 손끝만 겨우 꼼지락댈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옆에 있었으나 정면에서 보는 것처럼 몸을 완전히 내 쪽으로 틀고 있었다. 순진한 눈망울을 보니 ‘내가 무얼.’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나는 금세 샐쭉해졌다.
“모르는 척하지 마요. 생일 때는 물론이고 마을에 갈 때마다 매번 사람들의 관심은 죄다 끌어모았으면서.”
“그랬어? 난 너만 보고 있어서 몰랐어.”
아드리안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일 파티에서 아드리안을 살펴보려 할 때마다 그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우연히 계속 마주친다고 생각했는데 줄곧 보고 있던 거였어……?
“힐다. 내가 누군가를 홀릴 일이 있다면, 오로지 네 시선을 끌기 위해서일 거야. 어쩌면 더 타락해 버릴 수도 있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
“물론 그러길 바라지 않겠지? 그러니 너무 오래, 다른 인간에게 관심 두지 말아 줘.”
말은 잘해, 말은 잘해! 얄미워 죽겠어! 아드리안이 뭐라 속살거리든 손톱을 세워 꾹 눌러 버렸다. 아프다고 엄살을 피워 대서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 맘 같아선 더 꾹꾹 눌러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렇게 요사스럽게 웃는 건 어디서 배워서!
내가 손을 빼려고 파닥거렸으나 아드리안은 팔을 길게 뻗으면서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풀면 어디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마음 졸이는 것처럼.
저택으로 가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내 그런 손장난만 쳤다. 손을 빼려고 하면 꽉 붙드는 게 재밌어서 공연히 반복하는 건데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제 슬슬 도착할 것 같네. 힐다, 더 이야기 나눠도 괜찮겠어? 난 내일이라도 상관없어.”
돌연 손을 단단히 붙들며 그가 창밖을 살폈다. 이미 까마득한 밤과 안개가 자욱하게 껴있는데도 아드리안 눈에는 저택이 보이는 걸까.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밖을 기웃거리고 있자 서늘한 촉감이 이마를 훑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
마을에서 흉흉하게 기다리고 있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여유를 찾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아녜요. 하던 얘기는 마저 끝내야죠.”
머리카락을 모아 귀 뒤로 넘겨주다 내가 고개를 젓는 통에 다시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래, 오래 붙잡고 있진 않을게.”
벌써 목소리에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자 아드리안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려갔고,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어색하게 받으며 뒤따랐다. 졸려. 어두운 길을 잘도 찾아서 앞서가는 아드리안을 따라 내가 따가운 눈을 깜박였다. 졸리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인지, 그를 놓고 싶지 않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적당하겠어. 지금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정원에 이런 온실이 있었어요? 한 번도 못 봤는데.”
달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유리온실은 벽면 전체가 덩굴로 덮여 있었다. 커다랬지만, 정원 속에 완벽한 보호색을 띠고 묻혀 있는 만큼 못 보고 지나갈 법했다.
“으응, 보통 들를 일 없는 곳이니까……. 그런데 좀 어둡네. 불을 밝히는 게 좋겠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온실 내에 수십 개의 등불이 일제히 떠올랐다. 와. 나는 그를 따라 온실에 들어서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빛무리에 단숨에 시선이 뺏기고 말았다.
날아다니는 모양이 활달해서 처음엔 반딧불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닌 것 같았다. 몇몇 등불은 서로 부딪혀 반대로 날아가기도 하고, 연못에 내려앉았다가 물을 파드득 털어 내며 다시 날아오르기도 했다. 물살처럼 출렁거리는 빛무리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힐다, 이리 와.”
밤, 떠다니는 등불, 물 흔들리는 소리.
마법 같은 환상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나를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이끌었다. 한창 자라고 있는 모종, 비뚤게 자라나 수형을 교정받는 식물, 작은 연못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확실히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몸이 훅 들렸다. 악 소리를 내기 전에 나는 이미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입구 주변에서 나타난 등불들이 주인을 따르듯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반짝이며 일렁이는 빛의 자취를 눈으로 멍하니 좇았다.
“너무 예뻐요. 이런 건 처음 봐요.”
포르르 주변을 맴도는 등불에 조심스레 손을 뻗자 깃털처럼 손끝에 내려앉는다. 우와. 와. 참새처럼 가만히 내려앉아서 반짝거리는 등불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네가 더 예뻐.”
아드리안이 훅하고 바람을 불자 빛무리는 나비로 변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빛 가루를 뿌리며 팔랑거리는 나비를 정신없이 바라보다, 손으로 창틀을 짚는 기척에 도로 그를 바라봤다. 환상 같은 풍경 속에 기이한 열기를 품은 눈동자만이 선명했다. 모든 게 꿈 같았지만, 실은 가장 비현실적인 건 아드리안 그 자체였다.
쿵쿵 뛰는 심장을 억누르려다 실패한 내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어쩌죠, 저 생각보다 도련님을 훨씬 더 좋아했나 봐요. 물론! 순수하게 아끼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요, 늘 보고 싶고 좋아해요.”
사람을 상대로 했을 때 좋아한다는 말은 악마들에게 희한한 의미라고 하니, 말끝에 급하게 덧붙였다.
“정말이야? 내가 보고 싶었어?”
“네, 보고 싶었어요. 그것도 많이……. 다른 사람이랑 있어도 매 순간 도련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할 만큼요.”
이제 와서 숨길 게 뭐가 있겠나 싶어 줄줄 읊었더니 창틀을 쥔 손에 힘이 콱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러다 창틀도 부서지겠다 생각했는데 일찌감치 깊게 일그러져 있었다. 창틀을 부서뜨리지 않았다니! 로지는 거절 한마디 들으면 총도 쏘던데 아드리안은 그에 비해서 아주 신사적인 악마였다.
“저, 도련님. 혹시 이 마음이 부담스러우다면…….”
“……부담? 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기나긴 한숨을 꼬리처럼 흘리며 그가 내게 천천히 기울었다. 헉, 다가온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에 뒤로 살짝 빠지자 그의 팔이 능숙하게 등 뒤를 받혔다. 유일하게 드러난 목덜미에 코끝을 묻고 비벼 온다. 순식간에 등이 뻣뻣해지는데 밀쳐 낼 수 없었다.
“너는 내가 없으면 아쉽다고 했지. 나는, 힐다…… 나는, 네가 없는 시간 동안 완전히 죽어 버리고 말아.”
천장 높이 올라가 있던 등불이 포르르 내려왔다. 어둡고 차가운 밤, 우리 주변으로만 빛이 들어왔다.
“네가 없는 세상이 어떤 줄이나 알까, 힐다. 빛없이 컴컴한 그 세상이 얼마나 춥고 절망적인지.”
“…….”
“언제나 네가 곁에 있는 시간 속에서 살고 싶었어. 어느 날은 시간을 돌려서라도 널 보러 가고 싶었지. 탐해선 안 되는 권능마저 넘보게 하는 이 허기짐을, 고작 그리움이라고 할 순 없을 거야. 이런 내게 어떻게 네 마음이 부담스러울 수 있겠어?”
낮은 고해를 흘려 내며 그가 목덜미 깊숙이 입술을 묻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숨결에 온 솜털이 일어났다. 낯선 감각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며 풀어 주었다.
“사랑해. 네가 없는 세상은 꿈꿀 수 없을 만큼.”
숨이 저절로 멈춘다. 가슴이 떨려서 말이 안 나왔다. 아드리안도 이렇게 허우적대고 있을까. 떨리고 두근대서…….
유난히 상기된 숨결이 어깨 위로 쏟아졌다. 감정이 격앙되는 게 느껴져서 나는 급하게 그의 등을 쓸었다. 심장이 놀라울 정도로 크게 쿵쿵대며 손바닥에 깊게 스며들었다. 아드리안도 떨고 있구나. 가슴이 욱신거릴 만큼 좋았다. 이런 두근거림을 그와 공유한다는 사실이.
“난 네가 바라는 뭐든 되어 줄 수 있어. 말 그대로 무엇이든. 그러니 다른 사람은 필요 없잖아. 우리 둘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다른 사람한테 눈길 같은 거, 주지 마.”
“도련님.”
“네 눈엔 나만 보였으면 좋겠어. 나 말곤 아무도 너를 못 봤으면 좋겠어. 다 없애 버리고 싶어. 네 시선이 닿은 것들. 네 눈앞에 있는 것들, 전부…….”
“저도 도련님만 있으면 충분해요.”
이번엔 그의 숨이 멎었다. 나는 조심히 등을 쓸어올려 목덜미 위에 손을 얹었다. 뜨끈하다.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던 분노와 살기는 이미 잠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덜미를 토닥거려주자 조금 더 진정되어 갔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침묵을 채웠다.
“그러니까 없으면 죽는다느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다시 만나야 하는데 죽긴 왜 죽어요.”
그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결이 고운 머리카락이 사라락 흩날리며 턱 밑을 간질였다.
“제가 다른 사람과 있는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저한테 특별한 건 도련님 한 사람뿐인걸요.”
“카지미어…….”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던 손이 우뚝 멈췄다. 역린이 긁힌 노룡처럼 느릿하게 고개가 들렸다. 차갑게 굳은 눈 위로 파르스름한 불꽃이 튀고 있었다. 흉기에 가까운 살의……. 나만의 질투심에 불타오르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동안 카지미어는 내내 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단 말이지.
우리끼리 얘기할 걸 괜히 카지미어만 괴롭혔다는 말도 쏙 들어갔다. 이 말까지 하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겠네.
“힐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줄래? 네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고 싶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분위기가 심상찮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가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내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 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게 무슨……. 도련님은 제 상전에 높은 귀족이신데 어떻게 그래요?”
“이름으로 부르는 것쯤은 쉬운 일이잖아. 내게도 말 놓고 편하게 대해 줘.”
이건 무슨 얼토당토않은……. 물론 속으로야 이름을 수천 번 되뇌고 심지어 악마 새끼, 주인 새끼라고 욕도 여러 번 했다지만, 이걸 아드리안 앞에서 입 밖으로 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살살 속삭이는 목소리에 은근슬쩍 넘어갈 뻔했지만, 나는 억지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건 안 돼요. 일개 하인이 도련님 성함을 부르다뇨. 누가 듣거나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저는 크게 혼날 테고 도련님께도 누가 될 거예요.”
“고작 이름을 불러서 실추될 명예 따위 필요 없어. 난 그저 네 목소리로 이름을 듣고 싶을 뿐이야. 그때마다 축복받는 기분일 테니까, 어서…….”
“안 돼요. 말이 되는 부탁이어야 들어드리죠.”
「아드리안이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스트레스성 두통’이 발동합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스트레스성 어지러움’이 발동합니다.」
「아드리안이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잠깐만요! 알았어요, 알았어! 아드리안, 아드리안! 됐죠?”
「아드리안의 지병 ‘스트레스성 두통’이 사라집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스트레스성 어지러움’이 사라집니다.」
“다시 불러 주겠어? 내 이름.”
“……아, 아드리안요.”
이 악마가 이제 몸으로 협박하네. 요즘에야 비교적 건강해진 건 알지만, 어디까지 아플 수 있는지 쭉 봐온 나로선 조금만 아파해도 과민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 몰라. 부르라는데 불러버리지 뭐. 자포자기한 심정과 달리 개미만 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자 그가 다시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또 불러 줘. 더 불러 줘.”
“아드리안, 아드리안, 아드리안. 이제 됐죠?”
“한 번만 더.”
“하, 정말……. 대신 둘이서 있을 때만이에요. 다른 사람 있을 때는 꼭꼭 도련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한 번 더 안 불렀어.”
“……아드리안.”
“어쩌지, 나 이제 밤새도록 듣고 싶어졌는데.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
비척비척 나를 다시 품에 안고 그가 나직이 말했다. 어휴, 이러다 습관 되겠네. 그런데 습관처럼 안겨 오는 그가 쬐끔 귀엽긴 했다.
“거짓말쟁이. 오래 붙잡고 있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악마의 약속을 믿는 거야? 순진한 힐다.”
“……이제 좀 놔주세요. 저 더워요.”
“사랑은 원래 더운가 보지.”
“…….”
“봐, 볼이 더 뜨거워졌잖아.”
가만히 볼을 맞붙이는 그의 온도가 훨씬 더 뜨거웠다. 체온이 밀려와 순식간에 더 더워졌다. 실감 안 날 만큼 그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적나라하게.
“내가 노력할게, 힐다.”
“…….”
“열심히 노력할게.”
뭘 노력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 때문에 필사적인 건 그리 싫지 않아서 가만히 웃어 버리고 말았다. 허리를 감싼 팔은 점점 단단해지는데 내게 닿는 모든 건 조심스럽고 연약하다.
“보내기 싫다. 지금 헤어지면 내일 아침에야 보는 거잖아.”
기나긴 한숨이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이 말을 여러 번 들었던 거 보면 아드리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홀로 애정 공세를 펼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좋나. 괜히 쑥스러워져서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몸을 덮는 체온이 내려갈 줄을 몰랐다. 많이 더운가.
“아침 해 뜨면 곧장 갈게요. 주무시고 일어나면 금방일 거예요.”
“눈 뜨자마자 네가 보였으면 좋겠는걸. 나의 힐다.”
“저기, 아드리안…… 도련님. 방금 그 말 좀 이상하…… 게 들리지 않아요?”
“이상하다니,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아…… 네. 제가 착각했나 봐요.”
“내 옆방으로 옮길 생각은 아직 없는 거야? 물론 네가 숙소에서 계속 지내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하인의 숙소 맵이 닫혔습니다.」
두둥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갑자기 맵이 닫혔다. 숙소에서 지내겠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순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숙소 닫으면 나 어디서 자라고? 내가 원망 어린 눈초리로 쏘아보자 아드리안은 순진한 눈을 빛내며 “응? 응?” 하고 되물었다. 잠깐 뿔났던 마음이 그 얼굴을 보자 또다시 연약하게 녹고 말았다. 나 언제부터 아드리안한테 이렇게 약해진 거지?
“알겠어요. 방 옮기는 건 다시 생각해 볼게요.”
「맵 개방! 하인의 숙소로 갈 수 있습니다.」
“잘 생각했어. 옆방으로 옮겨도 네가 곤란해질 일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댁 때문에 제일 곤란해질 것 같은데요. 내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보는데도 아드리안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실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다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이것까지 말하면 사방이 뒤집힐지도 몰라.
“그렇게…… 좋으세요?”
“응, 좋아. 정말 좋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으로 보였다. 온몸으로 표현하는 애정이 내 가슴을 짜르르하게 울릴 정도인걸. 입가가 자꾸 올라가려고 해서 곤란했다. 왜, 대체 왜 이렇게까지 좋아진 건데.
처음엔 분명 작디작은 마음이었다. 평범하게 물밑으로 굴러다니던 것에 하나씩 돌이 얹어져서 바위가 되었다. 흘러온 그물에 감겨 흙바닥을 구르고, 물을 흠뻑 머금고 점점 커지다 어느새 바다가 되어 버렸다. 그저 얕은 개울인 줄 알았지, 발을 내디디고 보니 까마득한 심해였다. 벗어나기엔 이미 늦은 거겠지.
“뭐, 그래도 저만큼은 아닐걸요? 겨우 참고 있는 거지, 전 소리 지르면서 뛰어다니고 싶을 지경이라고요.”
“자꾸 이렇게 심장 아프게 할 거야? 나는 제물이 도망쳐도 관대하게 봐줄 정도인걸.”
아니, 그렇게까지? 이건 예상 못 했다. 제물은 놓치면…… 좀 아까울 것 같은데.
“그럼 전, 전…….”
“생각나지 않으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돼. 이미 한번 지기도 했잖아?”
“에잇, 방해하지 마시고요. 전…… 그래요, 이 메이드복을 누가 훔쳐 가도 화가 안 날 정도예요.”
“누가 네 걸 훔쳐 간다고?”
“마, 말이 그렇단 거잖아요. 화내지 마세요.”
내가 만류하자 살벌하게 변해 가던 눈빛이 단번에 화사해졌다. 손바닥 뒤집듯 확확 바뀌는 모습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있죠, 우리는 왜 맨날 다툴까요?”
“그러게, 하지만 그 순간에도 널 사랑하고 있는걸.”
“어, 저는 다툴 땐 좀 아니던데.”
금세 딱딱하게 굳는 아드리안을 보고 내가 킥킥 웃었다. 이내 픽 미소 지으며 이마를 맞대오는 그와 한참 마음을 나누었다. 보이지 않는 피부 안쪽이 간질거리는 느낌. 따뜻하게 날 안아 주는 손길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사실 이따금 현실적인 문제가 머릿속에 퐁퐁 떠올랐으나 지금은 이 설렘을 즐기기로 했다. 게다가 아드리안이 옆에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 그와 마음이 같다고 생각하자 세상 두려울 게 없어졌다.
조만간 데이트 신청도 해야지, 아주 폼 나게!
세상 요란한 고백을 주고받은 날 밤, 처음으로 전설 베개를 베고 잤다. 역시 전설급 베개라 그런지 수면도 전설급이었다. 전설적인 수면, 전설적인 꿈, 전설적인 혈액순환, 전설적인 기상…… 모든 게 전설적이었다.
나는 전설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전설적으로 이불을 개고 베개를 올려놓은 다음 전설적으로 몸을 씻었다. 전설 아이템을 두른 채 ‘특별한 성장의 기운’ 버프를 받으니 숨만 쉬어도 하단 경험치바에 ‘+3’, ‘+9’, ‘+18’ 등의 다양한 숫자가 연속으로 뜨고 있었다. 문도 전설적으로 열고 나왔더니 대단한 효과음과 함께 하얀 글씨가 떠올랐다.
「레벨 31로 올랐습니다.」
「칭호가 ‘악마의 첫 연인’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오, 레벨이 벌써 31이라니. 역시 전설적인 레벨업이다. 조금 있으면 새 스킬 하나 얻을 수 있겠군!
함께 변경된 칭호는 어딘지 낯간지러워졌는데……. 이러려고 칭호 변경 대기로 떠 있었던 거구나. 난 또, 하찮은 일꾼으로 회귀하는 줄 알았지. 시스템에서나마 축하받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만.
참, 오늘은 아드리안에게 가기 전에 만나 봐야 할 사람이 있다. 에밀리! 에밀리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아침이니까 부엌에 먼저 가 있으려나?
“힐다!”
위치라도 대강 파악하기 위해 호감 대상을 누르려는데 마침 에밀리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게 손을 흔들자 정원 멀리 서 있던 에밀리가 다다다 뛰어왔다.
“에밀리, 잘됐다. 안 그래도 너 보러 가려고 했는데. 널 위한 선물을…….”
“힐다! 나, 나…… 정말 미안해.”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에밀리가 내 손을 잡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몰라. 실은 섭섭하다고 하고 나서 곧장 후회했어. 줄곧 사과하고 싶었는데 네가 많이 화났을까 봐 겁나서 눈치만 보고 있었어. 미안해, 힐다. 정말 미안해……. 심한 말로 상처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깊은 눈가에 차오른 눈물이 끝내 볼 위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엥? 물론 갑자기 섭섭해하면서 멀어질 때야 당황스러웠지만, 이렇게까지 미안할 일은 아니었는데. 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자기를 그만큼 친한 사이로 생각하고 있지 않더라, 그래서 섭섭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과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냐, 에밀리. 나 상처 안 받았어. 나야말로 미안해. 응? 그러니까 울지 마.”
“응. 흐윽, 응……. 나는 우리가 이대로 멀어지는 줄 알고…….”
“그건 정말 아냐. 내가 조금 더 빨리 말 걸었어야 했는데 미안해. 요즘 새로 온 후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
에밀리의 가녀린 어깨를 토닥거려주다가 손을 잡고 나무 벤치로 이끌었다. 선선한 그늘 자리엔 그녀를 앉혀 두고 햇빛이 쨍하게 들어오는 자리엔 내가 앉았다. 내 대답에 크게 안심했는지 다행히 훌쩍임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자, 봐. 에밀리. 너한테 화났으면 이런 선물을 준비했겠어? 나는 오히려 네 마음을 풀어 줄 만한 게 뭘까 고민하고 있었는걸.”
“선물이라니?”
가방에서 꺼낸 것을 들이밀자 에밀리가 주춤주춤 받아 들었다. 전설 메이드복과 전설 신발. 에밀리가 지금 착용하고 있는 회색빛 일반 등급과는 급이 다른 장비들이다. 포장을 뜯다가 장비의 정체를 깨달은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 돼…… 이게 다 뭐야?”
“들었잖아. 너 줄 선물.”
“그게 아니라…… 이렇게 비싼 걸 나한테 줘도 돼? 이거 우리 일급으로 치면 1년 넘게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잖아.”
“물론이지! 꼭 이번 일 때문만이 아니라 그동안 고마운 게 많아서 주고 싶었던 거야. 그러니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받아. 네가 받아도 되냐는 말은 하지 말고. 너라서 주는 거니까.”
“내가 뭘 해 줬다고 이런 걸…….”
“모든 걸 다 해 줬지, 말 그대로.”
“하지만…….”
“나 참, 부담 갖지 말고 받으라는 데도.”
여러 번 품에 밀어 넣었는데도 선물을 어정쩡하게 들고만 있던 에밀리가 놀란 토끼 눈으로 날 바라봤다. 게임에 끌려들어 온 이후 에밀리는 알게 모르게 내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작게는 저택 업무나 사용인들 소개부터 크게는 아드리안에 관한 일까지. 생전 처음 해 보는 일이 많아 우물쭈물할 때 가장 먼저 도와주던 손길을 난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 정말…… 소중히 간직할게.”
“소중히 간직하는 건 좋은데 꼭 입고 다녀야 해? 응? 이거 한번 입으면 다시 벗기 힘들 정도거든. 나중엔 잠옷으로 입고 자고 싶을지도 모른다, 너.”
“뭐어? 설마.”
웃는다, 웃어. 이제야 울음을 완전히 그치고 미소 짓는 에밀리를 보고 나도 바보같이 웃고 말았다.
“저, 에밀리. 얼마 전에 얘기한 거 말인데.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