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33)

7-2. 악마 앞에서 질투를 논하느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게 낫다.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것 같다. 가뜩이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중이었으나 어젯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드리안, 그 사특한 악마가 쓴 술수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밤 산책 따라갔다가 들은 온갖 망측하고 남사스러운 말이 눈만 감으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을 이렇게 시험에 들게 하다니, 아드리안은 다른 의미에서 악마였다.

이대로 제대로 자지 못하면 내일이 또 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숙면’을 쓰고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힐다, 이제 왔어?”

양심도 없는 악마는 맑은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제 날 안았을 때 기력을 쭉쭉 빨아간 거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건강하고 개운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양심도 없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도련님. 오늘은 일찍부터 준비하시네요?”

비교적 퀭한 내가 약 쟁반을 내려놓으며 흘끗 그를 봤다. 보통 이 시간쯤이면 홀로 차를 마시거나 독서에 열중하고 있어야 하는데, 드물게 검은 재킷을 걸친 채 옷자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적당히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 참석할 때 저런 차림을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응, 아버지께서 아침을 같이 먹자고 사람을 보내와서.”

“백작님께서요? 정말요?”

보통 아버지가 아들과 식사를 드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이 저택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적어도 내가 곁에 붙어 있고부터 백작과 아드리안이 한 시야에 들어온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둘이 함께 식사한다고? 오늘 아침은 아드리안의 식사를 뺏어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대단한 일은 아냐. 1년에 한 번쯤, 내가 얼마나 죽어 가는지 사람을 한 번씩 보내 확인하곤 하시니까.”

오랜만의 식사가 얼마나 죽어 가는지 확인하는 용이라니, 거참 살벌한 부자 관계다. 왜 아드리안 옆에는 죄다 저런 인간들뿐일까. 이 게임 장르가 공포인 이유가 아드리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넘쳐 나는 성범죄자, 정체 모를 백작, 살인마보다 더한 눈빛을 가진 경감, 환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사……. 그 모두의 장르가 공포였다.

“너는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돼.”

“아녜요, 도련님이 가시는 곳이면 당연히 저도 가야죠.”

내 대답에 아드리안의 미소가 선해졌다.

처음 게임에 들어와 마주했을 때부터 나는 특히 그의 웃는 낯을 두려워했다. 지금에야 달라졌지만, 아드리안의 미소는 희한했다. 왜, 살아 있는 사람은 다 그렇잖아. 기쁨의 미소, 어색함을 모면하려 짓는 미소, 비웃을 때 짓는 미소…… 모두가 다르다. 기분 좋아서 웃더라도 박장대소할 수도 있고 웃음소리 내지 않고 살짝 미소만 지을 수도, 찡그리면서 웃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매번 같았다. 항상 똑같은 눈 크기에 똑같은 입술 각도. 틀에 찍어낸 듯했다. 온 세상 선함은 다 끌어왔는데 도저히 웃는 것 같지 않으니 무서울 수밖에.

“이제 갈까?”

그런데 이젠 아니었다. 내 앞에서 그는 보석처럼 반짝이기도 했고 장난스럽게 웃기도 했으며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점차 감정이 다양해지는 그에게 시선을 뺏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걸음을 옮기는 아드리안 뒤를 내가 잠자코 따라갔다. 백작이 주로 생활하는 공간은 5층으로, 바로 한층 위였기 때문에 금세 다이닝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이 나타나자 집사인 앨번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는 이미 백작이 아드리안 몫까지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희귀 몬스터다, 희귀 몬스터가 나타났다!

“왔느냐, 아드리안. 어서 앉거라.”

아드리안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건네고 백작이 권하는 대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도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하곤 아드리안 뒤를 졸졸 따라갔는데, 흘끔 본 백작은 여전했다. 외눈 안경 너머의 눈은 날카롭기 그지없고 떡 벌어진 어깨에서 검투사 같은 기백이 흘러넘쳤다. 다시 봐도 아드리안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화려하지만 허무하고 섬약한 느낌의 아드리안은 오히려 백작 부인을 훨씬 빼다 닮았다.

“음, 이렇게 함께 식사하는 건 오랜만이구나. 마음껏 들거라.”

“네.”

짧게 대답한 아드리안이 식기를 들었으나,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가 도저히 부자지간의 식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사자 우두머리와 호랑이 우두머리가 겸상하면 이런 느낌일까? 양쪽 다 형형한 기운이 만만치 않았다. 아드리안은 사탄이라 그렇다 치고 저 백작은 뭐로 만들어진 인간이지?

“얼마 전의 일 때문에 걱정이 되어 불렀다. 스프링클러가 폭발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 거냐?”

“예.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누가 모포를 덮어 데려갔다고 들었는데. 그게 저 하인인가 보지?”

뜬금없이 백작의 눈이 내게 향했다. 단지 시선이 마주치는 것뿐인데 기다란 창살이 눈알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예.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놀라 쓰러졌을 뿐이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움찔한 걸 느꼈는지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백작의 시선을 끌어갔다.

나는 느리게 숨을 풀어 놓으며 그들이 이야기 나누는 성수 사건을 다시 떠올렸다.

모포……. 그날 내가 모포를 덮어 주긴 했었지. 성수에 몸이 녹아내리는데도 도무지 걷으려 하지 않아서 애먹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그 안을 보긴 했다. 성수에 젖은 걸 그대로 덮은 채로 업어갈 순 없잖아? 마침 정신도 잃었겠다, 망설이다가 걷었는데…… 으음, 아드리안이 어떤 꼴이었는지는 표현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얼마나 아플까, 빨리 데려가서 살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징그러워할 거라면 녹아내리던 손에서부터 일찌감치 도망쳤겠지. 그의 외모를 보고서 곁에 있었던 게 아니듯, 그 몰골이 되었다고 떠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모포를 고집스럽게 사수한 거로 봐선 내가 보지 않기를 바란 것 같으니…… 봤다는 건 말하지 말자. 악마 충격받아서 울면 어떡해. 달래는 데 한참 걸린다. 손잡고 놀아주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그렇게 쓰기 싫었다.

“……정말 몸이 괜찮았던 거냐? 몸에 어떤 변화는 없었고? 성수에 아무 반응 없었던 것도 확실해?”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거짓말 탐지기조차 속일 수 있을 만큼 태연한 어조였다. 그런데 백작이 조바심을 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 건가?

“그래, 알겠다. 어찌 되었건 그런 흉한 짓을 저지른 네 어미는 평생 별장에 유폐시킬 테니 다시는 걱정할 만한 일이 생기진 않을 거다.”

“우려하시는 바는 충분히 압니다만, 어머니가 몸을 추스르신 후 유폐형을 내리셨어도 늦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지, 그게 아니다. 그 여자가 악마 타령을 했을 때 일찌감치 보내버렸어야 했는데. 나약해 빠진 여자 같으니라고.”

“…….”

“그건 그렇고 아드리안, 네가 내 후원 몇몇을 맡아 줘야겠다. 조만간 바빠질 것 같아서 말이다.”

“어떤 이들입니까? 이제까지의 후원 내역을 넘겨주시면 검토하겠습니다.”

이 게임의 특성상 저렇게 의뭉스러운 구석이 하나라도 있으면 곧장 파봐야 한다. 저런 희귀 몬스터와 인연을 만들어 내는 법은 하나뿐이지.

백작……. 오늘에야말로 널 내 걸로 만들고 말겠어.

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앞치마 주머니에 고이 모셔 놓은 전설 장갑을 꺼내서 꼈다.

「전설 장갑 효과로 손놀림의 최대 속도가 20% 향상됩니다.」

백작 앞에서 허공을 쿡쿡 찌르고 있을 순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대화에 온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틈을 타서 아드리안 의자 뒤에 슬쩍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나만이 백작을 볼 수 있는 교묘한 각도로 고개를 틀었다.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2/6)

분류 :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백작

특징 : ?」

떴다!

좋아, 이번엔 꼭 잡고 말겠어! 나는 검지 끝에 온 힘을 모아 허공을 찔렀다. 야심만만하게 손을 뻗었으나 아쉽게도 ‘예’ 버튼은 아슬아슬하게 사라져 버렸다. 아까워! 하지만 내 손놀림이 무척 빨라진 덕분에 지난번보다 성공 가능성이 훨씬 커 보였다.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2/6)」

사라졌다가 금세 다시 나타나겠지? 난 다 알고 있다. 이제껏 시스템한테 엿 먹어 본 역사가 얼만데!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2/6)」

예상대로다! 두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찔렀으나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 금방 다시 나타나서 안타까워할 새도 없었다. 이번엔 눌려라, 얍!

“그리고 해리슨 경감이라는 자 말이다. 유독 우리 가문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구나. 한번 물면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고, 투견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던데. 특히 귀족에 대한 반감이 대단하고 들었는데 성가시게 됐어.”

오른쪽 밑! 얍!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경감씩이나 되는 자가 백작가에 관심을 가질 정도면, 아무 증거가 없진 않을 텐데요.”

이번엔 중앙! 진짜 좀 눌려주라! 왼쪽! 왼쪽 밑!

“……뭐, 우리 가문에서 후원하던 어린 피후원자 몇몇이 실종된 모양이다만.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게지. 그들이 가진 증거는 아무것도 없단다.”

“그렇군요. 그런데 아버지께선 그에게 아무 증거가 없는지 어떻게 아신 겁니까?”

「행운 크리티컬! 손놀림의 최대 속도가 15% 향상됩니다.」

눌렀다! 간발의 차로 ‘예’를 누르고 나는 소리 지르며 방방 뛰어다니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해냈다, 해냈어! 희귀 몬스터를 잡았어! 전설 장갑에 ‘숙면’ 크리티컬 버프까지 터져야 겨우 추가할 수 있다니. 백작 난이도 말이 되냐고요.

“……그의 상사가 내 오랜 친우이니만큼 말이다. 경감이 어떤 증거를 가졌는지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뿐이야.”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했습니다. 취소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하지만 시스템의 농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취소라니, 절대 아니지. 오른쪽!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했습니다. 취소하시겠습니까?

아니오 / 예」

‘예, 아니오’ 위치 바꾸는 거야 이미 한번 호되게 당해서 넘어가지 않는다. 하하, 오른쪽만 계속 누를 줄 알았지? 이번엔 왼쪽! 망할 시스템 같으니. 너도 엿 먹일 패턴이 바닥난 모양이구나?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했습니다. 취소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오른쪽!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려 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와. 이 망겜, 이젠 하다못해 문제를 꼬고 앉았네. 이번엔 예! 왼쪽!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했습니다.」

「현재 루에이리 호감도 lv.1 (0/200)」

성공했다!

시스템의 장난질을 넘어 드디어 백작을 호감 대상에 추가했다! 호감 대상 하나쯤이야 쉽게 추가할 수 있고 이제껏 일상적으로 해 왔지만, 이번은 달랐다. 단순히 백작을 호감 대상에 추가하는 것뿐 아니라, 짜증 나기 짝이 없었던 시스템을 드디어 이겨 먹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다.

깜박거리는 버튼으로 백작을 놓치고 얼마나 분했어? 버튼 위치 바꾸는 술수에 넘어가서 돈 뜯긴 건 또 얼마고? 버프빨, 템빨만 있으면 망겜 시스템 따위 두렵지 않다 이거다!

게임에 들어와 가장 업적을 해낸 뿌듯함으로 어깨를 들썩거려가며 웃었다. 와, 힐다야. 이번만큼은 정말 대견해. 잘했어. 처음으로 시스템을 이긴 네가 자랑스러워.

대견한 나머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빤한 시선을 뒤늦게 느끼고 멈칫하고 말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시리게 보일 만큼 푸른 눈이 날 빤히 향해 있었다. 허공에 의미 없이 떠 있던 손을 스르르 내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망했다. 쟤 게임 시스템의 존재는 이미 한참 전에 눈치챘는데. 호감 대상 추가하는 것도 간파하는 거 아니겠지?

“그럼 아드리안, 먼저 일어나 보마. 서류는 앨번을 시켜 곧 전달하마.”

“예, 알겠습니다.”

내 새로운 몬스터, 아니, 호감 대상은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는 자리를 떠났다. 문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백작의 하인들까지 그를 따라 사라지자 다이닝룸에는 나와 아드리안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말인즉 내가 이 몸에 들어온 게 완전한 우연은 아니라는 뜻이네. 흥미롭기도 하지.”

조금 전 행동을 본 아드리안이 무슨 말을 할지 긴장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다른 문제에 골몰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돌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내가 무서워하던 바로 그 웃음이다.

“도련님?”

“으응, 힐다. 불렀어?”

험악했던 미소가 대번에 선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조금 전 내 행동에 대해 떠올리고 캐물을까 봐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아드리안이 골몰한 문제는 꽤 컸던지 깊은 생각에 빠졌고, 그 덕에 나는 내 승리를 조금 더 만끽할 수 있었다.

이번에 마을에 가면 밧줄 재료와 백작 호감 작업용 아이템 사야겠다. 오랫동안 내버려 뒀던 아드리안 호감 작업용 아이템도 잊지 말아야지.

가까스로 추가한 백작은 내게 어떤 시스템 기능을 오픈해 줄지, 기대가 엄청났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다음 날 아드리안의 허락을 받고 마을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혼자 나가겠다는 허락 따위 받지 못했을 테지만, 마침 아드리안도 홀로 외출해야 할 일이 생겨서 운 좋게 나올 수 있었다.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는 그를 떨어뜨리는 건 힘들었지만, 어쨌든 당당하게 아드리안의 두 번째 마차를 빌려 타고서 마을로 향했다.

메인 퀘스트 완수해서 받은 보상, 매일 밤 들어오는 일급과 깨알같이 모은 검은돈으로 내 주머니엔 총 1,720골드라는 거금이 모여 있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잡화 상점. 밧줄과 지푸라기 한 무더기, 백작 호감 작업용 만년필과 깃펜, 회중시계, 그리고 아드리안 호감 작업용 찻잎과 오페라 악보, 컵 가드닝 세트를 사니 1,400골드가 홀랑 나가 버렸다.

잔액이 도로 세 자리로 주저앉았지만,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봐야 시스템이 온갖 이유를 붙여 가며 뜯어 갈 가능성만 커져서 아이템을 사 놓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역시 현대는 현물 시장이지.

「밀러드 마을에서 참수형이 일어났습니다.」

아이템을 가방에 밀어 넣으며 상점을 나오자 흰 글씨가 사르르 뜨며 사형 집행을 알려 주었다. ‘악마의 오른팔’ 칭호로 아드리안의 몸 상태를 알게 되었듯, ‘사형 도우미’ 부칭호를 받게 된 이후는 이렇게 사형에 관한 알림을 받게 되었다. 공헌도는 밧줄 제작자인 아드리안에게 돌아갈 테지만, 운반자인 나에게도 일부 돌아오는 모양이다.

쓸모없는 공헌도를 주는 대신 교수형을 더 자주 집행해 주면 좋을 텐데. 참수형 열 번에 교수형 한 번 일어나는 꼴이라 상대적 박탈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저거 다 교수형이었으면 공헌도가 다 얼마야? 아무래도 참수형이 빠르고 깔끔하니 더 자주 택하는 것 같은데, 참수형에 쓸 만한 도끼를 제작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마을 들른 김에 예비 도시락도 미리 준비해 놔야겠다 싶어 뒷골목으로 향하는데, 어째 마을이 예전보다 썰렁해진 느낌이 든다. 벽에 웬 낙서도 많아진 것 같고…….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라우다테…… 사탄? 사탄을 찬양하라?”

캬, 번역기 아니었으면 절대 못 읽었을 글귀다. 처음 뽑기에서 나왔을 땐 한창 공부하고 있었는데 놀리는 거냐고 짜증 냈는데, 번역기의 유용함을 몇 번 겪고 나니 뒤늦게라도 나와 줘서 고맙지 뭐야. 번역기를 구현한 개발자에게 마음속으로 큰절 한번 올리고 다시 벽에 낙서 된 글귀에 집중했다.

왠지 낯익다 싶었는데 걸어온 길을 흘끗 돌아보니 여기저기 똑같은 낙서가 있다. 저번에 왔을 땐 못 본 거 같은데……. 근처에 신전이 있는 걸 생각하면 이 마을 전체가 신성 모독인 수준이다. 아차, 얼마 전에 신전 무너졌지. 그래서 저런 낙서가 가득할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정체 안 밝히고 있는데도 저런 존재감을 과시하다니, 우리 아드리안 인기가 많구나? 자랑스럽고요, 내 어깨가 다 으쓱하고요.

“누님!”

“누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당당한 걸음으로 양아치 소굴에 들어가자, 벽에 기대 불량스럽게 서 있던 케이든과 그로버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요새 악명이 더 높아져서 그런지 눈이 과하게 반짝거려서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악명 덕분에 악인들을 죽이기 쉬우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케이든, 그로버. 오랜만이야. 내 쇼핑…… 아니, 좀 도와줄래?”

「길버트(악)가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나오미(악)가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캘빈(악)이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켄릭(악)이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아델라이드(악)가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감으로 빛나는 수많은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저 수많은 악인 중에서 죽어도 싼 악인을 골라내는 게 오늘 내 방문 목적이었다. 저 많은 악인 하나하나 붙잡고 일일이 이야기 나눠 보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케이든과 그로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럼요, 누님의 부탁이라면 도와드려야죠!”

“무슨 부탁인가요? 뭐든 하겠습니다!”

“잘됐다! 그럼 나랑 얘기하고 싶은 사람 중에 범죄의 죄질이 제일 나쁜 순으로…… 그러니까 능력 좋은 순으로 선별해서 보내 주겠어?”

“예, 그럼요, 그럼요!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군요! 맡겨만 주십쇼!”

케이든과 그로버가 자신 있게 외치고는 내 앞에 몰려드는 악인들을 막아섰다. 뭐든 동류가 서로를 잘 알아본다고, 수많은 양아치 중 걸러져서 오는 이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그 와중에 슬쩍 알아봤는데, 뒷골목 양아치들은 자기들끼리 칼 들고 설치는 게 일상이라서 누가 언제 사라져도 관심 없으며 하도 그런 일이 많아서 경관들이 신경도 안 쓴다고 한다.

좋다, 좋아. 악인들 막 죽이기에 딱 좋은 세계관이다.

“누님, 제가 말입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저명한 연쇄 살인마라고 할 수 있는데, 10년 전쯤일까요. 우리 정육점에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인간이 들어오는데, 고놈 참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곧장 썰어서 인육을 만들어 팔았습죠.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와. 10년이면 대단하네요. 그동안 경관에게 잡히진 않았나요?”

“그야 이곳 경관들은 돈 몇 푼만 쥐여 주면 무죄로 풀어 주니까요. 심지어 사형을 두 번 구형받았는데도 목 멀쩡히 붙은 채로 나왔습죠, 네.”

“와,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정말 대단한 업적이에요.”

“그럼 동료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누님?”

“그럼요! 안 받아 줄 이유가 없는 분인걸요!”

얜 진짜 죽어도 싸다. 완전 잭팟이다. 망설일 여지없는 쓰레기다! 아드리안 도시락 하나 추가!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수첩에 그의 이름을 써넣었다.

나는 호의로 가득한 미소로 그를 배웅하고 또 새로운 악인을 맞이했다. 악인들이 자신의 업적을 앞다투어 보고하면 적절히 걸러서 수첩에 메모해 두는 것이 내 일이었다.

향기롭다, 향기로워. 이곳이야말로 푸짐한 뷔페, 먹이의 보고였다. 사실 내 앞에 줄 서 있는 놈들은 죄다 아동 성폭행, 성추행, 연쇄 살인 등 살 떨리는 범죄를 저지른 인간들이었지만, 지금은 신선한 도시락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어디 보자, 다음은 토막 살인범이군! 나는 관대한 면접관의 미소를 띠고 새 지원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성함은?”

“……데이빗입니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터벅터벅 내 앞으로 왔다. 오오, 인상 험악하고 죄목도 살벌하니 대단한 쓰레기의 냄새가 난다. 이 인간은 들으나 마나 죽여도 싼 쓰레기가 분명할 거야! 나는 미리 수첩에 데이빗 이름을 또박또박 쓰면서 상냥하게 물었다.

“토막 살인을 하셨다는데, 그 외 업적이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제게 업적 같은 건 없습니다. 실은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요. 죽은 누이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자로 지목당하고 말았죠. 누이를 쫓아다니다 못해 결국 강간하고 죽인 미친놈…… 그놈을 찾고자 이곳에 들어온 겁니다.”

“어…… 그럼 다른 건요? 꼭 토막 살인이 아니어도 괜찮은데요.”

“없습니다. 제 인생의 목적은 그저 누이를 죽인 놈을 찾는 것뿐이거든요. 그러다 설령 붙잡혀 사형을 당한대도 좋아요. 그놈을 찾아 복수할 수만 있다면요.”

뭐야. 범죄자가 아니잖아. 좋은 제물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눈만 감으면 아직도 생생히 떠올라요. 돌아오는 밤길이 무섭다고, 저녁에 데리러 나오라고 했는데 제가 깜빡 잠드는 바람에 못 갔거든요. 그때 졸지만 않았어도, 마중만 나갔어도 아직 제 곁에 있었을 것만 같아서…….”

한 차례 자책한 끝에 큰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코끝이 시큰해졌다. 실은 복수를 관두고 어머니를 뵈러 가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땐 끝내 눈물이 달리고 말았다. 안 돼. 얘는 못 죽여. 누명을 썼을 뿐이니까 빼야겠어. 코를 훌쩍거리며 수첩에 써둔 이름을 지우다가, 결국 남자와 한바탕 울고 말았다.

“안녕히 가십쇼, 누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얼추 스무 명의 죽일 놈을 추려내고 악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뒷골목을 나오자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하루가 꽤 허무하게 간 것 같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었으니까. 비상식량을 빵빵하게 채우고 나니 밥을 먹지 않고도 배불렀다.

“죽어, 이 새끼. 죽어!”

힘차게 마차로 돌아가려는데 반대쪽 골목에서 험악한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에구머니나’ 하며 못 본 척 얼른 피해 버리는데, 나는 잠깐 멈춰서 남자를 응시했다. 와, 길거리에서 노인을 패고 있는데도 아무도 안 말리네. 나라도 나서서 말리려는 찰나, 다행히 노인이 먼저 도망가고 말았다.

“빌어먹을, 또 놓쳤어! 제기랄!”

골목이 왕왕 울릴 정도로 폭행범이 고함질렀다. 제법 반반한 얼굴과 커다랗고 튼튼한 체격……. 저 주먹에 맞다 안 죽은 것만으로 노인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뒷골목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저런 쓰레기가 있다니, 역시 현실이 가장 큰 쓰레기장이다. 이 정도면 마을 전체가 아드리안 냉장고 수준 아닌가? 식량난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로 향했다.

“어? 밧줄을 잘못 사 왔네.”

방에 와서 짐을 하나씩 풀어 놓다가 밧줄 사이에 끼어 있는 무언가를 집어 들어 올렸다. 내가 고른 건 교수형에 쓸 수 있는 굵은 밧줄이었는데, 공예용 가는 끈도 함께 끌려온 모양이었다. 오, 옛날에 이거로 벽 장식 만드는 거 유행했었는데. 심심풀이 삼아 하나 만들어 볼까?

“그러고 보니 제작소에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메뉴를 찾아서 제작소를 누르자 재료를 넣고 만들 수 있는 아이템 목록이 쭉 나왔다.

“분명 이쯤 있었는데……. 여기 있다. 서양식 매듭 공예품.”

공예용 끈을 재료로 1개 넣으면 서양식 매듭 공예품이 무작위로 하나 나온다고 한다. 어차피 당장 쓸 아이템도 아닌데 한번 만들어 봐? 내친김에 재료를 전부 넣어 봐야겠다. 그러잖아도 내 방이나 아드리안 방, 주방 전부 장식 없이 삭막해서 뭐라도 걸어 놓으면 좋겠다 싶었으니까.

“버튼을 누르면 되나?”

조심스럽게 ‘서양식 매듭 공예품’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면서 재료를 놓을 수 있는 원반 모양의 빛이 나타났다. 공예용 끈은 총 여섯 줄. 가지런히 선반에 올려놓자 잠시 후 환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레벨 때 오픈된 시스템을 아직 한 번도 안 써 보다니. 빡겜러로서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서양식 매듭 공예품(6개)이 제작되었습니다.」

하얀 글자가 뜸과 동시에 벽 장식 네 개, 식물 인테리어용 걸이 한 개, 컵 받침 한 개가 튀어나왔다. 오, 진짜 만들어지네? 선반에서 가지고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만듦새가 썩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두 같은 모양이면 재미없으니까 끝부분만 다듬어 보자.

나는 꽉 짜인 끝단을 살짝 풀어 헤치거나 묶어서 멋을 낸 다음, 하나는 내 방에 걸고 나머지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걸어 놓으니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

유독 허전해 보이는 입구 쪽 벽에 하나 걸어 두자 따뜻하고 포근한 인테리어가 완성됐다. 아드리안 방에도 하나 걸어 줘야지!

“어머, 힐다. 이게 뭐니?”

마침 주방에 들어서던 레티샤가 벽에 걸린 공예품을 보고 물었다. 이크, 정신 산만하게 장식해 놨다고 혼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얼른 고개 숙여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레티샤 님. 다른 게 아니라 우연히 재료가 생겨서요. 몇 개 만들어 본 김에 허전해 보이는 벽에 건 건데. 정신 사나울까요?”

사형장에 쓸 밧줄을 잘못 보고 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티샤에게 중요하지 않았는지 다소 신기해하며 벽 장식을 만져 보고 있었다.

“아냐, 그냥 두렴. 세상에, 끈을 이용해서 이런 걸 만들었단 말이니? 이런 건 처음 보는데……. 힐다, 네게 이런 능력이 있었는지 미처 몰랐어. 솜씨가 아주 좋아.”

“고맙습니다. 저, 두 개 더 있는데 드릴까요?”

“내게 준다고? 이 좋은 걸 그냥 받아도 되니?”

“네. 원하시면 더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재료만 있으면 금방 만들거든요.”

사실 게임 시스템이 만들어 주는 거지만, 장식을 달거나 끝부분을 다듬는 건 내가 했으니까 제작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공예용 밧줄은 1골드밖에 안 하는걸. 직장 상사의 밝고 호의 어린 미소를 살 수 있다면 1골드는 껌값이나 다름없다.

“고맙다, 힐다. 어서 방으로 가 걸어 놓아 봐야겠어.”

벽 장식을 마저 받아든 레티샤가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의외로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으시구나. 아드리안한테 줄 몫이 갑자기 사라지긴 했지만, 만드는 데에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니니 다음으로 미뤄도 될 것 같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사 온 아이템 얼른 처리하고 아드리안 보러 가야겠다. 가방을 꼭 쥐고 분주하게 5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4층을 지나갈 때 방을 흘끔 봤는데 불빛도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 꽉 닫혀서 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백작 호감 작업만 하고 얼른 가 봐야지. 금세 도착한 백작의 방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 보았다.

“들어오거라.”

중후한 목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얕게 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서 문고리를 돌렸다. 일개 하인일 뿐이었다면 최상위 포식자를 먼저 찾아오는 무모한 짓은 벌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호감 대상이라는 뒷배가 있으니까. 처음 만나고부터 백작이 찝찝하긴 해도 이 알 수 없는 의문을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너는 아드리안의 하인이 아니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레티샤가 보냈느냐?”

편지를 쓰고 있던 손을 멈추고 백작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아드리안의 방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방을 채 둘러보기 전에, 외눈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빛이 선득하게 다가왔다.

아드리안과 다른 의미로 백작은 사람을 위압적으로 누르는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왠지 사족 붙이며 보고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할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얼른 가방을 열어서 만년필부터 집어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아닙니다. 백작님. 이걸 드리려고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아무 맥락 없이 선물을 주려니 민망하고 뻘쭘하다. 하지만 원래 게임 호감도 작업 시스템이 그런 거잖아. 가만히 있는 캐릭터에게 뜬금없이 아이템을 줘서 호감도를 올리고 감사 인사를 받는 시스템.

“흠. 만년필이로군. 제법 쓸 만해 보이는데.”

「루에이리의 호감도가 50 올랐습니다.」

「현재 루에이리 호감도 lv.1 (50/200)」

만년필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감도가 쑥 올라간다. 아드리안 못지않게 레벨당 채워야 할 경험치가 높았지만, 호감 대상으로 추가하는 과정이 워낙 험난해서 딱히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필기감이 좋지 않군.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기도 하고.”

「루에이리의 호감도가 50 내려갔습니다.」

「현재 루에이리 호감도 lv.1 (0/200)」

쓸 만해 보인다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 잠깐 당황했다. 호감도가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가는 건 처음 봤다. 300골드짜리 만년필이 쉽게 홀라당 날아간다고?

“다른 건 없나? 이것뿐이야?”

그것도 모자라 백작은 호감 작업용 선물을 더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와, 이거 순 도둑놈 아냐? 누가 보면 나한테 돈 준 줄 알겠다. 기가 막혔지만 애써 티 내지 않고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두 개 더 내밀었다. 아이템 하나로는 호감도 1레벨도 오르지 않을 게 뻔해서 집어 온 건데,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어떠세요? 이것들은 마음에 드시나요?”

“호오, 이건 만년필보단 쓸 만해 보이는군.”

「루에이리의 호감도가 70 올랐습니다.」

「현재 루에이리 호감도 lv.1 (70/200)」

“하지만 깃털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진중하고 우아하지 못해.”

「루에이리의 호감도가 70 내려갔습니다.」

「현재 루에이리 호감도 lv.1 (0/200)」

“이건 또 뭔가. 회중시계? 흠, 구릿빛이라. 너무 반짝거리지도 않고 적당히 고급스러운 색이군. 뚜껑이 열리는 느낌도 부드럽고…….”

「루에이리의 호감도가 70 올랐습니다.」

「현재 루에이리 호감도 lv.1 (70/200)」

“하지만 금형이 미흡하고 조잡하군. 마감도 섬세하지 못해. 다른 건 또 없는 건가?”

「루에이리의 호감도가 70 내려갔습니다.」

「현재 루에이리 호감도 lv.1 (0/200)」

“다른 건 또 없느냐고 물었다.”

백작은 내가 건넨 세 개의 아이템을 싹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 놓고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그야말로 눈뜨고 코 베인 기분이다. 시스템이 알려 준 호감 작업용 아이템만 사 온 건데, 선물 줬을 때 잠깐 올랐을 뿐 도로 바닥으로 내려가 버리니. 차라리 처음부터 올라가지 않으면 나았을 걸, 괜히 올라가서 사람 기대하게만 만들잖아.

방금 얼마가 날아간 거지? 만년필이 300골드, 회중시계 200골드……. 계산하지 말도록 하자. 현기증 난다. 그보다 지옥의 불꽃처럼 이글이글 눈빛을 쏘아 대는 저 백작부터 처리해야겠다. 받기만 하면 마음에 안 든다고 던져 버리면서 뭘 또 달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저…… 오늘은 이게 끝입니다, 백작님.”

“고작 이거로 끝이라? 흐음. 별것 아니라고 하더니 정말 별것 아닌 물건만 골라서 줬군.”

백작은 대단히 실망한 눈치였다. ‘공물을 바치려거든 제대로 된 걸 골랐어야지’라고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다. 공짜로 선물 받은 물건을 곧장 쓰레기통에 버려 놓고 불평까지 하다니. 부자가 염치까지 없다.

방금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아이템들이 내 며칠치 일급인지 무심코 계산하다 보니 서럽기까지 하지만, 이쯤 되니 오기로라도 백작의 호감도를 올려야겠다.

“송구해요, 백작님. 다음에는 더 마음에 들 만한 물건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저런 쓸모없는 물건을 또 사다가 바치겠다고? 네가 감히 날 농락할 셈인가?”

어? 이렇게 갑자기 화를 낸다고? 나는 급하게 덧붙였다.

“전혀 아닙니다. 백작님. 다음에는 더 좋은 걸 골라 오겠습니다.”

“괘씸하기 짝이 없군. 이런 보잘것없는 일로 저녁 시간을 방해하다니. 썩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하던 일을 방해받은 불쾌감에 호감도가 50 내려갔습니다.」

「루에이리가 호감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루에이리가 적대 대상에 추가되었습니다.」

하얀 글씨가 뜸과 동시에 백작의 눈빛에 적의가 가득 차올랐다. 말도 안 돼. 굳이 내 돈 써 가며 힘들게 선물 사 와서 바치는 데에 농락하려는 의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적대 대상에 추가된 지 얼마 안 됐으니 빨리 수습하면 되돌릴 수 있을 거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에도 3초 법칙이 있잖아?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면 참작해 줄지도 몰라.

“백작님. 선물이 마음에 안 드셨다니 아쉽지만, 제까짓 게 감히 백작님을 농락하다뇨.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 제발 적대심 좀 거둬 주라. 우리 방금까지 호감 관계였잖아. 사이 좋았잖아.

“썩 나가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드리안의 전속 하인이라 해도 더는 봐주지 않을 터이니.”

「루에이리의 적대심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적대심이 강해지고 있다니……. 안 돼. 3초 법칙이 백작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다. 촛불에서 번져 간 빛이 그의 얼굴 위를 음산하게 일렁거렸다. 이 이상 해명해 봐야 좋은 일 없을 것 같아 초고속 백스텝을 밟으며 방을 나왔다.

혹시나 쫓아올까 봐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루에이리의 적대심이 약해지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보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나는 4층과 5층 사이 층계참에 서서 벽에 이마를 댔다.

절망적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택의 일인자랑 적대 관계가 되다니. 돈은 돈대로 쓴 상황이라 더 억울하기 짝이 없다. 분명 시스템이 가르쳐 주는 대로 아이템을 산 건데! 호감도가 오르고도 아이템 등급을 따지며 도로 내려갈지 누가 알았겠어.

하, 꼴 보기 싫다고 쫓아내는 건 아니겠지? 이인자 곁에 꼭 붙어 있으면 막아 주겠지? 지난번에 별장에 내려보낸다 만다 하면서 백작 부인이랑 맵을 열었다 닫았다 난리였는데 쫓겨나는 걸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좋아, 그래도 믿을 구석은 있으니 다행이다.

인생이란 멀리서 희극, 가까이선 비극이라더니 내가 딱 그렇다. 게임 속 세상에 직접 들어왔다는 걸 게임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무척 부러워하겠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좋은 거 하나 없다. 극도의 빈곤 속 처절한 생존투쟁기일 뿐이잖아. 보통 게임 후반부쯤 되면 골드나 아이템이 넘쳐 나게 마련인데 이 게임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애초에 백작과 호감 관계를 맺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시스템을 한번은 이겼다며 기뻐서 방방 뛰던 어제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호감 대상에 백작을 추가하는 일이 유독 힘들긴 했지. 혹시 그게 시스템이 날 말리는 거였을까? 얘 추가하면 안 된다고, 추가하면 큰일 난다고 알려 주는 건 아니었을까? 그러게 애초에 공포게임에 난데없이 호감도 시스템이 다 뭐냐고!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적대 대상으로 추가되면 상대가 접근할 때 알림이 뜨잖아? 그럼 갑자기 나타난 백작을 보고 놀라지 않아도 되고 백작이 정체를 숨기고 다가올 때 알아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틀렸어, 백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정체 숨기고 다닐 일이 뭐가 있겠어.

“……힐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이게 누구 목소리인지 깨닫자마자 조금 전까지 한 생각은 단번에 날아가 버리고 반가움이 들어찼다. 아드리안 집에 와 있었구나!

“도련님!”

“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

검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 묻혀 아드리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섬뜩할 정도로 번뜩이는 푸른 눈만 선명했다. 끼이익. 지탱하고 있던 팔을 내리자 문의 작은 틈이 어둠에 먹혔다. 아드리안을 보고 주체 못 하고 벌어지려던 입가가 멈칫했다.

“물어봐도 될까. 이 늦은 시간에 홀로 아버지 방에서 나온 이유…….”

“어, 도련님?”

“경우에 따라선……. 아니, 그냥…….”

숨을 고르려는 듯 어깨가 크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복도로 스며들어 온 달빛이 날카로운 선으로 그의 얼굴을 양분했다. 밤의 어둠이 한쪽 얼굴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

“다…… 버리고…… 싶어.”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더운 숨을 품고 가슴이 크게 솟았다 가라앉았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고 주변이 워낙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큰 소리로 떠든 것처럼 선명히 들리는 듯했다.

이미 몇 번 느낀 바 있는, 전신에 오한이 일게 하는 고요한 살의.

쟤가 왜 저럴까 생각하다가 문득 머릿속에 소설 하나가 쓰이기 시작했다. 별장에 유폐된 백작 부인, 아픈 외아들. 이참에 아들 하나 낳아 한자리 차지할 속셈으로 백작을 유혹하러 찾아가는 야망 넘치는 하인. 어쩐지 지극히 상식적인 시나리오 같은데…….

“도련님, 아녜요! 뭘 생각하시든 그건 아녜요!”

식겁한 나머지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소맷부리를 잡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충분히 오해받을 만하지만, 이 음산한 기운 좀 거둬 주라. 아드리안 주위로 음험하게 퍼지는 안개가 저택을 뒤덮고도 남을 것 같다. 백작부터 아드리안까지, 오늘 일진이 어쩜 이렇게 사나운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네, 아녜요! 절대, 절대요!”

“아니야?”

찬찬히 돌아보는 푸른 눈이 마치 늪에서 스며 나오는 기괴한 생명체처럼 음침했다. 희망의 빛을 품고 양지로 나오려던 그것이 돌연 푹 들어갔다. 있는 힘껏 삐딱선 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아니든 맞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호감을……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거지. 그래,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처음부터.”

“아이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백작님껜 어……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 대답을 듣고자 뇌물을 몇 개 바친 것뿐이에요. 대답은 못 들었지만요. 제가 도련님 선물도 많이 사 왔는데 자꾸 이러실 거예요?”

“…….”

“어서 방으로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해요.”

아드리안이 중얼거리는 말이 꽤 살벌해서 나는 급하게 아무 말이나 뱉으며 그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랫동안 외롭게 지냈으니 후유증이 있는 거겠지, 하나뿐인 하수인이 다른 애랑 노니까 심술부릴 법하지. 하지만 아드리안을 패륜아로 만들 순 없었다.

겨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얼음장 같은 얼굴이었다. 호감 작업용 선물을 샀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밤새 달래도 안 통했을 것 같다. 나는 얼른 그를 테이블로 끌고 가 선물을 하나씩 꺼내 놓았다.

“도련님, 이거 봐요. 도련님을 위한 실내 가드닝 세트예요.”

“가드닝……?”

“네! 이 식물 말인데요. 생명력이 질겨서 아무리 죽여도 안 죽는대요. 햇빛 가리고 물도 안 준 채로 둬도 다섯 달은 족히 살아남는다니, 이 정도면 도련님 곁에서도 살아남지 않겠어요?”

“…….”

“그리고 이 근방에 유명한 오페라 가수가 왔었다면서요. 무척 유명한 아리아를 편곡해서 불렀다는데 그대로 받아쓴 악보를 운 좋게 구할 수 있었어요. 무려 한정판이래요! 그리고 이건 도련님이 즐겨 드시던 찻잎요. 요즘 안 드시길래 찻잎 통을 들여다보니 거의 다 떨어진 것 같아서요.”

아드리안은 호감 대상 중에서도 비효율 끝판왕이었지만, 그래도 애정으로 준다! 마침 돈도 좀 있었거든!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정판 악보라니, 대단해. 거기다 가드닝 세트까지.”

예상대로 셋 다 좋아하는 눈치였으나 그중에서도 가드닝 세트를 무척 행복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백작은 비싼 아이템 줘도 마음에 안 든다고 집어 던지던데. 1골드짜리 일반 연필만 받아도 좋아하는 아드리안이 최고다.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건 거대 식물원이었지만, 재정상 그건 무리였으니까.

“그리고 이것도 좀 봐요. 도련님. 오늘 마을에 나갔다가 모아 온 건데요.”

“이게 다 뭐야?”

“도련님 비상 도시락요! 죄다 죽여도 싼 놈들이에요. 잘 보시면 이름 옆에 죄명도 쓰여 있고요, 찾기 쉽게 외모 특징도 써놨고. 무연고자는 별표로 표시해 뒀으니 안심하고 죽여도 돼요.”

“힐다……. 날 위한 도시락을 이렇게 많이 준비해 준 거야?”

내친김에 악인들의 이름을 수집해 둔 수첩을 보여 주자, 투명한 벽안이 물기에 젖어 들 듯 촉촉해졌다. 음침한 검은 기운이 사라지고 표정이 풀리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휴, 백작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을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게임 시스템 참 어이없다. 일급 받아 가며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사는 하인이 왜 돈이 남아도는 부자 놈들한테 선물을 바쳐야 하는 거지? 역시 재화 밸런스가 엉망이다. 개발실에 밸런스팀 없다는 데에 내일 치 점심 케이크를 건다, 내가.

“하지만 난 네가 염려돼. 매번 죄책감을 느껴 가며,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 말이야.”

안타까움이 깊게 묻어나는 어투인데 만족스러워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씁쓸하게 내려간 입매와 부드러워지는 눈빛에서 모순적이고 기이한 이중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게 있었다. 호감도 왜 안 올라? 과거의 경험으로 비춰 보나 조금 전 실패로 끝난 백작의 호감 작업을 떠올려 보나 이쯤 되면 알림이 떠야 하는데?

나는 멀뚱멀뚱 허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도련님. 저…… 실례지만요. 선물 받고 마음이 막 요동치지 않으세요? 고맙다거나, 감동적이라거나.”

“널 보면 언제나 내 마음은 요동쳐, 힐다.”

맑디맑은 벽안이 폭포 쏟아지듯 빤히 응시해 왔다.

“그러니까 더 자주 날 봐줘야 해.”

“…….”

“더 자주 손잡고, 더 자주 안고. 응?”

가만히 고개 내려 내 귓가에 달게 속삭였다. 그건 언뜻 세뇌, 혹은 주문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정작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요동친다는데 호감도 왜 안 오르지? 이게 다 얼마짜린데! 황당한 나머지 아드리안 앞에서 대놓고 호감 목록창을 누르기까지 했다. 그러자 뜨는 문구에 더욱 황당해지고 말았지만.

「아드리안 호감도 lv.3 (0/1400)」

아드리안 호감도 레벨 3이라니? 그런 알림 못 봤는데. 언제 오른 거지?

언뜻 기억하기로 레벨 3으로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가 800이었다. 문제는 내가 800 오를 만큼 아이템을 준 적이 없다는 거다.

최근에 준 건 고작해야 생일 선물이었고 그때조차도 호감도가 올랐다는 알림은 뜨지 않았다. 백작 호감도는 제대로 작동했으니 버그도 아닐 테고. 시스템은 온전한데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설마.

갑자기 내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바늘 끝 같은 촉으로 시스템의 존재를 알아낸 적이 있었다. 혹시 시스템의 제어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아드리안의 감정과 호감도 레벨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다는 셈인데. 아이템을 사 줘 봐야 호감도 오르지도 않을 테고…….

맙소사, 아드리안 호감도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나요?

“그러다 상처 나겠어.”

속삭임이 흘러들어 왔던 귀가 가려워 벅벅 긁고 있자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저, 도련님. 제가 오늘 조금 피곤해서 별일 없으시면 숙소로 가 볼까 하는데요.”

백작과의 적대 관계부터 아드리안의 호감도까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숙소에 돌아가면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한 번 더 훑어봐야겠다. 놓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멍하니 걸음을 옮기려 하자, 문으로 향한 시선을 아드리안이 훅 들어와 막아섰다.

“무슨 소리야. 벌써 돌아간다니. 오늘 종일 떨어져 있었는데?”

“내일 같이 있어요. 오늘은 그만…….”

“내일은 오늘이 아니잖아, 힐다. 내일은 내일의 할당량이 있는 거고 오늘은 오늘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으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 하루 종일 봐도 부족하다고 말했었잖아? 선물 몇 개 안겨 주고서 만족하라는 건 억지야.”

줄줄이 쏟아 내는 불평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아드리안이 매달리는 듯한 눈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나는 잠깐 시스템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고 차분히 말했다.

“저도 물론 도련님이랑 있고 싶죠.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

“조금만 더 있다가. 밤새 있자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길 바라? 응?”

“이미 많이 늦었잖아요. 선물 드리려고 잠깐 온 거고…….”

“하…… 머리가 너무 아파.”

“네? 갑자기요? 저녁 약은 드셨어요?”

“으응. 약 먹었는데도 갑자기…… 잠깐 앉아서 쉬어야겠어.”

신음처럼 웅얼거린 아드리안이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한 데다 미간까지 찌푸린 걸 보니 진짜 아파 보인다.

그런데 왜 알림이 안 뜨는 걸까? 호감도와 달리 지병 알림은 줄곧 떴었는데. 아드리안이 혹시 거짓말하는 건 아닌지 잠깐 생각했다가,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빛을 보고 의심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방을 고쳐 메고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도련님, 많이 아프세요?”

“으응. 힐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가진 않겠지?”

어느새 핼쑥해진 그가 힘없이 물었다.

“약 더 가져올까요? 마침 두통약이 딱 떨어져서.”

“약은 괜찮아. 대신 네가 손잡아 주면 안 아플 것 같은데.”

하긴 약이라고 해 봐야 진통제일 뿐이니 반복해서 먹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거다. 진통제 대신 손이라면 비교적 싸게 먹히는 셈이다. 게다가 실은 나도 손잡고 싶어서……. 마지못해 내미는 시늉을 했는데 순식간에 잡아채였다.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듯 잠깐 품고서, 깍지 끼듯 손을 얽어 넣는다. 가슴이 저렸다.

“힐다. 서 있기 다리 아프지 않아?”

나를 올려다보는 눈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순해 보였다. 머리…… 이제 안 아파 보이는데.

“별로…….”

“다리 아프잖아. 여기 앉아도 돼. 아니면 누워도 되고.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어? 너를 마냥 붙잡고 세워 두기가 미안해서 그래. 저기 네가 좋아하는 베개도 있는걸.”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듯 침대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곤, 아드리안이 희망에 가득 찬 눈빛을 보내왔다. 단지 다리 아파서 앉기에는 침대라는 장소는 다소 상징적이지 않나? 나는 잠시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민망해하는 내가 스스로 속물로 느껴질 만큼 순진하고 착한 얼굴이었다.

잠깐 앉기만 할까. 그리고 아드리안 괜찮아지면 일어나서 가면 되잖아. 무려 전설 베개도 있는데. 생각도 은근슬쩍 느슨해지려고 했다. 아니지, 아니야. 정신 차리자. 안 그래도 아까부터 얼굴이 계속 달아올랐는데 이보다 더 가까워지면 죽으란 거지.

“안 돼요. 제가 어떻게 도련님 침대에 앉겠어요. 그리고 아직 외출복인데, 침대 더러워져요.”

“네가 머문 곳인데 더러울 리가.”

“외출복인데 당연히 더럽죠. 내일 빨래를 담당한 하인이 힘들 거예요.”

“으음, 하지만 힐다…….”

“안 돼요.”

“아아.”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드리안은 탄식과 함께 내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조금 초조하게 콧등을 문지르는 통에 긴 속눈썹이 간지럽게 쓸렸다. 이제껏 아드리안의 얼굴을 만져 본 적은 없어서 그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에 살짝 놀라고 있는데, 난데없이 손끝이 그의 입술에 닿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히익. 깜짝 놀라 손가락을 오므라뜨리고 말았다. 그대로 목 뒤까지 딱딱하게 굳어서 가만히 있는데, 그걸 알아챘는지 그가 희미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더 욕심은 내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살을 비비고 있었다.

“알겠어. 정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가 너무 아프면…….”

“…….”

“너무 아파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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