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33)

7-3. 악마 앞에서 질투를 논하느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게 낫다.

“……기분 좋아 보이네, 힐다.”

“네?”

“저녁 시간 내내 웃고 있잖아.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마찬가지로 내내 조용하던 아드리안이 무거운 입을 뗐다. 음식이 거의 다 남은 접시를 서빙 카트에 하나씩 옮기다 말고 고개를 들어 보니, 얼음처럼 서늘해진 눈이 보였다. 의식하지 못한 채 슬며시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얼른 내렸다.

카지미어에게서 들은 아드리안의 옛 모습을 상상하는 데 열중하다가 그만.

“오늘 종일 뭘 했길래 그리 즐거워해?”

“카지미어랑 세탁실에 있었어요. 일을 가르쳐 줘야 해서.”

“……그렇구나. 단둘이 세탁실에 있었단 말이지.”

처음엔 카지미어 꼬투리 잡으려고 혈안이 됐다가 나중엔 아드리안 얘기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걸 당사자 앞에선 말할 순 없었으므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숨을 고르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내 무언갈 참아 낸 얼굴로 날 바라봤다.

“굳이 함께 있을 필요는 없었는데.”

「세탁실(저택 내) 맵이 닫혔습니다.」

“불필요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화를 억누르듯 억지로 가다듬어진 목소리였다. 굳이 옆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 설마 아드리안, 지금 내가 텃세 부릴까 봐, 지 오랜 부하라고 걱정하는 거야? 사람을 뭐로 보고!

사실 정확히 맞아떨어졌지만, 그래도 막상 꼬집히니 더 오기가 들었다. 거기다 대답도 듣지 않고 맵을 닫아 버리는 건 내심 확신하고 있다는 거잖아!

“아뇨, 전혀 불필요하지 않았어요. 저희 무척 알찬 시간을 보냈거든요!”

“……흐음. 카지미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네.”

아드리안의 눈꺼풀이 잔잔하게 내려갔다. 딱히 부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드리안 과거 이야기 들을 땐 묘하게 신나긴 했으니까.

“그래서…… 카지미어는 쓸 만해? 네 일을 맡길 만큼 쓸 만하냐고 묻는 거야, 난.”

이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물어볼 줄 알았다고!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닌 건데. 꼬투리 하나라도 잡으면 풍선처럼 부풀려 일러바치고 내쫓으려고 했는데, 걔가 쓸데없이 유능해서 망해 버리고 말았다.

그럼 진짜 이대로 쫓겨나야 해? 굴러온 돌에 치인 박힌 돌 되는 거냐고.

얼마나 손에 힘을 줬는지 카트로 옮기려던 찻잔 손잡이를 부서뜨리고 말았다. 뽀각 소리가 나며 깔끔하게 떨어짐과 동시에 100골드 손해 배상 청구 메시지가 떴지만,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신감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일을 맡길 만큼 쓸 만하냐니, 내 대체재 정도는 얼마든지 있다고 대놓고 들은 것 같았다. 어떻게 아드리안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름대로 큰 결심하고 옆에 있었던 건데, 그저 옛 부하를 부르면 끝날 일이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부서진 손잡이가 보이지 않도록 돌려놓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네. 솔직히 흠잡을 데 없이 쓸 만했어요. 하지만 꼭 제 일을 맡겨야 해요? 저도 같이하면 안 돼요?”

“일을 같이…… 한다고? 같이 다니겠다고 말하는 거야? 카지미어와?”

“네. 안 되나요? 그것도 싫으세요?”

쫓겨난 자리를 도로 달라고는 자존심상 말 못 하겠으니 옆에 끼기라도 하겠다는 뜻이었다. 자꾸만 좁아지려는 마음을 애써 태평양처럼 넓히고 한 제안인데, 아드리안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좋았어?”

무슨 질문이 저래? 내 자리 다 뺏기게 생겼는데 좋을 게 뭐가 있겠냐고.

“네! 진짜 너무 좋아요. 궂은일 힘든 일 대신해 준다는데 누가 싫어하겠어요? 도련님도 좋겠어요. 도련님을 위해서 한 몸 바치겠다는 부하가 이렇게나 많아서.”

“……힐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 도련님께 화를 내요!”

섭섭해, 너 이 새끼. 나 필요 없어? 진짜 나 필요 없냐고!

요새 내 앞에서 내내 카지미어 얘기만 하고 말이지. 머리 열면 카지미어만 득실거리고 있겠어, 아주. 걔가 그렇게 좋아? 옛 부하가 온 게 그렇게 좋냐고!

그래, 솔직히 같은 악마이니만큼 말이 더 잘 통하긴 하겠지. 옛날부터 옆에 있었다니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할 테니 얼마나 편하겠어. 하지만 원래 옆에 있던 사람도 생각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나뿐이라고 해서 내심 얼마나 설렜는데, 나쁜 놈…….

“힐다 네가…… 카지미어 때문에 나에게 화를…….”

멍하니 중얼거리는 아드리안은 마치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느라, 자기 손에 들린 또 다른 찻잔 손잡이가 부서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뭐야, 이 찻잔. 내구도가 엉망이었잖아?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아드리안이 내려놓은 찻잔을 마저 카트에 옮겨 두었다.

「레벨 30으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오른팔, 변경 대기 중)」

「스킬 개방! ‘그림자 은신’ 스킬을 쓸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상쾌한 알림과 함께 눈을 떴다. 전설템 5세트를 한 번에 얻으면서 순식간에 올랐던 25레벨 때와 달리,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던 요즘은 숙면 버프빨로 겨우 기어 올라왔다 싶다. 그나저나 이 게임 만렙은 몇 레벨일까. 신화템 5세트 구하면 만렙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신화템 한번 손에 넣을 날이 오기는 할까?

이어서 무료 뽑기에서 나온 지푸라기와 ‘라이트닝’ 주문서, 곰돌이 인형을 가방에 쑤셔 넣고 힘차게 숙소를 나섰다. 일과가 시작하자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역시 카지미어. 이틀 전부터 샛별처럼 떠오른 요주의 인물이다.

“힐다, 안녕? 좋은 아침!”

숙소를 나서자 우연히 마주친 루이스가 힘찬 아침 인사를 건넸다. 어? 어어, 좋은 아침. 얼결에 덩달아 인사하고 루이스의 뒷모습을 흘끗 봤다. 하인 중에서도 소문난 뺀질이인 그가 저렇게 명랑한 인사를 건네는 건 처음 봤다. 평소엔 저택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한 듯이 찡얼거리고 다니느라 바쁘더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언제나처럼 저택 안 넓은 홀에 들어섰는데 거대하게 꿈틀대는 무언가가 시야에 걸렸다. 갑자기 알은척하기 싫어지는데. 무심코 서너 발짝 지나가다 말고 한숨을 푹 쉬며 도로 돌아갔다. 내 발길이 멈춘 곳은 홀 벽면에 붙은 벽난로 앞. 나를 권고사직의 길로 밀어 넣고 있는 장본인이 그 안에 있었다.

“야, 너 거기서 뭐 해?”

“난로 청소 중이지, 뭐 하긴.”

벽난로에 반쯤 묻힌 탓에 동굴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쓱싹쓱싹. 쇠로 된 벽난로 안쪽을 문지르는 소리도 간간이 섞여 들었다. 밀랍과 테레빈유를 섞은 광택제, 흑연이 앞에 준비된 걸 보니 꽤 본격적인데.

“그러니까 이 따뜻한 봄날에 난로 청소가 웬 말이냐고. 정기 청소는 아직 너한테 배당 안 됐을 텐데. 누가 시킨 거야?”

“누가 시켰든 뭐가 중요해? 도련님을 위해 일하는 건데.”

벽난로 청소는 다들 꺼리는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었다. 나야 매번 눈치 좋게 빠졌지만, 어쩌다 운 나쁘게 걸린 하인은 흑연 시커멓게 묻혀가며 벽난로에 처박혀야 했다. 저택엔 수많은 하인이 있지만, 환기 안 되는 잿더미에 들어가 일하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담당자도 일찌감치 정해졌을 텐데, 왜 난데없이 카지미어가 하고 있냐고요.

“이거 끝나면 나가서 울타리도 고쳐야 해. 아까 장작 패고 있을 때 부탁받았어.”

“뭐? 누가 또 장작 패라고…… 아, 깜짝이야.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장작이고 울타리고 누가 시켰냐고 물어보려다가 벽난로에서 쑥 나온 그를 보고 기겁해서 물었다. 몸통 박치기당해서 5m 날아갔을 때도 살짝 긁히고 말았던 얼굴에 웬일인지 피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흑연이 거멓게 묻어 반쯤 가려져 있는데도 푸르고 붉은 자국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야…… 너 어디 가서 처맞고 다녀? 꼴이 그게 뭐야?”

“이거? 별일 아냐.”

“별일 아니긴, 나보고 그 헛소리를 믿으라고? 그 꼴로 잘도 그런 말이 나오지? 빨리 말 안 해? 누가 너 괴롭혀?”

“별일 아니래도…….”

난로 청소에 쓰던 브러시와 흑연을 바구니에 담아서 자리를 뜨는 그를 쫓아가며 끈질기게 물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쫓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거 더럽게 빠르네.

“야, 빨리 말해. 말 안 해? 누가 너 걱정돼서 이러는 줄 알아? 도련님 직속이자 내 후임이니까 관리하려는 건데.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이쪽도 곤란하단 말이야.”

내가 빠르게 뛰어가 앞을 막고 물으니 그가 멈칫했다. 커다란 늑대가 돌부리 앞에 멈춰 선 꼴이다. 그는 흑연이 검게 묻은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으, 으음. 그게 도련님께서…….”

“뭐? 크게 말해.”

“어젯밤에 도련님께서 오랜만에 가르침을 주겠다고 하셔서. 그러다 생긴 거야.”

“가르침?”

“그래, 가르침. 크, 혼자만 아는 비밀로 오래오래 간직하려 했는데.”

“무슨 가르침을 줬기에 얼굴이 그렇게 돼?”

그래도 얼굴은 봐줄 만했는데 지금은…… 곤죽이 다 됐다.

“다름 아닌 전하의 가르침이잖아. 다소 과격해도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광이지. 지옥에 있을 땐 쉽게 가질 수 없는 기회였거든. 어젯밤 죽어도 좋을 정도로 기쁜 나머지 도련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부 귀담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기억할 거다.”

어젯밤을 회상하듯 그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종족의 영광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 몸뚱이를 갈아서라도 평생 충성을 바치겠다. 넋 나간 듯한 말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드리안, 어제 식사 후에 웬일로 방에 빨리 돌아가라고 하더니 그래서였구나. 새 오른팔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물론 나도 그 가르침이라는 걸 한번 받아 본 적은 있었다. 칼 쓰는 법을 알려 주겠다며 막무가내로 팔을 잡고 끌어당기던 것도 가르침이라면 말이다. 나한텐 그때 딱 한 번 하고 말더니 카지미어한테는 오자마자 하는 걸 보면, 최측근이 쟤로 낙점된 건 사실인 듯하다.

「칭호 변경이 대기 중입니다. (현재 칭호 : 악마의 오른팔)」

망할. 시스템조차 주기적으로 글씨를 띄우며 내 위치를 거듭 상기시켜 준다. 나는 이제 곧 평범한 하인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겠지. 칭호도 도로 ‘하찮은 하인’ 같은 거나 달리게 될 테고. 조금 우울한걸.

“근데 그 가르침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과격한 거야? 얼굴에 피멍이 들 정도로?”

“뭐, 다소 그런 편이지. 어금니가 뽑힐 뻔했을 때는 조금 아팠지만 말이야. 뽑히면 정말 아프거든.”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응, 응,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방금 꽤 살벌한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하지만 난 알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련님께서 날 얼마나 믿으시는지 말이야. 어금니 정도야 몇 개고 내어 드릴 수 있어.”

“그래? 도련님께서 널 그렇게나 믿으셔?”

“그럼, 물론이지. 아무리 부하라도 악마인 이상 믿고 적진에 밀어 넣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충성과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

잔뜩 상기된 카지미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듣고 보니 그렇다. 릴리트 진영에 스파이로 넣을 정도면 그만큼 믿는다는 거니까.

부럽다. 아드리안과 나는 서로 조금씩 숨기는 게 있는데. 정들었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서로 믿지 못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그런지 둘 사이에 엄청난 신뢰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가 무척 부러워졌다.

“흐음, 고쳐야 할 울타리가 여기인가?”

생각에 잠긴 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정원 가장자리에 다다라 있었다. 울창한 수풀과 야생화를 가르는 경계에 하얀 울타리가 볼품없이 부서져 있었고, 카지미어는 그 앞에 놓인 공구함을 능숙하게 열어 망치와 못을 꺼내 들었다. 그 옆에 준비된 나무판자를 들어서 울타리를 고치기 시작하는데…….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능숙해서 금세 감탄하면서 보게 되었다. 고아원에서 허드렛일은 혼자 도맡아 했다더니 못 하는 게 없네. 저 정도면 만능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뭐든 쉽게 뚝딱뚝딱해 낼 수 있어서인지,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카지미어, 혹시 사람들이 일 부탁하고 갔어? 일 잘하는 네가 하는 게 낫겠다느니, 자기는 몸이 안 좋거나 할 일이 있어서 가야겠다면서 말이야.”

“뭐야,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역시 만만해 보여서 떠맡긴 거였네. 자기 일 남한테 넘기고 혼자 편해지려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 진짜……. 야, 도련님께서 너한테 벽난로 청소나 울타리 수리하라고 시키셨어?”

“아니, 그건 아니지.”

그가 망치질을 멈추고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떤 표정으로 일을 떠맡았는지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다. 이렇게 허술한 모습을 보이니 일터에서 몇 년간이나 굴러먹은 수완가들한테는 어련했겠어. 어서 낚아달라고 수면에서 첨벙거리는 붕어 새끼가 따로 없었겠다.

“근데 왜 이걸 네가 하고 있어? 넌 도련님의 직속 하인인데.”

“그야 저택 일을 돕는 게 곧 도련님께 도움이 될 테니까. 뭐든 하는 게 곧 도련님을 돕는 길 아니겠어?”

“바보야, 너 그런 식으로 하다간 남들이 죄다 일 떠넘기고 가 버린다? 그럼 너 혼자만 일하게 되는 거야. 이 저택에는 자기 일 알아서 잘하는 사람도 물론 많지만, 기회만 되면 남한테 일 떠넘기려고 혈안이 된 사람도 많은데. 죄다 도맡아서 하다간 몸살 날걸?”

“나 튼튼해. 저택 일 좀 떠맡는다고 안 아파. 사제님께서 곤란한 사람이 부탁할 땐 거절하는 거 아니랬어.”

“야, 너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 일 죄다 떠맡아서 하고 있다고 쳐. 백번 양보해서 네가 유능하고 튼튼해서 조금도 지치지 않고 그걸 다 해낸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때 도련님께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쩔래? 심지어 다른 일을 하느라 모르면?”

“어? 그,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그의 표정이 난해해졌다. 악마라기에 얼마나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있을지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잖아.

“네가 일 잘하는 건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일을 죄다 떠맡는 게 도련님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고. 이 저택에 들어온 이상 최우선은 도련님이어야 해. 알겠어?”

“으, 응.”

“알아들었으면 당장 망치랑 못 내려놓고 일어나.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얼굴 좀 닦고. 으이구, 너 이래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래?”

“……에이브릴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에이브릴한테 혼날 때랑 똑같아.”

손에 든 걸 내려놓고 엉거주춤 일어나며 그가 중얼거렸다. 거뭇한 멍 자국 사이로 보라색 눈동자가 미묘한 열기를 띠고 빛났다. 에이브릴 얘기만 나오면 열렬해지는 게, 좋아하는 마음을 숨길 길이 없나 보다.

“혹시 에이브릴이라는 애랑 사귀는 거야?”

남의 연애사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지만, 카지미어의 이야기는 들어 보고 싶었다. 악마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그 상대가 인간이 될 수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저, 절대 아드리안 때문에 물어본 건 아니다. 크흠.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얼마 전에 내가 말실수를 하지만 않았어도…….”

“무슨 말실수?”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기에 궁금해져서 물었으나 대답은 곧장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지?

“……고 싶다고.”

“뭐? 잘 안 들리는데.”

“너를 좋아한다고…… 좋아해서 먹고 싶다고 고백했어.”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먹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그것도 첫 고백으로.”

뭐야, 이거 미친놈이었잖아? 후임이고 나발이고 얼른 피하자.

“잠깐만! 도망가지 마, 힐다. 말이 헛나온 거니까.”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말이 헛나와?”

서너 발짝 뒤로 물러나서 경계 만만한 눈빛을 보내자 카지미어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나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냐, 설명하지 마.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들어줘, 힐다. 악마에게 좋아하는 감정은 인간과 조금 달라.”

“뭐가 달라? 좋아하는 마음이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 이상 변명이 안 돼.”

“오, 정확해. 방금 한 말이 정답이야!”

“……뭐? 이런 정신 나간…….”

“진정하고 들어 봐. 악마는 종족 특성상 강한 상대에게 끌리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돼 있어. 하지만 강해지려는 것 또한 본능이라,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힘을 섭취하고 싶은 욕망도 동시에 갖게 되는 거야. 왜 그러냐고는 묻지 마.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종족이니까.”

“네 말은 악마면 다 그렇다는 거야? 좋아하면 식욕을 느낀다고?”

“……징그럽게 들리겠지만 맞아. 그래서 배우자에게 뜯어 먹혀서 죽는 경우도 많았어. 그러면 다음엔 또 다른 배우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하지만 넌 이제 인간이잖아. 같은 인간을…… 먹고 싶어?”

“훨씬 억제하기 쉬워지긴 했지. 하지만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 큰 충동을 느낄 때가 있어. 에이브릴은 건드렸다간 정말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참는 거야. 참을 수 있어. 악마일 때보다 훨씬 쉽게. 에이브릴에게 말할 순 없겠지만.”

허어. 정말이지 사랑의 방식이 폭력적이고 과격한 종족이다. 종족 특성이라니 자기들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겠지만, 낯설고 소름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인간이 돼서 옅어졌다니 다행이지.

아드리안도 마찬가지겠지? 내게 정들었다고 말하던 순간 식욕을 느낀 게 아니었기만을 빌 뿐이다. 애초에 난 훨씬 약한 인간이잖아. 먹어 봐야 입가심밖에 안 될 텐데.

“어? 힐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 내게 난로 청소와 울타리 일을 맡긴 사람 말이야.”

“뭐? 어디?”

생각을 잠시 멈추고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자 익숙한 얼굴이 걸렸다. 루이스. 저 소문난 뺀질이가 동료들과 시시한 농담을 나누며 왁자지껄 지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 좋아 보이더라니, 남한테 업무 미뤄 놓고 잘하는 짓이다.

멀리서였지만 우리 둘의 시선을 느꼈는지 루이스가 멈칫하고 이쪽을 바라봤다. 양심이 완전히 소실된 건 아닌지 찔끔한 눈치다.

“저런 놈한테는 말로 해 봐야 소용이 없어. 기다려 봐.”

“어, 어어. 힐다. 설마 망치 던지려고? 잠깐…….”

“안 맞게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마.”

기껏해야 옆에 떨어지는 정도일 거다. 나는 잔디밭에 놓인 망치를 집어 들고 팔을 붕붕 돌리다, 두 번째 바퀴일 때 휙 던졌다. 이 정도면 겁 좀 먹겠지 싶어서 던진 건데 느닷없이 바람이 훅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갑작스러운 바람을 일으킨 건 바로 카지미어였다. 엄청난 속도로 내달린 그는 가볍게 점프하더니 공중에 떠 있는 망치를 휙 낚아챘다. 그러고는 세 번의 공중제비.

가뿐히 지상에 착지한 그는 루이스가 아닌 내게 달려왔다.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내 앞에 멈추고선, 보이지 않는 꼬리를 열심히 흔들어댔다. 원반던지기?

“카지미어……. 네가 개야?”

“……아.”

아무리 늑대가 갯과라지만, 인간 모습을 한 채로 이건 좀.

내가 기겁하며 물어서인지 올망졸망 빛나던 눈동자에 뒤늦게 이채가 돌았다. 툭. 물고 있던 망치가 잔디밭에 떨어졌다. 카지미어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몸을 일으켰다.

“후, 난데없이 인간에게 이 무슨 추태를…….”

“망치 다시 던져 줄까? 물고 오면 간식이라도 줘?”

“시끄러워. 앞으로 내가 보는 데서 물건 같은 거 던지지 마. 아까처럼…… 그렇게 돼 버리니까.”

어지간히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면서도 빨개진 귓불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호오. 거역할 수 없는 본능인가 보지. 재밌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씩씩대며 돌진했고, 루이스는 기세에 밀린 채 망치를 받아 들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멀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일을 도로 넘긴 것 같으니 그걸로 됐다.

내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대인 건 여전했지만, 저 충성스럽고 꿋꿋한 강아지를 진심으로 미워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 아드리안도 그런 거였겠지?

무심코 고개를 젖혀 4층, 아드리안의 방을 올려다본 때였다. 창문에 드리워져 있던 검은 그림자가 그에 맞춰 휙 사라졌다. 때마침 햇볕이 쨍하니 반사되어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자취도 없다.

“어? 아드리안…….”

창문 앞에 서서 이쪽을 보는 것 같았는데. 눈도 마주친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건가? 나는 흥분한 카지미어를 얼른 숙소로 돌려보내고 갸웃거리며 저택에 들어섰다.

“……카지미어와는 어때?”

건네받은 아침 약을 먹자마자 아드리안이 물었다. 첫마디가 또 카지미어다. 요즘 카지미어가 아닌 다른 걸 생각하기는 하는 걸까?

“네, 뭐. 나쁘지 않아요. 일도 잘하고 쓸 만하고 몸도 튼튼하고요. 사랑과 관심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았지만요.”

그야 물론 강아지니까.

“흐음. 아직도 카지미어와 서로 이름으로 불러?”

“네. 그냥 곁에 있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어요.”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네?”

“아무것도 아냐, 힐다.”

점점 어둡고 낮아지던 속삭임이 내가 돌아보자 말짱하게 돌아왔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라든지 반듯한 입술. 누가 봐도 아름답고 선한 미소였으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내리누른 냉랭함. 섬뜩함…… 처음 아드리안에게서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다시 차갑게 다가왔다.

왜 또 저 얼굴로 돌아간 거지?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생각 없이 옆을 보곤 매우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커튼이…….

“도련님, 커튼이 왜 이래요? 왜 이렇게 갈기갈기 찢겨 있어요? 이 비싼걸. 교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으응, 그거.”

그거? 나는 놀란 얼굴로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주기적으로 찾아와 난동 피웠다는 백작 부인은 별장으로 쫓겨났겠다, 감히 아드리안 방에서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은 즉…… 내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으응, 그거어?

“도련님, 이거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눈 피하지 말고 말씀해 보시죠.”

“그건 절대 내가 한 게…….”

“미리 말씀드리는데, 도련님. 전 잘못보단 그 잘못을 감추려는 태도가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만약 잘못을 감추시면 무척 화가 날 것 같아요.”

“…….”

“다시 여쭤볼게요. 이거 누가 찢었어요?”

“……일부러 한 거 아냐. 단순한 실수였어. 창문에 낀 걸 모르고 잡아당겨서.”

그는 답지 않게 말을 흐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창문에 낀 걸 당겼다고 이렇게 누더기가 됐다고? 거대한 괴물이 발톱으로 찢어 낸 것 같은데? 왜 그랬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부루퉁한 걸 보니 쉽게 입 열 것 같지 않았다.

“알겠어요. 일단 새 걸로 교체해요. 이참에 햇빛이 좀 더 잘 드는 종류로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러잖아도 색이 침침해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번엔 밝은색으로 준비해 볼게요. 읏차.”

“힐다, 수고스럽게 직접 일하지 마. 카지미어 불러서 시키면 되니까.”

또, 또! 또 카지미어 시키래! 하루 만에 중요 업무를 다 넘긴 것도 모자라서 이젠 이런 허드렛일에서까지 밀려나는 거야?

화가 난다. 카지미어만 따로 만나면 이럴 일 없는데, 아드리안에게서 이름 몇 번만 들으면 분노 조절 장애에 걸리는 것 같았다. 커튼 바꾸는 것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누가 충실한 대형견 아니랄까 봐 카지미어는 귀신같이 자기 이름을 듣고 쳐들어왔다. 방 안을 빠르게 훑어본 자색 눈이 내게 고정됐다. 마침 커튼을 풀어 내리려고 움켜쥔 참이라 살짝 움찔했다. 그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듯싶었다.

“커튼이 찢어졌군요! 고아원 내 커튼이란 커튼은 제가 다 달았었죠. 당장 바꿔 놓겠습니다!”

의욕에 넘쳐 순식간에 다가온 그가 커튼을 빼앗으려 들었다. 나는 또다시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악마 놈이 이젠 대놓고 내 일을 뺏으려고 드네? 욕망 넘치는 새끼.

“하, 하하. 카지미어. 이건 내가 할게. 넌 가서 다른 일이나 할래? 중요한 일 많을 거 아냐.”

당장 꺼지라는 말을 간신히 억눌렀다. 상사 앞에서 텃세 부릴 순 없으니까, 상냥하게, 상냥하게.

“아니면 가서 좀 쉬도록 해. 오늘 아침부터 일 많이 했잖아. 응? 네가 몸져누우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뭐? 내가 몸져눕는데 네 마음이 왜 아파?”

“일일이 따지지 말고 커튼, 좀, 놔주겠어? 이거 내가 먼저 발견했거든? 네가 할 일은 네가 찾아. 망치 던져 줄까? 응?”

“도련님께서 나더러 하라고 시키셨는데? 내가 할게.”

끝내 이를 악물고 말했는데 카지미어의 대꾸는 끊이질 않았다. 둘 다 동시에 잡아당기고 있는 탓에 커튼은 완전히 찢기기 직전이었다. 놔, 안 놔? 이래도 안 놔? 내가 커튼을 팍팍 잡아당겼지만, 상대방도 지지 않고 팍팍 잡아당긴다.

아, 얄미워. 때리고 싶어. 저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전에 없던 살의가 불쑥 솟는다.

“그런데 말이지. 카지미어. 뜬금없지만 네 팔 근육 좀 만져 봐도 돼? 이런 튼튼한 몸은 진짜 처음 봐서, 불끈거리는 근육 전부터 만져 보고 싶었어.”

“하핫! 그럼. 물론이지! 얼마든지 만져 봐!”

“와……. 엄청 단단하네. 내가 쳐도 안 아플 것 같아. 몇 대만 쳐봐도 돼?”

“쳐봐, 쳐봐. 뭐 얼마나 아프겠어.”

“응, 그럼 살살 쳐볼게. 아프면 꼭 말해야 해.”

패고 싶다. 그럴 때가 아니란 건 알지만 패고 싶다. 카지미어와 마주 보고 하하 호호 웃은 나는 내면에 잠자고 있던 모든 폭력성을 주먹에 담아 그의 팔에 꽂았다. 퍽, 퍽퍽. “와, 신기하다. 진짜 단단해.”라고 말하며 몇 대 쳤더니 두껍게 자리 잡은 팔 근육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피부는 이미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내 울분을 풀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와, 정말 단단하다. 신기해. 카지미어는 이렇게 맞아도 하나도 안 아픈가 봐.”

“이, 이, 이건 좀 아픈데. 힐다 너 힘이 왜 이렇게 세? 그, 그만. 이제 그만하고 커튼 좀 갈까?”

“야! 어디서 손을 잡아, 미쳤어!”

“아야야. 일부러 한 거 아닌데…….”

“……흐음, 두 사람 꽤 가까워진 것 같네. 생각보다 더.”

목소리가 한 옥타브씩 뚝뚝 떨어져 바닥을 쳤다. 참, 아드리안이 보고 있었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악마 주변으로 엄동설한의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힐다, 아까 말했듯이 커튼은 놔두고 나가 봐도 좋아. 카지미어, 너는 남고.”

“왜요? 왜 카지미어만 남아요? 저도 있을래요.”

“야, 힐다. 빨리 가. 도련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시잖아.”

“이름…….”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흡사 목 뒤를 칼로 그어 대는 섬뜩함이라, 조금 더 조르려던 입이 절로 다물렸다. 오랜만에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어대던 카지미어도 어깨를 살짝 움츠릴 정도였다.

“……어서 가 봐, 힐다.”

배웅해 주려는 듯 그가 몸을 완전히 돌렸다. 입매가 한 치의 오차 없이 계산된 모양으로 휘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아무리 나라도 마냥 버틸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응, 그래.”

“언제든지, 꼭요.”

나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마구 쏘았지만, 아드리안은 끝내 붙잡지 않았다. 오늘 산책이나 하면서 이야기 좀 나눌까 했는데. 아쉬움에 살짝 시무룩해진 채 문을 닫고 나왔다.

아드리안에게선 어제 내내 기별이 없었다. 낡은 오른팔이 신규 오른팔과 눈앞에서 투덕거린 게 괘씸해서였겠지? 지나고 보니 고작 커튼 하나에 괜한 자존심 세웠다 싶은데, 그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처럼 느껴졌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안 불렀다는 건 이제 내가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준 거겠지. 자진 퇴사할 때까지 말려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성공적으로 진행돼 가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 저택에서 내가 해야 할 건 이제 대문 앞 청소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힐다! 드디어 왔구나!”

다소 힘없이 터덜터덜 부엌에 들어섰는데 레티샤가 부산스럽게 반겼다. 인심이 넉넉하긴 해도 사무적인 엄격함만은 늘 철저하게 지키던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반기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에 너무 심하게 빡쳐서 저러나 싶기도 했다. 낯설어하는 기색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저번에 내가 부탁했던 것 말이야. 만들어 왔니?”

“매듭 공예품요? 네, 그러잖아도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잠시만요.”

“어머, 잘됐구나. 글쎄, 공작 부인께서 이걸 보고 무척 좋아하셨다지 뭐니. 선금을 내어 주시며 전부 사 오라고 하셨다더라.”

“정말요? 잘됐네요.”

“그럼, 잘됐고말고. 마침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부인들께서도 장식을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눈독 들이셨다니, 다른 저택에서도 곧 사람이 올 거야. 어머나, 오늘은 비즈 장식이 추가되었구나? 예쁘기도 하지.”

「공예품을 판 골드와 일급(선불)이 들어왔습니다.」

「골드 +7,070G」

“참, 받은 돈에서 소개비는 조금 떼었단다. 나와 그쪽 소개인 몫으로 개당 50골드 정도이니 괜찮겠지?”

제작소에서 뚝딱 만들어서 장식만 얹은 건데 좋아한다니 잘된 일이지. 무심하게 생각하며 매듭 공예품을 건네다가 눈앞에 뜨는 흰 글씨를 보고 심장 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9,730골드라니, 꿈꾸고 있는 거 아닐까?

이제껏 10골드, 20골드씩 깨알같이 모아서 가성비를 따지며 쓰다가 갑작스럽게 큰돈이 생기니 기쁘기보다 어안이 벙벙했다. 시스템의 횡포에 300골드도 모으지 못했던 내게 갑자기 9천 골드라니? 놀라운 동시에 머리 한쪽에선 시스템이 뺏어 가기 전에 빨리 써야 한다는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힐다, 부수입이 많아 들떴을 테지만 부탁 하나만 하자. 이 근방에서 벌목이라도 했는지 대문 앞 길가에 나뭇잎이 수북하게 쌓여 아주 지저분하더구나. 가서 깨끗하게 쓸어줄 수 있겠니?”

매듭 공예품을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레티샤가 말했다. 느닷없이 청소라니.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바닥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제가 왜요? 이번 달 담당은 제인인데. 지난번에도 대신해 줬다고요.”

“제인이 열감기 때문에 벌써 일주일째 드러누워 있잖니. 깨끗이 청소해 두면 이번 달은 이불빨래는 면제해 주마.”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뺏길세라 벽에 기대어 있던 빗자루를 들고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빗자루질 몇 번으로 공포의 이불빨래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설령 혹한기라도 나설 수 있었다.

“흠, 어디 보자. 나뭇잎이 많이 쌓여 있긴 하네.”

레티샤 설명대로 나뭇잎 더미가 대문 앞 큰길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가을이나 겨울 되면 장난 아니겠는걸. 그때까지 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에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청소나 하자.

나는 얼른 생각을 털어 버리고 저택 끝쪽에서부터 걸어오며 빗자루로 쓸기 시작했다. 지갑에 1만 골드 가까이 쌓여 있는데 하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다니. 이래서 사람들이 돈으로 신분을 사는가 보다.

그나저나 9천 골드를 어디에 쓰지? 마을에 가면 에밀리 선물부터 사는 게 낫겠다. 그때 많이 섭섭했던 것 같으니까 선물로 기분 풀어 줘야지. 사업을 확장할 궁리도 해 봐야겠다. 또 어떤 돈지랄을 하면 좋을까…….

「적대 대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 이게 누구야. 수상한 백작 가문의 수상한 하인 아냐?”

쓱싹쓱싹 열심히 나뭇잎을 쓸고 있는데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내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성수 사건 이후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왜 여기에…….

“……안녕하세요, 해리슨 경감님. 제프리 경사님도 안녕하셨어요?”

“저도 기억해 주었네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그래, 여기서 무슨 수작질이지?”

쾌활하게 손 흔드는 제프리와 달리 해리슨은 여전히 삐딱하고 불량했다. 눈에 흐르는 강렬한 살기만 보면 경찰인지 범죄자인지 여전히 헷갈릴 정도다. 갑작스러운 무례함에 내가 인상을 찌푸려도 굽히는 기색 하나 없다. 범죄자를 대하다 보면 다 저렇게 되나?

“수작질이라뇨. 제가 하인인 거 그새 잊으셨어요? 제 손에 들린 빗자루는 장식처럼 보이고요? 그래서 청소하고 있던 것도 물어봐야 아시는 거예요?”

“큭큭, 여전히 입만 살았어. 너희 백작은 어디 있지? 바른대로 말하면 사형은 면하게 해 주지.”

“몰라요. 백작님이 어디 계신지 일일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리고 제가 뭘 했는데 다짜고짜 사형이에요?”

“경감니이임! 진짜 왜 이러십니까. 애먼 사람은 건드리지 않기로 각서 쓰시지 않았습니까. 예? 저 이러면 경정님께 다시 보고드릴 수밖에 없어요. 다음 근신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요.”

마주치자마자 맹렬한 기 싸움을 펼치는 나와 해리슨 사이로 제프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시야가 가려지자 해리슨은 겨우 입을 다물었다. 뚱한 표정의 그를 등지고 제프리가 내게 사근사근 웃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저희 경감님이 얼마 전에 근신이 풀리셔서 많이 예민하셔서 그래요. 그러니 백작님께는 비밀로 해 주시죠. 예?”

“네. 정말 당혹스럽고 놀랐지만, 경사님께서 그렇게 부탁하시니 한 번은 넘어가 드릴게요.”

사실 백작과 적대 관계라 말해 봤자 소용없겠지만, 난 크나큰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그러자 제프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아, 정말 고마워요. 경감님께서 하필 귀족 자제분을 크게 건드리시는 바람에 한동안 근신하셨거든요. 이제야 겨우 풀려났는데 다시 팔츠그라프 백작님과 얽혔다간…… 어후, 옷 벗을 각오해야죠.”

“……제프리. 언제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을 거야? 이 근방을 조사한다지 않았어? 어서 썩 하러 가지 못해?”

“아아, 그렇죠. 잠깐 실례할게요. 이 근방에서 사람이 자꾸 사라진다는 신고를 받아서. 경감님, 여기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이상한 의심으로 또 사람 잡지 마시고요. 예?”

굳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정보를 술술 읊은 제프리가 저택 반대편으로 향했다. 우거진 수풀 사이를 유심히 살피며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해리슨을 곁눈질했다. 같이 안 가는 건가, 불편한데…….

“귀족 자제분한테 크게 손대셨나 봐요. 경감님이 근신까지 받으실 정도면.”

“뭐. 거의 죽일 뻔했으니까.”

“네? 죽일 뻔했다고요?”

경찰이? 내가 놀라서 물었는데 해리슨은 대수롭지 않은 기색이었다. 몇 번이고 이미 저질러 봤다는 듯이.

“자꾸 헛소리를 지껄여 대기에 홧김에 목을 찔렀는데 죽진 않더군. 아쉽게도.”

“그 무슨…… 흉악범이기라도 한 거예요?”

“아니. 그냥 용의자였을 뿐이지만, 잘난 신분을 들먹이면서 건방지게 굴기에 교육해 줬을 뿐이야. 감옥에서 나가는 바람에 다시 고귀하신 귀족으로 살아갈 테지만, 나는 알지. 그놈이 범인이었다는 걸.”

“범인인 걸 아는데 보내 줬다고요?”

“그렇게 비난하는 눈으로 쳐다보지 마. 신분 잘 타고 태어난 것들은 무슨 죄를 저지르든 그러거든. 그래서 찔러 버린 거야. 적어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앞으로 그 새끼가 저지를 범죄는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경감님이…… 그러셔도 돼요? 누구보다 법을 지켜야 하는 분이.”

내가 망설이며 묻자 해리슨의 입가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법? 큭, 옛날에야 물론 그랬지. 발에 불나게 뛰어서 범죄자를 잡아가면 법이 심판해 줄 거라는 알량한 꿈을 꿨었다는 말이야. 다 빌어먹을 개소리야. 개소리라고. 죽어라 뛰어 봐야 뭐 하겠어. 돈이든 신분으로든 쉽게 풀려나는데. 세상의 정의는 죽은 지 오래야. 음. 그래. 죽은 지 오래지. 그러니…….”

“…….”

“나라도…… 정의를 세워야 하는 거지.”

처음엔 내게 향하던 말이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속삭임으로 변해 갔다. 그래, 나라도. 허공을 쏘아보며 맹목적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해리슨 얘도 가만 보면 참 정상이 아니야. 제프리는 이 정도까진 아니던데. 이 세계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경찰까지 미쳐 있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팔츠그라프 백작에 관해 이야기해 줄 게 정말 없나? 뭐든 좋은데 말이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전 애초에 백작님 하인도 아니란 말이어요. 백작님이 무슨 저택 돌아다니는 강아지인 줄 아나 봐. 어디 갔는지 뭐 하는지 다 알게.”

“흘려들은 거라도 없는지 잘 생각해 봐. 네가 모신다는 소백작도 얽혀 있으니까.”

“……저희 도련님이 뭘요?”

“백작가에서 후원하는 자들이 하나씩 사라졌는데 과연 소백작이 관련 없을까? 응? 내 감이 확실하게 속삭이고 있거든. 분명 구린 구석이 있다고.”

“증거도 없이 고작 감으로 아픈 분을 건드리신다고요?”

“왜, 못 건드릴 이유라도 있나?”

빗자루를 휘둘러대던 손을 멈추고 해리슨을 올려다봤다. 속내를 모조리 파헤치려는 듯 검은 눈이 나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죽일까?

“저희 도련님, 몸이 안 좋으셔서 밖에 잘 나다니지 못하는 거 아실 텐데요. 증거도 없이 이렇게 애먼 사람 몰아가도 되는 거예요?”

“그 얘기를 빼먹었군. 얼마 전에 말이지. 마르쿠트 후작가의 도련님이 죽었어. 그것도 아주 처참한 몰골로 말이야. 우연한 기회로 그 시체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손등에 동그란 관통 흉터가 남아 있더군. 크기와 모양이 익숙해서 자세히 보니 딱 연필에 꿰뚫리면 그런 흉터가 남을 것 같더란 말이지. 과연 이게 우연일까?”

죽일까?

“내가 여기서 연필로 사람을 찌르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신기하게도…….”

“꼭 다른 사람에게 찔려야만 그런 흉터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실수로 생긴 상처일 수도 있고 스스로 찌른 걸 수도 있고요. 연필이 딱히 희귀한 물건도 아니잖아요. 우리 저택만 해도 하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요? 저희 도련님을 본 목격자가 하나라도 있어서 이렇게 추궁하시는 거여요?”

“……뭐, 아쉽게도 없지. 어째선지 손등에 난 흉터에 대해 아는 사람조차 없더군. 자기들이 모시는 도련님이라면서 희한하단 말이야.”

“그냥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어 보이는걸요.”

“햐, 안 넘어가네. 만만치 않단 말이야.”

해리슨이 시가를 잘근잘근 깨물며 큭큭거렸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려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증거가 없다면 지금 죽이지 않아도 되겠지.

“하, 하하. 눈빛 좀 보라지. 푸흡, 큭큭. 지금 당장 칼 꺼내서 날 찔러도 이상할 게 없겠는데. 너, 너와도 언젠가 감옥에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아까 제프리 경사님께서 이상한 의심으로 사람 몰고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해리슨 경감님. 그것도 병이에요.”

코끝으로 살기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그에게 친절히 안내해 준 후, 나는 다시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경감님!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또 헛짚었나 봐요.”

그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저택 반대편 숲 지대를 대충 둘러보고 제프리가 돌아왔다.

“저희 어쩝니까? 네? 경감님과 저만 최근 검거율이 0%잖아요. 지금 팔츠그라프 백작가에 관심을 두실 때가 아녜요. 실적을 올려야 한다고요, 실적을.”

“…….”

“빨리 가요. 네? 작은 건수 하나라도 잡아야 한다고요.”

제프리에게 팔이 잡혀 반대쪽으로 끌려갈 때까지, 해리슨의 살벌한 시선은 떠날 줄을 몰랐다. 나는 그들이 길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르쿠트 후작가라면 예전에 딸기잼 받으러 갔던 거기잖아? 후작가 도련님이라면 성희롱 일삼다가 아드리안한테 당했던 그놈일 텐데, 처참하게 죽기까지 했다니. 혹시 아드리안과 연관되어 있진 않겠지? 신전 무너뜨린 일도 그렇고 이야기 좀 해 봐야겠다. 아직 천적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계속 살인하는 건 찝찝하기도 하고, 해리슨도 이상하게 집착하고 있고. 당분간 몸 사릴 필요가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어? 힐다다. 힐다!”

제프리와 해리슨이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카지미어가 나타났다. 카지미어, 저택에 있는 거 아니었나? 길 끝에서 걸어오는 그를 마주 보고 손 흔들어 주면서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오는 거지? 뒤에서 끌고 오는 수레는 또 뭐고. 아니, 그리고…….

“야, 너 얼굴이 왜 또 그 모양이야? 어제보다 훨씬 심하잖아.”

표현할 길이 없는 엉망진창이다. 단순히 멍이 든 정도가 아니라 저건…… 처음 만났던 날 몸통 박치기로 인해 생긴 볼의 상처가 작은 스크래치로 느껴질 정도다. 카지미어가 내 앞에 우뚝 서더니 힘없이 웃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가관이네.

“괜찮아. 많이 나았는걸. 부러진 팔도 금방 붙었고, 어금니도 빠질 뻔했는데 다행히 그대로고.”

“……그게 많이 나은 거라고? 팔이 부러졌다는 건 또 뭐야?”

“말…… 했잖아. 나, 도련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영광스러운…… 기회지.”

“야, 가르침이고 뭐고 좀 쉬엄쉬엄해야지 않겠어? 도련님을 따르는 네 마음이야 충분히 알겠지만. 거울은 봤어?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냐. 눈이 부어서 안 보인다고. 너 내가 보이긴 하는 거야?”

손을 펼쳐 눈앞에서 휘휘 흔들자, 시선으로 이리저리 따라오다 말고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괜찮아. 이 정도는 금방 나아. 오늘 오후면 다 낫겠지…….”

“그래, 회복이 빠른 건 다행인데. 당분간 도련님께 쉬겠다고 말씀드려. 참 이상하다. 악마들은 원래 그렇게 몸 상해 가며 가르쳐?”

“응. 그런 편이긴 해. 그래도 쉴 수는 없어. 도련님의 가르침은 어디서도 받지 못할 영광인데…….”

“됐어. 그냥 때려치워. 얻어터지기만 하는데 가르침은 무슨 가르침이야? 그 뒤에 끌고 온 건 또 뭐고.”

“그렇지, 힐다! 도련님께 바칠 제물 가져왔어!”

“아하, 제물. 제물이었구나. 난 또 뭔가 했네……. 뭐! 제물이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응? 제발 그렇다고 해 줘. 아침 해가 저렇게 쨍하니 솟아 있는데 사람 납치해 온 건 아니라고 해 달라고! 경악한 나머지 붕어처럼 뻐끔대고 있는데 카지미어는 해맑게 밝아지기만 했다.

“응, 제물. 마을에서 잡아다가 기절시켜서 가져왔으니 싱싱해. 오늘 갓 잡아 올린 활어나 다름없는 셈이지. 기절시키고 눈과 귀를 막아 놓은 데다, 이 길에 들어서기 전에는 전부 산길로 왔으니 목격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마을에서 잡아서 기절, 눈과 귀, 활어……. 표현 하나하나가 경악스러운 와중에 사람 하나 태운 수레를 끌고 산을 탔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역시 유능한 인재야.

“흐음, 그런데 말이지. 제물은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는 거잖아? 그럼 팔다리 잘라서 가져와도 되지 않을까? 굳이 이렇게 무겁게 끌고 오느니…….”

내가 왜 가만히 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미쳤어? 내 눈은!”

“어차피 팔다리가 잘리나 멀쩡히 붙어 있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왜, 왜 기겁하는 거야? 힐다 너도 사람 죽이는 데 익숙한 거 아니었어?”

“아니거든, 아니거든! 대부분 공범이지 주범은 아니었거든!”

주인 잘 따르는 대형견으로만 생각했던 내가 바보지. 악마의 본성이 어디 가겠어? 제물을 가져오랬다고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나는 애써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먼저 주변을 확인한 후, 슬쩍 고개를 내밀어 수레를 살폈다. 기절은 제대로 시켰는지 두건을 쓴 남자가 목덜미를 훤하게 드러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카지미어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근데 저 사람은 뭐야? 어떻게 골라서 데려온 거야?”

“응? 그냥 마을을 지나가다 보이는 사람 잡아 온 건데.”

“뭐? 그럼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기절시켜서 태워 왔단 거야? 범죄자도 아니고?”

“범죄자라니. 왜 그런 걸 따져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나 죽이면 되는 거 아냐?”

내가 놀라서 휘둥그레진 만큼 카지미어도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나는 그 순간 또다시 깨달았다. 참, 얘 악마였지. 나처럼 살인 후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만큼 범죄자 여부나 범죄의 경중을 따질 필요도 없는 거다.

“아냐, 그래도 이건 아니지. 방금 경감이 냄새 진하게 맡고 왔다 갔단 말이야. 얼른 마을에 다시 돌려보내자. 왔던 길이 어느 쪽이야?”

“응, 저쪽. 참, 도련님 아침 약은 걱정 안 해도 돼. 나가기 전에 미리 문 앞에 놔두고 왔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근데 너 저 사람 어떻게 기절시켰어? 설마 때렸어?”

“응, 한 대 때리니까 바로 기절하던걸.”

덜커덩. 산으로 향하는 험한 길에 들어서며 수레가 돌부리에 걸렸다. 카지미어는 가볍게 수레를 들었다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혀를 크게 찼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비인도적으로 끌고 오면 어떡해?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때려서 죽이는 게 제일 나쁜 방법이다, 너. 인도적으로 빠르게 죽여 줘야지. 난 적어도 독으로 마비시키고 아픔을 못 느끼게 해 왔단 말이야.”

“그래? 이런 식으로 죽이면 나중에 지옥 갈까?”

“어차피 네 고향인데 그런 걱정은 왜 하는 거야?”

“듣고 보니 그러네.”

“그래도 우린 다행이지. 도련님이 거기 군주랑 아는 사이라며? 도련님 안다고 하면 벌은 살살 내려 주지 않을까?”

“흠, 일리 있는 말이야. 군주님도 도련님을 꽤 신임하셨으니까 봐줄지도.”

“거기 군주도 도련님한테 빠져 있어? 군주 딸도 쫓아다녔다면서…… 세상에, 그러고 보면 사방을 다 홀리고 다녔잖아?”

언젠 나더러 호감 뿌리고 다닌다더니 자기는 더 했네, 더 했어. 어쩐지 사람 홀리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더라. 같은 악마도 유혹하는 수준인데 인간이 어떻게 당해 내겠어? 아드리안에게 두근거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거다.

“야, 우리 갈 길도 먼데 승부나 마저 할까?”

카지미어가 타고 왔다는 험난한 산길에 접어들며 내가 제안했다. 피멍투성이인 그의 얼굴 위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승부를 보자. 말해 두는데 난 절대 질 일 없어. 패배하고서 울지나 마.”

“뭐래, 나야말로 질 일 없어. 도련님 체취가 묻은 손수건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뭐? 그런 게 있다고? 왜 진작 말 안 했어?”

카지미어는 수레를 끌다 말고 돌로 머리 맞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드리안에게 부탁하면 손수건 말고도 다양한 것들을 내줄 테지만, 그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우리 멍멍이 충격받으면 어떡해. 이런 거 보면 아드리안이 날 더 아끼는 것 같기도 하고.

흠, 생각하니 갑자기 보고 싶어지네. 오늘 저택에 돌아가면 꼭 산책하러 나가자고 해 봐야겠다.

나는 카지미어와 함께 산을 타고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끼이익, 끼이익. 바람이 나뭇잎을 쓰다듬는 소리 사이로 수레 굴러가는 잡음이 끼어들었다. 간혹 나무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리는 소음이 나긴 했으나 산속이라 대체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잠깐 상황을 잊고 주변을 돌아보려고 하기만 하면 제물 후보가 신음을 흘리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다. 가차 없는 손날이 제물의 머리를 가격해 도로 기절시킨 게 벌써 세 번이나 됐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뿐인데 저 사람은 무슨 죄래. 목숨이라도 구해서 다행이지.

“근데 너 사제님의 뜻을 받들어서 산다는 애가 이렇게 폭행을 일삼아도 돼? 사제님이 악행을 저질러도 된다고 가르치진 않았을 거 아냐.”

“뭐, 그야 그렇지. 사제님께선 평생 인간들에게 덕을 베푸셨으니까. 이 일을 아시면 무척 슬퍼하시겠지.”

“그래도 괜찮아? 너의 신은 사제님이라며.”

“뭘 물어. 당연히 안 괜찮지. 하지만 사제님의 뜻을 받기 한참 전에 도련님을 모셨잖아? 우선순위가 도련님께 있는 건 당연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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