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3)

7-1. 악마 앞에서 질투를 논하느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게 낫다.

백작 부인을 보낸 날 온종일 아드리안이 이상했다. 온종일 일 시킨다더니 왜인지 모르게 자기가 더 이상해졌다. 신전을 무너뜨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난 후라서일까? 이상하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대체 아드리안이 왜 저러는 걸까? 그를 살리는 일 말고도 내 감정 추스르는 일만으로 벅차서, 나는 외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내 상냥하고 온화한 친구, 에밀리에게 물어보는 거였다. 그녀를 위해 특별 제작한 고구마라떼로 호감도를 레벨 5로 올려놓고 진지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있지. 에밀리. 절대 내 얘기는 아니고 친구 얘긴데 말이지.”

“으응. 이야기해 봐. 어머, 어머, 이거 너무 맛있다.”

「에밀리가 달콤하게 제조된 음료에 크게 기뻐합니다.」

「에밀리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현재 에밀리 호감도 lv.5 (20/50)」

“내 친구가 직속 상사랑 유독 친밀한 편이거든. 그런데 상사가 요새 좀 이상하대. 말도 안 하고 나가서 사고치고 오는 일도 있고. 물론 사생활 전부를 말할 이유는 없고 내 친구도 말 안 한 거 천지라 불평할 처지가 아닌 건 알거든? 근데 엄청 섭섭하대. 섭섭할 게 아닌데 섭섭하대.”

“으응. 그래서?”

“문제는 내 친구가 왜 그렇게 섭섭한지 모르겠다는 거지. 거기다 매일 얼굴 마주쳐야 하는 사인데 사적인 감정을 계속 이입하는 게,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어머, 힐다! 너 도련님 좋아하는구나!”

에밀리가 활짝 웃으며 건넨 말에, 나는 마침 한 모금 들이켜던 고구마라떼를 잔디 비료로 주고 말았다. 나는 급하게 손수건으로 더러워진 입가를 닦았다.

“뭐, 뭐?”

“그럴 줄 알았어! 안 그래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어. 도련님께서 이상하시다고? 으음, 나는 도련님이 어떤 분인지 사실 잘 몰라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눌 만한 분도 없고……. 휴버트 선생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휴버트, 그 미친 의사는 다른 의미로 여러 가지를 터놓고 의논한 상대긴 했다. 아직 저택에 있었다면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가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냐. 에밀리. 오해야, 오해.”

“응?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몰래 도련님 흠모하는 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힐다 너는 바로 옆에서 도련님을 모시잖아? 충분히 승산이 있어, 응.”

“그게 정말이야? 도련님을 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공포게임 최종 보스를 짝사랑하다니, 간이 큰 건지 보는 눈이 없는 건지…….

“봐, 힐다 너 표정이 바로 바뀌잖아. 그런데도 아니라고 할 거야? 내가 보기엔 이미 좋아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언제부터였어? 도련님껜 말씀드려 봤어?”

“잠깐만, 에밀리.”

“아니면 설마 벌써 사귀는 사이야? 어쩐지…… 생일날 도련님께서 널 보는 눈빛이 이상했거든. 역시 사귀는 거지? 나 언제 좋은 소식 들을 수 있어?”

“아니, 좋은 소식이라니.”

“신분 차이가 있느니만큼 쉽진 않겠지. 하지만 선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힘든 일도 많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못 이겨 낼 게 뭐가 있겠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도련님께선 몸이 약하셔서 그 흔한 약혼자도 없으시고 말이지. 방해물도 없겠다, 승산은 충분한 것 같아. 그러니 지금이라도 도련님께 가서 말하고…….”

“잠까안! 에밀리 잠깐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 나는 아직 출발선에 서지도 못했는데 이미 에밀리는 골인해서 뒤돌아보고 있었다. 얘기가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이야. 에밀리가 상냥하다고 해서 고민 상담까지 그러리라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구 던지잖아? 나는 그 광속 직구에 명치와 배를 처맞고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새 퀭해진 눈으로 생글생글 웃는 에밀리를 봤다. 다정한 친구의 손에 왠지 보이지 않는 따발총이 들려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에밀리.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한데, 도련님이랑 나 그런 사이 아냐. 푸흡, 미쳤나 봐. 사귀긴 무슨.”

“응? 아니라고? 그럼 생일 파티 때 도련님이 널 왜 그렇게 봤을까?”

“아냐. 뭘 봤든 아냐. 우린 그런 사이 아니고, 난 그냥, 그냥…….”

내가 말하면서도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아드리안에게 정이 든 것뿐이다. 그를 상대로 연애감정이라니 말도 안 돼. 그래, 말도 안 되지. 연애감정 따위…… 으음, 정말 없는 거 맞나?

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에 빠져 있자, 함박웃음으로 가득했던 에밀리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갔다. 고구마라떼가 반쯤 남은 머그잔을 꾹 쥐고 그녀가 입술을 떨었다.

“힐다, 너 혹시 나한테 자세히 밝히기는 싫었던 거야?”

“응? 아니, 그게 아냐.”

“어쩐지 왜 아무 말도 안 해 주는지 했어. 내가 몰랐으면 했던 거구나. 조금 서운하다……. 우리 제일 친한 친구잖아. 난 너한테 바로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거기도 한데…….”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나는 얼른 머그잔을 내려놓고 손을 내저었다.

“아냐, 에밀리! 절대 아냐! 숨기려던 게 아니라 난 진짜 도련님 좋아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거였어!”

“괜찮아, 힐다. 힘들게 변명할 필요 없어. 밝히기 싫었는데 내가 먼저 알은척해 버렸잖아.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에밀리의 호감도가 30 내려갔습니다.」

「현재 에밀리 호감도 lv.4 (30/40)」

이럴 수가, 방금 고구마라떼 날아갔다.

“어, 어어? 에밀리, 잠깐만 내 말 좀…….”

“내일 괜찮으면 마저 이야기해도 될까? 미안해, 힐다. 나 혼자 멋대로 들떴다가 멋대로 속상해해서…….”

「에밀리의 호감도가 50 내려갔습니다.」

「현재 에밀리 호감도 lv.3 (10/30)」

정말 서운한 건지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단 채로 에밀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어버버 하는 나를 두고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폭풍이 휩쓸고 간 폐허에 남겨진 것처럼 멍해졌다.

허어,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에밀리를 달래 줘야 하는데…… 내가 아드리안한테 연애감정이 있다고? 에밀리가 많이 섭섭해하는 것 같은데…… 아드리안한테 연애감정이 있다고?

내가 아드리안을…….

유령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어두운 정원을 뚫고 숙소로 터덜터덜 향했다. 아까는 다소 갑작스러워서 부인하긴 했지만, 내 행동을 가만히 되짚어 보니 안 좋아한다기엔 양심이 없을 정도다. 아드리안 살리는 데만 급급했지, 정작 내 행동이 뭘 뜻하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앉아서 내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공포게임의 최종 보스를 짝사랑하는, 간 크고 보는 눈이 없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니. 미쳤다, 미쳤어. 그러고 보니 나 원래 게임에서 로그아웃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잖아. 언제부턴가 싹 잊고 아드리안 살리는 길만 애타게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드리안한테 연애감정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드리안에겐 이곳이 현실이지만, 내게는 로그아웃하면 끝일 뿐인 게임이다. 내 의지로 이곳에 끌려온 게 아니듯 나갈 때도 똑같을 수 있다. 작별 인사라도 하고 가고 싶다는 소망조차 사치겠지. 사귀자고 해 놓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아드리안한테 더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만약 게임에서 로그아웃할 수 없대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아까 에밀리도 말했잖아,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해서 힘들 거라고. 백번 양보해 아드리안이 나한테 호감이 있다 쳐도, 하인 신분 때문에라도 부인 자리를 차지하긴 힘들 것 같다. 아드리안이 몸이 약한 탓에 그 흔한 약혼자가 없었다고 하니, 건강해지면 하나쯤 생기겠지.

그럼 뭐, 애첩 자리라도 주려나? 아드리안은 어마어마한 부자니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건 싫다. 본처를 질투하는 데에 내 창창한 청춘을 쏟을 순 없잖아?

그럼 현실적으로 이 마음을 전해서 좋은 게 뭐가 있지? 양쪽 다 배드엔딩 아닌가?

아드리안도 날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건드릴 수 없었다. 나도 좋아한다느니 뭐니 말해 놓고 떠나 버리는 건, 혼자 구명조끼 끼고 물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욕심내서 억지로 가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가 그를 좋아하고 그도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끝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쓰리긴 하지만,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겠지. 게임에서 나가더라도 내 현실을 바쁘게 살다 보면 오래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수 있을 거다.

대신 게임에서 나가기 전에 아드리안의 건강은 되찾아 줘야지. 그의 세계를 끝낼 수 있다는 천적도 찾아서 처리해야겠다. 이미 죽어 버린 릴리트 때문에 이보다 더 불행해지는 걸 보기는 싫으니까. 건강을 되찾고 천적까지 사라지면 아드리안은 여기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확신은 없지만, 되도록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아드리안 옆에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내 사람을 내 손으로 지켜 낼 수 있으니까 오히려 기뻤다. 이것만은 돌아가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에밀리 쪽도 수습해야 하는데.”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괜한 오해를 만들고 말았다. 울먹거리기까지 하던 얼굴이 흉터처럼 남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뭐 하고 있을까? 부탁 목록을 눌러 보자 하얀 창이 눈앞에 떴다.

『에밀리 : (。•́︿•̀。) 힐다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중……. lv.3 (10/30)

케이든 : (:3[▓▓]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중……. lv.10 (MAX)

그로버 : (:>[▓▓] 맞은편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중……. lv.10 (MAX)

로지 : ︻╦╤─ ҉ - - - 부관 섭외를 거절한 악인에게 총 쏘는 중……. lv.10 (MAX)』

에밀리 보려고 확인한 건데 뜬금없이 로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아 버렸다. 비상식량으로 부관 챙겨 주는 건 좋은데 거절하면 저렇게 총을 쏘는구나. 아마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협박용 사격이겠지? 하하, 그럴 거다. 아무리 그래도 거절했다고 막 죽이고 다니진 않겠지……. 어쩐지 추측에 자신이 없다.

툭, 툭.

그때 밖에서 창문을 연달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밖에서 웬 작은 돌멩이를 던져서 창문에 맞히는 것 같았다. 뭐야, 누가 창문에 돌멩이를 던져? 어느 미친놈이야?

“힐다.”

창문 앞으로 기어가서 밖을 살폈는데, 바로 옆에서 속닥거리는 것처럼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미친놈의 정체를 확인한 내가 허겁지겁 창문을 열었다.

‘도련님! 거기서 뭐 하세요? 이 늦은 밤에.’

혹여 누구라도 들을까 봐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는데, 그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하아, 산책하자는 거네. 쟨 나 없으면 놀 사람 없어서 진짜 큰일이다. 어쩔 수 없이 또 놀아줘야지. 아드리안 때문에 요즘 도무지 하인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고용주가 저런데 어느 하인이 열심히 일하겠냐고. 앞으로 백작가의 앞날이 컴컴하다, 컴컴해.

나는 속으로 마구 투덜거리면서 얼른 방을 나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 싸매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입꼬리는 왜 점잖지 못하게 슬쩍 올라가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힐다, 이거 받아.”

선선한 밤공기를 즐기며 달빛이 만들어 낸 길을 나란히 걷고 있다가 아드리안이 갑자기 뭔갈 불쑥 내밀었다. 여러 종류의 꽃을 따다가 엮어낸, 알록달록 작은 꽃다발이었다. 한 손을 왜 등 뒤에 숨기고 있나 했더니, 이런 깜찍한 걸 준비해 왔단 말이지?

“정원 서편에 봄꽃이 많이 피었다고 했잖아. 보여 주고 싶었어.”

“이거 직접 만드신 거예요?”

“응. 마음에 들어?”

“뭐…… 나쁘진 않네요.”

직접 자른 여러 종류의 꽃을 풀줄기로 묶어 놨다. 훌륭한 솜씨라곤 할 수 없지만 정성스럽고 풋풋했다. 으음, 오늘 섭섭한 티를 많이 내긴 했나 보다. 내내 눈치 보는 건 느꼈는데 손수 선물을 만들어 올 줄은 몰랐다. 꽃다발 선물이라니, 의외로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이 있구나.

내가 작게 웃고 말자 아드리안이 가볍게 숨을 흘렸다.

“다행이야. 사실 너 닮은 꽃만 고르려고 했는데 막상 뒤지니 눈에 띄는 게 없었거든. 정원을 유지하는 데 들이는 거액을 생각하면, 죄다 너만도 못한 건 괘씸한 일이지.”

“에이, 왜 애꿎은 정원을 탓하세요? 예쁘게 태어난 제 탓을 해야죠.”

“그러네. 꽃이 아니라 힐다 네가 어여쁜 탓이구나.”

“…….”

“네 탓이었어.”

그냥 장난으로 헛소리 한번 해 본 건데 너무 진지한 대답이 돌아와서 말문이 막혔다. 그 뒤로도 너를 닮은 꽃은 천상을 뒤져도 못 찾을 거라고 중얼거리는데 부끄러워진 나머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민망해지라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고서야.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저 놀리시는 거죠? 일부러.”

“무슨 소리야? 난 진심이야. 분명 봄꽃들이 아름답게 피었는데 너를 보고 나니 하나도 예쁘지 않은 거야. 이것들을 줘도 될까 한참이나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너보다 어여쁜 걸 고르다가는 아마 평생 선물을 주지 못할 테니까…….”

“안 들려요. 도련님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안 들려요.”

“내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귀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힐다, 어디 봐.”

“으아아! 가까이 오지 마요! 손도 내리시고요! 얼굴 잡으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진짜 첩첩산중이다. 체취에 취한 척하면서 돌진할 때도 이렇게까지 낯뜨거워지지 않았는데. 문제는 저런 대사를 내뱉는 당사자가 태연하다는 거다. 뻔뻔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엄청난 뻔뻔함이다.

으으, 으……. 이렇게 역전된 상황을 인정할 수 없어. 악마를 꽤 잘 다룬다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몰리다니. 굴욕이다. 게임 인생 최대의 치욕이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불쑥 솟아올라서 쓸데없는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자꾸 그러시면, 어? 저 또 도련님한테 달려들어요? 어? 체취 맡는다고 막 이렇게 해 버려요?”

오냐오냐해 줬더니 그새 버릇이 없어진 거 봐!

이렇게 우위를 빼앗길 순 없지. 악마도 피하는 변태 전법이라는 필살기가 내게 남아 있으니까! 조금 전 뒷걸음질 친 만큼 반은 오기로 성큼성큼 다가갔는데, 아드리안은 의외로 꿈쩍하지 않았다. 옛날엔 이렇게 다가가기만 해도 창백해져서 두통에 시달리던데, 이, 이상하다.

에잇, 그냥 반응이 늦은 거겠지! 반은 오기로 셔츠를 콱 붙잡고 지옥의 킁카킁카를 시도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일순 진한 빛을 띠며 가늘어졌다.

“힐다, 고작 그 정도로 되겠어?”

새파래져서 물러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팔로 내 등을 감더니 순식간에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새에 품에 갇혀 버렸다. 졸지에 그의 가슴 부근에 코를 박았더니 익숙한 체향이 밀려들었다. 언제 맡아도 좋은 장미향…….

“이제 충분해? 네가 원하면 셔츠도 벗어줄 수 있어.”

날 꼭 껴안으며 내는 목소리가 다정하고 은근했다.

미쳤나 봐. 여기가 어딘데 셔츠를 뭐? 제정신이 아니다. 근데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말해 봐. 벗을까?”

귓가에 대고 속삭여 대는 통에 목덜미까지 솜털이 바짝 솟았다. 온몸을 휘감는 뜨거운 온기가 습하게까지 느껴졌다. 쾅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나오려는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내가 원하던 건 이게 아닌데.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턱턱 막히는 숨을 필사적으로 내쉬며 언젠가 썼던 필살기를 떠올렸다. 좋아, 이거라면 먹힐 거야!

“우웁, 웁……. 아, 아뇨. 이대로도, 으읍, 도련님, 도련님 체취 너무 좋, 좋은데요. 여, 영원히 맡아도 질리지 않을 우윳빛깔…….”

“그럼 우리 영원히 이러고 있자. 아무리 안아도 부족했는데 잘됐지.”

이거면 물러나겠다 싶었는데 웬걸, 끌어안는 힘이 더 강해졌다.

사람 살려요, 유저 살려……. 숨 막히도록 세게 안는 것도 아닌데 호흡 곤란으로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옛날의 필살기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

우선 진정시켜야 해.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도련님, 우선 진정, 진정하시고요. 도…… 련님. 저 도련님 얼굴 보고 싶은데…… 이러고 있으면 얼굴을 못 보는…… 우어억.”

“그래. 네 말을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그가 돌연 힘을 풀고 상체를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내 허벅지 뒤쪽을 팔로 단단히 받히고 안아 들었다.

바,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놀란 나머지 기우뚱 넘어지려는데 그의 다른 손이 등 뒤를 자연스럽게 받쳐 주었다.

정확히 같은 높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사람 하나 안아 들고 있으면서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아 놀라울 따름이었다.

얘 힘 언제 이렇게 세졌지? 방어력은 언제 또 오른 거고? 픽픽 쓰러지던 병약 도련님이 갑자기 이러니 적응이 안 된다. 제물 몇 개 바쳤다고 금세 이렇게 세지나?

“이제 만족해?”

난 멀찍이서 보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예술 작품 감상하듯이…….

“응. 나도 네 얼굴 보니 기분 좋아, 힐다.”

내가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해사한 웃음에 눈이 부셨다. 이마가 맞닿을 듯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현실감이 없어 오히려 멀게 느껴졌다. 척추부터 발가락까지 순식간에 오므라들었다. 엄청 예쁘게 웃네.

“그, 그렇게 좋아요?”

“어떻게 안 좋겠어?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걸.”

즐거운 상상이라도 하듯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눈꺼풀 위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살짝 밀어 넘겨주자 눈빛이 아득해졌다. 이 악마가 날 죽이려고 하는 걸까. 기다란 깃털이 배를 마구 간질이는 것 같다. 동시에 까마득한 불길 속에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이러다 정말 혈압 상승하거나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저, 도련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을게요. 내려 주시면 반성의 의미로 바로 머리 박을게요.”

나는 꼼지락거리던 손으로 그의 어깨를 퉁퉁 쳤다.

“네 머리를 감히 어디에 박는다는 거야?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는 뜻이지?”

“죄송해요. 그럼 그냥 가만히 있을게요.”

악마 버릇을 고치긴 개뿔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울상을 짓고 있자 아드리안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몇 번 간청한 후에야 겨우 내려 주었는데, 그러고도 손은 꼼짝없이 잡혀 있었다.

그가 은근슬쩍 앞으로 밤 산책을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으나 기세에 눌린 난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까지 쿵쿵거리는 박동이 제발 전해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3권 끝.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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